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회) 

 

3. 나라의 분렬

 

오랜 력사와 문화를 가진 인디아도 기원전부터 부단한 싸움과 분렬로 각지에 소왕국들이 형성되고 왕조들이 여러차례 교체되면서 자기 발전의 길을 걸어왔다.

령토가 광활하고 지하자원의 종수, 매장량에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인디아는 여러 나라들이 눈독을 들일만한 좋은 《먹이》였다.

이슬람교도인디아시대는 11세기에 이슬람교도들이 인디아에 침입하여 여러 왕국들을 정복함으로써 시작되였다.

이슬람교도의 통치시기에는 델리(노예)왕조, 하르지왕조, 투그라크왕조 등 여러 왕조가 수립되였으며 이 시기 몽골족인 티무르의 침입을 받았다. 1526년이후 모골(인디아사람들이 몽골이라는 말을 잘못 발음해서 굳어진 말.)제국의 통치를 받았으나 모골제국은 16세기말~17세기초를 절정으로 하여 점차 쇠퇴하였다. 한편으로는 15세기말에 뽀르뚜갈식민주의자들이 인디아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16세기말~17세기초에는 네데를란드, 영국, 프랑스식민주의자들이 또한 인디아에 대한 침입을 시작하였다.

당시 영국, 프랑스, 네데를란드식민주의자들은 각각 《동인디아회사》를 설치하고 저마다 인디아에 대한 침략을 강화하였다.

영국식민주의자들은 모든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1757년에 인디아에 대한 독점적인 지배권을 확립하였으며 1858년에는 전인디아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때 그들은 이슬람교도들이 집중되여있는 오늘의 파키스탄지역을 《직할식민지》로 떼여놓고 통치하였다. 그들은 인디아인민의 반영봉기를 계기로 식민지통치를 더욱 강화할 목적밑에 전인디아를 영국녀왕의 직접적인 관할하에 넣음으로써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시키고 총독정치를 실시하였다.

인민들의 투쟁기세가 점차 높아지기 시작하자 영국식민주의자들은 1940년 1월에 인디아의 이른바 《자치》를 인정하였다.

그다음 그들은 광활한 령토와 지하자원을 가진 이 나라를 분할통치하기 위하여 정치세력간, 종교간 모순에 끼여들어 불화의 불씨를 던지군 하였다. 이로부터 인디아에서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간, 호상대립된 정당들간의 충돌이 오래동안 지속되였으며 이 과정에 국내에서는 매우 복잡한 사태가 조성되였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1940년 3월 인디아이슬람교도련맹은 이슬람교도가 다수 거주하는 지역을 인디아로부터 분리할것을 요구하였다. 종교적알륵을 리용하여 인디아인민들의 민족해방투쟁을 분렬시키려던 영국식민주의자들이 이슬람교도련맹의 이 요구를 부채질함으로써 두 교파간의 반목은 가일층 첨예화되였으며 류혈적인 싸움은 1947년에 이르러 최대로 격화되였다.

교파들간의 치렬한 싸움이 일어번지는 인디아의 여러 도시들에서는 탄환이 획획 소리를 치며 날아갔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단말마의 웨침소리가 그칠새없었다.

각 신문들은 나라의 이러한 정세를 보도하고있었다.

이슬람교도들의 지도자라고 하는 모하메드 알리 지나는 《두 민족리론》을 강하게 들고나왔다. 다시말하여 그는 무슬림(이슬람교도)만을 하나의 나라로 하고 힌두교도(인디아교도)는 그들대로 다른 하나의 나라로 하자는것을 주장하였다.

인디아는 《두 민족리론》을 극구 반대하였다. 다민족, 다종교국가인 인디아에는 두개의 교리가 있을수 있기때문에 갈라지면 안된다는것이 나라의 주장이였다.

