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6 회)
8. 《조선인들의 일이니까요》 경매장에 들어서던 경식은 주춤 멈춰서버렸다. 예상외로 많은 사람들이 너렁청한 홀안에서 웅성거리고있었던것이다. 지어 그들중에는 사진기를 메고
서성거리는 기자들의 모습도 보였다. 모름지기 대다수가 경매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일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일반인들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조선의 옛 악보집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앞에 경식은 어리둥절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신문에 경매를 공개해서일가? 하지만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경매가
벌어지군 하는 이 오사까에서 그런 일은 례상사가 아닌가. 곁에 있는 하또리의 심정도 마찬가지인것 같았다. 경식이 더욱더 커지는 중압감에 눌려 우두커니 서있는데 저쪽에서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을 바라보니 조동수가 벌써 와서 우달근과 함께
그를 기다리며 서있었다. 경식은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놀랍군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다니…》 경식이 불안한 어조로 이렇게 중얼거리자 조동수가 의연히 웃어보이며 말하는것이였다. 《도꾜에서 엄길호동지가 몇번이나 전화를 걸어왔댔습니다. 리선생에게 꼭 전하라더군요. 총련과 동포들이 든든히 뒤를 받쳐주고있으니 배심을
가지고 내밀라고 말입니다.》 경식은 그 말에 정신을 버쩍 차렸다. (아무렴, 향악보를 탐내는 경쟁자들가운데 나만큼 뒤가 든든한 사람이 또 어디 있을라구.) 순간이나마 주춤거렸던 자신을 다잡으며 경식은 경매장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홀의 한가운데 권투경기장처럼 네모지게 란간이 둘러져있었다. 란간안에는 비단천을 씌운 큼직한 탁자 하나가 있었는데 그 주위로 여러개의
의자들도 놓여있었다. 바로 그곳에서 경매가 벌어지게 되는것이다. 경매시간이 가까와오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란간주위로 모여들었다. 학자풍의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돈냄새를 물씬물씬 풍기는 호사스러운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호기심에 끌려온듯싶은 새파란 젊은이들과 유한부인들의 모습도 눈에 띄운다. 일본인들도 많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여기저기서 조선말들도 적지 않게 들려왔다. 경식은 같이 온 사람들의 격려를 받으며 란간가까이로 자리를 옮겼다. 마침내 시간이 되자 경매를 주관할 경매인이 나무마치를 들고 나타났다. 그뒤로는 남빛기모노를 방정하게 차려입은 녀인 하나가 따르고있었다.
《아라이스시》 녀주인이였다. 녀인을 알아본 경식은 낯을 돌리고말았다. 쓰디쓴 환멸감이 치밀어오르는것을 견딜수가 없었던것이다. 녀인과 함께 란간안으로 들어간 경매인이 탁자앞에 나섰다. 이윽고 경매인의 새된 목소리가 경매장을 울렸다. 《에- 지금부터 <조선향악보>에 대한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미 신문과 방송을 통해 대략 소개가 되였습니다만 <조선향악보>는 조선의 유서깊은 향악곡들을 수록한 고악보집이올시다. 그럼 경매에 참가하실분들은 이안으로 들어와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바람터진 숲처럼 장내가 술렁대고 경매에 나서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하나둘 란간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경식의 심장이 북치듯 높뛰기
시작했다. 곁에서 누군가가 자기 손을 꽉 쥐였다놓는것을 얼결에 의식하며 리경식도
성급히 란간안으로 들어갔다. 여라문명의 사람들이 란간안에 모여들었다. 그들의 모습을 둘러보던 경식의 눈길은 그만에야 우뚝 굳어져버리고말았다. 자기가 겨루어야 할
경쟁자들속에 다름아닌 박상열이 끼여있는것이 아닌가. 홀연 날카로운 아픔이 온몸에 미쳐왔다. 박상열이 나타나리라고 짐작하지 못한것은 아니였지만 막상 오늘 또다시 그와 맞서고보니 억이 막히는
심정을 금할수 없었다. 박상열도 어두운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있었다. 경식은 상열에게로 다가갔다. 《끝내 여기까지 찾아왔나?》 흐려진 어조로 이렇게 묻는 경식에게 상열은 침울하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이. 운명이 나와 자네를 끝까지 맞서게 하는구만. 아마 우린 서로 악연인가보네.》 경식은 비통한 심정으로 상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작고 동그란 상열의 안경알이 랭랭하게 번뜩이고있었다. 드넓은 세상을 내다보기에는 그
