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 회)

 

7. 꽃목걸이사건이후

 

1978년 초엽이였다.

조선에서 부대통령급이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제는 조선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였고 주체의 조국에서 온다면 그가 누구든지 발벗고 뛰쳐나가 맞이할 차비가 되여있는 비슈와나스였다. 하물며 《부대통령》(부주석)이 오는데야.

그는 슬금슬금 꽃목걸이를 준비하였다.

인디아외교력사에서 자기 나라를 찾아오는 사절들에게 꽃목걸이를 걸어주는 법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것은 생각되지도 않았다.

비슈와나스는 잘 준비한 꽃목걸이를 보이지 않게 차에 싣고 비행장으로 나갔다.

비행기가 도착하였고 조선의 사절들이 비행기에서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마중나온 인디아외무상 나르씸하 라오가 그들앞으로 다가서고있었다.

이때였다. 불쑥 나타난 비슈와나스가 어쩔새없이 나르씸하 라오의 가슴에 꽃목걸이를 갖다대였다. 얼결에 그 꽃목걸이를 손에 받아든 외무상 역시 어쩔새가 없이 조선대표단 단장의 목에 그 꽃목걸이를 걸어줄수밖에 없었다. 이미 조선의 사절들이 그앞에 와섰던것이다.

신문들에 이 사진이 크게 났다. 그것은 물의였고 인기였다. 이것은 인디아사회계에 희소식으로 되였다. 이 나라의 풍습에 도대체 그런 례가 없었던것이다. 더더욱 정부급행사에는 없었다. 영국녀왕이 와도 그렇게는 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쑈까호텔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단을 위한 연회가 있을 때였다.

비슈와나스를 알아본 수상 모자르지 데싸이가 《비슈와나스, 당신 왜 그 꽃목걸이 가지고갔는가?》 하고 묻는것이였다.

그럴만도 한 일이였다. 나라의 외교력사상 없던 일을 저질렀으니 그것은 사실 정치가들과 외교관리들에게 있어서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상 시끄러운 일들을 산생시킬수 있는 요소로 될수 있기때문이였다.

비슈와나스는 갑자기 말문이 막히였다. 수상까지 물어보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하였던것이다.

《사실 나는 소박한 생각에서…》

비슈와나스는 말꼬리를 흐리였다. 그 모습이 능청스러운 태도로 보이였던지 수상은 어처구니없는 쓴웃음을 지으며 지나치고말았다.

모자르지 데싸이는 인디라 간디가 수상을 하던 그 전해까지 부수상으로 있던 사람이였다.

그 전해 인디아에서는 《정치적지진》이 일어났다고 볼수 있다. 그것은 전국에 《비상사태》를 실시하는 혼란이 있었고 그해에 진행된 국회선거에서 인디라 간디가 패했기때문이였다.

사실 인디아에서는 간디가 수상으로 집권한 10여년기간에 많은 성과들이 이룩되였고 결국 나라는 진보와 번영의 길로 나갔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임기 마지막기간에 주관주의적요소들이 나타났다. 그것이 본의든 본의아니든 대중은 정확히 가려보는것이였다. 그의 주관주의적표현은 우선 그가 외세에 의존하려고 하는데서 나타났으며 다음으로는 사람들에게 피임수술을 할것을 강제로 내려먹이는데서도 나타났다.

결과 소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간디를 견결히 지지해온 사람들중의 한성원으로서 비슈와나스는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어찌할수 없는 일이였다. 현실은 집권자가 주관주의, 관료주의를 부리면 오래가지 못한다는것을 말해주고있었다.

인디라 간디는 이해부터 간디국민대회당 위원장으로 되여 그 당을 이끌고있었다.

비슈와나스는 모자르지 데싸이와는 그가 부수상으로 있을 때부터 좋은 관계를 가지고있었다. 모자르지 데싸이도 활동적이고 정열적인 비슈와나스에 대한 인식이 나쁘지 않고있었다. 그는 정계에서 경험이 많은 사람이였다.

그런데 나르씸하 라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외무상에게는 이 일로 하여 아주 좋지 않게 보이게 되였던것이다.(나르씸하 라오는 모자르지 데싸이 다음 수상이 되였다.)

비슈와나스는 은근히 부아가 돋았다.

내가 무엇을 잘못한것이 있단 말인가. 내가 바라서 내가 하고싶은것을 했을뿐인데…

내 더 많은 꽃목걸이를 엮을테다.

오늘은 조선의 한사람에 불과했지만 래일은 전체 조선인민에게 꽃목걸이를 다 걸어줄테다. 아니, 크고큰 꽃목걸이를 엮어 조선의 땅덩어리에 통채로 걸어줄테다. 그렇게 못할것이 무엇이랴. 주체의 고향에, 주체의 조국에…

이것이 꽃목걸이사건이후 비슈와나스의 생각이였다.

그 사건이 있은 후 쳄스포드구락부에 나타난 그를 면목있는 외국기자들이 에워쌌다.

쳄스포드구락부는 뉴델리의 가장 중심부, 대통령의 저택과 국회청사가 있는 곳에 자리잡고있는 가장 급수높은 구락부였다. 그 주변에는 외무성, 국방성, 재정성을 비롯한 5개의 기본성이 주런이 있었다.

이 구락부는 1922년에 인디아주재 영국총독이 영국의 고관들을 위해 세운 구락부로서 독립전에는 인디아인들이 들어올수 없던 곳이였다.

