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9 회)
5. 한길우에서 아쉬쉬가 류학을 마치고 돌아왔다. 20대의 름름한 청년으로 성숙된 이 손자를 바라보며 누구보다 기뻐한것은 비슈와나스였다. 아쉬쉬는 영국에서 12년간을 공부하였다. 비슈와나스가 그를 고등학교 2학년때부터 런던에서 교육받게 하였던것이다. 그리하여 고등학교시절부터 해외에서 공부한 그는 킹즈 콜리쥐(왕의 대학)까지 졸업하고 조국으로 돌아왔던것이다. 영국영주권을 가지고있는 비슈와나스는 그사이 런던에 자주 가 이 손자를 만났다. 또한 아쉬쉬는 방학때면 집에 와 어린시절과 다름없이 할아버지의 곁에 붙어있었다. 가장 사랑하는 이 손자와는 항상 만나고 련계가 있었지만 류학을 완전히 마치고 이제는 조국으로 돌아와 함께 있게 되였으니 비슈와나스의 기분은 마냥 좋아지는것이였다. 아쉬쉬는 대학에서 영어를 배우고 시장 및 기업경영학을 전공하였다. 최고의 고등교육을 마쳤는데도 그는 계속 공부할 심산이였다. 그는 한달에 며칠간씩 런던에 가 박사원과정까지 마치겠다는것이였다. 또한 그는 아버지의 기업을 돕는 한편 할아버지와 함께 주체사상연구보급을 위한 길에 나서겠다고 하였다. 아쉬쉬의 리상은 높았다. 그는 자기의 모든 활동에 주체사상을 구현해가는것을 더없는 긍지로 간주하고있었다. 비슈와나스는 보람이 있었다. 어린 아쉬쉬를 런던의 고등학교에 넣을 때 비슈와나스는 이 손자를 키스 벤네트에게 맡겼던것이다. 다시말하여 영국에서의 아쉬쉬의 공식적인 후견인은 키스 벤네트였다. 런던에는 상주하고있는 아쉬쉬의 삼촌(비슈와나스의 넷째아들)도 있었지만 할아버지가 이 손자의 후견인으로 내세운 그 사람은 누구인가. 키스 벤네트, 그는 주체의 벗이였다. 비슈와나스가 그를 처음으로 만난것은 1984년 4월 뽀르뚜갈의 수도 리스봉에서 진행된 주체사상에 관한 국제토론회장에서였다.
열정적으로 토론하는 젊은 그의 모습은 참가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였으며 그때부터 비슈와나스는 영국에 갈 때마다 그를 만나기 시작하였다. 키스 벤네트는 런던교외의 좋은 위치에 있는 독채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있었다. 그 역시 인디아에 올 때마다 비슈와나스를 찾아왔다. 그들은 이렇게 주체로 맺어지고 주체로 가까와진 벗이였다. 같은 리념, 같은 뜻은 사람들을 직업과 나이에 관계없이 서로 벗으로, 형제로 맺어주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공고한 뉴대였다. 키스 벤네트는 영국에서 출판하는 인디아신문회사에 관계하고있는것으로 하여 많은 인디아사람들과 교제하고있었다. 또한 그는 인디아계영국인이 영국정부의 상을 할 때 그 상의 서기를 한 전적도 있었다. 이런저런 연고로 하여 그들은 친숙하게 지내고있었으며 주체의 길에서 공동보조를 맞춰나가고있었던것이다. 세계의 곳곳에서 진행되는 주체사상국제토론회들에 그들은 항시 함께 참가하고있었다. 당시 키스 벤네트는 주체사상국제연구소 리사였으며 유럽지역 주체사상연구회 서기장, 조선인민과의 영국친선련대성운동 위원장, 영국국회 제정당 친선의원그루빠 서기였다. 오늘 그는 주체사상국제연구소 부리사장, 《국제김일성기금》사무국장으로서 비슈와나스와 손을 맞잡고 주체사상연구보급선전의 앞장에서 활약하고있다. 바로 그러한 키스 벤네트가 동료의 어린 손자의 공식적인 후견인이 되여 10여년간 그를 어떤 길로 이끌었겠는가 하는것은 명백한것이였다. 조국에서나 해외에서나 주체사상신봉자들속에서 주체의 원리를 익혀오며 성장한 아쉬쉬였다.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으며 무엇을 생각하고있는가 하는것은 누구도 모른다. 오직 본인만이 그 모든것을 안고 자기 갈길을 묵묵히 가고있는것이다. 아쉬쉬는 주체사상에 대한 글도 제절로 여러건 써가지고왔다. 《주체사상과 인디아》, 《나의 앞길에 비치는 해빛》 등의 제목으로 쓴 그의 글들은 일반적인 해설글이 아니라 주체사상을 자기 나라의 실정과 민중의 요구에 맞게 실천적으로 연구분석한 론문형식이라는데 자기의 개성이 있었다. 그것을 본 파타크박사는 수준이 있다고 하며 그 글들을 곧 《주체의 시대》에 편집하자고 하였다. 