안경이 지내 답답할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숨이 컥 막혀왔다. 어째서 한조상의 유산을 찾으러 나선 후손들이 남의 나라 땅에서 이렇게 서로 악연으로 만나야만 하는가. 분렬의 비극은
이다지도 참혹하단 말인가. 두 사나이사이에 괴로운 침묵이 흘렀다. 그럴 때 둥근 운송모를 쓴 사나이 하나가 포장한 책꾸레미를 들고 들어왔다. 사나이는 포장을 헤치더니 책들을 탁자우에 가지런히 올려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경매인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앞에 차려놓은 고서들이 바로 <조선향악보>입니다. 경매에 참가하실분들은 먼저 경매물을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구경군들의 웅성이는 소리가 높아지는 속에 란간안에 들어온 사람들이 우르르
탁자를 에워쌌다. 경식도 서둘러 그리로 다가섰다. 탁자우에 여러권의 고서들이 놓여있었다. 경식은 울렁거리는 마음을 안고 고서 하나를 손에 들었다. 누렇게 색이 바랜 겉가위우에 붓글로 씌여진
제명이 한눈에 안겨왔다. 《조선향악보》 순간 울음이 터질듯이 가슴이 벅차올랐다. 경식은 떨리는 손으로 책의 갈피갈피를 조심조심 번져보았다. 아직도 먹향기가 사라지지 않은듯 한
참지우에 정간보(우리 나라의 고유한 옛 악보)형식으로 력대로 전해져온 《거사련》, 《취화평》, 《발상》과 같은 수많은 향악곡들의 선률과 가사,
장단이며 악기들이 표기되여있었다. 틀림없는 우리 나라의 향악보였다. 눈앞이 흐려왔다. 선조들의 희로애락과 세월의 풍상을 고스란히 껴안은 향악보가 물밑에서 흐느적거리는것 같았다. 얼마나 찾고찾던 민족의
재보인가. 지금껏 민족문화재들을 하나하나 찾을 때마다 느끼군 하던 그 모든 감동들을 다 합쳐도 이 순간의 환희에는 비길것 같지 못했다. 리경식은 터져나갈듯 한 기쁨에 온몸을 떨며 저도 모르게 박상열쪽을 바라보았다. 향악보를 들여다보는 상열의 얼굴에도 희열의 빛이 끓고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속이 뭉클했다. 이 행복한 순간을 동족과 함께 얼싸안고 기뻐하면 얼마나 좋으랴. 생각할수록 창자가 끊어질 일이였다. 국토를
두동강낸 분렬의 비운은 겨레의 기쁨과 환희마저 이렇듯 두동강으로 갈라놓고있었던것이다. 얼마후 그들은 탁자를 중심으로 빙 둘러앉았다. 탁자와 제일 가까운 의자에는 경매를 요구한 《아라이스시》 녀주인이 자리를 잡았다. 녀인은
둥그스름한 눈까풀밑에 깊숙이 눈을 감추고 앉아있었다. 그러면서도 무릎우에 모아얹은 녀인의 손가락들은 수판알을 튕기듯 쉬임없이 꿈틀대고있었다.
랭혹한 타산과 억척스러운 고집의 빛이 조는듯이 무표정한 녀인의 얼굴에 비껴돌았다. 어느 한순간 녀인은 리경식과 피끗 눈이 마주쳤건만 랭담하게
인츰 눈길을 피해버렸다. 미안해하는 빛이라고는 꼬물만큼도 찾아볼수 없는 모습이였다. 하긴 저 녀인한테야 향악보라는게 한갖 돈벌이수단에 불과할거라고 생각하니 경식은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그런 속에서도 그의 마음은 뒤웅박 신고 얼음판에 선것처럼 불안했다. 경매에 나선 사람들중에 가루베의 얼굴이 없었던것이다. 이상한 일이였다.
가루베가 이 자리에 없다는 사실이 승냥이가 날고기를 사양했다는것만치나 괴이쩍기 그지없었다. 혹시 그자가 향악보를 포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그날 《백자》차집에서 헤여질 때 가루베가 짓던 악의에 찬 웃음을 경식은 똑똑히 기억하고있었다. 그렇다면 경매에 대해 아직
모르고있기라도 한건가. 그것 역시 있을수 없는 일이였다. 박상열이나 히사꼬에게까지 추파를 던지면서 이쪽의 일거일동을 피눈이 되여 주시해온
가루베가 아닌가. 아무리 따져봐도 께름한 생각이 자꾸만 머리를 쳐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신호종소리처럼 울리는 경매인의 목소리가 번거롭게 흐르던 경식의 생각을 흔들어깨웠다. 《그럼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처음 가격은 100만엔! 자, 어서 경매에 참가해주십시오.》 구경군들속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흔히 부르는 고서의 값치고는 처음부터 예상을 훨씬 뛰여넘었던것이다. 누군가가 주저없이 값을 부른다. 《난 110만엔을 내겠소!》 그러자 경쟁하듯 다른 소리들도 뒤를 따랐다. 《난 120만엔!》 《130만엔!》 《140만엔!》 리경식도 드세차게 사품치는 격렬한 힘에 떠밀리워 폭풍의 중심으로 빨리워들어갔다. 그는 웅글은 소리로 웨쳤다. 《150만엔을 내겠소!》 하지만 련이어 튀여나오는 소리들이 거침없이 그의 소리를 삼켜버렸다. 《그럼 난 160만엔!》 《난 170만엔!》 《180만엔!》 서로 덮치고 밀막으며 어찌들 승벽을 부리는지 누가 얼마를 부르는지 분간키조차 어려웠다. 부르는 값이 올라갈 때마다 구경군들은 와와- 환성을
올리며 고아댔다. 지어 프로레스링장면을 구경하기라도 하는듯 발까지 구르며 응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경식은 온몸이 징징 소리를 내는듯 한 긴장을 느끼며 또다시 값을 불렀다. 《200만엔을 부르오!》 순식간에 경매가격이 두배로 뛰여올랐다. 그런데도 달아오른 열기는 좀처럼 식을줄 몰랐다. 《210만엔!》 《230만엔!》 … 《아라이스시》 녀주인의 얼굴은 흥분에 북받쳐 빨갛게 달아올랐다. 경매판이 이렇게까지 크게 번져질줄은 그 녀인도 미처 생각지 못한
