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7 회)
9.끝난 곳에 시작이 있다 정열적인 삶의 소유자들에게 있어서는 인생자체가 새로운 일의 련속으로 설계되여있는듯싶다. 비슈와나스는 부지런히 인생길을 걸어갔다. 항상 끝난 곳에서 또 새로운것을 시작하면서… 창조성은 역시 인간의 본성이였다. 주체사상연구보급이라는 성스러운 길에 걸음을 찍어가는 그의 나날은 토론회와 도서집필의 련속이였다. 그는 자기도모르게 토론회 하나를 마치면 더 큰 토론회를 새롭게 준비하는데 달라붙었고 한권의 도서를 끝내면 또 다른 도서를 구상하였다. 그렇게 흘러간 1980년대였다. 빛나는 년대였고 보람찬 년대였다. 이 년대에 주체사상연구보급은 세계적범위로 확산되였다. 아프리카지역 주체사상연구위원회가 시에라레온에서 창립(1985.4.15)되였고 유럽지역 주체사상연구회가 프랑스에서 결성(1985.10.20)됨으로써 모든 대륙들에 지역연구소가 다 조직되여 움직이고있었다. 주체사상이 어떤 사상이기에 국제적인 학술기구까지 존재하며 각 대륙들에 그 연구조직이 다 나와 세계를 들썩이게 하는가. 특히 전유럽적인 주체사상연구조직체의 결성은 유럽사람들은 물론 광범한 세계사회계에서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유럽을《세계의 우수한 사상과 문화의 발상지》로 자부하는 유럽인들이 동방조선에서 창시된 사상을 인정하고 그것을 지역에 연구보급하기 위한 전유럽적조직체를 내온다는것은 결코 범상한 일이 아니였다. 이것은 조선에서 나온 주체사상의 보편성과 견인력에 대하여 웅변적으로 말해주는것이였다. 또한 유럽지역 주체사상연구회를 명망높은 학자인 에드몽 쥬브(연구회 리사장)가 이끈다는것은 사회의 관심을 끌게 하였다. 그는 이미 1966년에 프랑스 정치학 및 법학 국가박사칭호를, 1968년에는 국가정교수학직을 수여받은 오래고 경험있는 학자였으며 대학교수였다. 그리고 프랑스 제3세계연구협회 서기장, 국제법연구프랑스협회 성원, 제3세계년감편찬위원회 위원, 프랑스평화옹호위원회 위원, 국제사회발전전망연구협회 집행위원, 프랑스어로 말하는 작가들의 협회위원장직을 겸임하고있는 유명한 사회활동가로서 프랑스대통령으로부터 나뽈레옹시대에 제정된 레지옹 도네루훈장까지 수여받은 사람이였다. 그는 1989년에는 프랑스 해외과학원 원사칭호를 수여받았다. 1985년 4월 윈에서 열린 주체사상국제연구소 리사회 제2차 집행위원회에서 한스 클레카츠키(오스트리아공화국 전 사법상,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종합대학 공법 및 정치학연구소 소장)가 주체사상국제연구소 리사장으로 선출된것 역시 사회의 주목을 끌고있었다. 국제연구소 초대리사장이 아시아인이였다면 제2대 리사장은 유럽인이 선출되여 맹활약을 하고있다는 그것자체가 주체사상은 어느 한 지역에 한한 사상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인 리념이라는것을 다시한번 실증해주는것이였다. 한스 클레카츠키는 정계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였다. 일찌기 윈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20대의 젊은 나이에 법학박사가 된 그는 누구보다도 자기 조국의 앞길에 대해 깊이 모색하였다. 오랜 세월 수난에 찬 예속의 력사와 함께 자주성을 무참히 유린당해온 자기 조국의 인민들은 그 어떤 지배와 예속도 없는 진정한 자유의 세계를 갈망하였다. 그는 자기 나라 인민의 이 간절한 념원을 실현하기 위해 학문탐구와 정치활동으로 한생을 불태워왔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을 자연과 사회의 온갖 구속과 예속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들에게 자유와 평등, 자주성을 보장해주는 문제를 결코 법으로는 다 해결할수 없다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인간의 자주성을 실현시켜줄수 있는 참된 리념을 찾아 세계의 발전되였다고 하는 나라들을 다 돌아보면서도 찾지 못했던 위대한 사상을 그는
