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7 회)
9. 그들이 함께 부른 《아리랑》 경매가 끝났다. 수많은 사람들속에 휩싸여 축하의 인사를 받느라 여념이 없던 경식은 뒤늦게야 진도집녀인을 찾아보았다. 녀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증권거래소 역원에게 물으니 녀인이 거래소안에 있는 간이차집에 들어갔다는것이였다. 리경식은 여러권의 《조선향악보》를 박상열과 함께
나누어들고 녀인이 들어갔다는 간이차집으로 들어갔다. 우달근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차집안은 조용했다. 진도집녀인은 희여스름한 앵초꽃화분이 놓인 창문곁에 허탈한 사람인양 눈을 감고 앉아있었다. 창문으로 비껴드는 석양볕이
저으기 지쳐보이는 녀인의 얼굴을 어설프게 비쳐주고있었다. 그들은 조용히 녀인에게로 다가갔다. 《아주머니, 정말 고맙습니다.》 《그 마음을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경식과 상열이 이런 말을 해서야 녀인은 눈을 뜨고 그들을 쳐다보았다. 우달근도 부리부리한 두눈에 감동의 빛을 숨기지 못하며 미안한 심정을
쏟아놓았다. 《이전엔 내가 좀 지나쳤던것 같수다. 원체 내 성미가 못돼놔서 그런거니 너무 고까와하지 마시우다. 허허…》 가슴을 찔리운듯 녀인의 얼굴이 금시 창백해졌다. 당황함과 면구스러움을 감추려는지 녀인은 황황히 창문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얼마후 녀인이
누구에게라 없이 조용히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녀인에게서 처음으로 들어보는 우리 말이였다. 《전 그런 인사를 받을만 한 인간은 못됩니다. 갑자기 제가 무슨 애국자로 돌변이라도 해서 그랬던건 아니니까요.… 오늘 큰애의 담임교원을
만나려고 학교엘 갔댔습니다. 거기서 일본아이들이 우리 애를 <쭁꼬>라고 몰아주는걸 봤어요. 일본아이들은 모두매를 맞고 쓰러진 우리 애를 짓밟고
서서 <반자이>를 부르더군요.…》 녀인의 목소리는 흐느낌같은 소리에 삼키워지고말았다. 창밖을 내다보는 녀인의 둥그런 어깨가 쓰라린 아픔으로 하여 경련을 일으키고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모두가 굳어져있는데 한참만에야 눈물을 훔친 녀인이 다시금 말을 계속하는것이였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경매가 시작되여서도 제 머리속엔 오로지 돈생각밖에 없었습니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난 뒤 줄곧 그렇게만 살아왔는걸요.
돈을 벌려면 체면도, 의리요, 정이요 하는것도 다 없애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땐 넝마옷을 걸치고 남정들속에 끼워 토목건설장에서
일해보기도 하고 어떤 땐 보리밥 한줌에 양파로 빈 배를 채우면서 부두에 나가 오끼나까시(배짐을 싣고부리우는 인부)노릇을 해보기도 했지요.
