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6 회)
3. 첫 기사 인간이 이렇게도 숭고해질수 있을가. 비슈와나스는 지금 자기의 마음이 참으로 숭고해진다고 생각되였다. 그것은 며칠째 읽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도서들이 안겨준 충격때문이였다. 얼마전 조선령사관을 방문한 비슈와나스와 아브둘 말라크는 조선사람들과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장경일과도 우정을 더욱 두터이 하였다.
조선사람들에 대한 그의 첫 인상은 외유내강한 사람들이라는것이였다. 확실히 조선은 무엇인가 강렬한 자기 정신을 가지고 힘차게 약동하고있었다.
분명 동방의 밝은 등불은 다시 켜졌다. 이것은 사회주의나라들을 다
대상하고있는 그의 가슴속에 스스로 젖어드는 생각이였다. 그의 앞에는 조선령사관에서 가져온 몇권의 책이 놓여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그닥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인차 읽어볼념을 하지 않았던
책들이였다. 그 어떤 이름난 학설에도 확 당기지 않고있던 그로서는 충분히 그러할만도 한 일이였다. 그러던것이 영국에 갈 일이 생겨 그는 그 책들을 가방에 넣었다. 뉴델리에서 런던까지 9시간을 비행하면서 그는 그 책들을 읽기 시작하였다.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들었던 그 책들은 점점 시간이 모자라게 비슈와나스의 심혼을 끝모를 세계에로 이끌어가는것이였다. 그는 읽을수록 그
책들에 심취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영국에서 돌아온 다음에도 그 책들을 거듭 읽었다. 그 책들을 통하여 그가 정립한것은 현대조선의 력사는
수령의 력사라는것이였다. 비슈와나스는 파키스탄에 전화를 했다. 아브둘 말라크도 그때 조선령사관에서 같은 책들을 가지고갔던것이다. 비슈와나스의 전화를 받은 말라크도
그와 같은 소견을 가지고있었다. 조선의 수령 김일성! 읽을수록 위대하게 안겨오는 그이의 혁명생애를 두고 생각이 깊었다. 자기의 가문은 증조부때부터 광활한 령지를 상속받았는데 조선의 수령은 증조부때부터 상속받은것이란 소작살이와 민족수난의 비극이 드리운 빼앗긴
나라였다. 그이는 1912년에 탄생하시였다. 지구상의 근대력사에서 참으로 어수선한 동란의 시대였다. 같은 식민지에서 태여나 자기는 대학으로 갔는데 그이는 나라를 찾으려 손에 총을 잡았다. 자기의 가문은 물려받은 부동산을 꾹 쥐고 그만하면
빼앗긴 나라에서도 굶지 않고 살았는데 그이의 가문은 모두 나라찾는 길에서 목숨을 바치였다. 조선을 강점한 일제의 초대총독 데라우찌는 조선사람은 우리의 법률에 복종하든가 죽든가 그 어느쪽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선언하였지만
그이는 일제를 때려부시는 싸움의 길에 용약 떨쳐나서시였다. 나는 나라의 해방과 독립을 글로만 호소하였는데 그이께서는 무장투쟁을 조직령도하시였다. 그이께서는 20성상 비바람, 눈바람 다 맞으시면서
기어이 조상의 숙망이였고 인민의 념원이였던 나라의 해방을 안고오시였으며 《강대성》을 자랑하는 미국과의 또 한차례의 전쟁에서 승리를 이룩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놀라울 정도로 빠른 기간에 전쟁의 상처를 말끔히 가시고 그 면모를 몰라보게 일신시켰으며 조국땅에 사회주의사회를 일떠세우시였다. 그이의 생애와 활동은 확실히 다른 사회주의나라의 수반들과는 류다른데가 있는것이였다. 김일성! 그이이시야말로 차례진 운명에 순종한 인간이 아니시였다. 참으로 그이는 숙명을 맞받아 뚫고나가신 민족의 영웅이시였다. 본받아야 할 위대한 인간이시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인지 허구인지 단정할수는 없었다. 당시 워싱톤대변인들을 비롯한 서방제국주의자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선에 대하여 《전쟁상처를 가시지 못한 페허국》이라느니 《사람들이
조폭하여 신변안전을 담보할수 없는 나라》라느니 하면서 별의별 악선전을 다하고있었다. 비슈와나스는 자기 눈으로 보지 못한것은 선뜻 믿지 않았다. 그는 조선에 대하여 아는것이 너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 책들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훌륭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따쓰통신사 기자들과 조선에 가본 사회주의나라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조선에 대한 책을 읽었는데 그것이 사실인가고 물어보았다.
