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3 회) 6. 생활은
생활이다 인간의 모든 생활에 물질이 안받침되여있음을 이 세상 그 누가 부정할수 있으랴. 그래서인가, 력사의 갈피갈피에 그것을 둘러싸고 벌어진 충돌의 흔적들이 새겨진것은… 그 충돌은 기본 계급간의 모순이였다. 그래서 맑스가 《자본론》에서 전면적으로 해명한 잉여가치에 관한 학설은 자본주의기본경제법칙을 밝히고 자본주의착취의 비밀을 폭로한것으로 하여
로동계급의 혁명투쟁력사에 그 의의를 뚜렷이 새겨놓은것이리라. 인간은 누구나 력사를 관망하며 그 력사속에 산다. 산다는것은 생활한다는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 그 누구에게 있어서도 생활은 례외가 아니다. 생활과 완전히 동떨어진 사람이 그 어디에 있으랴. 비슈와나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유와 평화, 진리의 길을 모색하는 그의 리념 역시 그 생활속에서 무르익는것이였다. 호화생활은 하지 않았지만 뉴델리에 와서 어느덧 석달이 흐르는 사이 그의 주머니는 점점 들장나기 시작하였다. 생활을 말로써 대신할수는
없는것이다. 랭정한 현실은 걸음마다 돈을 요구하였다. 어디에 가서 돈을 꾸어온담? 아무리 생각해도 이 도시에선 어디 가서 돈을 꿀데도 없었다. 설사 돈을 꾼다 해도 노예로 되는 그런짓은 하고싶지 않았다. 하지만 생활은
그의 의사에는 관계없이 걸음마다 그를 엄습해왔다. 출발은 컸는데 내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다니?! 처음으로 궁핍한 생활에 맞다들린 비슈와나스는 이러지도저러지도 못하고 조바심에 가득찬 마음을 안고있었다. 부모에게? 왜서인지 고향에는 전보를 치고싶지 않았다. 부모에게는 자력으로 이 세상을 걸어갈줄 아는 자식의 어엿한 모습만을 보여주고싶었다. 쏘련대사관에? 거기에는 죽어도 손을 내밀어서는 안되였다. 노력하면 보수가 온다고 하였지만 그 문제에 대해서는 에피모브도 비슈와나스도 둘다 일체 입밖에 내지 않고있었던것이다. 돈에 대해서는 누구나 생각하고있으면서도 누구나 쉽게 말하지 않는가보다. 특히 지성인들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아마도 그것은 돈만이 아니라
도덕과 륜리의 흐름으로 이어지는것이 또한 인간생활이기때문이리라. 돈을 앞세운다면 그런 인간관계는 돈과 함께 끝나지만 신뢰와 우의, 덕을 앞세운다면 그뒤엔 반드시 더 큰 보수가 따르게 되는것이다. 속에 구렝이가 들어앉은 이 두사람은 서로가 보수에 대한 말은 한마디없이 일정한 기간 지탱하면서 정말로 상대방이 함께 한길을 갈수 있는
사내인가를 가늠해보고있는지도 모를 일이였다. 배운 사람들에게 있어서 교제의 오묘한 수완은 역시 지성이다. 비슈와나스는 설사 금전이 안들어올망정 자신의 지체를 낮추고는싶지 않았다. 그의 빈주머니는 곧추 서지 않았지만 자존심만은 뻣뻣이 서있었다.
