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9 회)
제 3 편
제 3 장
1
6월 하순, 대지는 한껏 신록에 푸르렀다. 논판들에는 모살이를 하고난 벼포기들이 거름독이 올라 검푸르게 우줄우줄 자라며 아지를 치고있었다. 신의주교외의 벌판을 지나 의주로 가는 도로를 따라 몇대의 승용차가 달리고있었다.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차창밖을 내다보시였다. 열려진 차창으로 훈훈한 바람이 불어왔다. 벼포기들이 해볕에 춤추는듯 한 벌판을 끼고 달리던 차는 나지막한 등성이의 강냉이밭을 량쪽으로 헤가르며 쾌속으로 미끄러져간다.
벌써 정초부터 쉬임없이 현지지도의 길에 나서신 그이께서는 흥남에 가셨다가 평양으로 올라오시여 중요한 회의들을 지도하시였으며 그리고는 다시 저 멀리 길주의 영예군인들을 찾으시였고 백암령을 넘으시여 량강도안의 사업을 현지에서 지도하시였다. 련이어 당중앙위원회 6월전원회의를 평양에서 소집하시고 며칠후에는 최고인민회의 제2기 3차회의에서 중요한 연설을 하시였다. 그런 후에 지금 평안북도에 오시여 여러 부문 사업을 현지에서 지도하시는중이였다. 중요한 회의들이 련속 진행되고 현지지도의 길은 끊임없이 이어지고있었다.
도로표식비는 의주까지 4키로메터를 가리켰다.
경애하는 김일성동지께서는 문득 운전사를 향해 말씀하시였다.
《차를 세우시오.》
그이께서는 앞쪽으로 걸어가는 한 로인을 발견하신것이였다. 로인은 등에다 괴나리보짐같은것을 지고 남자용넙적고무신우에는 뽀얗게 길먼지가 올라있었다.
웬 영문인지 몰라 눈이 둥그래지던 로인이 벙거지처럼 전이 처져내린 물바랜 밤색모자를 급히 벗는것이였다.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를 알아본 로인이였다.
수령님께서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로인에게 물으시였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장군님… 전… 저… 의주까지 갔다가 거기서 뻐스를 타구…》
《의주라면 거기까지 같이 가십시다. 거기서 또 어디로 더 가십니까?》
로인은 부관쪽을 바라보며 말해야 되겠는지 망설이는 눈치더니 대답을 재촉하시는듯 한 수령님의 눈길을 우러르며 말했다.
《예, 거기서 뻐스를 타구 청수까지 갑니다.》
《그럼 우리와 같은 곳으로 가는구만요. 어서 차에 타고 같이 가십시다.》
《예?…》
황송해서 어쩔줄 몰라하는 로인을 부관이 뒤차로 데려가려 했으나 그때 수령님께서는 손을 들어 만류하시며 말씀하시였다.
《내가 로인님과 같이 타구 가겠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부관이 열어준 문으로 로인을 먼저 태우신 다음에야 자신께서 차에 오르시였다. 그러시고는 로인에게 물으시였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먼길을 떠났습니까?》
《예, 그저 좀 다녀올 일이…》
당황해하고 송구스러워하는 로인의 마음을 풀어주시려는듯 김일성동지께서는 편안히 앉으라고 이르시다가 《가만, 등에 진건 벗어서 이쪽에 놓으시고… 별로 크지도 않은데 좌석에 그냥 놓아두십시오.》라고 하시였다.
그제야 로인은 수령님께서 하신 물음에 제대로 대답을 올리지 못했음을 깨달았는지 이렇게 말했다.
《사실은 청수에 아들녀석두 그렇구… 조카사위벌되는 사람이… 리승기박사밑에서… 돌에서 실을 뽑는다구 하면서 너무 수고하길래…》
《그래, 이게 무엇입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만져보시다가 자그마한 토기단지를 손으로 감촉하시였다.
로인이 대답했다.