하지만 아쉬쉬는 발표를 서두르지 않았다. 좀더 다듬고 세련시킨 다음에 론의에 붙여보겠다는것이였다. 더없이 사랑스런 손자였다. 그뿐이 아니였다. 어린시절부터 할아버지를 따라 판도리비비마을을 돌아보며 호기심을 가졌던 아쉬쉬는 점차 세계관이 형성되면서 세습적으로 물려오는 가문의 령지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깊이 생각하고있는것이였다. 샤르마가문의 후손중에서 이 아쉬쉬만이 의외에도 가문의 령지가 조상의 유언대로 보존되기를 바라고있었다. 이것은 모순적인 일이 아닌가. 킹즈 콜리쥐를 나온 그가, 장차 보다 넓은 세계의 활무대에로 진출해야 할 세대가 세습을 따르다니?! 어쨌든 그는 명백하게 말하였다. 《내가 판도리비비마을을 다시 일쿼세우겠습니다.》 《?…》 일부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가문의 령지가 탐나서인가? 의혹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는 아쉬쉬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아무리 령락해도 판도리비비마을은 내 나라의 한 부분입니다.》 비슈와나스는 감격했다. 세습적인 령지라는 개념전에 제것을 귀중히 여기는 그 정신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것인가. 다행이였다. 손주대에 가서 선친의 고향마을을 지키겠다는 후대가 나온것은 천만다행이였다. 결코 너 헛배우지 않았구나! 그렇다. 판도리비비마을에는 선조의 념원만이 아닌 인디아의 전통이 있고 넋이 깃들어있다. 아무리 낡아도 판도리비비는 우리의것이다. 우리모두는 인디아사람들이다. 아쉬쉬는 이렇듯 선친의 고향마을에 대해서도 자기의 일가견을 뚜렷이 가지고있었다. 어쨌든 그는 모든것을 할아버지를 따랐다. 샤르마가문의 고집스런 유전의 피가 이 손자에게 력력히 흐르고있다고 생각하니 비슈와나스는 다소 마음이 평온해지는것이였다.
누구든 조상의 땅을 잊어서는 안되는것이다. 사람은 제 민족, 제것을 귀중히 여길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기를 허무하게 여기게 되며 그런 사람은 결국 자주성을 잃어버리게 되는것이다. 주체가 이것을 가르치고있지 않는가. 선친의 고향마을에 대한 사랑, 다시말하여 조국대지에 대한 사랑은 새 세대들로 하여금 지난날의것을 이어받아 앞길을 개척해나가며 자기가 살고있는 사회를 개변시켜나가려는 의욕을 북돋아주는것이였다. 아쉬쉬는 말하였다. 《주체사상은 실천을 위한 철학이며 생활과 행동의 지침입니다. 주체사상은 사회를 발전시키는 담당자는 그 나라의 민중이라는것을 밝혀주고있습니다.》 그는 지금 어린시절처럼 매일 《주체사무실》에 와서 이야기하고있었다. 할아버지와 손자는 부단히 문답하였다. 비슈와나스는 아쉬쉬가 어떤 측면에서는 자기보다 주체사상의 원리들을 더 깊이있게 파고들고있다고 생각되였다. 응당 그렇게 되여야 했다. 비슈와나스는 아쉬쉬가 진정한 주체사상신봉자가 될수 있다는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확실히 그에게는 인생에 대한 주체의 관점이 있었다. 샤르마가문에 주체의 대를 이처럼 믿음직하게 이어가는 후손이 있다는것이 더없이 자랑스러웠다. 비슈와나스는 아쉬쉬가 박사원과정만 마치면 그에게 공식적으로 《주체사무실》을 인계할 생각까지 하고있었다. 나이 80을 훨씬 넘겼으니 《주체사무실》을 주체의 길을 가장 멀리 갈 후대에게 넘겨주고싶은것이 그의 마음이였던것이다. 현재 킹즈 콜리쥐의 재학중인 아쉬쉬의 동생 마니쉬도 주체사상학습을 열심히 하고있었다. 두 손자는 아버지보다 할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비슈와나스가 그곳에 자주 가기때문이였으며 또한 그들이 인디아에 올 때면 할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내였기때문이였다. 매일 아침 8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전화가 왔다. 