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5 회)
제 7 장 길은 영원하다 인간은 누구나가 지나온 길을 돌이켜보리라. 특히 인생의 말년에 이르면 누구나가 지나온 그길에 대해 후대들에게 교훈삼아 또는 자랑삼아 터놓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자기의 지나온 길에 대해 조만간에 말하지 않는 성격이였다. 말한다면 앞으로 가야 할 길에 대해서였다. 만약에 그가 자기가 걸어온 인생길에 대해 그리고 자기가 해놓은 일에 대해 좀 더 성실하게 나에게 들려주었다면 이 책이 이처럼 빈약해지지는 않았을것이다. 물론 빈약하게 번져지고있지만 그나마를 위해서도 나는 때로 그에게 억지로 물어보지 않으면 안되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그는 마지못해 대답하군 하였다. 아마도 그것은 자신의 훌륭한 소행에 대해 라렬하는것을 후대들앞에 자기를 내세우는 일로 생각하는것이기때문이였으리라. 사내는 자기의 공로를 코에 걸고 다니지 않는 법이다. 이 세상의 정의로운 사람들은 자기 조국을 위해, 인류를 위해 스스로 바치는 모든 희생을 그렇듯 당연한것으로 여기고있는것이다. 그러한 비슈와나스가 이밤에는 묻지 않는 말을 나에게 또 그리고 옆사람들에게 그냥 한다. 《오늘은 내가 세상에 세번째로 부활한 날이요.》 환희에 넘친 그의 말을 싣고 명절의 불빛이 한껏 어린 보통강의 물결도 끝없이 춤을 추는듯싶다. 2010년 10월 9일 밤이다. 자기 감정에 충실한 그는 오늘의 환희에 대해서 세계의 벗들에게 그냥 말을 하였다. 《우리모두는 행운아들이요!》 저녁늦게 청류관에서 시작된 연회는 주체사상신봉자들의 끝없는 감격과 환희속에 흐르고있었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을 모시고 진행한 조선로동당창건 65돐경축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관람하고 금방 돌아온 이들이였으니… 이들모두는 오늘 주체위업의 밝은 미래를 확신하였다. 영광스럽게도 주석단에 초대된 비슈와나스는 줄곧 환하게 안겨오는 또한분의 위대한 태양의 모습을 우러렀다. 비슈와나스는 자기의 온 넋이 그이께 쏠리는것을 금할수 없었다. 그의 가슴속에서는 시줄이 흐르고있었다. 뵈옵는 순간 아, 그이는 태양이시다 광휘로운 빛발로 나의 온몸을 감싸안으시는 그 빛발에 이끌려 저마다 키돋움하며 만세! 만세! 온 장내가 환호로 들끓을 때 그이 뿌리시는 그 빛발로 누리는 밝다 그 빛발에 싸여 모두의 가슴은 젊음으로 약진한다 우러를수록 아, 그이는 태양이시다 한없이 준수하신 그이의 모습 주체위업의 밝은 미래이시다 … 김일성동지의 접견을 처음으로 받던 그날처럼, 김정일동지앞에 처음으로 나서던 그날처럼 비슈와나스의 가슴속에는 태양찬가가 높이 울리고있었다. 그만이 아닌 온 세계 진보적인류의 가슴가슴에 태양찬가가 끝없이 흐르는 명절전야의 평양의 밤이였다. 청류관이 통채로 환희에 넘쳐 흔들리는것 같았다. 1세신봉자들이 세상에 높이 울린 태양찬가는 오늘 수없이 늘어나는 2세, 3세신봉자들의 가슴가슴에 이처럼 더 높이 울려퍼지고있는것이다. 주체의 태양의 빛발을 받으며 두 세기를 살아오는 비슈와나스는 자기의 삶이 긍지롭게 여겨졌다. 태양의 그 빛발은 그의 삶의 자양분이였다. 비슈와나스는 21세기 10년대가 환희로왔다. 이날을 향하여 줄달음쳐온 2000년대였던가?! 비슈와나스는 새 세기의 지나온 첫 년대를 돌이켜보았으며 이제 향도의 태양이 누리를 밝게 비칠 다음년대들을 내다보았다. 고결한 정신을 지닌 사람들의 자취는 세월의 이끼에 묻혀지지 않는다. 그는 새 세기에 들어와서 더 많은 일을 설계했고 더 분발하여 주체의 길을 걸어왔다. 1. 