《토봉꿀입니다.… 과학자들이란 죽을둥살둥 모르면서 제몸은 통 돌볼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옳습니다. 그런 사람들이지요.》
김일성동지께서는 미소를 지으시더니 짐짓 이제와는 다른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이번에 가서 단단히 혼 좀 내우십시오. 몸이 쇠약해지면 과학두 무엇두 다 못한다구 말입니다.… 그래서 로인님이 직접 이번길에 곁에서 지켜보며 이것으루 몸보신을 잘 시키십시오.》
그러자 이제껏 앉을 자리에 못 앉은것 같아 오밀조밀해하던 로인은 마음이 풀려 제법 성수가 나서 말하는것이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나두 협동조합에 나가 아직 일하는 몸이구 요새는 강냉이애벌김이 바쁜데 아 글쎄 아들녀석이 신접살림을 펴구 이사를 했지, 또 그녀석 말이 제 사촌매부되는 사람이 몸을 너무 돌보지 않으니 나더러 와서 좀 신칙해달라구 편지에 성화가 이만저만 아니올시다.… 한데 우리 애녀석은 전쟁때 리승기박사네 집에서 신세를 지며 실험공일을 하다가 대학엘 갔댔습니다. 그녀석이 대학을 졸업하구 딴데루 가려는걸 알구 저두 부랴부랴 달려와서 아들자식을 불러앉혀놓구 대판 욕을 해주었습니다. 하여튼 이래저래 그녀석이 다시 청수로 왔습니다.》
《잘하셨습니다. 그래 아드님이름은 뭐라구 합니까. 참, 로인님의 성함은 어떻게 부르시구?》
《제 아들은 오정해라구… 전 오원배라구 합니다.》
여기서 오원배는 마음이 흥떠지면서 그만 가문자랑까지 꺼내고말았다.
《전 본시 의주태생이나 청수동에서 많이 살았습니다.… 왜놈들과 끝까지 싸우려던 그 독립군대장 오동진이와 항렬로는 오촌조카벌이 됩니다.》
《그렇습니까? 오동진선생네 가문이시구만요. 허허허…》
김일성동지께서는 반가우시여 로인의 손을 잡아주시였다. 기가 오른 오원배는 가슴에 두손을 포개여얹고 어떤 감회에 잠긴 경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이래뵈두 김형직선생님을 두번이나 만나뵈왔습니다. 청수동에 오시여 연설하시던 모습이 지금두 저의 눈앞에 삼삼합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고개만 끄덕이실뿐 말씀이 없으시였다.
승용차는 어느덧 옥강리를 지났다. 도로는 압록강을 왼쪽에 끼고 뻗어있었다. 차는 압록강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김일성동지께서는 아버님께서 자주 다니시던 이 근방의 산천을 다시 눈여겨보시려는듯 차창밖을 내다보고계시였다.
로인은 그때의 저를 뉘우치듯 이렇게 말하고있다.
《참, 그때 오동진오촌숙이 날 못 따라서게 했지요. 앓는 홀어머니를 두고 안된다는거였지요. 나두 젊었을 땐 혼자서 일본놈 대여섯은 단번에 제끼는 힘장사였답니다. 그때 나두 따라나섰더라면…》
그러자 김일성동지께서는 차창밖으로부터 시선을 로인에게로 돌리시며 미소를 지으시였다.
《그랬더라면 우린 산에서 만날번도 했습니다.》
이 《산에서》라는 말뜻을 로인도 이내 알아차린듯 하였다.
《제가 항일빨찌산에요? 아, 그렇게야. 장군님을 모신 그분들이야 모두 어떤분들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로인님과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혁명은 보통사람들이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두요.…》
로인은 두손을 가슴에 얹으며 설레설레 머리를 저었다.
《저같은거야…》
김일성동지께서는 웃으시다가 조용히 물으시였다.
《그래 오동진선생을 마지막으로 만난 때가 언제입니까?》
《그게… 그렇습니다. 김형직선생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청수동에 왔댔지요. 밤이였는데 나보구 술을 내놓으라구 해서 한되병 내놓았습니다. 그 술을 마시면서 사나이통곡을 터뜨렸습니다. 김형직선생님께서 돌아가시니 자기는 앞이 막막해진다구 말입니다.…》
오원배의 목소리는 떨리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로인을 위로하듯 그의 무릎에 손을 얹으시며 생각에 잠겨 말씀하시였다.