정말이지 무슨 일인들 못해봤겠나요. 그렇게 한푼두푼 제 청춘을 팔아서 돈을 모았고 아이들을 키워왔습니다. 이 세상에서 믿을건 단지 돈뿐이라고
생각해왔기에 전 선생님들에 대해서도 <조국밖에 모르는 멍청이들>이라고 속으로 비웃었답니다. 하지만 가루베라는 그 일본인이 조선사람들을 놀려대면서
날치는걸 보니 눈꼴이 사나와서 견딜수가 있더라구요. 이 땅에 끌려와서 일본인들한테 당해온 수모가 생각났어요. 우리 애를 몰아준 일본아이들도
그런자들의 말을 듣고 조선사람을 업신여긴다고 생각하니 더구나 참을수가 없더군요. 전 아들애의 앙갚음을 하고싶었어요. 그래서 경매를 포기하겠다고
한겁니다. 초가삼간이 다 타버린대도 빈대 죽는걸 보니 시원하다는 격이였겠지요.》 리경식은 거세게 울려오는 심장의 박동소리를 들으며 녀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고보면 진도집녀인 역시 겨레의 피가 흐르는 조선사람임이
분명했다. 조선사람들의 가슴마다에 새겨져있는 수난의 상처와 울분이 녀인의 가슴속에도 피못으로 짓박혀있었다. 그런줄도 모르고 자기는 돈밖에 모르는
수전노라고 너무도 쉽게 녀인을 속단해버리지 않았던가. 이 세상 그 어디서 무엇을 하든 조선사람들의 마음속 밑바닥에 철심처럼 뿌리박혀있는 민족의
얼을 보지 못한것이다. 그 얼이 있기에 박상열도 마지막순간에 자기와 손을 잡은것이고 진도집녀인도 끝끝내는 민족의 편으로 돌아섰다고 생각하니
경식은 피줄을 튕기며 솟구쳐오르는 흥분을 좀처럼 진정할수가 없었다. 그러는데 서글픔에 잠긴 녀인의 목소리가 또다시 그의 귀에 울려왔다. 《제가 왜 <아라이>라는 일본성을 쓰는지 아십니까? 물론 남편의 성을 딴거지요. 그인 생전에 늘쌍 <아리랑>을 흥얼거리군 했답니다. 그래서
통명으로 쓰는 성도 <아리랑>의 <아라리요>에서 따와서 <아라이>라고 달았더랬지요. 왜 그런지 오늘따라 남편생각이 간절해지는군요.… 일본이
싫습니다. 이 섬나라 땅에서 살기가 막 지긋지긋합니다.》 진도집녀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흐트러진 녀인의 머리칼이 피기가 사라진 이마며 피로에 잠겨 푹 꺼져들어간 눈을 가리우고있었다. 녀인은 슬픈
빛이 감도는 얼굴을 숙이며 조용히 인사를 하더니 식당을 나서는것이였다. 녀인의 괴로워하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지만 혼자 있고싶어하는 그 마음이
리해되여 누구도 선뜻 녀인을 불러세우지 못했다. 경식은 언제건 한번 녀인을 꼭 다시 찾아보리라 마음먹으며 두사람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그들이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정문앞에서 기다리고있던 하또리 류따로가 반가움이 넘쳐흐르는 얼굴로 다가오는것이 아닌가. 《하하하… 리선생! 정말 통쾌했습니다. 난 오늘 당신들에게서 조선민족의 저력을 보았습니다.》 하또리는 리경식과 박상열의 손을 부여잡고 연방 찬사를 터뜨렸다. 경식은 후더워오는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진실한 벗이였다. 지금껏
조선문화재반환을 위해 성심성의를 다한 그를 마주하고보니 이 시각 기쁨을 함께 나누고싶은 생각이 절로 솟구쳐 경식은 하또리에게 말했다. 《선생님, 우리가 그토록 찾던 <조선향악보>를 한번 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하또리가 대번에 활기를 띠며 어쩔줄을 몰라했다. 《이거 정말 고맙소. 실은 나도 향악보를 구경하고싶은 생각이 굴뚝같던 참이였는데 리선생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만.》 희색이 만면해서 덤벼치는 하또리를 보며 박상열도 동의하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우달근은 볼일이 있다고 떨어지고 경식과 상열이 하또리를 근처의
