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회) 

제 1 장

너는 어디로 가려니

 

사람들이여, 세계지도를 펼치고 대양들을 한번 찾아보라. 그러면 누구에게나 새삼스럽게 생각되는 대양이 있으리라.

태평양과 대서양사이에 있는 인디아양!

한 나라의 국호가 그대로 하나의 대양의 이름으로 명명되여있는것이다.

지구우에 그런 대양은 이 하나뿐이다. 그렇듯 인디아는 넓고넓은 나라인가.

아시아의 남부에 자리잡고있으면서 북부는 중국, 네팔, 부탄, 북서부는 파키스탄, 북동부는 먄마, 방글라데슈와 잇닿아있으며 그밖의 지역은 인디아양에 면해있는 반도의 나라 인디아!

세상사람들은 인디아를 가리켜 준대륙이라고 한다.

아마도 그것은 령토가 넓고 인구수가 많은 나라라는 의미에 앞서 생활풍습, 기후풍토, 문화전통 등이 그 어느곳보다도 다종다양하기때문이리라.

그래서인지 세상에는 두 대륙을 차지하고있는 나라도 있고 인디아보다 더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도 있지만 그 나라들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고있지 않는것이다.

다민족국가인 이 나라에는 언어와 풍습 및 생김새가 서로 다른 민족, 종족이 자그만치 세계의 나라수와 맞먹는 200여개나 살고있으니 충분히 그렇게 불리울만도 한것이다.

민족, 종족이 많은 그만큼 이 나라에서 사용되는 언어 및 사투리는 800종이나 된다. 영어를 비롯한 외래침략자들의 언어들은 인디아 여러 언어들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일정한 수의 단어들이 들어갔을뿐 인디아의 언어들은 자기의 내적법칙에 따라 계속 발전하여왔다. 많은 현대인디아어들(벵갈어, 힌두어, 우르두어, 마라트어, 구쟈라티어 등)은 풍부한 문예작품들을 가지고있다.

기후차가 심한 이 나라에는 동식물분포 또한 다양하고 생활수준, 문화수준이 각이한 그만큼 빈부의 차이 또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인것이다.

나라의 인구수는 오늘 13억에 이르렀고 수도에도 1 500여만의 사람들이 모여 붐비며 제나름의 각이한 생활을 펼치고있다.

비슈와나스는 자주 붐비는 이 도시를 떠나 북쪽방향으로 400키로메터정도 떨어져있는 고향마을을 찾군 한다.

그 마을이 바로 판도리비비마을이다.

그 마을은 단순히 그의 어린시절의 추억과 부모들의 발자취가 스며있는 땅이 아니라 샤르마가문이 대를 이어 물려오는 광활한 령지가 펼쳐져있는 가문의 보다 큰 집이였다.

숱한 후손들이 바로 그 대지에 생의 명줄을 걸고 때로는 서로 웃고 때로는 서로 다투며 변덕많은 이 세상을 걸어가고있는것이였다. 서로 손을 잡든 싸우든 어쨌든 가문의 그 령지는 오늘도 떠나지 않고 옹기종기 몰켜선 후손들이 하나같이 매달려있는 생의 토양이였다.

세습적으로 근 200년동안이나 대대로 물려오는 그 땅은 무려 500정보에 달하였다. 그 땅을 손에 넣은 증조부는 이미 오래전에 고인이 되였고 이제는 갈래갈래 늘어난 그 후손들이 모다붙어 땅을 관리하고있었다.

흐르는 세월은 그들속에서 빈번히 의견상이를 일으키군 하였다.

가물이 들어 흉작이 들 때면 더욱 그러하였다. 저마다 자기 몫을 달라느니 땅을 팔아 돈을 나누어가지자느니…

하지만 아직은 그렇게 할수 없는 땅이였다.

가부장적가족제도의 법도에는 선친들이 살아있을 때에는 자손들이 재산을 가르지 못하게 되여있는것이였다. 앞으로 세대교체가 몇번 더 이루어지는 그때에 가서는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지만 비슈와나스의 세대들이 살아있는 한 조상의 유언을 어길 권리가 감히 누구에게도 없다고 그들은 생각하고있었다.