5정보의 부지를 차지하고있는 이 구역에는 정구장, 수영장을 비롯한 운동시설들이 갖추어져있었고 2층으로 된 건물안에는 회의장, 식당을 비롯한 봉사망들이 다 있었다. 신사들은 여기서 회의도 했고 결혼식도 했으며 또한 각국의 이름있는 기자들이 여기 모여 한잔 마시며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다. 물론 그 리용비는 다른 구락부에 비해 높았다.

비슈와나스는 널리 알려진 이 구락부를 리용하여 국내외의 이름있는 작가, 기자들과 출판보도계의 거물들을 만나군 하였다.

쳄스포드구락부의 단골들은 비슈와나스를 기다렸다는듯이 그의 출현을 환영하였다. 촉각이 빠른 그들은 이미 그의 활동에 대해 냄새를 맡고있었던것이다.

《당신은 부자인데 왜 그처럼 조선을 숭배하는가?》

《당신들이 김일성주석의 접견을 한번 받아보라. 그러면 누구나 다 그이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고 조선을 따르지 않고서는 못배기게 될게다.》

《주체사상은 어떤 사상인가?》

《피가 끓고 심장이 뛰게 하는 사상이다. 당신들도 그 사상을 알면 세계가 달라질것이다.》

국제적인 광고기지인 《인터라즈》사장이 주체사상신봉자가 되여 조선의 김일성주석을 스승으로 받들어모신다는 소식은 점점 국내외로 퍼져갔다.

비슈와나스는 조선에 걸어줄 큰 꽃목걸이를 엮어나가기 시작하였다.

그 꽃목걸이는 이제 뉴델리에서 진행하게 될 첫 주체사상국제토론회의 성과적개최였다.

그는 그 준비사업을 더욱 다그쳐나갔다.

전해에 평양토론회에 참가하고 김일성동지를 또다시 만나뵙고 돌아온 그는 새로운 흥분으로 학회성원들과 함께 이 사업에 여념없는 나날을 보내였다.

우선 그는 국제토론회를 앞두고 분위기도 조성하고 경험도 얻기 위하여 1978년에 전국적인 주체사상토론회를 뉴델리와 파트나 두 곳에서 보다 크게 조직하려고 결심하고있었다. 그는 자기의 이 계획을 동료들과 합의하였다.

준대륙이라고 불리우는 인디아땅에서의 전국적인 토론회는 사실상 지역적인 국제토론회의 범위보다 결코 작다고 말할수 없는것이였다. 한나라의 범위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참가하는 민족수나 인원수에 있어서 지역적인 국제토론회보다 더 많을수도 있는것이였다. 사실상 인디아 한나라의 인구수보다 더 작은 인구를 가진 대륙도 있는것이였다.

이러한 인디아에서의 전국적인 토론회의 영향력은 참가한 그 민족이나 종족들의 줄기를 타고 전세계에로 뻗치게 되는것이였다. 바로 이러한 땅에 비슈와나스가 주체사상신봉의 화신으로 거목과도 같이 떡 버티고 서있는것이였다.

1978년에 들어서면서 비슈와나스는 조선과 접촉하는 보다 대중적인 모임인 협회같은것을 하나 결성할 생각을 하고있었다.

여기에 각계각층 군중을 광범히 망라시킴으로써 그 조직을 통하여 주체사상신봉자들을 더 많이 육성하자는것이였다. 그리하여 그는 학회성원들에게 인원을 선발해올데 대한 과업을 주었다.

그자신이 앞장서서 사람들을 선출해왔다. 그때 그가 선발해온 사람들중의 한사람이 바로 고빈드 나라인 스리바스타바였다.

고빈드는 인디아공산당 청년사업부에서 일하고있었다. 그는 눈에 영채가 도는 젊은이였다.

인디아 럭크노우종합대학 정치학부를 졸업한 그는`당시 새 사회를 갈망하는 지식청년들이 흔히 걷는 그길, 맑스―레닌주의를 탐구하는 길을 택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공산당에서 근무하면서 여러 신문들에 맑스―레닌주의를 옹호하는 글들을 기고하고있었다.

이 세상에는 정신적인 인간이 되고싶은 소원을 품는 청년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길을 잘 들어야 건전한 정신을 소유할수 있는것이다.

고빈드는 참된 인생의 길을 모색하고있었다. 《투쟁은 곧 행복이다.》는 맑스의 좌우명을 기발처럼 내흔들며 사회적정의를 위한 투쟁에 젊은 걸음을 내짚었지만 현실은 단순하지 않았고 생활은 고전가들의 《명제》와 《예언》대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그는 정신적좌절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는 동서방의 정치뉴스를 다루면서 차츰 그 어떤 리론에도 기울어지지 않는 객관성, 엄정중립을 지키는 방향으로 나가고있었다.

이러한 그를 바로 그 당의 총비서가 비슈와나스에게 소개하였던것이다.

비슈와나스는 무소속이였지만 인디아국민대회당, 인디아공산당, 인디아공산당(맑스주의)과는 긴밀한 련계를 가지고있었다.

이 3개의 당은 인디아에서 제일 큰 당들이였다. 이 당들과의 긴밀한 련계가 있음으로 하여 어느 정당에도 속해있지 않았지만 비슈와나스는 그 사회에서 언론활동도 기업활동도 구애됨이 없이 벌리며 사회생활을 원만하게 펴나가고있는것이였다.

학회성원들이 선발해온 많은 사람들로 비슈와나스는 인디아조선친선협회를 결성하도록 뒤에서 조직하였다. 하지만 그는 의도적으로 정면에 나서지 않았다. 이미 《주체사상연구학회》의 서기장으로 되여 맹활약을 하고있는 그가 거기에 얼굴을 비친다는것은 그 단체의 대중성을 약화시키는 후과를 가져올수 있는 요소로 될수 있었기때문이였다.

