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8 회)
제 6 장 세기의 언덕에서 제도가 뒤바뀐 나라의 정치정세와 경제생활은 평온할리가 없었다. 베를린장벽의 붕괴를 계기로 크게 변하기 시작한 세계정치정세의 여파는 동유럽의 사회주의나라들을 휩쓸었던것이다. 쏘련이 붕괴되여 새로운 로씨야가 탄생한 때로부터 5년이 되는 1996년이였다. 나는 그때 이르꾸쯔크, 노보씨비르스크, 옴스크 등 로씨야의 도시들을 돌아보면서 가슴이 아팠다. 자유와 문명을 가져오리라고 생각했던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는 혹심한 인플레와 빈부격차를 초래했고 국민생활은 급격히 악화되여 정치경제는 커다란 혼란에 빠져들고있었다. 70여년동안 지속되여온 사회주의를 버리고 단숨에 자본주의를 지향한 놀라운 사변은 몇년 세월이 흐른 그때에도 나라에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오고있었다. 수수방관할수 없는 이 현실을 놓고 로씨야의 학자들은 모스크바국립종합대학에 모여 앞길을 모색하고있었다. 아. 엠. 꼬왈료브원사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주체사상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간다면 오늘의 로씨야의 혼란된 정세가 극복되고 반드시 이전 쏘련과 같은 강력한 로씨야가 재생되게 될것이라는것을 나는 믿어의심치 않는다. 지난 시기에는 우리 학자들사이에 련계가 깊지 못하였는데 오늘은 주체사상이라는 공동의 리념이 있기때문에 우리들의 마음이 통하고 우리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앉을수 있게 되였으며 흉금을 털어놓고 새 사회건설의 방도를 론의하게 되였다.》 현세계에서의 인간문제에 관한 국제학자연구련맹 위원장인 그는 세계명인사전에도 몇번 오른바있는 로씨야의 저명한 철학자였다. 일흔을 훨씬 넘어섰지만 조금도 굽어들지 않은 후리후리한 키는 왕성한 그의 정신력과 함께 사회주의사상리론의 전선에서 도고하게 자기를 지켜온 그의 학자적품위를 말해주는듯싶었다. 맑스주의철학의 거두로 알려져있는 그가 그러할진대 주체사상에 대한 로씨야의 정계, 학계, 사회계인사들의 호흡은 대단히 컸다. 그들은 솔직하게 말하였다. 조선에는 쏘련에서 맑스―레닌주의를 배우고 간 사람들이 많기때문에 선생의 자세를 취하였는데 이제부터는 학생의 자세를 취하겠다고 허심탄회하게 말하는것이였다.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나자신도 주체사상의 과학성과 정당성, 그 불패의 생활력에 대하여 현실적으로 더욱 새롭게 느끼게 되는것이였다. 력사가 태동하는 동란의 시기에 독창적인 사상의 빛발은 더욱더 뚜렷이 빛을 뿜는다. 인간의 가치관을 두고 저마다 고심속에 빠졌던 현대의 숱한 철학가, 사상가들이 주체사상을 생명의 젖줄기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세기와 더불어 도도히 굽이치는 자주의 흐름을 가까이에서 체험하는 나의 가슴에는 주체사상의 폭이 참으로 넓고 아름차게 안겨왔다. 인간의 자주적요구를 반영하여 나온 사상은 사회적진보에 리해관계를 가지는 모든 계급과 계층의 요구와 일치한것이다. 그래서 만민이 주체사상을 따르는것이다. 그때 모스크바종합대학에서 나는 비슈와나스와 처음으로 통성하였다. 나는 그의 명함장을 보고 내심 의아쩍었다. 멋들어지게 만들어진 각국의 명함장들을 받아온 나로서는 세계적인 광고업자로, 저명한 사회활동가로 전대륙에 알려진 그의 명성에 비해 너무도 수수한 명함장을 받았던것이다. 그는 재산도 있고 적지 않은 액의 은행구좌도 가지고있는 사람이였다. 나는 스스럼없이 물었다. 《비슈와나스선생, 당신의 명성에 비해서는 명함장이 너무도 수수합니다.》 그는 아무런 가식도 없이 조용히 대답하였다. 《김일성주석에게서 배운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가슴이 뭉클하였다. 그 한마디면 되였다. 그 한마디에 그의 정신, 그의 지향이 다 비껴있는듯 하였다. 그렇게 놓고보니 그는 차림새도 수수했고 식사도 항시 검소하게 하고있었다. 역시 명함장도 다를바 없는것이였다. 적지 않은 나라의 대통령들과 인물들을 만나본 그가,