그들은 모두 김일성원수는 위대한분이시라고 한결같이 말하였다. 그들은 일치하게 김일성원수는 조선해방을 위해 싸우신
민족의 장한 아들이시며 세계평화를 수호하시는 진정한 국제주의자이시라고 말하는것이였다. 비슈와나스는 조선에 대해 알고싶었다. 그는 곧 조선의 사절들을 《인터라즈》에 초청하였다. 이렇게 되여 이번에는 그가 자기의
사무실에서 조선사람들을 마주하게 되였다. 그들은 새로운 도서들을 또 가지고왔다. 그것은 비슈와나스가 부탁한 《김일성선집》과
조선을 소개한 소책자들이였다. 조선총령사와 1등서기관은 《인터라즈》에 수많이 전시되여있는 도서, 잡지들을 보고 내심 놀랐다. 쏘련, 체스꼬슬로벤스꼬(당시), 로므니아,
벌가리아, 마쟈르를 비롯하여 사회주의나라들을 소개한 그 책들은 비슈와나스가 《인터라즈》를 설립하기 이전부터 10여년간 출판해온것들이였다. 쏘련과 벌가리아를 선전한 도서가 제일 많은듯싶었다. 모름지기 그것은 《인터라즈》의 주인이 그 나라들에 대한 관심이 제일 많다든가 아니면 그
나라들이 《인터라즈》와의 사업을 잘한데 기인될것이라고 생각되였다. 무엇을 숨기랴. 모든 외교사절들이 주재국에서 자기 나라의 훌륭한것들을 소개선전하려고 한다는것을. 그래서 기자, 언론인들과 출판업자들과의
관계를 좋게 한다는것을. 하지만 그들의 노력 하나만 가지고는 그 일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 보다 실질적인것은 주재국의 사람들이 그 나라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가 하는데에 영구성이 담보되여있는것이였다. 조선총령사는 비슈와나스가 사회주의나라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한데 대하여 평가하였다. 숨김없이 말한다면 그것은 조선을 위해서도 그렇게
노력해줄것을 바란다는 마음의 비침이였다. 인디아의 이름있는 정치신문인 《인디안 타임스》의 주필이며 세계에 그 령역을 뻗치고있는 《인터라즈》사장인
비슈와나스만한 적임자가 쉽지 않은것이였다. 비슈와나스는 오찬을 마련하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그는 자기의 솔직한 생각을 그대로 터놓았다. 《무슨 글을 쓰고 무슨 책을 출판하겠는가 하는것은 내 마음입니다. 내가 사회주의를 선전하는것은 사회주의사회를 인정하기때문입니다. 조선에
대해서는 새롭게 알게 되였는데 앞으로 더 연구하여 내가 할 일은 내가 결심할것입니다.》 역시 비슈와나스는 비슈와나스였다. 그는 그 누구의 비위를 맞추려 할줄을 몰랐고 또 틀을 차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였다. 우람한 체구와 검불그스름한 청동빛의 얼굴이 그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보이는지도 몰랐다. 그후 그는 조선사람들과 보다 친숙하게 지내면서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해갔다. 그러나 조선에 대한 글만은 쓰지 않았다. 신문, 잡지들에는
사회주의나라들을 소개하는 그의 글들이 계속 나가고있었지만 조선에 대한 그의 글만은 찾아볼수가 없었다. 리해되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는 조선을
방문한적이 없었던것이다. 비슈와나스는 자기의 이름을 귀중히 여기였다. 10대에 기자활동을 시작한 그가 40에 이른 오늘날에는 나라의 권위있는 론설가로 명성을
떨치고있었으니 충분히 그럴만도 한 일인것이다. 때문에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책은 다 감동적이지만 본국의 사람들이 준 책만을 보고 그대로는
쓸수 없다고 생각하고있었다. 정확한것을 정확하게 써야 했다. 그것이 곧 비슈와나스라고 그는 자기자신을 철저히 간주하고있었다. 그렇게 그해가