김일성동지의 로작들에서 발견하게 되였던것이다. 그는 조선을 방문하고 인간의 자주성을 완전히 실현할수 있는 인간해방의 위대한 사상에 대해 리론실천적으로 확고히 공감하게 되였다. 이렇게 되여《영구중립》을 국시로 삼고있는 자본주의나라에서 정치활동도 적지 않게 했고 자본주의법학과 정치학을 오래동안 연구해오던 그가 주체사상을 따르게 된것이였다. 한스 클레카츠키가 인생말년에 방향전환을 하여 이처럼 주체사상을 연구보급하는데 앞장서게 되였다는 사실은 서방학자들의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킬만도 한 일이였다. 참으로 벅차게 흘러간 1980년대였다. 이 년대에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지역에 강력한 주체사상신봉자들의 공동체가 형성되였다. 1986년 4월에 오스트리아의 수도 윈에서 진행된 세계의 자주화와 평화를 위한 주체사상국제토론회에 참가하였던 비슈와나스는 한스 클레카츠키와 에드몽 쥬브, 서부도이췰란드(당시)의 녀류작가 루이저 린저를 만나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슈와나스는 그들에게 말하였다. 《유럽은 주체사상을 뒤늦게 받아들였지만 주체사상에 대한 연구와 보급사업은 유럽의 자주화를 실현하는데서 매우 의의있는 사변으로 될것입니다.》 한스 클레카츠키는 이에 전적인 동감을 표시하였다. 《주체사상은 김일성주석께서 유럽에 주신 귀중한 선물입니다. 사실 큰 나라의 지도자라고 하여 반드시 세계적인 지도자로 불리우는것은 아닙니다. 세계의 지도자라면 적어도 정치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운명을 결정하고 그 운명개척의 방도를 밝혀줄수 있는 위인이여야 합니다. 그런분이 바로 김일성주석이십니다.》 에드몽 쥬브는 이렇게 말하였다. 《솔직히 말하여 자존심이 강한 유럽학자들에게서 그 어떤 좋은 사상도 그 권위를 인정받기란 쉽지 않습니다. 나는 학자로서의 량심을 가지고 말합니다. 우리 유럽인들이 진리를 탐구하려면 주체사상을 따라배워야 한다고말입니다.》 루이저 린저 역시 이에 동감을 표시하는것이였다. 《김일성주석께서 창시하신 주체사상의 원리와 결부하여 유럽이 직면한 현실적인 문제인 유럽의 자주화문제를 직접 다룬것은 매우 의의있는 일입니다.》 루이저 린저가 그 어떤 사상이나 그 사상의 창시자에 대하여 격찬한다는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늘 비평만을 쓰는 그를 가리켜 세상사람들은 《부리사나운 계절조》라고 부르고있었던것이다. 루이저 린저는 제1차 세계대전시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구의 서반구와 동반구에서 일어난 사변들을 모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목격한 비판적사실주의녀류작가였다. 평화와 민주주의를 주장하며 무소속문필가로 된 그는 예민한 안목과 신랄한 비판력으로 자기가 쓴 책들이 22개 나라말로 번역출판되고 두번에 걸쳐 세계문학상을 받던 기쁨앞에서도 조금도 인상을 달리하지 않던 《랭랭》한 녀자였다. 도이췰란드를 떠나 로마에 거주지를 정하고 5대륙을 다 다녀보며 적지 않은 국가수반들과 유명무명의 정치지도자들을 만나본 그에게는 그의 붓이 말해주듯이 늘 불만의 대상은 많았어도 존경이 가고 탄복되는 위인은 없었다. 그는 서부도이췰란드(당시)와 남조선괴뢰들사이에 조작된 이른바 《련대위원회》고문단성원으로 남조선에 간적도 있었다. 그러던 그가 조선을 방문하여 김일성동지를 만나뵙고는 흥분과 감격을 안고 이 세상을 웃으며 활보하는 새 인간으로 태여났던것이다. 그때 그의 정신상태가 얼마나 앙양되여있었는가 하는것은 15개 장으로 된 《조선방문기》를 한달도 못되는 기간에 탈고한 사실에서도 알수 있었다. 그는 문필로 인생의 봄을 맞이하였고 문필로 황혼기도 맞이한 자기가 그 글을 쓸 때처럼 흥분되고 정열에 북받쳐보기는 처음이였다고 말하였다. 그는 그 글의 마지막장 《김일성》이라는 제목에서 자신은 김일성주석을 만나뵙게 됨으로써 리론과 실천에서 사회주의를 인정하게 되였다고 하면서 《위대한 주석의 사상과 실천은 제3세계가 선택하여야 할 길이다. 서방은 적극적으로 그분과 사업하여야 할것이다. … 김일성주석이 계심으로 나는 인류의 미래를 확신한다.》라고 호소하였다. 루이저 린저는 신자였다. 그는 사람이 곡절많은 한생을 리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자면 그 무엇인가를 믿는 마음의 기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였다. 그는 《사람들이 정신속에서, 진리속에서 하느님을 흠모할》것을 바랐고 《실천적인 그리스도의 박애》를 념원하였었다.