인쇄비만을 지불하고있던 에피모브의 입에서 드디여 보수에 대한 말이 나왔다. 그날은 《쏘베트 땅》 제3호가 발행된 1948년 1월초의
어느날이였다. 새해의 첫 호에 맞게 편집된 잡지를 번지며 앞으로의 편집방향에 대한 이런저런 말을 하던 에피모브는 이제서야 생각난듯이 흔연하게 돈문제를
꺼내는것이였다. 《당신 로임을 얼마나 요구하는가?》 비슈와나스는 로임이라는 말이 왜서인지 좀 귀에 거슬렸다. 그것은 그 말이 은연중에 내가 여기에 고용되였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하기때문이였다. 현재 주머니는 비여있어도 나는 결코 돈과 재산이 없거나 또한 그것이 탐나서 뉴델리에 와 혼자 돌아가고있는것은 아니지 않는가. 나는 다만 무엇인가 큰일을 하고싶을따름이다. 나는 남에게 고용되는것을 결코 원치 않는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어려서부터 몸에 푹 배인 천성이였으며 한생을 관통하고있는 철칙이였다. 하기에 그는 오늘도 자기가 주체사상을 따르는것은 조선에 고용돼서가 아니라 자기의 심장이, 온넋이 그것을 신념으로 받아들였기때문이라고 세상에 대고 거침없이 말하고있는것이다. 원래 그는 자존심이 강한 사내였다. 그런 사내는 평생 그 누구앞에서도 숙어들지 않고 세상을 제 마음대로 쥐락펴락해야 시원해할상싶다. 에피모브는 오늘에야 비로소 로임소리를 슬쩍 꺼냈지만 비슈와나스의 눈에 반가와하는 빛이라고는 전혀 비끼지 않는것을 보고 내심 놀라와했다. 돈이 없으면 한걸음도 걸어갈수 없는 이 세상에서! 유럽에는 돈없는 사람을 이발없는 승냥이에 비유한 속담이 있다. 이발없는 승냥이가 무슨 일을 치랴. 하지만 비슈와나스는 뻣뻣했다. 흔히 생활에서 잔말이 없고 상대방의 말을 시원하게 받아들이는 성미인 비슈와나스였지만 이번에는 주겠다는 그 말에도 실퉁해하며 이렇게 대꾸하는것이였다. 《내가 무슨 여기 직원이라고 로임을 받겠소.》 그때에야 비슈와나스의 속생각을 알아챘는지 에피모브는 소리내여 웃으며 자기 말을 다시 정정하는것이였다. 《아, 로임이 아니지. 도와준데 대한 사례라고 해야 할걸 내가 잘못 표현했네. 사례는 응당 받아야 하네.》 《그렇다면!》 그제서야 승낙한다는듯이 내키지 않는듯한 표정을 지으며 내뱉는 비슈와나스의 말투는 너와 나는 동등한 지위라는것을 강조하는듯싶었다. 돈이 있으면 이 세상에서 많은 일이 되지만 타고난 기질은 돈으로 흥정할수 없는것이였다. 《그래 얼마를 요구하나?》 《요구는 무슨 요구?》 비슈와나스는 여전히 태연자약하였다. 《그래도 생각하는것이 있겠지.》 《아니, 당신들 마음대로!》 나이는 어리지만 끝까지 배포유한 비슈와나스의 태도에 감동되였는지 아니면 위축되였는지 에피모브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하였다. 《그럼 한달에 300루삐씩하면 어떤가?》 《아무렇게나.》 이것으로 서로가 3달동안이나 말해오지 않던 실무적인 문제가 락착되였다. 그리하여 비슈와나스는 그자리에서 3달분의 사례금인 900루삐의 돈을 받게 되였다.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액수였다. 그때 비슈와나스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변화도 없었지만 마음속에서는 부모에게 손을 내밀지 않고 생활을 이어갈수 있게 되였다는 안도의 숨이 나가고있었다. 그다음에야 싼또쉬 꾸마리가 문뜩 생각났다. 이 세상에 자기를 기다리는 녀성이 있다는것은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바삐 돌아갈 때에는 전혀 생각나지도 않더니 정작 돈을 쥐고보니 그와 한 약속이 생각났고 또한 그 약속을 지킬수 있게 되였다는 자부심으로 은근히 가슴이 설레이기까지 하는것이였다. 사람이 공기만을 마시고는 살수 없지 않는가. 역시 생활은 생활이였다. 비슈와나스는 우선 그 돈으로 뉴델리중심에 아빠트 2칸짜리 집을 세내였다. 세집이였지만 그래도 이제사 그에게 편지를 받고 보낼 번지가 생긴것이였다. 그 번지는 그가 틀림없이 뉴델리에 발을 붙였음을 나타내는 표적과도 같은것이였다. 