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 회)
1. 녀자의 나라, 악몽과 쾌락 캄캄한 밤. 머리를 풀어헤친 녀인이 허둥지둥 걸어가고있었다. 비가 내리고 땅은 질척질척했다. 번쩍- 번개불이 일었다. 녀인은 흠칫 멎어섰다가 다시 걸었다. 얼굴에는 마치 문둥병에 걸린듯 헌데가 덕지덕지하고 치마에는 피가 물들어 벌거우리한데
그우에 감탕까지 게발렸다. 번개불이 비칠 때마다 녀인의 그런 모습은 처참하고 무섭게 드러났다. 문득 앞에 불빛이 나타났다. 어둠속에서 환하게 비치는 불빛은 앞에 어느 집에서 쏟아져나오고있었다. 집안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녀인은 신음소리를 질렀다.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웃음소리와 떠들썩한 말소리가 울려나오던 집이 조용해졌다. 녀인은 다시 문을 두드렸다. 대문이 열렸다. 젊고 체격이 우람진 사나이가 나왔다. 《누구시오?》 하고 사나이는 녀인을 보며 물었다. 《나… 나다.》 녀인은 마른침을 삼키며 가슴에 두손을 얹었다. 사나이는 눈살을 찌프렸다. 《나를 모르겠느냐? 너희들의 고모, 그러니까 너희들 아버지의 누이다.》 그러자 사나이의 뒤에서 여러 사람이 얼굴을 드러냈다. 호기심과 동정이 어린 눈길이였다. 《그래, 왜 왔소?》 사나이는 무뚝뚝하게 물었다. 《나를 좀 살려…》 녀인은 말끝을 채 맺지 못했다. 그의 눈앞에서 문은 다시 닫겼다. 그리고는 다시 캄캄한 어둠 또 어둠이였다. 녀인은 눈물을 흘리며 어둠을 보고있었다. 문안에서 사나이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쌍하다고? 누가, 저 녀자가? 너희들은 저 녀자가 어떤 녀자인지 벌써 잊었느냐? 우리 아버지의 누이였다고? 누이동생이였다고? 그래, 그랬어. 언제인가는 그랬어. 얼마나 예쁘고 오돌찬 막냉이처녀였던가! 하지만 바로 그 녀자가 우리들의 아버지, 바로 저 녀자자신이 자기의 친오라비를 죽였어. 그것도 가장 비렬하게… 우리 아버지들, 저 녀자의 오라비들은 슬기롭고 힘이 넘치던 사람들이였어. 더우기 우리 아버지는 더욱 뛰여난분이였지. 그분은 맏이로서 형제들이 서로 모여살기를 바랬어. 물론 그분들은 무뚝뚝한데도 있고 거친데도 있었지. 그런데 저 녀자는 한피줄을 이은 오라비들보다 한 외간사나이를 더 사랑했지.… 처녀가 때가 되면 짝을 얻는것이야 인륜인데 누가 마다하련만 하필 그 사나이를 사랑할건 뭐겠니? 그 사나이는 처녀 오라비들의 원쑤였으니까. 그러니 어떻게 됐겠니? 우리의 아버님들은 자기들의 막냉이누이에게 타일렀지. 그러지 말고 서로 어울려서 앞일을 의논하자고, 때로는 타이르고 때로는 욕도 하고 나중에는 매까지 들었지. 하지만 저 녀자는 막무가내였어. 마침내 저 녀자는 몰래 자기가 반한 녀석에게 추파를 보내고 그를 끌어들였지. 그리고는 그 사내와 함께 자기 오라비들의 등에 칼을 박았어. 그후 오라비들의 땅을 그 사내와 함께 차지하였지. 그렇지만 인륜과 천륜을 어긴 저 녀자도 자기가 그렇게 바라던 행복을 찾을수는 없었어. 그렇게도 짝사랑하던 사내에게도 버림을 받았고… 하긴