지나갔다. 새해에 들어와서 또 몇달이 지난 4월초의 어느날 뜻밖에도 조선에 대한 그의 첫 기사가 신문에 실리는 날이 왔다. 그 신문은 인디아에서 제일 큰 신문인 《타임스 오브 인디아》였다. 수백만부가 발행되는 신문이였다. 거리에서, 전차에서 사람들은 그 신문을 들고 읽었다. 비슈와나스의 기사는 신문의 한구석 광고란이 아니라 한 면을 통채로 채우고있었다. 별의별 뉴스들이 꼬리를 무는 그 사회에서 한 내용의 글이
그렇게 많은 지면을 차지하기는 극히 드문 일이였다. 사실 처음에는 그 기사를 어느 한 출판사에 주었는데 그들이 시간을 끌고있었다. 그 출판사와의 관계가 좋았는데도 그들은 그 기사를 심중히
여기지 않고있는것이였다. 심사가 뒤틀린 비슈와나스는 나라에서 제일 큰 신문의 한 면을 통채로 돈을 주고 사서 실었던것이다. 비슈와나스의 본때는 어디서나
나타나고있었다. 《태양》이라는 제목을 달고 쓴 그 기사는 대인기였다. 그 기사는 조선에 대한 비슈와나스의 첫 기사인 동시에 또한 인디아에서 처음으로 되는
조선을 소개한 기사이기도 하였다. 조선령사관에서는 깜짝 놀랐다. 역시 큰 배는 서서히 움직이는것인가?! 웅심깊은 사람은 자기의 결심을 가볍게 말로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그 기사에는 자기들도 다는 몰랐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감동적인 생활일화들이 비슈와나스특유의 섬세성과 론리성을 타고
감각적으로 씌여졌던것이다. 인디아에서 자리를 뜨지 않았던 그가 이 자료들을 어떻게 알아냈을가?! 누구에겐들 자기 소식통이 왜 없으랴. 흥분된 심정을 안고 조선총령사와 1등서기관은 《인터라즈》를 찾아왔다. 비슈와나스는 여전히 사무실에 앉아 아무런 인상변화도 없이 할 일을
하고있었다. 희디흰 와이샤쯔를 입고 책이 무둑히 쌓여있는 량수책상앞에 틀있게 앉아있는 그에게서는 역시 실업가보다는 지성인의 체취가 더 진하게
풍기고있었다. 감사의 인사를 하는 조선의 벗들에게 그는 당신들은 정말 위대한 분을 수령으로 모시였다고 한마디 했을뿐이였다. 2009년 4월 15일 우리 나라를 방문한 비슈와나스는 그때를 회상하여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그해 4월 15일을 맞으며 그 기사를 썼습니다. 외국인들중에서 김일성주석을 태양으로 표현한것은 아마 내가 처음이 아닌가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내가 어디서 그런 표현을
본딴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내가 그렇게 느끼고 표현하였기때문입니다.그후 그이의 수차에 걸치는 접견을 통하여 나는 내가 그이를 태양으로 칭송한것이
얼마나 잘한것인가를 심장으로 새기게 되였습니다. 나는 그것을 긍지롭게 추억하군
합니다.》 조선을 방문해보지 않고 어떻게 처음부터 그런 기사를 썼는가라는 나의 물음에 그는 믿을만한 사람의 체험담을 들었기때문이라고 하였다. 믿을만한 사람의 소개는 인간의 인식활동에서 자못 큰 역할을 하는듯싶다. 누구든 자기의 눈으로 직접 보고 체험하기 전에는 그런 사람의 소개에
근거하여 대상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는것이기때문이다. 그런 사람의 소개는 책보다도 훨씬 신용가치를 가지는것이였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또 물어보는 나에게 비슈와나스는 그 사람이 바로 에피모브가 친구라고 한 똘스찌꼬브라고 하는것이였다. 아, 똘스찌꼬브! 나는 놀랐다. 그는 내가 알고있는 로씨야사람이였다. 아니, 그는 조선인민모두가 잘 알고있는 로씨야의 친근한 벗이였다. 참으로 세상은 넓고도 좁은것이였다. 나는 비슈와나스가 우리들보다 먼저 똘스찌꼬브와 손을 잡은 주체사상신봉자들의 1세라는데 대하여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되는것이였다. 나는 리해되였다. 똘스찌꼬브의 말을 들었다면 그가 충분히 그런 글을 마음놓고 쓸수 있는것이였다. 당시 똘스찌꼬브는 쏘련공산당 국제부
