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9 회)
6. 《자유》의 나라인가, 구속의 나라인가 비슈와나스는 쓰고 또 썼다. 그의 마음속심리는 누르면 솟구치는 힘이 더 강해지는 용수철의 튐성과도 같았다. 한껏 장약된 사랑과 증오의 화약으로 폭발하는 그의 튐성을 누가 감히 누르겠다고 나설수 있으랴. 쓰러졌다가 일어선 사람은 배가의 힘으로 용솟음치는듯싶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과 부단히 대화했고 또 독서했으며 한편으로는 집필을 다그쳐나갔다. 대화는 민첩한 사람을 만들고 독서는 해박한 사람을 만들며 집필은 정확한 사람을 만든다고 한다. 비슈와나스는 《트리뷴》에도 조선에 대한 기사를 싣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결김에 하는 감성의 분출이 아니라 신념으로 받아들인 리성의 폭발이였다. 나라의 분렬과 함께 파산되였던 《트리뷴》은 그 이후 챤디가르에 새롭게 기지를 꾸리고 1950년을 전후하여 재생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1880년경에 창간된 신문은 자기의 력사를 그렇게 세월의 풍파에 호락호락 내던지려고 하지 않았던것이다. 비슈와나스는 《트리뷴》의 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혹시 파라카슈의 행처를 알수도 있지 않을가 하여 물어보았으나 아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다른 연고는 없었지만 왜서인지 생활의 갈피마다에 드문히 그 처녀가 생각키웠다. 인생의 초엽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끼였던 파라카슈! 잠시나마 한 신문사에 함께 있던 동창이라는 의미에서도 그는 그 처녀의 이후인생길을 알고싶었다. 하지만 그 《빛》은 어디로 숨어들었는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늘 챤디가르는 현대적인 도시의 면모를 갖추고있다. 챤디가르와 뉴델리에서 발행되고있는 《트리뷴》의 부수는 100만부를 넘으며 그 신문은 A부류에 속하는 전국적인 일간신문으로 알려지고있었다. 비슈와나스의 이름으로 하여 한때 인기를 끌던 《트리뷴》이 이제는 세계에 더욱 널리 알려진 그 명성을 잊을리가 없었다. 《트리뷴》은 비슈와나스의 원고들을 환영하였다. 비슈와나스는 조선에 대한 기사를 쓰는족족 일간신문인 《트리뷴》에 날려보냈다. 그러면서도 주에 1건씩 《인디안 타임스》에 내는것은 철칙으로 지켰다. 인디아의 지식계층들은 물론 그외 많은 사람들속에서 조선에 대해, 조선의 위대한 수령에 대해 알게 되였다. 비슈와나스의 사색은 줄곧 조선이라는 나라에로 쏠리고있었다. 어떤 나라이기에 가보지도 않고 무슨 힘에 끌려 내가 스스로 그 나라에 대한 소개기사를 몇년째 계속 써내고있으며 그것으로 하여 죽음의 고비도 겪어야 했는가. 그 나라를 지지하는 길에서는 그 어떤 죽음도 맞받아나갈 용기가 나도모르게 이 가슴속에 샘솟는것은 또 무엇때문인가. 확실히 그 나라에는 무엇인가 거대한 힘이 있었다. 그 힘은 정의의 가슴들을 보이지 않게 끌어당기는 견인력이 틀림없었다. 조선에 대한 그의 애착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해졌다. 지난날 식민지농업국가였던 조선은 불과 14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사회주의공업화의 력사적과업을 빛나게 실현하고 그 위용을 만방에 더욱 뚜렷이 빛내고있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지지와 찬탄의 목소리는 세계적으로 더욱 높아졌고 인디아에서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에 대한 그의 글을 더욱 관심을 가지고 읽었다. 