세기가 바뀌는 속에 21세기를 맞이하게 되는 인류에게 있어서 자주화의 기치를 더 높이 드는것은 진보와 평화를 위해 나서는 필수적인 요구였다. 2000년 4월 16일. 인민문화궁전 원탁회의실에서 열린 주체사상국제연구소 리사회 제15차회의에서 비슈와나스는 국제연구소 리사장으로 선출되였다. 20세기 마지막년대의 10년간 국제연구소사업을 이끌어온 이노우에 슈하찌는 건강상의 리유로 자기의 사임을 제기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새 천년기를 맞이한 오늘 우리 국제연구소에는 보다 새롭고 힘있는 체제가 절실히 요구됩니다. 나는 발전하는 현실의 요구에 맞게 우리 국제연구소사업을 추켜세울 새 리사장을 선출할것을 제의합니다.… 나는 새 리사장으로 비슈와나스선생을 추천합니다. 그는 오랜 기간 주체사상연구보급활동에 이바지해왔습니다. 그가 뉴델리를 비롯한 세계의 곳곳에서 진행된 주체사상국제토론회들의 조직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으며 또 그가 얼마나 많은 글들을 써왔고 또 쓰고있는가에 대해서는 온 세상이 알고있는바입니다. 그는 지금도 주체사상신봉자들의 대오의 앞장에서 맹활약을 하고있습니다. 나는 그가 리사장으로 되면 김정일총비서의 의도대로 온 세계의 자주화위업실현을 위한 투쟁에서 한몫하리라는것을 굳게 믿으면서 여러분들이 적극 지지해주기를 바랍니다.》 회의집행부에서는 이노우에의 이 제의를 충분히 토론하고 비슈와나스를 리사장으로, 이노우에 슈하찌를 명예리사장으로 임명하였다. 비슈와나스의 어깨는 보다 무거워졌다. 그는 자주의 새 세기, 21세기를 넘겨받게 되는셈이였다. 《세계의 벗들! 당신들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의 말은 짧았고 표정은 무표정했다. 참가자들의 박수속에 그는 의장직을 맡은 알바 챠베스를 비롯한 의장단성원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자주의 새 세기를 당겨오려는 비슈와나스의 열도는 세기가 바뀌는 속에 더 높아져갔다. 이제 새 세기에 자기의 인생길이 어디까지 그어지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길은 대를 이어 영원히 이어질것이다. 이렇게 확신하는 비슈와나스는 첫 사업으로서 김일성주석의 탄생 90돐을 맞는 해에 주체사상 첫 세계대회를 진행할것을 발기하였다. 그날을 향해 그는 뛰고 또 뛰였다. 우선 보다 많은 나라들에서 전국조직들을 결성함으로써 세계대회를 그야말로 전세계의 모든 나라 대표들이 다 참가한 대회로 의의있게 맞이하여야 했다. 비슈와나스는 그해 5월에는 방글라데슈에, 7월에는 스리랑카에, 12월에는 영국에 가서 주체사상전국토론회조직과 연구소조들의 활동을 적극 방조하였다. 그가 움직이는 모든 비용은 무케시가 전적으로 보장하여나섰다. 그것이 단지 자식의 의무에서라면 해마다 제기되는 그 약차한 비용을 그렇게 전적으로 감당해내기 힘들것이다. 무케시는 아들의 의무이기 전에 주체사상신봉자로서, 아시아지역 연구소 부서기장으로서 자기가 응당 맡아나서야 할 시대의 임무로 간주하였던것이며 국제연구소가 자기에게 준 과업으로 받아들이였던것이다. 그 역시 기업가이기 전에 주체사상신봉자였다. 혈연적관계를 초월하여 하나의 리념과 하나의 사상으로 이어진 부모와 자식간의 뉴대처럼 공고하고 영원한것이 어데 있으랴. 이런 사람들, 자주의 새 세기를 열렬히 지향하는 신봉자들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하여 2000년 한해에만도 네팔, 방글라데슈, 캄보쟈, 몽골, 레바논, 말리, 민주꽁고, 마로끄, 에짚트, 가이아나, 에꽈도르, 유고슬라비아(당시), 따쥐끼스딴, 오스트리아, 로씨야, 로므니아, 도이췰란드, 오스트랄리아에서 전국적인 주체사상연구조직들과 수많은 소조들이 결성되는 성과들이 이룩되였다. 