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회)

제 2 장

4

 

철수는 지금 고장난 굴착기를 붙안고 씨름을 하고있었다. 유압식굴착기이긴 하지만 오래되다보니 유압장치들에서 기름이 새여 말썽이였다. 거기다가 오늘은 어떻게 된 일인지 도무지 발동이 걸리지 않았다. 가까이에 모닥불을 피워놓은 철수는 굴착기의 배밑에 들어가 나사틀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모닥불은 단지 주위를 밝힐뿐이고 혹한의 추위는 막아주지 못했다. 철수가 입고있는 솜옷은 오래된것인데다가 얇아서 찬바람이 사정없이 스며들었다. 말그대로 뼈속까지 에이는 혹한의 추위가 계속되고있었다. 바다에서 불어치는 칼바람에 의해 굴착기의 부분품들에 손가락이 떡떡 얼어붙는 판이였다.

철수는 먼저 맡았던 새 굴착기를 공연히 내놓았다는 후회감이 막심했다. 사랑을 위해 굴착기를 양보한 대가를 단단히 치르고있는셈이였다.

요새는 정말 은별이와 만날 기회도 없었다.

철수는 은별이의 시원시원한 성격속에 슴배여있는 강단과 자부심의 높이가 점차 아득하게 올려다보이는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은별은 제대군인당원이다. 그런데 자기에게는 무엇이 있는가. 수도건설장에서 굴착기를 배워 그것을 운전했다는 경력밖에 더 없지 않는가. 물론 아버지는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이름난 선장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타고난 곧은배기였고 자식들 일에 옴니암니 참견하는 성격이 아니였다. 아버지는 늘 《자기가 발을 붙인 일터를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사는 보람을 찾을수 있다.》고 말하군 한다. 인제는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소리이다. 그러나 철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화만 치솟군 했다. 아버지의 인박힌 순결성과 주변사람들의 자세는 같지 않다고 생각되였기때문이다.

(남들은 다들 살줄 아는데 아버지는 고지식하고 일밖에 몰라.)

밤이 깊어갈수록 사나운 날씨는 계속 기승을 부렸다.

(그만두고 래일 할가?)

철수의 마음속에서는 차츰 나약성이 머리를 쳐들기 시작했다. 작업반총화때마다 오늘은 어느 동무가 굴착과제는 얼마 또 어느 운전사는 수송과제를 얼마 하고 평가를 하다가도 《철수동문 언제 가야 중간쯤에라도 끼울텐가?》라고 면박을 주던 작업반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작업반원들은 락후분자라고 하면 흔히 자기를 짚고있었다. 그럴 때마다 철수는 눈앞이 보이지 않는 굴착기를 붙안고 씨름할바에는 차라리 다른 기대를 타야겠다는 생각이 불같이 치밀군 하였다.

이때였다. 《철수동무!》 하고 부르는 처녀의 웨침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뜻밖에도 은별이였다.

목이 꽉 메여오고 감동에 젖어 철수는 《나 여기 있소.》라고 겨우 대꾸했다.

은별은 철수를 찾아낸 기쁨을 감추지 못해했다.

그의 손에는 음식그릇을 싼 보자기가 들려있었다.

《추운데 고생하는군요. 어서 좀 나와요.》

굴착기밑에서 기여나온 철수는 얼어든 입술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반가와 어쩔줄을 몰라했다.

《우리 저기로 가자요.》

은별은 철수를 이끌고 채석장의 구석진 곳으로 이끌었다. 거기는 커다란 막돌들이 바람을 막아주는 곳이였다. 거기에 철수를 데려다앉힌 처녀는 《춥지요? 잠간 기다리세요.》라고 하고는 전지불을 비치며 삭정이를 주으러 갔다.

미안한 생각이 든 철수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며 《은별동무, 나무는 여기 있소.》 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은별은 들었는지 말았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철수는 밤에 쓰려고 모아두었던 삭정이를 한아름 안아왔다. 은별이의 갑작스러운 출현은 나약했던 철수의 마음속에 자존의 훈풍을 불러왔다. 한편으로는 생활에서 주도권을 쥐지 못하고 처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자기의 처지가 쑥스럽게도 생각되였다.

