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4 회) 제 3 장 갈길이 정해진 이상 가야 한다 누구에게나 길은 있다. 어떤 길을 어떻게 가는가에 따라 그 인생의 흔적이 력사의 갈피에 영예롭게 혹은 수치스럽게 새겨지기도 하고 또한 자취없이 세월과 더불어
사라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자기 조국, 자기 인민의 자치와 존엄을 위해 한생을 모색해온 독립운동지도자들을 잊지 않는다. 한생을 비폭력무저항주의운동으로 인디아의 독립을 위한 길을 걸어온 간디를 못잊어 인민들은 뉴델리에 그의 릉을 세웠다. 간디릉은 그의 화장식을
거행한 라즈가트에 꾸려져있다. 간디릉의 면적은 크지 않다. 검소하게 꾸려진 릉은 멀리에서 보면 마치 웃뚜껑이 없는 큰 흙무덤과 같이 보이고 주변에는 푸른 잔디가 주단처럼
깔려있다. 그 둘레에는 콩크리트담장을 쳤고 담장은 사시장철 푸른 덩굴나무들로 뒤덮였다. 거기에는 붉은 벽돌을 쌓아서 만든 2개의 작은 문이
나져있다. 릉원중앙에 검은색대리석으로 쌓은 간디묘가 있는데 묘의 길이와 너비는 각각 3메터이고 높이는 1메터이며 밑부분은 장방형으로 되여있다. 릉의
정면에는 힌두어로 《오! 로머여!》(오! 하느님이여!)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다. 《간디자서전》에 의하면 그는 어렸을 때 마귀를 무서워하였는데 집안사람들은 그에게 《로머》를 찾아 마귀를 쫓는 법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이때로부터 재난이 닥쳐올 때마다 《로머》를 찾아서 화를 복으로 만들군 하였다는 간디였다. 그가 총탄에 맞아 숨지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부르짖은것도
이 한마디 말이였다. 간디는 정치가로서는 너무나 성자의 모습이 짙었고 성자로서는 너무나 정치적색채가 농후하였다고 할가. 그 역시 자기는 성자가 되고자 노력하는 정치인에 불과하다고 겸손히 말하군 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이 지상의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오로지 신을 두려워할뿐이다. 나는 어느 누구도 미워하지 않을것이며 또 나는 어느 누구의
부당한 억압에도 굴복하지 않을것이다. 나는 진실로써 진실하지 못한것과 싸울것이며 모든 고난을 이겨냄으로써 참되지 못한것을 물리치련다.》 간디릉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꽃잎을 간디릉에 뿌린 다음 땅바닥에 꿇어앉아 경문을 외우면서 간디의 명복을 빌어 기도를 드린다. 인디아를 방문하는 외국지도자들도 다 간디릉을 찾아가 꽃다발을 증정한다. 사람들은 간디릉을 돌아보면서 그가 내들었던 《불살생》,
《진리파악》이라는 구호를 력사의 시점에서 다시한번 음미해보는것인지. 인디아의 자치를 획득하기 위한 그의 불복종운동은 비폭력무저항주의로 하여 대중적지반을 잃고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였으며 그자신은
개별적단식운동을 전개하는데 그쳤지만 그의 선량한 넋은 얼마나 큰 지지와 동정을 불러일으켰던가. 인디아인민들이 수도에 간디의 묘를 세워 성지로 지정하고 정신적기둥으로 그를 우러러보는것은 결코 우연한것이 아니다. 인디아의 화페에도 간디의
초상이 새겨져있다. 《종성의 구별이 없고 모든 사람이 평등한 사회》는 바로 간디가 생전에 일생토록 추구해온 리상사회의 하나였으며 인디아헌법에도 그것이
명시되여있다. 간디의 그 이름은 인디아인민의 기억속에 살아있어 《마하트마》로 오늘도 불리우며 세상에 전해지고있는것이였다. 인민들은 여기에 선량한 그의
넋을 보존하고 길이 전하며 여기서 또한 많은것을 추억하고있다. 유구한 력사의 갈피갈피에 새겨진 피의 교훈을 어이 잊을수 있으랴. 길은 멀고 험하다. 인생길이 누구에겐들 탄탄대로가 되랴. 멀고 험한 그길을 사람마다 제나름으로 가로 질러 혹은 에돌아 빨리 가려고 모지름을 쓴다.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면 사람의 한생은 력사의 한순간에 불과한것이지만 그 순간들을 간고하게 톺아오르며 인간은 력사를 창조하는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힘은 무궁무진하다고 하는것인지. 묻노니, 력사여! 인간의 무궁무진한 그 힘에 떠받들리여 너는 자기 발전의 길을 가고있는것인가. 비슈와나스는 자기 조국의 력사를 안고 진리의 길을 모색하며 앞으로만 나아가려고 모지름을 썼다. 큰 목표도 앞으로 나갈 때만이 주어지고