모양이였다. 온 경매장이 사람들의 왁작거리는 소리로 하여 펄펄 끓고있었다. 경식은 축축하게 젖어든 살쩍을 훔치며 더 높은 값을 불렀다. 《250만엔!》 우달근이며 조동수가 주먹을 흔들어보이며 연방 격려를 보낸다. 그들을 보니 배심이 두둑해왔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자기 몸을 깡그리
바쳐서라도 기어이 향악보를 찾아야 한다는 그 한가지 일념만이 경식의 가슴속에서 세차게 끓어번지고있었다. 가격이 300만엔계선으로 육박하자 경쟁자들이 하나둘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300만엔계선을 넘어섰을 때에는 불과 너덧명의
경쟁자들만이 남게 되였다. 《320만엔!》 《325만엔!》 《330만엔!》 … 가격이 오를수록 부르는 소리들은 점점 줄어들고 동안도 떠졌다. 경식은 온몸이 땀에 떠서 계속 값을 불러나갔다. 《350만엔!》 뒤따르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경매인이 나무마치를 집어들며 열기띤 소리로 물었다. 《자, 350만엔! 더 부르실분이 없습니까?》 조금 있더니 도전하듯 부르는 누군가의 소리가 뒤를 따랐다. 《360만엔!》 경식은 향악보가 놓여있는 경매탁에만 온 정신을 집중한채 다시금 값을 불렀다. 《370만엔!》 그런데 얼마간 침묵이 흐르다가 좀전의 목소리가 또다시 뒤를 따르는것이 아닌가. 《380만엔!》 불시에 가슴이 무직해왔다. 너무도 귀에 익은 목소리였던것이다. 비로소 경식은 자기와 그 한사람만이 남았다는것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법석대던 구경군들도 언제부터인지 숨을 죽이고 두사람의 경매를 지켜보고있었다. 경식은 천천히 눈길을 돌려 자기의 마지막 경쟁자를 바라보았다. 아니나다를가 승부심에 불타는 박상열의 눈초리가 이쪽을 주시하고있었다. 고집스럽게 두드러진 되박이마우에 튀여나올듯 곤두선 피줄이며 잔뜩
도사린 어깨근육에서 경식은 그를 사로잡고있는 팽팽한 긴장감을 대뜸 느낄수가 있었다. 경식은 가빠오르는 숨결을 애써 고루고나서 값을 다시 불렀다. 《400만엔!》 《400만엔! 400만엔을 불렀습니다!》 경매인이 신바람이 나서 소리쳤다. 그러자 상열도 거치른 기세로 맞받아 부른다. 《난 450만엔을 낼테요!》 《450만엔! 아, 이번엔 450만엔을 불렀습니다!》 경매인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아라이스시》 녀주인이 멍해진 눈빛으로 두사람을 쳐다보았다. 구경군들도 또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과연 저 두 사나이는 어떤 사람들이기에
저렇듯 엄청난 돈을 부르며 한사코 물러서지 않는걸가고 수군거리는것 같았다. 경식의 마음은 쓰라린 고뇌로 하여 갈가리 찢겨져나가는것 같았다. 어찌하여 한피줄을 이은 자손들이 한조상의 유물을 두고 이렇게까지 다투어야만
하는가. 저기서 구경하는 수많은 일본인들이 이 광경을 보고 뭐라고 할것이며 동포들의 심정은 또 어떠하랴. 진정 저 사람들앞에서 우리 겨레의
하나된 모습을 보여줄수는 없단 말인가. 불한숨이 나갔다. 가슴속에서 뒤울려오는 거센 울부짖음소리가 억누를길 없는 힘으로 목에 차올랐다. 경식은 피타는 눈길로 상열을 바라보았다.
상열의 눈빛도 저으기 떨리고있었다. 하건만 굳어질대로 굳어진 대결의 타성에서 벗어나기 힘겨웠던지 대뜸 그가 고개를 외로 틀어버린다. 두 사나이의 겨룸을 기껏 부채질하려는듯 경매인이 더욱 새되게 목청을 올렸다. 《자, 450만엔입니다! 인젠 더 부르실분이 없습니까?》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저쪽에서 컬컬하고 쉬지근한 목소리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1 000만엔이요! 가루베 신조가 1 000만엔을 낼테요!》 순간 장내의 이목이 그리로 쏠렸다. 모직외투를 입은 대머리신사가 단장을 슬쩍슬쩍 짚으며 란간안으로 들어오고있었다. 가루베였다. 번쩍번쩍
윤기가 흐르는 얼굴에 의기양양한 빛을 띠우고 가루베가 거드름스레 이리로 오고있었다. 리경식의 두눈이 칼날같이 번뜩였다. 경매가 막판에 이른 이 시각에 저자가 돌연히 나타나다니. 경식의 관자노리에서 손가락같은 굵은 피줄이
툭툭 튀여올랐다. 가루베는 곧바로 경매탁으로 다가가더니 탁우에 놓여있는 고서들을 걸탐스럽게 들여다보았다. 그러는 그자의 두터운 금테안경속에서 모듭뜬
퉁방울눈이 탐욕스럽게 희번덕거리고있었다. 멍청해서 서있던 경매인이 믿어지지 않는다는듯 따져물었다. 《제가 잘못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분명 이자 1 000만엔을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가루베가 여봐란듯이 배를 불쑥 내밀며 방금 한 말을 곱씹어 외우는것이였다. 《그렇소. 1 000만엔이요! 1 000만엔!》 폭음같은 탄성이 경매장에 터져올랐다. 1 000만엔이라니? 그만한 돈이면 도꾜나 오사까의 번화가에 번듯한 료정을 하나 차릴만한 액수가
아닌가. 일반평민이 서너해를 놀고먹고도 남을 돈을 눈섭 하나 까딱 않고 부르는 가루베앞에서 사람들은 모두 입을 벌리지 않을수 없었다. 더우기
《아라이스시》 녀주인의 놀라움이 이만저만 아닌것 같았다. 가루베를 쳐다보는 녀인의 얼굴에 의혹과 반신반의, 아연함이 착잡하게 엉켜돌고있었다.