또한 비슈와나스는 정부가 남조선과의 관계도 그닥 나쁘지 않기때문에 보다 광범한 사람들을 인입하기 위해서는 남조선과 등을 돌려댄 자기가 그 단체의 정면에 나서지 않는것이 좋을것이라고도 생각하였다.

그의 생각은 옳았다. 그 단체는 말그대로 친선협회인것이다. 비슈와나스는 인디아조선친선협회의 위원장으로서는 이름있는 외무상 피. 쉬브 샹카르를 내세웠다. 그리고 서기장으로는 자기의 친구 오. 피. 만수리를 추천하게 하였다. 만수리는 자유기자였다. 비슈와나스는 이 협회의 부위원장이라는 명색을 지니였을뿐이였다. 모든것은 그의 계획대로 되였다. 문제는 뒤에서 이들을 잘 조정하며 밀어주는것이였다.

그때 비슈와나스는 건강이 나빠지면서 치료를 받아야 할 몸이였다. 그리하여 가족들과 동료들은 그에게 시간을 내여 치료를 받을것을 권고하였다. 하지만 이 거목은 결코 누울수가 없었다. 크고큰 꽃목걸이를 엮으려면 절대적인 시간이 모자라는것이다.

《일단 결심하고나선 길인데 어떻게 잠시라도 지체할수 있겠는가.》

비슈와나스의 투지는 변함이 없었다. 아마도 그것이 없으면 비슈와나스가 아닐것이다. 그는 휴식을 모르고 전국토론회준비를 다그쳐갔다.

바로 이런 때 도꾜에서 주체사상국제연구소가 창립되였다는 소식이 온 세상에 알려졌다.

그날은 1978년 4월 9일이였다.

비슈와나스는 야스이 가오루와 오가미 겡이찌의 미더운 얼굴들을 보는듯 하였다. 그들은 지난해 가을 평양에서 돌아가 국제연구소의 창립을 위하여 맹활약을 하였던것이다.

이미 불치의 병에 걸려있던 야스이 가오루는 올해초부터 자리에 눕게 되였으나 병원에서 전화로 그 준비사업을 끊임없이 다그쳐왔던것이다.

그리고 그자신은 창립대회에서 할 보고문을 준비하였다.

《존경하는 조직위원회 위원들!

친근한 동지들과 벗들!

우리모두가 오래동안 바라고 기다리던 주체사상국제연구소창립대회는 드디여 오늘 그 막을 올리게 되였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보고문에는 주체사상이 창시되게 된 경위와 그 사상리론적내용 및 생활력이 개괄되여있었고 새로 창립되는 주체사상국제연구소의 사명과 목적, 그 의의가 서술되여있었다.

야스이 가오루의 이렇듯 헌신적인 투쟁과 조직위원회 사무국성원들의 적극적인 활동 그리고 일본국내외의 수많은 주체사상신봉자들의 지지와 성원속에 국제연구소는 마침내 자기의 탄생을 전세계에 알리게 되였던것이다.

창립대회에서는 야스이 가오루를 대신하여 일본 김일성주석저작연구회 전국련락협의회 리사 구리끼 야스노부가 《주체사상을 따라배우자》라는 기조보고를 하였다. 또한 대회에서는 《주체사상은 자주시대의 성스러운 기치》라는 창립선언이 발표되였고 규칙이 채택되였다. 대회에서는 야스이 가오루가 국제연구소 리사장으로 선출되였다.

주체사상국제연구소의 창립과 이 대회에서 한 진보적인사들의 심장의 웨침은 비슈와나스와 전세계 주체사상신봉자들에게 커다란 고무적힘을 안겨주는 중대소식이였다. 이제는 모든 대륙들에서 국제연구소를 거점으로 련계를 취하며 주체사상연구보급을 더욱 심화시켜나갈수 있게 된것이였다.

모든 조직들은 자기의 정연한 체계를 가질 때 보다 큰 성과를 기대할수 있는것이다.

비슈와나스는 생각하였다.

로조단체 하나만 보더라도 세계적으로 련결시키기 위하여 나라별, 지역별로조기구들이 있고 그우에 국제기구가 있지 않는가.

세계를 둘러보면 별의별 국제기구들이 무수하다. 국제련합기구(유엔), 국제적십자, 국제법협회, 세계평화리사회, 세계보호련맹, 세계발명 및 저작소유권기구 등…

세상에 《국제》와 《세계》라는 단어가 붙은 기구들은 이루 다 꼽을수 없을 정도이다. 그중에는 정부적기구도 있고 비정부적기구도 있다. 또한 상설적기구도 있고 비상설적기구도 있다. 그 기구들중에는 허울좋은 명색뿐 실지에 있어서는 유명무실한 기구들도 많다.

하지만 주체사상연구조직은 그 결성부터 다르지 않는가.

시대적인 하나의 사상으로 굳게 단결되여 결성되는 조직!

그런 조직, 그런 기구는 틀림없이 가장 잘 조직된 째인 집단으로 될것이며 영원한 생명력을 가지게 될것이다.

비슈와나스는 주체사상국제연구소가 세계에서 제일 큰 국제기구로 되여야 한다고, 아니 될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보라, 현재도 세계에는 100여개 나라들에 주체사상연구조직이 결성되여있으며 그 신봉자들은 날을 따라 점점 모든 나라들에 확산되여가고있지 않는가.

주체사상연구보급사업은 진리를 사랑하는 일부 선각자들속에서 진행되던 1960년대로부터 세계의 일부 지역과 나라들에서 대중적으로 벌어지던 1970년대초를 거쳐 1970년대말에는 세계의 각이한 사회제도를 가진 수많은 나라들에서 본격적으로 진행됨으로써 이 사업은 국제적인 사업으로 확고히 전환되게 된것이다.

