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6 회)
제 3 편
제 5 장
1
방하민이 리승기한테로 간것은 오후무렵이였다.
그때 리승기는 뜨락의 나무들사이를 거닐고있었다. 오전에 공장시험소에 나갔으나 오후에는 의사의 지시를 지켜 나갈수가 없었다. 림세진은 당분간 오전에만 연구소와 건설장에 나가는것을 허용하였다.
리승기는 못마땅한 기색으로 림세진한테 화를 내려고 하였다. 그런 기미를 눈치챈 림세진은 오히려 흔히 희로애락이라는 그 정서의 변화가 이제는 리승기한테 정상으로 되돌아왔다는 제딴의 직업적인 타산에 의해 속으로 못내 기뻐했으며 따라서 너그러운 미소를 띄우고 롱담으로 굼때였다.
《아, 난 이젠…리선생한테 시끄러운 존재이니 인차 사라지겠습니다. 그때까지만 참구 제 말을 들어주시우. 옛날부터 간다는 사람의 소청은 들어준다는데… 안 그렇습니까?》
리승기는 하는수없이 허허 웃고말았다. 그 웃음 역시 림세진을 기쁘게 한건 두말할것 없다.
방하민이 들어서자 리승기는 그를 기다리던중이라 급히 다가와 방하민과 손을 마주잡았다.
방하민은 웬일인지 목이 메여와서 그저 떠듬거리며 《리선생! 그새…》하다가 《요즘 좀 어떠십니까?》 하고 말했다.
《이게 얼마만입니까!》
리승기는 반가운 인사와 함께 그의 손을 놓지 못하였다.
그들은 손들을 부여잡은채 같이 응접실로 들어가 쏘파에 앉아 서로 마주보기만 했다.
방하민의 얼굴은 희멀쑥한 혈색이 여전했으나 작은 두눈에는 그전처럼 예리한 빛이 아니라 두리두리한 얼굴에 퍼그나 조화되게 온화한 빛이 어려있었다.
앞차대의 한옆에는 화분우에 진홍빛제라니움꽃이 피여있었다.
방하민은 제가 구해준 수정안경을 쓴 리승기를 처음 보게 된다. 불시에 가슴이 뭉클해지는것 같았다. 그 수정안경알을 통해 내다보는 리승기의 눈빛이 몇년전보다 더욱 뜨거워보였다. 방하민자신이 그렇게 느꼈을따름이다.
두사람은 서로 나눠야 할 회포가 많은것 같기도 하고 이미 다 풀고나서 별로 없는듯이 느껴지기도 했다. 리승기는 자기들이 이제 해야 할 일부터 화제에 올리고싶어졌다.
방하민은 자리가 잡히는 차제로 리승기네를 찾아보겠다고 한 어머니의 말을 전달했다.
《아니, 내가 먼저 찾아가 인사를 드려야지요. 고국땅을 밟아보며 어머닌 참 기뻐하시겠소.》
《네, 오늘두 려관방에 있지 않구 며느리, 손자와 함께 평양시내를 돌아다니실겁니다.》
《그럴테지요. 그럴테지요.》
그 어머니의 심정에 감심하는 리승기는 어쩐지 방하민이 친동기처럼 가깝게 느껴지였다. 그를 만나는 지금 리승기는 가슴속에 넘치는 뜨거운 정으로 하여 일상생활의 사리도 더 명료해지는것 같았다.
방하민과의 사이에 있었던 일, 특히는 그를 경원시하게 되였던 그 모든것들이 기억에 되살아났는데 이상하게도 그를 원망하는 감정은 없고 그것이 순전히 자기의 잘못과 불찰로 인하여 그렇게 된것만 같이 느껴졌다. 자기는 편협하고 옹졸한 사람이 아니던가.… 정도이상의 자기비하의 감정 역시 아직은 병적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것일수 있으나 어쨌든 그것은 방하민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였다.
리승기는 방하민에게 물었다.
《그래, 새로운 합성수지개발에 관한 학위론문을 가지구 나왔다는데…》
이 말은 그 론문에 대한 질문보다 앞으로 어디서 일하게 되는가를 묻는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방하민은 그 뜻을 알아차린것 같았다.