비슈와나스는 그 주소를 달고 편지를 날려보냈다. 라호르로, 판도리비비로… 그 주소로 편지가 날아들었다. 인간생활이 시작된것이였다. 보다 넓고 붐비는 뉴델리에서의 생활이. 비슈와나스는 둘이 살기에는 넉넉한 그 집으로 싼또쉬 꾸마리를 데려올수 있었다. 집세는 한달에 40루삐면 되였다. 이때에 싼또쉬 꾸마리는 안경을 끼고있었다. 사실 눈이 나쁜데 안경을 벗고있자니 참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비슈와나스는 픽 웃고말았다. 이런것 역시 생활인지. 가정은 어떤 경우에도 지키는데 그 뜻이 있다. 싼또쉬 꾸마리는 《쉬바신》을 우러러 빌고빌었다. 그는 자기가 숭상하는 그 《신》이 악을 물리치고 둘이 함께 새살림을 편 뉴델리에서의 생활이 순조롭게 흘러가게 해주기를 기원하였다. 그때부터 비슈와나스는 가정을 싼또쉬 꾸마리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사회의 각 방면으로 활동의 폭을 넓혀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때 인디아에서 대성인이라고 불리우는 마하트마 간디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인디아에서는 힌두교도와 똑같이 이슬람교도들도 포섭하여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그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1948년에 들어선 뉴델리의 공기는 험악할대로 험악해지고있었다. 그러자 그는 최후의 유일한 수단으로 또다시 단식투쟁에 들어가면서 모든 힌두교지도자들에게 호소하였다. 이무렵에는 전국민의 신망을 한몸에 지니고있던 그인지라 그가 단식까지 하며 투쟁하는데 감격한 힌두교지도자들은 흔연히 무릎을 꿇고 인디아땅에서 살고있는 모든 이슬람교도들을 보호하기로 맹세하였다. 그러나 역시 일부 힌두교도들은 불만을 억누를길 없어 간디가 살아있는 동안 인디아를 완전한 힌두교국가로 만들수 없다고 속단한 나머지 드디여 그해 1월 30일 10일간 단식을 마치고 기도하러 가는 간디를 총으로 쏘고야말았다. 간디는 극우익조직인 국민지원단의 한 성원이 쏜 3발의 총탄에 맞고 즉석에서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평생을 두고 인디아를 위하여 간고한 투쟁을 계속해오던 비폭력주의자이며 무저항주의자인 간디는 자기가 그처럼 아끼고 사랑하던 힌두교도들의 손에 의하여 숨을 거두었던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80이였다. 간디는 자기를 두고 《나는 성인도 아니며 정치가도 아니다. 나는 체험을 쌓고있는 사람이다.》라고 쓴바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후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사이의 대립을 완화하기 위하여 애타게 노력한 간디였으나 그는 종내 교도들에 의하여 그렇게 암살되였다. 간디의 시체는 힌두교의 례식에 따라 뉴델리교외에서 화장하였는데 화장한 재는 간지스강에 그리고 인디아 최남단의 쿠마리갑부근의 인디아양과 아라비아해, 벵갈만이 합쳐지는 곳에 뿌려졌다. 간디의 화장식이 거행되는 라즈가트로 흘러드는 군중속에 비슈와나스도 섞여있었다. 몰려든 간디신봉자들은 수만명을 이루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결혼》한 녀성이 제일 많다는 그의 이름을 실증해주고있는것인지. 많은 녀성들이 그와 마음속의 《결혼》을 하였다는것이다. 모를 일이였다. 녀성들의 마음을 끌어당기게 한 그 리유가 무엇인지?
그에게 대명사로 붙은 《마하트마》인가? 그 《위대한 넋》은 평등권획득을 위한 그의 《비폭력》, 《무저항주의》였으며 《불살생》, 《진리파악》의 구호였다. 정녕 그는 이기기 위하여 착하였는가. 그렇다면 그의 그 넋이 앙양된 민족해방운동을 왜 좌절시켰으며 식민지당국과의 모든 협상에서 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는가?