이 땅을 500년, 아니 1000년이후에도 절대로 팔지 말라! 그리고 노나가지지도 말라! 노나가지기 시작하면 다 쪼각나고 마지막에는 없어지고만다!

이것이 증조부의 재산상속유언이였다. 샤르마가문에 어길수 없는 철칙으로 내려오는 이 법을 아직은 누구도 선뜻 허물지 못하고있는것이였다. 가문을 대대로 보존하라고 그런 유언을 한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상의 그 어명을 과연 흐르는 세월이 언제까지나 지켜주려는지.

증조부는 가정의 화목과 단결을 위해 그런 유언을 남기였으련만 왜서인지 세월이 갈수록 가문에는 그 땅으로 하여 금이 가고있는것이였다.

흐르는 세월이 점점 비슈와나스의 가슴에 육감적으로 던져주는것은 세습적으로 물려받은 그 땅이 언제가서는 몫몫으로 나누어지게 될것이라는 예감이였다. 세대가 바뀌고바뀌면서 가문의 보다 큰 집은 족보에나 남아있겠는지 현실적으로는 생활단위로 쪼개져나갈것이라는 예감이 강했다.

부르죠아혁명이 일어난지도 벌써 몇세기가 흘러가지 않았던가.

19세기 전반기는 18세기말에 있은 프랑스의 정치혁명후 한쪽에서는 부르죠아제도가 수립되고 산업혁명이 추진되면서 새로운 모습을 낳고있었으며 다른쪽에서는 낡은 봉건적, 가부장적관계들이 새로운 부르죠아적관계에 의하여 허물어지고있던 시기였다.

바로 그러한 시기에 마련된 가문의 광활한 이 령지가 21세기가 흘러가는 오늘까지도 가부장적세습으로 보존되고있으니 그 땅, 그 가문이 결코 조용할리가 없는것이다.

현대문명의 눈부신 광채와 봉건의 어두운 그림자가 다 비껴있는 자기 나라의 량쪽모습을 한눈에 굽어보고있는 비슈와나스에게 있어서 그 령지는 가문의 더없는 재산이며 상징이기도 하였고 또 골치거리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비슈와나스가 태여나던 20세기 전반기에는 그래도 그 땅의 주인들이 모두 화목했으며 평화롭게 지내고있었다.

독자들이여, 우리 함께 주인공이 태여나던 그 시절의 판도리비비마을로 들어가보자.

 

1. 판도리비비마을(1)

 

1926년 9월 15일.

인디아의 판쟙(5개의 물줄기)주 호쉬아프르구역 판도리마을에 제일 땅많고 덕이 있는 집안으로 소문난 샤르마가문에 또 한세대의 장손이 첫 고고성을 터치였다.

태여날 때부터 남달리 크고 머리칼이 새까맣게 나와있는 그를 보며 가문의 어른들은 모두 무연히 펼쳐진 조상의 땅을 믿음직하게 다스릴 미래의 주인이 태여났다고 자못 기뻐하였다.

그 가문에는 조부와 증조부의 갈래들이 있기는 하였지만 력대적으로 맏자식의 맏아들이 가문의 상속권을 이어받는것이 기정사실화되여있기때문에 가문의 장손인 그 아이는 틀림없이 샤르마가문을 주인이 되여 이끌고나갈 《력사적》사명을 지니고 태여난 귀동자였다.

그 아이의 이름은 비슈와나스였다.

아직 살아있는 할아버지계렬의 조상들이 그 아이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성은 아니고 그저 이름이였다. 그는 애초에 성을 쓰지 않았다.

비슈와나스!

그 이름에 어떤 뜻이 담겨있는지 거기에 대하여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저 부르기 쉬운 이름이라고만 생각되였을뿐이다. 하지만 그 이름에는 이미 사라진지 오랜 싼스크리트어(고대인디아어)로 깊은 뜻이 담겨져있었다. 그것이 알려지기까지에는 세기가 바뀌여야 했다.

온 세계에 명성이 알려질 때 그 이름의 뜻도 비로소 알려지게 되는것인지.

만약 그때 인디아에도 봉건제도성립시기부터 20세기초까지 유럽을 비롯한 일부 나라들에 존재하였던 작위제도가 있었다면 샤르마의 이 후손에게 백작이든 후작이든 세습적인 작위가 차례졌을수도 있을것이다.