무슬림과 힌두교도간의 종교적반목을 조장시켜오던 영제국주의자들은 두 교파들간의 충돌이 절정에 달한 1947년 7월 이슬람교도가 많은 지역과 힌두교도가 많은 지역을 분리하여 각각 《독립》시키는 《인디아독립법》을 조작하였다. 이리하여 교활한 영제국주의자들은 이해 8월 15일에는 순전한 종교적표징에 따라 인디아를 두개의 《자치령》으로 갈라 독립을 선포케 하였던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여 영국이 300여년전부터 발을 들여놓았던 땅에 독립을 선포케 하였는가. 세계최대의 식민지제국으로 그 위세를 떨치던 영국이.

1914년에 영국의 식민지면적은 3 350만평방키로메터, 식민지인구는 무려 4억명에 달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후 영국은 전쟁에서 승리는 하였으나 받은 피해로 하여 국력이 쇠퇴해지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부터 인디아를 비롯한 식민지들에서 반영독립운동이 강력히 전개되였다.

19세기 전반기에 형성된 대영제국은 1931년에 해체되고 《영국국왕에 대한 공통의 충성에 의해 결합된, 각각의 주권을 가진 동등한 독립국가들의 련합체》로서 영련방이 생겨났으나 실제로 독립을 쟁취한것은 카나다, 오스트랄리아를 비롯한 영국계백인이 우세한 자치령뿐이였다.

영국은 력사적으로 유럽대륙에서 영국을 릉가하는 강국이 출현하지 못하게 하는 국가정책에 기초하여 교묘한 외교와 적절한 군사적개입을 통해 《세계의 경찰관》으로 행세하여왔다. 대표적인 실례로 나뽈레옹전쟁에서 프랑스를, 크림전쟁에서 로씨야를,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도이췰란드를 패배시키고 유럽정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것을 들수 있다.

그러나 1930년대에 상대적으로 국력이 강화된 파쑈도이췰란드의 침략정책에 타협(뮨헨협정)하지 않을수 없게 된것은 영국이 더는 세계최대의 강국으로서의 지위와 실력을 유지할수 없다는것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초에 영국은 파쑈도이췰란드와의 전쟁에서 파멸적인 타격(덩께르크전투에서 패배)을 받아 많은 인명손실과 륙군무장장비의 대부분을 잃었다.

1944년에 영국군은 미군과 함께 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파쑈도이췰란드군에 대한 결정적인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전후 영국은 전쟁때에 당한 막대한 손실, 강국으로 등장한 쏘련과 미국의 지위 강화, 식민지지배제도의 붕괴 등의 요인으로 국제적지위가 현저히 낮아졌으며 정치경제적으로 미국에 의존하고 추종하는 길로 나갔다.

영련방은 영국국왕에 대한 충성을 반드시 필요로 하지 않는 동등한 국가들의 련합체로 변하였으며 영련방의 기능과 지위는 더욱더 상징적인것에 불과한것으로 되였다. 제2차 세계대전후 영국의 경제발전속도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낮아져 영국의 국력쇠퇴는 계속되였다.

유럽의 제국이라고 일컫던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직후 국제적압력에 못이겨 불법적인 자기의 소유지들을 점차적으로 내놓지 않으면 안될 처지에 이르게 되였던것이다.

또한 로동당이 영국의 집권당으로 되면서 사태는 급속도로 진전되여 정권이양문제가 구체적으로 론의되기 시작하였고 모든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여갔다. 이에 따라 이슬람교도들의 문제가 한층 더 심각하게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마하트마 간디는 한 국민이 두개의 집단으로 갈라지는것을 원치 않았으나 3억의 힌두교도와 1억의 이슬람교도들사이에는 도살전이 전개되여 그 싸움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번져갔다. 이 처참한 상태에 부닥친 간디는 그 험한 싸움터를 직접 찾아 동분서주하면서 종교는 다를망정 《하느님》은 같은 《하느님》이며 《하느님》은 자손들이 피를 흘리며 싸우는것을 원치 않으니 제발 평화롭게 단결하여 살자고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들에게 안타까이 호소하였다.