한참만에 은별이도 삭정이를 안고왔다.

그사이에 철수는 모닥불을 피우고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처녀에게서 삭정이를 받았다.

《야, 나무풍년이군요.》

철수의 곁에 무져있는 삭정이를 본 은별은 환성을 올리며 그것들을 집어 모닥불에 덧놓았다. 삭정이래야 바다물에 떠내려온 가느다란 나무가지이거나 혹은 가차도일대에서 생겨난 잡관목따위였다. 그것들이 열을 낼리는 만무했다. 철수는 불씨가 변변치 않은데도 자꾸만 나무를 덧놓는 은별이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지청구를 했다. 그러자 은별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면서 랑만에 넘쳐 말했다.

《철수동문 활활 타오르는 우등불이 나빠요?》

은별은 자기가 들고온 음식보자기를 풀기 시작했다. 거기에서는 밥과 돼지고기두부탕, 절인 숭어찌개와 김치 그리고 술까지 한병 나졌다.

철수는 명색도 없이 처녀의 도움을 받는것이 어쩐지 게면쩍었다.

은별은 자기의 속궁리를 이렇게 말했다.

《철수동무, 언제부터 한번 온다온다 하면서도 일이 바빠 뒤늦게야 온걸 리해하세요. 몸은 비록 도갱건설장에 있었지만 마음은 늘 동무곁에…》

여기까지 말하던 은별은 제김에 부끄러운듯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철수는 이 말이 한마디의 꾸밈도 없는 진심이라는것을 알았다. 어쩐지 나약해졌던 자신이 더없이 부끄럽고 민망스러워졌다.

은별은 철수의 그런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던지 잔에다 술을 부어 철수에게 내밀었다.

《철수동무, 우선 한잔 하세요. 여기 간석지사람들은 이런걸 두고 가슴에 불을 지핀다고들 하더군요.》

철수는 눈굽이 쩌릿이 저려와 갈린 목소리로 《은별이, 고마와…》라고 하며 잔을 받아 쭉 냈다. 랭돌같던 가슴속에서 불이 확 이는것 같았다.

은별은 그 모양을 재미있게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래일 20만산대발파를 한대요. 난 발파수는 아니지만 한몫 할래요. 말하자면 2번수가 될래요. 제대되여 첫 수확물을 간석지건설장에 바치는 력사적순간이예요.》

은별은 마치 시나 읊듯이 자기의 랑만적인 생활을 정서적으로 펼쳐보였다.

그럴수록 철수는 마음이 서글퍼지는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한날한시에 간석지건설장으로 온 처지이건만 자기들의 위치는 하늘과 땅차이로 느껴졌던것이다.

《뭘해요, 어서 들어요.》

《응.》

은별은 모닥불에서 생긴 뻘건 숯덩이들을 끌어다가 그우에 두부탕그릇을 올려놓았다. 따끈한 두부탕을 철수에게 대접하고싶었던것이다.

철수는 어쩐지 음식물들이 목에 걸려 잘 넘어가지 않았다. 대해볼수록 은별이가 얼마나 다정다감하고 웅심이 깊은지 몰랐다. 그런데 난…

문득 철수는 은별이가 이 음식을 자기네 집에서 해가지고 왔으리라는 생각에 미치자 그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알고싶은 생각이 불같아졌다. 두부탕이 보글보글 끓자 맛있는 국냄새가 풍겨오며 철수의 식욕을 자극했다. 철수는 더운국에 밥을 말아 맛있게 먹으면서 자기의 궁금한것을 이렇게 터놓았다.

《은별이, 동문 나에게 부모님들에 대해선 아직도 말해주지 않았지? 아버지는 도대체 무얼 하오?》

그러자 은별은 방긋 웃으며 대꾸했다.

《평범한 건설자라지 않았나요. 하지만 우리 아버지처럼 그렇게 웅심깊고 인정많은분은 드물거예요.》

《그건 어째서?》

은별은 추억에 젖은 눈길로 뭇별들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이야기했다.