한갖 시미즈의 자그마한 술집이나 노리다가 이런 굉장한 횡재를 하게 된것이 녀인으로서도 선뜻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였다. 경악에 질린 경매인의
목소리가 장내를 흔들고있었다. 《1 000만엔! 놀랍게도 1 000만엔을 불렀습니다!》 가루베가 부른 1 000만엔이라는 금액앞에 리경식도 당황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언젠가 우달근으로부터 교육회사업에 기부할 100만엔을
얻기 위해 기업과 가산을 죄다 저당잡혔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그런 실례가 말해주듯이 일본에서 기업을 운영하는 동포상공인들의 경우에도 1
000만엔은 결코 쉽게 부를수 있는 금액이 아니였다. 물론 조국을 위한 일이라면 동포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나설것이다. 하지만 끝끝내 가루베가
향악보를 포기하지 않고 재력을 휘두르며 발악적으로 나온다면?… 이런 생각을 하니 경식의 호흡은 저도 모르게 다급해났다. 가루베는 그러는 리경식의 모습을 흐무러진 웃음속에 지켜보고있었다. 바로 이 시각을 준비하기 위해 그는 얼마나 많은 공력을 쏟아부었던가. 리경식이 오사까의 한 녀인을 만나러 갔다는 정보를 흥신소 주인으로부터 받고 가루베는 처음에 얼른 쫓아가 녀인에게서 향악보를 뺏아내야겠다고
서둘렀었다. 녀인의 신상자료로 보아 리경식의 설복이 무른 땅에 말뚝 박듯 쉽사리 먹어들진 않을것이요, 따라서 자기가 녀인에게 엄청난 돈을
내보이기만 하면 향악보는 절로 품안에 굴러떨어질것이라고 타산했던것이다. 허나 다음순간 아라기령감이 바라는게 단지 향악보나 가져다 바치는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뒤골을 때렸다. 조선의 고서보다도 중요한건 아시아와
세계를 주무를수 있는 지혜를 깨닫는거라고, 센징들을 누르자면 그들의 내분과 불화를 할수 있는껏 부채질해야 한다던 령감의 살기찬 목소리가 귀바퀴를
후려갈겼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번에는 자기의 능력을 령감에게 확고히 인정받아야만 했다. 한동안 머리를 쥐여짜던
가루베는 마침내 그럴듯한 대본 하나를 완성했다. 가루베는 리경식에 대한 정보를 박상열에게도 알리도록 했다. 그러면 박상열이 틀림없이 오사까로 뛰여올것이고 두 조선인사이에는 향악보를
둘러싸고 또다시 치렬한 쟁탈전이 벌어질것이다. 한편으로 가루베는 향악보를 가지고있다는 《아라이스시》 녀주인에게로 달려갔다. 그가 조선인이라는게
좀 꺼림직했지만 흥신소가 알아본바대로 일본인행세를 하면서 돈에만 눈을 밝히는 녀인이 분명했다. 가루베는 녀인에게 향악보를 경매에 붙이라고
꼬드겼다. 그렇게 되면 흥미를 가지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게고 그들중에는 부자들도 있어 틀림없이 횡재를 하게 될거라고 극구 장담했다. 아무리
리경식과 사전에 오간 말이 있었다 할지라도 돈에 눈이 어두운 녀인이였으니 마침내는 가루베가 던진 미끼를 받아물고야말았다. 가루베는 쾌재를 올리며 그길로 경매준비에 달라붙었다. 자기가 앞에 나서면 리경식이나 박상열이 기미를 챌가봐서 그는 뒤에서 은밀히
조종하였다. 녀인의 명의로 경매를 신청하고 경매시간과 장소를 빨리 선정하게 하였으며 지체없이 경매광고를 신문과 방송에 내도록 하였다. 그러느라고
경매주최측을 대신하여 돈도 많이 뿌렸다. 하지만 가루베에게 있어서 그런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문제는 리경식이네가 손쓸새없이 일을 일사천리로
내미는것이였다. 일단 경매가 벌어지기만 한다면야 자기의 승리는 떼놓은 당상이 아닌가. 결국 모든 일이 그가 꾸민 각본대로 착착 맞물려왔던것이다. 구경군들의 왁작대는 소리가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경매장의 관심이 온통 가루베 한사람에게만 쏠려있는것 같았다. 그는 히벌쭉이 웃으며
구경군들을 둘러보았다. 여느 경매보다 퍼그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있었다. 아닌게아니라 경매판이 이렇게 커지기를 마음속으로 얼마나 빌고 또
빌었던가. 가루베가 갖은 품을 들여가며 오사까시민들의 관심이 늘쌍 집중되는 증권거래소를 경매장소로 택하게 한것도, 신문과 방송에 광고를 내고도
모자라 인맥까지 총 발동하여 될수록 많은 사람들이 경매장에 모여들도록 기를 쓴것도 바로 그때문이 아니였던가. 만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조선인들끼리 서로 싸우게 하고 자기의 이름을 한바탕 들날리자는것이 가루베가 노리는 진의도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리경식과 박상열에게서 당한 모욕을 톡톡히 되갚아주고 아라기의 신임을 얻어 멀지 않아 있게 될 선거때 령감의 적극적인 후원을 끌어내자는것이였다. 《자, 1 000만엔입니다! 더 부르실분들이 없는지요.》 주위를 휘둘러보며 묻는 경매인의 말뒤에는 이미 물음표가 없었다. 벌써부터 기자들이 가루베를 향해 사진기의 초점을 맞추고있었다. 가루베는
부얼부얼한 얼굴에 함박웃음을 한가득 실으며 기자들을 바라보았다. 래일 아침이면 보기 드물게 치렬했던 이 경매에 대한 소식이 신문과 방송을 통해 파다하게 퍼져갈것이다. 가루베의 이름과 얼굴이 《일본의
긍지를 지켜낸 애국적인 사나이》로 한껏 포장되여 사람들의 눈길을 모을것이다. 당장 선거를 눈앞에 두고있는 가루베에게 있어서 그 이상의 더 좋은
광고가 어데 있겠는가. 그렇게 보면 이 인기극의 연출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경매장에 기자들을 불러들이고 경매열기가 최고조에 달한 순간에 자기가