수십년간의 피눈물나는 투쟁으로 독립을 맞게 된 때에 나라가 둘로 갈라진다는것은 간디에게 있어서 차마 눈뜨고 볼수 없는 가슴아픈 일이였다.

하지만 인디아는 둘로 갈라지고야말았다.

인디아가 독립을 맞이한 그날은 환희의 날이였으나 또한 나라의 분렬을 가져오는 비극의 날이기도 하였다.

영제국주의자들은 나라를 분렬시키면서 앞으로 저들의 식민주의적목적을 계속 추구하기 위하여 카슈미르(인디아와 파키스탄이 접하고있는 21만 8 000평방키로메터에 달하는 지역)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 당시 카슈미르는 인디아나 파키스탄의 어느 한 나라에 자유로이 속할 권리가 부여되여있었다. 하지만 영제국주의자들은 이 지역을 어느쪽에도 귀속시키지 않고 분쟁거리로 남겨두었다.

독립후 두 나라는 수차의 회담을 벌려오다가 카슈미르의 동부 및 남동부는 인디아의 통치구역으로, 서부 및 북서부는 파키스탄의 통치구역으로 각각 분할하였으나 국경확정문제와 종교적대립으로 분쟁은 세기가 뒤바뀐 오늘까지도 빈번히 일어나고있다. 이 하나의 실례를 통해서도 인류는 전쟁과 분쟁의 화근은 제국주의라는것을 똑똑히 알수 있는것이다.

인디아는 이렇게 되여 둘로 갈라졌다. 즉 힌두교도들이 집중되여있는 본래의 인디아지역을 한 나라로 그리고 이슬람교도들이 대부분인 지역을 또하나의 다른 나라로.

《이슬람》이란 말은 아랍어로 《순종》, 《복종》을 의미하는바 종교적으로는 《신을 따른다.》는 뜻으로서 회교를 이슬람교라고 부르고있는것이다. 원래 이슬람교는 7세기에 아랍사람인 무함마드(571년경―632년)에 의해 만들어진 교로서 그 발생지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로 알려져있다.

이 세상에 새롭게 등장하는 또하나의 이슬람교국가의 이름은 파키(순수하다)스탄(나라)이였다. 초대총독으로 된 모하메드 알리 지나가 나라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다시말하여 순수한 나라라는것이다.

하나의 교도들만으로 국가를 세우면 나라가 정말로 순수해지려는지…

하긴 인디아의 본래국호도 힌두스탄이라고 한다. 다시말하여 힌두교의 나라라는 뜻이다. 옛날에는 이 지역에 이슬람교도도 시크족도 없었으니 충분히 그렇게 불리울만도 한것이였다. 그러던것이 지금으로부터 250여년전에 영국이 이 힌두교의 나라에 독점적인 지배권을 확립하면서 인디아라고 불렀다고 한다. 오늘도 이 나라에 우르두어를 하는 사람들이 저희들끼리 말할 때는 힌두스탄이라고 하고 영어로 말할 때는 인디아라고 하는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는것이다.

인디아는 힌두교를, 파키스탄은 이슬람교를 국교로 선포하자 즉시 종교적리념에 따른 사람들의 대이동이 시작되였다.

그때 파키스탄은 인디아의 동부의 한쪽과 서부의 한쪽을 차지하였다. 그러하였던것이 1971년 3월에 동부파키스탄이 떨어져나와 방글라데슈국가를 창건함으로써 오늘의 파키스탄은 그때의 서부지역만이 속하는것이다.

당시 제일 복잡하게 교들이 자기 파를 따라 분주히 이동하기 시작한 곳은 판쟙주였다. 그것은 판쟙주가 인디아와 파키스탄지역을 다같이 차지하고있었기때문이였다.

바로 이 일대에서 말할수없이 처참한 대학살사건이 벌어졌다. 그와 동시에 인디아의 수도 뉴델리에서도 증오와 공포의 분위기가 맴돌게 되였다.

간디는 사태의 엄중성을 직감하고 뉴델리와 판쟙주를 래왕하면서 사태수습에 전력하였다.

