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 회) 

 

3. 샤르마가문의 대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였다.

비슈와나스도 기계가 아닌 사람인데 불과 몇달전에 뇌수술을 한 그의 몸상태가 어찌 편안할수 있으랴.

하지만 그는 치료와 안정을 하는 속에서도 계획했던 모든 사업을 침착하게 내밀어왔다. 

8월 26일에 에꽈도르에서 진행된 라틴아메리카주체사상연구소 집행위원회 제15차회의와 《자주와 평화의 기치밑에 21세기의 사회주의를 건설하자》라는 주제의 지역토론회, 10월 13일에 탄자니아에서 진행된 아프리카주체사상연구위원회 리사회 제7차회의와 《아프리카에서의 자주, 단결, 협력과 자력갱생을 위한 주체사상과 새시대》라는 주제의 지역토론회, 11월에 오가미 겡이찌사무국장을 초청하여 인디아에서 진행한 전국토론회 그리고 새해 2008년에 들어와 뉴델리에서 각국의 대표들의 참가하에 성대히 진행한 주체사상국제연구소창립 30돐기념행사 등…

강렬한 리성의 힘이 바로 그에게 병마앞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를 주었고 예나 다름없이 엄한 눈빛을 그대로 주고있는것인가.

비슈와나스는 지금 뉴델리의 노이다지역에 새로 일떠선 화려한 건물을 돌아보고있다. 

그는 감탄했다. 설계도 현대적이였고 모든 설비, 비품이 최고급이였다. 3층으로 지은 멋쟁이 그 건물은 건평이 1만평방메터였다. 하지만 비슈와나스의 감탄을 자아낸것은 그 건물의 화려함만이 아니였다. 바로 그 건물의 가장 화려한 1층홀과 2층홀의 정면에 크게 부각해놓은 홀의 이름때문이였다.

무케시 샤르마는 1층홀을 김일성주석을 흠모하는 인류의 마음을 담아 《태양의 홀》이라고 명명하고 2층홀을 김정일장군님의 업적을 길이 전하려는 마음을 담아 《향도성의 홀》로 명명하였던것이다. 홀들은 각각 6 000평방메터였다.

무케시는 말하였다.

《해마다 4월 15일이면 이 〈태양의 홀〉에서, 2월 16일에는 〈향도성의 홀〉에서 경축행사들을 진행할것입니다.》

비슈와나스는 이 셋째아들이 미더웠다. 누가 시킨들 그렇게 할수 있으랴.

자식이 자식된 도리를 다하는것은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것이다.

그때부터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초상화를 모시고 이 홀들에서 큰 행사들이 진행되였다. 전국토론회, 련합토론회, 경축야회, 집회 등…

또한 세계의 주체사상연구조직대표단들과 조선사회과학자협회대표단이 인디아에 오면 여기에 초청하여 다채로운 행사들을 하군하였다.

손색이 없었다. 크고작은 회의장들, 각이한 연회장들과 식당들, 그리고 지하에는 1 000대의 차를 세울수 있는 차고 등…

이 전시쎈터의 옆에는 또한 400개의 방을 가지고있는 현대적인 호텔도 지어놓았다.

인디아의 유명한 연출가가 여기에 와서 자주 영화촬영을 하고있었다. 이런 피사체를 영화예술가들이 그냥 스칠수 없었다.

자식들에게 부어주는 부모의 사랑에는 차별이 없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믿음과 기대도 다 같다고는 볼수 없다.

비슈와나스는 날이 갈수록 무케시에게 믿음과 기대가 한껏 실리게 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는 자기의 대를 믿음직하게 이을 아들은 철저히 셋째라고 생각하였다. 그 대는 기업이 아니라 바로 주체의 대였다.

기업에 대한 믿음은 모두에게 있었다. 보통 부모가 죽으면 자식들간에 재산을 놓고 싸움이 벌어지지만 비슈와나스에게는 그런 우려성이 없었다. 그것은 모든 자식들이 다 자기 기업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운영하며 살아나가는 길에 확고히 들어서있기때문이였다. 물론 기업의 크기는 달랐고 성공과 실패의 우여곡절도 달랐다. 하지만 찌그러져서 파산되는 기업은 없었으며 모두가 자력으로 앞길을 개척하며 살림을 펴나가고있었다.

