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 회)
5. 운각스님, 그는 누구인가 면악산 미륵사의 운각스님. 그의 속명은 고계수다. 고계수는 발해에서 가독부(《가장 높은이》라는 말로서 왕을 의미함. 후세의 상감에 해당함.)를 직접 모시던 사람이였다. 그는 20살 나이에
벌써 선조성 간의라는 높은 벼슬에 올랐다. 그만한 나이에 그만큼 높이 오른것은 조정에서 특이한 일이였다. 선조성은 정당성, 중대성과 더불어 3성의 하나이다. 선조성은 왕의 명령, 지시를 아래에 선포하거나 그에 대한 의견을 왕에게 제기하는 기관이다. 선조성의 장관을 좌상(정부안에서 정당성의 장관 대내상의 다음가는 두번째 자리), 좌상밑에 그를 돕는 대신급벼슬로 좌평장사,시중이 각각 1명 또 그밑으로 좌상시, 간의 등이 있어 일상적으로 왕의 행동, 의례를 돕고 왕의 고문(자문)에 응하며 그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권고하는 일을 하였다. 이런 선조성의 간의라, 너무 젊은 나이에 너무 높이 올랐다고 할수 있었다. 고계수가 그렇게 된것은 개국공신이였던 조상의 후광을 입은데도 있겠지만 저 또한 명석한 두뇌와 남다른 용기를 가지고있었기때문이였다. 간의 고계수를 바라보는 조정의 눈길은 서로 달랐다. 선망과 사랑, 질투와 증오가 엇갈려있었다. 새파랗게 젊은 나이, 발해의 명마처럼 름름한 자태, 가독부를 직접 모시는 간의라는 벼슬로 하여 고계수는 명문가의 한다하는 처녀들과 딸을 둔 고관대작부인들의 넋을 빼앗고도 남았다. 그를 사모하던 나머지 병에 걸려 죽었다는 처녀도 있었다고 한다. 너무 잘나고 너무
화려한 벼슬에 올랐다고 볼수 있다. 고계수가 이렇듯 세속에서는 인기가 있고 따라서 으쓱할지는 몰라도 정사에서만은 그렇지 못했다. 고계수는 젊은 나이에 어울리게 열중하기 쉬운 성격이였다. 그는 인간으로서는 반안군왕 대야발을 숭배하였다.
야발은 고왕 대조영의 동생으로서 일찌기 고구려얼을 받들것을 주장한 사람이였다. 고계수는 반안군왕 대야발이 쓴 글들을 읽고 새기였으며 그 과정에
자기를 야발의 화신으로까지 여기게 되였다. 고계수가 야발을 좋아한것은 그의 주장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박달임금때부터 내려온 겨레의 얼을 받들어
나라를 일떠세우고 그 얼을 지켜나간것으로 하여 고구려가 겨레의 부국강병의 나라로 되지 않았던가. 발해도 떳떳이 고구려를 이은 나라로 되자면
한얼, 고구려의 얼을 받들어야 한다. 고계수의 이러한 생각과 주장은 공자니, 맹자니 하는 학문을 외우는 국학(대학)에서는 색다른것이였다. 그러면서도 계수가 간의로까지 된데는 그가 다름아닌 야발의 숭배자이기때문이였다. 고계수가 조정에 입문할 그때의 가독부는 제13대왕 현석왕(871-894년)이였다. 발해 230여년의 력사에서 15대의 왕들이 있었는데 그가운데서 고왕 대조영1대로부터 간왕 영충에 이르는 9대까지는 대조영과 그의 아들,
손자의 뿌리였다. 그러나 10대선왕 대인수부터는 대조영의 동생 야발의 현손(4대손)이였다. 반안군왕 대야발을 숭앙하였던 현석왕은 야발의 숭배자인 고계수를 남달리 총애하였다. 간의 고계수는 그리하여 황상(가독부)인 현석에게 주자감에서의 유교교육도 꼭 그르다고는 할수 없지만 그보다는 조상전래의 얼을 심어주게 할것과 문존무비의 문치를 무존문비의 무치로 바꿀것을 건의하였다. 조상대대로 내려온 겨레의 얼, 한얼의 가르침이 있는데 어째서 남의 나라 얼을 배우겠는가. 얼치기가 되면 사람도 나라도 망한다. 정 남의 얼을 배워야 한다면 곁들이로 배우게 하든지 정당성 관하 6부의 하나인 의부(례부)지망생 그것도 의례, 제사, 과거, 학교 등을 맡아보는 정사인 의부는 아니고 외국사신들을 맞아들이고 보내는 지사인 선부의 벼슬할 사람들에게나 배우게 하자는것이다. 이와 함께 나라안에 상무기풍을 세워야 한다. 발해가 참말로 고구려를 이은 나라라면 마땅히 상무기풍을 세워야 한다. 발해가
13대가독부에 이르도록 고구려의 옛땅을 많이 찾기는 했어도 아직 못 찾은것도 많다. 그만큼 발해는 할 일이 많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나라를 떠받든다는 대신들이 저 당나라 문물이나 쫄쫄 외우고 우쭐거리니 나라꼴이 무엇이 되는가. 발해사람 셋만 모이면 맨손으로도 호랑이를 때려잡는다는 씩씩한 기상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상무의 기풍이 사라져가고 술이나 마시고 당나라시나
