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 회) 
 

7. 판가리시각을 앞두고

 

다음날이 되였다.

아침술을 놓기 바쁘게 우달근은 서둘러 집을 나갔다. 상공회에 가서 건물양도증서부터 작성해가지고 오겠다는것이였다. 어린애처럼 설쳐대는 그의 모습을 보니 리경식의 마음도 마냥 설레였다.

오늘은 정말 향악보를 손에 넣게 될가? 돌이켜보면 얼마나 많은 시련과 좌절을 겪으며 예까지 왔던가. 그래서인지 향악보를 거의 찾게 된 이 시각까지도 경식은 좀처럼 마음을 놓을수가 없었다. 부디 모든 일이 순조로와야 할텐데. 어제 《아라이스시》 녀주인의 마지막태도로 보아서는 이쪽에서 부른 조건에 어지간히 만족해하는 눈치가 분명했었다. 하지만 하루밤사이에 혹시 마음이 변하기라도 했는지 누가 알랴. 그리고 그보다 더 우려되는것은 가루베 같은자들의 움직임이였다. 엄길호에게서 련락을 받은 다음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채 조용히 오사까로 달려왔지만 향악보가 고국으로 되돌아갈가봐 피눈이 되여 날뛰는 그자들이 팔짱을 끼고있을리는 만무한 노릇이였다.

그런가 하면 경식의 눈앞에 박상열의 모습도 떠올랐다. 지금 그는 무엇을 하고있을가? 여전히 가루베의 리용물이 되여 헤매고있을가? 아니, 그럴리야 없을테지. 엄길호의 말대로 이런 때 그런 사람들과도 마음을 합칠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번거로운 상념은 끝없이 갈마들었다. 그렇게 반나절쯤 시간이 흘렀을 때 우달근이 돌아왔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방안에 들어서는 그를 보는 순간 경식은 가슴이 철렁했다. 달근의 얼굴이 온통 흙빛으로 질려있는것이 아닌가. 아니나다를가 달근의 입에서 기막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내인이 상공회사무실에 전화를 걸어왔수다. 사정이 생겨 오늘은 만날수가 없으니 후날 다시 련락하겠다나요. 허 참…》

경식은 온몸이 금시 나른해졌다. 갑자기 무슨 사정이 생겼단 말인가? 정말로 밤새 녀인의 마음이 변한걸가? 만일 가루베가 냄새를 맡고 여기까지 따라왔다면?… 등골로 전류같은것이 찌르르 치달았다.

불안과 초조에 시달리며 하루를 보내고난 경식은 이튿날이 되자 아침밥도 번진채 달근과 함께 녀인을 만나러 가기 위해 서둘렀다. 그들이 막 집을 나서려는 때였다. 총련 오사까부본부의 조동수가 신문을 들고 뛰여드는것이였다.

《아, 다들 계셨군요. 이 신문을 좀 보십시오.》

조동수는 다급히 손에 든 신문을 그들앞에 펼쳐보였다. 《오사까마이니찌》 조간신문이였다. 조동수가 가리키는 광고란을 들여다보던 두사람은 다같이 신음소리를 흘렸다. 다음과 같은 광고가 그들의 눈을 비수마냥 찔러왔던것이다.

《공시

14세기말-20세기초의 조선향악곡들을 기록한 고문헌 <조선향악보>를 경매합니다. 경매는 소유자인 아라이 기요시의 요구에 의하여 진행합니다.

장소: 오사까증권거래소

시간: 1월 20일 금요일 오후 5시

경매인: 증권거래소 회원 나까무라 시게지》

경식은 손으로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심장이 목굽을 치받는듯 한 충격을 느꼈던것이다. 그러니 녀인이 끝내 향악보를 경매에 붙였단 말인가. 도대체 그 녀인을 만나고 온 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가루베의 마수가 뻗쳤을가? 아니면 박상열이 또다시 찬물을 끼얹고 나선것은 아닌지?…

《에익, 돈벌레같으니. 그런것두 동포라구 믿구 찾아갔던 우리가 미련했수다!》

달근의 입에서 사나운 욕설이 마구 터져나왔다. 경식도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르는 분격을 간신히 눌러 삼키고있었다. 지독한 수전노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랭혹한 리기주의로 무장한, 조선사람다운데라군 쥐뿔도 찾아볼수 없는 녀인이였다. 온몸이 그대로 분노의 폭탄이 되여 당장이라도 그 녀인한테로 달려가고싶은 충동을 걷잡기 힘들었다.