물론 기업도 무케시가 제일 컸다.

어느정도인가?

뉴델리의 중심에 있는 공원 가든 오브 화이브 쎈씨즈(5개의 감각)도 무케시가 정부로부터 40년을 기한으로 2007년부터 임대하여 운영하는 정도였다. 그는 10정보의 면적을 가진 이 공원안에 36개의 큰 상점들과 20여개의 식당, 유희시설들을 새롭게 전개하였다.

꽃과 분수로 아름다운 이 공원에서는 정말 여러가지의 감각을 다 맛보게 되여있는것인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으며 명절이면 사람들로 꽉 차고넘쳐 흥성이였다.

나라의 전시쎈터와 호텔기업의 거두로 등장한 그는 수도에는 물론 전국의 많은 주들에 기업을 뻗치고있었다.

인디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이며 나라의 정보산업의 중심지인 하이드바르에도 그는 최근에 5성호텔을 개업하였다. 외국의 많은 고위급정객들과 수반들이 여기에 자리를 잡고 인디아의 정보산업기지들을 돌아보군 하였다.

뉴델리에서 그곳까지는 1 000키로메터이다.

무케시는 또한 뉴델리에서 350키로메터 떨어져있는 곳인 라쟈스탄주의 소재지인 쟈쁘르에도 호텔과 또하나의 큰 청사를 건설하고있었다. 그 청사에는 이제 내올 《국제류행설계 및 기술연구소》의 현판이 붙여지게 될것이다. 그 연구소는 류행설계, 기술 등을 배워주는 대학이다.

이렇듯 넓고넓은 인디아땅의 중요도시들에 있는 큰 호텔들과 문화시설들은 그의 기업의 일환으로 되고있었다.

그 모든것을 돌보느라고 무케시는 바빴다.

그는 여러 나라의 정객들과 정부요인들 그리고 나라의 수많은 관리들과 기술자들, 로동자들을 매일같이 상대하고있었다.

그가 만나는 그 모든 사람들을 주체사상신봉자로 이끈다면!

비슈와나스는 무케시에게 바로 이런 기대감과 믿음을 가지고있었다.

정말로 그의 발길이 가닿는 그 모든 곳에 주체사상연구조직이 새롭게 태여나고 또 태여나고있었던것이다.

주체사상을 따르는 사람은 아름다왔고 성실하였고 깨끗하였다. 주체사상은 사람을 가장 힘있는 존재로 세상에 떠올리며 래일에 대한 희망과 무한한 열정을 지닌 더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독여주는 삶의 젖줄기였다.

무케시는 자기 주위의 모든 사람들과 자기 기업에 종사하는 전체 로동자, 기술자, 업무원들이 주체사상을 신앙하며 그렇게 살기를 바라마지않았던것이다.

자식들중에서도 무케시는 주체사상의 진가를 가장 정확히 리해했고 자기의것으로 생활에 받아들이고있는 강렬한 인간이였다.

씨족관념으로는 맏장손을 계렬로 족보를 기록할지는 몰라도 사회적으로는 주체사상을 이어가는 자손을 축으로 가문을 형성하고 이어가야 했다.

바로 그러한 셋째아들 무케시 샤르마의 집에서 잔치를 하는 날이 왔다.

언제나 조용하던 이 집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는 처음이다.

뉴델리의 남쪽 싸아나크 람즈지역에 자리잡고있는 이 집은 마치 오늘을 기다려 자기의 큰 자태를 드러내놓고있은듯싶다. 집은 무려 2 500평방메터였다.

키높이 자라 가지를 드리운 나무들이 넓은 잎새를 흔들고 또한 갖가지 꽃들이 피여나는 이 집의 정원으로 사람들이 그냥 흘러들었다.

이 집이 바로 무케시 샤르마의 집이였다.

며칠째 계속되여오는 그의 딸 결혼식은 오늘 6일째 되는 날을 맞이하였던것이다. 처녀의 마지막밤이여서인지 이날에는 그의 앞날을 축복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모여드는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녀자는 시집을 가면 부모의 슬하를 떠나게 되여있다. 그때부터 녀자는 또하나의 다른 세계에 들어선다고도 할수 있겠는지. 다시말하여 남편과 운명을 함께 하는 녀자의 운명이 그때부터 시작되는것이였다.