증조부 리쉬 샤르마는 가문의 이 땅을 마련하고 사탕공장을 운영한 사람이였다.

할아버지 쌀리그 람 샤르마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였다. 그는 인디아에서 알려진 농업교수였다.

쌀리그 람 샤르마는 새 품종의 남새들을 육종해냈으며 그것을 자기 땅에 퍼치게 했다. 그는 인디아의 서부에만 자라고있던 빠빠야(호박비슷한 남새)의 품종을 개량하여 판쟙주에도 자라게 했으며 인디아땅의 농법에 대한 책도 여러권 썼다.

오늘의 북부델리에 있는 인디아정부 농업성산하 연구소인 뿌사농업연구소가 바로 쌀리그 람 샤르마가 있던 연구소의 후신인것이다.

이 연구소는 원래 빠뜨나에 있었는데 1918년에 지진으로 무너진 후 여기로 옮겨온것이였다. 이 연구소의 넓은 홀에는 인디아농업발전의 자랑찬 연혁을 말해주듯 력사적으로 공로있는 농학자들의 초상이 걸려있다. 거기에 영국의 통치하에서 유일하게 인디아인으로서의 농업박사였던 쌀리그 람 샤르마의 초상이 오늘도 한자리를 차지하고있는것이였다. 이 연구소가 운영하는 250정보의 시험포전에는 오늘도 쌀리그 람 샤르마가 육종한 새 품종의 여러가지 밀, 벼, 남새들이 자라며 그의 공로를 전해주고있다.

쌀리그 람 샤르마는 비슈와나스가 태여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비슈와나스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어른이 된 다음에 이 연구소에서 볼수 있었다. 쌀리그 람 샤르마는 빠뜨나에서 지진이 일어나던 그해에 세상을 떠났던것이다. 당시 할아버지의 나이가 42살이였던것으로 보아 그는 어려서부터 수재였던것 같다.

가문의 땅은 할아버지의 형인 라챠만 다스가 경영하고있었는데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도 공부를 한 사람이였다. 가문의 좌상이 된 그에게는 이 광활한 령지를 떼메고나가는 일보다 더 중한 일이 없었다.

라챠만 다스도 비슈와나스의 출생을 기뻐하였다.

이 어린 복동이는 장차 가문의 이 령지를 떠메고나갈 주인이였다.

부유하고 교육받은 가정에서 태여난 비슈와나스는 무럭무럭 자랐다. 물질생활도 정신생활도 높은 급에서 향유하며 아이는 부럼없이 자랐다.

샤르마가문은 대대로 힌두교도들이였다.모두가 힌두교를 숭상하였다. 그러나 실지 종교활동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경전들은 누구보다 많이 보고 교리도 잘 알고있었지만 사원에는 다니지 않았고 《브라만신》이나 《비슈누신》, 《쉬바신》(힌두교의 기본신앙대상인 세계창조신, 생명보존신, 파괴신을 말함.)중에서 그 어느 신을 우러러 빌지도 않았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그들은 하나라도 더 현실적인 일들을 하느라고 분주히 돌아갔다. 이것 하나만 놓고보더라도 그의 가문은 그때에 벌써 고급한 사고를 하는 지성인들이였음을 알수 있다.

그러한 가정의 교양을 받으며 비슈와나스는 자랐다.

인디아는 전설이 많은 나라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시간이 주어지는대로 날마다 인디아땅에 깃들어있는 신비로운 전설들과 성인들의 영웅담에 대하여 어린 아들에게 열심히 이야기해주었다.

귀여운 이 어린 복동이를 가문의 사람들은 그저 비슈라고 즐겨불렀다.

그가 태여난 판도리마을을 멀리 감돌아흐르는 비아스강에도 수많은 전설들이 깃들어있었다.

판도리마을의 한복판에 지금도 보존되여있는 그의 고향집 대문에도 아름답게 부각된 전설속의 새들이 날고있었다.

긴 목을 앞으로 빼들고 긴 다리는 뒤로 늘이고 좌우로는 쌍겹으로 된 큰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새!

어린 비슈는 그 새가 새겨진 대문을 활짝 열어제끼군 하였다. 그러면 자기도 큰 새가 되여 멀리멀리 아름다운 세계로 날아가는듯싶었다.