원대한 리상도 앞으로 나갈 때만이 품어지는것이다. 강물을 따라 계속 걸으면 꼭 바다를 보게 되리라. 그는 이런 의지를 안고있었다. 갈 길이 있는 사람은 주저앉지 않는다. 간디의 《마하트마》가 배회하는 땅에서 자기 삶의 길을 찾아 몸부림쳐온 우리의 주인공의 인생길을 나는 계속 더듬어간다. 1. 자기의 힘으로 자유의 새는 이미 《유토피어》세계를 날고날았다. 마음속의 그 새는 드디여 비슈와나스의 걸음을 지구상의 첫 사회주의나라에로 이끌어갔다. 첫 출국은 누구에게나 자못 설레이는 일이다. 그것도 자기 나라와는 다른 체제, 다른 제도의 나라에로 갈 때에는 더욱 그러한것이리라. 국경과 국경을 넘어 달려온 국제렬차는 축구꼴문대모양으로 크게 세워져있는 나무문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그 나무문의 웃부분에는 CCCP(쏘베트사회주의공화국련맹)라고
쓴 글발이 두드러지게 부각되여있었다. CCCP! 그 이름 얼마나 빛나던 시대였는가. 바로 이 나라였다. 이 나라가 바로 사회주의10월혁명이 수행된 후 레닌의 다민족사회주의국가형성에 관한 사상에 기초하여 1922년에 그
창건을 선포한 쏘베트사회주의공화국련맹인것이였다. 공화국련맹의 창건은 쏘련인민에게 얼마나 자랑찬 성과와 위훈들을 가져왔던가. 사회주의공업화와 농업집단화의 실현, 파쑈도이췰란드침범자들에 대한 격멸, 전후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의 부활… 지구륙지면적의 1/6을 차지하고 국제무대에서 그 위용을 당당히 떨치고있는 사회주의중심의 그 나라에 지금 비슈와나스는 처음으로
들어서고있는것이였다. 렬차는 열려진 나무대문을 천천히 지나갔다. 둔덕들이 듬성듬성 있는 벌판의 대문옆에 붉은별이 달린 모자를 쓴 두명의 붉은군대병사가 어깨에 총을 메고 청동의 자세로 차창들을 랭담하게
바라보고있었다. 그때 그 누가 인류력사상 첫 사회주의국가인 쏘련이 그 세기의 마지막년대에 근 70년간의 자기의 존재를 끝마치게 될줄 상상이나했으랴. 그랬다. 그때에는 많은 나라의 사회주의지지자들이 이처럼 쏘련으로 물밀듯이 흘러들던 시대였다. 모스크바에 내린 비슈와나스는 따쓰통신사 관계자들의 마중을 받았다. 한주일에 걸치는 모스크바체류기간 비슈와나스는 여러곳을 참관하면서 사회주의적민주주의하에서의 쏘련의 눈부신 성과들과 활기띤 사람들의 모습을
자기 눈으로 확인할수 있었다. 집단주의에 기초한 사회의 우월성이 인민경제의 여러 부문에서 나타나고있었다. 정치체제와 사회흐름에 예민한 그는 사회주의사회에서 중시하고있는 공산당의 령도적역할과 국가활동의 강화 등에 깊은 주목을 돌리였다. 체류기간 그는 따쓰통신사와는 물론 쏘련상업성과도 많은 교섭을 하였다. 거기에 에피모브의 딱친구가 있었던것이다. 에피모브의 소개신을 가지고 찾아가 만난 그 친구는 유리 뻬뜨로브라고 하는 아주 쾌활한 사람이였다.
뻬뜨로브는 모스크바에서 8키로메터 떨어진 곳에 있는 자기의 별장에 비슈와나스를 초청하였다. 그는 겨울에는 주로 이곳에 와있다는것이였다. 그의 집은 시내의 아빠트에 있었다. 그 친구는 술도 잘 마셨다. 호흡이 맞았다. 비슷한 성격과 취미 그리고 동업자라는 그것이 그들을 인차 친숙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두 나라간의 상품전시회와 무역거래 그리고 무역도서의 출판과 관련한 많은 계약을 맺었다. 비슈와나스는 시간을 내여 뻬뜨로브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180키로메터 떨어져있는 야스나야 뽈랴나에도 갔었다. 19세기 로씨야비판적사실주의문학의 거장인 똘스또이가 《전쟁과 평화》, 《부활》과 기타 소설들에서 여러번 묘사한 이곳의 경치를 그는 오래도록
부감하며 생각에 잠겼다. 야스나야 뽈랴나라는 지명은 수림가운데 있는 경치 아름다운 넓은 공지라는 뜻을 담고있다. 새하얀 탑과 봇나무림속으로 뻗은 꼬불꼬불한 오솔길, 늪을 가로 질러놓은 자그마한 다리, 둘레에 빼곡이 둘러선 나무들로 하여 이곳은
겨울인데도 경치가 한결 정가로왔다. 작가의 집은 푸른 지붕에 새하얀 벽체로 된 집이였다. 그앞에는 못이 있었는데 《인수》라고 불리운 오랜 비술나무 한그루가 서있고 둘레에는
정향나무가 들어차있으며 문옆에는 넓다란 로대가 붙어있었다. 작가의 집필실에는 큰 책상 하나가 놓여있었고 이딸리아의 화가 라파엘이 그린 성모상이 걸려있었으며 작가가 입던 옷가지들이 진렬되여있었다.
서재에는 그가 본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35종의 문자로 출판된 2만 2 000권의 도서들이 진렬되여있었다. 비슈와나스는 문학의 거장의 생가를 돌아보며 무저항주의와 그리스도교적박애주의, 도덕적완성 등의 교리로 일관된 《똘스또이주의》를 되새겨보았다.