비슈와나스는 세계의 이 많은 조직들과 신봉자들을 하나의 정연한 체계에 묶어세우는것은 더는 미룰수 없는 현실의 성숙된 요구라고 생각하였다.

그렇다. 주체사상국제연구소를 축으로 하여 각 대륙을 대표하는 지역연구소들도 내와야 한다.

주체사상국제연구소는 사무국성원들을 둔 상설적인 국제기구이다.

비슈와나스는 아시아지역을 대표하는 상설적인 주체사상연구조직을 창립할 궁냥을 속으로 하고있었다.

그는 그날을 향해 더욱 분발하여나섰다.

비슈와나스는 온 가족까지 동원시켜 전국토론회준비를 다그쳐갔다.

그리하여 그해 12월초 뉴델리에서는 주체사상에 관한 제1차 인디아전국토론회가 성과적으로 진행되게 되였다. 이 토론회는 인디아땅에 주체사상열풍을 안아오는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

그후 그는 숨돌릴 사이도 없이 곧 파트나로 갔다. 빨리 가서 우선 조직사업을 선행시켜놓고올 작정이였다.

당시 가정적으로는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여 위급한 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더 빨리 갔다오려고 서둘렀던것이다.

다른 사람을 보낼수도 있었지만 이번 길만은 자기가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부지구에서 열리는 첫 토론회였기때문이다. 앞으로의 영구성을 위해서도 시작부터 기틀을 잘 마련해놓는것이 중요하였다.

파트나는 뉴델리에서 1 000여키로메터나 떨어져있는 비하르주의 소재지였다. 거기서 토론회를 개최함으로써 나라에 불어오기 시작한 주체사상열풍을 전국의 방방곡곡에로 급속히 확산해가자는것이였다.

파트나에 도착한 그는 주장관을 만났다. 우선 이 도시에서 토론회를 주관할수 있는 적합한 인물을 하나 찾아 내세우자는것이였다. 그래야 더 많은 사람들을 인입하여 토론회를 성황리에 진행할수 있게 되는것이다. 또한 토론회에 그치는것이 아니라 이것을 기화로 하여 동부지구에 연구소조망을 많이 내오게 하자는것이였다.

일은 혼자서는 못하는 법이다. 많은 사람들을 인입할수록 일은 더 빨리 잘되는것이다. 비슈와나스는 이것을 잘 알고있었다. 하기에 그는 이 지구에서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불러일으킬만한 영향력있는 인물을 고르는데 각별한 의의를 부여하고있었다.

주장관은 파트나종합대학 부총장인 티. 비. 무케르지를 소개하였다.주장관은 무케르지가 학식도 있는 사람이고 연설도 잘한다고 하는것이였다. 그만하면 나이도 있고 사회적직책도 있으므로 대번에 호감이 갔다. 이리하여 비슈와나스는 비하르주장관의 소개로 무케르지를 만날수 있었다. 만나보니 그는 좋은 사람이였다.

아주 적임자였다.

세계의 여기저기서 울려나오는 주체사상에 대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있던 때에 전국적인 조직인 《주체사상연구학회》 서기장이 나타난것으로 하여 그는 구세주라도 만난듯이 매우 반가와하였다. 《인디안 타임스》 주필이며 《인터라즈》 사장인 그의 이름을 누가 모르랴. 그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시기적절한 시기에 약속이나 한듯이 비슈와나스가 나타났던것이다.

같은 뜻을 품은 사람들은 한길에서 만나기마련인가보다.

인류의 리상사회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주체사상을 따르는 한길에서 만나는것은 자연스러운 일인듯싶었다.

비슈와나스는 많은 자료들을 가지고왔다.

그들 둘은 하루종일 이야기했고 또 한밤을 지새웠다.

비슈와나스는 자기의 경력을 소개했고 자기가 주체사상을 신봉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도 허심하게 다 터놓았다. 그래야만이 함께 한길을 갈수 있는 동료로서 서로 인생의 리해를 더 깊이 하고 굳게 손을 잡을수 있는것이였다.

그는 진정으로 사람들을 대했다. 진정을 가지고 대하면 모든것이 다 좋아지는것이다. 그는 매 개인의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되여있는것을 더 중시하였다.

비슈와나스는 밤가는줄 모르고 주체사상을 놓고 자기가 아는껏 또 자기가 생각하는 모든 견해를 다 피력하였다.

무케르지는 리해가 갔다. 많은것을 정확히 아는 사람일수록 새로운 사상의 가치를 빨리 포착하는것이다.

지금까지 인류는 까다로운 론리로 수많은 철학을 내놓았고 또한 그것들은 모두 인류리상사회의 실현을 표방해나섰지만 그 어느것 하나 력사발전을 추동하는 결정적요인을 밝혀내지는 못하지 않았는가?

바로 그것이였다. 무케르지는 자기가 선행고전가들의 철학을 신봉하면서도 불만을 느끼고 날이 갈수록 깊은 모순속에서 헤여날수 없었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생각되는것이였다.

력사상 처음으로 사람을 위주로 하여 철학의 근본문제를 제기하고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세계에 대한 견해, 세계에 대한 관점과 립장을 밝힌 철학, 바로 그것으로 하여 력사발전이 자연사적과정이 아니라 력사의 주체로 된 인민대중의 목적의식적인 활동에 의하여 힘있게 추동되게 한 철학…

이것은 독창적이다. 정녕 주체사상이야말로 현시대 인류가 반드시 신봉해야 할 유일한 철학적세계관이 아닌가!