《엄마, 이 새가 무슨 새나?》

모든것에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한 어린 아들을 대견히 바라보며 두르가데비는 말하였다.

《그 새는 두루미라는 새란다. 그 새는 장수와 깨끗함을 상징하는 새란다.》

그 시절에 어머니의 말을 다 리해할수는 없었으나 두루미라는 새가 좋은 새라는 인식만은 어린 비슈의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

정말 그 새가 무연히 펼쳐진 자기네 땅우를 날고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날마다 그 두루미떼를 쫓아가며 그 새의 마음이 되여 이 세상을 훨훨 나는 꿈을 꾸고있었다.

자기 집대문에 새겨진 두루미는 더 크고 아름다왔다. 그는 두루미라도 자기 집대문의 그 아름다운 두루미가 되고싶었다.

이 집의 대문에 새겨진 전설속의 두루미, 아마도 거기에는 이 집의 후손들과 이 집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이 길이길이 장수하며 깨끗하게 살기를 바란 조상들의 말없는 념원이 깃들어있으리라.

그 집은 19세기 초엽에 증조부가 지은 집으로서 건평수는 1 000평방메터에 달하였다. ㄷ자형으로 된 그 집의 대문은 오늘의 궁전들의 출입문보다도 2배나 큰 쌍문이였다. 하지만 그 문은 무게의 힘을 받지 않고 가볍게 밀기만 해도 스르르 열리고 닫기군 하였다.

집의 마당은 그저 포장한 공지였고 방은 무려 40칸이였다. 거기서 직계가족들이 저마끔의 방을 차지하고 살았다. 집의 지붕은 나무로 얹었는데 밤색칠을 진하게 하여 유별나게 나타나고있었다.

집의 량옆으로는 그보다 약간 작은 집들이 8채나 있었다. 그 집들은 어미집을 좌우로 둘러싸고 보호해주며 따르는 파수병들같았다. 그 집들에서는 친척들이 살았다. 단층으로 지은 그 집들마다에는 저마끔의 우물들이 있었고 둘레둘레에는 모두 빨간 벽돌로 울바자를 둘러쳤다. 1메터남짓한 그 울바자우에는 쟈스민, 장미, 해바라기 등 갖가지 꽃들이 계절을 따라 피고있었다. 

어린 비슈는 이 울바자에서 저 울바자에로 마음대로 드나들수 있는 이 마을, 이 족보의 꼬마주인이였다.

족보의 모든 사람들이 여기저기 바라다니기를 좋아하는 이 꼬마주인이 나타나면 저마다 반겨맞아주며 제 자식들이 그와 가깝게 지내기를 바라마지않았다. 그것은 족보의 장손으로 되여있는 이 꼬마주인이 먼 후날 가문의 령지를 다스리게 될 그날에 가서 저들의 자식을 잊지 않고 잘 돌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것이다.

비슈와나스는 같은또래의 아이들보다 몇살 우이라고 할만큼 몸집이 컸으며 눈과 코, 모든것이 다 큼직큼직하게 생긴것으로 하여 그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앞날을 두고 기대를 표시하군 하였다.

판도리마을의 인구수는 2 500여명이였는데 그중 비슈와나스의 가족들과 친척계렬에 속하는 사람들이 근 200명이였다. 그들이 모두 가문의 이 땅을 뜯어먹고 살았다.

당시 이 마을에는 전기가 없었다. 하지만 극히 적은 한두 집에서만은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보고있었다. 샤르마가문에서는 기본 관수를 위해 발전기를 돌리고있었다. 5개의 물줄기가 있다는 뜻에서 판쟙주였으나 이 마을에서 강까지는 거리가 멀기때문에 지하수를 뽑아 관개수로 리용하고있었던것이다.

해가 짧은 계절에는 저녁 6시부터 11시까지 조명등을 켰다. 비슈와나스는 그 조명등밑에서 다른 애들보다 앞서가며 글을 익혔다.

무더운 여름날에 책을 볼 때면 큰할아버지인 라챠만 다스가 특별히 그의 옆에 선풍기를 놓아주군 하였다. 가문의 장손을 위해선 아까울것이 없었던것이다.

《비슈야, 누구보다 공부를 잘해야 하느니라.》

그는 항상 이렇게 말하였다.