그 시간이면 또 어김없이 비슈와나스는 전화를 받았다. 그 전화는 무케시 샤르마에게서 오는 전화였다. 때로는 지방도시에서, 때로는 해외에서… 무케시는 그 어디에 가서 그 무슨 일을 하든 전화시간을 잊지 않았으며 어김없이 지키였다. 그것은 생활의 철칙이였다. 어제는 캄팔라에서 전화하더니 오늘은 아크라에서 전화했다. 《…어제 우간다의 신봉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지금 아프리카지역토론회에 참가할 준비를 하고있습니다. 캄팔라에 있는 우리 회사 직원들에게 주체사상소책자들을 다 나누어주었습니다. 다음달에 연구토론회를 조직하려고 합니다. 나는 오늘 가나의 정객들을 만나 합의하고 현재 건설중에 있는 우리 소인디아촌에 주체사상연구소조를 내오려고 합니다.》 그 전화는 단순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전사가 지휘관에게 하는 보고였다. 무케시는 아들이기 전에 전사였으며 기업가이기 전에 주체사상신봉자였다. 그들은 하루도 건늠없이 전화했으며 매일 토론했고 매일 줄기차게 사업을 전개해나갔다. 무케시는 기업을 우간다에 꾸려놓은데 이어 가나, 르완다에로 확장하고있었다. 우간다는 신봉자들이 비교적 많은 나라였다. 현재 국제연구소 리사이며 아프리카지역 주체사상연구위원회 리사장인 바구마 이쏘케(우간다 물, 토지 및 환경성국무상)도 거기에 있었다. 아프리카각국의 신봉자들은 불안정한 사회정세속에서도 아프리카의 주인은 자기자신이라는 자각을 가지고 주체의 기치를 높이 들고나가고있었다. 무케시는 가는 곳마다에서 더욱 높아가는 주체사상의 열풍을 뜨겁게 느끼며 가나에로 왔던것이다. 그는 우간다대통령과 가까운 사이였으며 가나대통령과는 친구지간이였다. 무케시의 기업은 국내를 벗어나 해외에로 점점 확장되고있었다. 무케시는 지금 가나정부와 협력하여 아크라에 소인디아촌을 건설하고있었다. 인디아의 모든 은행들이 무제한한 차관을 주며 무케시를 후원하고있었다. 그만큼 무케시는 사람들속에서 신망이 있었다. 그럴수밖에 없었다. 그는 큰 기업인이였지만 술도 마시지 않았고 담배도 피우지 않았던것이다. 그는 소박하게 살았으며 신용을 귀중히 여기였다. 또한 그는 모든것을 자력갱생의 원칙에서 설계했고 집행해나가고있었다. 아마도 그것이 주위사람들로 하여금 그에 대한 믿음을 자아내게 하는것인지도 몰랐다. 무케시가 아시아, 아프리카에 기업을 늘여갈수록 주체사상연구보급망도 그만큼 늘어갔다. 그는 새로 개설되는 자기의 모든 기업들에 주체사상연구조직을 우선적으로 내오는것을 철칙으로 삼고있었다. 《소인디아촌이 가나에서 주체사상촌이 되기를 바란다.》 비슈와나스는 무케시에게 이제 조직하게 될 연구소조에 정부관리들을 망라시킬데 대해 강조하였으며 또한 연구소조조직에서 지켜야 할 일련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주의를 주었다. 그들은 부자이기 전에 주체사상연구조직의 한 성원들이였다. 무케시의 처도 마찬가지였다. 키는 크지 않아도 안면이 매우 넓은 키란은 직업상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며 주체사상에 대해 선전하고있었다. 키란은 나라의 상업회의소 부소장이였다. 활달하고 락천적이며 사리정연하게 말을 할줄 아는 키란은 대통령과 수상이 그 어디에 가든 녀성대표로 항상 동행하며 인디아의 리익을 대변하고있었다. 부단히 넓어져가는 그의 활동범위는 곧 주체사상선전의 범위이기도 하였다. 키란은 주체사상연구녀성협회 회장이였던것이다. 그는 자기의 사업대상에 있는 모든 녀성들을 한사람한사람 그 협회에 인입시켜나갔다. 전국적인 조직인 이 협회에는 이미 수백명이 망라되여있었다. 2010년 3월 12일. 뉴델리에서는 아시아지역 주체사상연구소 리사회 제13차회의가 진행되였다. 이 회의에서 무케시 샤르마는 아시아지역 주체사상연구소 서기장으로 선출되였다. 누구보다 기뻐한것은 오가미 겡이찌였다. 이 회의에 참가하기 위하여 그는 전날 도꾜에서 왔던것이다. 각 대륙들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있는 아시아지역 연구소에 이처럼 리지적이고 활동적이며 사회적영향력이 있는 인물이 《참모장》으로 선출된것은 금후 발전을 위한 좋은 기틀을 마련한것으로 되는것이였다. 