
(제 17 회)
17. 가을뻐꾸기 천궁은 궁예에게 만나자고 했다. (이것봐라, 천궁이 나를?) 하고 생각하며 궁예는 재미있다고 웃었다. 궁예는 천궁의 집으로 갔다. 거기에 무달이 있는것을 보고 놀랐다. 《스님께서 우리 무달형님의 딸 시내를 마음에 있어하신다는데 사실이요?》 하고 천궁이 에돌지 않고 물었다. (그것때문이구나.) 하고 생각하며 궁예는 한다하는 천궁이 무달을 형으로 높이는것이 놀라운듯 잠시 말을 못했다. (다 그러는가, 누구에게나? …) 궁예는 천궁을 보며 생각했다. 천궁의 얼굴에는 호기심과 부유한 지방의 호족다운 자신심이 배여있었다. 《그렇소이다.》 궁예가 대답했다. 《역시 듣던바 그대로군. 결단이 있고 시원시원하시오.》 하며 천궁이 말을 이었다. 《나는 스님께서 우리 형제의 딸을 좋아하는걸 탓하고싶지 않소만…》 《소승이 알기에는 천궁께서 지루한 설교를 하지 않을줄 아는데요.》 《허, 패기가 좋소이다.》 《어서 용건을 말씀하시오이다.》 (이 사람하고는 터놓고 말해볼만 하다.)고 천궁과 궁예는 다같이 생각하였다. 《그러죠. 스님께서는 시내에게 또 다른 사내가 눈독을 들이고있다는걸 아시오?》 《모르오이다. 내가 그 녀자를 좋아한다는것이 중요하지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알바가 아니지요.》 (혹시 천궁이?) 하는 예감이 번쩍 스쳤으나 궁예는 그럴수 없다고 보았다. 《허, 스님은 대범하시오이다. 스님은 응당 그래야지요. 아마 그 사내다운 배짱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지요, 우리 시내가 말이오이다. 그런데… 스님의 상대가 만만치 않으니 결코 소홀히 할수 없는줄 아오이다.》 《그게 누구오이까?》 궁예는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물었다. 고요한것으로 움직이는걸 치는, 흔히 범이 그러하듯 덮치기 전의 모습 그대로인 궁예를 보며 천궁은 속으로 웃었다. 《현령 김계진이요.》 《현령?》 마침내 궁예의 한쪽눈이 번쩍 빛을 뿌렸다. 《서뿔리 볼 사람이 아니지요. 현령이라는 벼슬이 아니라 그는 전 임금의 유지를 받아 지금의 녀왕을 등극시킨 시중 준흥의 조카라는데 뼈가 있는것이랍니다.》 《시내는 나에게 그런 말 한적이 없었소이다.》 (이 사내가 풀 죽었는가?) 하고 생각하며 천궁은 말을 이었다. 《그건 시내가 스님을 퍽 마음에 두고있기때문이겠지요. 또 그는 현령이 누구의 조카라는 따위를 모르지요.》 사실인것 같았다. 궁예는 무달이 천궁의 말을 들으며 입을 다시는것을 보고 빙긋 웃었다. 《한마디로 나는 미천한 스님인데 어떻게 한다하는 현령이요, 시중의 뒤받침까지 있는 상대를 대하겠는가 하는것이겠지요?》 이 사람은 눈치가 빠르다. 그러나 성급한데가 있다 하며 천궁은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렇지요. 만일 내가 우리 형제의 딸이 옳게 판단하고 옳게 결심하지 않았다고 본다면 다시말해서 나도 스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런 말을 꺼내지 않았을것이오이다.》 궁예는 잠시 한눈을 찌프리며 생각에 잠겼다. 《천궁님!》 궁예가 입을 열었다. 《걱정마시오이다. 일대일로 싸운다면 더 말할것도 없고 지혜로 싸운다고 하더라도 결코 내가 뒤지지는 않소이다.》 궁예는 자신만만해하였다. 《허, 알수 없는데요. 스님이 무슨…》 천궁은 궁예를 지켜보았다. 《내가 거짓말하는가 하오이까? 김계진이 시중따위의 조카라는게 무슨 큰것이오이까? 나는 임금의 아들이오이다.》 천궁과 무달은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서로 마주보았다. 너무나 엄청난 소리다. 미쳤는가, 아니면 호기를 부리는걸가? 《임금이라면, 어느 임금 말씀이오이까?》 천궁이 혹시 하여 물었다. 《어느 임금이라니요? 신라임금이지요.》 《신라 어느 임금이시오?》 《헌강왕!》 천궁이 웃었다. 《원, 스님도 롱담 곧잘하시오이다.》 《롱담이 아니오이다. 그건 사실이오이다.》 하고 궁예는 으쓱거렸다. 갑자기 천궁과 무달의 낯빛이 변했다. 불한당과 흥정하고있었다고 두사람은 생각했다. 《그만합시다.》 천궁이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이때까지 부드러운 빛이 씻은듯 사라졌다. 무달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어지고 순하던 사람이 이때까지의 불만스럽던 표정이 별안간 달라졌다. 똑똑하고 날카로운 낯빛이 되여버렸다. 원쑤로 보고있었다. 눈빛이 날카로운 궁예가 그걸 모를리 없었다. 그것은 궁예에게 뜻밖이였다. 그는 어리벙벙해서 천궁과 무달을 바라보았다. 아니할 소리를 했구나. 자존심을 세워보느라고 꺼낸 신라임금의 아들따위소리가 이렇게도 사람을 변하게 하는가. 이 사람들은 정말 신라를 싫어하는구나. 그렇다면 고구려는 어떤가. 아마 좋아할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나를 미워하지 않을것이다. 큰걸 알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