《그랬을겁니다. 두분은 참 자별한 사이였댔으니까요. 우리 아버님께서 청수동에 가신것만도 일곱번인가 된다고 합니다. 삭주근방까지 세면 더 많구요.》
《오실 때마다 중요한 연설과 회의들을 하셨습니다.… 한번은 우리 오동진아주버니의 안내로 동주성에 올라… 그게 어느해던가… 시를 읊으시였습니다.》
1918년 늦은가을의 추운 어느날.
김형직선생님께서는 동지들과 함께 (지금의 벽동군 동주리에 있는) 동주성 완월루에 오르시여 달빛어린 강산을 바라보시다 시 한수를 읊으시였다.
《그 시를 나도 압니다. 로인님두 기억하십니까?》
《기억하구말구요.》
로인은 잠시 길옆을 따라 흘러내리는 압록강의 물결을 바라보더니 운을 떼기 시작했다.
달밝은 완월루에 높이 올라서
동주성 바라보니 감개 깊어라
북변강 배사공의 구슬픈 저 노래
구봉산기슭에 메아리치네
네 모습 예로부터 아름다와서
길손의 시흥을 불러줬건만
왜놈의 학정아래 눈물지으니
달빛도 산천도 빛을 잃었네
김일성동지께서는 저 멀리 어디엔가 솟아있을 동주성을 바라보시는듯 차창밖의 먼 하늘에 시선을 보내시며 로인의 뒤를 이어 나직하면서도 힘주어 읊으시였다.
굶주리는 민중아 슬퍼말아라
짓밟힌 동포야 일어나거라
판가리싸움에 이몸 바치니
사나이 총검이 분노에 운다
무도한 왜적들을 쳐물리치고
동주성 완월루에 다시 올라서
목청껏 독립만세 높이 부르자
무산민중 새 사회 세워나가자
차안에는 잠시 침묵이 흐르고 차의 가벼운 진동만이 느껴왔다.
문득 김일성동지께서는 로인을 향해 말씀하시였다.
《선렬들의 뜻을 받들어… 그래서 우린 지금 사회주의를 건설하고있지 않습니까. 사회주의라는 인민의 락원, 인민이 주인된 사회를 말입니다.》
오원배는 감심하며 머리를 끄덕이였다.
《장군님, 너무 걱정마십시오.… 왜 이렇게 험한 길로 일년내내 현지지도의 길우에서 지내십니까. 그 로고의 천만분의 일도 우리 백성들이 헤아리지 못하고있습니다.》
《로인님, 그래두 다니면서 봐야 기쁜 일두 있고 생각도 깊어집니다. 옛글에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구 한번 보는것이 백번 듣는것보다 낫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내 이번에두 신의주쪽에 갔다가 갈에서 실을 뽑게 된걸 보구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비오는 날 배를 타구 갈밭이 있는 섬에 다녀오자구 하니까 사람들이 나보구 〈수상님, 위험합니다.〉 해서 〈일없소. 이런 길이면 백번두 더 나서겠소. 비바람을 좀 맞으면 뭘하오.〉 하고 말해주고 우산을 들고 배전에 내려섰습니다.》
《저런, 비가 쏟아지는데 배우에서… 제발 장군님, 다시는 그런 험한 바다길에 나서지 말아주십시오. 바다란 변덕이 심해서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릅니다.》
《괜찮습니다. 난 산에서 싸울 때 별의별 경난을 다 겪은 사람입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호탕하게 웃으시다가 로인한테로 약간 몸을 기울이시며 말씀하시였다.