그런것이 하늘이 정해준 인륜이란것인가.

그래서 시집가는 딸의 앞길을 부모들이 모든것을 다하여 축복하여주는듯도 했다.

샤르마가문은 떠들썩하였다.

기티카!

무케시의 맏딸인 그는 델리종합대학을 나오고 류행소개잡지 《브라이드 앤스일》(신부와 스찔)의 기자로 한창 이름을 날리고있었다.

보기만 해도 시원하게 큰 두눈과 그우에 붙인듯한 진한 눈섭, 선이 굵직굵직한 얼굴을 보면 그에게는 부드러운 장난기와 자기의 세계가 있다는것을 짐작하게 되는것이다.

비슈와나스는 사랑스런 이 손녀의 앞길을 축복하였다. 이미 맏아들의 딸들은 결혼식을 하고 남편들을 따라 카나다를 비롯한 해외에로 날아갔지만 기티카는 뉴델리를 떠나지 않고 문필활동으로 사회에 크게 이바지할 리상을 안고있었다.그리하여 그는 배우자도 뉴델리에 있는 사람을 택했던것이다.

주체사상신봉자집안에서 태여난 그는 어려서부터 많은 책을 읽었으며 자기가 쓰는 글들에서 녀성의 사회적지위와 역할에 대해 강조하고있었다.

오늘 세계적으로 볼 때 어느 나라에서나 부부쌍방이 결혼전의 자기 성을 그대로 가지며 가정생활에서나 사회생활에서 동등한 권리를 행사하고있는것은 아니였다.

기티카의 결혼식은 시작부터 흥겨웠다.

그럴수밖에 없었다. 가문의 조상이 기티카의 결혼식에는 첫날부터 참석하고있었던것이다. 그것도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이미 증손자까지 거느린 비슈와나스는 가문의 조상으로 받들리우고있었다. 참으로 그는 가문에서 싼타클로스(크리스마스전야에 아이들에게 선물을 보내준다는 신적인 로인)와도 같은 존재였다.

비슈와나스는 원래부터 한주일의 결혼풍습을 달가와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결혼식을 단 하루에 와닥닥 한것을 천만다행으로 두고두고 추억하였다. 물론 그때는 시국이 어수선하여 어쩔수 없는 일이였지만.

정부에서도 이 결혼풍습을 장려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느모로 보나 오늘의 현실과 실리에 맞지 않기때문이였다. 하지만 막지는 못하고있었다. 매우 오랜 옛적부터 굳어지고 굳어져온 민족의 풍습은 현대의 생활양식이 아무리 새로운것이라 해도 거기에 자기의 자리를 호락호락 양보하려고 하지 않는것이다. 강산은 쉽게 변해도 풍습은 달리하기 힘든 법이다.

그래서인지 오늘까지도 인디아에서는 어느 가정에서나 이 결혼풍습이 그대로 적용되여오는것이며 또한 누구도 어쩔수없이 그에 따르고있는것이였다.

참으로 력사와 더불어 형성된 풍습은 그 민족의 고유한 속성인듯싶다. 그렇지 않다면야 어찌 영국과 카나다, 미국 등 다른 나라에서 살고있는 인디아의 이주민들속에서도 이 결혼풍습만은 오늘까지 계속 유지될수 있으랴.

오늘 세계적으로 결혼식을 7일간 하는 나라는 인디아와 인디아에서 분리된 파키스탄뿐이라고 한다. 파키스탄에서 또 분리된 방글라데슈는 가난하기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한다.

비슈와나스는 결혼식을 유럽에서처럼 2~3시간 교회당에 가서 간단히 하면 좋을것이라고 늘 생각하고있었다.

때문에 그는 가문의 결혼식에 참가는 하였지만 다 비치지는 않았고 중요한 대목들에만 나타나 축하를 해주군 하였다. 그러던것이 기티카의 결혼식에만은 첫날부터 참석하고있는것이였다.

어찌 그렇지 않을수 있으랴.

기티카의 결혼을 축하해주기 위해 저 멀리 바다건너 국경과 국경을 넘어 일본에서 찾아온 귀한 손님이 첫날부터 참석하고있었으니…

샤르마가문이 떨쳐나서 환대하는 그 손님은 누구인가?!