오늘 세계에서 가장 큰 박물관의 하나로 되여있는 이곳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이 과연 《똘스또이주의》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있는지. 똘스또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사랑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악한 일은 하지 말고 선한 일만 해야 한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물론 사람은 선한 일만 해야 한다. 하지만 똘스또이의 그 말은 너무도 많이 들어온 박애주의에 불과한것이였다. 똘스또이 역시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있다.》는 종교와 박애주의의 제창자라고 생각되였다. 그러한 똘스또이가 《사람의 두가지 악덕은
무위도식과 미신이며 두가지 미덕은 활동과 지혜이다.》라고 한것은 아주 들을만한 말이였다. 마하트마 간디도 비폭력무저항주의운동을 벌렸지만 그것이 과연 모순에 찬 현실로부터의 옳은 출로였던가. 비슈와나스는 이 세상의 모든 리념과 주의주장들을 둘러보고싶었고 자기의 견해를 정립해보고싶었다. 그는 부단히 사색하며 앞으로 나갔다. 귀국할 때에는 비행기로 런던을 거쳐 왔다. 그것은 언제나 반복을 싫어하는 그의 취미이기도 하였지만 보다는 자기 조국의 모든 분야에 그 영향을 미치고있는 영국이라는 나라를 구체적으로
알고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데 목적을 둔것이였다. 비슈와나스는 18세기 후반기부터 19세기 전반기에 산업혁명을 수행하여 세계최초의 공업국가로 된 영국의 면모를 알고싶었던것이다. 엥겔스는 자기의 저서 《영국로동계급의 형편》에서 《영국의 산업혁명이 가지는 의의는 프랑스의 정치혁명이나 도이췰란드의 철학혁명이 가지는
의의와 같다.》고 썼다. 상업금융을 전공한 그는 바로 경제발전에서 그러한 의의를 가지는 영국의 산업혁명이 가져온 결실들을 눈으로 확인하고 시야를 넓히자는것이였다.
또한 영국은 19세기 초엽 진보적랑만주의문학의 대표자인 바이론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였다. 세계에서 유명한 시인을 낳았지만 그로 하여금 망명하지 않으면 안되게 한 그의 조국을 비슈와나스는 들여다보고싶었다. 영국에는 인디아계사람들이 많았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관계로 인디아의 사람들이 그 나라에 많이 흘러들었던것이다. 비슈와나스는 그들과 휩쓸리며 친교를 맺었고 그들의 도움으로 런던의 곳곳을 돌아보았다. 국회의사당이 자리잡고있는 웨스트민스터에는 넥타이를 맨 신사들이 걸어다니고있었다. 또한 한 살림집이 1층과 2층으로 되여있으며 매 층에 마당이 달려있는 훌륭한 테라스주택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이 중심거리에도 실업자들이 범람하며 고급주택지구에도 뒤골목에서나 보게 되는 초라한 집들이 그냥 남아있는것이였다. 그는 영국땅에서 쌘드위치맨(광고판을 몸의 앞뒤에 메고다니는 사람)을 보고 놀랐다. 그 쌘드위치맨은 광고업자의 눈길을 끌었다. 인디아에도 이렇게 광고판을 메고다니는 사람광고판은 이전에도 지금도 없는것이다. 이것이 고도의 성장을 자랑하는 발전된 자본주의사회의 현실이였다. 비슈와나스는 빈부의 차이가 하늘땅 차이로 되여있는 자본주의사회의 전면모를 여기 영국땅에서 보는듯 했다. 자본주의경제의 빈 공간들을 순간에 포착하는 그의 두눈은 지난날 자기 조국을 강점하고 경제상승의 길에 들어선 이 나라에 뚫고들어갈
경제적틈들을 예리하게 엿보았다. 첫 해외출장에서 돌아온 비슈와나스는 자기자신은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찬 일거리를 듬뿍 안겨주었다. 그것은 《인터라즈》에 보다 큰 활성을
가져오는 계기로 되였다. 비슈와나스는 자기가 생각해낸 고안들을 동료들과 토론했고 그들이 그 실행방법을 스스로 암시받도록 함으로써 그들이 자기가 생각한것처럼 느끼고
자각적으로 움직일수 있게 하였다. 경영활동에서 그 방법은 사람들을 배가로 분발하게 하는것이였다. 사실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의 훈시나 시킴을 싫어하며 자기 생각을 가지고 행동하려고 하는것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존중해주는것을 바라고있는것이다. 비슈와나스는 과격한데가 있기는 하였으나 기업적측면에서는 사람들의 이 심리를 잘 파악하고있었다. 사람들은 성수가 나서 뛰고 또 뛰였다. 비슈와나스는 기대속에 사는 인생이 아니였다. 모든것을 《하느님》에게 맡기면서 미련을 안고 래일을 기다리는 그런 류형의 인간이 아니였다.