《그래 청수에 갔을적에 돌에서 실을 뽑는걸 실험실에서라두 한번 보셨댔습니까?》
《네, 신기하긴 신기합니다. 헌데 지금 어찌나 고생들을 하는지…》
《과학이란 그런겁니다. 어떻게 일조일석에 되겠습니까. 석회석과 무연탄에서 실을 뽑는 그 일도 신심이 가는 일입니다. 우리의 원료, 우리의 기술로 하니까요. 꼭 될것입니다. 몇년후에 그 실로 짠 천으로 지은 옷을 맨먼저 로인님이 입어보셔야지요. 아드님두 조카사위두 거기 있구 이렇게 정성이 지극하게 그들을 도와주구있는데…》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참말 고맙습니다.… 장군님께서만은 변함없이 끝까지 믿어주고계신다는 말을 다 들었습니다. 장군님께 충정하겠다구 맹세다진 과학자어른들이 왜 못해내겠습니까.…》
그리고나서 오원배는 과학자들을 자랑하고싶고 또 제가 한 처사를 허물없이 말씀드리고싶은 심정에서 이렇게 말을 계속했다.
《장군님, 사실… 거기서 일하던 한 연구사가 가정을 전혀 돌보지 않다나니 처가 덜컥 세상을 하직했을 때… 난지 석달밖에 안되는 갓난애까지 애들이 셋이나 되여 녀자들이 선뜻 들어서려구 못했습니다. 나한테 조카벌되는 녀맹사업을 하는 애한테 혼사말이 왔는데 그 애가 망설인다는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밤중에 거기 당도해서 자는 아를 불러앉혀놓구 한바탕 해대였지요.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돌에서 실을 뽑는 장한 일을 하는 그런 과학자들의 발꿈치에나 네가 가느냐, 난 네가 그 집에 들어서는걸 보구야 가겠다 하구 말했습니다.… 허허허.》
오원배는 2년전 그때 일이 떠오르며 저로서도 웃음이 나오는 모양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로인의 손을 찾아쥐시고 못내 대견해하시며 말씀하시였다.
《잘하셨습니다. 참 잘하셨습니다.》
그러시다가 문득 생각이 나신듯 그 손을 놓으시고 등받이에 몸을 젖히신채 승용차의 앞시창으로 마주 흘러오는 길을 내다보시며 말씀하시였다.
《그런데 얼마전에는 거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연구사동무가 미처 손을 쓸새없이 잘못되였습니다.… 그 동문 나의 명의로 된 표창장을 준 동무였는데…》
김일성동지께서는 침중한 어조로 말씀하시다가 더 뒤를 잇지 못하시였다.
오원배는 조용히 말씀드리였다.
《저두 그 선생을 잘 압니다. 우리 정해한테서 편지로… 불상사가 생겼다는걸 알구 이번 길에 들려보자구 사실… 그 유가족의 애들이 너무 어려서 어쩌는지… 에미곁에서 떨어질수 있으면 당분간 우리 집에라두 데려다두었으면 좋겠는데.》
《로인님… 정말 고마운 말씀입니다.… 모두 잘 도와줍시다.… 그렇게 되느라니 그 일을 책임지고 하는 리승기박사의 심정인들 오죽하겠습니까.… 우리 다같이 도와줍시다. 인민이 그를 돕구 내각수상이 그를 돕지 않으면 누가 돕겠습니까?》
오원배는 연신 고개만 끄덕이며 말을 못한다.
김일성동지께서 하시는 말씀속에 울리는 그 진정이 목메여와서 더 입을 열지 못하는것이다.
승용차가 청수에 들어섰을 때는 정오가 가까운무렵이였다.
2
네명의 방사공이 비날론의 첫 방사공들이라고 할수 있었다.
김병주는 화학전문학교를 나온 25살의 청년이다. 그는 요즈음 열흘째나 낮에 일하고도 밤에 리승기박사와 같이 현장에 나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맨처음에는 원사이며 교수인 리승기박사가 청년들이 있는데서 《병주동무, 이 시각부턴 전적으로 나와 같이 일해야겠소.》 하는 바람에 얼마나 어깨가 으쓱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병주는 밤마다 방사노줄을 잡고 리승기박사의 잔소리를 듣느라니 그만 화딱지가 나는데다가 감기까지 와서 이틀이나 합숙방에 누워버렸다.
리승기가 달려왔다. 누구를 심부름시키지도 않고 그가 직접 찾아올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김병주는 감기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황급히 일어나 미안해서 어쩔바를 모르다가 리승기를 따라나섰다.