그에게 있어서 하루밤 주체사상신봉자와 이야기한것은 오랜 세월 책을 읽은것보다 더 큰 인생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것이였다.

무케르지는 비슈와나스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위대한 철학이요! 내 따라가겠소.》

다음날 비슈와나스는 파트나종합대학의 넓은 강당의 연탁에 나섰다. 이것은 무케르지가 솔선 나서서 조직한것이였다. 무케르지는 자기보다 나이는 아래이지만 자기보다 먼저 주체사상에 접하고 주체사상의 조국을 방문한 비슈와나스를 선배로 내세웠다.

비슈와나스는 파트나시의 여러 인사들과 대학교원들, 학생들앞에서 현시기 급속한 속도로 전세계에 파급되여가고있는 주체사상의 원리에 대하여 개괄강의를 하였으며 또한 주체사상의 창시자이신 위대한 김일성주석을 직접 만나뵈온데 대한 자기의 소감을 아무런 꾸밈도 가식도 없이 이야기하였다.

비슈와나스의 연설은 참가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그들이 이제 진행되게 될 토론회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대하게 하는 계기로 되였다.

파트나토론회준비를 위한 비슈와나스의 노력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무케르지와 함께 주장관을 다시 만나 주에서 참가할 사람들의 선정과 토론자들 그리고 토론제목과 내용, 회의장소, 날자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락착하고야 그곳을 떠났다.

뉴델리에 도착하니 아버지의 병세는 차도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를 위해 할수 있는 모든것을 다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파트나토론회준비를 미루지 않고 일정대로 계속 내밀어갔다.

뉴델리와 다른 주들에서 참가할 사람들의 명단을 종합했고 필요한 조직사업을 빈틈없이 해나갔다.

토론회날자는 점점 박두해왔고 아버지의 병세는 더 위급해가고있었다.

비슈와나스는 병원에서 떠나지 못하고있었다. 그것은 맏자식으로서의 응당한 도리였다.

말비아를 비롯한 많은 동료들이 아버지의 병문안을 왔다. 아버지는 얼굴에 산소마스크를 쓰고있었다. 동료들은 자기들이 파트나토론회를 성과적으로 치를테니 걱정말고 아버지를 잘 돌보라고 부탁하였다. 비슈와나스도 이 정황에서 떠나기를 꺼려하였다.

그는 줄곧 아버지곁에 붙어있었다.

바드리 나트 취바는 혼미한 정신을 애써 가다듬으며 자식의 이 모든 움직임을 말없이 가늠하고있었다. 언제나 자식이 가는 길을 축복해주며 그길에 길함만이 있기를 빌어온 그였다.

바드리 나트 취바는 누운 상태에서 어서 떠나라고 손짓하였다.

《아버지, 일없습니다.》

비슈와나스는 아버지를 안심시키느라고 조용히 그리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또 손짓했다.

《아버지, 가지 않아도 됩니다.》

그 무엇을 생각하는듯 바드리 나트 취바는 잠자코있었다. 그러다가 불쑥 산소마스크를 자기 손으로 쭉 벗기며 그는 숨차게 말을 뱉았다.

《맏이야, 너 갔다올 때까지 내… 내가 죽… 죽지 않는다.》

비슈와나스는 당황하여 급기야 산소마스크를 다시 씌워주면서 대답하였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이런 사연을 안고 비슈와나스는 파트나에서 진행되는 주체사상전국토론회에 참가하게 되였다. 학회성원들도 뜨거운것을 삼키며 더욱 열정적으로 토론회를 대했다.

토론회는 량일간에 걸쳐 성과적으로 진행되였다. 모든것이 비슈와나스의 계획대로였다. 그는 정면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조직사업을 치밀하게 해나갔다.

주장관을 비롯한 여러 각료들과 인사들의 축하연설이 있은 다음 말비아가 《주체사상은 새 사회건설의 길을 밝혀주는 새로운 학설》이라는 제목으로 보고를 하였다.

그다음 많은 사람들이 토론하였다. 그들중에는 머리에 터번을 쓴 시크교도들도 보이였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비슈와나스는 피. 엘. 쏜디가 생각났고 그가 그리웠다. 그가 만약 살아있다면 교도에 관계없이 비슈와나스가 초청하는 이 회의에 기꺼이 참가하였으리라.

피. 엘. 쏜디는 시크교였다.

시크교는 16세기 인디아에서 발생한 종교로서 근 백년이래 동부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과 영국, 카나다, 미국 등지에 퍼지였다.

지금 인디아에는 시크교도가 250만명정도 있고 세계적으로 볼 때에는 300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인디아의 서로 다른 교파들도 자주, 평화, 친선의 이 리념아래에는 이처럼 하나같이 다 모여드는것이였다.

이렇게 되여 인디아의 동부지역에도 주체사상의 기운이 고조되기 시작하였으며 파트나종합대학을 비롯한 여러곳에 주체사상연구소조들이 나오고 비하르주주체사상연구학회가 조직되게 되였다. 무케르지는 그 학회의 위원장으로 선출되였다.

인디아에서 한개 주라면 사실 한개 나라보다도 더 클수 있는 범위였다. 무케르지가 인디아주체사상연구학회대표단 단장으로 조선을 처음으로 방문하였을 때 그는 바로 이 비하르주주체사상연구학회 위원장의 명의로 위대한 수령님의 접견을 받았던것이다.