비슈와나스의 아버지, 어머니도 아들의 글을 통하여 조선에 대하여 알게 되였고 위대한 수령님에 대하여 공감하게 되였다. 이제는 그의 부모들도 70이 넘었다. 이전보다는 많은 날을 아들과 함께 있었지만 아직도 빈번히 고향마을에 갔다오군 하였다. 역시 바드리 나트 취바와 두르가데비의 심장은 판도리비비마을에 있는듯싶었다. 부모들은 농촌에 있기를 좋아하였다. 그렇게 도시와 농촌을 오가면서도 그들은 승용차를 절대로 타지 않았다. 집에는 차도 많았는데 그들은 뻐스가 몸에 맞는지 언제나 그것을 리용하여 고향마을에 갔다오군 하였다. 바드리 나트 취바와 두르가데비는 이 세상에 대해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이 세상의 쓰고 단맛과 빈부의 차이를 누구보다 많이 현실적으로 감수하고있었다고 해야 할것이다. 7남매의 자식들은 모두 뉴델리에서 기업들을 하고있었다. 맏자식이 뉴델리에 발을 붙여서인지 모든 형제들이 손을 잡고 이곳에서 의좋게 살아가고있었다. 그러나 농촌마을의 친척들은 농사를 지으면서도 도시에서처럼은 살지 못하였다. 또한 농촌에는 굶어죽어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바드리 나트 취바와 두르가데비는 이쪽과 저쪽, 다시말하여 극단에서 극단으로 오가며 세상의 모든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있었다. 부모들은 한주일내지 열흘만에 농촌에서 돌아와서는 그사이 쌓인 신문들과 잡지들을 열심히 읽으며 더 깊이 이 세상을 리해하려고 하였다. 이럴즈음 국제광고협회에서 비슈와나스를 초청하였다. 무시할수 없는 광고기지로 세계에 두드러지게 두각을 나타내는 《인터라즈》의 총사장을 국제광고협회에서 부위원장으로 선출하였던것이다. 국제광고협회는 뉴욕에 본부를 둔 세계에서 제일 큰 광고기구였다. 생각던 끝에 비슈와나스는 이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이 기회에 아메리카대륙도 한번 밟아보자는것이였다. 아메리카합중국? 도대체 어떤 나라인가? 서방세계에서 미국은 《민주주의표본》으로 한껏 묘사되고있었다. 그래서인지 기자구락부에서는 흔히 마주앉으면 미국에도 가보았는가라는 질문이 오가고있었다. 하지만 우정 갈 필요는 느끼지 않고있던 비슈와나스였다. 동유럽의 사회주의나라들과는 다 거래하고있었고 또 적지 않은 자본주의나라들도 돌아본 비슈와나스는 이 기회에 가장 발전되였다고 떠드는 미국이라는 나라에도 가보자는것이였다. 이것은 그의 심장이 가리켜 내린 결심은 아니였다. 다만 랭철한 리성이 내리는 판단이였을뿐이였다. 비슈와나스는 부모들이 뉴델리와 판도리비비마을을 오가며 나라의 극단과 극단을 보고있듯이 자기도 세계의 서로 다른 정치체제의 극단과 극단을 실지 눈으로 확인해보자는것이였다. 이렇게 되여 그의 걸음은 처음으로 미국의 북동부에 자리잡고있는 도시 뉴욕으로 향하게 되였다. 항시 비슈와나스를 주시하고있던 남조선대사관에서는 놀랐다. 몇년간 북조선을 찬양하는 글들을 도수높게 냅다 써온 그가 북조선에 갈줄 알았는데 의외에도 미국으로 가는것이였다. 놈들은 쾌재를 올렸다. 곧 그들의 련락선이 서울로, 뉴욕으로 이어졌다. 이 기회에 그를 돌려세워보자는것이였다. 돈으로, 기업으로 그리고 온갖 《명예》로… 때는 1972년 1월이였다. 대륙과 대양을 횡단하여 가는 도중의 항공역마다에 그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한 안내사업이 멋있게 째여져있었다. 