차집으로 안내했다. 경식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하또리에게 향악보를 펼쳐보였다. 하또리의 달아오른 눈길이 향악보의 갈피갈피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그의
얼굴에서 감동과 흥분의 불길이 벌겋게 타오르기도 하고 사색과 명상의 안개가 고즈넉하게 내려앉기도 했다. 이윽고 하또리는 머리를 쳐들더니 탄복을
금치 못하는것이였다. 《정말 귀한 문화재군요. 당신들은 실로 큰일을 하셨습니다.》 뭔가 깊이 생각해보는듯 구붓한 구레나룻을 천천히 쓰다듬던 하또리가 불쑥 경식에게 말을 꺼냈다. 《리선생, 내가 당신들한테 한가지 의견을 내놓아도 나무라지 않겠습니까?》 경식은 갑자기 심중해지는 그의 얼굴을 의아하게 바라보며 선선히 승낙했다. 《별말씀을, 어서 말씀하십시오.》 하또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느닷없이 이렇게 묻는것이 아닌가. 《리선생, 우리 이 고서를 가지고 한 이삼년간 장사를 해보지 않으렵니까?》 너무도 뜻밖의 제의인지라 리경식도 박상열도 한순간에 어리벙벙해지고말았다. 《장사라니요?》 경식이 놀라운 어조로 반문하자 하또리가 자기 생각을 숨김없이 터놓았다. 《이 책은 그야말로 동양의 보물입니다. 중세동양음악을 리해하는데서 사료적가치가 매우 큰 고서라는게 한눈에 알립니다. 만일 우리가 이 책을
복사해서 도꾜대학이나 윈대학, 소르본느대학 같은 세계의 이름있는 대학들과 학술기관들에 소개하겠다고 제의한다면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틀림없이 그들은 그 어떤 대가도 마다하지 않고 우리의 제의에 응해나설겁니다.》 생각만 해도 벅찬듯 하또리는 드레진 가슴을 부풀리며 한껏 숨을 들이그었다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리선생, 이런 말을 한다고 날 무슨 간상배처럼 생각지는 마십시오. 물론 조국애는 이 세상 그 어떤 도리보다 강하지요. 하지만 명예도 얻고
량심도 지키면서 실리까지 얻는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북조선이 사회주의제도라 해도 돈은 역시 필요할겝니다. 덕을 베풀려면
자기부터 족해야 한다는 말도 있듯이 앞으로 리선생이 애국사업을 계속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또 고국에 가서 생활을 하자고 해도 그렇고 돈이 있어서
나쁠거야 없지 않습니까. 장담하건대 만일 리선생이 한 2년쯤 귀국을 미루고 나와 함께 있어준다면 선생은 큰 재부와 명예를 다 얻어가지고
처자들앞에 나설수 있을겁니다. 또 조선민족의 귀중한 재부가 세상에 널리 소개되기도 할거구요.
두말할것없이 나의
이 제의는 박선생에게도 동시에 하는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하또리의 기대가 담긴 눈길이 경식과 상열의 얼굴을 초조히 더듬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만 살아온 그로서는 제나름의 선의와 진정에서 그런 제의를
했다는것을 경식은 잘 알고있었다. 허나 그것은 받아들일수 없는 제의였다. 묵묵히 생각에 잠겨있던 경식은 한참만에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선생님, 이 책은 한 개인의 물건이 아니라 우리 겨레의 유산이고 조국의 재부입니다. 어찌 자식이 어머니의 재부를 팔아 제 리속을 채울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왜 그리도 자기 조국을 첫자리에 놓는지 일본사람들은 다는 리해못할겁니다. 추위에 얼어본 사람이 태양의 귀중함을 더 잘