그러던 그의 심장속에 《김일성주석께서는 자신께서 원하시건 원치 않으시건 신적존재로 추대되신분》이라는 신념이 자리잡은것이였다. 그는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께 기도는 드렸어도 꽃다발을 드린적은 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은 실제적인 행복을 준 일이 없기때문입니다. 나는 인류에게 실제적인 자유와 평화의 길을 밝혀준 김일성주석께 뜻깊은 백두산의 꽃을 꺾어 꽃다발을 엮어 삼가 드리였습니다. 나는 이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간주하고있습니다.》 비슈와나스는 이들의 말을 들으며 김일성주석이시야말로 만민을 끌어당기는 위대한 힘을 지니신분이시며 그이께서 내놓으신 주체사상은 인류의 가장 위대한 사상이라는 확신을 새삼스럽게 하게 되는것이였다. 제노라하며 세상을 돌고돌던 모든 사람들이 조선을 방문하고 김일성주석을 한번 만나뵙기만 하면 이들처럼 주체의 인간으로 이 세상에 새롭게 태여나는것이였다. 비슈와나스는 이처럼 해마다 진행되는 주체사상국제토론회들에 빠짐없이 참가하며 보다 많은 세계의 인사들과의 뉴대를 두터이해가는 그 바쁜 나날속에서도 집필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도서 《위대한 수령의 자제분》(뉴택크출판사. 1986)과 《향도성―김정일》(뉴택크출판사. 1988)을 집필하여 출판발행하였던것이다. 1988년말에 비슈와나스는 필리핀에 가게 되였다. 인디아정부에서는 마닐라에서 진행되는 국제과학토론회에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뻗치고있는 《인터라즈》총사장을 나라의 대표로 파견하였던것이다. 그 토론회는 나라들사이의 과학기술발전을 서로 도모하자는데 목적을 둔것이였다. 그 토론회에서 남조선《대표》는 자기네의 과학기술발전에 대하여 장황하게 력설하였다. 그의 토론을 다 듣고난 비슈와나스의 감정이 좋을리 없었다. 이윽고 인디아의 차례가 되여 그는 연단에 나섰다. 나날이 발전하고있는 인디아의 새로운 과학기술면모에 대하여 통보하고난 그는 남조선 《대표》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그가 한 연설을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이럴 때 보면 그 역시 그 무엇에도 구애되지 않는 《정의의 날카로운 부리》였다. 《물론 남조선의 기술은 당신이 말한것처럼 발전하였다고 하자. 하지만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집이 없어 길가에서 방황하고있으며 빈민굴에서 살고있다. 또한 수많은 매음현상이 있다. 그뿐이 아니다. 돈만 있으면 총을 사서 살인을 하고 강도질을 하고있지 않는가. 대답해보라. 나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면 거기에 대하여서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당신이 한번 말해보라.》 비슈와나스는 부리부리한 눈길을 남조선 《대표》에게 던지며 마음속의 하고싶은 말을 꺼리낌없이 해나갔다. 정면으로 주는 면박이였다. 세계의 긴장한 시선들이 연단에 선 비슈와나스와 객석에 앉아있는 남조선 《대표》사이를 부단히 오갔다. 남조선 《대표》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갈 자세였다. 인디아의 대표인 《인터라즈》총사장의 웅글고 열기띤 목소리는 청중의 머리우에 높이 울려퍼졌다. 《과학과 문명을 사랑하는 세계의 선량한 마음들이 모인 이자리에서 나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알리고싶습니다. 지난 시기 김일성주석각하께서는 평양에 온 남조선의 한 〈대표〉에게 세가지문제에 대하여 말씀하시였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북반부에 많은 원료를 가져가고싶은대로 가져가라고 하신것입니다. 둘째로는 남조선의 바다에 고기가 없으면 북조선의 바다에 와서 물고기를 마음대로 잡아가 남조선의 많은 실업자들에게 먹이라고 하신것입니다. 