병주는 소가죽옷을 앞에 두르고(방사액인 망초액때문에) 일하는데 어떨적엔 폴리비닐알콜을 온몸에 뒤집어쓰는 때도 있었다. 머리칼보다 가는 노줄구멍이 메여 실이 끊어져서 다시 이으면 또 끊어지군 하였다. 려과부분이 말썽인가 하면 이번에는 망초의 비중때문에 애를 먹었으며 그러다간 치차뽐프에서 치차쪼각까지 튀여나오기도 하였다. 잘하자고 하는 일이 조급하면 더 안되는 때가 많은 법이다.
그래도 리승기는 줄창 병주의 곁에 붙어있기만 한다. 마침내 병주는 볼부은 소리로 리승기한테 물었다.
《선생님께선 어째 자꾸 나만 못살게 구십니까. 다른 동무보다 제가 더 잘하지두 못한데 말입니다.》
그러자 리승기는 이 어린 청년앞에서 뭐라고 말할지 제사 오히려 당황해서 어쩔줄 모르다가 급기야 중얼거리는것이였다.
《이보라구, 병주동무가 제일 낫길래 그러는거지.》 그러면서 리승기는 안경을 벗어들고 별로 이상하게 눈을 껌뻑거리는데 아무리해도 그 표정과 눈깜작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수 없을뿐아니라 평상시에 이 침착한 성미의 학자한테 과연 이렇게 간절한 표정을 조급히 내비칠 때가 있었던지 도무지 그것을 기억해서 찾아낼수 없었다. 분명히 이 학자한테는 비상한 일이 기다리고있음이 틀림없다.
병주의 곁으로는 리승기박사만 아니라 중간공장장 리재업이도, 김용석부소장도 뻔질나게 왔다가군 하였다. 언제보나 리재업은 소리없이 나타났다가 몇마디 조용히 조언을 주고 어느새 사라졌다. 한데 김용석은 커다란 철문이 열려진 출구로 들어서면서부터 큰 목소리로 《수고하누만, 수고해.》 하고 부르짖고는 성급한 걸음으로 다가와 허리를 굽혀 이리저리 들여다보는것이였다. 그러다가 고개를 쳐들고 그 시커먼 눈섭밑의 부리부리한 눈초리로 병주를 바라보는것이 고무나 신심을 주기보다 어떤 추궁과 위압감을 더해주는것만 같았다.
그런대로 병주는 일주일이 지나 실뽑기를 아주 능숙하게 처리할수 있게 되였다.
리승기는 병주의 귀에 대고(이런 동작 또한 리승기한테서 처음 보는 일이다.) 속삭이듯 말했다.
《이건 내 혼자 결심이 아니야. 다 토론하구 결정한 문제지.》
《뭐라구요?》
병주는 두눈이 떼꾼해졌다. 제가 지금 하는 이 실뽑기가 도대체 무슨 비상한 일로 된다는것인지, 그것도 그렇거니와 리승기의 여느때없는 얼굴표정과 말투들이 이상하기만 하였다.
리승기는 병주한테 다시 몸을 기울였다.
《이제껏 왜 말하지 않았나 하면… 미리 말해놓으면 병주동무가 손이 떨려 일이 잘되지 않을가봐 그랬단 말이요.》
병주는 여전히 대답을 못하고 서있다.
리승기는 슬그머니 병주의 옆구리를 줴지르는것이였다.
《그래두 모르겠나? 오늘 당조직에서 불러 지시를 줄거네.》
《그럼 제가?…》
그제야 경애하는 김일성동지께서 비날론중간공장을 돌아보러 오실수 있다는 소문을 상기한 병주는 제가 어떤 자리에 서겠는지를 짐작한듯 그만 몹시도 놀란 표정이 되였다.
리승기는 병주한테 일렀다.
《이제 수령님께서 오시면 동무가 그이께 처음으로 비날론의 방사를 보여드리는 영광을 지니게 되네.… 동무의 기능에 이제는 덤비지만 않으면 돼. 절대 덤비지 말라구. 안되는걸 억지로 보여드리려구 하는것두 아닌거구. 알겠나?》
《알겠습니다.…》
병주는 여전히 얼떠름해 서있었다. 그러니 그가 우리 나라 비날론의 첫 방사공으로 되는 영예를 지니는셈이 아닌가.
