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 회)
4. 운각스님과 제자 면악산동쪽에 있는 미륵사는 후기신라력사에 9산문이라고 일컫는 사찰에는 들지 않는다. 9산문이란 무엇인가. 신라에 불교가 성할 때 유명한 스님들이 당나라에 가서 달마(達磨)의 선법(禪法)을 이어받아다가 종풍(宗風)을 일으킨 아홉곳의 산문을
말한다. 홍척(洪陟)국사가 남원 실상사(實相寺)에서 편 실상산문(實相山門), 도의(道義)국사가 장흥 보림사에서 편 가지산문(迦智山門),
법일(梵日)국사가 강릉 굴산사에서 편 사굴산문을 비롯해서 동리산문, 성주산문, 사자산문 등등이다. 물론 신라에 이 9산문만 있었느냐 하면 그런건 아니다. 다만 이 9산문이 력사에 남았다는것이요, 그만큼 그 산문을 연 스님이라든지 산문이 유명했다는것이다. 미륵사가 언제 누구에 의해 열렸는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고구려때부터라고도 하지만 누구도 따져보지 않았다. 사찰도 별로 크지 않다. 미륵전이라는 법당이 있고 그앞 좌우쪽에 동승당, 서승당이 자그마하게 붙었고 법당앞에 불탑 하나, 나지막한 다락 하나 그리고 문간이 전부였다. 웬만하게 큰 사찰이라면 대웅전을 중심에 앉히고 좌우승당에 불탑도 크게 하나 또는 둘, 문간도 세개쯤 되고 관음전, 명부전 해서 법당들과 봉향각, 객실, 종각, 수각, 목욕탕, 창고
등과 같은 부속건물들이 즐비하련만 미륵사는 그에 비하면 초라한셈이다. 신라의 이르는 곳마다에 사찰들이 장마철 버섯나듯 무수하게 솟았지만 그 많은 사찰들의 스님들가운데서 면악산의 미륵사나 주지 운각스님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모양이다. 다만 하슬라쪽 어딘가 산문에 주지님이 서로 오가는 사이라던지… 그래도 사찰은 역시 사찰이다. 해시(밤 9시부터 11시사이) 반쯤 되자 초라한 사찰에 어울리지 않는 범종이 뗑- 뗑- 뗑- 세번 울렸다. 2경 종소리다. 승방이 잠자리에 드는 시각이다. 범종소리가 야릇한 메아리를 울리며 사라져버리자 주위는 고요해졌다. 어딘가 가까운 곳에서 흐르는 물소리만이 주절주절 들릴뿐이다. 밤이 깊어갔다. 문득 별빛으로 어슴푸레한 숲속에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림자는 미륵사를 이윽토록 바라보다가 슬금슬금 다가갔다. 열려있는 문간을 지나 곧장 주지의 방으로 향한다. 보매 이 그림자는 초행 같지 않다. 그림자는 조용히 주지의 방문을 두드렸다. 《스님!》 《누구요?》 《고마입니다.》 하고 그림자가 나직이 대답했다. 이어 불이 켜지고 문이 열렸다. 《들어오게!》 고마는 방으로 들어갔다. 첫눈에 미륵보살의 모습이 보였다. 미륵보살은 머리를 약간 앞으로 숙이였는데 오른손의 팔꿈치를 오른쪽무릎에 대고 손가락으로 살짝 볼을 떠받치고있었다. 또 오른쪽발은 왼쪽무릎우에 팽팽하게 올려놓고 왼쪽발은 앉은데서 밑으로 내린 모양을 하고있다. 법문의 말로 사유반가의 모습이다. 탱화(불, 보살, 성현들의 초상을 그린 그림)도 있으나 희미하여 무슨 상인지 뚜렷치 않았다. 《주무시는데 안됐소이다.》 하고 고마가 말했다. 《아니… 별로 마음이 뒤숭숭해서 잠들지 못하고있었네. 자, 어서 앉게.》 운각스님은 여느 신도와는 달리 례를 갖추지 않고 말했다. 두사람은 온돌우에 앉았다. 《무슨 일인가, 이 밤중에? 자네의 안색이 심상치 않군…》 운각스님의 물음에 고마는 마른 입술을 감빨며 눈길을 내리깔았다. 《차를 마시겠나?》 고마는 고개를 저었다. 《뜻밖의 일이 생겨서 도사님을 찾아왔소이다.》 운각스님은 꼼짝않고 고마를 건너다보았다. 고마는 두서없이 자기에게 있었던 일을 말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운각스님은 합장했다. 《사람의 일은 참으로 알수 없구만. 자네에게 그런 일이 생길줄이야. 견물생심, 황금흑사심이라… 내가 자네에게 풍수를 배워주고 삼을 잡게 한것이 이런 후과를 낳을줄이야… 그래, 그 사람이 분명 죽었나?》 《저도 미처 그렇게 될줄 몰랐소이다.》 《세월이 그렇게 만드는것이겠지… 거마리라… 아마 그 사람도 본래는 착한 사람이였지? 심장병을 앓는 아비에게 약을 써준다고 늘 거마리를 잡아 붙여진 별명이라고 들었는데…》 《옳소이다.》 