셋째로는 북조선에는 아주 훌륭한 관개체계가 수립되여있는데 그에 대한 기술이 필요하면 가져다 관개체계를 수립하라고 하신것입니다. 그런데 그자는 담화석상에서는 대단히 훌륭한 일이라고 긍정하고 돌아가서는 다 거절하고 북조선의 아름다운 명승지들에 호텔이나 지어놓고 다른 나라의 관광객들을 많이 받으면서 돈벌이를 하는것이 어떤가고 제의해왔습니다. 그들이 왜 그러했겠습니까? 그것은 남조선인민들이 공화국북반부에 들어와보고 사회주의제도가 좋다는것을 알면 돌아가서 자기들을 뒤집어엎을가봐 겁나하였기때문입니다. 나라의 통일과 민족을 제일로 귀중히 여기시는 김일성주석께서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으시였습니다. … 여러분! 이 세상에 김일성주석과 같으신분이 여러명 있다면 세계에는 평화와 번영만이 있을것입니다.》 비슈와나스의 토론이 끝나자마자 회의에 참가한 수천명의 사람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 어느새 꼬리를 사렸는지 남조선의 《대표》라는자는 보이지 않았다. 가소로운 《대표》였다. 그래도 그자는 한때 명색이 《대통령》이였던 최규하였다. 물론 박정희사살후 전두환세력에 의거하여 실권없이 몇개월간 《대통령》자리에 올라있었지만. 필리핀에서 돌아온 비슈와나스는 이 사실에 대해 정부에 보고하였다. 정부의 대표로 이 회의에 참가하였던것만큼 그는 이 기회를 남조선집권자들을 폭로하는 좋은 기회로 삼았다. 당시 수상은 라지브 간디였다. 인디라 간디녀사는 1984년 10월 31일 아침 친위대성원들인 2명의 씨크교도들에 의하여 암살당하였다. 씨크교도들은 자기들의 폭동을 진압한 인디라 간디에게 앙심을 품고있었던것이다. 라지브는 이미전에 정계에 나서지 않을것이라고 말한바 있었다. 하지만 국민대회당의 의원들은 라지브를 새 지도자로 선거하고 새로운 내각을 발족시켰던것이다. 어머니의 뒤를 이은 라지브 간디는 나라의 자주적발전을 위해 노력하고있었다. 이즈음 베를린장벽이 붕괴되는 놀라운 사변이 일어났다. 장벽은 1961년에 구축한것이였다. 동부로부터 서부에로의 자유로운 래왕을 금지하기 위해 장애물과 철조망으로 길을 차단하고 그다음 콩크리트블로크로 쌓아놓았던 이 장벽이 28년만에 붕괴되는 화면은 온 세상에 공개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대국들에 의해 분렬되였던 도이췰란드가 40여년만에 통일된것이다. 1989년 11월에 일어난 이 사변을 계기로 세계정세는 크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세계는 법석 떠들었다. 동유럽의 나라들에서 개혁, 개편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져갔다. 사회주의진영에 분렬구가 터진것이였다. 하지만 비슈와나스의 마음은 1980년대의 이 령마루에서 줄곧 자주위업의 새 년대기에로만 이어지고있었다. 그는 1992년을 생각하고있었다. 김일성주석과 김정일동지의 탄생 정주년을 맞는 가장 뜻깊은 해였다. 무엇인가 선물을 마련해야 하였다. 력사에 전해지고 인류에게 남을만한 가장 의의있고 뜻깊은 선물을! 그는 며칠을 두고 생각하였다. 내가 마련할수 있는 선물은 무엇일가. 그의 생각은 만민의 하늘의 뜻을 정립하여 세상에 남기는것보다 더 신성한 일은 없을것이라는데 미치였다. 조선에도 세계에도 김일성주석에 대한 책은 수백수천권에 달하지만 그이에 대한 백과사전은 없지 않는가. 백과사전은 영원히 보존되여있을것이다. 작은 책은 한번 읽고 버릴수도 있는데 사전만은 누구나 보존하는것이다. 그렇다, 김일성주석에 대한 백과전서를 만들어 영원히 보존되게 함으로써 태여나고 태여나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읽게 하여야 한다. 그이에 대한 백과전서의 편찬이야말로 김일성주석의 제자로서, 주체사상신봉자의 첫 세대로서 내가 동시대인들과 후대들을 위하여 해야 할 성스러운 사업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생각한 그는 시작전부터 흥분되였다. 그 누구에게 물어볼것도, 승인받을것도 없었다. 이것은 자기의 진정이자 전세계 주체사상신봉자들의 한결같은 마음일것이였다.