모든 일은 노력하면 되는것이였다. 비슈와나스는 일을 성과적으로 마친 즐거운 기분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고도로 떠오른 비행기의 시창아래로 은하수마냥 길게 늘어진 간지스강이 흘러가고있었다. 기분이 떴다. 비슈와나스의 가슴속에서는 저절로 시줄이 흘러나왔다.

 

오 간지스강이여, 너도 기뻐하여라!

이 땅에 주체의 태양이 빛을 뿌리니

너의 젖줄기를 물고자란 이 나라의 아들딸들이

인간의 참된 삶을 누리며

이 땅의 주인으로 너를 지키게 되리라

너의 흐름과 더불어 영원히!

 

비슈와나스는 저녁늦게 뉴델리에 도착하였다. 그는 피로를 풀새도 없이 곧장 병원으로 차를 달리였다. 아버지가 기다린다고 생각되였기때문이였다. 한시바삐 보고해야 했다.

파트나토론회기간에 아버지의 병이 중하다고 전화가 왔었지만 그는 자리를 뜨지 않고 끝까지 토론회를 치르었다. 갈 길이 정해진 이상 가야 하기때문이였다. 그것이 그의 신조였다. 그 무슨 장벽이 앞을 막아도 갈 길은 지체없이 가야 한다는것이 이미 굳어진 그의 신조였던것이다.

병원에는 가족들이 모두 와있었다. 비슈와나스는 가슴이 덜컹하였다. 급히 아버지곁으로 다가간 그는 무릎을 꿇으며 앉았다. 눈을 뜨고 자는듯 조용히 한자세로 누워있는 아버지는 아직 정신이 있었다.

《아버지, 제가 왔습니다.》

절절히 부르는 아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바드리 나트 취바의 눈은 좀더 크게 떠지는것이였다. 그는 기다리던 아들을 일별한듯싶었다.

《아버지, 파트나주체사상토론회는 아주 잘되였습니다.》

비슈와나스는 눈물을 머금고 이렇게 자기의 걸음을 보고하였다.

곁에 선 가족들은 모두 눈에 손수건을 가져갔다.

《아버지!》

《…》

정기가 희미해가던 그 눈에 별안간 빛이 감돌더니 아버지는 알릴듯말듯 소리없이 웃음을 짓는것이였다. 말할 기운이 이미 없어진 아버지는 그렇게 아들의 장한 걸음을 칭찬해주는것이였다. 마지막기력을 모아 혼미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바드리 나트 취바는 아들의 소식을 기다리고있었던것이다.

아버지의 그 웃음, 그것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모습이였다. 그 모습은 아들에게 남긴 더없이 귀중한 선물이였으며 또한 이 세상에 남긴 당부였고 믿음이였다. 그 웃음은 한뉘 남을 치료해주며 선한 일을 해온 아버지의 영원한 모습이였으며 아버지가 이 세상에 남긴 모든것이였다.

토론회를 성과적으로 치르고 돌아온 아들의 장한 모습을 보며 바드리 나트 취바는 편안히 잠든듯 하였다.

비슈와나스는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다.

얼마나 웅심깊은 아버지였던가. 엄하면서도 언제 한번 이 아들이 가는 길을 막아나선적이 없는 아버지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지켜보고있었다. 이 아들이 가는 길에 그 무슨 일이 있을가 걸음걸음 지켜보고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보는 책들을 모두 짬짬이 보고있었다. 그리고 말없이 리해하고있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아들모르게 회의장에 들어와 아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위대한 그 사상에 감동을 표시하군 하였다.

엄격하면서도 다심했던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너무도 많았다. 이 끝없는 추억이야말로 아버지가 넘겨준 진짜 유산이였다.

그렇게 아버지는 갔다. 어제날 숱한 사람들의 병을 돌보아주던 취바박사는 그렇게 조용히 웃으며 갔다. 말없는 그 웃음으로 아들의 앞길을 축복해주며…

아버지는 갔지만 비슈와나스의 가슴속 깊은 곳에는 아버지앞에 그리고 시대와 력사앞에 자기가 할 의무를 성실히 지켰다고 생각되는 그 무엇이, 보다 숭고하고 거룩한 그 무엇이 무거웁게 자리를 잡는것이였다.

그날은 1978년 12월 27일이였다. 당시 바드리 나트 취바의 나이는 76살이였다.

비슈와나스는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 자기 아버지의 사망에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시하시여 조전을 보내주실줄은 정말 몰랐다.

조선대사관을 통해 그 조전을 받아든 비슈와나스의 가족은 한번 맺은 인연을 잊지 않으시고 영원한 전우로 대해주시며 언제나 굽어살펴주고계시는 그이의 하늘같은 그 의리, 그 인품에 감동되여 깊이 머리를 숙이였다.

비슈와나스의 가족만이 아닌 인디아의 모든 주체사상신봉자들이 국경넘어 발산하는 그이의 위대한 그 동지애에 깊이 감심되여 주체사상을 따르는 길에 더 분발하여나섰다.

아버지가 사망한지 삼일째 되는 날이였다.

비슈와나스는 영국에서 오는 한장의 전보를 받았다.

그는 이미전부터 영국에 드나들면서 영국의 영향력있는 인물들과 영국조선친선협회를 내올데 대하여 합의하고 그 준비사업을 뒤에서 적극 밀어주고있었던것이다. 또한 런던에 적지 않게 자리잡고있는 인디아계영국인들속에도 비슈와나스의 힘은 막강하게 뻗치고있었다.

전보는 바로 그들에게서 온것이였다. 내용인즉 새해를 맞으며 협회를 결성하겠는데 비슈와나스가 빨리 와달라는것이였다. 그 협회결성식장에 모실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초상화를 비슈와나스가 모시고가도록 이미 약조가 되여있었던것이다.

