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8 회)

제 3 편

제 2 장

3

 

며칠사이 시간은 한자리에 정지된듯도 하고 한정없이 흐른것 같기도 했다. 악몽속에서 허덕이는 사람처럼 눈앞의 현실을 도무지 믿을수가 없어 병원에서 나온 리승기는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탁상등을 켜놓은채로 자리에 누워있었다. 방금이라도 유쾌한 롱담과 웃음으로 입귀의 금이를 반짝이며 림창직이 문을 열고 들어설것만 같다.

(창직인가? 들어오게.…)

하지만 그가 없다니 이게 웬말인가.…

의식을 회복한 첫날 오전에 그는 병원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누가 들어와도 천정만 쳐다보면서 응대가 없었으며 그저 팔을 들어 버릇처럼 손을 내젓군 하였다. 실성한 사람의 손짓처럼 그 뜻을 알수 없었다.

그는 이 며칠동안에 온 생애가 다 흘러간것만 같았다. 무엇인가 숨가쁘도록 가득차있으면서도 텅 비여있는듯 한 이 며칠동안 그는 사람들앞에 꿋꿋이 서있느라고 만신의 힘과 의지를 다해야만 했다. 이 동안 저녁에는 연구사들이 리승기의 집에 모여오고 같은 시간에 연구사의 안해들이 금진이한테 가있었다. 오정해의 안해 안명숙이 의사로서 금진이한테 련이어 캄파와 진정제주사를 놓아주어야만 했다. 허나 그 어떤 약이나 위안도 실심한채 멍하니 앉아있는 이 젊은 녀인한테 소용이 없는것 같았다.

리승기는 몇사람과 함께 거기로 찾아갔다. 갓난애를 안고 앉았다가 일어서다말고 앞으로 꼬꾸라지듯 푹 고개를 숙이며 흐느끼는 그를 바라보자 리승기는 가슴이 찢기는 아픔에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다만 두손으로 그의 어깨를 어루만져 눌러 그를 다시 자리에 앉히였다. 세상모르게 잠든 어린 아기의 쌔근거리는 숨소리, 아기의 포대기에 떨어지는 눈물방울… 림창직이 《선생님…》하고 부르는것 같아 와뜰 놀라며 뒤돌아보는 순간, 문득 거치른 이역땅에서 만났던 그의 첫 얼굴이 떠오른다. 운전사인 형이 보내주는 돈을 보탬하면서 고학으로 겨우 고공을 나온 림창직이 다까스끼중간공장에 찾아와 《나도 조선사람입니다.》하고 자기앞에 나타났던것이 어제만 같다. 혼란된 남조선땅에서도 자기를 도와 섬유강좌를 꾸리려고 애쓰던 창직이, 조국통일성전에 남먼저 총을 메고 의용군에 나서더니… 비날론공업화를 눈앞에 둔 때에 이렇게 쓰러진단 말인가.

림창직의 입귀에서 반짝이는 그 금이발을 다시 볼수 있다면 아, 그 웃기 잘하던 유쾌한 사나이… 떠오르는 얼굴마다 림창직의 얼굴로 환각되여 깊은 밤에도 잠들수 없는것이였다.…

리재업이 웃방에 누운 리승기의 곁에 앉아 한숨 절반, 설명 절반으로 사고의 원인을 말하고있었으나 처음에는 그것이 하나도 뇌리에 잡히지 않았다. 리승기는 다시한번 그한테 설명을 청해서야 어렴풋이 깨닫게 되였다. 문제는 그 가스치환때문이였다. 조작상결함이라고 하기엔 그것이 너무나도 믿어지지 않았다.

림창직은 비등식합성법을 한시바삐 실험해보려고 앞장섰다가 모진 광풍에 쓰러진것이다. 리승기는 그가 자기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반응조작의 한계점과 최대치를 밝혀낸것만 같았다.

(이건… 이건 내가 우유부단한탓이였어. 나의 우유부단성이 끝내 한 학자의 죽음까지도 가져온게 아니고 무엇인가?!)

심사숙고, 완강성, 침착성을 제일로 내세우면서 이제껏 결단성이 부족한 치명적인 결함을 내내 미봉하려 한듯이 생각되였다.