등장한것이 얼마나 잘한 일인가싶었다. 가루베의 육중한 몸이 콘트라바스마냥 기분좋게 떨려났다. 드디여 그렇게도 눈독을 들이던 《조선향악보》가 제 손에 들어오게 된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아라기의 뜻대로 조선인들의 내분이 경매를 통해 극도에 이르렀고 자기는 자기대로 하늘에 닿을만치 인기를 올렸으니 이거야말로 꿩먹고
알먹고 둥지털어 불땐 격이 아닌가. (필경 아라기에게도 이 소식이 가닿을테지. 인젠 그 두상도 이 가루베 신조를 세살 먹은 아이 대하듯 하진 못할걸.) 이런 생각을 하니 자꾸만 흐드득흐드득 웃음이 솟구쳐오르는것을 견딜수가 없었다. 가루베는 리경식에게로 눈길을 되돌렸다. 길쑴하고 묵직한 리경식의 얼굴이 터질듯 한 긴장으로 하여 돌처럼 굳어져있었다. 가루베의 늘어진 볼이 웃음으로 떨렸다. 자기를 《호리야》라고
단죄하며 릉멸을 퍼붓던 사나이, 그 사나이가 지금 피할 길 없는 패배의 고배를 앞에 두고 괴로워하고있는것이다. 가루베는 승리자의 쾌감으로 하여
가슴이 터질것만 같았다. 그래, 이런걸 두고 바로 승리자의 쾌감이라고 하지. 바야흐로 마지막숨을 몰아쉬고있는 적수를 어르듯 가루베는 리경식의
앞에 다가가 빈정거렸다. 《리선생, 내가 이미 말했더랬지요. <조선향악보>는 어차피 내 손에 들어오고만다구요. 강약이 부동이라는 소리가 괜히 생겨났겠습니까.
핫하하하…》 가루베가 치솟는 쾌감을 도저히 누를길 없는지 밭은 목을 제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득의만면해서 어쩔줄 몰라하는 그자의 꼴을 보면서 경식은
그 시각 사정없이 자신을 매질하고있었다. 아이적에 할아버지가 쥐여주던 그 회초리로, 지금껏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해온 그 회초리로 피가 터지도록
자기의 종아리를 치고 또 치고있었다.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아픔에 온몸이 푸들거렸다. 할아버지를 격노케 했던 그날의 원한이 경식의 가슴에 쓰라리게
되살아났다. 허파가 뒤집히도록 너털대던 가루베가 이번에는 박상열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자는 무시무시하게 이그러진 박상열의 얼굴을 알아보더니 흐뭇한
조소를 던졌다. 《아, 박상열씨도 오래간만인데요. 전번엔 날 멋있게 업어넘기더니만 오늘은 웬일이시오? 이렇게 보따리를 바꿔멨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꿀은
달지만 벌은 쏜다는 말이 있는가보지요. 흐흐흐…》 박상열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소리가 새여나왔다. 가루베를 노려보는 그의 두눈에 시뻘건 불길이 이글거렸다. 경매인이 셈을 세는 소리가
들려왔다. 《1 000만엔, 두번째!…》 서서히 울려오는 승전고를 듣는듯 가루베의 얼굴가에 희색이 넌즈러져흘렀다. 가루베는 승리의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고싶었다. 하여 그자는
보란듯이 경매탁앞에 나서더니 오만한 랭소를 입가에 띠우며 리경식과 박상열을 향해 다시금 이죽거렸다. 《당신들의 심정이 지금 어떠하리라는걸 나도 짐작합니다. 그동안 두분이 고생해온걸 생각하면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허나 아무리
당신들이 모지름을 쓴들 달리될수야 있겠습니까. 조선인들의 일이니까요. 흐하하하…》 가루베가 또다시 경매장이 떠나가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찌나 너털거리며 웃어대는지 그자의 눈이며 입이며 코가 유들유들한 살속에 빠져 온통
흐물거리는듯싶었다. 리경식의 우묵한 눈확에서 시퍼런 섬광이 튀여나왔다. 노도인양 격렬한 기운이 가슴속에서 있는 힘을 다하여 불끈 솟구쳐오르며 무섭게 태질을
했다. 흔히 북과 남사이에 끼여들어 어부지리를 얻은 일본인들이 조선사람들을 비웃으면서 저렇게 말하군 한다. 《조선인들의 일이니까요.》 민족분렬의 쓰라림과 통한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그 지껄임을 이 시각 가루베에게서 듣는 순간 경식은 참을길 없는 아픔과 분노에 숨이 멎는것만
같았다. 경식의 목언저리에 피줄이 부풀어올랐다. 사납게 묻는듯 한 그의 눈길이 차디찬 밤하늘을 찢는 번개마냥 상열에게로 날아갔다. 박상열 역시
피발이 선 두눈을 부릅뜬채 경식을 마주보고있었다. 서로를 지르보는 두 사나이의 눈길이 허공에서 부딪쳐 맹렬한 불꽃을 일으키는듯 했다. 《1 000만엔, 세번째!…》 마지막 셈을 세는 경매인의 목소리에서는 더이상 아무런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경매를 지켜보는 대다수 사람들의 얼굴에도 결말은
보나마나하다는듯 방심한 기색이 떠돌고있었다. 아까부터 우달근이 뭐라고 안타까이 소리치고있었지만 구경군들의 번잡스러운 말소리들에 묻혀 좀처럼
가려들을수가 없었다. 경매인이 서서히 나무마치를 쳐들었다. 《드디여 <조선향악보>가 1 000만엔에 경매되였음을 알립니다!》 이렇게 고아대며 경매인이 마치로 경매탁을 치려는 순간이였다. 별안간 웅글은 고함소리가 벽력마냥 장내에 울려퍼졌다. 《가만!》 리경식의 고함소리였다. 경식이 자리를 차고 일어나 경매인을 제지시키며 웨쳤다. 《경매는 아직 끝나지 않았소!》 나무마치를 든 손이 허공중에서 굳어져버렸다. 경매인이 어리둥절해서 경식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설마 더 부르시겠다는…》 아연실색한 나머지 말도 제대로 마무리지 못하는 경매인에게 경식은 서슬찬 기상으로 결연히 웨쳤다. 《그렇소, 더 부르겠소. 2 000만엔이요!》 그 순간 웅성거리던 장내는 물을 뿌린듯 조용해졌다. 2 000만엔이라니?… 잘못 들은거나 아닐가?… 구경군들모두가 눈이 휘둥그래지고말았다.