그는 여러해를 두고 국민들에게 가르친 비폭력주의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는것을 절감하였지만 계속 자기의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간디는 파키스탄에서는 힌두교도를 학살하더라도 인디아에서는 힌두교도와 똑같이 이슬람교도들을 포섭하여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계속 주장하였다.

국경을 갈라야 했다. 결국 판쟙주는 둘로 갈라지게 되였다. 한쪽은 인디아쪽으로, 한쪽은 파키스탄쪽으로.

라호르는?

많은 무슬림들이 살고있으며 제일 큰 이슬람교사원이 있는 이 번화한 도시를 파키스탄쪽으로 하여 국경이 그어지게 되였다. 이 도시는 변함없이 판쟙주의 소재지인데 파키스탄쪽의 판쟙주소재지로 된것이다.

라호르는 복새판을 이루었다. 이 도시에 살던 힌두교도들은 부산을 피우며 인디아쪽으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주정부를 비롯한 주의 통치기관들에서 일하던 힌두교도들은 인디아쪽의 판쟙주소재지로 된 챤디가르로 갔다. 모든것이 뒤죽박죽이였다.

《트리뷴》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라에서도 큰 신문이였던 이 출판기지의 기대들은 졸지에 멎고 활자들은 그냥 놀았다. 기자도 직원도 모두가 교파에 따라 이주하는데 누가 그 공간을 메꿀수 있으랴. 거의 모든 주들에 지사를 두고있는 이 본사가 순식간에 붕괴나 다름없는 처지에 이른것이였다.

비슈와나스는?

더 말해 무엇하랴. 명성이고 뭐고 순간에 다 없어지고말았다. 사람들은 이 신문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않았다. 국적이 달라지는 판에 그 무엇에 대해, 그 누구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있으랴. 모두가 곁눈팔새없이 가장집물을 걷어안고 저 갈데로 부지런히 뛰고 붐비고있었다.

아, 개인의 운명은 나라의 운명에 따른것이였는가.

비슈와나스도 라호르에서 탈퇴하여야 했다. 그는 라호르를 사랑했다. 청춘시절의 희망을 키운 곳, 사회에로의 첫 발을 내디딘 곳…

그는 오늘도 이 파키스탄을 어머니조국이라고 부르고있다.

그는 언어도 우르두어를 더 잘 알았다. 우르두어와 힌두어는 서로 말은 비슷했지만 글자는 아주 달랐다. 일반적으로 우르두어를 하는 사람들은 힌두어로 말은 했지만 글은 우르두어만큼 잘 알지 못하고있었다.

비슈와나스는 소중한 추억이 깃든 그곳의 모든것과 작별해야 했다.

이런것이 어쩔수 없는 숙명이란것인가.

이 세상에 과연 이 숙명을 박찰 힘은 없단 말인가.

받아들여야 했다. 받아들이면서도 가슴은 아팠다. 하지만 방도는 없었다. 운명은 그렇게 주어진것이였다.

그는 정다운 피. 엘. 쏜디와도 작별해야 했다.

총경영자는 매우 섭섭해하였지만 그도 어쩔수 없었다. 그 역시 자기의 앞길과 《트리뷴》의 운명을 당장은 가늠할수 없는 처지인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하느님》은 너무도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희롱하는것이였다.

조국을 사랑하는 젊은 비슈와나스의 가슴은 쓰렸다.

분렬된 나라는 어수선하였다.

역마다는 아비규환이였다. 빈민렬차는 남녀로소들과 트렁크, 상자, 보따리로 꽉 들어찼다. 죽음에 직면한 공포와 살고저 하는 열망이 이 불행한 사람들을 이리로 몰아쳤던것이다. 곳곳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자유》가 수많은 사람들을 제 집에서 내쫓았던것이다.

비슈와나스는 이 모든것을 보았다.

인디아의 절대다수 인민이 성실한 땀을 흘리지만 그들이 바라는 살기 좋은 사회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나라가 분렬되는 가슴아픈 광경을 그는 똑똑히 보았다.

