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 회)
7. 왕륭과 도선 왜 그때 도선스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던가. 미륵사에 가는것이 서해를 건너가는것보다 멀었던가. 사람을 띄우긴 했다. 그러나 운각스님은 오지 않았다. 만날 필요가 없다는것인가? 그만두라지 하고 왕륭은 생각했다. 도선스님만 하겠는가. 왕륭에게 도선스님은 특별한 사람이였다. 도선은 왕륭으로 하여금 래일의 야심찬 꿈을 가지게 하였고 그 꿈을 실현할수 있는 믿음을 준 사람이였다. 왕륭이 도선을 알게 된것은 15년전 일이였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아버지로부터 넘겨받은 가업을 떠메고 한창 바다건너 당나라와의 무역에 열을 올리고있던 왕륭에게 있어서 정신적인 리상은 50여년전에 이름을 날렸던 장보고라는 사나이였다. 장보고는 태여난 곳과 그 조상을 알수 없는 사람으로 력사에 기록된, 이를테면 평민이하의 사람이였지만 바다를 무대로 하여 한바탕 이름을 날렸다. 후날 옛 백제의 땅 조음도의 장자리에서 태여났다고 하지만 그건 그에 대해서 널리 알려진 다음의 일이고 그때로서는 어쨌든 천한 신분의 사람이였다. 궁파(장보고의 아명)라고도 했다. 궁파는 어릴 때 바다에 익숙하고 활과 창을 련마한 다음 그때에 야심있는 젊은이들이 누구나 그러하듯 서해건너 당나라 절강성 금산현 서주라는 곳으로 갔다. 당시 당나라 서울장안을 비롯하여 산동성 등주현 유산포, 문등현, 청녕현 적산포일대와 대운하 회수류역의 내륙지방 곳곳에는 백제, 고구려유민들과 신라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거주하고있었다. 원래
산동반도일대에는 고구려, 백제사람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세력을 뻗치고있었는데 그때에는 주로 무역관계에 있던 사람들이였다. 그러던것이 고구려, 백제가 망한 뒤에 숱한 유민들이 몰려들었다. 바다건너
고국이 그리웠고 또 이전부터 영향력이 있던 곳이라서 그랬을가. 하여튼 산동반도일대는 그때부터 백제, 고구려유민의 판으로 변화되여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것이다. 어찌보면 바다를 접한 산동반도일대와 회수류역일대는 제2의 백제, 고구려라고도 할수 있었다. 많은것이 백제, 고구려식으로 변모되여갔다. 후날 중국의 력사에 산동반도일대에서 전국을 뒤흔들어놓은 이들에 의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는데 그것도 결코 우연하지는 않을것이다. 그건 그렇고 궁파에 대한 이야기이다. 서주에 닿은 궁파는 무녕군에 입대하였다. 그때 서주일대는 고구려계후예인 리정기의 일파가 군림하고있었는데 그 세력이 막강했다. 당나라로서는 생사존망의 위기까지 느낄 정도였다. 궁파가 서주에 넘어가 무녕군에 입대할 때는 리정기의 후손인 리사도를 토벌하고있었다. 토벌에 참가한 궁파는 작지 않은 장수로까지 승진했는데 궁파의 뛰여난 무술도 무술이려니와 어딘가 당나라의 전통적인 《이이제이》 즉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아주 흥클한 수법의 냄새가 물큰 난다. 어쨌든 신라사람으로서 고구려사람들을 제압하는데서 궁파는 번견으로 된감이 든다. 궁파가 단신으로 바다를 건너와 장수로까지 된것을 보면 아주 희한해보이지만 이후 군대에서 나와 적산지역에 법화원이라는 사찰을 세운것을 보면 알려지지 않은 무슨 곡절이 있었을것이다. 후회했는가? 그럴수도 있다. 궁파는 법화원을 근거로 하여 차츰 세력기반을 구축하였다. 