방금전까지도 가루베에게로만 쏠려있던 뭇눈길들이 일시에 리경식에게로 집중되였다. 수많은 사람들의 긴장한 숨소리만이 장내에 엉켜도는데 얼나간
모양으로 멍하니 서있던 가루베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경식에게 말을 걸어왔다. 《허허 리선생, 누굴 놀리시는거요. 대관절 당신에게 그 많은 돈이 어데 있다는겁니까?》 능글거리며 비웃는 가루베에게 대고 경식은 주저없이 대답했다. 《있소! 난 박상열씨와 함께 2 000만엔을 내겠소!》 너무도 뜻밖의 대답이였다. 경식은 불이 펄펄 이는 눈빛으로 상열을 바라보았다. 돌이라도 녹여낼듯 한 절절한 호소가, 쇠물보다 더 뜨거운
확신이 그 눈빛에 담겨져있었다. 상열은 가슴속에 쌓였던 번열을 토하듯 어깨숨을 몰아쉬고있었다. 이대로 계속 리경식과 대결하다가는 향악보가 가루베의 손에 넘어가고말것이
불보듯 뻔한 일이였다. 그가 모진 고뇌속에 시달리면서 친구와의 대결마저 서슴지 않은것도 결국은 자기나름으로 민족을 위해서가 아니였던가. 할진대
아무리 반공을 《국시제1주의》로 삼는 이남의 국민이라 해도 겨레의 소중한 재보가 왜놈간상배의 손에 들어가는것이야 어떻게 용납할수 있단 말인가.
언젠가 자기더러 겨레앞에 부디 죄인이 되지 말라고 웨치던 리경식의 부르짖음소리가 바위를 들부시는 파도소리마냥 귀전에 메아리쳐왔다. 경식을 향해 쳐들린 상열의 안경알에 조명빛이 부딪쳐 백광으로 부서진다. 마침내 그가 용수철마냥 부르르 떨며 암팡진 몸을 일으켜세웠다.
그리고는 경식을 바라보며 소리높이 화답하는것이였다. 《그렇소! 우린 함께 2 000만엔을 낼테요!》 경식은 눈뿌리가 확 달아오르는것을 느끼며 상열을 마주보았다. 분명 그날의 모습이였다. 비운의 시절 왜놈들과 피투성이싸움을 벌리는 자기를
온몸으로 막아나서던 친구, 상열의 불같던 그 모습을 경식은 20여년만에 다시 보았던것이다. 장내의 여기저기서 막혔던 물목이 터지듯 탄성들이 터져나왔다. 《잘한다!-》 《아무렴, 그래야지!》 그것은 조선말들이였다. 구경군들속에 있던 수많은 우리 동포들이 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들을 내두르며 격정을 터뜨리는 소리들이였다. 그
목소리들은 그대로 힘찬 기운과 열이 되여 리경식과 박상열의 흉벽을 쾅쾅 두드려왔다. 그렇다. 이 시각 동포들에게는 북과 남이 따로 없었다.