그 사내라는것이 뭐 계집이 탐나서 그런것이 아니고 그 오라비들의 땅이 탐나서 이때껏 거짓사랑을 하였던거지. 저 녀자는 그걸 영원히 모를거야. 보았지? 저 녀자의 얼굴이 헌데로 가득차고 풀어헤친 머리카락에서 이가 굴러떨어지고 치마는 피가 물들고 진흙이 게발린걸… 바람난 욕정을 채우기 위해, 저 하나만의 안락을 위해 형제를 배반하고 형제를 외간남자에게 내맡겨 멸망케 한 그런 녀자의 말로는 바로 저런것이다.》 어둠속에서 울리는 젊은 사나이, 자기 조카의 목소리는 천둥처럼 들려왔다. 녀인은 귀를 틀어막고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어둠속으로 정처없이 걸어갔다. 비가 내리고 진탕이 튀여올랐다. 사방에서 개똥벌레들이 파랗게 불을 켜고 떠돌았다. 아니, 그건 반디불이 아니였다. 범이 두눈을 파랗게 켜고 그 녀자를 노리고있었다. 어쩌면 저리도 많은 범이 욱실거릴가. 그 범들은 그 녀자가 걸어온 지난날에 남겨진 그 많은 죄악을 따라다니는 원망과 저주들이였다. 《아, 무서워! 살려주…》 녀자는 목놓아 부르짖었다. 하늘에서 우뢰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더러운 몸뚱이를 살리려고, 그 몸뚱이의 쾌락을 이루려고 혈육을 살해한 악마! 너는 영원히 고통과 죄악에 찬 번민과 불안, 고독에서 벗어나지 못할것이다. 너의 자식들도 네가 저지른 죄를 타고나서 또다시 너와 같은 치욕과 고통을 당할것이다!》 피비가 쏟아져내렸다. 아, 살려주세요! 진성녀왕은 외마디소릴 지르며 깨여났다. 녀왕의 침실은 조용하였다. 투명한 비단천가리개밖에서 굵직한 초가 그루에서 타고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몸에 푹 밴 당나라향냄새가 새삼스럽게 풍겨왔다. 땀이 흘러 턱에 맺혔다. 녀왕은 촉촉히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녀왕은 알몸이였다. 옆에서 또 다른 알몸뚱이가 자고있었다. 녀왕은 손을 뻗쳐 그를 깨우려다가 그만두었다. 물끄러미 비단가리개너머로 타고있는 초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방금전 꿈에서 보았던걸 되새겨보았다. 괴상하고 무서운 꿈이였다. 그런데 그 꿈은 오늘 밤 처음 꾸는것이 아니였다. 그 녀자가 왕이 된 그날부터 여러번 비슷비슷한 꿈을 꾸는것이다. 그것이 하도 무서운 꿈이여서 녀왕은 공포에 질리는것이다. 흉몽대길이라고 아무리 위안하려 하여도 어쩌면 그럴수 있을것인가. 무슨 사연이 있어도 꼭 있을것이다. 해몽 잘한다는 일관을 부를가 하고 생각도 했지만 그때마다 도리머리 저었다. 해몽이 길하게 풀리면 모를가 흉하게 풀리면 그건 아니한것보다 못할것 같았다. 두려웠다. 녀왕은 스스로 꿈에서 본것을 되살리며 하나하나 따져보았다. 제가 두 오라비를 죽이고 그 조카들에게서 버림을 받고 하늘의 노여움에 쫓겨 몸부림친것을 도무지 인정하고싶지 않았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절대로 그럴수 없다. 하지만 어째서 꿈은 그렇게도 생동한가. 녀왕은 선대가 저지른 죄악의 벌을 자기가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온몸이 얼어들듯 떨렸다. 신라 51대왕, 력사에 진성녀왕이라고 전해지는 이 녀자의 이름은 만. 887년 7월, 력사의 기록을 빌어 말한다면 정미 광계 3년이 즉위원년이다. 이로써 신라의 세번째 녀왕으로 되였다. 첫번째 녀왕은 27대왕인 선덕녀왕 덕만이였다. 재위년대는 632년부터 647년까지다. 두번째 녀왕은 28대왕인 진덕녀왕(647-654년)이다. 한겨레의 나라, 저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있어보지 못한 녀왕이 신라에는 세번씩이나 태여났으니 희귀하다면 희귀한것이요, 별나다면 별난것이다.