당시 조선과 영국간에는 그 어떤 외교관계도 없었으므로 영국인들은 조선과 관련한 모든 자료를 비슈와나스에게 부탁하고있었던것이다.

이러한 전보를 앞에 놓고 가족들은 비슈와나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관례대로 하면 아버지의 장례행사일정이 채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가족의 그 누구도 집을 떠날수 없게 되여있었던것이다. 특히 맏자식은 더했다. 가문의 책임을 자식들이 진다는 의미에서 맏자식이 장례행사를 시작부터 끝까지 주관하게 되여있는것이였다.

인디아의 장례행사는 전통적으로 16일로 되여있다. 장례일정은 다음과 같다.

첫 3일간은 자식들과 친척들이 모여 장례를 치르는 날이다. 인디아에서는 죽은 사람을 그날에 화장하는것으로 되여있다. 그런데 이 행사는 반드시 해가 지기 전에 하여야 하는것이다. 때문에 해가 졌을 때 죽은 사람은 다음날 해가 뜰 때 내간다. 이 나라에서 화장풍습은 수천년전부터라고 한다. 오늘까지도 농촌들에 봉건의 짙은 구름이 무겁게 드리운 이 나라에서 수천년전부터 화장풍습이 있은것은 놀라운 일이다. 아마도 그것은 불교의 발생지이기때문인지.

령구는 자식들이 메고나간다.

령구를 화장한 다음에는 모두가 앉아서 머리를 숙이고 명복을 빈다.

4일째 되는 날은 재가루를 간지스강과 고인의 고향마을에 뿌리는 날이다.

인디아에서 간지스강은 수천년전부터 성스러운 강으로 여겨져왔기때문에 빈부의 차이에 관계없이 모든 집들에서 이 강에 고인의 재가루를 뿌리는것이 하나의 관례로 되여있다. 여기에는 부모들의 대를 이어 자식들이 모든 일을 다 잘해나간다는 뜻도 있다고 한다. 물론 바드리 나트 취바도 화장하여 그 재가루를 간지스강에 뿌리고 그 일부를 판도리비비마을의 벌에 뿌리였다.

조객을 받다가 13일째 되는 날에는 큰 홀에 모여 영결행사를 한다. 고인이 어떤 사람이였는가에 따라 여기에 참가하는 인원은 적을수도 있고 많을수도 있다. 보통 빈민들의 조객은 몇십명에 불과하지만 명망있던 사람들이였거나 부자들이였던 경우에는 조객의 수가 몇천명도 넘는다.

이 행사에서는 고인의 측에서 자격이 있는 사람이 발언하게 되여있다. 그 발언은 대체로 맏자식이 하는것이였다. 그아래자식들은 하얀 천으로 둘둘 감은 모자를 머리에 쓰고 서있는다. 이날에 중들을 몇명 불러서 종교행사를 하고 식사를 시킨다.

이날이 지난 뒤에도 16일까지는 행사가 끝나지 않은것으로 되여있다. 고인의 모든것들을 처리하여야 하는것이다.

고인의 옷들은 다 고아원에 보낸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고인의 옷이 아니라 집에 있는 옷들을 자선식으로 나누어주기도 한다.

비슈와나스의 어깨에는 아직 이러한 장례행사를 주관하여야 할 의무가 지워져있는것이였다.

그러나 그의 가슴속에는 그 어떤 풍습의 바줄에 한번 내디딘 자기의 발걸음을 비끄러맬수 없다는 생각이 더 앞서고있었다.

지체없이 가야 했다.

그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중대한 일은 없는것이였다. 결심은 섰으나 선뜻 말이 나가지 않았다. 전통적인 민족의 풍습을 어긴다는것은 선친앞에 효도를 다하지 못하는것이라는 죄의식이 은연중에 마음 한구석에서 꿈틀거리고있었기때문이였다.

이미 결혼식때 전통적인 풍습을 한번 어긴바 있는 비슈와나스였지만 장례행사는 조상을 모시는 문제이므로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것이였다. 결혼식때에는 아주 잘되였다고 쾌재를 불렀지만 지금은 마음대로 선뜻 행동을 할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동의를 받아야 했다.

그는 벽에 걸린 아버지의 초상을 우러렀다.

《아버지!》 하고 마음속으로 아버지를 불렀지만 더는 말이 나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예나 다름없이 인자하게 자식을 내려다보고있었다. 그 모습은 비슈와나스를 파트나로 떠밀던 정겨운 그 모습이였다. 바드리 나트 취바는 맏아들의 심정을 어느새 다 알고 이렇게 말하는듯싶었다.

《맏이야, 어서 떠나거라. 갈 길을 지체해서는 안되느니라.》

하지만 말이 나가지 않았다. 그때처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이 한마디만 하면 떠날수 있으련만 왜서인지 더는 말이 나가지 않았다.

누구에겐들 자식된 도리를 다해 마지막까지 선친을 바래워드리고싶은 심정이 왜 없으랴.

이때 그를 떠민것은 두르가데비였다.

《갈 길을 지체하면 큰일을 못하느니라. 어서 떠나거라.》

《어머니!》

이 순간 비슈와나스는 어머니의 그 주름잡힌 얼굴에서 오늘까지 받으며 살면서도 다 느끼지 못하였던 끝모를 사랑의 젖줄기를 다 받아안는듯싶었다.

어쩌면 그 나이에 자식의 속마음속을 그리도 잘 알아주실가?!

어쩌면 그 나이에 시대의 사상을 따라가는 이 아들의 길을 말없이 지지해주고계실가?!

힌두어와 영어로 된 김일성주석의 로작들을 짬짬이 읽어온 어머니였다.

