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0 회)
2. 주체의 봄을 위하여 몇년만에 다시 만나는 친구들인듯 비슈와나스는 무케르지일행을 뜨겁게 포옹하였다. 하긴 《유토피어》세계에 처음으로 가서 새롭게 탄생하고 오는 그들이였으니 그럴만도 한것이였다. 비슈와나스는 기뻤다. 조선을 방문하였던 대표단의 전원이 김일성주석을 만나뵙고 새 사람이 되여 돌아온것이 기뻤다. 주체사상의 조국을 방문하고 그 사상의 창시자로부터 축복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온 그들의 얼굴마다엔 희열이 한껏 어려있었다.
그들모두에겐 힘이 솟구쳤고 포부와 희망이 나래쳤다. 인류의 대성인으로부터 정신적계시를 받아안고 한껏 흥분되여 조국에 돌아온 이들을 태우고 비슈와나스는 차를 몰아갔다. 실지 이들보다 더 흥분된것은 비슈와나스였다. 그의 심장은 웨치고있었다. 보라, 나 하나만이 아니지 않는가?! 만나뵙는 사람모두가 그러한것이다. 누구나 그이를 한번 만나뵙기만 하면 새롭게 부활하는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이를 만나뵈오면 태양의 그 인품에 스스로 반하여 모든것을 터놓으며 한생을 따라가게 될것이다. 때문에 더 많은 주체사상신봉자들을 키워야 했다. 그리하여 그들모두를 그이앞에 내세워야 했다. 그러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새롭게 부활하여 세상은 자기의 모습을 새로운 봄빛으로 변모하게 될것이였다. 주체의 봄을 위하여! 그날을 향해 지금 비슈와나스는 바쁘게 가고있는것이였다. 비슈와나스는 차를 그레이터캘라슈거리로 몰아갔다. 그 거리에는 비슈와나스의 저택이 있었다. 모두는 비슈와나스의 집으로 간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차는 그의 집을 그냥 지나쳤다. 그들은 조선대사관으로 간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집옆에 바로 조선대사관이 있었던것이다. 그러나 차는 조선대사관을 지나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한 단층집마당으로 쑥 들어가 서는것이였다. 아담하게 꾸려진 독채였다. 비슈와나스의 집은 522번지인데 여기는 502번지였다. 비슈와나스의 집과 조선대사관과 나란히 있는 건물이였다. 《자, 들어가 집구경을 좀 하세.》 비슈와나스는 설명없이 이들을 집안으로 떠밀었다. 일행은 영문을 모르고 집안을 두루두루 살펴보았다. 큰방이 4칸이나 되고 위생설비가 갖추어진 정갈한 집이였다. 모두가 이만하면 괜찮은 건물이라고 하였다. 그제서야 비슈와나스는 말하였다. 《이 집은 내가 세를 낸 집이네. 물론 쓰고싶을 때까지.》 《?》 《지역연구소를 개설하려면 우선 건물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일행은 탄복하였다. 저마다 비슈와나스의 손을 잡았다. 모든 일을 미리미리 설계하며 빈틈없이 조직해가는 그가 고마왔고 날이 갈수록 돋보였다. 시작부터 그랬듯이 그는 주체사상을 선전하는 일에 심혈을 들부었으며 언제나 동료들을 내세웠고 말없이 뒤에서 모든 일을 조종해갔다. 웅심깊은 사람만이 그렇게 할수 있는것이였다. 그는 멀리 앞을 내다보고있었다. 믿음직한 그런 길잡이, 그런 조직자가 항시 곁에 있다는것은 인디아의 주체사상신봉자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고무로 되며 또한 기쁨이 아닐수 없었다. 그들은 다같이