《음, 사람에게 뜻이 없으면 세월에 쉽게 변하지. 가련하구나. 그 거마리의 패거리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밤이 돼서 모르겠소이다.》 《혹시 군사들이 아니던가?》 《그런것 같지는 않았소이다.》 운각스님은 무릎우에 놓은 염주알을 하나하나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건 그렇고, 이제는 어찌려나?》 한참후 주지가 물었다. 《글쎄, 갑자기 닥친 일이라…》 고마는 주저하며 말끝을 흐리다가 다시 스님을 올려다보았다. 《저, 도사님! 한얼이 깨날 때가 온 모양이오이다.》 《응?!》 운각스님의 눈이 번쩍했다. 그의 눈길은 고마를 새삼스럽게 훑어보았다. 《한얼이 깨여난다… 좋은 말이야. 이제보니 자네가 퍽 컸군.》 운각은 고마의 어깨를 두드렸다. 《제자는 그저 그렇다는걸 감촉했을뿐이오이다.》 《그게 중요하지… 장하네. 내 이때껏 그걸 말해주고싶었지만 자네스스로가 깨닫기를 바랬지. 기쁘네. 그래, 잠들었던 한얼이 다시 깨여날 때가 온 모양이야.》 《제자가 미거하지만 새벽닭이 될가 하오이다.》 운각스님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불함산으로 가지 않으려나?》 《불함산말이오이까?!》 《그렇네.》 《그럼 진나라로?!》 《자고로 악한 세상 거스르는 사람들은 다 산으로 갔지. 하물며 불함산은 우리 겨레의 조종의 산이 아닌가.》 운각스님은 고마를 찬찬히 살폈다. 고마는 고개를 숙이고있었다. 《어째, 생각이 없나?》 《제자는 아직 거기까지 생각해보지 못했소이다. 저는 그저…》 《음…》 《도사님, 죄송하오이다.》 《아니야, 난 강요하지 않아. 사람은 누구나 제갈길이 있는걸…》 고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운각스님은 고마 아버지의 친구였다. 그러나 고마는 아버지가 림종할 때까지 그걸 몰랐다. 아버지는 운명을 앞두고 미륵사의 운각스님을
찾아가라고 하였다. 운각스님은 고마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오래동안 합장한채 친구의 명복을 빌었다. 그러고나서 고마에게 물었다. 《그래, 너는 내게 와서 무엇을 하려느냐? 상좌노릇 하다가 스님이 되겠느냐?》 어린 고마는 얼떠름해있었다. 《허, 참 딱한 노릇이다. 대체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줄수 있겠느냐?》 《아버님은 저더러 스님에게서 배우라고 하셨소이다.》 《배운다? 뭘, 부처님을?》 운각스님은 고개를 저었다. 《불도는 나 혼자 배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제자를 두고싶은 생각이 없다. 그러니 어쩐다?》 운각스님은 한동안 고마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만 하다, 너의 애비뜻이 무엇인지… 하지만 그것도 딱한노릇이다. 나는 애당초 누굴 가르치려 해본적이 없는데, 더구나 너같은 아이에게는… 하지만 어디 해보자꾸나.》 고마가 운각스님에게서 배운것은 세속에서 출세를 위한 학문과는 다른것이였다. 그리고 물론 그 내용도 서로 달랐다. 어떤 때는 하늘, 어떤 때는 땅, 어떤 때는 물을 가르치는가 하면 어떤 때는 사(력사)를 가르쳤다. 자꾸 왔다갔다하였다. 운각스님은 저로서도 못마땅한지 자주 한숨을 쉬며 《나는 도대체 너에게 무엇을 어떻게 배워주어야
하겠는지 모르겠다.》 하고 짜증을 내군 하였다. 운각스님의 말은 고마에게 가르칠것이 없어서가 아니였다. 오히려 그에게는 너무나 배워주어야 할것이 많았다. 제자인 어린 고마도 총명하기