자기가 고정식합성법에 대한 미련을 채 가시지 않았고 또 비등식에 대한 결단도 내리지 못한 어중반한 상태에 있었다고 리승기는 자기를 사정없이 타매하였다. 자기의 확고한 결심으로 뒤받침해줄대신 림창직의 독자성을 운운하면서 자기를 숨겨왔지, 림창직의 곁에 자기가 서있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것이였다.

리승기는 다름아닌 제가 그를 그런 비참한 죽음에로 몰아갔다는 절통한 심정에 다시금 와락 머리를 움켜쥐지 않을수 없었다.

아, 림창직이 그렇게 가다니… 믿어지지 않는 현실이였다. 생각할수록 쓰디쓴 회환과 상실감이 가슴을 저미고 아프게 하였다. 그것이 무엇이기에 거기에 귀중한 학자의 생명이 바쳐지게 했는가. 한 과학자의 성스러운 제단앞에 백번 꿇어앉아도 자기는 용서받을수 없을것이였다. 이것은 학자로서의 나의 죽음과도 같은것이다. 한 생명이 밝혀놓고간것이 과학상의 큰 진리로 될지는 모른다. 허나 자신이 실책했다는것을 느끼면 아주 하찮은 문제를 놓친것만 같아 끝없이 통탄하게 되는것이였다.

사흘째되는 날 저녁에 그는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련이틀 억병으로 술에 취했던 현석실장이 오늘 저녁은 한잔도 입에 대지 않은채 정색해서 올방자를 틀고앉아 방바닥만 내려다보고있었다. 김용석이도 옥지문이도 오정해도 왔다. 리재업은 녀인들이 가있는 금진이한테 들렸다가 온다고 했다.

리승기는 이 며칠사이 처음으로 입을 열어 조용히 뇌이였다.

《모두들 모였구만.… 모였어.… 한데…》

그의 마음은 다 온것 같이 생각되다가 그만 불시에 가슴이 허전하다. 속에서 원통한 웨침이 터질것만 같다.

(창직이는 없구나.… 그만이 오지 못하는구나.)

좀 있다가 리재업이와 방하민이 함께 들어왔다.

리승기는 고개를 쳐들어 방하민을 낯선 사람처럼 유심히 바라보았다. 한달전에 본것 같기도 하고 며칠전에 본것 같기도 했다.

방하민이 겁먹은듯 한 눈길로 리승기의 얼굴을 살피고있었다. 진정으로 비감에 찬듯 그의 작은 두눈이 퀭해지도록 커지였다. 그는 어떤 위안의 말도 찾지 못한채 들어오자 고개를 숙이고 앉았을뿐이다. 슬픔에 뒤이어 공포감이 무겁게 가슴을 누르는 방하민이였다.

방하민은 이제와서 자기가 도이췰란드문헌자료대로 림창직한테 고정식을 우기던 그것이 마치 장애로 되고 그릇된 미련으로 되여 그의 죽음을 가져온것만 같이 생각되였다.

그는 이 무시무시한 사건으로 결코 비등식의 실패를 보고 고정식의 합리성을 다시 주장하고싶지는 않았다. 그는 림창직의 죽음에서 학자의 랭철한 눈으로 비등식의 가능성을 예감했으나 그것 또한 다행스럽지는 않았으며 이 모든 현실이 공포감만을 자아낸것이였다.

방안이 조용하고 모든 눈길이 저한테로 쏠리는것만 같아 머리를 쳐들지 않을수가 없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리선생, 기운을 내십시오. 모두들 선생의 얼굴만 쳐다보는데…》

그리고는 용기를 내여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창직동문 정말 과학의 상상봉으로 오르다 기슭에서 쓰러졌습니다.… 화학사를 돌이켜보더라두 정말 화학은 다른 과학보다 더 많이 학자들의 목숨을 앗아갔지요.… 그는 리선생의 한쪽팔이나 다름없었구 선생을 받들어온… 기슭이였는데…》

그 말을 듣는지마는지 가만히 앉았던 리승기가 머리를 가로저으며 조용히 말하는것이였다.