김일성동지의 제자로 태여난 인디아의 주체사상신봉자들이였다. 그들은 며칠을 두고 토론하였다. 비슈와나스는 이미 지역연구소의 기구와 사명 그리고 창설에서 제기되는 이러저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안을 작성해놓고있었다. 학회성원들은 그것을 놓고 실무적인 합의를 거듭하였다. 그들은 아시아지역 주체사상연구소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 32돐이 되는 오는 9월 9일을 계기로 그 전야에 창립하기로 락착하였다. 지역연구소창립을 보다 현실적이고 의의있게 하기 위하여 지역적인 주체사상토론회를 크게 조직하고 그끝에 창립대회를 가지기로 하였다. 시간이 없었다. 9월 9일까지는 이제 2달이라는 시간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모든것은 사상의식이 결정한다는것을 이미 잘 알고있는 주체사상신봉자들이였다. 각기 분담이 조직되였다. 그것을 안고 그들은 바삐 뛰기 시작하였다. 비슈와나스는 우선 주체사상국제연구소와의 련계를 취했다. 그것은 지역연구소는 국제연구소의 산하조직으로 되기때문에 상급조직과 긴밀한 련계를 가지고 세계적분위기를 마련하자는것이였다. 그는 또한 정부와의 사업에 들어갔다. 당당히 나라의 승인을 받고 새로 나오는 조직을 정부에 등록하기 위해서였다. 고빈드는 방글라데슈, 파키스탄을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돌면서 주체사상연구조직들을 내오는 사업을 도와주었고 연구소조모임들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다시말하여 그는 지역토론회준비와 함께 지역연구소를 내오기 위한 지반을 닦아나가는 사업을 내밀고있는것이였다. 무케르지는? 파트나시의 정든 집으로 돌아간 그는 안해 로밀라와 마주앉았다. 《여보, 나는 아무래도 부총장직을 내놓아야겠소.》 뜻밖의 말에 로밀라는 의아해하였다. 《그건 왜요?》 이미 모든것을 결심한 무케르지는 서슴없이 말하였다. 《내 량심이 그것을 가리키기에 말이요.》 《아니, 그러면 우린 어떻게 살아요.》 《주체는 내 생명이고 인류의 생명이요. 그길을 따라가면 반드시 살게 될거요.》 《…》 《당신도 읽지 않았소. 김일성주석각하의 략전을 말이요. 뒤늦게나마 나는 위대한 그분이 내놓으신 사상을 받들고싶소.》 무케르지의 말은 절절하였다. 고등교육을 받은 로밀라가 그 말을 리해하지 못할수가 없었다. 그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남편을 뜨거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무케르지는 토론회준비위원회 위원장의 중임을 맡아안고 전반사업과 함께 모든 문건들의 준비와 심의를 보기로 하였던것이다.
다음날 무케르지는 비상한 결심을 안고 대학의 넓은 강당의 연단에 나섰다. 지금 그의 심장은 생애에 일찌기 없었던 커다란 활력을 안고 세차게 끓어번지고있었다. 그럴수록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위대한 사상의 진수를 너무도 늦게야 깨달은것때문에 수많은 제자들을 시대의 흐름에 좀더 이르게 합류시키지 못한 책임감이 무겁게 자리잡고있었다. 전교의 학생들은 숨을 죽이고 앉아 언제나 정열적이고 류창하던 부총장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기를 초조히 기다리고있었다. 《학생들,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고 김일성주석각하를 만나뵙는 영광을 지니였습니다.… 나는 이 며칠동안에 자신이 한생을 바쳐 탐구해온 모든것을 주체사상으로 재검토하였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주체사상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재생의 길을 걸을것을 굳게 결심했습니다. … 주체! 주체만이 우리가 갈 길이고 주체사상만이 우리가 지녀야 할 유일한 세계관이라는것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연단을 내리려는 무케르지를 둘러싸고 학생들은 연방 의혹에 찬 질문들을 들이댔다. 그는 연단에 다시 올라 주체철학의 근본원리를 해설하면서 주체철학은 인간의 본성과 세계의 지배자, 개조자로서의 그의 지위와 역할을 새롭게 밝힘으로써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최상의 경지에 이르게 하였다는데 대하여 론증하였다. 