자비하신 《하느님》은 왜 사람들을 들볶우며 이렇게 고통속에 몰아넣는지?

세상을 흉악하게 만들고 흉악한 질서속에 놓아두는 《하느님》은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것이 못되였다. 사실 저 하늘에 계신다는 《하느님》에게는 땅우의 사람들이 찬양하든말든 그다지 문제로 되지 않을것이였다.

이 세상에 과연 사람들을 안정의 길로 인도하는 성자와 천사는 없단 말인가.

서로 다른 교파로 또는 그 무슨 제나름의 주의주장으로 갈라지는 이 모든 사람들을 하나의 정신적힘으로 묶어세울 그러한 사상이 과연 이 세상에 없단 말인가.

7억(당시)의 인구를 가진 인디아를 추켜세울 정신적인 힘은 어디에 있는가?

어느 리념을 따라야 인디아를 번영의 길로 이끌어갈수 있는가?

아무리 생각을 굴려보아도 만민이 공명할 사상은 없었다. 이 세상 제나름의 각이한 사람들을 하나로 이끌어갈수 있는 보편적인 사상, 인디아의 복리를 위한 실천적인 방도를 밝혀주는 그런 사상은 알수 없었다.

그가 우러를만 하다고 생각하는 성인들은 다 《천상의 아들》로서 허구에 불과하였다. 《인간생활의 안내서》로 간주하였던 《성서》들은 현실세계를 외면하고 《래세》의 《락원》만을 《약속》해주고있었다.

비슈와나스는 파키스탄으로 밀려가는 무슬림들과 인디아로 밀려오는 힌두교도들의 대집단을 보면서 저 모든 사람들을 하나의 리념아래 안정을 누리게 한다는것은 하늘의 조화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인디아의 문학작품들에는 서로 다른 신앙으로 하여 인디아로부터 부득불 《제2의》 조국인 파키스탄으로 이주해가지 않으면 안되는 비극적운명의 형상들이 반영되여있다.

독립은 이룩되였으나 둘로 분렬되는 나라의 정치정세가 얼마나 복잡성을 띠였는가 하는것은 당시의 비참한 현실을 반영한 인디아의 그 작품들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사람들은 《운명의 구세주》, 사상과 인덕으로 천하를 다스릴 위인을 갈망했지만 그러한 위인이 현실세계에 존재하지 않는것이야말로 인간세상의 가장 큰 비극이였다.

그 비극을 안고 비슈와나스는 인디아의 참된 아들이 되고저 민족이 나아갈 출로를 찾아 모색에 모색을 거듭하였다.

하지만 방도는 없었다. 다만 진리에 대한 갈구로 타끓는 젊은 혈기를 어디에 바칠데 없어 몸부림쳤을뿐.

그는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고향마을에 돌아왔다.

부모가 있고 처가 있는 고향집은 세월이 어떻게 흘러가든 언제나 자식을, 남편을 기다려 맞이하는 살뜰한 품이였다.

그래서 가장 안전한 피난처는 어머니의 품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라호르를 잃고 직업을 잃고 동료들을 잃고 고향집에 돌아온 젊은이의 죽지는 꺾이여있었다. 그의 심장은 괴로움에 쓰리고 아팠다.

주의 소재지인 라호르의 통치기관들에 자리를 잡았던 샤르마가문의 모든 사람들이 다 인디아쪽으로 나왔다.

판도리비비는 인디아쪽의 마을이였으므로 거기에 있던 샤르마가문에서는 다른 변동이 없었다.

인디아쪽의 판쟙주에 살던 이슬람교도들은 파키스탄쪽으로 이주하느라고 부산을 피웠지만 인디아중부와 남부쪽의 무슬림들은 인디아에는 무슬림도 있을수 있다는 나라의 립장을 따라 거의 대다수가 정든 고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오늘도 인디아는 세계적으로 무슬림이 제일 많은 나라로 되고있다. 오늘 인디아에는 1억 5천만의 무슬림이 있다고 한다. 분렬당시에도 인디아에는 무슬림이 아주 많았다. 인디아는 서로 다른 교들을 다 포섭하는데로 나갔던것이다.