《아니요. 그는… 하나의 봉우리였소.》

방안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

그 말은 사실이기도 하다. 림창직이 믿고 칭찬하며 키우던 연구사가 당장 그를 대신하여 합성공정을 담당하고 비등식합성법을 시험해야 한다. 그러니 그 연구사가 벌써 림창직의 기슭으로 된셈이다. 림창직은 화학과 화학공업에서 합성이라는 중요부문에서 여러가지 문제들을 실천으로 해명하여 피의 교훈을 남긴채 하나의 봉우리로 솟아오른것이 분명하다. 말은 하지 않아도 이 순간에 방안의 모든 연구사들은 이런 감정에 휩싸여있었다.

 

×

 

연구소로 나간 리승기는 제 방에 들어갔다가 생소한 곳처럼 느껴져서 고적감에 쫓기듯 거기서 나오고말았다.

그의 발걸음은 저도 모르게 합성건물안으로 향해졌다.

주인을 잃은 집… 거기엔 합성탕크를 다시 설치하는 용접공들과 운전공들이 있었다.

용접면을 든 한태호가 얼핏 리승기를 보자 여느때처럼 감히 일어서서 인사도 못하고 애써 눈길을 피하려는듯 한사코 용접면에 얼굴을 묻는것이였다.

리승기는 합성탕크옆에 있는 엘모뽐프를 내려다보았다. 림창직이와 마지막으로 만난 그날 저녁에 조립되여 반응액을 순환시키던 그 엘모뽐프, 그것이 움직이지 않고있었다. 허나 림창직이 중절모를 썰어서 끼운 바킹이 어느 틈사이에 있을 그 엘모뽐프는 합성탑에 액을 퍼올리는 심장부의 역할을 다하여 이제라도 산 사람의 박동과 숨결처럼 제 률동과 음향을 되찾아 쉬임없이 돌아갈것이 틀림없다.

(아, 헌데 그 사람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누군가 곁에서 그한테 펼쳐진 공정일지를 내밀었다. 그는 누군지를 알려고 돌아보지도 않고 그저 공정일지를 받아들었다. 리승기는 한껏 주의를 모아 거기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무엇인가 안타까이 찾는듯싶다. 그날 저녁에 림창직이 반응조작을 하였던 그 류량, 온도 등이 기록되였지만 이상하게도 압력란에는 수자가 비여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자를 쓰려고 만년필을 대였다 뗀 자리가 보이는것만 같았다.

또다시 끓어오르는 마음을 누를길 없어 리승기는 거기에 더 서있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키가 훤칠한 그가 머리를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 늦은봄의 해볕에 안경알이 번뜩이였다. 그 안경알은 서글픔에 젖어 뿌옇게 흐려지는가보았다.

구내길에서 연구사들은 그와 상론할것이 있어도 당장은 피하면서 그를 쳐다보고 사라지군 하였다. 그렇다. 그는 이 연구사들속에 서있는 봉우리임에는 틀림이 없다. 따라서 그는 높은 산정처럼 해빛을 먼저 받는것이고 또한 스러져가는 석양의 노을도 마지막까지 그한테 비끼는것이 아니겠는가.

높은 산마루는 세찬 바람도 더 많이 맞는 법이라고 하였다. 쓰러지면서도 마음만은 꿋꿋이 버티여내야 한다.

(아, 그 어느때인가 아버지도 지리산정에서 본 그 꼭대기에 있는 나무얘기를 하였지. 누워서도 자라는 나무들!… 내가 감히 산정에 서있다고 자부하기엔 우스운 일같지만 어쨌든 사람들앞에서 나는 자신을 그렇게 생각해야 해.… 무거운 책임감을 더욱 자각해야겠으니…)

점심시간이 퍽 지나서 리승기는 무엇때문인지 공장밖으로 나왔다. 그는 자기로서도 어디로 가자고 나섰던지 까맣게 잊은 사람처럼 잠시 섰다가 걸음을 떼였다. 가까이에 있는 화학전문학교 운동장에 들어선 그는 거기서도 어디를 갈지 방향을 모르는듯 주위를 두릿거리였다.

마침 그때 40대로 나보이는 학교교장이 그를 띠여보고 급히 다가왔다.