그후 귀국하여 조음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궁파가 조음도에 청해진을 설치한것은 유리한 륙지와 해상의 점을 타산하였기때문이였다. 조음도는 해로상 당, 일본과의 해상무역을 통제장악하기 쉬운 길목이였으며 신라의 왕경(경주)관문인 울산항으로 왕래하는 국내의 선박들도 통제보호할수 있는 곳이다. 또한 북으로는 강진, 북서로는 해남으로 이어져 영산강연안 등 내륙지방과도 쉽게 통할수 있고 해상무역확대와 해상세력건설에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있었다. 바다라는 넓고넓은 활무대에서 일본은 물론 천자의 나라라고 일컫는 당나라와 겨룬 궁파는 역시 큰사람이였다. 조음도 즉 청해진을 거점으로 하여 궁파는 후날 신라의 운명까지 뒤흔드는 사람으로 되였다. 물론 그의 운명이 뭍에 난 룡처럼 비참하게 끝나기는 하였으나 젊은 왕륭에게 큰 리상으로 되기에 족하였다. 궁파처럼 바다를 통해 당나라는 물론 일본과의 무역을 활발히 벌려 선대가 넘겨준 가업을 빛내이는것이 왕륭에게 꿈이였다. 그 꿈은 헛되지 않아
왕륭은 젊은이치고는 빠르게 해상무역에서 재부를 축적해갔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방금 당나라에서 돌아와 집에서 쉬고있는데 안해가 심상치 않은 얼굴로 집에 들어섰다. 별난 사람 다 보았다고 안해는 들으라는듯 말했다. 한참 터밭에서 점심차릴 남새를 가리고있는데 키가 자그마하고 가무잡잡한 웬 사람이 집앞에서 어정거리고있었다. 처음에는 여느 길손인가 하여
스쳐보았지만 그런게 아니였다. 그 사람은 왕륭의 집을 이곳저곳 살피며 한숨을 내쉬였다. 그리고는 지나가는 말로 《기장을 심을 곳에 돌피를 심었구나. 아깝다.》 하더라는것이다. 안해의 말을 반쯤 흘려듣던 왕륭은 문득 미치는바가 있어 베개를 뿌리치고 밖으로 뛰여나갔다. 삿갓을 쓴 사람이 천천히 걸어가고있었다. 그는 자기를 거듭 부르며 달려오는 왕륭을 지켜보았다. 《길손은 누구시오?》 왕륭의 젊은이다운 무례의 물음이였다. 쉰 좀 넘었을가 한 길손은 눈가와 입귀에 잔잔한 웃음을 지었다. 왕륭은 이 사람에게서 리득을 바라는 초조한 빛이 한점 없는것을 보고 놀랐다. 대번에 말투가 공손해졌다. 《왕륭이라고 하옵니다. 길손께서 지나쳐온 저기 집의 주인이오이다.》 《나는 도선이라고 하오이다.》 하며 손님은 빙긋이 웃었다. 《저의 집으로 모셨으면 하오이다.》 《그러죠.》 사양하는 법도 없다. 응당 그래야 하듯 쾌히 응했다. 이렇게 왕륭은 도선을 알게 되였다. 도선은 전라남도 남서부에 위치한 령암출신사람이라고 전해진다. 15살에 스님이 되여 월유산 화엄사에서 대경(大經)을 공부하여 바로 대의(大義)에 통하니 수많은 불학도들이 신(神)으로 추앙하였다고 한다. 그후 수도행각에 나서서 동리산 혜철대사를 찾아 소위 무설설(無説説), 무법법(無法法)을 배워 크게 깨닫고 23살에 천도사(穿道寺)에서 구계(具戒-불교의식)를 받았다 한다. 도선은 운봉산에 굴을 파고 불도를 닦기도 하고 태백산앞에 움막을 치고 여름을 보내면서 수도생활을 하기도 하다가 드디여 희양현 백계산의 옥룡사에 자리잡고 거기서 생을 마칠 뜻으로 말없이 수양하고있었다. 헌강왕이 그의 명성을 듣고 궁중에 들게 했다. 도선은 왕에게 여러모로 정신적영향을 주었으나 얼마후 다시 산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는 음양지리설,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후날 력사에 남았다. 이른바 선비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당나라를 정신없이 외우고 이 땅에서 그대로 토해내고있을 때 제 나라, 제땅의 음양지리설, 풍수지리설을 주장한 대있는 사람이였다. 