오늘 인디아의 헌법을 보면 인디아인이 첫번째이고 그다음 힌두교도, 무슬림, 그리스도교, 씨크족 등으로 되여있다. 파키스탄에서는 무슬림을 먼저 놓는다.

일시 고향마을로 돌아온 비슈와나스는 잠시 한숨을 돌리였다.

하루밤 자면 생각은 더 현명해지는것이다.

비슈와나스는 고향집에서 한주일동안 자고 깨며 줄곧 고심하였다. 밤에 눕고 아침에 일어나도 그의 마음은 어딘가 허전하였다.

리념이 없거니 어이 살아 삶이라 할수 있으랴.

비슈와나스는 몸부림쳤다. 그저 끌리는대로 몸과 마음을 맡긴다는것은 그에게는 있을수 없는 일이였다.

라챠만 다스를 비롯한 할아버지계렬의 어른들은 마침이라고 생각하며 광활한 가문의 령지를 떠맡아 관리하기를 권고하였다.

하지만 금방 하늘을 날기 시작하던 그의 나래가 가없는 세월을 앞에 놓고 여기에 내려앉을수는 없는것이였다. 운명을 맞받아 더 높이 날고싶었다. 이 세상 어디로든지, 그 어디로든지!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다. 그 시절에 놓쳐버린 값비싼 진주는 인생에 다시 붙잡을 길이 없는것이다. 청춘시절을 잃은 사람의 앞길이 어찌 윤택해질수 있으랴.

바드리 나트 취바와 두르가데비는 맏아들이 보다 큰 인물이 되기를 바랐다. 하여 그들은 비슈와나스의 발걸음을 굳이 붙잡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그만한 믿음도 있었던것이다.

싼또쉬 꾸마리는 순박하고 조용한 녀성이였다. 결혼한 몸이지만 아직 애어린 소녀같은 순진한 미소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말없이 평온이 깃들게 하였다.

그에게는 나라의 분렬로 하여 자기 주인이 라호르를 떠나게 되였고 정들었던 《트리뷴》을 잃게 된것은 가슴아픈 일이지만 도무지 집에 붙어있지를 않는 그가 그것으로 하여 며칠간이라도 집에 와있게 된것은 다행이라 하지 않을수 없는것이였다. 결혼후 이렇게 며칠간 집에 함께 있어보기는 처음이였다. 비슈와나스가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좋았다.

싼또쉬 꾸마리는 《쉬바신》을 우러러 날마다 마음속으로 조용히 빌었다. 《쉬바신》은 힌두교의 기본신앙대상의 하나로서 그가 어려서부터 숭상하는 파괴의 신이였다. 그의 부모들이 《쉬바신》은 다른 신이 없을 때 제일먼저 나온 력사가 깊은 신이라고 하면서 온갖 사회악을 짓부시는 좋은 신으로 섬기고있었던것이다. 그러한 부모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그는 《쉬바신》에 대한 신앙심이 대단히 지극하였다.

싼또쉬 꾸마리는 무슨 일에서나 열정적인 자기 주인이 이 란리판을 무사히 넘기고 모든 일이 다 잘되기만을 빌고빌었다. 날마다 빌고빌면서도 이 젊은 녀인은 《트리뷴》을 잃은 자기 주인이 거기서 련마해온 필력과 경험으로 장차 어떤 길을 톺아올라가겠는지는 상상할수 없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 큰일을 하는 많은 사내들이 성실하게 빌고비는 녀성들의 그 마음에 떠받들리워있는지 어이 알랴.

며칠간 집에 있으며 비슈와나스는 한생의 반려자가 된 꾸마리에 대해, 또 그리고 가족을 가진 자기에 대해서도 새삼스레 깨달으며 앞일을 설계해보았다. 부모에게 의존해서 살수는 없기때문에 무엇을 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가문의 땅을 관리하고싶지는 않았다.