《지금 당장은 그 론문을 덮어두겠습니다.》
《덮어두다니?》
《그건 원유에서 출발하는 합성수지개발이구…》
《무슨 말씀이요? 우린 앞으루 원유화학두 해얄게 아니요?》
《하지만 지금은 저두 비날론공업화에 참가하겠습니다.》
방하민은 (제가 도피자이지만 이제라도 허락된다면) 하는 생각을 말로 덧붙이지 못하는게 안타까왔다. 이 며칠사이에 굳혀진 결심 아니, 기차에서 내린 날 밤에, 비날론공장건설장을 정신없이 새벽까지 돌아치던 그밤에 이미 결정되다싶이 한 그 결심을 아무 주저없이 석연히 터쳐놓은것이다.
리승기는 잠간 아무말없이 방하민의 얼굴을 건너다보다가 《고맙소.》 하더니 《하여튼 짬을 내서 그 론문을 한번 보았으면 합니다.》 하고 부탁하는 어조로 말하는것이였다.
《그럴 시간이 있겠습니까?… 차차… 이제 앞으루 리선생의 방조를 바랄뿐입니다.》
방하민이 리승기앞에서 이렇듯이 허심한 어조로 말하기는(그와의 친교는 꼭 10년에 이르렀다.) 아마 이것이 처음일지 모른다.
그 순간에 리승기는 불현듯 방하민의 어머니가 《같은값이면 조선박사》라고 했다는 그 말이 생각났다. 그는 말했다.
《뭘요. 나두 합성수지는 아직… 하지만 같은 고분자화학자로서 함께 힘써봅시다.》
리승기의 말속에 울리는 호의를 감촉한 방하민은 다소 흥분에 겨워 음성을 높였다.
《리선생두 언젠가 말했지만 사실 여기 있을 땐 몰랐는데 전 2년동안 가있으면서 그전에는 느끼지 못했던걸 느끼게 되였습니다.… 그 나라는 말입니다. 리론화학은 그렇다치구… 그건 그들이 멘델레예브와 같은 대학자를 가졌다는것으로도 리해가 갑니다만… 한데 응용화학은 우리가 결코 뒤지지 않았다구 생각했습니다. 몇달쯤 지나 거기 연구생들은 당신의 수준이 곧 조선의 수준이겠는데 그 수준이면 여기에 괜히 온것 같다구 말했습니다. 사실 폴리비닐알콜섬유는 물론이구 폴리비닐알콜공업자체두 우리가 앞섰지요. 제가 다시 예레반화학공장에 가보구두 느꼈지만… 이제 비날론공업화만 완전히 되면 섬유문제만 아니라 화학공업에서 큰 주추돌을 박는거나 같지 않습니까.… 이제 선생의 공적은 바야흐로…》
《가만…》
리승기는 손을 들어 상대방의 말을 가볍게 제지시켰다. 남한테서 자그마한 찬사라도 받는 이런 순간이 제일 멋적고 괴롭기까지 한 그였다.
허나 그는 방하민의 말을 끊어놓고 좀 당황해서 어쨌으면 좋을지 몰라하였다. 남의 말을 중둥무이시키는 례는 그한테서 거의 없는 일이다.
리승기는 그럴 때 마침 안해가 방안에 들어오는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랐다.
분이는 들어서며 대뜸 눈이 동그래지더니 《아이구, 이게 누구세요? 방선생이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어머니를 모시구 부인이랑 함께 나오셨다니 참말 반갑습니다.》 하고는 남편과 방하민을 번갈아보았다.
안해의 거동을 보며 리승기가 물었다.
《그 얘긴 이따 하기루 하구, 밖에 누가 오셨소?》
분이가 대답했다.
《네, 건설장을 돌아보겠다구 나갔던 오선생네 아버님이 돌아오셨습니다.… 그럼 들어오시라구 하겠어요.》
분이는 방하민한테 회포는 이따가 풀자는듯 다정히 고개를 끄덕여보이며 되돌아서 밖으로 나갔다.
리승기는 방하민에게 말했다.
《참, 오원배로인이 오셨다는 말을 미처 못했군. 글쎄 그 먼 의주땅에서 로인들이 견학단인지 관광단인지 무어가지구 왔습니다. 로인님은 아들네 이사짐두 겸사 꿍져가지구 기차에 부쳐오구.》
그 말을 듣던 방하민은 문득 청수에서 제가 정하고 다니던 하숙집을 나중에 오정해네 신혼부부한테 빼앗기고 물러나던 일이 어제런듯 머리에 떠올랐다. 그것을 운명의 지꿎은 희롱이라고 속으로 자신과 남을 다같이 비웃던 그때의 그 회의주의자인 자기가 돌이켜져 부지중 미소를 짓지 않을수 없었다. 이번에도 자기는 오정해의 새집들이를 보게 되는것인가. 이 순간 그것은 매우 즐거운 일로 생각되였다.