지역연구소 리사장으로서는 하리쉬 굽따가 선출되였다. 리사장이였던 레기에 라나툰게는 병으로 그 전해에 애석하게도 사망하였던것이다. 그에게는 자식들이 많았다. 그는 자식들에게 자주의 길을 걸으라는 유언을 남기였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크리케트선수인 아르준이 그의 맏아들이였다. 현재 스리랑카의 체육상을 하는 아르준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가고있었다. 지역연구소 리사회에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탄생 100돐을 맞으면서 지역연구소의 기능과 역할을 더욱 높이며 주체사상연구보급활동을 보다 적극화할데 대한 문제들이 토의되였다. 리사회회의가 있은 다음날인 3월 13일. 뉴델리에서는 《자력갱생―자주에로의 길》에 관한 아시아지역 주체사상토론회가 성대히 진행되였다. 새로 선출된 하리쉬 굽따 지역연구소 리사장과 무케시 샤르마서기장이 이 토론회를 능숙하게 조직운영해나갔다. 토론회의의 주제인 《자력갱생―자주에로의 길》은 각이한 직업의 모든 사람들에게 다 부합되는 실천적인 문제인것으로 하여 모든 참가자들이 이에 적극 호응하였다. 주체사상의 현실적의의와 생활력을 극구 찬양하는 목소리가 시종 회의장을 울리였다. 비슈와나스는 오가미 겡이찌가 뉴델리에 온 기회에 토론회를 하나 더 조직하고싶었다. 지역연구소 리사장과 서기장의 직책을 새로 수행하는 하리쉬 굽따와 무케시 샤르마의 열의도 대단히 높았다. 이렇게 되여 3월 20일 뉴델리에서는 주체사상국제연구소, 아시아지역 주체사상연구소, 인디아에 있는 주체사상연구조직들의 련합토론회가 성대하게 진행되게 되였다. 주제는 《태양절기념》이였다. 무케시는 토론회끝에 연회도 마련하였다. 한잔 술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것이다. 연회장에서 사람들은 더욱 화기애애하여 서로의 우정을 두터이 하였다. 하나의 리념아래 모인 이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아까울것이 무엇이랴. 이 모든것을 위해 그는 부지런히 기업을 하고있는것인지. 사람이 돈만 알면 인차 돈벌레가 되는것이고 돈벌레가 되면 그는 벌써 인간으로서의 사회적가치를 상실하게 되는것이다. 더 많은 기업인들이, 각이한 직업을 가진 더 많은 사람들이 주체사상신봉자들의 대렬에 들어서고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자기 생활의 사활적인 요구로부터 시대의 사상을 스스로 받아들이고있기때문이였다. 아쉬쉬도 그랬다. 이 토론회들에 참가하여 할아버지들이, 아버지들이 그토록 열렬히 토로하는 심장의 웨침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는 그의 걸음걸음은 이미 《자력갱생―자주에로의 길》을 걷고있었다. 다음번엔 조선을 함께 방문하자고 하는 비슈와나스에게 아쉬쉬는 말하였다. 《할아버지! 나는 주체사상을 완전히 습득한 다음에 그리고 그 연구보급을 위해 무엇인가 기여를 한 다음에 조선을 방문하겠습니다.》 기특하였다. 그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제절로 계속 공부하고있었다. 높은 급의 고등교육을 다 마쳤는데도 그는 시대의 선진사상이 인간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무기라고 하면서 주체사상에 대해 계속 진지하게 파고들고있었다. 그는 법률, 금융, 상업 등 자기가 배운 모든 학문에 주체의 원리를 부단히 적용해나가고있었다. 샤르마가문은 대를 이어 모두가 주체의 원리들을 학습하고있었으며 자기들의 실천활동에 구현하려고 노력하고있었다. 가문을 고귀하게 만드는것은 혈통이 아니라 정신이였다. 그들은 그 어디에서 그 무슨 일을 하든 인류의 자유와 진보, 평화를 위한 주체의 한길우에 서있었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그 후손들모두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