비슈와나스는 인생을 적극적으로 설계했고 그 설계대로 모든것을 내밀어갔다. 열정이 없는 사람은 아무 일도 해내지 못한다. 비슈와나스는 자기의 앞길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자의식이 매우 강하였다. 자기자신에 대한 신뢰, 그것이 성공의 첫째가는 비결이라고도 말할수 있는것이다. 비슈와나스는 남에 대한 요구성이 대단히 높을뿐만아니라 자신에 대하여서도 대단히 엄격하였다. 자기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인간은 결코 자유인이 될 자격이 없는것이다. 그는 그때부터 매해 심지어는 한해에 몇번씩 이전 쏘련과 벌가리아를 비롯한 동유럽의 사회주의나라들과 영국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그는 결심을 품고 세계적범위에서 출판, 광고와 관련한 거래건들을 하나하나 솜씨있게 성사시켜나갔다. 그는 우선 영국영주권을 수속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영국영주권을 받기는 쉬웠다. 식민지시기나 독립이후 한동안은 인디아인들이 영국에 사증없이 드나들수 있었으며 영주권도 인디아주재 영국대사관 고등판무관 아니면 영국외무성에
신청하면 나오군 하였던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인디아인들이 영국영주권을 많이 가지고있는것이며 영국녀자를 데리고사는 인디아남자들이 또한 많은것이다. 비슈와나스는 오늘도 영국에는 사증없이 다니고있다. 그의 려권에는 입출국도장만 있고 사증은 없는것이다. 비슈와나스는 런던에 광고회사를 차리고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다시말하여 《인터라즈》의 첫 해외지사가 나왔던것이다. 기업이 아주 잘되여서 세금도 대단히 많이 내야 할 정도였다. 《인터라즈》의 기업은 모스크바에도 점점 깊숙이 침습하기 시작하였다. 비슈와나스와 뻬뜨로브는 술좌석에서도 서로 호흡이 맞았고 일솜씨에서도 호흡이 잘 맞았다. 그들은 서로 오락가락하면서 부단히 계약들을 맺었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손색없이 성사시켜나갔다. 결심한 사람에게 오르지 못할 산이 있으랴. 혈기에 넘쳐 솟구치는 비슈와나스의 힘은 하늘에 닿은듯싶었다. 그는 자의식이 강한 인간이였다. 그는 동유럽의 사회주의나라들을 돌고돌았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사회주의운동가, 사회주의기업가라고 하였다. 시종 사회주의나라들을 위주로 돌고돌면서 사회주의를 선전하였고 또 사회주의나라들의 기업들과 련대하였으니 그렇게 불리울만도 하였다. 사람마다 고유한 자기 성격이 있듯이 사람은 누구나 자기도 모르는 재능과 기질을 묻어두고있다. 그 재능과 기질은 생활의 환경이 조성되면
자기도 모르게 발휘되는것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역시 자기 개성의 미가 있다. 그의 기업은 나날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그는 부단히 일을 쫓아갔다. 많이 일하는 사람에게 수확의 열매는 주렁지기마련이다. 해가 갈수록 《인터라즈》의 수입금은 늘어갔다. 업무가 불어나는데 따라 인원도 늘여야 했으며 방도 몇칸 더 세내야 했다. 비슈와나스는 소문없이 광고의 설계와 편집 그리고 인쇄도 다 자체로 하기 위한 준비를 면밀하게 해나가고있었다. 다시말하여 미구에는 국가적인 광고, 출판기지를 독립적으로 창설할 구상을 안고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이 구상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모든것은 때가 있는 법이다. 비슈와나스는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였으며 정부와의 사업에도 은근히 힘을 넣고있었다. 그는 말없이 생각을 깊이 하고있었다. 1954년말에 인디라 간디와 처음으로 사업련계가 이루어졌다. 인디라 간디는 쟈와하를랄 네루의 딸이였다. 당시 그는 인디아 전국사회봉사기구 부위원장이였는데 비슈와나스는 이 기구의 성원이였던것이다.
회의를 마치고 헤여지면서 인디라 간디는 비슈와나스에게 말하였다. 《우리 기구에서 가장 젊고 유망한 당신에게 나는 기대를 가지고있습니다.》 진한 눈섭과 억실억실한 두눈을 가진 인디라 간디는 그 생김처럼 성격도 비교적 활달한 편이였다. 《힘껏 일해보겠습니다.》 우물쭈물하지 않고 시원하게 대답하는 비슈와나스는 그때부터 인디라 간디의 눈에 들었다. 그는 승벽이 매우 강한 녀성이였다. 비슈와나스 역시
그런 성격을 좋아하였다. 실무적인 일로 만나군 하였지만 비슈와나스는 그때부터 그와의 친교를 두터이 하기 시작하였다. 20대에 쟈와하를랄 네루수상의 신임을 받고 또한 그 딸의 기대를 사게 된것은 비슈와나스에게 나라의 보호를 받으며 기업을 펴나갈수 있는
법적담보를 마련해주는것으로 되였다. 인디라 간디는 무슨 일에서나 열정적이고 책임적인 비슈와나스를 좋아하였다. 그는 자기의 공무집행 전기간 비슈와나스를 신임하였으며 비슈와나스
역시 그와 공식적으로 긴밀한 사업련계를 유지해갔다. 1955년 인디아국민대회당대회에서는 네루의 제의에 따라 인디아에 《사회주의모범사회》를 건설할데 대한 강령이 채택되였으며 1959년
당대회에서는 농업개혁을 수행하며 각이한 형태의 협동경리를 발전시킬데 대한 강령이 채택되였다. 또한 네루는 대외분야에서 평화와 국제적협조,
전쟁위협의 반대, 신식민주의와 인종주의의 반대를 지향한 중립정책을 실시하였다. 네루는 어느 한 시의 구절인 《생명은 짧은데 가야 할 길은 멀다.》를 자주 인용하군 하였다. 이처럼 그는 사회주의를 지향하여 많은 일들을
벌려놓은 사람이였다. 나라의 이러한 정책과 세계정세발전의 추이는 비슈와나스가 날을 따라 더 많이 찍어내는 사회주의서적들에 대한 법적보호와 인기를 더해주었으며