학생들은 환성을 올렸다. 이 연단에 오르면서 무케르지는 40년동안을 이 대학에서 세계철학사를 론하고 정치경제학을 론하던 자기의 한생을 돌이켜보았다. 그 나날 그는 명예도 얻었고 직위도 얻었다. 하지만 그는 랭철한 판단을 내리였다. 나의 존재, 나의 명예, 나의 권위가 문제로 되여서는 안된다. 주체사상은 나 한사람에게만 속하는것이 아니라 전인류에게 속하는것이다. 인류를 해방하는 길에 내 무엇을 주저하랴. 그는 한생을 번지며 살아온 책장을 덮었다. 그는 간지스강물결로부터 태평양의 파도에까지 온 지구를 뒤덮어가는 주체의 노래, 시대의 새 노래를 듣고있었다. 이렇게 되여 무케르지는 자기의 지난날과 단호히 결별하였던것이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인생의 엄청난 결단이였다. 수십년간을 쌓아올렸던 《사상루각》을 깡그리 헐어버리며 파트나종합대학의 으리으리한 층계를 내리는 부총장을 수많은 교수들과 학생들이 바래웠다. 이 경이적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는 동시에 주체사상에 대한 현실적인 사고를 하게 하는 계기로 되기도 하였다. 무케르지는 배웅하러 따라나오는 교수들과 제자들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며 절절히 말하였다. 《주체는 인류의 생명이요. 인류는 반드시 주체의 길로 가야 하오. 이것은 진리요.》 그의 말은 길지 않았지만 무게있게 사람들의 심장을 울려주었다. 진정한 학자만이 내릴수 있는 용단이고 웨침이였다. 주체사상은 그에게 새로운 출발을 내렸다. 그는 60나이에 삶의 보금자리를 폈던 비하르주에서 뉴델리로 완전히 집을 옮겨왔다. 그의 앞길에 문득 나무들이 푸르러졌고 하늘이 더 높이 건듯 들리웠으며 세계는 황홀하게 빛나기 시작하였다. 봄을 맞은 자연이 생기를 회복하듯이 그의 온몸엔 새로운 힘과 정열이 솟구쳐올랐다. 참으로 강렬한 인간들이였다. 비슈와나스부부는 무케르지부부를 뜨겁게 맞이하였다. 주택이 마련될 때까지 무케르지부부는 지역연구소 청사로 장만한 집의 한방에서 살기로 하였다. 학회성원들의 이런 완강한 투쟁과 노력이 마침내 열매를 맺는 력사적인 시각이 왔다. 1980년 9월 6일. 뉴델리에서는 주체사상에 관한 아시아지역 토론회가 성대히 개막되였다. 토론회장면을 보도한 인디아신문들을 보고 세계는 감탄했다. 그것은 토론회가 국회회의장에서 진행되였으며 그 회의장 500석에 참가자들이 꽉 차넘치였기때문이다. 그 회의장은 국회청사와 잇닿아있는 마부랑카르(인디아 첫 국회의장의 이름)회의장이였다. 원래 그 회의장은 국회의원들이 아니면 쓰지 못하게 되여있었다. 비슈와나스는 주체사상연구학회에 있는 적지 않은 국회의원들을 내세워 그들의 이름으로 그 회의장을 당당히 리용하였던것이다. 정계에 그의 인맥은 뻗어나가고있었다. 이 대회에서 무케르지가 한 보고 《주체사상은 자주위업의 승리를 앞당기는 위대한 사상》은 오늘도 사람들의 기억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토론회에서는 주체의 태양이신 김일성주석을 높이 칭송하였으며 그이께 삼가 올리는 편지가 만장일치로 채택되였다. 주체사상의 열풍은 대륙을 휩쓸고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속에서 토론회 2일날인 9월 7일 드디여 아시아지역 주체사상연구소가 자기의 창립을 온 세상에 선포하였다. 얼마나 고대해온 이 순간인가. 비슈와나스의 가슴은 한없는 기쁨으로 설레였다. 이 시각 그의 마음은 위대한 스승에게로 달려가고있었다. 그전해 9월 15일 김일성동지의 접견을 받은 석상에서 비슈와나스는 삼가 말씀을 드리였다. 《주석각하! 저는 앞으로 주체사상에 관한 아시아지역 토론회를 열고 거기에서 아시아지역 주체사상연구소창립을 선포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주석각하의 주체사상을 아시아지역에서 더 빨리, 더 잘 보급할수 있게 될것입니다.