아시아담당 과장이였다. 그가 인디아에 왔을 때 비슈와나스는 에피모브를 통하여 그를 만날수 있었던것이였다. 그렇다면 똘스찌꼬브는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사람이기에 그의 말을 듣고 비슈와나스가 그처럼 흥분되여 조선에 대한 기사를 스스로 썼는가? 독자들의 이에 대한 의문은 나의 체험담을 들으면 충분히 풀릴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똘스찌꼬브의 집에서 하루밤을 지새운 이야기를 여기서
하려고 한다. 그날은 하늘에 눈구멍이 뚫린듯이 솜같은 눈송이들이 뭉테기로 쏟아지던 1996년 1월 27일이였다. 로씨야를 방문하고있던 나는 그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친선 및 문화협조 로씨야협회 중앙리사회 위원장인 웨. 게. 똘스찌꼬브의 초청을 받았다. 혼잡을 이룬 모스크바의 거리거리에 무더기로 쏟아지는 눈속을 뚫고 승용차는 시내의 중심부에 자리잡고있는 레브 똘스또이의 동상앞에서 멎어섰다.
그날도 문학의 거장은 소공원에서 쏟아지는 찬눈을 머리에, 어깨에 이고지고 줄곧 《전쟁과 평화》속에 잠겨있는듯 했다. 바로 그 똘스또이의 동상을 마주하고 선 아빠트에 조선인민의 친근한 벗 똘스찌꼬브가 살고있는것이였다. 그 아빠트는 이전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사업하던 사람들이 살고있는 집이였다. 그리 화려하지는 않지만 무게있어보이는 그 아빠트현관에 나는 눈을 털며 들어섰다. 어딘가 모르게 정숙이 깃들어있었다. 층계를 올라 초인종을 울리자 기다렸다는듯이 나이보다 훨씬 젊어보이는 큰키의 집주인이 마중나오며 뜨겁게 나를 포옹하는것이였다. 그가 바로
똘스찌꼬브였다. 《반갑습니다. 동지!》 그의 첫 말에 나는 벌써 마음이 하나로 통함을 느끼였다. 그때는 동유럽의 사회주의나라들이 이미 무너진 때여서 사회주의시기의 모든 이름들과 함께 로씨야땅에서도 《동지》라는 부름말은
사라져버렸던것이다. 그런데 그 부름말을 나는 그에게서 들었던것이다. 내 조국에선 어디서나 례사롭게 울리는 《동지》라는 부름말이 로씨야땅에선
참으로 값비싸게 울리던 때였다. 《따바리쉬》(동지, 동무)대신에 《고쓰빠진》(각하, 씨)이라는 부름말이 어디서나 통하고있었다. 서글픈 일이지만 로씨야에서 《동지》란 말은 이전 사회주의시기에만 들을수 있는 《낡은 말》로 되였던것이다. 똘스찌꼬브는 나를 집안으로 이끌며 손들어 바람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조선말로 큼직하게 씌여진 《환영》이라는 두 글자가 걸려있었다. 후더운 그의 진정이 나의 가슴에 흘러들었다. 그는 옷도 넥타이도 제일
값진것으로 차리고 앞가슴엔 주런이 훈장들도 달았다. 만민의 어버이 우리 수령님과 한생 인연을 맺고산 그것으로 하여 그는 조선사람들을 이처럼 귀한 손님으로 뜨겁게 맞이하고있는것이였다. 우리 수령님의 절대적인 권위가 있어 조국을 떠나서도 나는 이렇게 그이의 전사로 환영을 받고있다는 생각이 불쑥 들면서 저절로 눈시울이
젖어드는것이였다. 기쁨에 넘쳐 활기를 띤 로씨야의 벗은 책장들로 벽을 이룬 복도를 지나 넓은 전실로 나를 안내하였다. 그는 사면벽에 가득찬 각국의
귀중품들중에서 우리 수령님께서 선물하신 도자기며 수예품들을 각별히 가리키며 소개하였다. 가보로 길이 전할 그 기념품은 가운데자리에 정히
진렬되여있었다. 우리 둘은 기쁨에 넘쳐 마셨다. 그럴수밖에 없었다. 그는 우리 수령님을 운명의 스승으로 존경하는 외국의 한사람이였고 나는 바로 그 수령이
찾아준 조국에서 태여난 그 인민의 한사람이였기때문이였다. 정신적뉴대의 한계는 국경을 넘어서 끝이 없는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 둘은 더욱 열렬해졌으며 서로가 흉허물이 없이 속마음을 터놓았다.