로인의 턱수염은 흰 명주실처럼 부드러워보였고 몸에는 흰 모시로 시원한 여름옷을 입었다. 그것은 그가 생의 마지막날까지 벗지 않을듯싶은 그 고유한 조선남자옷이였다. 아래도리에 여기저기 흙얼룩이 져있었다.
리승기는 그것을 살펴보며 《저런, 다른 옷을 바꿔입으시구 나가실걸.》 하고 걱정하다가 되돌아서며 말했다.
《누가 왔나 보십시오. 방하민선생이…》
방하민이 두손을 합장해서 배허벅에 붙이고 꾸뻑 절을 하자 오원배가 황황히 다가서며 그의 두팔을 잡았다.
《오호, 이게 누구시오. 서경조 그분의 아드님이…》
가뜩이나 건설장을 돌아보느라고 흥분했던 오원배는 눈을 슴벅이다가 졸지에 눈물이 솟구치는지 손끝으로 눈굽을 누르고있었다.
방하민은 제가 앉았던 안락의자에 오원배를 앉히고 자기는 보통의자에 앉았다.
어느덧 오원배는 신이 나서 건설장을 돌아본 이야기부터 펼쳐놓았다. 큰 도시를 일떠세우는것 같아서 의주읍시내는 거기다 대면 촌마을이라는둥 그저 어마어마하고 통 무어가뭔지 모르게 억이 막힌다는둥… 저 건설이 보통건설인가, 농사군의 일이란 거기에 비하면 아이들의 소꿉장난이라는것이다. 앞으로 섬유직장이 자리잡는다는 그 건물안에서 흰솜이 쏟아진다는 그것을 꿈처럼 그려보며 좋이 한시간은 서있었다는것이였다.
리승기는 미소를 짓고 그 말을 들었다.
방하민이 고개를 쳐들고 추연한 빛에 잠겨 듣고있었다. 그는 지금 갑자기 떠오른 생각때문에, 바로 그 일을 함께 의논할 사람들이 한데 모이게 된 이 우연한 일치때문에 잠시 말을 못하였다.
그런데 얼마후에 오원배가 진정을 하더니 방하민이 생각하는 바로 그것을 물을줄이야…
《참, 선친의 혼을 모시구 나왔겠지?》
그것은 서경조의 유골을 념두에 둔 말이다.
방하민은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일어서기까지 하였다. 그러면서 《네.…》 하고는 더 말을 못했다.
《그래, 어디다가 모시자구 하나?》
오원배의 물음이였다.
방하민은 제 생각을 내놓기 앞서 리승기의 의향을 묻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리승기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야 청수동에 모셔야지요.》
그 말에 방하민은 뒤를 이었다.
《전 이미 그렇게 생각하면서두 여러분네들의 의향을 알구싶었댔습니다. 생각이 이렇게 같게 되니 저로서는 뭐라구 해야 할지…》
오원배가 고개를 끄덕거리였다.
《암, 여부가 있소. 그분의 유골을 어디다 안치하겠소. 그 고장을 내놓구서 말이요.… 청수동 산마루에 서경조 그분의 유골을 안치합시다.》
그리고나서 그는 제가 할바를 실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방선생, 이제 평양에 같이 가서 그 길로 서경조 그분의 혼을 모시구 청수에 갑시다.… 리선생은 바쁜 몸이니 후일에 기회를 보아 한번 가서 잔을 부어드리시우.》
그는 이 일에서는 자기의 말대로 해야 하며 다른 의견이란 있을수 없다는 태도였다.
리승기는 로인의 말에 그만 쩌릿이 가슴이 저려오며 눈굽이 뜨거워올랐다. 무엇때문인지 그저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는 말을 되풀이했을뿐이다.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청수동 산발에는 비날론을 위해 한몸바쳐 쓰러진 김용진이, 림창직이 잠들어있다.… 아, 독립되고 문명한 새 조선을 그렇듯 갈구하던 서경조를 그들곁에 묻지 않고 어디다 묻을것인가!)
2
며칠뒤의 어느날 오후.
일본에서 귀국하여 여기로 온다는 기별이 있었던 렴성근이 연구소에 도착하여 리승기의 방에 급히 들어섰다.