《선생님이 어떻게 이렇게 오셨습니까?》

《그저 좀… 볼일이 있어서…》

교장은 그를 제 방에 안내하려고 현관에 들어섰다. 그들은 2층 층계를 올라 교실의 출입문들을 지나 복도를 걸어갔다. 교장실로 가기전에 세개의 큰 유리창문이 복도쪽으로 난 꽤 널직한 방이 있었다. 가운데 긴 탁자가 놓이고 벽면에 가득한 장마다 실험기구와 시약병들이 들어찬 실험실이였다. 한데 창문이 약간 열렸는지 거기로 한 녀교원이 강의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창문옆에서 리승기가 걸음을 멈추고 교장도 따라섰다.

리승기는 그것이 금진의 목소리임을 확실히 알아들었다. 아직 집에서 출근 못하는줄 알았던 금진이, 그는 지금 저기 학생들앞에 서있다. 금진의 목소리는 조용하면서도 명료히 울리였다.

《학생들은 지금 졸업학년의 마지막학기를 보내고있습니다.… 이제 동무들이 졸업하면 대부분 생산현장이나 연구소에 나가 실험공이나 현장기수로 될거예요.… 여러분, 화학은 흥미있는 학문입니다.》

금진의 목소리는 떨리고있었다. 문득 리승기는 51년 초여름 어느날, 금진의 초청으로 카바이드에 대하여 강의하던 일이 떠올랐다. 카바이드로의 연도를 지키다가 희생된 전로공의 딸이 터뜨리는 흐느낌앞에 말을 못하고 섰던 그때 자신이 받았던 충격이 되살아올랐다. 그때와 꼭같이 괴롭고 비장해지는 마음이였다. 금진의 음성은 눈물겹게 들린다.

《나라의 화학공업을 떠메고나갈 보람찬 래일이 여러분들을 기다리고있습니다. 때문에 이번 졸업을 앞둔 실습에서는…》

리승기는 더 듣고있을수가 없어 창문을 지나 걸어갔다. 그러자 교장은 모든것을 깨달은듯 제 방으로 안내하면서 안락의자에 앉도록 리승기한테 자리를 권하고는 제가 먼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선생님은 아마 리금진교원때문에 오신것 같은데… 그 선생의 일로 지내 상심하지 마십시오. 저희들이 가능한한 도와주도록…》

리승기는 안락의자에 앉아 그 말을 듣더니 《고맙습니다.》하고 뇌이고는 조용히 일어났다.

교장은 더 만류하지 못하고 말없이 그를 따라서며 운동장의 한끝 교문밖까지 나왔다. 리승기는 교장한테 그저 머리를 끄덕여 인사와 부탁의 뜻을 보이고는 돌아서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있었다.

 

4

 

저녁에 집으로 찾아온 리재업이 리승기한테 한장의 편지를 내놓았다.

그는 편지를 내놓기 망설이듯 주저주저 말했다.

《일본에 있는 렴성근이한테서 편지가 왔습니다.》

사실은 불상사가 생긴 그 이튿날에 온 편지였는데 리재업이 여태 내놓지 못하고 건사했던것이다.

《렴성근이?…》

리승기는 자기의 가슴속에서 고뇌의 어두운 그림자를 헤집으며 한가닥 반가움의 밝은 빛이 솟아오르는듯싶었다.

(13년전, 일본에서 내가 오사까헌병대에 잡혀갔을 때 렴성근이도 조선인학생반전그루빠혐의로 체포되여 와있었지. 해방의 날에 거기서 같이 나오며 얼싸안던게 엊그제같은데 렴성근이 지금은 일본땅에서 조선대학교 교수로 있다니…)

리승기의 손에 편지를 넘긴 리재업이 조용히 설명을 달았다.

《편지는 3국을 통해 인편으로 온것 같습니다.》

렴성근이와 함께 공부했던 리재업은 편지를 일주일동안이나 간수하면서 내놓지 못했으나 지금은 장인이 겉봉을 뜯기를 조급히 기다리는 눈치였다.

리승기는 길죽한 편지봉투의 웃머리를 뜯고 속지를 꺼내들었다. 그는 읽으려 했으나 얼른 첫줄이 잡히지 않았다.

제가 당하는 심적고충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일들이 펼쳐지는것 같아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몇순간이 지나서야 그는 편지에 끌려들기 시작했다.