도선이 왕륭을 만났을 때는 불함(백두)대산줄기를 훑으며 두루 산천을 살피던 때였다. 《스님께서 아까 저의 집을 두고 하신 말씀이 있으신줄 아오이다.》 왕륭이 자리를 잡고 건늰 첫말이였다. 《그렇소이다.》 《무슨 뜻이온지 빈도가 받고자 하옵니다.》 도선은 또 잔잔한 웃음을 지었다. 습관인 모양이다. 초월의 눈빛, 그 빛에 욕심있는 사람은 늘 굴복하기마련이다. 왕륭은 젊은 나이였지만 이런 사람에게는 오로지 자기쪽에서 무엇인가 바랄수밖에 없다는것을 알고있었다. 네것 하나면 내것 하나, 이른바 등가보상의 철저한 장사리속에 쩌든 왕륭에게 이런 일은 좀 거북한 일이지만 그래도 욕심을 부리는건 또 뭔가. 《불함산을 아시는지?》 하고 도선이 넌지시 물었다. 《예.》 《어떻게?》 《우리 겨레의 조종의 산이 아니오이까?》 《오?-》 도선의 낯빛이 변했다. 잔잔한 초월의 빛에서 처음으로 호기심이랄가 그런 빛이 드러났다. 약간 놀라운, 이런 세상에 그만큼 아는 사람도 드물게 보는것이라고 도선은 생각했다. 왕륭은 자기의 대답에 도선이라는 이 범상치 않은 사람이 좋은 반응을 보이는것이 기뻤다. 《더구나 우리 집의 조상은 불함산에서 온줄로 알고있소이다.》 왕륭의 조금 자랑기어린 말에 도선은 더욱 놀라워하였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였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군 하는것일가. 《주인의 성이 왕씨인데 조상의 성인가요?》 하고 도선이 물었다. 《아니오이다. 선조들께서는 특별한 성이 없고 제가…》 《그렇다면, 저 바다건너 서쪽나라에서 왕선지란 사람이 큰일 칠 기세라던데 주인의 성도 왕씨이니 혹시 그 갈래가 아니시오?》 도선의 말에 이번에는 왕륭이 놀랐다. 이 사람이 어떻게 왕륭이 나름대로 정통하고있다고 자부하는 당나라의 정세까지 그렇게 잘 알고있는가. 왕선지라면 후날 력사에 《황소의 란》이라고 기록된, 당나라를 멸망에로 이끈 그 반란의 선두자다. 왕륭이 자기의 성을 《왕》으로 잡은것이 무엇때문인지 누구도 모른다. 당나라의 왕씨들과 장사거래를 순조롭게 하기 위한것일수도 있고 왕이라는 그 의미를 벌써부터 생각하고있기때문일수도 있다. 왕륭이 도선을 우연히 만나게 된 그때는 세상이 온통 뒤집혀질 조짐이 신라에서도 당나라에서도 나타나고있었다. 영풍 미륵사의 운각스님 같은분은 어느때인가 그 일을 론하면서 200여년만에 고구려가 되살아날 조짐이라고 했다. 668년 당나라가 신라와
야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니 200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당이나 신라가 꼭같은 파국의 조짐을 보이는것이 결코 우연치 않다는것이다. 왕의 사위로 왕위에 올랐던 응렴이 재위 14년만에 이르러 즉 874년에 근종(近宗)이 반역하여 궁궐에 침입했으나 금군에게 패하여 사형당하고 이듬해 7월에 응렴 즉 경문왕이 죽었다. 49대 헌강왕이 즉위했다. 도선이 초청되여 만났다는 바로 그 헌강왕이다. 그러나 도선은 왕의 초청은 고마울망정 서울 경주의 그 귀족들, 이른바 왕의 대신하들이 자기를 맞아주는 그 쌀쌀하고 거만한 눈초리, 우물안의 개구리같은 좀스러운 태도를 보고 다시한번 역겨움을 누를길 없었다. 이때 서해너머 당에서는 이미 6월에 왕선지가 여러 주를 함락하고 무서운 기세로 나라를 흔들고있었는데 여기에 황소라는 사람이 응하여 합쳐졌다. 당이나 신라나 비슷한 대동란의 시각을 맞고있는것이다. 그렇게 보면 운각스님의 평도 과히 틀리는것 같지 않다. 《우리 집안은 본래 저 불함산에서 왔소이다.》 왕륭이 성씨풀이는 뒤쳐놓으며 은근히 자기의 성은 당나라 그것과는 인연이 없다는걸 말했다. 