기업의 활성화를 가져오게 하는 또하나의 계기로 되였다. 새 생활창조로 들끓는 벅찬 환경속에서 비슈와나스는 네루와 그 딸과의 관계를 사업상관계로 아주 자연스럽게 유지해나갈수가 있었다. 인디라 간디는 1964년 인디아국회 상원의원으로 선거되였으며 같은 해 인디아공보 및 방송상으로 임명되였다. 그때 그는 이 성의 자문위원으로
비슈와나스를 등용시켰다. 비슈와나스는 그때 많은 일을 그와 같이 하였다. 그때 비슈와나스는 민족국가수훈리사회 성원이기도 했다. 인디라 간디는 1966년 1월부터 1977년까지 인디아공화국 수상으로 사업하는 전기간 그리고 1978년 1월부터 간디국민대회당 위원장으로,
1980년 1월부터 다시 수상으로 취임하여 반대파에 의하여 피살될 때까지 비슈와나스의 적극적인 후원자였다. 나라의 자주적발전과 번영을 위하여 노력하는 이런 정치활동가들과 국가적인물들의 지지속에 일을 내밀어온것은 비슈와나스에게 있어서 참으로 행운이
아닐수 없었다. 이러한 정세의 흐름속에서 《쏘베트 땅》은 자기의 《부지》를 보다 광범하게 확장해나갔다. 1950년대 중엽부터는 인디아의 여러 지방말을
포함한 16개 어종으로 이 잡지를 번역출판하는데까지 이르렀다. 1955년 5월에 와르샤와조약기구가 조직됨으로써 동서쁠럭대치상태는 더욱 구체화되고있었다. 다시말하여 나토창설과 와르샤와조약기구의 창설로
동서의 랭전은 더욱 세계의 표면에 드러나게 된것이다. 이럴 때 출판선전은 더욱 활기를 띠는듯싶다. 《쏘베트 땅》의 부수는 대폭 늘어났으며 알바니아, 벌가리아, 마쟈르, 동부도이췰란드(당시), 뽈스까, 로므니아, 체스꼬슬로벤스꼬(당시)를
비롯한 와르샤와조약기구에 가입한 모든 나라들과 기타 많은 나라들에 다 배포되였다. 비슈와나스는 땀을 흘리며 돌아갔다. 쏘련대사관에서는 대단한 만족을 표시하였다. 그들은 쏘련의 당과 정부의 요직들이 인디아를 방문할 때마다 비슈와나스를 잊지 않고 소개하는 정도였다. 월간으로 창간되였던 《쏘베트 땅》은 1960년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반월간으로 되여 월에 2번씩 발행하였으며 뉴델리, 뭄바이, 콜카타,
마드라스를 포함한 여러곳에 그 지부를 두게 되였다. 그러다나니 이 잡지에 종사하는 100명에 가까운 직원을 대사관에 두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시간은 빨리도 흘러갔다. 노력하는 사람에게 시간은 언제나 모자랐고 긴장하였다. 그렇게 1950년대가 흘러갔다. 이 년대에 비슈와나스는 많은 경험을 얻었고 지식을 쌓았다. 이 년대에 정신도 육체도 기업도 크게 장성한 그에게 있어서 국가적인 회사의 정식
창립은 이미 사활적이며 성숙된 요구로 나섰다. 1961년에 《인터라즈》는 드디여 나라의 인정을 받고 국가에 정식 그 이름을 등록하게 되였다. 비슈와나스는 《인터라즈》가 거처하고있는 그 기업쎈터청사의 4층과 5층을 모두 임대하였다. 앞으로는 그 청사를 통채로 살수도 있는것이였다.
그는 아싸프 알리거리를 떠나고싶지 않았던것이다. 그것은 이 거리가 위치상 구델리와 뉴델리의 경계점에 있었기때문이였다. 앞문을 열면
뉴델리였고 뒤문을 열면 구델리였다.(뉴델리→새델리) 교통상중심지는 언제나 사람들을 끌기마련이다. 특히 상업적목적을 한 건물은 이런 위치가 명당자리인것이다. 사실 그의 주머니는 그 기업쎈터의
주인보다도 더 불어나있었다. 5층으로 된 그 건물은 오늘도 손색이 없다. 건물의 면적은 2 500평방이며 한층이 800평방이나 되였다. 비슈와나스는 여러 어종에 따르는 번역원들을 비롯하여 광고의 설계, 편집, 그림, 인쇄 등을 자체로 할수 있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다
모집하였다. 그리하여 직원이 151명이나 되였다. 이제는 각 대사관의 외교관들도 사무실에 앉아 당당히 맞이할수 있게 되였다. 화분에 심은 종려나무가 그의 사무실출입문 한쪽에 사철 푸른
잎새를 머리우까지 펼치고있어 방안을 한결 정가롭게 장식하고있었다. 그 종려나무밑으로 나날이 거래건들이 꼬리를 물고 날아왔으며 기업은 눈에 띄게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사회주의나라들과의 출판인쇄업은 파동이 없었고 그만큼 신용이 담보되였다. 그것은 사회주의나라들에는 자본주의나라들에서처럼 기업들이 제마끔 자기
리익만을 추구하는 난관같은것들이 존재하지 않았기때문이였다. 다시말하여 사회주의나라들의 기업은 모두 관영기업이라는데 그 우월성이 있었다. 《인터라즈》는 광고사로서의 두각을 점점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주문자들이 국내외에 날을 따라 늘어나기 시작하였던것이다. 많은 회사들과 개인들이 다 《인터라즈》에 자기들의 광고를 주문하려고 하였다. 또한 신문사들에서도 저희들이 직접 주문받은 광고를 더 잘
만들기 위해 다시 《인터라즈》에 주문하였다. 《인터라즈》는 주문받은 광고를 설계한 다음 우선 그것을 주문자들에게 보이고 그들이 좋다 하면 정부의
승인을 받아 방송과 신문사들에 보내였다. 정부에서도 광고주문을 《인터라즈》에 하였다. 정부의 광고내용은 정부의 공적, 정부의 계획, 직업모집, 물부족현상 등 그러루한것들이였다. 개인들은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자기의 광고를 큰 신문에 낼것을 요구하였지만 정부의 광고는 작은 신문들에 실리였다. 그것은 정부가 기업들을
다같이 추켜세우기 위해 그렇게 하기를 요구했기때문이였다. 비슈와나스는 모든 신문사들과의 관계를 다 좋게 가지며 일판을 크게 벌려나갔다. 모스크바와 런던을 비롯한 해외의 주요회사들에서도 《인터라즈》에 많은 광고를 주문하기 시작하였다. 《인터라즈》는 점점 나라의 큰 회사로
자라났으며 국내외의 인기를 획득해갔다. 오늘 《인터라즈》는 세계각국에서 출판하는 국제회사들을 소개하는 책들이나 전화번호책들에 다 오르고있다. 그럴만도 한 일이다. 《인터라즈》는 1987년에 세계적으로 제일 큰 광고상인 《클리오국제상》을 받았으니말이다. 이 상은 세계에서 유일한