《어렸을 때 언젠가 난 아버지에게 썰매를 만들어달라고 조른적이 있어요. 그런데 글쎄 그 다음날 아버지가 썰매를 만들어가지고 집에 들어서신게 아니겠어요? 난 정신없이 마당으로 달려나갔어요. 하지만 실망하고말았어요. 썰매가 어방없이 컸거던요. 〈아버진 씨… 이게 어디 썰매예요? 발구지.〉

그러자 아버지는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는게 아니겠어요.

〈왜 그러느냐. 이 아버지도 함께 타자고 그런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지고말았어요. 아버지는 오빠와 언니 그리고 나를 이끌고 얼음판으로 나갔어요. 그리고는 우리들을 그 썰매에 태우고 밀어주는것이 아니겠어요.

〈자, 어떠냐? 저렇게 개별적으로 타는것도 좋지만 이런 뻐스는 더 괜찮지 않니?〉 우리들은 너무도 기뻐 서로 웃고 떠들며 좋아했어요. 썰매를 타던 다른 애들은 우리를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몰라요. 얼마후 오빠가 문득 제의하더군요.

〈아버지, 우리가 밀테니 막냉이와 함께 타십시오.〉

그래서 난 아버지의 품에 안겨 썰매를 타게 됐답니다. 우리 아버진 자식들을 절대로 큰소리로 꾸지람하시는 법이 없었어요. 자신의 모범을 자식들이 따라할것을 바라셨지요.

우린 아버지가 하루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마중나가 가방을 받거나 모자를 받고 하면서 법석 떠들군 했어요, 마치나 오래간만에 만난것처럼… 오죽했으면 제가 학교에 갈 때면 아버지의 체취가 스민 옷에 볼을 비벼보고야 집을 나서군 했겠나요?》

은별의 이 말은 철수에게 더없는 감동을 불러왔다. 딱딱하고 고지식한 자기 아버지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성격이 아닌가? 그럴수록 은별이의 아버지를 만나보고싶은 욕망이 가슴속에서 샘솟듯 하였다. 식사가 끝나자 은별은 그릇들을 거두었다.

《어때요? 언제면 굴착기가 구실을 하게 될가요?》

철수는 자신없어 머리를 흔들었다.

《유압계통이 말썽이요. 고압변들과 호수들이 머저리처럼 노는데다 인젠 기관까지…》

은별은 걱정스러운 어조로 철수의 말을 받아주었다.

《그러니까 합병증이 왔구만요. 제가 좀 도울수는 없을가요?》

《괜찮소. 내 힘으로 살려보겠소.》

흰소리를 치는 철수를 불안스럽게 바라보던 은별이가 제잡담 한마디 했다.

《그것들만 교체하면 될가요?》

《그럼. 나아질거요.》

은별은 이 문제를 아버지에게 상정시켜야 되겠다고 결심했다.

처녀는 음식보자기를 꽁꽁 싸더니 다른 보자기를 풀어헤쳤다. 거기에서는 포근한 군청색솜옷이 나졌다.

《짐작으로 지은건데 맞는가 한번 입어보세요.》

숨겨져있던 처녀의 애틋한 련정을 감수한 철수는 코마루가 시큰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은별이, 고맙소.)

명색이 사내인데 처녀의 도움을 받는게 좀 멋적기는 했으나 철수는 스스럼없이 받았다. 그는 낡아빠진 솜옷을 활활 벗어던지고 은별이가 준 새 솜옷을 입었다. 솜옷은 우아래 한벌인데 품도 그렇고 기장도 그렇고 신통히도 몸에 꼭 맞았다.

철수가 옷을 갈아입는 사이 은별은 자리를 좀 피해 수평선 아득한 저 멀리 바다를 바라보고있었다.

별무리 흐르는 밤하늘은 얼마나 유정하고 드넓은 바다는 또 얼마나 웅심깊어보이는가.