《아무래도 경매는 피할 길이 없을것 같습니다.》

조동수의 침착한 목소리였다. 그제서야 경식은 정신을 가다듬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보기 시작하였다. 조동수가 말한대로 인제는 경매장에서 판가름을 하는 길밖에 다른 길은 없었다. 경매날까지는 앞으로 사흘이 남아있었다. 일단 신문에 광고를 냈으니 향악보에 흥미를 가지는 인물들이 경매장으로 모두 모여들건 뻔한 일이고 그런 인물들중에는 두말할것없이 가루베도 있을것이다. 그곳에서 향악보가 누구의 손에 넘어가는가를 결정하는 판가리싸움이 벌어질것이다.

그렇다. 분명 판가리싸움으로 될것이다. 가루베와 같은 파렴치한들이 향악보를 뺏기 위해 필사의 힘으로 달려들것은 자명한 일이였다. 과연 그런자들과 맞서 기어이 향악보를 손에 넣을수 있을가?

조마조마한 위구심이 천근만근의 무게로 경식의 두어깨를 짓눌러왔다. 그런 심정을 짐작한듯 곁에서 달근이 격한 어조로 부르짖었다.

《까짓거 경매를 할테면 하라지요. 내 온 재산을 통채로 들이밀어서라두 기어쿠 조상의 유물을 되찾구야말겠수다. 아니! 나 혼자뿐이 아니웨다. 이 소식을 알면 오사까의 동포들이 몽땅 들구일어날거우다.》

그러자 조동수도 의기양양해서 곁을 달았다.

《왜 오사까동포들뿐이겠습니까. 일본에 사는 우리 동포들모두가 리선생을 응원할겁니다.》

《아무렴!》

불등걸처럼 이글거리는 그들의 눈빛을 보니 리경식의 가슴도 투지로 끓어올랐다. 백번 옳은 말이였다. 그의 뒤에는 조국이 있었다. 애국에 불타는 동포들이 있었다. 하거늘 두려워할것이 대체 뭐란 말인가. 경식은 사지에 뻗쳐오는 충만한 힘을 의식하며 우달근과 조동수에게 기운차게 말했다.

《그 말씀들을 들으니 힘이 솟구칩니다. 그렇구말구요! 마음을 합치면 하늘을 이긴다는데 동포들이 뭉친 힘으로 달라붙으면 못해낼 일이 뭐겠습니까. 아마 하늘의 별도 따올겝니다.》

《하하하…》

세사람의 호기스러운 웃음소리가 집안을 흔들었다.…

드디여 경매가 열리는 날이 왔다.

얼마나 더디게 흘러간 사흘간이였던가. 동포들을 만난다, 자금을 마련한다 하며 오금에서 불이 날 지경으로 바삐 돌아치는 속에서도 경식에게는 이 사흘간이 석삼년맞잡이로 여겨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사흘후에 모든것이 결판난다는 긴장감때문이였다. 향악보의 운명도, 그것을 찾기 위해 기울여온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도 사흘후에 가서는 결말을 보게 된다고 생각하니 밥을 먹어도 모래를 씹는것 같았고 자리에 누워도 쉬이 눈을 붙일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사흘어간에 경식의 얼굴은 눈에 띄게 헐끔해졌다. 과연 최후의 승부는 어떻게 될것인가?

시간이 되자 리경식은 우달근과 함께 경매장으로 떠났다. 겨울의 짧은 해가 서쪽하늘가에서 불그스레한 락조를 피우기 시작한무렵이였다. 살얼음에 쌓인 거리는 싸늘한 랭기를 풍기고있었다. 땅을 핥으며 불어온 칼바람이 외투자락을 물어뜯었다.

정장차림에 허연 입김을 씩씩 뿜으며 걸어가는 우달근의 모습은 전장으로 나가는 전함인양 자못 엄엄해보였다. 아침부터 점포일도 보는둥마는둥 하며 경식의 주위에서 공연히 서성대던 그였다. 때없이 방안을 드나들기도 하고 까닭없이 마누라를 들볶아대기도 하면서 화로에 엿을 놓은 사람처럼 안절부절 못하던 그의 심정을 경식은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

리경식은 짐짓 웃어보이며 달근에게 롱삼아 말했다.

《허허… 부회장아버님을 보니 꼭 결전장에 나가는 무사 같습니다.》

그러자 달근이 열적은 웃음을 띠우며 말을 받았다.