그는 나에게 련속 권하며 말하였다. 로씨야사람들은 정말 술을 좋아하는듯 했다. 그런들 어떠리, 리성의 힘은 폭발적으로 솟구치며 인간을
아름다운 세계에로 그냥 이끌어가는데… 우리 둘은 뿌슈낀이며 똘스또이, 세계적명인들에 대해서도 많은 말들을 나누었다. 그 어떤 화제이든지간에 마지막에는 정의와 진리에 관한
결론으로 떨어졌다. 이윽하여 그는 정숙하여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 가장 걸출한 정의와 진리의 화신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이시라는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의 방으로 한번 들어가보자고 했다. 그를 따라 다른 방에 들어선 나는 금시에 눈이 뒤집히는듯 했다. 벽에 가득한 사진들은 나를 흥분이 아니라 격동시켰다. 그 사진들은 1945년 붉은군대 지휘관으로 조선에 나왔던 그때로부터 시작하여 조선전쟁시기 《쁘라우다》특파기자로 그가 평양에 있을 때 직접
찍은 젊으신 우리 수령님의 영상사진들이였고 또한 1950년대로부터
1990년대초까지에 이르는 기간 우리 수령님을 모시고 찍은 사진들이였다. 또한 그에게는 이외에도 우리 수령님을 직접 찍은 사진들을 가득히 채운 두툼한
사진첩이 있었다. 거기에는 내가 처음 보는 우리 수령님의 30대시절의 영상사진들도 많았다. 부러웠다. 조국해방전쟁시기 우리 수령님곁에서 기자활동을 한 외신기자로서의 그가 무척 돋보였다. 우리 수령님에 대한 그의 추억은 매우 귀중한것이였다. 《…나는 가장 평범한 나날들에 김일성동지를 만나뵈왔고 그분과 흉금을 터놓고 인간적인 대화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그 기억은 저의
한생에 영원히 추억될것입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상한 견인력을 지니고계시였습니다. 항상 자애롭고 인자한 미소를 띄우시는것이 그분께서 인민을
대하시는 립장이였습니다. … 김일성동지께서 사람들과 악수를 하실 때에 그분의 손은 항상 정답고 부드럽고 따뜻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분의 심장의
뜨거움을 넘겨받는듯 하였습니다. 그것으로 하여 사람들은 순수 인간적인 측면에서 벌써 그분과 교제를 나누기가 즐거웠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아주 쉬운 말로 말씀하시였습니다. 재간도 부리지 않으시고 학자풍으로도 말씀하지 않으시였지만 항상 현명한
사상들을 말씀하시였고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습니다. 마치 그 사상들이 그분의
평범한 생활의 한 부분인듯이 말입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천재성에 대하여 그는 우리 나라 혁명과 건설에서 이룩된 성과와 결부하여 많은 이야기들을 하였다. 그는 우리 나라에서 활동을 하던 당시의 증명서도 내보이며 보람찬 시절을 긍지높이 추억하였다. 또한 조선에서 발행한 1954년의 년하장도
그는 소중히 건사하고있었다. 1954년! 그해는 조선인민에게 있어서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미제를 타승하고 신심에 넘쳐 맞이한 승리의 새해였다. 정말로 그해의 년하장에는 총을 억세게 틀어잡은 인민군병사의 모습과 함께 《승리의 새해》라는 글발이 씌여있었다. 전후의 세대인 나로서는 처음 보는 년하장이였다. 그것도 조국을 멀리 떠나 외국인의 집에서 보는 감정은 매우 감격스러운것이였다. 그뿐이 아니였다. 그는 현대조선문학에서 력사소설의 대표작의 하나라고 할수 있는 장편소설 《두만강》의 전3권을 다 가지고있었다. 매 권의
첫장을 펼치면 그의 이름이 조선글자로 큼직하게 씌여져있었고 그아래에는 기증하는 저자의 자필이 있었다. 그 모든것을 그는 소중히 건사하고있었다.