읊는것으로 세월을 보내며 당나라에 가서 과거에 합격되는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풍조를 낳지 않았는가. 고계수의 건의는 다 옳은것이였다. 고계수는 자기의 뜻이 참말로 나라를 위한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가독부도 고계수의 말이 옳다고 고개를
끄덕이였다. 하지만 3성6부의 벼슬아치들과 3사3공의 원로들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마땅치 않게 여겼다. 《젊은 놈이 가독부의 총애를 받아 너무 높이 오르다나니 방자해졌다, 민충이 쑥대에 오른것처럼… 누군 뭐 너만 못해서 죽었소 하고 살아가는줄 아느냐. 고약한 놈, 혼내줘야 하겠는걸.》 하고 수군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차츰 고계수는 외토리로 되여갔다. 하지만 계수는 개의치 않았다. 누구나 쉽게 할수 없는 일을 하는 사람은 어차피 외로울수밖에 없다 하고 고계수는 자기변명했다. 그러다가 아니, 그래도 방비는 해야겠다, 그러지 않다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고계수를 몰아대는 패가 딴딴히 진을 친 뒤였다. 《옳은것은 항상 이긴다.》 하는 생략된 설교만 믿고있던 고계수는 그때에야 비로소 《옳은것은 항상 사람들에게 옳음을 납득시켜야 하며 그러자면 옳지 않은것을 경계하고 그와 싸워 이길수 있게 자기의 진을 튼튼히 쌓을 때라야 이긴다.》 하는 길다란 풀이를 알게 되였다. 하지만 행차뒤 나발이였다. 례부(형부)에서 간의 고계수의 죄를 가독부에게 상주했다. 죄인즉 당나라에 숙위로 가있는 가독부의 피붙이가 그 누군가에 의해 피습되였는데 그 사건을 꾸민 음모의 장본인이 고계수라는것이다. 사실 숙위로 가있는 사람이 어느날 밤 술에 취해 싸움질하다가 조금 다친 사건인데 거기에 고계수가 말려든것은 그야말로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였다. 그 죄상이라는게 너무나 황당한것이여서 처음 고계수는 꼬박꼬박 따져들었다. 하지만 차츰 고계수는 자기가 《죄》를 지은것이 다만 례부의 속통사나운 벼슬아치 몇몇에 의해 꾸며진 허술한게 아니라
정당성, 중대성은 물론 선조성의 한다하는 우두머리들의 꿍꿍이로 엮어지게 된것이라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고계수는 분통했지만 어리석은 무리가 어떻게 똑똑한 놈 머저리로 만드는가 알게 되면서 입을 다물었다. 마치 늪에 빠진듯이 헤여나려면 날수록 계수의 적수들은 생뚱같은 《죄》를 늘여놓았다. 고계수는 가독부만을 애오라지 바라보았다. 그러나 가독부도 고계수의 《죄》에 대해서 아니하지 못했다. 무리는 항상 옳고 홀로는 그르다는 이 엄청난 인간사회의 악습에는 가독부라 해도 어쩌지 못하는것이냐. 바보무리의 우두머리는 어쩌면 더욱 바보일지 모른다. 《간의 고계수는 젊은 혈기라 잘못을 저지를수 있다. 잘못을 고칠 때까지 벼슬을 거두도록 하라!》 하고 가독부는 내려보냈다. 대왕, 성왕, 황상이라고 불리우는 가독부의 그 말은 결국 고계수의 《죄》를 인정한다는것이다. 인정은 하되 고계수를 버릴수는 없다는 소리인데 하긴 그것만도 고계수에게는 《황은이 망극하다.》해야 할것이다. 《나라가 썩었다.》 고계수는 꺼지게 한숨을 쉬였다. 고계수는 벼슬에서 쫓겨나자 온다간다 없이 곧장 상경 룡천부를 떠나 옛 고구려의 서울이였던 평양으로 왔다. 옛터를 품놓고 돌아본 고계수는 다시 남하하여 면악산으로 왔다. 상경에서 중경 현덕무를 거쳐 서경 압록부, 다시 평양에 올 때까지 고계수는 다만 옛 고구려의 서울, 황페해졌다는 그 서울을 보고싶은 생각뿐이였다. 그러나 평양을 돌아보고는 다시 무슨 생각에서인지 패강진일대까지 남하하여 면악산에 이르렀다. 그때 패강진일대는 발해의 령역도 아니요, 그렇다고 원쑤 신라의 령역도 아닌 이를테면 절충지대였다. 패강진일대로 내려오면서 고계수의 마음속에는 옛 고구려의 땅, 발해의 끄트머리까지 가보자는 속생각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패강진일대에