멀리서부터 날카롭고도 맵짠 바람이 기승을 부리며 몰아쳐오고있었다. 간단없는 파도소리만 들려올뿐 사위는 말그대로 먹물을 뿌린듯 캄캄했다. 그러나 은별은 노호하는 격랑과 비린내 풍기는 칼바람을 통하여 바다의 리듬을 읽고있었다. 그에게는 조금도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모두가 잠든 이밤에도 잠들줄 모르는 간석지건설장이 아닌가.

이때 《은별동무!》 하는 철수의 부름소리가 들렸다.

은별은 모닥불가까이로 다가왔다.

새 솜옷을 입고 선 철수의 모습은 한결 더 의젓해보였다.

은별은 사실 그 솜옷을 어머니에게 부탁했었다. 그때 어머니는 딸에게 《너 그걸 누구에게 주려니?》 하고 물었다. 은별은 그저 《그건 비밀이예요. 하지만 값은 있어요.》라고 굼때넘겼다.

어머니는 은별이의 부탁대로 약속한 날자에 새 솜옷을 지었으며 밤참을 해달라는 부탁도 어김없이 들어주었다.

꼭맞는 솜옷을 입은 철수를 보니 은별에게는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이 가슴가득히 차올랐다.

《어디 보자요. 됐어요, 꼭맞아요.》

철수의 솜옷차림을 앞뒤로 살펴보고는 스스로 만족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자기가 계획했던 일을 깨끗이 마무리한 은별은 어서 가서 눈을 좀 붙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래일 11시면 20만산대발파의 도화선에 불을 단다고 하지 않았는가.

《철수동무, 난 가야겠어요.》

《가만, 할말이 있소.》

《?!》

철수는 당황한 나머지 장갑낀 은별의 손을 덥석 잡아 그를 자기의 곁에 끌어다앉혔다.

은별은 돌발적인 철수의 이 행동에 어리둥절해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철수는 할말을 못 찾고 한동안 갑자르더니 이렇게 말꼭지를 뗐다.

《은별동무, 동무는 제 생활궤도에 들어섰는데 난…》

어쩐지 비관에 잠긴듯 한 철수의 말에 은별은 슬그머니 반발심이 생겼다.

《그럼 동문 뭐예요?》

《은별동무야 당당한 제대군인당원이 아니요. 그런데 난 평범한 굴착기운전공이란 말이요.》

《굴착기운전공인데 어쨌다는건가요? 같은 간석지건설자인데 난 뭐 특수한 위치에 선 건설자란 말인가요?》

《그런게 아니라 사실…》

《사실이구 오실이구 난 철수동무가 무슨 뚱딴지같은 생각을 하는지 리해되지 않아요.》

사실 리해되지 않는것도 없었다. 은별은 철수의 속생각을 너무도 빤드름히 알고있고 그것이 오히려 자기 울분으로 느껴져 무엇이라 타매해야 할지 안타깝기만 하였다. 이윽하여 그는 철수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퍽 가라앉은 음성으로 이야기하였다.

《삶은 순간이지만 부강조국건설에 이바지할 때 빛난다고 생각해요. 내가 동무를 좋게 생각한건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는 그 마음때문이였어요.》

철수에게는 은별이의 사상정신적높이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아찔한 벼랑을 올려다보는듯 한 심정이였다.

하지만 철수는 용기를 내여 말하였다.

《난 동물 믿겠소.》

은별에게는 철수의 이 말이 자신을 가다듬는 결심으로 들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철수가 벗어던진 낡은 솜옷을 차곡차곡 보자기에 쌌다.

《이건 내가 빨아 손질해줄테니 번갈아입으세요. 그럼 난…》

은별은 의미있는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어둠속으로 총총히 사라져버렸다.

철수는 은별이로 하여 자기의 눈앞이 금시 밝아진감을 느꼈다. 자리에서 일어난 철수는 공구를 들고 다시 굴착기에 달라붙었다.

 

×

 

20만산대발파를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있었다.