항시 자존심과 우월감으로 가득차있던 그가 어찌하여 오직 우리 수령님앞에서만은 절대적으로 머리숙이게 되였는가?! 그 명성 세기와 더불어 누리에 찬연하건만 생존시 그리도 겸허하시고 그리도 자신을 낮추시며 인민을 력사의 주인으로 내세워주신 우리 수령님! 그이의 숭고한 그 인품에, 그이의 위대한 그 사상에 이 세상 그 누가 반하지 않을수 있으랴. 비슈와나스도 바로 그런 사람들중의 한사람이였다. 그는 말하기를 세계적인 업적을 쌓으신 김일성주석의 명함은 전세계가, 력사가 다 알고 높이 떠받들고있지만 그분의 생활은 차림새로부터 시작하여 모든것이 참으로 검소하였다는것이였다. 그래서 모든것을 우리 수령님을 닮으려고 노력하고있는 비슈와나스였다. 이때 나는 그와 초면이였지만 지면을 통하여 이미 알고있은터라 마치 구면인듯이 밤가는줄 모르고 많은 말을 나누었다. 인생의 시작부터 로씨야사람들과 손을 잡고 기업을 펴며 이 땅을 수없이 밟아온 비슈와나스였다. 그 나날에 벌려온 그의 기업은 상승의 일로를 걸어왔다고도 말할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그는 제도가 뒤바뀐 바로 그 땅에서 하많은 추억과 함께 인생의 철리를 새삼스럽게 깨닫고있다. 곡절많은 20세기의 마지막년대는 비슈와나스에게, 아니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령도자를 잘못 만나고 옳은 지도사상을 가지지 못하면 나라가, 인민이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된다는 력사의 교훈을 깊이깊이 새겨주며 흘러가고있었다. 1. 사변, 붉은기가 내려지다 1991년 12월. 크레믈리궁전의 지붕우에 나붓기던 붉은기가 서서히 내려지고있었다. 크레믈리의 지맥과도 같은 온 세계 각국에 있는 쏘련대사관의 지붕우에 나붓기던 붉은기도 서서히 내려지고있었다. 비슈와나스는 한동안 얼떠름하였다. 세계에 강대성을 자랑하며 74년동안 지속되여온 사회주의체제의 종말! 지구를 뒤흔드는 강력한 이 충격앞에서 만사람이 주춤하였다. 20세기에 들어와 전세계를 휩쓸었던 사회주의의 열풍에 떠받들려 창공에 높이 휘날리던 그 붉은기의 세찬 퍼덕임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얼마나 크나큰 힘을 불러일으켰던가. 그 붉은기의 세찬 퍼덕임은 온 세상 하늘에 소리를 내며 수십년을 휘날려왔다. 붉은기의 그 펄럭임소리를 더 가까이에서 들으려고 모스크바로 흘러들던 사람들이였다. 비슈와나스도 그랬다. 첫 출국의 나라가 바로 사회주의쏘련이 아니였던가. 사회주의쏘련의 그 74년에서 비슈와나스는 43년을 따라왔다. 보라, 《쏘베트 땅》은 43년의 년륜을 새기고있지 않는가. 1940년대말부터 90년대에 이른 오늘까지 단골손님으로 쏘련대사관에 드나들면서 그 잡지의 발간을 주관하여온 비슈와나스였다. 즉 43년간을, 바라캄바거리의 전주수보다도 훨씬 더 많은 년륜을 그는 그 잡지에 새겨왔던것이다. 물론 그 나날은 사회주의와 운명을 같이한 나날이였다. 《쏘베트 땅》은 넓고 풍요하였다. 그 《땅》은 판도리비비마을의 령지보다 더 넓고 풍요하였다. 한 지역, 한 나라만이 아니라 전대륙으로 부단히 자기의 령지를 확장해온 세계적인 《땅》이였다. 그 《땅》의 한복판에 비슈와나스는 서있었다. 3년전. 