나약성의 로출은 민족이 바라는 모든것을 가져오지 못하게 하였으며 많은 《결혼》자들도 결코 그를 보호할수 없게 하였던것이다. 비슈와나스는 조의를 표시하면서 다시한번 이 세상의 모든 교파들이 서로 싸우지 않기를 바라마지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줄곧 마음속으로 이 세상의 서로 다른 교파들과 당파, 학파들을 다 포섭할수 있는 그러한 넓은 그릇, 넓은 리념은 없을가 하고 생각하였다. 생활은 멈춤없이 흘러가고있었다. 해가 바뀌면서 비슈와나스에게 첫 자식이 태여났다. 딸이였다. 첫딸은 금주고도 못산다는 말이 있듯이 모두가 귀해했다. 그 딸의 이름은 닐람이였다. 비슈와나스도 그 첫딸을 고와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집에 있는 날보다도 밖에 나가있는 날이 더 많았다. 아이는 싼또쉬 꾸마리가 전적으로 키워갔다. 역시 녀자는 안으로 돌고 남자는 밖으로 도는 존재인듯싶다. 비슈와나스는 《쏘베트 땅》을 더욱 힘차게 걸구어갔다. 그는 쓰딸린시대의 번영하는 사회주의쏘련의 모습을 글과 사진으로 밤가는줄 모르고 편집해나갔다. 쏘련이 진행한 첫 원자탄시험의 성공! 1949년의 이 놀라운 사변은 당시 세계를 법석 들끓게 하고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세계는 쏘련과 미국을 각각 축으로 하여 쁠럭을 조성하면서 《랭전》의 바람을 몰아오고있었으니 충분히 그럴만한 일이였다. 그때 미국신문들에는 쏘련이 원자탄을 가지기 전에 쏘련에 원자탄을 써야 한다고 고아대는 일련의 상원의원들의 주장을 실은 글들이 수두룩하게 나오고있었다. 서방의 모든 출판물들은 로씨야사람들이 원자탄을 만들려면 10년이상 지어는 20년이상 걸릴것이라는 나발을 꺼리낌없이 불어대고있었다. 그런데 쏘련이 전후 이처럼 빠른 시일에 원자탄을 만들었으니 10월의 전취물을 믿음직하게 지킬 위력한 무기를 가지게 되였다는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로 세계가 인정해야 하였다.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의 비극, 미국의 열핵전쟁위험이 쏘련으로 하여금 자기들의 지식과 경험을 열핵무기를 만드는데 돌리게 했던것이다. 뒤이어 진행된 수소탄제작의 성공! 이것은 미국보다 늦게 핵분렬폭탄을 성공한 쏘련이 미국보다 먼저 핵융합폭탄을 성공하였음을 알리는 또하나의 사변이였다. 《쏘베트 땅》은 이 모든것을 담으면서 자기의 《령지》를 온 나라, 온 세계에로 점점 확대해나가기 시작하였다. 발행부수가 늘어나면서 그는 출판기지도 샥튀출판사에서부터 인디아공산당출판사인 뉴 에이쥐(새시대)로 옮기였다. 물론 여기서는 인쇄만 하였고 판권은 어디까지나 쏘련대사관에 있었다. 처음에 영어로만 발간되였던 이 잡지는 1년후부터 힌두어로도 발행되기 시작하였다. 날이 갈수록 비슈와나스에게는 더 많은 일거리가 기다린듯이 나섰다. 쏘련대사관을 중심으로 맺어지는 인디아주재 사회주의나라들의 각 대표부들에서 저마다 비슈와나스에게 출판을 의뢰해오기 시작하였던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젊고 수상의 신임을 받는 비슈와나스가 막강한 힘을 가진 출판업자나 되는듯이 생각하고있는 모양이였다. 그도그럴것이 《쏘베트 땅》은 그 형식과 내용이 더욱 다양하게 편집발행되는것으로 하여 광범한 독자들의 인기를 모아가고있었던것이다. 혈기에 넘치는 비슈와나스는 밤에는 책을 읽고 낮에는 또 이리저리 뛰여다니며 정신없이 지식의 샘을 생활에서 한껏 들이마시고있었다. 의뢰해오는 일감들을 이제는 혼자서 감당하기가 어렵게 되였다. 그는 기업을 꿈꾸기 시작하였다. 단번에 기업을 차려놓을수는 없으니 우선 그 일환으로 자그마한 회사같은것을 하나 내오는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대방이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자기의 기업이 없을 때에는 그에게 얹히우기마련인것이다. 자기 앞길을 개척하자면 우선 자기의 힘이 있어야 한다. 자기의 노력, 자기의 힘을 믿을수 있다고 생각될 때 드놀지 않는 신심과 배짱이 생기는것이다. 비슈와나스는 자기의 힘을 키워 자기의 노력으로 모든것을 이룩해나가고싶었다. 그럴 때만이 래일을 확신성있게 설계할수 있었고 또 그대로 내밀수 있는것이였다. 젊고 불타는 심장은 지칠줄을 몰랐다. 