태여날 때부터 차례진 그 령지에 모든것을 얹고 숙명으로 인생을 보내고싶지는 않았다.

머리우에 푸르게 열려진 하늘가를 향해, 그 하늘끝에 맞닿은 대지를 향해 그는 소리쳤다.

아 하늘아, 땅아, 나에게 광명의 빛을 뿌리라.

드디여 그는 일어섰다. 모든것이 결심되였던것이다. 결심된 이상 고향마을에 더 앉아있을수가 없었다.

사람이 결혼하면 고쳐지는 습성도 있고 성격도 좀 달라진다고 하지만 비슈와나스의 가슴속에 퍼덕이는 그 두루미의 세찬 나래는 조금도 늦춤없이 더 멀리 날아가려고만 용쓰고있었다.

너무도 젊어서인가?

아니였다. 비슈와나스자신이기도 한 그 두루미는 한생을 그렇게 날았다. 그는 모든 세간살이를 안해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자유를 찾아 한생을 그렇게 날고날았다.

그는 부모들에게 뉴델리에 가 직업을 잡고오겠노라고 다짐했으며 싼또쉬 꾸마리에게는 집을 장만한 다음 데리러오겠다고 약속하였다.

그 다짐, 그 약속은 다름아닌 자기자신에게 하는 맹세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에 대한 담보는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명백하였다. 그것은 자기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가정도 나라도 지킬수 없다는 그것이였다.

그런 의지, 그런 신념을 잃지 않는것이 중요하였다. 바로 그것이 남아의 징표로도 되지 않을가.

이왕 이렇게 된바엔 수도에 발을 붙여보자는것이 비슈와나스의 결심이였던것이다.

그는 자기 삶의 앞길을 자기가 선택하고싶었다.

그는 생활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생활은 이제부터라고 생각하고 모든것은 뚫고나가봐야 하였다.

두려운것은 없었다. 그의 혈기는 왕성했고 의지는 확고했다.

그는 이 혼잡판이 수습되기 전에 다시 라호르에 들어갔다. 친구들 그리고 만나야 할 사람들을 다 만나보고 움직이기 위해서였다.

알따브 후쎄인은 라호르재판소에 그대로 있었다. 그는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그는 무슬림이였던것이다. 이슬람교를 따르던 그의 가족들은 판도리에서 파키스탄으로 된 라호르에 이미 다 이주해와있었다.

라호르는 여전히 복새판이였다.

비슈와나스는 알따브 후쎄인을 비롯한 친구들과 만나 형세에는 관계없는 사람들처럼 상을 차려놓고 회포를 나누었으며 자기들이 갈 길을 한밤 이야기하였다.

정의감으로 불타는 20대 초엽의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가슴아픈것은 나라의 분렬이였다.

나라가 분렬되는 이 시각 조국앞에 선 의무보다 더 중요한것이 무엇이랴.

젊은이들은 둘로 갈라지는 조국을 안고 몸부림쳤다.

젊고 건장한 그들은 취하지도 않았다. 마실수록 강렬해지는듯싶었다.

《알따브, 우린 왜 헤여져야 하는가?》

《세상에 이런 비극이 어디에 있나?》

두 친구는 가슴을 치며 통탄하였다.

어이하여 서로 친한 우리가 의사에는 관계없이 갈라져야 한단 말인가.

나라의 분렬, 이는 종교적분쟁이 안아온 비극이였다.

한 땅덩이가 둘로 갈라지는것과 함께 한몸인줄 알았던 가장 가까운 친구와도 서로 갈라져야 했다.

비슈와나스와 알따브는 헤여져선 못살 딱친구였다. 그 둘은 말그대로 한몸, 한그림자였다.

그처럼 가까운 동무가 있었던가. 한마을에서 태여나 소학교시절을 함께 보냈고 대학시절도 한기숙사, 한호실에서 함께 딩군 친구!