《선생님…

헤여진지도 13년세월이 가까와옵니다.… 귀체만강하온지?… 인편을 통해 소식을 들었습니다. 폴리비닐알콜중간공정이 성과적으로 되고 그에 따라 〈합성1〉호 섬유생산을 공업화할 준비가 본격화된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뻤습니다. 여기 일본에서는 구라시까방직과 닛뽄방직이 경쟁적으로 비닐론(이 사람들은 이렇게 이름을 붙였습니다.)공업화에 달라붙었습니다.

선생의 충실한 제자이던 가와가미 히로시도 선생님께 안부를 전해달라는군요. 그는 선생님이 북에 가서야 자기의 연구사업을 성과적으로 진척시킨다는 말에 무척 기뻐하고있습니다.…

저는 교편을 잡고있으면서 우리의 비날론공업화에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될가 하는 생각으로 여러가지 책과 잡지들을 보고 연구도 합니다. 그래서 이제 귀국이 실현되면 맨선참 선생님에게로 달려가 연구집단을 도와 조국의 비날론공업화에, 화학공업발전에 이바지하려는 크나큰 포부를 안고있습니다.… 선생님을 만나뵈올 날이 얼마 멀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꼭 귀국실현의 배길이 열리여 조국의 품속에 안길 그날만 기다립니다. 선생님도 아다싶이 저의 고향은 남조선에 있습니다. 하지만 조국은 김일성원수님께서 이끄시는 공화국입니다. 그래서 나의 진정한 고향은 공화국북반부인것입니다.…

…선생님, 얼마전에 미국에 있는 지태규선생이 일본에 왔다갔습니다. 저한테도 왔더군요. 다른 제자들과 동료들을 만난 뒤였습니다.

며칠후에 우리는 아인슈타인이 일본에 와서 한 그 유명한 강연회에 같이 참가하게 됐습니다.

일본의 한 청년지식인이 상대성리론에 대해서 까다로운 질문을 했을 때 아인슈타인이 통속적으로 답변하여 큰 강당안에 폭소가 터졌던 그 강연회입니다.…》

…그 강연회에서 돌아오는 지태규의 얼굴에서는 우울한 빛이 가시지 않았다고 한다.

뜻밖에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는것이다.

《렴군, 난 미국에서 아인슈타인과 만나 면담을 한적 있네.…》

《그래서요?… 무슨 얘기들이?》

《난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영광의 상상봉에 올라선 행복한 과학자라고 생각했네. 고분자화학에서 슈타우딩거가 할아버지이고 풀로리가 아버지인것처럼 물리학에서는 뉴톤이 할아버지이고 아인슈타인이 아버지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 생각엔 아인슈타인은 단순히 아버지인 정도가 아니지. 현대물리학의 창시자가 아닌가.… 그래서 나는 담화도중에 〈당신은 자신을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생각할 권리가 있지 않는가?〉하고 물었더니 웬일인지 얼굴에 쓸쓸한 미소를 띠우고 그는 당치않게도 나의 영어발음이 아주 류창하다는게 아니겠나. 내 말에 대한 대답을 피하는 그의 심중을 모르고 나는 모욕감을 느꼈지. 그러자 그는 〈미안합니다.〉하고 사죄의 뜻을 표하고는 〈당신도 나도 조상의 땅을 떠나 살지 않습니까?〉하는것이였네.》

이무렵 아인슈타인은 히틀러를 견제할 목적으로 자기들이 시작했던 원자탄개발이 수소탄을 비롯한 대량살륙무기로 확대되는데 따라 학자로서 절망적인 고민에 싸여 그것을 후회하면서 일련의 평화활동을 벌리려고 했었다.

지태규는 아인슈타인에게 물었다.

《아인슈타인씨, 당신들 유태인들의 나라인 이스라엘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선생을 바이츠만대통령의 뒤를 이어 두번째 대통령으로 초빙했을 때 왜 거절을 했습니까?》

바이츠만은 유태인영국화학자로서 시온주의운동을 벌리다가 후에 이스라엘의 초대대통령으로 된 사람인데 아인슈타인과는 개인적인 친교도 있었다.

그때 아인슈타인은 역시 담화중에 종종 보게 된 그 쓸쓸한 미소를 띠우고 말했다.

《우선 난 과학자로서 정치에 관여치 않고싶습니다.… 물론 우리 유태인들한테도 나라가 생겼다고 볼수 있습니다. 헌데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리익을 침해할 때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 말은 자기가 진정으로 조국이라고 생각할 나라가 없다는 뜻으로도 울리였다.