렴성근은 들어서자 장의자에 트렁크를 내던지고 리승기한테로 달려왔다.
리승기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에 굳어진듯 앉았다가 바삐 일어났다.
그는 렴성근이를 부둥켜안았다.
《이게 얼마만이요?》
《선생님!…》
렴성근이도 더 말을 못하고 손수건을 꺼내 눈굽을 훔친다. 45년도 일본오사까헌병대 류치장에 있다가 같이 나와 헤여져서는 처음이니 15년세월이 지난것이다. 두사람은 그냥 떨어질줄 모르며 장의자에 같이 나란히 앉았다.
《렴동무!…》
리승기는 이렇게 불러본다. 처음으로 부르는 동무라는 말이지만 이 말로 하여 몇배나 더 친근감이 생기는 후배였고 친지였다.
《선생님, 그동안 수고많았습니다. 저희들은 그저 해외에서 왼심만 쓰구 앉아 별루 한 일두 없이…》
《천만에 소리네. 자네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얼마나 큰 고무를 받군 했다구.…》
렴성근은 평양에서 수속이 끝나는 차제로 가족보다 한발 먼저 여기로 달려왔다고 했다. 조급한 마음을 달랠수 없어 저우에서부터 시작하여 비날론공장건물들을 쭉 훑으면서 걸어왔는데 이처럼 큰 규모의 건물을 단 한해사이에 해제낄수 있는 조국의 힘에 넋을 잃고섰다가 하마트면 자동차가 옆을 지나가는것도 모를번 했다는것이다.
《선생님, 래일부터 당장 일에 뛰여들고싶습니다. 전 어느 공정에서 일할가요? 제 검화공정을 해보면 어떻겠습니까?》
《하 좀 천천히, 여전히 성미가 불같다니까. 그렇지 않아두 정신을 못 차리게 떨떨해있는 판인데 렴동무까지 달려들어 이렇게 볶아대니…》
두사람은 소리내여 웃었다.
《선생님, 전 이제부터도 헐치 않으리라는걸 각오합니다. 일본도 겨우 1만톤되나마나한걸 가지구 얼마나 씨름을 했다구요. 한데 우린 2만톤능력이 아닙니까.… 허지만 그동안 조국에서 많은 과학자, 기술자들이 자라났으니 문제없으리라는 확신이 갑니다.》
그러더니 문득 잊었다고 하면서 《선생님, 가와가미가 편지를 보내더군요.》 하고는 트렁크를 열며 말했다.
《닛뽄방직의 중진인 가와가미 히로시는 늘 은사로서 선생님을 존경하며 회상합니다. 여기 선생님이 애용하던 책 몇권도 보관했다가 보내고 그리구 그때 다까스끼 중간공장에서 시험용 비닐론실로 처음 짠 천도 몇메터 보관했다면서 그것도 기념품처럼 보내더군요.》
리승기는 책을 밀어놓고 연회색도 아니고 흰색도 아닌 색갈의 비닐론천을 손에 들어 매만지며 감회에 젖어 말했다.
《가와가미가 의리를 잃지 않구 있다니 고마운 일이구만.… 저와 같은 사람들의 일본을 생각해달라구 하더니, 그만은 여전히 변치 않았어.》
렴성근은 리승기에게 가와가미의 편지를 내밀었다. 리승기는 1948년에 남조선에서 가와가미의 편지를 받을 때처럼 그렇게 조급하게 후들거리는 손으로 겉봉을 뜯지 않았다. 그는 편지에 무슨 내용이 있을가 가늠하기라도 하듯 이쪽저쪽 뒤번지며 겉봉을 보다가 천천히 끄트머리를 뜯었다. 낯익은 가와가미의 필체가 보였다.
리승기는 안경을 벗어들고 편지를 읽었다. 그는 편지를 읽고나서 렴성근에게 말했다.