언제나 조선에 마음을 두고사는 귀중한 감정은 그의 생활의 모든 곳곳에 스며있었다. 그는 전후 재더미로 된 평양이 김일성동지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어떻게 일떠섰는가에 대하여 선교구역의 청년거리로부터 시작하여
거리이름을 하나하나 꼽아가며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자기는 내가 보지 못한 그 모든것의 증견자라는것이였다. 그는 1945년부터 오늘에 이르는 반세기를 조선과 줄곧 인연을 맺고 산다고 하면서 자기의 한생을 터놓았다. … 그의 경력속에는 군인시절도 있고 기자시절도 있으며 당일군시절도 있었다. 그가운데서도 그가 제일 잊지 못해 그리워하는 시절은 평양주재
《쁘라우다》특파기자로 사업한 청년시절이다. 그 시절에 그는 인생의 다른 장에서는 터득할수 없었던 귀중한 진리를 깨달았다. 그 시절이 그리울 때면 그는 한장의 사진을 꺼내보군 한다. 색은 비록 날았지만 그속에는 그가 가장 존경하는 위인의 모습이 있다. 당시 그는 《쁘라우다》특파원으로서, 유일한 외신기자로서 《유엔군》의 항복서와도 같은 정전협정문건을 검토하시고 비준하시는 승리자, 희세의
젊은 령장 김일성동지의 모습을 촬영하는 행운을 지니였다. 부드러우면서도 담대하시고 젊으시면서도 거룩하신 김일성동지의 모습, 바로 그 모습은 그때에나 오늘에나 그의 마음속에 비껴있는
그이의 영원한 모습이다. 그는 1951년말 한심하게 파괴된 평양의 반토굴집에 짐을 풀면서 조선을 동정하고 전쟁의 운명을 걱정하였다. 그런데 생활에서는 본래의 예상이 완전히 뒤집히는 경우가 있다. 전쟁이 확대될수록 견디기 힘들어하는 편은 놀랍게도 미국이였다. 어느날 그는 그렇게도 뵈옵고싶었던 김일성동지를 만나뵈옵게 되였다. 명성에 비해 너무도 젊으신 그 모습에 탄복을 금치 못하고있는데 김일성동지께서는 그의 손을 잡아주시고 어려운 때 수고를 하게
됐다고 하시면서 가족들의 안부까지 세심히 물어주시는것이였다. 그의 얼굴에서 그 기간의 고충을 헤아리신듯 김일성동지께서는 전쟁형편과 전망에 대해서, 공화국의 대내외정책에 대해서
포괄적이면서도 세세하게 알려주시고 국제정세의 새로운 측면까지 분석해주시였다. 대범하신 반면에 인정미가 철철 넘치시는분, 이것이 첫 순간에 느껴지는 김일성동지의 특징적인 인상이였다. 그이께서는 우리는
이긴다고, 우리는 이미 이겨놓은 싸움을 하고있다고 그의 가슴에 신심을 꽉 채워주시였다. 김일성동지를 만나뵈온 후부터 그가 쓴 기사에는 진정으로 조선의 숨결이 실리기 시작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어려운 싸움을 령도하시면서도 시간을 내시여 그가 쓴 기사를 보아주시고 잘못 고찰한 문제를 바로잡아주기도
하시였으며 어떤 때는 현지지도의 길을 가시면서 함께 가자고 이끄시기도 하시였다. 미국과 그 추종국들이 《하기공세》요 《추기공세》요 하면서 대군을 몰아오고있을 때도 김일성동지께서는 흔연히 작전대앞을 떠나시여
후방의 로동자들속에 들어가시여 생산문제를 토의하셨고 농민들과 씨앗도 뿌리시였으며 전후복구건설계획도까지 보아주시였다. 진정 김일성동지께서 지니고계시는 특출한 모든것, 언제나 이기시는 비결은 인민이라는 그 원천에 바탕을 두고 나온것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 생각을 그는 전승의 축포가 오르고 위대한 김일성원수께서 열병식단상에 오르실 때 그 영예로운 모습을 사진에 담는것과 더불어