이를데없었다. 그러고보면 운각스님은 타고난 스승의 자질은 없는가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각스님의 가르침은 한곬으로 지향하는것이 있었다. 세상의 영웅은 용감하다. 그들은 대세를 만들어낸다. 그런 영웅은 고금동서에 헤아릴수 없이 많다. 특히 세월이 어수선할 때는 마치도 준비되여있었던듯이 그런 영웅들이 나오기마련이다. 무릇 영웅가운데 영웅은 나라를 세우는 사람이다. 그런 영웅은 용감한것 하나만으로 되는것이 아니다. 지와 덕을 아울러 갖추어야 한다. 그런 영웅이라야 백년대계쯤 하는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걸 다 갖추고 태여나는 영웅은 자고로 없다. 다만 그걸 헤아리고 품에 안을수 있는 사람이라면 된다. 요컨대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그들에게 능력에 맞게 일감을 주며 서로의 관계를 잘 맺어줄줄 아는 영웅이야말로 백년대계를 이룰수 있다는것이다. 그런 영웅은 하늘이 낸다. 영웅은 저 혼자로서는 용을 못쓴다. 영웅을 가르쳐주며 이끌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 사람은 사(력사)를 알아야 한다. 풍운의 시대에는 바로 력사를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걸 알고 찾는 사람이 분명 력사에 남는 영웅이 될것이다. 이것은 후세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너의 상을 보고 품성을 보건대 너는 장차 영웅을 옳게 이끌어주고 지혜를 주는 그런 사람이 될게다. 이런 취지였다. 스승의 말이 어느 정도 맞는지 고마는 미처 모르고 배웠다. 그런데 지금 운각스님이 고마더러 진(발해)나라로 가라고 한다. 불함산쪽에서 풍운이 일고있는가? 마치 고마의 속을 들여다본듯 운각스님은 생각에 잠겨 말했다. 《진… 처음 이름이 좋았어. 널리 고구려의 넋을 떨치겠다는 뜻이였다. 그것도 바로 불함산이 우뚝 솟은 그 땅에서… 그런데 지금은… 발해는 너무나 조용해졌어. 좋지 않아. 고인물은 썩기 쉽거던. 약동하지 않는것, 나아가지 않는것, 크지 않는것, 그것은 고구려의 넋이 아니야. 한얼이 아니거던…》 《도사님, 이 제자는 우리 신라가 발해와 관계를 좋게 가지지 못하는것이 참으로 한이로소이다. 신라나 발해는 다같이 박달임금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가 아니오이까. 한겨레끼리 어찌…》 《그게 이 땅의 비극이다. 백성들에게야 무슨 죄이겠느냐만 이른바 진골이요, 성골이요 하는 신라의 나리들은 바다건너 당나라는 천자의 나라로 보고 고구려 하면 돌아앉아 바로 보려고 하지 않으니… 무슨 야만국같이 보거던. 만고에 웃길 일이야. 그러니 고구려를 이은 발해인들 곱게 볼리 있겠느냐. 미운놈 고운데 없고 고운놈 미운데 없다는 그 찌들대로 찌든 소인의 소갈머리! 그게 살아남기 위한 상책이냐, 망해가는 천조냐?》 《스승께서 바라신다면 불함산으로 가겠나이다.》 운각스님은 고마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마치 무슨 흠이라도 찾아내려는듯. 그러다가 조용히 한숨을 쉬였다. 《일이란 억지로 해서 되는게 아니야. 아, 뜻은 예대론데 세월은 변했어. 이제 신라도 발해도 그리고 당나라도 멀지 않아 망할거야… 그래, 어디로 갈텐가?》 《하슬라쪽으로 갈가 하였소이다.》 《언제?》 《날이 새면…》 《음, 그래. 갈길은 서두르는게 좋아…》 《그런데 도사님! 그만 책들을 놓고 왔소이다.》 《그건 념려말게. 자당께서는 오셨던가?》 《아직…》 《누이의 해산을 도우러 가셨다지?》 《예.》 《소식을 아시면 몹시 놀라실거네.》 《그게 내려가지 않소이다.》 《어찌겠나. 사내란 언제든지 한번은 집을 떠나기마련인걸…》 운각스님은 잠시 수염을 쓸었다. 《하슬라쪽이라…》 운각스님은 고마더러 차라리 송악의 왕륭을 찾아가는것이 어떤가, 구태여 발해로 가지 않겠다면 송악에 머무르는게 어떤가, 송악에서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질듯싶은데 그러면 거기에서 고마가 할바를 찾을수 있지 않겠는가고 물었다. 불함산으로 가는것과 하슬라쪽으로 가는것은 서로 다른 의미다. 그러나 하슬라쪽으로 가는것과 송악으로 가는것은 비슷한 의미다. 고마는 왕륭을 찾아가보긴 하겠지만 거기서 오래 머물지는 않겠노라고 대답하였다. 《아, 새날을 알리는 3경(0시) 종을 울릴 때가 되였네. 이 산속에 뉘 들으라고 종을 울리겠냐만 그래도 종을 울리는거야…》 운각스님이 말했다. 동틀무렵. 고마는 운각스님에게 절을 올리고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