《남에서 시작도 못한걸 북에 와서 하게 된 비결을… 그 힘의 원천을 알고싶다는군.》
《글쎄 나보구두 그걸 물으며 알고싶어했습니다.》
《그 참, 그걸 어떻게 한두장의 답신으로 쓸수 있겠나. 내 일생으로 그 대답을 찾았는데.… 아니야, 가와가미는 리해 못해. 그는 일본사람이야. 위대한 수령님을 모신 우리 조선민족의 긍지를 그가 어떻게 쉽게 알수 있겠나.… 참, 여기에 쓰기를 미국에 있는 지태규도 일본에 왔다가 같은 조선사람이지만 머리를 기웃거리더라구 썼구만.》
《귀국직전에 저두 일본에 온 지태규박사를 또 만났습니다.… 한데 난 그가 미국의 대학에서 교수, 박사에 별감투를 다 쓴대두 부럽지 않습니다.… 그는 통일되기 전에는 조선에 가지 않는다고 하면서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구 하지만 그가 조국을 위해 아무 한 일도 없는 이상 그 말자체가 자기 변명이나 자기 위안에 불과하지요.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고 하지만 그자신이 무서운 숭미사대주의자가 아닙니까. 그래두 국경이 없다구요? 그가 한때 교또시절에 나의 스승이였다는것이 영예감보다 불쾌감을 더 자아낸단 말입니다. 그는 해방전부터 미국놈들의 두뇌수입전략에 녹아난 사람입니다. 게다가 반공사상까지 갖구있는데 그건 그가 미국에 림시로 가있던 1950년 6월 당시에 1차남진때 자기네 가족이 집에서 내쫓겼기때문이라는거지요.… 알구보니 그때 리승엽이 그따위짓을 한 모양인데 한두사람의(그것도 나쁜놈의) 잘못된 처사를 가지고 다 평가하지 말라구 지태규한테 말해줬습니다만 워낙 성미가 괴팍스러워서… 그래 내가 북에 간 리승기선생의 행복한 운명을 보고 생각되는 점이 없는가고 했더니 〈글쎄, 그건 참…〉 하면서 한숨을 쉬며… 생각은 깊어지는 모양이더군요.》
그리고는 그 말은 더 말자는듯이 손을 내젓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 편지에 선생님을 일본섬유학회 명예회원으로 선거했다는 말이 있을텐데요. 나보구 전달해달라기두 하구.》
리승기는 편지에서 그 구절을 읽었다.
《〈선생님, 우리가 선생님을 일본섬유학회의 명예회원으로 선거했음을 알립니다. 부디 승낙해주십시오.〉 이렇게 썼구만.》
리승기가 이렇다할 답변이 없자 렴성근은 말했다.
《가와가미나 사꾸라다 이찌로… 과학자로서의 량심과 의리로 봐서… 아마 그들이 학회에서 주동적인 제의를 한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있던 조선대학교도 교또대학과의 련계가 좋은 편입니다.》
리승기는 머리를 끄덕이며 편지장을 봉투속에 넣고나서 갑자기 생각난듯이 물었다.
《렴동무는 원유화학에 대해선 전혀 파악이 없나?》
렴성근은 눈을 껌벅거리며 대답했다. 《없는데요. 왜 그러십니까?》
《60년대에 들어서자 지금 원유화학에 대한 세계적인 추세가 활발해지지 않았나? 우린 그걸 외면할수 없네. 수령님께서 이 부문 인재를 양성할데 대한 교시를 주신적도 있네. 한데 이 부문 학자가 적네. 몇사람 안되지. 방하민이라구 쏘련에서 대학두 나오구 다시 가서 연구원을 마치면서 새로운 합성수지개발에 관한 론문을 쓰고 나왔지만 원유화학에 의한 합성섬유연구는 아직… 렴동무도 알겠네만 여러 나라 문헌들에는 폴리아크릴니트릴계섬유(아닐론), 폴리에스테르계섬유(데트론)에 대한 연구결과들이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지 않나.》
《선생님은 비날론을 발명하신분이 아니라 지금은 과학원 분원 원장으로 저한테 말씀하시는군요. 하여튼 전 일본에서도 폴리비닐알콜을 연구했으니 당분간은 선생님과 함께 비날론공업화에 몸바쳐 일하겠습니다.… 그리구는 역시 카바이드에서 시작하는 염화비닐을 공업화하구 다음은 염화비닐섬유도(모빌론)도 하겠습니다.》
《고맙소, 고마워.… 사실 비날론공업화에서 아직 아름찬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지.》
《제가 어느 공정에서 일하게 될가요?》
《렴동무 말대로 검화공정이 어떨는지 토론해봅시다.》
《검화공정은 주로 이때까지 누가 했습니까?》
리승기는 의자에서 일어나 방안을 거닐며 렴성근에게 사람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의 어조는 빠르지 않았다. 자기의 제자들과 조수들을 아끼는 사랑과 함께 지어 그들의 열정과 탐구심을 두고는 선망과 존경의 감정까지도 숨기지 않았다.