창자를 찢는 분렬의 아픔이, 용암처럼 터져나온 민족적의분과 자존심이 삽시에 그들모두를 하나로 만들어버린듯싶었다. 동포들의 그런 모습앞에
일본인들도 감동을 금치 못했다. 《아라이스시》 녀주인이 바늘방석에 앉은것처럼 안절부절을 못한다. 무릎우에 얹혀있는 녀인의 손가락들이 얼어붙은듯 가드라든채 꼼짝도 안하는데
횡재의 기쁨에 달아있던 녀인의 낯빛은 그 무엇인가에 위축된듯 해쓱하니 질려있었다. 《요로시-》 가루베가 입술을 앙다물며 내뱉는 소리였다. 그자의 실한 목에서 힘줄이 사납게 불거져나왔다. 얼굴에 피가 번져 자기의 적수들을 노려보던
가루베는 미친듯이 거쉰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당신들이 그렇게 나온다면 좋소. 난 5 000만엔을 내겠다는걸 선포하는바요!》 사람들의 얼굴이 일시에 하얗게 굳어졌다. 시간마저 경악에 질려 우뚝 멈춰서버린것 같았다. 허나 그것은 잠시뿐이였다. 얼어붙었던 경매장의
분위기를 깨뜨리며 구경군들속에서 고함소리들이 터져나왔다. 《리선생, 기운을 내시우다!》 《1억엔! 1억엔을 부르시오!》 우달근을 비롯한 동포들이 목터지게 부르짖는 소리였다. 경식과 상열이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불덩이같은것을 삼키는데 가루베가 발작이라도 하듯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것이였다. 《흥! 1억엔이구 10억엔이구 얼마든지 부를테면 부르시오! 당신들이 1억엔을 부른다면 난 10억엔을 부르겠소! 당신들이 10억엔을 부르면
난 100억엔을 부르겠단 말이요! 제아무리 죽을 기를 써봤댔자 당신들, 조선인들이 우리 일본인들의 재력을 당해낼것 같은가! 흐하하핫…》 좀전까지만 해도 신사연하던 가루베의 얼굴은 무모한 광기에 사로잡혀 미친듯이 울골질을 하는 야수의 상통으로 돌변해있었다. 증오에 타끓는
수많은 눈길들이 서리찬 비수인양 그자에게로 날아들었다. 그러거나말거나 가루베는 입에서 침방울이 튀는것도 아랑곳 않고 그냥 악청을 뽑아대고있었다. 《자, 또 불러보시오! 어서들 불러보란 말이요! 유감스럽게도 여긴 웅변대회장이 아니요. 돈으로 모든게 결판나는 경매장이거던. 당신들이
열백번 혀를 깨문들 어쩌겠소. 경매물의 소유자인 아라이 기요시상은 오로지 제일 높은 가격을 부르는 사람에게만 소유권을 양도할테니까. 리경식씨,
박상열씨! 인젠 이 가루베 신조의 승리를 인정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요? 가혹한 진실을 말한다면 당신네 같은 조선인들이 과연 <조선향악보>를
만져볼 날이라도 있겠는지 모르겠군요. 흐하흐하…》 뚱뚱한 배집을 들썩거리며 갈가마귀소리로 껄껄대던 가루베가 자기의 승리는 기정사실이라는듯 서슴없이 향악보에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이였다.
서리발같이 매몰찬 목소리가 가루베의 머리우에 떨어졌다. 《다치지 마세요!》 뜻밖에도 녀인의 목소리였다. 리경식도 박상열도 어안이 벙벙해서 소리가 난쪽을 바라보았다. 분명 그 녀인의 목소리가 아닌가.《아라이스시》
녀주인이 창백하게 굳어진 얼굴로 못박힌듯 앉아있었다. 피기가 사라져버린 파리한 뺨, 지그시 악물린 입술, 린광이 차겁게 끓는 두눈… 무엇인지
선뜻 가늠할수 없는 어둡고 착잡한 빛이 녀인의 얼굴가에 세차게 회오리치고있었다. 녀인의 둥근 어깨가 숨겹게 오르내린다. 이윽고 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뭇사람들의 의아한 눈길을 모으며 경매탁앞에 나섰다. 《아, 그러고보니 아라이상도 한말씀하실 때가 된것 같군요.》 뻥뻥해서 서있던 가루베가 그제서야 녀인의 의도를 알겠다는듯 닁큼 자리를 내주며 하는 말이였다. 녀인은 한동안 자기가 경매에 붙인 고서들을
새삼스럽게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러는데 그 모양을 지켜보던 가루베가 능글거리며 또다시 말을 거는것이였다.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경매결과가 아라이상의 마음에 드실테지요?》 하건만 녀인은 아무 대답도 없이 여전히 고서들에서 눈길을 뗄줄 몰랐다. 그러다가 마음속 울혈을 송두리채 날려버리려는 사람인양 깊은숨을
내긋더니 분연히 머리를 쳐들었다. 다음순간 녀인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터져나왔다. 《여러분, 난 이 경매를 포기하겠다는걸 알려드립니다!》 술렁대던 사람들이 별안간 폭탄이라도 맞은것처럼 입들을 다물었다. 경매를 포기한다구? 경매인도 구경군들도 동지달에 무지개를 보기나 한것처럼
얼떨떨해서 멍하니 서로 얼굴들만 마주보았다. 가루베가 퀭해진 눈으로 녀인을 보며
혀뻐드러진 소리를 질렀다. 《포, 포기라니? 갑자기 그, 그건 무슨 소리요? 아라이상, 난 당신에게 5 000만엔을 내겠단 말이요. 5 000만엔! 설마 5
000만엔을 포기하시겠다는 뜻이야 아닐테지요?》 그러자 랭랭한 증오가 번뜩이는 녀인의 눈길이 가루베에게로 향해졌다. 《옳아요. 난 5 000만엔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조선사람을 우습게 아는 당신 같은 사람과는 거래하지 않으렵니다. 난 이 책들을
저분들에게 무상으로 넘겨드리기로 결심했습니다.》 너무도 뜻밖이였다. 녀인이 가리켜보이는 사람들은 다름아닌 리경식과 박상열이였던것이다. 그러니 녀인이 조선사람들에게, 그것도 무상으로 고서를
넘겨준단 말인가. 고막을 압박하는듯 한 정적이 경매장에 깃들었다. 누구보다도 놀란 사람은 리경식이였다. 돈밖에 모르는 녀인이 아니였던가. 민족을 짐으로 여기고 살아가던 녀인이 아니였던가. 그런 녀인의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오다니.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 사실앞에 경식이 얼떠름해있는데 눈섭꼬리를 우악스럽게 치켜올린 가루베가 게거품을 물고 고아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아라이상! 대체 어찌된 일이요? 당신은 돈을 원하지 않았는가! 내가