비슈와나스는 눈물이 났다. 고마왔다.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바라보는 이 순간에 철이 다 드는것 같았다. 이렇게 훌륭한 어머니가 나를 지켜주고있었단 말인가!

오해에 앞서 리해하라는 좌우명을 안고살아온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고급한 지성인이였으며 재산도 가지고있은 상류층이였다. 하지만 언제한번 티를 낸적이 있었던가. 손수 자식을 키우느라 자손을 키우느라 허리펼새없이 한뉘를 보내신 어머니였다. 잘 모시고싶었다. 이제라도 잘 모시고싶었다.

두르가데비는 아들의 손을 잡으며 거듭 말하였다.

《떠나도록 해라. 아버지도 그걸 바라실게다.》

그러자 모든 가족들이 두르가데비를 지지해나섰다. 동생들도, 처와 자식들도 여기 일은 걱정말고 어서 떠나라고 비슈와나스를 떠밀었다. 온 가족의 마음이 그가 가는 길에 따라섰던것이다.

어머니의 그 마음, 온 가족의 그 뜨거운 마음에 떠받들려 비슈와나스는 일신상의 그 어떤 고통도 불행도 다 이겨내며 주체의 한길로 줄달음쳐갔다.

그는 그날로 비행기를 탔다. 한시도 지체할수 없는 주체의 길이였다.

참으로 주체사상은 그의 생활의 전부였고 생명이였다.

그는 걸음걸음 위대한 스승의 혁명생애에 비추어 자신을 생각했다.

김일성주석!

열네살 어리신 나이에 집을 떠나 나라를 찾는 혁명의 길에 나서신 그이는 그길에 가정도 청춘도 다 바친 불굴의 투사, 절세의 애국자이시였다.

그이이시야말로 부모의 뜻을 이룩하신 효자중의 효자이시였으며 인민의 숙원을 풀어주신 성인중의 성인이시였다.

비슈와나스는 그이께서 걸어가신 큰 자욱우에 자기의 작은 발자국을 놓으며 끝까지 따라가고싶었다.

그이의 혁명생애를 천만분의 일이라도 따르고싶은것이 그의 마음이였다.

그는 기아와 빈궁이 범람하는 인디아의 진정한 평등과 인간해방,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성스러운 길에 가정도 자신도 모든것을 다 바치고싶었다.

영국의 동료들은 비슈와나스의 도착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비슈와나스는 아무 일도 없은듯 흔연히 웃으며 그들의 마중을 받았다.

이리하여 1979년 1월 1일 런던에서는 김일성동지의 초상화를 모시고 영국조선친선협회를 결성하는 모임이 성대히 진행되였다. 이 모임에는 무려 300여명의 사람들이 참가하였다. 그들모두는 회원으로 등록된 사람들이였다.

결성모임에서는 김일성동지께 올리는 편지를 채택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해 9월 비슈와나스를 만나신 석상에서 자신께서 그 편지를 받아보았다고 말씀하시였다.

영국에서의 일정을 성과적으로 마친 비슈와나스는 그 걸음을 서부도이췰란드(당시)로 이어갔다. 그는 곧장 집으로 갈수가 없었던것이다. 할수 있는껏 더 많은 일을 하고 돌아가는것이 자기의 길을 떠밀어준 어머니에게 그리고 가정의 모든 혈육들에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되였기때문이였다.

서부도이췰란드의 프랑크푸르트에는 비슈와나스와 거래가 있는 실업가가 있었는데 비슈와나스는 그를 통해 그곳의 적지 않은 사람들속에 주체사상에 대한 좋은 영향을 주고있었던것이다. 그 실업가의 이름은 니먼이였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비슈와나스는 니먼을 회장으로 하는 주체사상연구학회를 결성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렇듯 비슈와나스는 그해의 신년을 런던과 프랑크푸르트에서 보내며 줄기찬 활동을 벌려나갔다.

일을 성과적으로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온 가족이 모인 앞에서 한가정의 아버지로서만이 아니라 주체사상신봉자로서 하고온 일에 대하여 보고하였으며 인디아땅에 주체사상을 선전하는데서 자기의 가정이 앞장설데 대하여 당부하였다.

모든것을 다 바쳐 주체사상국제토론회를 준비해가고있던 이때 비슈와나스에게는 또다시 크나큰 신임과 영광이 안겨지게 되였다.

김일성동지께서 비슈와나스의 활동정형을 보고받으시고 그를 고무격려해주신 한없이 고마운 말씀이 그에게 전달되였던것이다.

그이의 말씀에는 먼곳에서 싸우는 전사일수록 더욱 아끼시며 믿어주시는 고매한 사랑이 철철 흘러넘치고있었다. 그 사랑은 주체사상의 창시자에게서만 흘러나올수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영원히 마를줄 모르는 인간사랑의 바다였다. 그 품에 안긴 전사는 행복하였다.

행복은 언제나 끊임없이 헌신적으로 일할 때 저도모르게 찾아오는것이다.

비슈와나스는 위대한 스승께서 계시는 주체의 조국, 조선의 하늘을 멀리에서 우러러보며 심장으로 웨쳤다.

내 마음속의 하늘이시여! 당신에게서 뿜어지는 주체의 광휘로운 그 빛발을 온 누리에 펼쳐가는 길에 내 한생을 바쳐가겠나이다. 살아도 죽어도 영원히 이 길을 가겠나이다.

이렇듯 비슈와나스는 꽃목걸이사건이후 주체의 조국에 드리는 더 큰 꽃목걸이를 준비하기 위하여 주체의 한길을 걷고 또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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