머물러있으면서 계수의 생각은 달라졌다. 이 땅은 고구려의 옛터다. 발해도 신라도 아닌 다름아닌 고구려의 옛터다. 어째서인지 그것이 고계수를 여기에 머물러있게 하였던것이다. 너무 일찌기 영화를 누려본 사람은 또한 앞날을 경계해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격언을 되뇌였는지 아니면 그토록 바라던 고구려의 옛터가 바로 여기로다 하고 홀로 만족했는지 그건 알수 없다. 어쨌든 고계수는 어제날의 영화도 기다리는 가족도 다 잊고 패강진일대에 머물렀다. 그때 고계수를 사로잡은것이 부처님이였다. 부처님 그자체의 가르침보다도 세속의 거친것들에 부대끼지 않고 조용히 살아갈수 있다는것이 바로 고계수로 하여금 살아가는 방편으로서 부처님을 흉내내게 되였다. 그러고보면 고계수 즉 운각스님은 독실한 불교의 비구라고 볼수는 없을것이다. 고계수는 미륵사의 운각스님이 되였다. 그러나 법복을 입고 염주알을 세며 목탁을 두드려도 운각스님은 한얼의 가르침을 언제나
새기고있었다. 그러면서도 한가한 시간을 틈내여 세상을 돌아보는것을 멈추지 않았다. 고계수의 마음속에서는 언제 한번 발해, 고구려의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자기를 한얼씨앗을 품은 호두껍질같은것으로 여기였다. 고계수와 같은 사람의 삶을 결코 범상하다고 할수는 없었다. 스무살 젊은 나이에 가독부를 모시고 벼슬에 올랐던 사람이 한적한 가람에 들어박혀
세월을 보낸다는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볼수도 있었다. 타락이면 타락이라고 볼수도 있다. 그러나 고계수의 일생을 나이가 들수록 지탱해주는것은 한얼, 겨레의 얼을 꾸준히 되새기며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살피는것이였다. 그것은 지나간 부귀영화에 대한 그리움도 아니요, 타락도 아니였다. 고계수는 스스로 자기는 오로지 발해, 고구려를 위하여 사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타고난
사람이라고 여겼다. 겨레를 위해 할수 있는것이 무엇일가? 한얼, 겨레의 얼을 살리는것이요, 고구려를 살리는것이다. 그러면 발해는? 그는 자기가 그토록 그려보는 고구려도 허망하게 망하였다는 사실을 끄집어내지 않았다. 그에게 고구려란 항상 가지줄기 뻗어가던 그때 즉 추모임금(주몽)에 이어 광개토대왕에 이르는 그때라고만 보았다. 그러다나니 고구려를 이었다는 발해도 역시 한창 자라나던 그때가 있었다는것, 그러나 지금은 그야말로 시들어간다는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고계수는 나이가 들수록 더욱 고구려를 꿈꾸었고 어떻게 하면 발해가 고구려를 이은 나라로 될것인가만을 생각했다. 세상을 모르는 환상이요, 공상이라고 할수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기가 한얼을 새기고 고구려를 꿈꾸는것이 허무하게 끝날수 있다는것,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씨앗을 퍼뜨려야 함을 깨달았다. 바로 그렇게 하는것만이 참말로 자기의 뜻을 세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것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러던 그에게 고마가 찾아온것은 큰 변화였다. 그리하여 고계수는 고마에게 자기의 넋을 넘겨주기 위해 머리를 짰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것이 아니였다. 고마의 일은 고계수가 바라는대로만 되지 않았다. 고마가 세상에 나가게 되는것이 어딘가 모르게 우연에 쫓기는듯 한감이 들어 고계수는 마음을 놓을수가 없었다. 고마가 떠나간 뒤 고계수는 다시 지난날로 되돌아왔다. 사람을 키우는것은 꼭두각시를 깎는것과는 다른것이다. 고계수는 제가 키운 제자 고마가 과연 참된 제자인지, 잘못 키운 제자인지 분간키 어려웠다. (한얼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될것이다.) 하고 고계수는 생각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