어딜 가나 그의 주위에는 《친절》한 남조선의 외교관들이 감돌았다. 허참, 이렇게도 낯간지럽고 뻔뻔스럽다고야. 보기좋게 나딩굴었던 그 자동차의 주인이 다시 살아나서 마음속의 가속답판을 누르고 또 누르고있는줄 너희들이 알고있는가. 뉴욕국제비행장에 내린 그는 국제광고협회 관리들의 마중을 받았다. 그들의 안내를 받으며 풀래트홈으로 나가는데 거기에 또 이미 련락받은 남조선의 외교관들이 《친절》하게 대기하고있는것이였다. 사회주의나라들을 기본으로 거래하는 《인터라즈》총사장이며 또한 사회주의나라들을 극구 찬양하는 《인디안 타임스》주필인 비슈와나스가 뉴욕에 나타난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다시없는 절호의 사업대상을 만난 기회인듯싶었다. 그자들은 고급호텔을 예약해놓았다느니, 이번 기회에 저희들이 많은 광고주문을 하겠다느니, 자금이 요구되면 제한없이 투자하겠다느니 하면서 별의별 추파를 다 던지고있었다. 약삭바른 남조선의 특파원들은 벌써 《자유》의 나라에 온 감상이 어떤가고 묻는 판이였다. 그자들을 한옆으로 밀어제치며 비슈와나스는 성격그대로 무뚝뚝하게 말하였다. 《시끄럽게 놀지 말어!》 뉴욕의 거리를 달리는 그의 시야에 하늘을 찌를듯한 고층건물들이 안겨왔다. 차안에서는 꼭대기를 볼수 없는 그 건물들에 대해 안내자는 열심히 소개하였다. 《저 건물이 바로 그 유명한 세계무역쎈터입니다. … 그리고 저 이스트강기슭에 자리잡은 장방형의 거대한 건물이 바로 유엔본부청사입니다.》 비슈와나스는 눈길을 옆으로 돌리고 자본주의세계의 대금융자본과 대독점기구들의 총본부가 몰켜있는 이 도시를 보려고 머리를 들었다. 차창밖으로 언뜻언뜻 스쳐지나는 화려한 그 모습들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아직은 다는 가늠할수 없었다. 그가 받은 첫 느낌은 다만 빼곡이 솟아있는 건물사이에 놓여있는 거리는 산속에 난 오솔길을 방불케 한다는것이였다. 그리고 거리를 붐비며 오가는 사람들은 협곡에서 헤매는 개미들의 무리를 련상케 한다는것이였다. 그날저녁 비슈와나스는 호텔에서 국제광고협회관계자들이 차린 식사에 초대되였다. 남조선의 특파원들이 주위에 감도는것을 본 그는 광고협회관계자들에게 저자들을 자기옆에 갖다놓으면 아예 돌아가겠다고 오금을 박아놓았다. 한잔 들어가면서 그들은 말이 많았다. 《뉴욕을 처음으로 방문한 소감이 어떻습니까?》 《글쎄? 모든 도시들에는 다 자기의 상징이 있겠지요.》 도시를 돌아보기 전에는 말하고싶지 않았으나 그들은 웃음을 지으며 계속 말을 시켰다. 《뉴욕의 상징은 〈자유의 녀신상〉이라고도 말할수 있지요. 여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합니까?》 《글쎄? 그 이름대로 말한다면 자유를 상징한다고 말해야 하겠지요.》 다음날 비슈와나스는 국제광고협회를 방문하고 이 국제기구의 부위원장이라는 명예를 받아안았다. 그럴만도 한 일이였다. 동유럽의 많은 사회주의나라들과 또한 아시아, 아프리카를 비롯한 그쪽 지역에서의 《광고왕》으로 떠받들리우는 비슈와나스를 그자리에 앉힘으로써 국제광고협회는 국제기구로서의 자기의 지위와 객관성을 세상에 충분히 보여줄수 있기때문이다. 그는 뉴욕의 여러곳을 돌아보았다. 뉴욕금융시장, 뉴욕증권시장, 뉴욕주식거래소, 세계무역쎈터, 유엔본부 등… 상업금융을 배운 그의 눈은 이 세상의 모든 움직임과 면모를 금융의 시점에서 들여다보고있었다. 그런 눈은 흔히 생활의 겉면이 아니라 그 밑바닥을 헤집기마련이다. 사실상 발전되였다고 하는 자본주의나라들은 겉으로 볼 때 화려하고 번쩍거리며 상품이 차넘치고 사람들이 생존열로 서로 붐비는것이 시선을 끈다. 