아는 법이니까요. 돈으로도 결코 살수 없기에 돈보다 더 중한것이라 할가.… 나나 여기 앉아있는 박상열씨나 모든 조선사람들에게 있어서 조국이란
바로 그런겁니다. 선생님, 우리한텐 돈보다도 조국이 더 귀중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경식의 얼굴에서는 인생의 다난한 체험에서 얻은 값비싼 신념이 후광마냥 강렬하게 빛발치고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상열의
눈망울에 열기가 어려 번뜩였다. 하또리도 이윽토록 경식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다가 입속으로 중얼거린다. 《리선생…》 얼마후 하또리는 자리를 떴다. 그를 바래주고 제자리로 돌아온 경식은 어리둥절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상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것이다. (어디로 갔을가?) 그들이 둘러앉았던 탁자우에는 향악보가 전부 그대로 놓여져있었다. 경식은 자리에 앉아 한동안 상열을 기다렸다. 하건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나타날줄을 몰랐다. 점점 의아한 생각이 경식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경매가 끝난 이후 좀처럼 말이 없던 상열이였다. 어둡고 우울하던 그의 기색이
경식의 눈앞에 자꾸 밟혀오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웬일일가? 혹시 경매를 치르고나니 향악보의 뒤처리때문에 고민스러웠던걸가? 돌이켜보면 향악보가
북으로 가는것을 막기 위해 지금껏 눈에 피발을 세우고 따라다닌 상열이였다. 하다면 어째서 향악보는 고스란히 내여놓은채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을가? 사실 경매가 끝난 뒤 리경식도 차후문제를 생각해보지 않은것은 아니였다. 그러나 경매장에서 동족의 부름에 불같이 호응해나서는 상열의
민족적량심을 목격했던지라 경식은 그 문제도 민족공동의 리익의 견지에서 대범하게 해결할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과연 박상열이 끝까지 화합의
길로 나올수 있을가? 상열은 종내 나타나지 않았다. 별수없이 경식은 무거운 마음으로 그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다. 도꾜로 돌아와 엄길호를 만나고난 경식은 그길로 히사꼬가 입원한 병원으로 달려갔다. 하또리의 이야기를 들은 다음부터 내내 마음 한구석에서
떠날줄을 모르던 히사꼬였다. (제발 다른 일은 없어야 할텐데…) 바야흐로 어둠이 깃든무렵이였다. 모든 일이 무사하기만을 빌며 히사꼬가 든 병실에 들어서던 경식은 그만 전기에라도 감전된것처럼 한자리에
굳어져버리고말았다. 다름아닌 박상열이 자기보다 먼저 와서 히사꼬의 침상곁에 앉아있었던것이다. 《자네가 어떻게…》 경식의 입에서 창황중에 튀여나온 소리였다. 그제서야 경식을 알아본 상열이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어지간히 당황해하는 기색이였다. 《왜 그리 놀라나? 난 뭐 히사꼬양을 만나면 안되는 사람인가?》 묻는듯 한 경식의 눈길을 피하려고 허둥대며 상열이 데퉁스럽게 내뱉는 말이였다. 경식은 벌기우리하니 상기된 그의 얼굴을 어리벙벙해서
바라보았다. 오사까에서 간다온다 말도 없이 홀지에 사라져버렸던 상열이였다. 그러한 그가 뜻밖에도 히사꼬앞에 나타날줄이야 꿈엔들 생각이나 했던가.