《아닌게아니라 지금 내 심정이 그것과 비슷하우다. 암, 결전장이다마다요. 뭇사람들이 지켜보는 결전장이 아니웨까. 우리가 오늘 향악보를 되찾지 못하면 남들이 뭐라구 하겠수. 저것들 제 조상이 넘겨준 유물두 찾아가지지 못하는 못난 자손들이라구 비웃을거우다. 그뿐인가요. 향악보를 다시는 찾을 길이 막막해질런지도 모르지요. 그걸 생각하니 죽을힘을 다해서라두 꼭 경매에서 이겨야겠다는 생각뿐이우다.》

우달근의 말은 승전에로 부르는 북소리마냥 커다랗게 울리며 경식의 가슴을 쿵쿵 두드려왔다.

수많은 동포들과 일본사람들이 경매를 지켜볼것이다. 그것은 돈과 돈의 대결이기 전에 주인과 날강도의 대결이 될것이다. 정의와 불의의 대결이 될것이고 량심과 철면피의 대결로 될것이다. 만일 그 대결에서 진다면 조국과 겨레앞에서 평생토록 머리를 들지 못할것이고 우리 후손들은 조상들이 물려준 귀중한 유산을 영영 볼수 없게 될것이다. 이겨야 한다. 세상사람들에게 정의와 량심은 끝끝내 승리한다는것을 보여주기 위해, 조선사람된 본분을 다하기 위해 민족의 자존심을 걸고 반드시 이겨야 한다.

무엇인가 열렬하고 드세찬 기운이 줄기차게 솟구쳐오르는것을 느끼며 리경식은 발걸음을 다우쳤다.

어느덧 그들의 앞에 서양식으로 지은 장방형의 낡은 건물이 나졌다. 그곳이 바로 경매가 진행될 오사까증권거래소였다. 그들이 건물로 다가가는데 누군가가 경식을 불렀다. 눈길을 돌려보니 뜻밖에도 하또리 류따로가 그들에게로 다가오는것이 아닌가.

《리선생을 여기서 만날줄 알았다니까.》

경식은 그를 바라보며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아니, 하또리선생님이 여기에 어떻게? …》

급히 왔는지 헐근헐근 숨을 몰아쉬던 하또리가 사연을 설명했다.

《오사까종합대학에 초빙강의를 하러 왔다가 신문에 난 광고를 보았소. 리선생이 그토록 찾던 <조선향악보>인데 경매에 붙인다는 소식을 들으니 그냥 지나칠수가 있더라구. 그래 만사를 제쳐놓구 달려오는 길이요.》

그때에야 사유를 안 경식은 반색을 하며 하또리의 손을 잡았다.

《반갑습니다. 이렇게 하또리선생님까지 오시니 한결 힘이 솟습니다.》

경식의 꾸밈없는 말이였다. 이렇듯 결정적인 시각에 사심없는 진정을 안고 달려온 한 량심인의 마음이 고마워 경식은 하또리의 손을 부여잡은채 놓을줄을 몰랐다. 그러는데 하또리가 근심스러운 빛을 감추지 못하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린다.

《신문에 광고를 냈으니 경매에 참가하겠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텐데…》

그 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경매에서 이길수 있겠는가고 우려하는 목소리였다. 우달근이 그런 마음을 짐작한듯 우선우선한 어조로 말했다.

《너무 걱정마시우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구 이렇게 좋은분들이 진심을 쏟아붓는데 산인들 떠옮기지 못할라구요.》

그 말에 하또리는 구레나룻을 쓰다듬으며 흔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옳은 말씀입니다. 아무튼 난 당신들의 뜻이 성취되기만을 마음속으로 빌겠습니다.》

벗의 뜨거운 성원에 사의를 표하고나서 경식이 경매장으로 들어가려는데 하또리가 조용히 불러세우는것이였다. 웬일인지 좀전과 다른 심각한 빛이 그의 얼굴에 떠돌고있었다. 경식은 이상한 예감이 들어 달근을 먼저 들여보내고 하또리와 마주섰다. 잠시후 그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나왔다.

《리선생, 그저께 히사꼬양이 테로를 당했소.》

《뭐라구요?》

너무도 돌발적인 소식에 경식은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하또리의 뒤따른 말이 무서운 진실을 확인해주었다.

《밤에 집으로 돌아가댔는데 어떤 괴한들이 달려들어서 폭행을 가했다고 하오.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다가 병원으로 실려갔는데 요행 위급한 고비는 넘겼다더구만.》

경식은 얼나간 사람처럼 말이 없었다. 아연함과 의혹에 사로잡혀 못박힌듯 굳어져있던 경식은 이윽고서야 떨리는 목소리로 하또리에게 물었다.