도선도 그쯤 알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머리를 돌렸다. 《부소압(송악산)의 세를 살펴본적이 있소이까?》 《조상들의 이야기는 알고있으나 거기까지는…》 왕륭이 고개를 돌렸다. 도선은 그러리라 짐작했는지 몸가짐을 다시하고 말했다. 《사람이란 하늘, 땅, 바람, 물 같은것에 두루 순응해서 사는것이 아니오이까. 그러니 그 세에 따라 이러저러하게 좋고나쁜 일이 생기는것도 틀린다고 할수 없지요. 우리 사는 이 땅을 보면 불함산의 한줄기이지요. 세 큰 줄기, 세 큰강을 뻗치는 불함산의 그 한줄기에서 산다 그 말씀이죠. 부소압으로 말하면 불함산줄기가 크게 남쪽으로 뻗어내리는 중턱에서 가지를 뻗치고 나온 산줄기의 맨 끝에 맺혀있소이다. 남쪽으로 내리던 불함산 한줄기의 중간에서 가지를 뻗은 산줄기는 바로 서해를 바라고 내려온것이오이다. 그래서 주인의 집이 서해를 바라고 자리잡은것을 보고 그 뜻과 됨됨을 짐작했소이다. 아마 바다건너 저 나라, 이를테면 산동반도 어디쯤에서
주인의 펄펄 나는 기운이 뻗고있겠지요.》 이 사람은 정말 지세를 두고 하는 말일가, 아니면 속이듯이 비밀히 상대의 래력을 캐여보고 신에 접한듯 하며 꾸미는 수작일가. 도선은 계속했다. 《하지만 댁은 남쪽을 향했으면 하오이다. 부소압도 불함대산줄기의 한끝이니 마땅히 그 큰 줄기의 기세에 맞추는것이 좋겠지요. 이걸 상응이라고 하지요. 불함산가지에서 살며는 불함산의 기세에 응하는것이지요. 그래서 내리고오르는 작용이 있으면 크게 사는것이요, 거스르면 맥이 끊기는것이지요. 이건 집을 해바라는 남향에
접한다는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큰 산의 기맥에 응하라 그말이오이다.》 왕륭은 이미 의문스러운것이 없어졌다. 도선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그 큰뜻이 풍기는 위엄에 저도 모르게 눌리고있는것이다. 《어른의 뜻을 따르겠소이다.》 왕륭은 덥적 절을 했다. 《사람이 나는것이 대체로 때, 능력, 곳 세가지에 의해 크게 결정되는가 보오이다. 이 땅도 하늘이 결코 무심한것은 아닐터이니 혹
아시겠소이까, 사찬께 이 반도를 건질 동량이 생기겠는지…》 도선은 야릇하게 끝말을 얼버무렸다. 도선의 그 말에 이때까지의 왕륭의 생각이 크게 변했다. 바다, 당나라, 무역, 장보고… 막연한 목적에서부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목적이
생겨난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 왕륭이 무엇을 아끼겠소이까.》 왕륭은 속으로 웃음지었다. 그때부터 왕륭은 도선에게 진정으로 복종했다. 꼭 3력이 결합된다. 실력, 권력, 재력, 장사로 말해도 큰 장사가 되는 일에 그가 무심할수 없다. 어쩌면 나라를 얻을수도… 한창 서른이 가까워오는 왕륭에게 속이 부글부글 끓게 하는 일이였다. 한해가 지나서 마침 아들이 태여났다. 877년이였다. 왕륭은 아들의 이름을 세운다는 의미의 건이라 지었다. 왕륭은 도선을 더욱 숭배하였다. 그리하여 자기세력이 뻗친 풍덕일대에 도선이 머물러있었으면 하였다. 도선도 앞일이 기대되여서인지 쾌히 응했다. 도선은 여러곳을 돌아다녔지만 풍덕에도 암자를 두고있다. 아들 건은 무럭무럭 자랐다. 어릴 때부터 바다일에 재미를 들여 지금은 도불을 따라 서해로 건너간것이다.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바라는것이 클수록 그만큼 근심도 큰
법이다. 뜻하지 않았던 심마니의 일, 그것이 도선의 말과 련결되여 겹쳐드는 까닭모를 불안감. 왕륭은 영안성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