그가 알고있는데 의하면 19세기에 《대영백과사전》이 나온 후 그와 맞먹는 큰 사전은 없었다. 더더구나 인물백과전서는 나온적이 한번도 없었다. 비슈와나스는 세상에서 처음으로 되는 위인의 이 인물사전을 가장 훌륭하게 완성하여 세계의 이름있는 도서관들과 대학, 연구소들에 보관되게 하고싶었다. 비슈와나스는 자기의 이 생각을 에쓰. 피. 쵸프라에게 말하였다. 그는 절대찬성이였다. 《인터라즈》의 창립당시부터 그 경영활동에 크게 기여해오고있는 에쓰. 피. 쵸프라는 책이 완성되면 그 인쇄공정은 자기가 책임지고 하겠다고 하는것이였다. 리윤에 앞서 인간의 지성, 인간의 지향을 더 귀중히 여기는 이런 벗들이 있어 《인터라즈》는 오늘까지 자기 일로를 무난히 걷고있는것인지도 몰랐다. 에쓰. 피. 쵸프라는 《인터라즈》와 더불어 오랜 나날을 서로 리해하며 함께 손잡고오는 귀중한 벗이였다. 비슈와나스는 《김일성백과전서》발행계획을 1990년 4월 에꽈도르에서 진행된 주체사상국제연구소리사회 제9차회의에 상정시켰다. 《나는 김일성주석각하의 탄생 80돐을 맞으며 〈김일성백과전서〉를 발행할것을 제의합니다. 그리고 1992년 2월에는 주체사상의 계승자이신 김정일각하의 탄생일을 맞으며 뉴델리에서 주체사상국제토론회를 열것을 제의합니다.》 그의 이 두가지 제의는 모든 리사들의 찬동을 받았다. 이노우에 슈하찌는 이렇게 말하였다. 《비슈와나스선생의 발기는 우리를 크게 고무하고있습니다. 〈김일성백과전서〉의 발행과 주체사상국제토론회는 위대한분들께 드리는 가장 큰 선물로 될것입니다.》 이노우에 슈하찌는 이 회의에서 국제연구소 리사장으로 선출되였던것이다. 그는 3대 리사장이였다. 국제연구소가 창립되여 이날까지 걸어온 자랑스러운 로정을 바로 그가 계속 이어가야 했다. 클레카츠키는 년령상 명예리사장으로 되였다. 비슈와나스는 세계의 동료들과 함께 1992년의 이 뜻깊은 선물을 준비하기 위한 사업에 새롭게 착수하였다. 《김일성백과전서》를 편찬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피부색과 언어, 신앙과 정견을 달리하는 수많은 정치가들과 학자들, 인민들이 이 사업에 자기를 참가시켜줄것을 열렬히 희망해왔다. 곧 국제적인 편찬위원회가 조직되였다. 일본의 이노우에 슈하찌교수와 프랑스의 에드몽 쥬브교수, 에꽈도르의 알바 챠베스박사를 비롯한 세계의 저명한 인사들과 인디아학계에서 이름있는 학자들 45명이 선발되여 참가하였다. 이 사업에 직접 참가하지 못한 여러 나라 정치가들과 작가, 예술인들은 비슈와나스에게 1만여통에 달하는 편지와 전보문들을 보내여왔다. 그는 김일성주석을 인류의 태양으로, 주체사상을 참다운 인간위업의 찬가로 칭송한 이 편지와 전보문들을 그대로 백과전서의 편찬자료로 리용하였다. 그 나날은 김일성주석을 하늘로 우러르는 진보적인류의 신뢰가 얼마나 절절한것인가를 다시한번 절감하는 나날이였다. 김일성동지의 접견을 여러차례 받으며 느낀 그이의 위인상과 그이의 로작들에 새겨져있는 심오한 철학사상, 세계의 자주화위업에 쌓아올리신 그이의 불멸의 업적들을 전서에 빠짐없이 담으려고 그는 노력하였다. 《인디안타임스》주필로 어언 칠순을 눈앞에 바라보게 된 나이였지만 그때 그는 김일성주석은 참으로 글로나 말로써는 도저히 그려낼수 없는 하늘같은분이시라는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것이였다. 그럴수록 그는 긍지감을 느꼈다. 바로 그런 위인에 대한 책을 전서로 남길데 대한 자기의 발기가 참으로 잘한것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것이였다. 그는 밤가는줄 모르고 집필하였으며 또 투고되는 글들을 편집해갔다. 앞일을 설계하는 사람은 젊음에 넘쳐 살기마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