렴성근이 물었다.
《그런데 리재업동무는?… 청수에서 비날론중간공장장으로서…》
《그는 공학에 밝은 사람이니 공정간 련계를 보장하구 약국에 감초처럼 안 비치는데가 없다네.》
렴성근은 리승기가 사위를 사랑스럽고 대견하게 여기는 심정은 여전하다고 생각하는지 웃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한시바삐 그도 만나고싶은 렴성근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디로 곧 떠날 기세같았다.
《지금이라두 당장 새로 건설된다는 과학원 분원청사를 돌아보고싶습니다. 그게 어딥니까?》
《하 렴동무, 여전하군그래… 앓으면서도 언 랭방에서 공부를 하던 그 열정가… 그 정열을 보구 자네 부인이 부모의 반대도 물리치구 자네한테 반해서 다녔다지, 허허허.…》
리승기는 렴성근의 팔소매를 잡았다. 그를 다시 장의자에 앉히고 먼저 말해주지 않을수 없었다.
수령님의 발기로 함흥분원이 창설되였다는것, 친히 건설부지를 잡아주신 그이께서 지난 달에도 몸소 건설현장을 돌아보시며 구체적인 지도를 주시였다는것을 말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60년 8월에 서호숙소에서 리승기를 만난 자리에서 과학원의 화학연구소와 화학공업성의 중앙연구소(전신은 1948년에 창설된 흥남연구소) 그리고 각지에 널린 화학연구기관들을 한군데 모이게 하여 화학공업의 토대가 튼튼한 함흥에 몇천명의 종업원을 가진 과학원 함흥분원을 창설하도록 해주시고 그 원장으로 리승기를 임명하도록 하신것이다.
렴성근은 더욱 흥분해서 거기까지 뻐스를 한번 갈아타고 갔다오면 되지 않느냐는것이다. 갔다올 차로 말하면 리승기는 제 승용차를 내줄수도 있었으나 오늘 밤은 이야기부터 실컷 하고싶었다.
그래서 리승기는 말했다. 《그러지 말구 래일 나와 같이 차를 타구 가보자구. 오늘 저녁은 우리 집에 가세.》
《그렇기두 합니다.… 사모님한테 인사두 하구 가와가미가 사모님한테서 다시한번 맛있는 조선음식을 먹어봤으면 좋겠더라는 말두 전하구요.》
렴성근은 트렁크안에 다시 책과 비닐론천을 챙겨넣었다. 제가 들고가려는것이다.
두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그새 벌써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카바이드굴뚝들을 지나 곧추 주택마을로 들어갈수 있었으나 그들의 마음은 자석에 끌리듯 그리고 서로 약속이나 한듯 비날론도시의 대통로를 따라 걸어갔다. 구내 한복판에 생긴 널직한 길이 포장된지도 오래전 일이다. 준공을 앞둔 건물들안에서는 휘황한 불빛속에서 밤에도 조립공사가 한창이다.
…집에 들어서자 분이가 달려나오며 렴성근이를 오랜만에 만난 오랍동생처럼 두팔을 부둥키고는 그저 《렴선생이… 렴선생이…》 하고 더 말을 못하며 옷고름을 찾아 눈굽에 가져갔다. 고학시절에 자기 집에 와 지짐쪼박이라도 맛나게 먹던 그때의 렴성근이 생각나는 모양이다.
상봉의 감격이 얼마간 지난 뒤 렴성근은 분이가 불러들이는 아이들을 보았다. 응접실에 들어서며 꾸뻑꾸뻑 인사를 하는 아이들을 렴성근이는 차례차례 안아주었다.
《세월이 참 흘렀습니다. 제가 얼굴을 알만 한 아이들이 여기 없으니…》
분이가 설명을 했다.
《큰애들의 얼굴을 보면 알겠는지… 혜연은 종합대학에 다니느라 평양에 있어요. 화학공대를 다니는 애두 이제 돌아와요.》
렴성근이 문득 추억을 더듬듯 혼자말처럼 뇌였다.
《아이들을 모두 일본식으로 부르지 못하게 하느라구 이름을 달았지요.》 분이가 웃었다.
《그건 이젠 다 옛말이지.》
《그래요. 다시 반복될수 없는 옛말이지요.》
안락의자에 앉아 안해와 렴성근의 해후를 바라보던 리승기가 마침내 안해더러 이렇게 말했다.