더우기 상열은 자신의
불미스러웠던 행동으로 하여 히사꼬의 반감을 사고있는 처지가
아닌가. 선뜻 갈피를 잡을수가 없어 경식이 아무 말도 못하고 서있는데 히사꼬의 부름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그쪽으로 눈길을 돌리니 히사꼬가 반가움에 겨워 찾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애쓰고있었다. 경식은 황황히 처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지 말고 누워있소, 히사꼬.》 처녀를 도로 눕히며 경식은 그의 모습을 유심히 눈여겨보았다. 히사꼬는 아직 머리에 붕대를 감고있었다. 언제 보나 눈은 꿈으로 가득차있고
심장은 다정다감하였던 처녀, 다채로운 랑만과 발랄한 성격을 부채살인양 펴들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주던 처녀가 별안간 상처입은 새모양이 되여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 경식은 그만 목이 꺽 메여오는것을 견딜수가 없었다. 바른소리를 했다고 처녀를 이 모양으로 만들다니… 입을 꾹 다문 그의
얼굴에 가증스러운 악한들에 대한 분노가 서려돌았다. 이윽해서야 경식은 눈시울이 붉어지는것을 애써 감추며 히사꼬에게 물었다. 《아직 상처가 많이 아프오?》 히사꼬가 입가에 연한 웃음을 띠우며 고개를 가로흔든다. 따뜻하고 약동하는 특유의 광채가 처녀의 깜장눈에서 흘러나왔다. 히사꼬는 기쁨에 넘쳐
경식을 쳐다보며 말하는것이였다. 《축하합니다, 선생님! 드디여 향악보를 찾으셨다지요?!》 《벌써 다 알고있는게구만.》 경식이 얼떨떨해하자 히사꼬가 알려주었다. 《박선생님이 제게 자세히 이야기해주셨습니다. 경매이야기랑 리선생님의 호소에 박선생님이 기꺼이 응해나섰다는거랑 모든걸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향악보를 찾으신것도 기쁘지만 그보다도 전 두분이 다시 친구로 만났다는 소식이 더 기쁩니다.》 처녀의 목소리는 령롱한 이슬방울같이 맑고 구김이 없었다. 넘쳐흐르는 기쁨이 생기로 충만된 처녀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되여 날리고있었다.
경식은 상열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상열이 열적은 태도로 경식에게 설명했다. 《자네가 전해줘야 할 희소식을 내가 먼저 전했다구 섭섭해말게. 실은 히사꼬양에게 지나간 일들에 대해 용서도 빌겸 해서 찾아왔더랬네.》 불시에 눈굽이 달아올랐다. 그제서야 경식은 히사꼬를 찾아온 상열의 마음을 심장으로 깨달을수가 있었던것이다. 히사꼬에게 터놓았다는 상열의
이야기는 그대로 리경식에게 터놓은 진심의 고백이기도 하였다. 경식은 가슴속에서 부풀어오르는 행복감을 누를길 없어 와락 상열을 그러안으며
부르짖었다. 《잘 왔네, 친구! 잘 왔어!》 마침내 박상열이 어제날의 친구가 되여, 정의와 량심으로 온몸을 불태우는 그날의 《구다라징》이 되여 경식의 앞으로 되돌아온것이다. 그런줄도
모르고 경식은 오사까에서 사라져버린 상열의 난데없는 행동을 두고 얼마나 속을 태웠던가. 혹 그가 또다시 마음을 돌려먹고 대결로 나오려는건
아닌지? 아니면 자기자신에게 환멸을 느낀 나머지 모든것을 포기하고 어디론가 은둔해버린것은 아닌지? … 정말 별의별 생각을 다했었다. 허나 상열은 결코 겨레의 믿음을 저버린것이 아니였다. 분렬주의자들에게 맹종맹동했던 지난날을 뉘우치며, 동족과 어깨겯고 애국애족의 길을