광고협회인 뉴욕에 본부를 둔 《국제광고협회》가 수여하는 상으로서 《오스카르》상과 맞먹는 상이였다. 《인터라즈》는 인디아에서 이 상을 받은 유일한
회사였다. 이 상의 수여식에는 에쓰. 피. 쵸프라가 갔다.그의 공적이 적지 않게 《인터라즈》에 깃들어있었기때문에 비슈와나스가 그를 떠밀었던것이다. 오늘 200명이 넘는 인원으로 운영되고있는 《인터라즈》는 자기의 지부를 전인디아땅의 모든 주(3개의 직할시인 뉴델리, 챤디가르, 판디췌리를
포함하여 총 32개 주)들과 해외에 두고있다. 업무가 번창해지는데 따라 비슈와나스는 경영자로서 주로 담화만 하였으며 많은
시간을 신간서적을 읽고 글을 쓰는데 바쳐갔다. 사람은 지식으로 빛난다. 미래를 지향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책은 항상 그의 길동무였다. 사람의 지위는 그가 읽은 책에 의해서 판별된다고도 할수 있을것이다. 비슈와나스는 실력을 배양하기 위해서는 자만함이 없이 부단히 보고 듣고 읽고 써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자명한 리치인것이다. 그의 우점의 하나는 자기에 대한 자신심을 가지고있으면서도 결코 자고자대하지 않는것이였다. 1961년부터 비슈와나스는 《인디안 타임스》의 편집원으로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이 신문은 인디아에서 유명한 정치신문이였다. 1928년 라호르에서 설립되여 존재한것으로 하여 이 신문사에는 면목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라의 분렬당시 이 신문사도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그래도 원만하게 뉴델리로 옮겨와 자기의 지위를 잃지 않고 상승의 길을 걷고있는것이였다. 비슈와나스는 그이후 이 신문의 주필로 되였다. 그는 많은 원고들을 봐야 하는 분망한 속에서도 매주 1건씩의 글을 써내였다. 주로 사회주의에
대한 정치론설을 썼다. 그는 신용은 경제적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정치적측면에서도 담보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신용이 있는 사회주의기업들과 련대하고있는 그는 한번 선택한 사회주의의 위업을 끝까지 옹호하고싶었다. 그때부터 그는 여러 정당들과의 사업을 원만하게 해나갔으며 그들과의 관계를 오늘까지 좋게 유지해나가고있다. 그는 하루 4시간 《인디안 타임스》의 일을 보고 그 나머지시간에는 또 《인터라즈》의 일을 보았다. 그래야만이 헤쳐갈수 있는 세상이였다.
그는 젊음을 불태워 인생의 탑을 부단히 쌓아올려갔다. 비슈와나스는 기자학과 광고업을 다같이 걸머지고 씩씩하게 걸어갔다. 이렇듯 비슈와나스의 이름은 1960년대 초엽부터 광고업자로서, 기자로서 국내외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962년에 들어서면서 비슈와나스는 《인터라즈》지부를 모스크바에 정식 개설하였다. 또한 그해에 비슈와나스는 《델리광고구락부》를 조직하고 그 창시위원장으로 되였다. 1964년에는 《인디아전국광고사협회》를 조직하고 또한 그 창시위원장으로 되였다. 그 조직은 뉴델리와 뭄바이를 비롯한 인디아의 모든 주들에 다 있는 광고사들의 주인들을 망라한 상설기관으로서 나라의 광고운영의 통일성을
보장할 사명을 띠고있었다. 그는 《인디아표준광고협회》를 창시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10여년어간에 비슈와나스의 이름은 허물수 없는 《인터라즈》의 대명사로 다시말하여 나라의 광고명맥을 틀어쥔 실권자로 알려졌으며 또한 그는
현대 사회주의정치의 론설가로 명성을 떨치며 자기의 지위를 확고하게 차지하게 되였다. 1965년에 이르러 비슈와나스는 쓸만한 집을 하나 장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활동무대가 넓어지고 관계인물들이 늘어날수록 그는 주택도
자기의 체모에 어울리는것으로 따라세워야 한다고 생각하였던것이다. 그래서 장만한 집이 오늘까지 살고있는 집이다. 그는 그레이터캘라슈(산이름. 히말라야산줄기의 한 부분)거리에 있는 주민지역의 한 부지를 사서 거기에 집을 지었다. 그곳은 뉴델리의 남쪽에
치우쳐있는 지대로서 중산층이상의 사람들이 살고있는 경치 좋은 곳이였다. 말그대로 부자촌이였다. 집의 면적은 500평방, 층수는 3층. 작지 않은 저택이였다. 정원에는 꽃들이 피여났다. 장미, 코스모스… 비슈와나스는 집둘레에 크지 않는 나무들을 심었다. 그리고 무슨 생각에서인지 정원에 키큰 뽀뿌라나무 3그루를 심었다. 그 나무는 길길이 자라
그 집의 보초인듯, 상징인듯 하늘을 치받으며 오늘도 설레이고있다. 나무를 심는 사람은 아름답다. 그런 사람은 래일을 생각하는 사람이기때문이다. 주택은 그만하면 되였다. 요란한 개성따위는 없어도 자연의 풍경이 미를 돋구면 그만이였다. 이만하면 방갈로(인디아에 영주하고있는 유럽인들의 별장)도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는 독립전 라호르에 있을 때부터 방갈로를 보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분명 땅은 자기 나라 땅인데 왜서 자기 나라 사람이 아닌 이국인들이 와서 더 좋은 집을 짓고 호화롭게 살며 으시대고있단 말인가. 그 집들에는 인디아사람들의 집에는 없는 휘황한 전등불빛이 방안에 가득차있었고
바닥에는 아릿다운 고급탄자가 깔려있었다. 비슈와나스는 이만하면 본국의 사람으로서 이제는 방갈로를 누를수 있다고 속으로 생각하였다. 다시는 식민지의 운명을 걸머지지 않기 위해서는 전체 국민이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 그것이 곧 애국심이라고 그는 자기나름으로 생각하였다.