당신에게 제일 비싼 가격을 부르지 않았는가! 엉!》 녀인은 머리를 흔들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제일 비싼 가격은 저분들이 이미 치르었는걸요. 난
아는건 별로 없어도 금새만은 헛보는 법이 없답니다.》 가루베에게 이렇게 내쏘고난 녀인은 이번에는 리경식과 박상열에게로 돌아섰다. 《왜 그러고들 계십니까. 어서 이 책들을 가져가십시오. 전 지금 이 자리에서 선생님들에게 이 책들을 양도하겠습니다.》 경매장의 여기저기서 감동의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흥분에 넘쳐 웨쳐대는 격한 조선말들이 천길폭포에서 흩뿌려지는 비말처럼 녀인을 향해
날아갔다. 《장하오!》 《진도집아주머니! 정말 반갑습니다!》 《과시 단군의 후예로다!》 부르는 소리, 환호소리, 흐드러지게 번져가는 통쾌한 웃음소리… 그 소리들이 경식의 귀전에 웅- 웅- 메아리쳐왔다. 저런 녀인을 너무나 때이르게 속단했던 자신이 뉘우쳐졌다. 녀인의 마음속에 불씨마냥
남아있는 겨레의 얼을 보지 못한 자신이 후회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도 녀인에게 무엇인가 웨치려고 하였다. 허나 목이 꽉 메여 종내 아무 말도
할수가 없었다. 가루베가 바짝바짝 말라드는 목너머로 마른침을 넘기느라 애쓰는지 울대를 씰룩거린다. 충혈된 퉁방울눈을 광포하게 흡뜨며 그자는 악에 받쳐
기승을 부렸다. 《아라이상, 내 당신을 법에 고소할테요! 당신은 계약을 어긴 책임을 톡톡히 져야 할걸. 이 자리에서 목숨걸고 장담하건대 내 기어코 당신을
알거지로 만들지 않나 두고보지!》 그러나 녀인은 가루베의 위협을 암차게 되받아쳤다. 《얼마든지! 난 주최측에 위약금을 지불할 각오가 돼있습니다. 하지만 똑똑히 명심해두십시오. 이 책의 처분권은 아직 나한테 있다는걸
말입니다. 설사 당신이 날 알거지로 만든다고 해도 난 절대로 당신 같은 사람들한텐 이 책을 넘겨주지 않겠어요!》 녀인의 두눈에는 억척스러운 고집과 결심이 드놀지 않는 바위마냥 굳어져있었다. 《옳습니다!》 구경군들속에서 누군가가 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식은 저으기 상기되여 열변을 토하는 하또리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조선향악보>는 마땅히 주인인 조선사람들의것으로 되여야 합니다. 인간의 초보적인 량심에 비추어봐도 과거 식민주의시대의 청산과 함께
오래전에 이미 주인들에게 반환되였어야 마땅하지요. 그러한 조선의 문화재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일본의 경매장에서 거래의 대상으로 오르내리고있다는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우리 일본인들은 이런 사실에 대해 응당 수치를 느끼고 분개할줄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리선생! 당신들이 이겼습니다.
일본의 량심은 당신들을 지지합니다!》 천정에 매달린 조명등이 흔들거릴 정도로 폭풍같은 박수갈채가 터져올랐다. 동포들도 그리고 적지 않은 일본인들도 진심어린 축하와 격려의 박수를
아낌없이 보내주었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그 박수소리들을 들으며 경식은 터지려는 오열을 꿀꺽 삼켰다. 하건만 뜨거운 물기가 눈시울을 지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처럼 찾고찾던 《조선향악보》를 손에 넣었기때문만이 아니였다. 그보다 더 경식의 마음을 울렁이게 하는것은 세인들에게 조선민족의 하나된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가슴벅찬 그 사실이였다. 자기와 박상열이 제일 비싼 가격을 치르었다고 단언하던 녀인의 말이 떠올랐다.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줄
알았던 녀인이 어쩌면 그리도 신통한 소리를 하였을가. 정녕 녀인의 말이 옳았다. 우리 겨레의 하나된 마음이야말로 천만금과도 비길수 없는 가장
값비싼 재부가 아니겠는가. 누군가가 다가와 경식의 손을 그러잡았다. 박상열이였다. 땀이 배고 흥분한 그가 경식을 보며 중얼거린다. 《축하하네, 이 사람아.》 그러는 그의 두눈굽에 눈물이 번쩍거렸다. 리경식도 눈허리가 시큰해오는것을 느끼며 상열에게 말했다. 《자네도 축하하네.》 그러고나서 이슬이 고인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녀인에게도 목메여 웨쳤다. 《축하합니다, 진도집아주머니!》 터질듯 끓는 심장의 뻐근한 고동소리를 들으며 두 사나이는 서로의 어깨를 힘껏 다그어안았다. 박수소리가 더욱 커졌다. 기자들이 그들의 모습을
렌즈에 담느라 바삐 돌아치고있었다. 《음- 그러구보니 너희들 조선인들이 서로들 짜구 날 우롱했구나.》 가루베의 입에서 비명소리처럼 길게 찢어져나오는 소리였다. 휘황찬 승리감에 도취되여 개선장수인양 허파가 잔뜩 부풀어있던 그자의 몰골은 지금에
와서 마치 비맞은 장닭같이 초췌해있었다. 경식은 써늘한 쇠빛눈으로 가루베를 굽어보며 기운차게 말했다. 《주인이 도적맞혔던 제 물건을 도로 찾아갈뿐이요. 어쩌겠소, 가루베씨. 당신의 말대로 조선사람들의 일이 아니요. 하하하…》 리경식과 박상열이 우렁찬 목청으로 함께 웃는 소리가 장내에 울려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