그와 함께 한 도시 라호르에서 인생을 그렇게 손잡고 걸어갔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그 둘은 서로가 제2의 《나》였다.

하지만 그와도 서로 국적을 달리해야 했다. 한지맥으로 잇닿은 땅에서 두 나라 사람으로 갈라져야 했다. 조국이 분렬될 때 가까운 친구와도 갈라져야 하는 이보다 가슴아픈 일이 또 어데 있으랴.

그것이 바로 나라의 분렬이 소꿉시절 친구들에게 가져다준 《선물》이였다.

그것이 바로 제나름의 신앙이 이 나라 청춘들에게 가져다준 《배려》였다.

수천년 이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교파간의 싸움으로 갈라져야 하는것이 이 나라의 비극이였다.

절통한 나라의 이 분렬, 이 비극을 체험하면서 그들은 자기 조국의 전망과 미래의 사회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게 되였다.

영령인디아의 한개 주격으로 되여 식민지통치를 받아온 지역들이 이 큰 덩어리에서 왜 제각기 떨어져나가고있는것인가. 파키스탄, 스리랑카, 먄마…

물론 그것은 식민주의자들의 분할통치수법, 분렬정책에 기인되겠지만 무시할수 없는것은 그들의 신앙적차이, 리념적차이인것이다.

이 모든 차이를 초월하여 인류가 단합하여 자유롭고 평화로우며 번영하는 새 사회에로 나아갈 길을 밝혀줄 그런 리념, 그런 사상은 이 세상에 없을가?!

그런 사상을 찾아가는 길이 있다면 인생을 그길로 줄달음쳐보련만!

청춘의 마음은 앞서달리는데 그들의 눈에 보이는 길은 아리숭하였다. 불안한 그들의 가슴은 넘쳐흐르고 답답했다.

《비슈, 잘 가라구!》

《잘 있으라구!》

그들은 포옹하며 말하였다.

《알따브, 우리 서로 마음만은 헤여지지 말자구!》

《헤여질수 없는 우리들이지!》

젊은 혈기의 가슴들은 갈증을 푸는 물을 목마르게 바랐다. 갈증을 푸는 그 물은 타고르가 바라고바란 자유인디아였다.

자유인디아를 목마르게 그리며 비슈와나스는 시를 읊었다.

 

오시라 갈증을 푸는 물이여!

환희의 흐름으로 폭포처럼 쏟아져

굳어진 심장을 헤치라!

용솟음치는 샘물은 신비로운 암흑속에서

뛰여나오거니

오시라 순결한 그대여!

태양이 그대 오길 반겨 기다림은

그대는 태양의 소꿉동무

그의 광명의 서정시는 그대 마음속 금빛시가를

불러일으키지 않느냐

 

오시라! 휘황한 그대여!

그 사막의 악마가 그대에게 뭔가 주문을 외워

돌빗장으로 그대를 가두려는가?

그대의 감옥담벽을 부시고 그대의 물결과 함께

자유로이 춤추며 뛰여오라

오시라! 굳세고 변함없는 그대여!

 

그들은 자기들이 달려야 할 인생렬차의 궤도를 이 한밤에 여기저기로 다 뻗쳐보는듯 했다.

갈래많은 인생의 궤도는 여기저기로 다 뻗어있지만 사람은 언제나 한길을 선택하기마련이다.

인생의 리치는 복잡한것 같지만 지내보면 세상 단순한것이 그것같기도 한것이다. 복잡하게 생각할것이 없었다.

비슈와나스는 모든것을 간단히 생각했다.

생활은 명백한것이다. 명백한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단순한것도 복잡하게 되는것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은 있기마련이다. 길은 합쳐지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련만 사람이 갈 길은 언제나 하나이다.

우선 가보자, 뉴델리로! 

 

되돌이

우리민족끼리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E-mail) : urimanager@silibank.com 홈페지내용에 관한 문의(E-mail) : uriminzok@silibank.com
Copyright © 2003 - 2013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
gotop
기사종합
 
도서, 잡지
 
영화, 음악
 
독자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