걸어갈 새로운 각오를 가다듬으며 그는 단연코 민족대단결의 드넓은 광장에 들어선것이다. 히사꼬의 말이 정말 옳았다. 향악보를 찾은것도 기쁜 일이였지만 그보다 더 기쁜것은 리경식과 박상열이 민족을 위한 길에서 친구로 다시
만난것이라 해야 할것이다. 그렇다. 그들은 절대로 헤여질수 없는, 영원히 한길을
가야 할 친구들이였고 혈육들이였다. 경식과 상열이 서로 그러안고 진정을 나누는데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히사꼬의 눈가에도 눈물이 맺혀 떨고있었다. 얼마후에야 두 사나이의 눈길은 다시금 히사꼬에게로 모아졌다. 경식이 중년의
사려깊은 손길로 히사꼬의 손을 꼭 잡으며 물었다. 《그런 글을 신문에 내기가 무섭지 않았소? 일본의 우익폭력세력이 얼마나 잔인한가 하는거야 히사꼬도 잘 알지 않소?》 그러자 처녀의 눈빛은 고요한 호수마냥 차분히 가라앉았다. 히사꼬는 잠시 생각에 잠겨있더니 창밖으로 눈길을 돌리며 나직이 말하는것이였다. 《때론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일본인으로 태여난게 무서울 때가… 지금도 저의 아버진 과거의 제정시절을 괴롭게 돌이켜보시군 한답니다. 악과
불의앞에서 <아니다>라고 항거하지 못한 그 나날들을 말입니다. 그때마다 아버진 저한테 옳지 못한것앞에서 침묵을 지키는건 긍정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명한 진리를 곱씹어주시군 합니다. 패전후 많은 세월이 흘러갔지만 아직도 이 땅엔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속에 몰아넣었던 과거의 악과
불의가 뻐젓이 날치고있습니다. 무서운건 폭력단이나 가루베 같은 철면피한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참말로 무서운건 많은 일본사람들이 악과 불의를
보고도 침묵을 지키는게 아닐가요. 그런 비굴한 침묵과 묵인이 결국은 이 땅우에 몸서리치는 과거를 또다시 되살려놓을가봐 그게 무섭습니다.》 처녀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경식은 자기 손에 쥐여진 히사꼬의 손가락들이 축축히 젖어드는것을 느꼈다. 고통스럽게 실려오는 중압에 눌려 경식이 울대뼈를 불근거리는데 상열도 주먹을 부르쥐며 벌컥 화를 터뜨리고야말았다. 《에익, 비렬한들!》 침통하게 굳어진 사나이들의 얼굴을 보고 히사꼬가 당황해했다. 《미안합니다. 제가 그만 선생님들의 기쁨을 흐려놓았는가봐요.》 경식과 상열은 그러는 처녀앞에서 더 말을 할수가 없었다. 의로운 처녀였다. 죄많은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파렴치한 무리들에게 한몸의 위험도 무릅쓰고 《아니다》라고 웨친 처녀의 도담한 그 용기가
눈물겨웠다. 인간의 초보적인 량심을 지키라고 애젊은 처녀까지 나서서 절규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본의 후안무치한 현실이 저주로웠다. 경식이 가슴속에 차오른 번열을 묵새기고있을 때 불현듯 히사꼬가 환성을 터뜨렸다. 《어마나! 눈이 오네요.》 처녀가 가리키는대로 창밖을 내다보니 아닌게아니라 밤하늘에 버들꽃같은 함박눈송이들이 소담하게 날리고있었다. 《야! 꼭 벌떼들이 날아다니는것 같아요!》 히사꼬는 손벽까지 치며 어린애마냥 좋아했다. 그러는 처녀를 보고 경식과 상열이 빙그레 웃는데 얼마후 히사꼬가 꿈속을 헤매는듯 랑만에 겨워