그러나 그 사회의 이모저모와 그 밑바닥까지 자세히 헤쳐보면 폭음, 포식, 과잉소비로 사람들의 두뇌에 곱이 끼고 인간이 랭담한 소비기계처럼 변해가는것을 발견하게 됨은 어쩔수 없는 일이였다. 비슈와나스는 뉴욕타임스사를 찾는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인디아에 특파원으로 파견되였던 이 신문의 안면있는 기자들의 안내를 받았다. 신문은 언론이면서 동시에 기업이였다. 《뉴욕타임스》는 국내외의 정치, 경제소식들을 위주로 편집하면서 판매경쟁이나 광고수입에 의존하지 않고 경영을 유지한다는 《고급지》로 자처하고있는 신문이였다. 1851년에 창간된 이 신문은 한번에 80~100면씩 편집하여 하루 네번 꺾어 인쇄배포하고있는 정도였다. 신문의 지면에는 글과 함께 사진과 그림, 광고가 압도적으로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있었다. 이 신문은 《자립성》, 《객관성》을 표방하고있으나 실지에 있어서는 민주당의 정책을 지지하고있는 철저히 대독점자본 특히 동북부의 금융자본에 예속되여있는 부르죠아신문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비슈와나스가 사회주의나라들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소개하는 기사들을 많이 쓰고있다는것을 알고있는 이 신문사의 안내자들은 김일성동지의 업적을 소개한 《뉴욕타임스》를 내놓는것이였다. 《조선은 20세기의 영웅을 낳았다》라는 제목을 달고 옹근 한면에 《김일성전》제1부를 소개한 그 신문은 1969년 10월 27일호였다. 또한 같은 책 제2부, 제3부의 내용을 알리는 글을 실은 신문들도 있었다. 부르죠아신문들이 이 정도로 소개한것을 보면 김일성동지의 명성이 세계언론계에 얼마나 높이 울려퍼지고있는가를 과히 짐작할수 있는것이였다. 《마천루》의 바로 뒤거리에 가본 비슈와나스는 깜짝 놀랐다. 거기에서 그는 《자유》의 녀신이 떠드는 《문명》의 세계와는 너무도 대조적인 이 도시의 판이한 두 현실을 목격하게 되였던것이다. 거기에는 최대의 빈민굴이 있었다. 그 거리의 이름은 《할렘가》였다. 기껏해서 7만명정도의 인구밖에 수용할수 없는 그 거리에는 무려 50만명의 흑인들이 몰켜살고있었다. 그들은 상품포장지와 판자로 지은 누기차고 악취풍기는 움막에서 살거나 거리를 방황하며 《자유의 녀신상》을 향하여 주먹질을 하고있었다. 그들에겐 일자리와 먹을것이 없었다. 번쩍이는 네온등, 화려한 백화점들, 여기저기서 울려나오는 《복지사회》이니 《평등》이니 하는 미사려구들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이였다. 얼핏보매 화려한 이 도시에서는 살인, 강간, 절도 등 각종 범죄가 일어나고있었으며 주택부족, 물부족, 대기오염 등 심각한 사회적문제까지 겹치여 주민들의 생활을 위협하고있었다. 《월가》와 《할렘가》는 자본주의세계의 앞모습과 뒤모습이였다. 그것은 《천당》과 《지옥》의 두 극단이였다. 《월가》에는 향락에 도취된 신사숙녀들이 미친듯이 웃고 떠들어대고있었으나 《할렘가》의 쓰러져가는 건물과 컴컴한 지하실, 악취풍기는 오물장들에서는 버림받은 불쌍한 인간들이 목숨을 부지하려고 모지름을 쓰고있었다. 이것이 과연 《만민의 평등과 자유》란 말인가. 미국국가창시자들은 세상에 대고 《모든 사람들은 평등한 인간으로 창조되였다.》고 선포하였지만 아마도 그들은 그 《평등권》을 무산자들과 흑인들에게까지 미치게 하려고는 하지 않았던듯싶다. 《자유의 녀신상》이 서있는 대돌에는 《지쳐빠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나에게 보내라》라는 글이 씌여있는데 바로 그 턱밑에 집없는 사람들이 한숨을 쉬며 앉아있는것이다. 