자체로 뭘 하나 설립해야 한다는 결심은 이제 더는 미룰수 없는 실천적인 문제로 나섰다. 의지는 확고하나 경험이 없었다. 그러나 해야 했다. 그것이 자기가 사는 길이였고 또한 사회주의를 돕는 길인 동시에 자기가 사회주의에로 나가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무은것이 5명의 동료들을 망라한 자그마한 그룹이였다. 어쨌든 그것도 하나의 사명을 지닌 집단이므로 명칭과 사무실, 직제가 있어야 했다. 생각던 끝에 명칭은 《인터라즈》(광고주식회사)라고 하였다. 하지만 말이 주식회사이지 거기에는 주주가 따로 없었다. 모두가 비슈와나스를 도와서 함께 일하고 수입금이 있으면 함께 나누기로 한 동료들의 회합일뿐이였다. 《인터라즈》는 그저 흔히 그 사회에서 대기업들이 취하고있는 주식회사의 이름을 가졌을뿐이였다. 물론 그 《인터라즈》가 오늘날에는 《트리뷴》이 전하고있는것처럼 《림까세계기록집》에 오른 유일한 광고주식회사로서 세계각지에 30억루삐에 해당되는 광고제국을 이끄는 대기업체로 되였지만 설립당시에는 이렇듯 소규모적이였다. 시작은 모두 작다. 하지만 큰일도 작은데서부터 시작되며 가장 높은 곳도 가장 낮은데서부터 톺아오르기마련이다. 사무실은 뉴델리 아싸프 알리(인디아의 애국투사의 이름)거리에 있는 한 기업쎈터의 크지 않은 방 하나를 세내여 마련하였다. 그리고 《인터라즈》의 조직기구는 주식회사가 하는것처럼 리사회가 운영하는것으로 하고 비슈와나스가 리사장의 직분을 맡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의 친구인 에쓰. 피. 쵸프라의 지위를 리사장의 대리인격으로 정했다.물론 이 모든것은 당시에는 정부의 인정도 없이 5명의 그룹성원들이 합의한데 불과하였지만 그들은 모두가 시작부터 각자에게 맡겨진 일거리를 안고 분주히 뛰였다. 일은 시작할 때가 언제나 좋다. 자그마한 소득을 놓고도 그들은 기뻐하며 서로 경험을 나누었다. 때는 1951년이였다. 동방의 크지 않은 나라 조선에서는 힘겨운 전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쏘련대사관에 드나들면서 사회주의나라들의 소식통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던 비슈와나스는 해방된지 5년만에 전쟁을 치르는 동방의 이 작은 나라가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미국에 과연 견디여내겠는가 하는 의문도 없지 않았다. 비슈와나스가 처음으로 미국인을 본것은 라호르에서였다. 라호르에는 크리스챤 칼레지라는 미국학교가 있었는데 거기서는 《평화의 사도》들이 언제나 선량한 웃음을 짓고있었다. 그들의 그 웃음은 정말로 선량한 인디아의 많은 학생들을 그 학교에 모이게 했다. 미국의 허울은 그럴듯하였다. 그들은 저들의 《공적》에 대해 쓴 책들을 내돌렸다. 그 책들은 돌고돌며 많은 사람들에게 미국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없는, 모두가 진리를 말하고 실천하는 나라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아메리카대륙에 몰려든 저들의 조상들이 원주민인 인디안들에 대한 인간도살만행을 어떻게 감행했으며 미국이라는 나라가 그 주검우에 어떻게 솟은 나라라는데 대해, 세계의 곳곳에서 평화의 모자를 쓰고 웃고있는 저들이 막뒤에서 무력간섭과 전복음모를 어떻게 꾸미고있는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오죽하였으면 오스트리아황제가 일찌기 《이 세상 소란스러운 곳에는 언제나 미국인이 있었다.》라고 말하였겠는가. 청소한 국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미국을 위시한 련합세력들과 단독으로 맞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있었다. 과연 조선이라는 나라는 어떻게 될것인가. 온 세상이 그런 눈길로 조선을 주시하고있던 때였다. 잘못하면 아시아대륙에서 또하나의 약소민족이 워싱톤의 희생물이 되는 비극이 빚어지지 않겠는가 하고. 그러나 생활에서는 예상을 뒤집어엎는 때가 있다. 조선전쟁이 바로 그러했다. 시간이 갈수록 힘들어하고있는것은 조선이 아니라 미국이였다. 놀랍게도 조선인민은 전쟁의 시련을 이겨내고있었으며 마침내는 3년간의 전쟁에서 침략자의 멱통을 누르고 승리를 선포하였다.