아인슈타인은 말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나는 나를 춰올리는 말을 들을 때면 나야말로 가장 불우한 사람처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그 명예의 봉우리와 내가 처한 인간적인 처지사이에는 너무나 큰 격차가 있기때문이지요.》

중년기후에 아인슈타인한테는 별로 과학적성과도 없었으니 그가 더더욱 우울하게 지낼수밖에 없었을것이다.

아인슈타인과의 면담이후에 지태규는 자기야말로 가장 불행한 사람처럼 생각되였다고 한다.

렴성근은 편지에서 계속 이렇게 썼다.

《선생님, 저는 지태규선생을 맞대놓고 선생님은 조국을 위해 과연 무엇을 해놓았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대답을 못하며 한숨을 쉽디다. 남조선에도 가지 않는다는겁니다. 과학도 경제도 모르는 리승만이한테는 가기 싫다는것입니다. 그의 견해는 조국이 통일되기 전까지는 남에도 북에도 가지 않는다는게지요. 그의 인생은 쓸쓸하게 흘러갈것입니다. 남북으로 분렬된 우리 나라를 두고 영 고민이 없지야 않겠지요. 말로는 미국의 과학에 의거해서 민족을 위해 무엇인가 해보겠다고 했지만 어쨌든 그는 전부터 정치적으로도 숭미사대에 물젖었으니 이러한 그한테서 삶의 보람은 무엇이겠습니까. 하여튼 이번에 만나고 저는 영 기대를 잃고 실망해버렸는데 한편으로는 그가 측은하고 동정이 가기도 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멀지 않아 선생님과 만날 날을 기약하며 이곳 일본땅에서 선생님이 일찌기 여기서 민족의 얼을 잃지 않으려고 애쓴것처럼 그렇게 자신과 후대들에게 그것을 더욱 튼튼히 심어주기 위한 노력을 다하렵니다.…》

장문의 편지를 읽고난 리승기는 침착하게 되새겨보려 애쓰며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향해 뒤짐을 지고 섰다.

편지는 이미 리재업의 손에 쥐여져있었다. 그는 방바닥에 앉은채로 편지를 읽고있었다.

창문을 내다보는 리승기의 심중에서 우러나오는 첫마디는 이러하였다.

(렴성근이가 온단 말이지.…)

편지구절이 그의 목소리처럼 귀전에 들린다.

《조국의 품속에 안길 그날만 기다립니다.》

그가 이제 당장 왔으면싶은 기다리는 심정은 조급하고 절절한것이였다. 크나큰 상실로 텅 빈듯 한 가슴속에 편지가 날라온 위안의 감정은 한줄기 봄바람이 흘러드는것처럼 후더운것이였다.

리승기는 편지내용을 머리속에 더듬으며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지태규가 일본에 왔다고 했지.…)

미국이 떠드는 세계주의가 실현된다고 하던 지태규였다. 망명객과도 같은 부평초신세… 그한테는 명예도 돈도 있다. 하지만 그한테는 조국이 없다. 민족의 과학에 한몸 바치지 않는 그가 무슨 진정한 학자일것인가.…

그의 인생은 아인슈타인의 쓸쓸한 미소보다 더 서글픈것이다. 그 자신도 이것을 충분히 느낄지 모른다.

아니다, 세계주의가 아니라 민족의 자립성이 생기고있으며 과학으로 하여 민족의 장래가 담보되는것이다.

리승기는 여전히 창밖을 내다보면서도 거기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채 그저 내심의 충격에 못이겨 사색에로만 줄달음치고있었다. 그는 깊은 숨을 후― 내쉬였다. 림창직의 죽음이후에 처음으로 가슴에 흘러드는 힘을 느끼였다.