세상에 태여나자부터 온갖 못된짓만 일삼으며 인류를 희롱해온 미국이라는 나라는 《자유의 녀신상》의 거룩한 외형으로 마치 신성한 《하느님》의 사도의 모습을 천하에 보여주려고 하는듯 했다. 앞뒤가 다른 이 도시의 어지러운 그 모든 몰골이 비껴서인지 여기에 흐르는 강물도 분이 잔뜩 치밀어 사납게 내닫는듯싶었다. 처음으로 뉴욕을 돌아본 비슈와나스는 미국식사고방식과 생활신조, 미국식생활양식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였다. 실용주의, 그것이 미국의 철학이였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란 본능의 노예이고 《본능의 묶음》이라는것이다. 그것이 과연 사람의 본성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이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에 대한 이러한 리해로부터 실용주의자들은 인류의 력사가 인간의 리기적인 생존을 위한 투쟁과 리기적인 협조에 의하여 이루어지는것처럼 설교하고있다. 20세기초부터 미국의 정신생활을 지배한 철학사조로서 실용주의는 《미국식민주주의》가 매 개인이 자기 문제를 내세우고 자기 중심주의적견지에서 리기주의를 마음대로 부릴수 있게 하는
정치제도이며 생활양식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적극 찬양하고있었다. 틀렸다. 《미국식민주주의》, 미국식정치방식으로는 결코 인류를 자유와 평화, 진보와 문명에로 인도할수 없다. 비슈와나스는 여기는 자기와 운명을 맺을 곳이 못되는 곳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였다. 왜서 월트 휘트만(뉴욕주태생의 시인. 1819―1892)이 자기의 조국 아메리카를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민족의 수치를 느끼였던가. 월트 휘트만은 곧추 손을 높이 쳐들고 아메리카인민의 이름으로 인류의 모든 초막들과 주택들을 위하여 세계에 인사를 보냈건만 그의 민주주의목소리는 여지없이 이 땅에서 랭대를 받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느낀다. 내 민족의 형언못할 수치와 비굴을 그리고 그걸 모두 내 일로 느낀다. 내가 당하는 그것도 바로 인도주의에 대한 복수이다.》 아마도 그는 자기가 태여난 이 땅의 주민이 지구의 모든 지역에서 몰려든 각이한 민족의 혼합으로 이루어졌음을 수치로 여겼으리라. 감명깊게 회고할 자기 민족의 유구한 력사가 없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였다. 월트 휘트만이 부르던 자유행진곡은 어디에 갔는지 이 땅에 들리는것은 오직 교회의 제단에 선 그리스도교목사의 음성뿐인듯싶었다. 남조선의 집권자들은 끈질기게 비슈와나스를 따라다니며 기업을 위한 모든 조건을 다 마련해주겠으니 곧장 자기들한테로 가자고 회유하고있었다. 비슈와나스는 그들에게 직방 말하였다. 《〈한국〉에 사상이 있는가?》 가보나마나한 일이였다. 사상이 없는 나라는 주권도 존엄도 있을수 없다. 미국을 등에 업고 살아가는 그들이 하는짓이란 그 어떤것도 믿어볼만한것이 하나도 없는 일이였다. 그들을 따라선다면 차라리 인간사표를 내고말것이라고 비슈와나스는 생각하였다.
《자유세계》에 대한 소감을 묻는 어용나팔수들에게 그는 말하였다. 《당신들이 한번 대답해보라. 미국은 〈자유〉의 나라인가? 구속의 나라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