속삭이는것이였다. 《전 눈이 오는 밤을 제일 좋아한답니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밤에 설레는 눈발속에 홀로 서있느라면 문득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리워지군
합니다. 그런 사람들과 나란히 거닐면서 뭔가 고백하고싶은 충동이 든다 할지 혹은 등불이 켜진 어느 가로등기둥에 호젓이 기대선채 눈을 맞으면서
가없는 명상에 잠겨보고싶기도 하구요. 제가 아직 철부지소녀지요. 호호호…》 경식의 입가에 미소가 희끗거렸다. 언젠가 눈이 내리던 밤 히사꼬의 간청에 못이겨 산보를 나갔던 일이 생각났던것이다. 그때 고개를 젖혀 온
얼굴에 눈을 맞으며 새소리같이 맑은 웃음을 터뜨리던 처녀의 모습이 어제런듯 안겨왔다. 왜서 이 처녀는 그렇게도 눈을 좋아하는걸가. 아마 조선의
옛 백자처럼 순백한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정가로운 그 성정때문인지도 모른다. 갑자기 경식을 쳐다보는 히사꼬의 눈빛이 구슬퍼졌다. 《향악보를 찾으셨으니 선생님은 인츰 조국으로 가시겠지요.… 그걸 생각하면 겁이 납니다. 저 혼자 있기엔 이 땅이 너무나 추우니까요.》 가까스로 흐느낌소리인양 속삭이는 처녀의 말이였다. 그 모습을 보니 경식의 마음도 에이는듯 아팠다. 불시에 뜨거운 눈물이 목구멍으로 꽉 차올랐다. 경식은 슬프게 깜박이는 처녀의 두눈을
들여다보며 힘들게 입을 열었다. 《히사꼬, 뜻이 같은 벗들사이엔 작별이란 없는 법이요.》 상열도 목메여 한마디 한다. 《몸이 추서면 우리 함께 발이 시리도록 눈길을 산보해봅시다.》 깨끗하고 단아한 히사꼬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고맙습니다.》 리경식과 박상열은 밤이 어지간히 깊어서야 병원을 떠났다. 밖에서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있었다. 차들이 붐비는 도로우에도, 숨막히게 밀집된 지붕들우에도 그리고 오가는 행인들의 머리우에도 함박눈이
소복이 내려쌓이고있었다. 온갖 어지러운것들을 하얗게 덮어버리며 내리는 눈을 보니 저도 모르게 고즈넉한 평온과 개운함이 마음속에 깃들어왔다. 얼마쯤 길을 걷느라니 공원이 나졌다. 두 사나이는 눈내리는 이 밤길을 좀더 걷고싶어 약속이나 한듯 공원으로 들어섰다. 공원안은 한적했다. 그들은 호호히 숫눈으로 덮인 길우에 나란히 발자욱을 남기며 걸어갔다. 이따금 지나치는 가벼운 바람이 부드럽고 가는
눈발을 날렸다. 함함한 눈덩이들이 나무가지들마다를 레스장식마냥 단장하고있었다. 그들의 발밑에서 눈밟히는 소리가 고요를 깨뜨리며 들려왔다. 《우리 고향에도 지금 눈이 내리고있을가?》 불쑥 상열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그 말은 산허리에 피여오르는 엷고 따스한 아침안개발처럼 야릇한 파문을 일으키며 경식의 가슴속에
퍼져왔다. 경식이 조용히 미소하며 대답했다. 《글쎄… 아마 고향마을엔 지금쯤 달이 떠있는지도 모르지.》 눈길우에 찍어가는 상열의 발자욱이 점점 깊어졌다. 이윽하여 추억에 잠긴 그의 목소리가 꿈결에서 들리듯 들려왔다. 《달이라… 달이 떴으면 아마 보름달이 떴을거야. 아, 어릴적에 본 고향의 달밤이 눈에 삼삼하구만. 동천에 뾰주름히 달이 떠오르면 뜰안은
온통 달빛으로 가득차군 했지. 이슬이 내린 감나무잎사귀마다에랑, 장독대 가장자리에 껑충하게 서있던 접시꽃우에랑 그리구 동네아주머니들의 얌전한
어깨우에랑 푸른 달빛이 구슬처럼 부서져 흘러내리군 했는데…》 상열의 이야기를 듣는 경식의 두눈에도 고향의 정겨운 달밤이 유정히 비껴흐르고있었다. 달과 호박이 걸린 초가집, 푸름한 달빛이 비단필마냥
비쳐들던 앞의 시내물과 뒤산의 솔숲, 한아름 둥근달을 바라보며 동심의 무지개를