비슈와나스리사장과 오가미 겡이찌사무국장이 이끄는 새 세기의 국제연구소는 자립성을 더욱 강화하면서 새로운 활력에 넘쳐 붐비였다. 국제연구소는 2001년 2월에는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에서 아프리카지역 토론회를, 4월에는 베네수엘라의 수도 까라까스에서 라틴아메리카지역 토론회를 조직하였으며 2002년 6월 19일에는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에서 21세기 자주위업에 관한 첫 세계대회를 성대히 개최하였다. 당시 세계정치정세는 어떠했는가. 세기가 바뀌는 속에 벌써 인류의 평화념원에 칼질하는 반력사적인 엄중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다시말하여 세계적인 충격파를 일으킨 미국에서의 9. 11사건에 뒤이어 《반테로전》이 선포되고 미국주도하의 아프가니스탄전쟁이 터졌던것이다. 폭탄과 미싸일 등이 비오듯 쏟아지며 터지는 무시무시한 폭음과 불길은 평화와 안정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와 희망을 깨여버렸다. 새 세기 침략전쟁의 막을 연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전쟁에 이어 이라크전쟁을 감행하는것으로써 인류의 자주, 평화념원에 정면도전하여나섰다. 그들은 유엔도 국제법도 세계민심도 안중에 없었으며 오로지 힘의 만능론만을 인정하였다. 사태는 제국주의가 존재하는 한 세계는 언제가도 평화로울수 없다는것을 보여주고있었다. 이것이 세기가 바뀌면서 인류의 가슴을 세차게 두드리는 력사의 경종이였다. 자주의 흐름을 가로막아보려는 힘의 세력이 아무리 사나와도 인류에게는 자신을 정화할수 있는 능력이 있는것이다. 인류에게 그런 능력이 없었다면 인류는 이미 오래전에 멸망하고 이 지구상에는 정의도 지성도 문명도 존재하지 않았을것이다. 력사를 돌이켜보라. 세계를 제패할것처럼 날뛰던 파쑈광들의 운명이 종당에는 어떻게들 되였는가. 인류의 운명은 하나로 련결되여있다. 진보적인민의 자주적련대를 호소하는 비슈와나스의 목소리는 절절하였다. 온 세상 주체사상신봉자들이 더욱 굳게 뭉쳐 자주의 새 세기를 앞당겨올것을 열렬히 호소하는 그의 목소리는 세계의 곳곳에서 울리고있었다. 비슈와나스는 세계의 신봉자들과 련대하여 2005년에는 또다시 남아메리카에서 21세기 반제자주위업에 관한 세계대회를 조직하였다. 베네수엘라의 수도 까라까스에서 9월 30일부터 10월 1일까지 진행된 대회는 아메리카대륙에 자주의 열풍을 몰아오는 또하나의 계기로 되였다. 새 세기의 국제연구소를 이끌면서 비슈와나스는 국제연구소와 지역연구소 리사회를 재편성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였다. 그것은 발전하는 현실의 요구에 맞게 주체사상연구보급사업을 보다 심화시켜나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것이였다. 그는 지역연구소 리사장들로는 허물수 없는 권위를 가지고있는 명망높은 학자들로, 서기장들로는 조직력도 있고 사회적영향력도 행사할수 있는 인사들로 꾸림으로써 그 활동의 기초를 보다 튼튼히 쌓아놓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역시 그는 세계적인 국제기구의 주인으로서의 임무를 자각하고있었다. 비슈와나스는 2005년에 아시아지역 연구소 서기장으로 하리쉬 굽따박사를 선출하였다. 하리쉬 굽따는 1980년대초부터 주체사상신봉자가 되여 활약해온 델리종합대학의 이름있는 경제학교수였다. 주체사상에 공감한 그는 인디아에서 진행되는 수많은 토론회들의 조직에 기여했으며 여러 나라에서 진행되는 국제토론회들에 참가하여 주체사상의 과학성과 정당성을 론증하였다. 그의 주택은 붜샬리 비탐브라구역에 있었다. 