영원한 기억속에 새겨넣었다. 그이후 1968년 1월 쏘련공산당대표단 성원으로 그가 평양에 왔을 때 누군가가 소개하려 하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동무는 소개하지 않아도
내가 벌써 알고있다고, 전쟁시기 《쁘라우다》기자로 우리와 함께 일한 전우라고 하시면서 그 너그러운 품에 따뜻이 포옹해주시였다. 순간 뜨거운
동지애가 그의 가슴속으로 련련히 흘러들었다. 김일성동지! 그이이시야말로 전생애에 걸쳐 모든 대결에서 모두 승리한 력사에 유일한 승리자이시였고 영원불멸한 정의의 화신이시였다. …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면서 계속하여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영원히 〈쁘라우다〉기자시절처럼 그분의 곁에서 살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는 꿈속에서도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꿈이
아니였습니다. 나는 조선방문을 통하여 나에게 영원히 〈쁘라우다〉시절만을 안겨주실 그러한분을 보았습니다. 그분은 슬픔에 잠긴 인민을 억세게 일으켜세우신분,
모습도 음성도 김일성동지 그대로이신 위대한 김정일동지이십니다.… 제가 오늘 이자리에서 특별히 더 강조하고 싶은것은 김일성동지께서 생전에 후계자문제를 예견성있게 그리고 가장 훌륭하게
해결하셨다는것입니다.》 우리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영생을 바라며 위대한 김정일동지의 건강을 축원하여 그리고 로씨야에서의
사회주의재건을 위하여 함께 잔을 들었다. 헤여지기에 앞서 나는 용기를 내여 그에게 부탁하였다. 우리 조선의 국보중의 국보로 될 그 사진들을 나에게 줄수 없는가고. 그러자 웬걸?! 그는 언제 한밤을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눈 사람인가싶이 그자리에서 딱 잘라 말하는것이였다. 《그것만은 안됩니다. 그것은 그 사진들이 나의 전생애이기때문입니다. 그 사진들은 조선만이 아닌 세계의 최대유산이며 내가 죽어도 대를 이어
물려줄 우리 가문의 가보중의 가보입니다.》 더 말했댔자 필요없음을 나는 직감하였다. 하지만 나의 가슴은 더 뜨겁게 달아오르는것이였다. 그것은 그 사진들을 받지 못한 섭섭함에서가
아니라 그의 가슴속깊이에 활화산처럼 굽이치고있는 우리 수령님에 대한 열화와 같은 충정심에 저절로 감복되였기때문이였다. 이렇게 되여 나는 그
귀중한 원본사진들을 가져올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의 가슴속에는 김일성조선의 공민된 긍지와 자부심이 넘쳐나 이 세상에 더욱
떳떳해지는것이였다. 헤여지면서 우리 둘은 사회주의를 지키는 길에서 만나고 또 만나고 토론하고 또 토론하자며 뜨겁게 포옹하였다. 이렇게 날이 밝았다. 정문앞의 승용차가 눈속에 묻히운들 그게 무슨 대수랴, 우리의 정신이 아름다운 새날에로 더 높이 나래쳤는데… 조선의 친근한 벗 똘스찌꼬브동지! 그때 그는 일흔하고도 두해가 지났는데 추억하고 사색하며 일하고있었다. 그는 바로 이런 사람이였다. 이런 사람, 그것도 조선사람이 아닌 쏘련사람의 이러한 체험담을 직접 들었으니 비슈와나스가 조선에 대한 첫
기사를 흥분하여 썼던것이며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태양이라고 그처럼 높이 격찬했던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