펼쳐보던 소꿉시절의 조무래기들… 이상한 일이였다. 눈발이 날리는 이역의 이밤에 어릴적에 본 고향의 밝은 달밤이 못견디게 안겨오는것은 무엇때문일가? 눈덮인 긴의자가 앞에 나졌다. 그들은 대충 눈을 털어내고 의자우에 시름없이 자리를 잡았다. 어깨너머로 나무가지 하나가 손에 잡혔다. 무언지
모를 신선한 힘이 온몸에 샘솟는것을 느끼며 경식은 장난궂은 소년시절로 되돌아간듯 나무가지를 힘껏 잡아흔들었다. 가지들우에 쌓여있던 눈가루들이
폭포수의 물보라처럼 뽀얗게 흩날려 떨어졌다. 두 사나이는 삽시에 눈사람이 돼버리고말았다. 눈 내리는 밤공중에 창쾌한 웃음이 터져올랐다. 허파가 흔들거리도록 터져나오던 웃음이 사라지자 상열이 이런 말을 하는것이였다. 《경식이, 내 자네에게 터놓고 말하지. 사실 경매가 끝난 뒤 내 심정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네. 차마 향악보를 가루베에게 뺏길수가 없어 자네의
손을 덥석 잡았지만 막상 경매에서 이기고보니 또다시 내 마음은 상극으로 갈라져 피투성이싸움을 벌렸네. 한쪽에선 더 이상 동족을 괴롭히지 말라고
서슬푸르게 꾸짖는데 다른 한쪽에선 절대로 북에 밀려선 안된다고 모질게 나를 쥐여흔들었네. 정말이지 고통스러웠네.》 경식은 상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피가 진 눈이며 꺼칠해진 뺨에서 고뇌에 모대긴 그의 마음이 풍겨오는것 같았다. 그러는데 상열의
무거운 목소리가 다시금 귀전을 울렸다. 《헌데 별스럽더군. 이북과 끝까지 해봐야 한다는 고함소리가 기승을 부릴수록 내 마음은 점점 자네에게로만 끌려가더구만. 마치 쇠붙이가 자석에
끌려가듯이 말일세.… <물각유주>라고 만물엔 제각기 임자가 있다고 했지. 아무리 봐도 <조선향악보>는 자네가 가져가야 할것 같네.》 경식은 처음 보기라도 하듯 상열의 얼굴을 찬찬히 눈여겨보았다. 상열이 히죽이 웃어보였다. 《왜 그렇게 놀라나? 찰거마리처럼 따라다니면서 못되게 굴던 박상열이가 갑자기 웬일인가 하는거겠지. 허허… 인젠 나도 알만 하네. 자네처럼
진정 겨레를 생각하는 마음이 대쪽같은 사람들에게 향악보를 가져가는것이라면 내가 무엇때문에 굳이 자네를 방해하겠나. 사실 <조선향악보>야 자네가
먼저 찾아나서지 않았나. 나도 인젠 깨달을만큼 깨달았네. 자네에 대해서 그리고 이북에 대해서 말일세. 지금껏 자네를 괴롭혀온걸 용서하라구.》 환희에 끓는 피의 설레임이 경식의 두눈에 끓어올랐다. 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상열의 손을 뜨겁게 부여잡았다. 마주잡은 손들을 통해 툭툭
울려오는 혈육의 맥박이 서로의 심장에 가닿았다. 그대로는 헤여지기 싫은 밤이였다. 상열은 근처의 점포에 뛰여가 소주를 가득 받아왔다. 그날 그들은 밤새도록 마주앉아 술을 나누며 억세고
짙푸른 우정을 나누고 또 나누었다. 《곧 귀국할텐가?》 시간이 퍼그나 흘러갔을 때 상열이 묻는 말이였다. 경식이 고개를 끄덕이자 상열은 누구에게라 없이 중얼거린다. 《그곳에도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는 내 겨레가 살고있을테지.》 그리고는 먼동이 푸름푸름 밝아오는 동녘하늘가를 바라보며 휘파람을 불기 시작하는것이였다. 진도집녀인의 남편이 늘쌍 흥얼거렸다는 《아리랑》이였다. 리경식도 함께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그들이 함께 부르는 《아리랑》의 휘파람소리가 새벽하늘가로 은은히
울려가고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