…》 지금 비슈와나스의 가슴속에 꽉 차흐르는것은 위대한 스승께 올린 결의를 드팀없이 수행했다는 그 환희의 감정이였다. 돌이켜보면 조선과의 외교관계가 설정되기 이전부터 조선령사관에 혼자 드나들면서 접촉하고 공감하기 시작한 주체사상이였다. 하지만 오늘은 주체사상을 따르는 길에 나라와 대륙의 많은 사람들이 대오를 이루어 발걸음을 맞추게 되였고 그 연구조직들이 세계적범위에서 날을 따라 늘어나고있으니 이것은 분명 삶의 기쁨이 아닐수 없었다. 지역연구소 창립대회에서는 마니크 랄 쉬게스타(네팔조선친선협회 부위원장)가 《아시아지역 주체사상연구소의 창립은 자주, 독립, 새 사회건설을 위한 아시아인민들의 투쟁을 힘있게 고무추동할것이다.》라는 제목의 보고를 하였으며 토론회에 참가하였던 많은 나라의 대표들이 연설하였다. 대회에서는 아시아지역 주체사상연구소창립선언 《주체사상을 연구보급하기 위한 사업을 활발히 벌려 시대와 인민앞에 지닌 숭고한 사명을 다하자!》가 만장일치로 채택되였다. 창립대회에서는 무케르지가 연구소 리사장 겸 소장으로, 고빈드가 서기장으로 선출되였다. 연구소의 지도기관은 리사회였는데 리사들로서는 지역의 각 나라에서 1명씩 선출되였다. 파키스탄에서는 아브둘 말라크가 리사로 선출되였다. 그는 이미 몇해전에 파키스탄조선친선협회 카라치지부를 결성하고 그 서기장으로 활약하고있었다. 그는 또한 파키스탄아시아아프리카인민단결기구 카라치위원회 서기장이기도 하였다. 인간은 자기의 성장을 느낄 때 인간으로서의 최대의 보람을 느끼게 되는것인지도 모른다. 무케르지는 한 나라 한개주의 학회 위원장으로부터 수십개나라가 자리잡고있는 세계에서 제일 큰 대륙의 연구소 《사령관》으로 성장하였고 고빈드는 한 나라의 학회 회원으로부터 제일 큰 그 대륙의 연구소 《참모장》으로 성장한것이다. 아브둘 말라크 역시 한 나라의 범위에서 벗어나 대륙의 연구조직의 사업에 참여하는 《참모》로 승진한것이다. 그들자신도 기뻐했지만 비슈와나스의 가슴은 한껏 부풀어올랐다. 모든것이 계획대로 실현되여가는 기쁨이란 이루 말할수 없는것이였다. 비슈와나스는 가슴뿌듯이 삶의 보람을 느끼고있었다. 아시아지역주체사상연구소가 창립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디아인민들은 물론 아시아와 세계의 수많은 진보적인사들로부터 축하편지와 축전들이 날아오기 시작하였다. 당시 대륙을 대표하는 주체사상연구소로서는 이미 1978년 2월 18일에 꼬스따리까의 수도 싼 호쎄에서 창립된 라틴아메리카지역연구소가 있었고 아시아지역 연구소가 2번째였다. 세계인구의 근 50프로가 살고있는 아시아대륙을 대표하는 주체사상연구소의 창립은 세계의 자주화위업실현에서 큰 의의를 가지는 사변이였다. 연구소청사의 정문에는 힌두어와 영문으로 쓴 글발이 눈부시게 안겨왔다. 《아시아지역 주체사상연구소》 비슈와나스는 정부에 연구소를 공식적으로 등록하고 이 현판을 내걸었던것이다. 그것이 비슈와나스의 성격이였고 일솜씨였다. 원래 인디아에서는 주택지구에 공식사무소를 두지 못하게 되여있었는데 비슈와나스가 앞으로 옮길것을 전제로 하면서 완강히 내밀어 정부의 허가를 받아냈던것이다. 구속없는 자유란 법률의 보호를 받아 이루어지는것이였다.사실 인간의 세계에는 법이외의 자유가 없는것이다. 다시말하여 자유란 법적허가밑에서 행동하는 권리라고 할수 있을가. 비슈와나스는 자기가 정의로운 일을 한다고 생각하였기때문에 모든것을 떳떳이 정부의 승인을 받고 세상에 소리를 내면서 하고싶었던것이다. 비슈와나스는 앞으로 사무소를 공공건물에 따로 내올 작정이였다. 하지만 현재는 우선 조직을 내오고 일할만한 곳을 마련하여 사업을 시작하는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였던것이다. 물론이다. 시작이 절반이라고 모든 일은 시작을 빨리 떼고 볼판이였다. 이렇게 아시아지역 주체사상연구소는 탄생하였다. 인디아의 많은 사람들이 직업적으로 위대한 사상을 연구보급하는 길에 나서게 되였다. 비슈와나스! 그는 주체의 씨앗이 뿌려져 나날이 무성해가는 넓고넓은 그 숲의 한가운데서 줄기줄기 뿌리를 뻗어내리는 거목처럼 말없이 서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