오가미 미에꼬!

그는 다름아닌 국제연구소 사무국장 오가미 겡이찌의 부인이였다.

아, 뜨거워라. 사무국장을 대신하여 리사장의 손녀의 결혼식에 온 부인의 그 마음!

가족이더냐? 가문이더냐?

아니여라, 그는 가족도 가문도 아닌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차림도 풍습도 서로 다른 이국인!

이웃이더냐? 이웃나라더냐?

아니여라. 그가 온 곳은 이웃도 이웃나라도 아닌 국경과 국경을 넘어 또 바다를 건너 멀고먼 아시아동쪽의 맨 한끝!

하지만 아니여라, 아름다운 녀인이여!

그대는 누구보다도 허물없는 한가족! 누구보다도 가장 가까운 이웃!

어찌 그렇지 않으랴. 하나의 리념, 하나의 뜻으로 이어진 숨결이 국경과 민족을 초월하여 모두의 심장에 높뛰고있는데야.

이처럼 가까운 가족이 어데 있으랴, 이처럼 가까운 이웃이 또 어데 있으랴.

그래서 샤르마가문과 인디아의 신봉자들이 모두 떨쳐나서 그를 뜨겁게 맞이하고 환대하는것이였다.

사무국장이 고마왔고 오가미 미에꼬가 더더욱 고마왔다.

기티카의 결혼식에 참가한 오가미 미에꼬의 모습은 국제연구소가 국제기구일뿐아니라 주체로 맺어진 뜨거운 혈육의 정이 오가는 화목한 한가정이라는것을 뚜렷이 보여주는 감동의 화폭이였다.

그래서 더더욱 환희롭고 의의있게 흘러가고있는 결혼식이였다.

꽃기둥들이 장식되고 꽃줄들이 늘어진 정원의 곳곳을 오가며 또한 활 열려져있는 집안으로 자유롭게 드나들며 사람들이 서로서로 주고받는 화기애애한 이야기와 웃음, 경쾌히 울리는 노래를 싣고 밤은 흘러가고있었다.

꽃무늬가 그려진 신부의 량손목에 친척들이 금은걸이들을 무거울 정도로 끼워주었고 거기에 저마다 금붙이들이 달린 줄무늬장식들을 또한 무거울 정도로 걸어주었다.

이들은 목걸이, 귀걸이, 팔걸이, 손목걸이 등의 장식을 좋아한다. 농촌에 가면 지어 발목걸이까지 하는 녀성들이 적지 않다. 이 나라에서는 남자들도 반지를 많이 끼는것이 상례로 되여있다.

인디아에서 이러한 장식은 재산보유정도를 나타내는 하나의 형식으로 되여있다.

일반적으로 인디아라고 하면 금에 대한 욕망이 류달리 강한 나라로 알려져있다. 금생산량이 극히 적은 인디아가 그 수입에 있어서는 단연 첫자리를 차지하고있으며 따라서 이 나라에서는 금시세가 끊임없이 저하되고있을 때에도 그 보유량은 계속 늘어나고있다. 

결혼식과 불교의식 등에 써먹을 례물로 금을 저축해두는것은 힌두족가정들에서 전통화된 하나의 풍습이다. 물질적부의 생산에 리용되지 못하는 그러한 금의 수량은 이루 헤아릴수 없을 정도이다.

인디아에서는 금이 가정의 안정과 행복의 담보물로 인정되여오는데 그러한 전통은 B. C. 250년 아쇼까왕의 통치시대에 그 시원을 두고있다고 한다. 

인디아의 오랜 그 전통은 결혼식을 하는 매 가정들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고있었다. 

부모들과 친척들은 지참품을 금,은,보석 등과 함께 돈으로 주고있었다.지참품을 그런것으로 주는것을 정부가 금지령까지 내리면서 막고있었으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있었다.잘사는 집에서는 그런 희유금속과 함께 고급주택도 지참품으로 마련해주고있었다.

인디아에서 라유리(례장)는 지위에 따라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하늘땅차이였다. 그만큼 빈부의 격차는 심했다.

이 집에서도 그러한 전통은 마찬가지였다. 