이 마을에서는 친척들만이 아닌 모든 농군들이 비슈와나스의 아버지, 어머니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고있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바드리 나트 취바였다.

비슈와나스의 증조부 리쉬 샤르마를 그저 취바라고 불렀기때문에 아버지는 성을 취바로 쓰고있었다.

바드리 나트 취바는 의사였다. 그는 당시 호쉬아프르구역의 남쪽지역에서 유일하게 대학공부를 한 자격의사였다. 그때는 구역적으로 대학졸업생을 꼽을 정도였다.

구역에는 2 000개의 마을이 있었는데 동, 서, 남, 북으로 갈라 한개 지역을 500개의 마을로 하고있었다. 판도리는 구역의 남쪽에 속하는 지역으로서 여기에 역시 500개의 마을이 있었다.

바드리 나트 취바는 이 지역 사람들의 병을 돌보는 의사였다. 이 지역에서 그의 이름은 취바박사로 통하고있었다. 그는 일찌기 박사학위를 받았던것이다.

취바박사는 말을 타고 다니였으며 때로는 걸어서 이 마을 저 마을로 쉬임없이 다니였다. 병이 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찾고있었던것이다. 어떤 날은 20~30키로메터씩 걸어다니며 치료하군 하였다.

직업적인 의사로서의 성실함과 친절함이 온몸에 배여있는 취바박사를 사람들은 따르며 존경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조건없이 무상치료를 베푸는 그의 이름은 주정부에까지 알려지게 되였다.

그리하여 당시 주장관이였던 영국인이 주정부의 이름으로 건물을 해결해주었으며 얼마간의 약품까지 보장받도록 대책을 취해주었다. 그것이 전인디아땅을 통치하던 영국인들이 저들의 《보호적인 시책》을 보여주려고 일부러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그것으로 하여 사람들은 더욱더 바드리 나트 취바를 《신》처럼 모시였으며 그는 더 많은 시간을 환자들에게 바칠수 있게 되였다. 그렇게 바쁜 시간을 보내면서도 바드리 나트 취바는 아들의 성장에 깊은 관심을 돌리였다. 며칠만에 집에 들어올 때면 어김없이 그는 어린 아들이 그 기간에 배운것들을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검열하였으며 또한 과제를 주기도 하였다.

어린 비슈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엄한 《책》이였다. 아들은 오직 그 《책》대로만 하여야 하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집을 떠나있는 시간이 많았으므로 그에 대한 양육과 교육교양은 주로 어머니가 하였다.

어머니 두르가데비는 명문가문의 출신이였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정성은 지극하였다.

두르가데비는 사람이 어려서부터 나쁜 버릇이 붙으면 고치기 어렵다고 하면서 태여나는 자식들을 모두 대바르고 훌륭하게 잘 키우기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두르가데비는 처녀때 고등학교를 나오고 2년제교원양성교육을 받은 자격교원이였다. 그는 가정교육과 정규교육을 잘 받은 녀성이였다. 그의 친정아버지가 프린슬리주의 교육상이였던것이다.

프린슬리주는 판도리마을에서 150키로메터 떨어진 두르가데비의 친정집이 있는 곳이였다.

당시 인디아에는 500개의 주가 있었는데 매 주들마다에는 마하라자(위대한 왕이라는 뜻.)들이 틀고앉아 통치하고있었다. 그들의 대다수는 영국인들이였다.

두르가데비의 아버지는 프린슬리주에서 그 마하라자의 고문이면서 교육을 담당하고있었던것이다.

비슈와나스의 아버지켠은 대체로 땅을 가지고 친족끼리 경작하며 과학연구활동에 종사했다면 어머니켠은 거의다가 정치활동에 참가하며 행정관료들을 하고있었다. 그런 혈통을 이어받아서인지 두르가데비도 100살을 넘긴 생애의 말년까지 신문을 많이 보며 국내외의 사건들과 정당들의 관계에 대해 자식들에게 말해주군 하였다고 한다.

결혼후 두르가데비는 판도리마을에서 교육활동에 모든것을 다 바쳐갔다.

판도리에는 소학교(5년제)가 하나뿐이여서 마을의 아이들이 학교에 다 갈수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물론 돈이 문제였지만 돈있는 사람들도 학교의 수용능력이 모자라 자식들을 학교에 다 보낼수가 없는 형편이였다.