그날은 《쏘베트 땅》의 창간 40돐을 맞는 명절이였다. 쏘련대사관은 흥성이였다. 대잔치가 열리였던것이다. 각국의 외교사절 50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쏘련대사는 《쏘베트 땅》의 《주인》인 비슈와나스를 격찬하였다. 그 격찬은 무엇을 의미하였던가. 그것은 《쏘베트 땅》을 개간하였고 기름지게 걸구어온 그의 노력에 대한 평가인 동시에 앞으로 그 《땅》을 더 풍요하게 가꾸어주기를 바라는 부탁이였고 믿음이였다. 《쏘베트 땅》창간 40돐을 맞으며 제정한 기념메달과 증서가 맨 처음 그에게 수여되였다. 40이라는 수자가 한가운데에 뚜렷이 부각되여있는 큼직한 메달을 쏘련대사가 그의 앞가슴에 드리워주었다. 그가 받은 증서에는 《〈쏘베트 땅〉사업을 통하여 쏘베트―인디아의 친선, 평화에 특출한 기여를 한 비슈와나스선생에게 수여한다.》라는 글발이 새겨져있었다. 그뿐이랴. 1만딸라의 상금… 각국의 외교사절들이 박수갈채를 보냈었다. 그 박수갈채는 또 무엇을 의미하였던가. 그것 역시 앞으로 《쏘베트 땅》과 같이 자기네의 땅들도 기름지게 하는데 적극 나서달라는 부탁이였고 믿음이였다. 불과 3년전이였다. 그날에 그들은 오늘을 내다보지 못하였단 말인가. 43년간을 기름지워온 그 《쏘베트 땅》이 졸지에 무너져내렸다. 수십년을 걸구어온 사회주의땅이 동유럽에서 련줄련줄 무너져내리는 이 사태를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것인가. 제2차 세계대전후 세계는 미국과 쏘련을 각각 중심으로 하는 량극을 형성하였다. 그해에 유엔창립이 온 세상에 선포되였다. 쌘프랜씨스코에서 유엔헌장이 채택되였던것이다. 어찌보면 이것은 모순적인 일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쏘미 두 최대렬강을 각각 축으로 세계가 둘로 갈라진 그해에 《평화》의 간판을 내건 이런 국제기구가 태여났으니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후의 세계는 일부 중립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들이 이 두 극을 중심으로 쁠럭을 형성하고 자기 발전의 길을 모색해온 세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그런데 오늘 그 하나의 극이 부서졌다. 하나의 세계가 깨여져나간것이다. 이것은 랭전의 종식을 의미하는것이였다. 미국이 이제는 《유일초대국》으로 떠오르게 되였는가. 세계는 법석하였다. 제나름의 주의주장들과 론평들… 다수가 사회주의는 종말을 고하였다는 목소리였다. 부르죠아어용학자들은 때를 만난듯이 사회주의는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떠들었고 수많은 사회주의사상가들과 리론가들도 가치관의 심각한 동요를 느끼였다. 그럴수밖에 없었다. 《물질문명》은 인간에게 여지없이 리념의 공백을 안겨주었고 자기의 기형성을 만천하에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누구나 력사속에 살고있다. 비슈와나스는 묵묵히 이 력사의 사변을 보고있었다. 하늘은 예나 다름없이 푸르렀고 거리의 사람들 또한 자기 생활의 길을 따라 예나 다름없이 흘러가는듯싶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소요는 일어나고있었다. 정치가들과 외교관들, 사상가들과 분석가들은 참으로 동란의 시대를 맞이한것이였다. 동유럽의 사회주의나라 각 대사관들은 란리판이였다. 어찌 그렇지 않을수 있으랴. 모두가 쏘련의 지붕밑에 있었으니… 쏘련의 붉은기가 내려지기 전부터 흐물흐물해지던 동유럽의 사회주의지반은 쏘련의 조락과 함께 졸지에 무너져내리는것이였다.