신부의 볼을 맞춰주는 사람마다 안겨주는 지참품은 한켠에 쌓이는데 그앞에 앉아있는 한사람은 그냥 념불을 외우며 신부의 머리우에 그리고 둘러선 가족들모두에게 《성수》를 뿌려주고있다. 이 모든것이 어길수 없는 하나의 례식으로 되여있는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축복해줄수록 신부는 울며 웃는다. 행복하여서인지 아니면 처녀의 마지막밤이 서운해서인지. 보다는 행복에 겨운 눈물과 웃음이리라.

신랑은 그저 신부의 매혹적인 두눈을 들여다보며 웃고있다. 그에게는 신부가 곱고 이밤이 즐거웁고 또한 래일이 환희로왔으리라.

우디트!

비슈와나스의 이 손녀사위는 인디아에서 잘 알려져있는 손전화회사인 샴통신회사 주인의 아들이였다. 그는 아버지를 도와 이 회사에서 로씨야의 기업들과 합영을 하고있었다.

샤르마가문과 접촉하면서 그도 주체사상을 리해했고 따르고있었다. 기티카의 할아버지 비슈와나스가 말하듯이 주체사상을 배워서 손해될것은 하나도 없었다. 인생에서 얻을것이 참으로 많은 사상이였다. 이 결혼식에 참가한 많은 관리들도 주체사상을 신봉하는것을 보면 이 사상은 확실히 재산의 유무에 관계없이 사회의 진보에 리해관계를 가지고있는 모든 계급과 계층속에 깊숙이 스며들고있는 시대의 보편적인 사상이였다.

웃음속에 노래속에 밤은 흘러가고있었다.

높지는 않으나 은은하게 울리는 오가미 미에꼬의 노래소리가 이 밤을, 샤르마가문의 이 대사를 한결 아름답게 장식하여주는듯싶다.

 

봄이 왔네 봄이 왔네

어디에 왔나

산에 왔네 언덕에 왔네

들에도 왔네

 

꽃이 폈네 꽃이 폈네

어디에 폈나

산에 폈네 언덕에 피였네

들에도 피였네

 

사람들이 환성을 올리며 박수를 친다. 정말로 봄이 온것이다. 신랑신부의 마음속에, 모두의 가슴속에…

꽃이 피는 그 봄에 이어 계절은 계속 흐르고있었다.

 

여름이 왔네 여름이 왔네

어디에 왔나

산에 왔네 언덕에 왔네

들에도 왔네

 

비가 오네 비가 오네

어디에 오나

산에 오네 언덕에 오네

들에도 오네

 

처녀들이, 녀성들이 즐겁게 서로서로 손잡고 흐르는 선률을 따라 어깨를 들썩이고있다. 모두의 가슴에 아름다운 사계절이 흘러가고있었다. 온갖 꽃이 피고 약비가 내리고 단풍이 물들고 흰눈이 쌓이고…

이 순간 오가미 미에꼬의 가슴속에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있었다. 그의 마음은 저도모르게 15년전 김일성동지를 만나뵙던 그날에 가있었다.

환하게 웃으시는 위대한 그이앞에서 삼가 노래를 불러드리던 그날은 1993년 4월 2일이였다.

그날 김일성동지께서는 오가미 미에꼬의 노래를 들어주시고 잘 하였다고 치하하여주시였다.

그때로 말하면 조선에서 긴장한 정세로 하여 온 나라가 전쟁에 대처할 만단의 전투태세를 갖추고있던 때였다. 바로 그러한 때 오가미의 가족이 조선에 간것은 영웅적조선인민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려는 마음에서였고 또한 김정일장군님께서 내리신 명령에 전적인 지지와 찬동을 표시하는 자기들의 결의를 다지고싶었기때문이였다.

영광의 그자리에서 오가미 겡이찌는 가족을 대표하여 삼가 말씀올리였다.

《주석각하께서는 저희들의 일에 대해 걱정하지 마시고 지켜보아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때부터 위대한 스승이 지켜보고계신다는 자각을 안고 주체의 길을 줄달음쳐온 오가미의 가정이였다. 조선의 적대국 자본주의일본에서 살며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주체의 한길을 쉬임없이 걷고있는 그들이였다.

남편을 도와 남편과 함께 주체사상을 연구보급하고 신봉자대렬을 부단히 늘여가는 길에 모든것을 다 바쳐가고있는 오가미 미에꼬!