병주한테 다시한번 그 작업공정의 조작을 시켜보고나서 리승기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밤은 일찌기 들어가 푹 자라구.》
바로 그 이튿날 정오가 가까운무렵에 경애하는 김일성동지께서 비날론중간공장에 도착하신것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초산과 알데히드, 합성과 중합방사 등 공정별로 차례차례 안내를 받으시였다.
그이께서는 설명을 들으시다가 웃으시고 말씀하시였다.
《화학공장이란 그저 탕크와 배관이구 눈에 보이는건 계기판뿐이니 그속에서 무슨 조화가 벌어지는지 볼수 없거던.… 사실이야 저속에서 내용물들이 뒤엉키며 복잡한 반응과 합성들이 진행되고있을테지만…》
리승기는 그이께서 유심히 바라보시는 그 눈길을 마주 대할수가 없었다. 그이께서는 무엇인가 다른것을 묻고계시는것만 같으시다. (겉으로는 평온하고 분위기도 좋지만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당신네들의 심중은 지금 복잡할테지. 가슴아픈 희생, 간난신고와 우여곡절이 허다하지 않는가. 그걸 나한테 속임없이 말해주어야 합니다.) 그이의 시선은 이런 뜻을 담은듯싶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탕크와 배관속에서 룡트림하고 뒤채기는 화학적인 내용물처럼 사실상 몹시 어려운 처지에서 헤매이는 자기의 처지를 그이앞에서 숨길수 없다는것을 리승기는 똑똑히 깨닫고있었다.
알데히드에서 합성으로 넘어갈 때였다.
두 공정은 벽체 하나를 사이두고 한 건물안에 있었다. 문을 나가 돌아다니기 말째여서 연구사들과 운전공들이 벽에 키낮은 문이라도 내려고 거기를 까고 문틀만 세워놓은채로였다.
김일성동지께서 허리를 굽히시고 거기를 지나 합성으로 넘어가려고 하시자 리승기는 제때에 편한 길로 안내해드리지 못하는 자신이 민망하고 송구스러웠다. 순간순간 제 생각에 옴해있다나니 미처 이런 점을 료량하지 못한다고 자신을 나무람하였다.
합성으로 넘어가는 첫어구에는 크고작은 배관들이 깔려있어 자칫하면 배관들짬에 발이 미끌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일성동지께서는 그것을 개의치 않으시고 정력적인 걸음새로 배관들을 타고넘으시며 합성탑앞에 이르시였다.
리승기는 문도 없는 문틀과 험한 곳에서 그이를 미처 막아서지 못한 자책감과 함께 이 합성탑을 지나 빨리 방사공정에 갔으면 하는 조급한 마음을 달랠수가 없었다. 비록 이 합성이 심장부라고 해도 어째선지 이 합성에서 그이를 오래 지체시켜드리고싶지 않았다. 빨리 방사에 가면 샘물처럼 맑고 투명한 망초용액속에서 노줄을 통해 흘러나오는 수천오리의 비날론실을 보여드릴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김일성동지께서는 가벼운 진동음에 귀기울이시며 묵묵히 합성탑을 지켜보시면서 얼른 걸음을 옮기려 하지 않으시였다. 지금은 별로 설명을 청하지도 않으시였다. 그이께서는 거기를 떠나지 못하시고 뒤짐을 지신채 합성탑주위를 몇걸음사이로 오락가락하시였다.
리승기는 그이의 심중에 떠도는 무거운 생각을 다 헤아릴수는 없었다. 그이께서 지금 다름아닌 림창직이도 생각하고계신다는것만을 명백히 깨달았다. 그는 죄스러운 마음과 함께 가슴저미는 상실감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몇걸음 걸어나가다가 얼핏 고개를 추켜들었다.
김일성동지께서 그의 팔을 껴들어주시는것이였다.