봄향은 지금 전투현장 합숙방에 누워 용길이와 자기 사이문제를 곰곰히 더듬어보고있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기사장과 자기가 왜 자꾸 그렇게 되는지 안타깝기만 했다. 온 건설장사람들이 인정하는것처럼 용길은 능력에 있어서나 지적수준에 있어서 더없이 존경해야 할 사람이였다. 그는 멋진 쾌남아였으며 문제포착의 능수일뿐아니라 통솔력도 있었고 사람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으로 되고있었다. 그런데 그와는 어째서 자주 마찰을 일으키게 되는것일가. 왜 생활에서의 리듬이 잘 맞지 않을가.

봄향의 가슴을 알찌근하게 한것은 자기가 그를 리해할수 없는것이였다. 무엇때문일가? 모든것은 자기탓이 아니겠는가. 봄향은 자기가 용길이와 같은 실력가의 지적수준을 리해할만 한 능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였다. 봄향의 얼굴을 뜨겁게 한것은 용길에 대한 자기의 험터구가 터무니없는것이였다. 지내볼수록 용길은 자기가 생각한것처럼 무정하고 자기 과신밖에 모르는 그런 인간이 아니였다. 처음 봄향이가 무모한 투석작업을 중지하라고 했을 때 안타까운 어조로 손님격이 아니라 주인의 립장에서 현실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라고 한 말이 그랬다.

얼마나 현실을 모르는 청맹과니였으면 그렇게까지 말해주었겠는가.

대계도의 도갱굴진을 진행할 때 새로운 천공방법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그랬다. 평범한 제대군인착암수가 내놓은 새로운 기술혁신안을 대하는 자기의 태도는 어떠했던가. 용길이처럼 진심으로 파고들고 신심을 줄 대신 남의 일처럼 쌀쌀하게 대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용길은 그것을 제때에 알지 못한 자기의 과실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고 사죄하였다. 거기에 바로 용길의 인간적높이가 있었고 인격적인 매력이 있었다.

도갱곁굴이 짧아졌을 때에도 용길은 규정을 흥정하려는 자기에게 원칙을 재는 자막대기가 되여야 한다고 안타까이 호소하지 않았던가. 만일 자기가 현실적인 요구를 외면하고 투석작업을 중지시켰거나 도갱굴진을 계속하지 못하게 했다면, 짧아진 곁굴에 폭약을 장진하게 하여 발파를 했다면 어쩔번 했는가.

생각만 해도 두려웠다. 가슴이 떨렸다. 자기는 결국 간석지건설자들의 열의에 찬물을 끼얹는 인간이 되고말았을것이다.

봄향은 용길이가 현실도 모르고 덤비는 자기를 너그럽게 대해주던 일들을 생각했다. 장송기사장의 부주의를 자기의 결함으로 인정하던 일이며 짧아진 곁굴을 눈감아준 자기앞에서 오히려 미안한감을 감추지 못하던 일들이 방불하게 안겨왔다.

결론은 명백했다. 현실을 대하는 태도에서나 리해하는 측면에서 자기는 아직도 인생의 초학도나 다름없었다.

봄향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지었다. 생각할수록 용길이의 인간적높이가 아득하게만 바라보였다.

(그는 더없이 성실하고 순결한 인간이야. 그에 비하면 난 아직 멀었어.)

봄향은 들끓는 현실속에서 자기의 존재를 재인식하게 되였던것이다. 그는 지금껏 자기를 찬미하는 달콤한 말마디들과 사랑에 도취된 눈길들에 만족하여 자기의 인생을 아름다운 장미꽃처럼 인식하고있었다.

그러나 간석지건설장에 뛰여들어보니 그것은 한갖 서푼짜리허영심과 처녀의 쓸데없는 자존심에 지나지 않았다. 거창한 투쟁의 대하속에서 봄향은 풍부하고 아름다운 지향을 가진 인간들이 자기의 모든 지혜와 정열을 다 바쳐 조국땅을 넓혀나가고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생의 수업종을 영원히 울려주는 거세찬 생활의 진폭에 서슴없이 뛰여들자 처녀는 자기의 인생관을 재정립하기 시작했다. 풍부한 지식과 지향도 현실에 발을 튼튼히 붙여야 알찬 열매를 맺을수 있다는것이 그가 찾은 생활의 철리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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