미국은 조선에서 38°선을 방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시아전역을 한 끝에서 다른 끝까지 갈라놓는 더 큰 다른 분계선을 둘러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었다. 이것은 제국주의의 무서운 분계선이다. 그처럼 음흉하고 포악한 미국이 역시 조선도 둘로 갈라놓았다. 조선을 통채로 먹고 아시아적인 더 큰 분계선을 만들려던 미국은 조선전쟁에서 력사상 처음으로 패했던것이다. 세상사람들은 갓 일떠선 조선인민이 결코 약소민족이 아니라 영웅적인민이라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비슈와나스도 조선에 대한 인식은 그것이 전부였다. 청소한 나라는 그이상 알려진것이 없었다. 또한 그는 그이상 생각할 경황도 못되였다. 비슈와나스는 넘쳐나는 일거리를 안고 바삐 뛰였다. 생존경쟁의 자연법칙이 작용하는 각박한 세상을 빤히 알고있는 그는 남의 도움이란 애초에 바라지 않았고 오직 자기의 기업을 자기가 창설하기 위하여 실로 피타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각자의 운명은 각자의 손안에 있는것이다. 비슈와나스는 낮에는 여기저기 출판기지들을 돌면서 계약을 맺었고 밤에는 사회주의리론도서들과 기업경영도서들을 날이 새도록 읽었다. 사람은 의지와 함께 실력이 있어야 하는것이다. 불패의 기업을 창설하기 위해서는 정치를 알아야 했고 또한 과학리론적으로나 경영실무적으로나 누구보다 높은 위치에 서있어야 했다. 일은 직위나 말로써가 아니라 실력과 실천으로 하는것이다. 그는 만난을 극복해가며 사람들과의 관계도 좋게 맺었다. 뉴 에이쥐출판사와는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가 되였으며 그외 다른 인쇄기지들에도 동료들이 늘어갔다. 《인터라즈》성원들은 비슈와나스의 지령에 따라 여기저기로 분주히 원고들을 날라갔으며 또한 인쇄물들을 날라왔다. 대부분의 인쇄물들이 쏘련대사관을 비롯한 체스꼬슬로벤스꼬(당시), 벌가리아, 마쟈르, 뽈스까, 중국 등 사회주의나라 대사관들에서 주문한 소책자들이였다. 사회주의나라들이 활기를 띠며 승승장구하던 시기이므로 일거리가 딸릴 걱정은 없었다. 기업적인 측면에서 놓고볼 때에도 그는 시대의 흐름을 아주 잘 탔다고 해야 할것이였다. 비슈와나스는 쏘련대사관으로부터 《쏘베트 땅》의 편집을 위한 자료들을 정상적으로 제공받고있었다. 사회주의쏘련의 위력의 시위는 계속되고있었다. 1950년대에 쏘련은 자기의 힘을 더 크게 과시하면서 국제적지반을 공고하게 다져나갔다. 원자력발전소의 건설, 원자력쇄빙선의 출현, 첫 대륙간탄도로케트발사시험에서의 성공, 첫 인공지구위성의 성과적발사… 세상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이 모든 격동적인 사변들이 《쏘베트 땅》에 구체적인 사진자료와 함께 빠짐없이 실리였다. 《쏘베트 땅》의 편집사업은 비슈와나스에게 있어서 사회주의의 힘에 대한 정신적지주를 더욱 굳게 해주며 그를 그길로 떠밀어주는 원동력과도 같은것이였다. 가장 발전된 공업국가가 아닌 조건에서도 이처럼 놀라운 성과들이 이룩되고있는것은 중요한 문제들의 해결에 힘을 집중할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회주의제도의 우월성을 말없이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로 되는것이였다. 《쏘베트 땅》은 흥성이며 자기 일로를 걸어갔다. 비슈와나스는 사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그 《땅》의 알려지지 않은 경영자였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 《땅》에서의 수확물이 얼마나 생활을 안받침했든지간에 그것은 이래저래 좋은 일이였다. 그는 생활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생활을 맞받아나갔고 창조하였고 즐기였다. 다년간 그 자료들을 읽고 편집하면서 그는 사회주의쏘련의 모습을 직접 제 눈으로 보고 그 사회를 체험해보리라고 속생각을 하고있었다. 이러한 그에게 드디여 쏘련에 갈 기회가 왔다. 따쓰통신사(이전)에서 정치도서와 친선관계에 관한 책들의 출판문제토론과 관련하여 그를 초청하였던것이다. 이러한 기회가 반드시 오리라고 믿고있던 비슈와나스는 그 초청에 쾌히 응하였다. 많은것을 알기 위해서는 많은것을 보아야 하는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1954년 1월(인디아에서 비가 제일 적게 내리며 북동계절바람이 부는 시기)에 첫 출국의 걸음을 사회주의쏘련으로 내짚게 되였다. 제 뜻을 가지고 제 갈 길을 한번 가보자. 하늘이나 공기처럼 길도 사람을 위해 있는것이다. 길이란 사람들에게 완전한 자유의 감정을 자아낸다. 계속 가보자, 모스크바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