그 구역은 델리종합대학의 가까이에 있는 교수들만이 사는 구역이였다. 그런것으로 하여 그는 주위의 많은 교수들속에서 주체사상을 선전하고있었으며 그들을 주체의 길에 인입하고있었다. 또한 델리종합대학 녀성단과대학 학장으로 사업하고있는 그의 처 싸드나 하리쉬도 열렬한 주체사상신봉자였다. 영문학 교수, 박사인 그는 특히 조선의 선군정치에 큰 감동을 받고 자기 대학의 학생들과 교원들에게 준군사교육을 주고있었다. 그는 인디아선군정치연구조직을 내오고 그 위원장으로 활약하고있었다. 비슈와나스는 항상 주위의 모든 신봉자들의 활동과 그들의 능력을 주의깊게 관찰하고있었다. 그만하면 학자적명예도 있고 나이도 지숙한 하리쉬 굽따가 적임자였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무케시 샤르마를 추천하는것을 반대하였다. 젊은 무케시에게는 아직도 시간이 있다는것이였다. 이리하여 하리쉬 굽따에게 지역연구소 서기장직이 넘겨지게 되였던것이다.
일은 공명정대하여야 한다. 특히 온 세계의 자주화를 위하여 투쟁하는 국제기구와 산하 지역기구들의 조직문제에서 그 어떤 사심이나 편견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되는것이다. 비슈와나스는 2006년 9월 평양에서 주체사상국제연구소 리사회 집행위원회 제10차회의를 소집하고 국제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사업체계를 보다 철저히 확립할것을 결정하였다. 이 회의의 결정을 집행하기 위해 비슈와나스는 집행위원들과 손을 잡고 국제연구소와 지역연구소들을 강력한 조직으로 부단히 개선강화해나가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여갔다. 2007년에 들어서면서 비슈와나스는 더욱 바쁜 나날을 보내였다. 우선 그는 이해의 첫 사업으로 2월의 명절에 즈음하여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 수여해드리는 국제김일성상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에게 전달하는 행사를 성과적으로 진행하였다. 평양에서 돌아오는 길로 그는 2월 27일 스리랑카의 콜롬보에서 《자력갱생, 민족경제 및 자주위업에 관한 아시아지역토론회》를 성과적으로 치르었으며 그해 5월에는 이딸리아의 로마로 갔다. 이미 아시아지역 주체사상연구소 리사회를 재편성한 비슈와나스는 로마에서 유럽지역 주체사상연구소 리회사 제9차회의를 열고 리사회를 새롭게 편성하였다. 리사장으로는 역시 저명한 학자인 에드몽 쥬브가 재선되였으며 리사들은 일부 소환, 보선하였고 서기장으로는 프랑스어, 에스빠냐어, 영어 등에 능한 이딸리아페르쟈외국인대학 교수인 마떼오 까르보넬리를 새롭게 선출함으로써 유럽각국의 조직들과의 련계를 직접 취하며 원만하게 사업해나갈수 있게 하였다. 련이어 로마에서 《나라의 자주성과 세계화》라는 주제로 유럽지역토론회를 조직진행하였다. 토론회는 유럽의 실정을 고려하여 창조적으로 진행되였으며 로마대학을 회의장으로 함으로써 많은 교수들과 학생들이 참가하여 알찬 내용들을 토론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날아가 그곳 지역연구소들도 재편성할 계획이였다. 이미 안은 짜있었고 필요한 조직사업도 되여있었다. 하지만 그는 뜻밖에도 그 다음달에 뇌수술이라는 어마어마한 고통을 치르고 생사기로의 침상에 눕게 되였다. 아, 인생이여! 10대의 소년시절부터 꿈많은 포부를 안고 한 도시의 골목골목을 살피며 새소식을 취재하던 어제날의 그 리포터의 지칠줄 모르는 걸음이 정녕 여기서 멈추어서는것인가. 그와 련결되여있던 세계의 모든 조직선들과 신봉자들이 인디아의 아폴로병원으로 쏠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