당황한 리승기는 마침 눈앞에 보이는 배관을 타고넘으면서 그이를 부축해드리려고 하였다.
다음공정에 가시여서 김일성동지께서는 밝은 미소를 띠우시고 활기에 넘쳐 별로 더 많은 설명을 청하는듯싶으시였다. 그이께서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시며 리승기가 자유자재로 설명을 할수 있도록 기분을 부추겨주시였다. 그러시다가 손을 쳐드시여 저안에서는 무엇이 어떻게 되는가고 물으시고는 미소를 지으신채 리승기의 말을 들으시였다.
그이께서는 념려와 걱정이 아니라 신심과 고무를 더 주시려고 마음쓰시는것만 같았다. 리승기의 표정과 몸자세, 설명과 말투에서 분명히 마음속을 꿰뚫어보신 그이께서는 얼핏 보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이 연구집단에서 흐르는 내적인 흐름 즉 매개 성원들의 기분상태, 정신상태까지를 가늠해보시는것이였다. 그이께서 중요하게 보시는것은 설비나 장치가 아니였다. 리승기와 그의 연구집단을 버티여내게 하는 정신적인 주추돌과 기둥이였으며 그들의 사색과 활동속에 존재하는, 결코 헝클어져서는 안되는 그 마음의 내재률인것이다.
탐구의 온갖 애로와 함께 희생의 쓰라린 슬픔까지도 그이께서는 깊이 마음쓰시는것이다.
리승기는 될수록 리해가 쉽게 공정을 설명하느라고 온 정신을 기울였지만 자기를 유심히 바라보시는 경애하는 김일성동지의 시선을 감촉할 때마다 속에서 뜨거움이 자꾸만 치받쳐오르는것을 누를수가 없었다. 방사공정에 들어서서야 이러한 흥분이 한결 가라앉는것만 같았다.
그때에 방사공 김병주는 너무도 긴장한 나머지 노줄구멍만 지켜보며 뒤를 돌아다보지조차 못하고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맑은 용액속으로 흘러나오는 실을 대견하게 바라보시다가 환하게 웃으시였다.
《정말 좋은 일이요.… 훌륭하오, 훌륭해.》
그이께서는 병주의 등을 다정히 두드려주시였다.
《수고하누만, 수고해.》
그제야 병주는 놀라듯 몸을 돌리며 김일성동지께 굽석 허리를 굽혀 인사드리는것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병주의 마음을 아시고 손짓으로 노줄구멍으로 나오는 실들을 가리켜보이시였다. 빨리 그쪽을 보라는것이였다. 그러시면서 병주의 곁에 바투 다가서시며 물으시였다.
《노줄이 몇구멍인가? 응?》
병주가 곧바로 서서 대답하려고 했으나 수령님께서는 그의 잔등을 두드려주시며 주의를 잃지 말고 노줄구멍을 지키라는듯 고개짓으로 그쪽을 가리키시였다. 병주가 대답을 드린다.
《0.08미리짜리가 2 000구멍입니다.》
《2 000구멍?》
김일성동지께서는 가느다란 실들이 련이어 흘러나오는것을 한동안 바라보시더니 《참 대단하오, 대단해.》 하고 다시금 환하게 웃으시였다.
그이께서는 맑은 용액속으로 줄줄이 뻗어나오는 실들을 들여다보시며 시선을 떼지 못하시였다. 만시름이 가시는듯 한 밝은 미소로 리승기를 돌아보시는데 흡사 그 미소는 이제는 한결 마음을 놓아도 되겠다고 리승기더러 위안해주는듯도 싶었다. 하여 합성에서 그리 가볍지 않은 마음을 은연중 서로 나누던 분위기가 여기 와서는 말끔히 가셔지는것만 같았다. 그 순간 리승기는 연구사업의 온갖 애로는 아무것도 아닌듯이 느껴지고 모든것이 잘되여나가리라는 밝은 생각에 가슴이 열리는것만 같았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밖으로 나오시자 주위를 둘러보시며 말씀하시였다.
《방안에 들어갈게 있습니까. 저기 나무그늘아래가 좋구만.… 다들 오라구 하시오.》
그이께서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시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