그러자 문득 아인슈타인이며 지태규며 그런 학자들의 운명을 합친것보다 림창직의 길지 않은 삶이 훨씬 더 빛나보이는것만 같았다. 미래를 향해 빨리 달리려는 지향때문에 그는 합성탑옆에서 쓰러졌다. 따라서 그가 세운 탑은 허물어지지 않았다. 그것을 기초로 탑은 자꾸만 자라오를것이다. 그 탑은 참다운 과학이란 사대와 교조를 배격하고 민족의 구체적인 풍토에 맞아야 한다는 열렬한 호소를 담은 비문을 새기고 다른 탑들속에 특별히 높이 솟을 권리가 있지 않겠는가, 이런 강렬한 느낌은 림창직을 잃은 후에 리승기가 처음으로 딛고 올라서는 마음의 주추돌이다.

이때 분이가 문을 열고 웃방에 들어서더니 문가에 살풋이 앉으며 말했다.

《아무래두 저… 성희 에미의 맏오빠 말대루… 맏오빠는 성희 에밀 기어이 고향으로 데려가겠다니… 거기 가서 교편을 잡으면 아이들두 친정어머니 손에서 잘 키울수 있다면서…》

창문가에서 돌아선 리승기는 뭐라고 대답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이 순간 그의 눈앞에는 남편이 죽은 뒤에 학생들앞에 나섰던 금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니야, 그를 내곁에서 떠나보낼수 없어.…)

안해가 조용히 말을 이어간다.

《성희 에미의 말이 리선생과 운명적으로 얽힌 남편을 생각하면 떠나고픈 마음이 없다면서…》

리승기는 그냥 선채로 안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옳소. 그는 우리곁에 있어야 하오. 연구소에… 연구조수로… 장차로는 연구사로…》

한편 렴성근의 편지를 다 읽은 리재업은 마치 그 편지에 이런 리유와 대답이 있기라도 하듯이 그것을 들어 가벼이 흔들며 말했다.

《옳겠습니다, 그렇게 하는것이.…》

리승기는 머리를 끄덕여보이였다.

그리고나서야 마음이 다소 개운해지는것 같았다.

 

5

 

화학이 다른 과학보다 더 많은 학자들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방하민의 말은 옳았다. 그런 경우 대체로는 그들의 죽음과 부상이 이렇게나 저렇게 새로운 법칙과 교훈을 남기기마련이다.

하지만 방하민은 숫제 그런 학술상의 문제들을 더듬어볼 여유를 잃고있었다. 그런 속에서도 공포감과 함께 고정식을 계속했더라면 이런 사고는 없었으리라는 반발심을 어쩔수 없었다. 외국에서 이미 파악된 고정식이고 자기가 가져온 문헌자료도 아주 신빙성있는데 그것을 따랐더라면 아무리 고정식이 장치가 복잡하다 해도 비등식처럼 이런 결과야 초래할수 있었겠는가 하는것이였다. 여기 실정에서(그는 벌써 남의 일을 말하듯 이렇게 생각했다.) 장치를 공업화단계에서 해결하기 힘들다고 해서 비등식으로 빨리 넘는것은 학문에 너무 정치성만 부여하는것으로 보였다. 형제나라들이 있는데 공업화단계에서 그만한 장치설비를 수입해올수 없단 말인가.…

방하민은 검화공정에서의 산에 의한 방법인 자기의 론문따위는 생각지도 않았다. 가뜩이나 신심이 적던 그 론문에서 겸손히 물러나면서 빨리 쏘련으로 떠나 그곳 박사원에서 새로운 합성수지연구로 방향을 바꾸려 했던것이다.

그는 이번 사고의 원인을 림창직의 조작상실수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리승기의 그 비등식주장에서 찾고싶었다. 그것이 너무나 시기상조이고 서뿔리 도입된것만 같이 여겨졌다.

진정으로 림창직의 죽음이 가슴아프게 느껴지자 방하민은 자기가 그를 결사적으로 말려야 했으며 리승기를 설복시켰어야 했다고 후회하였다. 적어도 이번까지는 과학원측을 공식적으로 대변한 자기였는데 제가 떨떨해서 그런 사태가 빚어진것만 같았다. 물론 이러한 리성적인 사고들은 썩 후에야 방하민의 머리속에 떠올랐고 그 돌이켜질수 없는 사고가 저질러진 이후 몇밤을 그는 독한 술로 자신을 위안하려고 애쓰고있었다.

이사짐만 보내놓고 아직 늙은이들은 떠나지 않은 그 하숙집방안에서 그는 머리를 싸쥐고 침대에 앉았다가는 벌떡 일어나 우리에 갇힌 짐승마냥 빙빙 돌아치기도 하였다.