자기의 능력과 학문 그리고 자기의 수완에 대한 자부심을 안고있는 그에게는
제나름의 배짱과 자유분방성이 너무도 풍부하였다. 명예는 젊어서부터 잘 거두라고 하였다. 비슈와나스는 떳떳이 머리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며 살고싶었다. 이때 그는 여섯자식의 아버지였다. 1949년에 첫딸을 본 후 2~3년을 사이로 5명의 아들이 주런이 태여났던것이다. 그들의 이름은 안일 샤르마, 쑤닐 샤르마, 무케시
샤르마, 나비쉬 취바, 라줴시 취바였다. 셋째아들까지는 성을 샤르마라고 했고 다음 두 아들은 성을 취바라고 했다. 증조부를 리쉬 샤르마라고 부르는 한편 그저 취바라고도
불렀던것이다. 그래서인지 조부는 성을 샤르마라고 했고 아버지는 또 성을 취바라고 썼다. 실지로 아버지의 형제들도 그리고 비슈와나스의 형제들(7남매)도 두 성을 제마끔 쓰고있었던것이다. 왜서 한가문에서 성을 두개로 쓰게 되였는지 모를 일이다. 혹시 그것은 증조부가 자기 대에서부터 그런 식으로 가문을 늘이려고 생각한데로부터
시작된것이 아닌지. 샤르마가문에서 그 어느 성도 쓰지 않는것은 오직 비슈와나스 혼자뿐이였다. 하지만 그는 자식들에게 선조의 두 성을 다 물려주었다. 어디까지나
족보는 족보인것이다. 1965년에 막내아들이 한돌에 잡히였다. 그 자식들을 키우느라 싼또쉬 꾸마리는 꼼짝 못하고있었다. 신앙심이 지극한 그는 아이들을 위해,
남편을 위해 그리고 가정을 위해 《쉬바신》에게 빌고빌며 자기 할바를 성실하게 해나가고있었다. 그는 말없이 사랑에 넘친 인생을 보내는 고결한
녀성이였다. 두르가데비는 그러한 며느리를 더없이 귀해하였다. 그 할머니가 손자들을 고와하여 그리고 애어머니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차례차례로 데려가서
얼마간 키워주기도 하였다. 비슈와나스는 고향마을에서 부모를 모셔왔다. 부모도 이제는 환갑이 지났으니 모셔올만도 한것이였다. 하지만 그의 부모들은 집구경을 한 다음에는
곧 고향마을로 내려갔다. 아직은 고향에서 땅냄새를 맡으며 사는것이 더 마음 편하다는것이였다. 한생을 살아온 고장을 쉽게 떠나려 하지 않는것은 늙은이들의 공통된 심정인것 같다. 그것도 그럴것이겠지만 그들에게는 또한 광활한 령지가
있었던것이다. 그리고 우리 취바박사, 우리 비비라고 불러주는 친근한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다. 이제는 선친의 계렬들도 하나 둘 떠나가고 바드리 나트 취바와 두르가데비가 제일 큰 어른이 되여 땅을 경작하는 친척들에게 사리를 따져가며
수확물들을 분배해줘야 할 지위에 이른것이였다. 그때부터 그의 부모들은 농한기마다 뉴델리에 올라와 그 기간의 아들의 활동을 들으며 세상을 가늠해보군 하였다. 자기 평생은 부지런하기에 달렸다. 자력으로 크게 일떠선 맏아들이 대견하였다. 그러나 두르가데비는 큰사람이 된 아들에게 항상 타이르군 하였다. 사람은 게을러서는 안되느니라,
제 시간에 출근해라, 그리고 제때에 돌아오라… 어머니의 그 말은 비슈와나스에게 있어서 헛눈을 팔지 않고 길을 곧바로 가도륵 이끌어주는 훈령과도 같은것이였다. 어머니의 음성은 비슈와나스의 걸음걸음에 항시 울리고있었다. 부모들은 얼마 안있어 다시 고향마을의 령지로 내려가군 하였다. 인디아에서 밀은 11월과 12월에 종자를 뿌리고 대체로 그 이듬해 4월에
가을을 하며 강냉이는 6월에 심고 9월에 거두어들인다. 그 계절에 그의 부모들은 움직일수가 없었다. 가문의 땅에서 나오는 수확물은 밀이 2 000톤가량 되였으며 강냉이가 500톤정도 되였다. 그 생산물을 두르가데비가 적극 활동하여 다 팔군
하였다. 그리고 그 돈을 의견없이 생산자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했다. 그 재산의 총관리와 회계는 200여명이나 되는 샤르마가문을 통솔하는
《정치》와도 같은것이였다. 사실 그것은 헐치 않은 일이였다.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 족속들은 가족단위로 자기 몫이 더 있어야 한다고 날이 갈수록 점점 언성을 높여가고있었다. 두르가데비는 저마다 자기네가
옳다고 하는 그 많은 친척들을 한사람한사람 만나 서로서로 리해시키고 화해시켰다. 만약에 서로 다른 리해관계를 가진 이 사람들을 끝까지 리해시킬줄 아는 아량있는 이 할머니가 없었다면 가문의 령지에 명줄을 걸고있는
친척들사이에 그 무슨 싸움이 벌어질런지도 몰랐다. 비슈와나스의 부모들은 고향의 령지를 비워놓고 마음편히 자식의 집에 와 앉아있을수가 없었다. 농번기때면 비슈와나스가 부모를 뵈오러 갔으며 그때마다 고향마을의 령지를 돌아보군 하였다. 비슈와나스가 나타나기만 하면 고향의 친척들은 줄레줄레 따라다니며 그에게 그저 도와달라고 사정사정하였다. 그것은 그가 령지의 틀림없는