두르가데비는 마을중심에 알맞춤한 건물을 하나 짓고 농민학교라고 이름을 달았다. 그리고 거기의 주인이 되여 농민자녀들에 대한 소학교교육을 시작하였다. 학년별에 따르는 교재들과 비품을 프린슬리주에 가서 가져오기도 하였다. 그는 자기를 자선가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이웃들을 위해, 농군들을 위해 할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는것이 인간으로서의 자기 의무라고 생각하였을뿐이다.

두르가데비는 아이들을 가르치는외에는 언제나 말없이 조용하였으나 그에 대해서는 온 마을사람들이 이야기하였다.

비슈와나스가 그 농민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자 두르가데비의 명망은 더욱 높아졌다. 자식에게 주는 훌륭한 어머니의 교육교양이 농민학교의 모든 아이들에게 다 나누어지는것이였다.

농군들은 감지덕지해하였다.

예로부터 밥은 아무곳에서 먹을지언정 교육만은 교양있는 집에서 받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재물이나 권력보다도 진리와 도덕을 더 중히 여기는 정신으로 아이들을 교양하는 두르가데비의 말은 그야말로 《신》의 가르침과도 같았다.

두르가데비는 마을사람들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비슈와나스는 농민들의 아이들과 함께 어머니에게서 배우며 소학교시절을 보냈다. 연줄연줄 태여나는 그의 동생들도 그렇게 배우며 자랐다.

마을에는 몇몇 안되는 토호들과 고리대들도 있었다. 그런 집의 땅을 부치며 연명해가는 소작농들의 집은 가난하였다. 대개가 그들은 한칸짜리 집에서 살고있었다. 낡은 양철판들을 무어 웃설미를 한 집들이다보니 우기에는 그 지붕으로부터 물이 흘러떨어지고 무더운 여름날이면 더운김이 확확 풍기며 추운 계절에는 차디찬 바람이 스며들었다. 그들은 그런 집에서 애들을 데리고 살며 가축을 치고 면양과 염소를 길렀다. 수백년동안 땅없는 농군들은 이렇게 살고있는것이였다.

그들은 한줄기 땅덩어리에 매달려 운명의 노예가 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였다.

이것이 봉건의 질곡이 짙게 드리운 20세기 전반기 인디아농촌의 모습이였다.

비슈와나스는 이 모든것을 보며 자랐다.

비오는 날 우산없이 진창길을 걷는 농군들이 그에게는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농군들의 그 모습은 그의 뇌리에 가난한 인디아의 농촌의 모습으로 깊이깊이 새겨졌다. 그는 한생토록 자기 나라의 그 가난한 농촌의 모습이 가셔질 날은 언제일가 생각하였다.

굶주림에 시달리는 인디아농민들은 소가 늙어죽을 때까지 온갖 시중을 다 들어주며 《우대》해주어야 하는 고달픈 생활까지 걸머지고있었다.

인디아와 같이 말못하는 짐승인 소를 우대하는 나라는 없다. 하기에 인디아는 세계에서 소마리수가 제일 많은 나라로도 유명하다.

그러면 그들이 소를 우대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뒤떨어진 농업국가였던 인디아에서 소가 힘든 일을 대신해주기때문인가.

아니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부림소로 리용하면서도 명절때나 혹은 일상적으로 소를 잡아 맛있는 고기와 가죽을 얻고있지만 이 나라에서만은 종교적악습때문에 소를 잡지 못하게 되여있는것이다.

인디아주민의 대다수가 힌두교를 믿고있는데 그들은 자기가 죽으면 령혼이 동물로 된다고 생각하면서 소를 신성한 동물로 믿고있는것이다.

힌두교도들은 소고기를 먹지 않는다. 지어 그들은 뱀이나 벌레들까지도 죽이는것을 꺼려한다. 그러므로 데칸높은벌과 같은 숲속에는 독사들이 욱실거려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있는 형편이였다.

지어는 공업도시들에서도 우대받는 소들때문에 사람들이 자유로 이 통행할수 없으며 자동차나 뻐스들이 조심히 다녀야 했다. 소가 농작물을 해치는 경우에도 그들은 소를 죽이지 못하고 보호하였다.