그는 벽에 늘 걸려있는 기타를 벗겨들고 타면서 음울한 목소리로 낮게 노래를 불렀다.

 

백설이 덮인 볼가강우를 달리는 삼두역마차

마부는 슬픈 노래 부르며 힘없이 머리숙이네

 

노래의 가사처럼 그도 힘없이 머리를 숙이며 기타를 부둥켜안았다. 그러다가는 기타를 활 침대우에 던져놓았다.

밤이면 안주도 없는 술을 들이키고는 침대에 쓰러졌다. 문득 녀인의 애통한 부르짖음을 들은듯싶어 와뜰 놀라 깨여나서는 다시 잠을 들지 못했다.

자기는 마땅히 림창직이를 제지시켜야 했다!

리승기도 바로 그곁에 있어야 했다!

그는 죽었고 자기나 리승기는 살았다. 그러니 자기도 리승기도 도덕적으로 파멸한셈이다.

죽은 사람은 살아있고 산 사람은 죽어버렸다는 독설과 역설이 취기가 오른 머리속을 맴돌았다.

방하민은 리승기를 찾아갔던 그 순간이 돌이켜졌다.

《그는 아까운 사람이였습니다. 리선생의 한쪽팔이였는데…》

크나큰 슬픔의 순간에 그것은 위선과 기만에 지나지 않았다.

금진을 위로하던 말도 그런것이였다.

《아주머니, 슬픔을 이겨내고 힘을 내야지요.》

남들보다 먼저 감히 그런 말을? 차라리 남들의 뒤에 숨어서 침묵을 지켜야 할것이였다. 금진의 오빠와 단 둘이 있게 된 기회에 그한테 한 말이 옳았을수도 있다.

《아무튼 누이동생을 어머님이 계시는 곳에 데려가시는게 좋을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매일, 매 시각 더 고통을 느끼게 될게라고 말해주어야 했다.

그렇다, 모두가 이 고통스러운 고장에서 떠나야 한다. 방하민은 그 순간에 자기가 리승기의 주위에서 그의 기슭이 허물어져내리고 봉우리조차 위태로와지기를 바란다고는 전혀 생각할수 없었으나 내심의 어디선가는 시기와 질투의 어두운 그림자가 배회한다는것을 어렴풋이 느끼였다.

그러자 그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환멸과 저주를 받아야 할 너는 무엇에 소용이 닿는 인간인가고. 다음순간에 다른 목소리가 부르짖는다. 하지만 보라, 매 개인의 가정과 사랑과 운명에 찾아드는 불행을.…

마침내 방하민은 림창직의 죽음까지도 그 출발을 리승기의탓으로 돌리고싶어졌다. 그는 자신을 두고 하던 비난마저 이제는 다 리승기한테 돌릴수 있는것이 얼마간 다행스럽기도 하였다.

그는 모든것을 잊으려고 다시 침대밑에서 부랴부랴 술 한병을 꺼내 고뿌에 콸콸 붓고는 단숨에 마셔버렸다. 빨리 여기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오만가지 상념을 밀어버리였다.

방하민은 자기의 론문을 신현석실장을 내세워서라도 리승기한테서 찾으려고 했었지만 그럴수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론문초안이 한통 있는것은 둘째치고 자기는 이제 쏘련학계가 인정하는 새로운 합성수지주제를 쥘테니까 말이다. 쏘련에 들어가 2년쯤 있느라면 뒤죽박죽이 된 자기의 정신생활을 정돈할수 있다는 희망도 생기였다.

어쨌든 래일 저녁은 여기를 떠날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전환점이 아닌가. 방하민은 그렇게 생각하니 일종의 용기조차 솟구쳤다.

아래방에선 역시 그들대로의 마지막밤을 이 집에서 보내는 늙은 내외가 깊은 잠에 들어있다.

바깥로인의 코고는 소리가 드르릉거리며 세게 들려왔다. 평상시에는 시끄러운 소음으로 되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그 소리가 인간의 육체와 정신에 깃드는 일상생활의 안정을 방하민한테 불러주었다. 방하민은 정상생활로 되돌아온것 같아 다소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로부터 십여일이 지나 방하민은 평양에서 외국으로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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