세속자이며 또한 도시에 나가 크게 성공하고있다고 말들이 돌아가기때문이였다. 판도리비비마을에는 비슈와나스와 6촌간이 되는 마노하루가 있었다. 마노하루의 할아버지는 비슈와나스의 할아버지 동생이였다. 계렬로 보면
비슈와나스가 가문의 장손으로 되여있지만 나이는 마노하루가 1년 우였다. 마노하루는 비슈와나스에게 영농물자같은것들을 요구하였다. 농촌사람들은 자력과 저축이라는것을 잘 몰랐고 돈있는 사람에게 매여달리려고만 하였다. 이것 역시 비슈와나스에게 차례진 운명인 모양이였다. 이때부터 그는 한쪽으로는 가문의 이 령지, 이 친척들도 돌보며 부단히 기업을 확대해갔다. 그의 조직자적능력과 수완은 날을 따라 출판보도계와 기업계에 은을 내기 시작하였다. 인디아주재의 각 사회주의나라 대사들과 외교관들은 교체될 때마다 비슈와나스를 소개하였으며 소개받은 신임외교관들은 그에게 많이 의거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의 사무실로는 각 나라 대사관들의 방문객들이 수시로 찾아들어 문턱이 닳아질 정도였다. 자기의 명성으로 주위사람들과 가까와지게 된 그는 나날이 왕성한 의욕으로 세계를 더 크게 호흡하며 분발하였다. 그는 이 세상에 자기의 이름을 가지려면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무수하다고 생각하였다. 아직은 인생의 전반기, 이제 더 가야 할 길은 멀고멀다. 하지만 어떤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것인가. 어떤 길을 걷는것이 자기자신은 물론 조국과 인류에게 진정으로 유익한 길을 걷는것인지 아직은 그자신도 가늠할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의 두루미는 끝간데없이 펼쳐진 저 하늘에로 더 세차게 날아오르고있었다. 비슈와나스는 생각하였다. 인간이라면 목표와 희망이 숭고하고 아름다와야 한다고. 그는 자기가 기업에서 일정하게 성공을 하였다고는 말할수 있겠지만 그것은 결코 인간으로서의 성공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물론이다. 사람이
돈과 재부만을 삶의 목표로 삼는다면 그것은 허무한 인생이나 다를바가 무엇이랴. 돈과 재부는 인간생활의 수단일뿐 그 자체가 인간의 리상과 리념,
지성을 대표한다고는 볼수 없다. 정신적만족은 돈과 재부에 있지 않았다. 비슈와나스는 그저 돈을 벌고 그것을 먹고 마시는데 써버리는 그런 인간으로 살고싶지는 않았다. 일을 해도 그것이 력사에서 인차 잊혀지고마는, 아무 의의도 없는 그런 일은 하고싶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와 자식들, 친척들외에도 자기의 존재를 뚜렷이 알수 있는 아니, 죽은 후에도 좋은 일을 한것으로 하여 세상에 남아있을수 있는
그런 일을 하고싶었다. 력사는 자기가 번 돈을 인류의 복리와 평화를 위해 다 바친 참인간들을 기록하고있다. 비슈와나스 역시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인민을 위해, 인류의 평화를 위해 보다 사회적인 일을 하고싶었다. 그는 자기의 조국, 넓고넓은 인디아의 곳곳에 굶주린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방황하고있는것을 보고있었다. 그들은 《극락》을 누리는 《천당》에
가기 위하여 사회적차별과 불평등을 참는데 습관되여있었다. 그들은 전세에서 범한 《죄악》을 씻고 현세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언제나 《신》을 우러러 빌고있었지만 행운이 그들에게 미소를 보내는 일은
결코 없었다. 오히려 《신》은 돈없고 불행한 사람들에게 화를 더 많이 가져다주는것이였다. 그는 조국의 이 현실을 외면할수 없었다. 아, 나의 조국 넓고넓은 인디아가 제 발로 살아갈수 있게 하는 방도는 무엇인가. 그는 그 방도를 찾아 세계를 돌아보고싶었다. 세계를 알 때만이 사람은 자기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자기 나라에 대하여 더 잘 알수 있게 된다는것은 너무도 자명한 리치가 아닌가. 더 많은 나라들을 알고 더 많은 지도자들을 알고 이 세상에 배회하는 모든 리념과 주의주장들을 다 알고 그다음 자기의 일가견을
세워보고싶었다. 적어도 자기 조국을 위하여 세계에 맞서보자면 그래야 했다. 비슈와나스의 마음속에 날고있는 두루미는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끝없이 나래를 퍼덕이기만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