《여보, 당신은 뭘하구 있소?… 그것부터 좀 꺼내오우.》
한순간 분이는 뭐냐는듯 남편을 보다가 흥분한 격동속에서도 세심하고 명민한 녀성의 촉감으로 남편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대뜸 알아차린듯싶다.
《그래요, 그래요. 잠간만…》 그리고는 방안에서 나갔다가 이내 되돌아왔다. 분이가 량손에 받쳐들고온 자그마한 지함을 리승기 역시 그렇게 정히 받아들었다. 리승기는 그것을 차대우에 놓았다.
《렴동무, 이것부터 좀 보구 그다음에…》
리승기는 목소리가 떨려 제대로 말을 이을수가 없었다. 렴성근이 급히 다가왔다.
리승기는 뚜껑을 연 지함안을 마치나 처음으로 보듯이 잠시 들여다보더니 그안에서 접어놓은 종이장부터 조심히 쥐고는 두손에 펴들었다. 거기에 적힌 글도 처음 읽는듯 또다시 눈굽이 뜨겁고 눈앞이 흐려왔다.
《이게 산삼이 아닙니까?》
지함안을 들여다보던 렴성근이 이렇게 놀란듯 묻다가 리승기의 손에서 그 종이장을 받아들었다.
렴성근이 조심히 종이장을 펴들고있었다.
안경을 벗고 손수건으로 눈굽을 훔친 리승기는 눈앞을 곧추 바라보며 조용히 서서 이제는 몇백번이나 읽어서 글자의 획까지도 뜬금으로 눈에 선한 편지를, 단어 하나하나가 사랑의 절정처럼 솟아올라 빛나는 그 편지를 마음속으로 뜨겁게 뇌인다.
《리승기선생에게.
며칠전에 선생이 병으로 인하여 입원중에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선생의 병에 도움이 될가 하여 방금 강원도 농민들에게서 나에게 보내온 산삼 2매를 송정하오니 받으셔서 병치료에 도움이 될것을 희망합니다.》
렴성근이 머리를 번쩍 들고 웨치듯이 물었다.
《아니, 이게 장군님의 친필이 아닙니까?》
《그렇네.》
리승기는 조용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렴성근은 그 편지를 또다시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나서 분이한테 넘겨주고는 흥분과 격정속에 잠시 멍하니 서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급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량손에 펴들고 두눈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막으려는듯 눈가에 가져갔다. 그의 두눈은 손수건에 묻혀있었다.
리승기는 그를 진정시키듯, 허나 자기도 다시금 감격이 되살아오르는듯 말을 못하고 그저 렴성근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그와 자기자신을 다같이 진정시키려고 애쓰는것이였다.
렴성근이 손수건을 떼고 숙였던 고개를 들고 떨리는 음성으로 《선생님… 제가 찾아온 조국이 이런 조국이니… 제 찾아온 품이 이런 품이니…》하더니 다시 손수건을 얼굴에 가져간다.
리승기는 여전히 그의 어깨에서 손을 내리지 않은채 말했다.
《여보게 성근이, 자네가 찾아온 조국의 품이 곧 우리 수령님의 품이 아니겠나.》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렴성근이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성근이, 수령님처럼 우리 학자들을 사랑하시는분은 없네.》
리승기는 격정과 흥분을 애써 누르며 말을 이었다.
《여보게 렴동무, 우리가 오사까헌병대에 갇혀서… 왜놈들이 우리를 개나 돼지처럼 무릎을 꿇게 하던 그때에 오늘같은 이런 날이 있을것을 생각이나 할수 있었던가? 엉?》
감격에 못이겨 숙이였던 머리를 쳐들며 렴성근이 대답했다.
《없었지요. 꿈에도 생각할수 없었던 일이였지요.》
그러다가 흐느낌을 강잉히 참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왜놈들은 어쩌다 저들의 리익때문에 조선사람학자도 쓰는척 하다가 저들한테 조금이라두 불리해지면 우리를 짐승처럼 취급하면서… 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두… 그러니 선생님, 이 귀중한 산삼을 보십시오. 우리 과학자들한테두 조국이 있어야 합니까? 없어야 합니까? 네?》
렴성근의 마지막말은 거의 애절하게 울렸으나 거기에 구태여 더 다른 대답은 필요없는듯 그들 세사람은 오래도록 그 두뿌리의 산삼을 들여다보고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