쏘련이 우산을 쓰면 비가 오지 않아도 같이 우산을 쓴다고 하던 나라들이였으니 그것은 어쩔수 없는 귀결이였다. 그들의 현실은 남의 안경을 끼면 눈을 망친다는 격언을 천하에 증명한셈이였다. 외교관들은 급기야 소환되기도 하였고 새로운 사절들이 또 오기도 하였다. 그들은 언제 비슈와나스에게 작별인사도 할새가 없었다. 아니, 그런것은 생각조차 할수 없었다. 본국의 정치체제가 뒤바뀌고 자기네 대통령들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는 판에 그들의 특사와도 같았던 특명전권대사들이 언제 그 누구를 생각할 겨를이란 있을수 없는 일이였다. 종전에는 대사가 바뀔 때마다 넘겨 소개되던 비슈와나스의 존재를 그들은 이제 더는 필요로 하지 않았다. 비슈와나스는 사회주의나라 대사들의 손에 이끌려 많이도 다녔으며 그 나라들의 최고훈장도 적지 않게 받았었다. 이전 쏘련은 물론 뽈스까, 로므니아, 동부도이췰란드(당시), 마쟈르, 알바니아, 체스꼬슬로벤스꼬(당시), 벌가리아 등… 벌가리아에서는 또또르 쥡꼬브로부터 직접 금메달과 특별증명서를 받은바도 있었다. 그 특별증명서에는 일생동안 사증없이 벌가리아에 드나들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여있었다. 그 많은 메달들과 증서들이 이제는 그 존재를 상실한 이전 사회주의나라들의 낡은 표적에 불과한것으로 되고만것이였다. 붉은기밑에 번성하던 《쏘베트 땅》도, 그의 관계자들도 붉은기와 함께 자취없이 사라지는 판이였다. 이것은 사실 《트리뷴》의 파산때보다도 더 혹독한 운명의 희롱이였다. 《트리뷴》은 일시 곡절을 겪고 다시 솟아났지만 사회주의의 운명에 대해선 그 누가 다시 예측할수 있으랴. 답답한 가슴을 풀어젖히려는듯 비슈와나스는 사무실의 창가림을 올리고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였다. 길 건너 맞은켠에 있는 아싸프 알리의 전신동상이 새삼스럽게 안겨온다. 그는 인디아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영제국주의자들과 싸운 애국투사였다. 그의 위훈을 전하기 위해 1960년대 중엽에 정부에서는 그의 동상을 그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이 거리에 세웠던것이다. 조국과 인민을 위해 생을 바친 사람은 그 인민의 기억속에 남아있다. 쏘련에도 사회주의조국을 지켜 피흘리며 싸운 애국투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오늘을 보자고 그렇게 피흘리며 목숨을 바쳤던가. 착잡한 생각에 잠겨 비슈와나스는 오래동안 사무실에 혼자 있었다. 세계정치정세가 이렇게도 뒤바뀌게 되다니? 비슈와나스는 뒤늦게 《인터라즈》청사를 나섰다. 그레이터캘라슈거리의 자기 집에 도착한 그는 운전사를 보내고 정문앞에 한참동안 그냥 서있었다. 그는 밤거리를 천천히 걷기 시작하였다. 바람을 좀 쏘이고싶었다. 뉴델리에서의 12월은 장마철이 지나가고 걷기에 좋은 날씨였다. 하늘은 쾌청하다. 사람들의 마음도, 나라들의 형편도 저 하늘처럼 쾌청하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걸음은 저도모르게 조선대사관앞에 와 멎었다. 조선대사관은 그의 집에서 불과 1키로메터 남짓한 거리에 위치하고있었던것이다. 조선대사관의 지붕우에서 람홍색공화국기는 여전히 펄럭이고있었다. 여느때보다 더 세차게 펄럭이는듯싶었다. 조선은 쏘련의 지붕밑에 있지 않았다. 모든것을 자체로 뚫고나가는 나라였다. 자력갱생의 나라 조선의 그 정신은 《주체》였다.
이날은 조선이 자주적으로 나간것이 얼마나 정당하며 주체사상이 얼마나 위대한 사상인가 하는것이 온 세상에 말없이 증명된 날이기도 하였다. 비슈와나스는 10여년전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 자기를 접견하여주신 자리에서 하신 말씀이 얼마나 명철한 분석이고 판단이였던가하는것을 오늘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것이였다. 그때에 김일성주석께서는 사회주의적요소가 점차 없어지고있는 나라들에 대하여 퇴조기라고 정확히 찍어 말씀하시였다. 그이의 그 말씀은 하늘의 계시였고 위인의 귀띔이였다. 그이께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오늘을 내다보고계시였던것이다. 정말로 그이는 세상천하를 굽어보시는 인류의 하늘이시였다. 이밤 비슈와나스는 그이의 제자로 태여나 하늘의 계시를 받으며 이 세상을 걸어가는 자신이 돋보이게 생각되기도 하였다. 비슈와나스는 펄럭이는 주체의 나라의 그 기발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왜서인지 람홍색공화국기속에 새겨져있는 그 오각별은 이 시각 더 크게, 더 뚜렷하게 자기의 모습을 세상에 떨치며 하늘을 꽉 채우는듯싶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