《대체 어떤자들이 무엇때문에 그런짓을 했다는겁니까?》

하또리는 뭔가 생각해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보나마나 우익깡패들이 한짓일게요. 히사꼬양의 글이 저희네 비위에 거슬렸겠지.》

《글이라니요?》

경식이 얼떠름해하자 하또리가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

《아니, 아직 모르고있소? 며칠전에 히사꼬양의 글이 신문에 났소.》

하또리는 성급히 외투깃을 제끼더니 품에 간수했던 신문 한장을 꺼내 주었다. 신문을 펼쳐드는 경식의 눈앞에 고지크체의 글제목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일본의 량심을 묻습니다!》

경식은 흥분속에 히사꼬의 글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정의를 실행하지 않는것이 일본의 슬기라고들 말합니다. 잘못한것에 대해 진심으로 잘못했다고 사과하지 않는것이 일본인의 지조이고 량심이라고들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는 너무나 많고많습니다. <천황제일본>이 패망하고 <민주주의일본>이 새롭게 태여났다고 선언한지 15년이 넘는 오늘날까지도 말입니다. 그래서 세인들은 우리 일본인들을 가리켜 겉과 본심이 다른 민족이라고 하는가 봅니다. 그래서 아직도 일본은 도덕적미숙아로, 인류의 보편적리상과는 멀리 동떨어진 후진국으로 세인의 비웃음을 받고있는가 봅니다. 식민지시기에 일본에 들어온 조선의 수많은 문화재들을 놓고서도 그렇게 말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작부터 일본의 량심을 비수같이 찌르고드는 글이였다. 히사꼬는 글에서 조선의 문화재들을 파괴하고 강탈한 일제의 죄행에 대해서, 가루베와 같은자들의 후안무치한 태도에 대해서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그러면서 량심있는 일본인들이라면 마땅히 과거의 죄행에 대해 뼈아프게 반성하고 조선문화재에 대한 반환의무를 스스로 걸머지고 나서야 할것이라고 의분을 토로하고있었다.

글을 읽고나니 사태가 짐작되였다. 히사꼬의 글이 가루베 같은 철면피한들의 비위를 사정없이 긁었으리라는것은 너무도 뻔한 일이였다. 그래서 그처럼 순진한 처녀에게 테로까지 감행했단 말인가. 경식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뢰소리와도 같은 굉음이 무겁게 메아리쳐왔다.

지금껏 향악보를 찾는 길에서 기쁨과 괴로움을 함께 나누어온 히사꼬였다. 가랑비가 내리던 몇달전 여름밤 박상열을 만나고 온몸이 비에 젖어 뛰여왔던 처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기가 경솔했다고, 박상열이 그런 사람일줄은 몰랐다고 흐느끼며 용서를 빌던 처녀. 쓰라린 뉘우침에 허덕이는 처녀의 그 모습에서 경식은 거짓없는 한 인간의 량심을 보며 이런 말만 거듭 외우지 않았던가.

《그러지 마오. 히사꼬에게야 무슨 잘못이 있겠소.… 히사꼬에겐 잘못이 없소.…》

그날 밤 경식은 처녀와 한우산을 쓴채 분렬된 조선민족의 고통에 대하여, 조국통일의 절박성에 대하여 이야기해주며 비내리는 밤거리를 오래도록 걷고 또 걸었었다. 그때 샘물처럼 끓어넘치는 맑은 두눈에 순정을 담으며 조선사람들의 벗이 되고싶다고 고백하던 히사꼬의 목소리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 처녀를 해치려고 하다니.

분노가 사나운 파도마냥 태를 쳤다. 비렬하기 그지없는자들이였다. 배타주의와 국수주의에 극도로 환장한 그런자들때문에 일본은 여전히 아시아의 고아로 치부되고있는것이고 조일 두 나라사이에 가로놓인 불신과 대립의 장벽은 나날이 높아지기만 하는것이 아닌가. 히사꼬를 테로한 악한들에게, 과거의 망령을 되살리려고 날뛰는 사무라이의 후예들에게 똑똑히 보여주어야 한다. 정의와 진리의 길을 가로막을 힘은 이 세상에 없다는것을.

경식은 불같이 달아오른 숨을 한껏 다그어쉬고나서 하또리와 함께 경매장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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