하긴 녀자라고 왕이 못된다는 법은 없다. 그건 그렇다치고 이 녀자 즉 만의 두 오라비는 다 왕이였다. 신라 48대왕 경문왕(861-875년)에게 두 아들과 딸 하나 있었으니 맏아들이 49대왕 헌강왕(875-886년)이요, 둘째아들이 50대왕 정강왕(886-887년)이였다. 만은 두 오라비의 뒤를 이어 마침내 51대왕이 된것이다. 두 오라비, 두 선왕은 꿈에서 본것과 비슷하지만 그들은 내가 죽인것이 아니다. 외간사내를 끌어들여 죽인것은 더우기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꿈에서는 그렇게 또렷하게 보였을가? 녀왕으로서는 도저히 알수 없었다. 녀자는 본래 남자에 비해 근시안이다. 생리적인 눈이 그런것이 아니라 의식에서 근시안이라는것이다. 녀자는 제 몸에 아이를 품고 낳아기르는데다가 남자에 비해 힘도 약하기때문에 천성적으로 애정과 근심이 많을수밖에 없다. 그 애정과 근심으로 하여 녀자는 남자들처럼 멀리 앞을 내다본다거나 생활의 그때그때마다 태연할수 없는것이다. 녀자에게 있어서 어제나 래일보다 오늘이 더 급하고 더 중한것이다. 이것은 녀자의 장점이면서도 약점이다. 진성녀왕은 꿈에서 본것처럼 자기가 두 오라비를 죽이지 않았다는것만으로 당장은 한숨을 쉬였다. 그러면서 앞으로 왕위를 자기 조카에게 넘겨주는것이 좋을것이라는것을 미리 생각해두는것이다. 하긴 왕이 된지
십년만에 이 녀왕은 자기 오라비인 헌강왕의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주게 되는것도 오늘 밤 꿈에서 본 그 공포때문에 이루어진것이기도 하리라. 녀왕은 옆에서 잠든 사내를 흔들었다. 남자는 곤하게 자고있었다. 이 남자는 애인도 남편도 아니다. 그저 남자였다. 젊고 아름답게 생긴 이 남자는 녀왕을 위한 남자가 아니라 녀자를 위한 남자였다. 녀왕을 위한 남자는 이 사람이 처음이 아니였다. 녀왕이 되여 각간(벼슬이름) 위홍이 처음도 아니고 그후 다른 여럿의 미남자 역시 전부가 아니였다. 녀왕인 그에게는 마치 벌들의 무리에서 그러하듯 수많은 수벌이 필요하였다. 녀왕벌이 맑은 날을 가려 하늘높이 떠오르면 그 많은 수벌이 뒤를 따르는데 그가운데 가장 기운있는 놈이 녀왕벌에게 붙어 후대를 남긴다. 그것은 오로지 자기 후대를 강한것으로 남기기 위한 벌의 생리적본능에 의한것이다. 그러나 진성녀왕에게는 벌들이 그러하듯 후대를 든든한것으로 남기기 위한 요구가 아니라 다만 그자신의 억제할수 없는 녀자의 욕정때문이였다. 진성녀왕은 녀왕답게 남달리 음심이 셌다. 그것이 아비 경문왕에게서 넘겨받은것인지 아니면 어미에게서 넘겨받은것인지는 모른다. 녀왕이 남달리 세게 남자를 탐내하는것은 다만 그자신의 생리적특성때문만이 아니였다. 녀왕이 되면서 여러번 되풀이되는 그 알쑹달쑹하고 괴상하고 무서운 꿈은 그에게 더욱 남자가 주는 그 고통스러우면서도 억제할수 없는 쾌락밖에 다른것은 만족치 않았다. 왕이라는 이 특이한 부름은 정치가 만들어낸것인데 진성녀왕인 만에게는 정치라는것이 필요없고 또 그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전혀 몰랐고 흥미도 없었다면 잘못이겠지만 하여튼 그에 가까웠다. 만은 그자신이 기를 쓰며 왕이 된것이 아니고 다만 위홍이나 준흥 같은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만들어주었다고 보는것이 옳을것이다. 꼬집어말한다면 만이라고 하는 이 녀자는 정치의 왕으로서는 허수아비였다. 진짜는 녀왕의 욕정 그것이였다. 녀왕은 다시 남자를 흔들었다. 남자는 아직 잠에 취해 녀왕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녀왕은 남자가 《아, 내 사랑!》 하며 자기를 끌어안아주길 기다렸다. 녀왕은 매번 남자를 바꿀 때마다 그렇게 말하도록 강요했다. 자기를 녀자로서가 아니라 왕으로 섬기느라 쩔쩔매는 남자를 볼 때마다 권력이 남자를 또 얼마나 어리석게 만드는가를 새삼스레 깨닫고 그것을 비웃으며 남자에 비한 녀자의 우월감을 느끼는 만이였다.
이 녀자는 권력이 아니라 그 권력이 주는 녀자의 쾌락만을 요구하였다. 진심이든 아니든 《내 사랑!》 하는
그런 소리를 듣지 않고서는 녀자로서의 마음이 즐겁지 못하였다. 《안아줘요!》 이것은 나약의 소리가 아니라 받아들이려는 본능의 부르짖음이였다. 또 그것은 안락에 들어가기 위한 문두드리는 소리였다. 《더 세게!》 문이 열렸다. 《더 세게!》 녀왕은 쾌락의 저 밑바닥까지 내려가고싶어 몸부림쳤다. 그러나 누구도 그 쾌락의 깊은 바닥까지 그를 끌어들이지 못한다. 그럴수록 꿈의 공포가 언뜻언뜻 되살아나려고 한다. 그 무서운 꿈을 지워버리려고 녀왕은 몸을 떨었다. 《더 세게! 더 세게!》 남자는 기진맥진하였다. 그러나 녀왕은 성차지 않았다. 녀왕은 성을 냈다. 《못난이…》 하지만 남자는 어쩌지 못한다. 녀왕은 이를 사려물었다. 신라의 밤은 깊어갔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