참으로 가난과 종교적악습으로 인디아농민들이 2중3중으로 걸머지는 부담은 컸다.

두르가데비는 이처럼 가난하고 우매한 농군들의 아이들도 차별없이 배워주었다. 머리가 총명한 아이들에게는 특별히 관심을 돌려 집에 데려다 재우고 먹이면서 공부를 시키기도 하였다.

무엇이 있다고 하여 누구나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것은 아니다. 하지만 두르가데비의 타고난 미덕은 이웃들을 도와주는것이였다.

선량한 녀성의 가슴에는 남에 대한 동정심이 있다.

가난한 집 자식들을 돌봐주는 어머니의 의협심은 어린 비슈와나스의 가슴에도 깊이 흘러들었으며 그것은 그의 성장에도 좋은 영향을 주었다.

두르가데비는 항상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대하였다. 그의 소리없는 웃음은 가문을 화목케 하고 농사를 흥하게 하였다. 그래서인지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두르가데비를 존경하였다. 간혹 친척들끼리 의견상이가 생기면 모두 그를 찾군 하였다. 사리를 밝혀 조용조용 말하는 그의 설복에 리해 못할 사람이 없었다. 그의 온화하고 조용한 몸가짐, 자애에 넘치는 맑은 눈초리 그리고 마치 기도를 올리는듯한 겸허한 의견과 친절성, 이러한 모든것이 커다란 힘으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샤르마가문의 가장인 라챠만 다스도 그를 좋아하였다.

샤르마가문에 대해 언짢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몇몇 안되는 토호들과 고리대금업자들이였다. 그들의 땅을 부치는 소작농들이 가장 어려울 때마다 저들에게가 아니라 두르가데비를 찾아가기때문이였다. 그때마다 그는 농군들이 바쁜 고개를 넘어서도록 도와주군 하였다. 그러면 토호들과 고리대금업자들은 마치도 저희들의 주머니에서 무엇이 나가기나 하는듯이 시기했다.

두르가데비는 주정부와의 관계도 좋게 가지며 사업을 잘해나갔다. 주장관을 비롯한 주의 관리들이 마을에 내려오면 그들을 대접했고 그 기회에 마을에서 도시와 련결하는 도로수리문제 등 제기되는것들을 설득력있게 제기하여 풀군 하였다.

이 모든것을 보며 어린 비슈와나스는 이 세상에서 자기 어머니가 제일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이 저도모르게 가슴속에 자리잡게 되였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첫 학교는 어머니이다. 그들의 눈에 비낀 어머니의 모습은 곧 이 세상인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긍지가 높아갈수록 어린 비슈와나스의 가슴속에는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이라는 우월감과 배짱이 소리없이 깃들고 싹트기 시작하였다.

어린시절의 환경은 사람들에게 미구의 성격을 규정하는 주요요인의 하나로 되는것이다.

그의 가정엔 사랑과 존경이 흘렀다. 부모와 자식간에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것이였다. 그것이면 되였다. 부모와 자식간에 그것이 흐르면 그 가정의 앞날에는 어두운 그늘이 비끼지 않을것이기때문이다.

두르가데비의 젊은 시절은 농민자녀교육에 다 바쳐지며 흘러갔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이 마을에서는 누구나 두르가데비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어머니라고 부르게 되였다.

마을에는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그리스도교 등 여러 교파들이 있었는데 그 모든 사람들이 두르가데비를 어머니라고 부르며 따르게 되였다. 늙은이, 젊은이 할것없이 그리고 농민학교를 나온 사람들도 그를 어머니라고 즐겨불렀다.

두르가데비는 온 마을의 어머니가 되였으며 그는 곧 이 마을의 상징으로 되였다.

언제 어느때 누구의 입에서 흘러나왔는지는 모르나 사람들속에서는 이 마을이 점차 《비비(어머니)마을》로 불리워지기 시작하였다. 두르가데비가 운영하던 학교도 《비비학교》, 바드리 나트 취바가 운영하던 병원도 《비비병원》…

그리하여 오늘은 정식 그 옛날의 판도리가 판도리비비로 지도에 표기되여 어머니마을이 인디아땅에 전설같이 생겨난것이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이 아마 그래서 나온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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