그의 모습은 자주의 길에 피여난 한떨기 아름다운 꽃으로 사람들의 눈에 비끼였다. 비슈와나스와 무케시, 샤르마가문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고마와했다. 여기까지 찾아와 이자리를 즐겁게 해주고 말없이 자기들을 고무해주는 그가 한없이 고마왔다.

웃음속에 노래속에 날은 밝아왔다.

이날은 신부가 신랑의 집으로 떠나가는, 신랑이 신부를 완전히 데려가는 결혼식의 마지막 7일날이였다.

비슈와나스는 떠나는 손녀를 포옹해주며 그의 앞길을 축복해주었다. 손녀를 데려가는 우디트는 할아버지의 발에 손을 대였다.

인디아의 인사법은 발에 손을 다치는것인데 직계가족끼리는 하지 않고 들어오는 사람만 하게 되여있는것이다. 례하면 사위와 며느리.

발에 손다치는것은 최대의 인사법이지만 반면에 직계자식이 가문의 어른들의 발에 손을 다치는것은 최대의 죄악으로 되여있었다.

인사하는 손녀사위에게 비슈와나스는 말하였다.

《좋은 사람이 되여달라구.》

할아버지의 그 말을 새겨안고 우디트는 기티카를 데리고 떠나갔다.

비슈와나스가 되여달라는 그 좋은 사람이란 새색시를 사랑해주는 사람만이 아닌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귀중히 여기며 인류의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였다.

신랑신부와 함께 량측의 모든 사람들이 다 신랑의 집으로 떠나갔다. 결혼법도가 그렇게 되여있는것이였다.

오가미 미에꼬도 샤르마가문이 되여 신랑의 집으로 갔다. 마지막까지 그는 한가정이 되여 다 참가하고있는것이였다.

그러한 마음들에 떠받들려 가정을 뭇는 신랑신부는 행복하였다.

비슈와나스는 마음속으로 바랐다.

아, 젊은 쌍이여! 부디 잊지 말아다오,너희들의 앞길을 세계의 주체사상신봉자들이 축복해주었음을!

문득 비슈와나스의 머리속에는 나라가 분렬되고 독립되는 해에 뉴델리에 혼자 발을 들여놓고 외롭게 이 거리를 거닐던 20대 초엽의 나날들이 떠올랐다.

온 도시가 대낮같이 불을 켜고 웃고 떠들며 명절의 밤을 즐기던 디왈리축전날에도 그는 갈데라고는 한 곳도 없었다. 또한 집도 없었던 그에게 찾아올 사람은 더더구나 없었다.

그때로부터 비슈와나스는 이제 자기에게도 집이 생기고 가족들과 동료들이 모여 전통적인 민족의 모든 축전을 한껏 즐길 그런 날이 오리라고 믿으면서 꾸준히 인생길을 걸어갔다.

돌이켜보면 뛰며 달리며 땀을 많이도 흘려온 세월이였다. 60여년이라는 년륜을 아로새겨온 그 나날에 세상은 얼마나 변하였는가.

추억도 많은 그 년대들을 후대들이야 어찌 다 알수 있으랴만 비슈와나스가 그들에게서 바라는것은 오직 하나였다. 그것은 태여나고 태여나는 이 땅의 모든 세대들이 운명의 주인은 자기자신이며 사람은 자기의 힘으로 참된 삶을 개척할수 있다는 주체의 인생관을 지니고 자기 인생을 운전해가기를 바라는 그것이였다.

샤르마가문은 그렇게 이어져야 했다.

주체의 인생관을 지닌 사람의 앞길에는 광명이 비쳐들기마련이다.

비슈와나스는 그러한 정신세계를 지닌 후손만이 진정으로 샤르마가문의 대를 이을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모든 자식들과 후손들에게 그것을 가르치며 그 정신을 물려주려고 노력하였다.

결혼식행렬은 떠나갔다.

하지만 비슈와나스는 마지막 이날만은 따라갈수 없었다. 이날에 전국토론회를 조직해놓았기때문이였다. 바로 이날에 일본에서도 행사가 있기때문에 오가미 겡이찌가 함께 오지 못하고 부인만이 왔던것이다.

그날은 조선로동당창건 63돐을 맞는 2008년 10월 10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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