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 회) 
 

6. 진도집녀인

 

겨울밤이 깊어가는무렵이였다.

리경식은 지친 다리를 끌며 협회로 돌아왔다. 가족을 떠나보낸 뒤 집을 팔고 그곳에서 자취를 하고있었던것이다.

이전 같았으면 오지뚝배기에 된장찌개를 끓여놓고 지나가는 발소리마다 귀를 강구고 기다렸을 안해의 모습도, 들어서기 바쁘게 달음쳐와 안기며 웃음배를 채워주던 아이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불꺼진 빈방만이 그를 기다리고있을뿐이였다.

경식은 불을 켜고 사무실에 들어섰다. 방안은 싸늘히 얼어붙어있었다. 성에가 불린 덧창문이 바람에 가늘게 삐걱거리고있었다. 화로에 불을 지피고난 경식은 허우룩한 공허가 드리운 방안을 둘러보며 책상앞에 마주앉았다.

일에 부대끼며 바삐 돌아치다가도 이렇게 밤에 홀로 앉아있을 때면 허전함과 그리움이 숨막힐듯 온몸을 사로잡군 한다. 가족과 함께 있을 때는 소중한 그 모든것에 대해 왜 그리도 무심했던가. 그리웠다. 온 식구가 동그랗게 모여앉던 따스한 아래목도 그리웠고 시름없이 방안에 감돌던 처자들의 웃음발도 그리웠다. 그뿐이랴. 잠들어있는 아이들의 고르로운 숨소리도 그리웠고 늘쌍 숫저운 애정과 소망이 밝은 배경색처럼 비껴있던 안해의 순한 눈매도 그리웠다.

경식의 눈길은 책상우에 놓여진 사진에 가멎었다. 얼마전에 조국에서 안해가 보내온 사진이다. 안해와 아이들이 모란봉의 최승대에 올라 웃고있는 그 모습을 들여다보느라니 문득 봄볕같이 훈훈한 기운이 가슴속으로 퍼져왔다. 그윽한 가을날이다. 하늘은 가없이 푸르고 바람은 건들거리는데 황금빛으로 물든 나무잎들사이로 투명한 가을해살이 무수한 빛가루로 부서져 쏟아져내리고있었다. 최승대의 란간에 매달려 좋아라 웃고있는 아이들, 안해의 두눈에 조용히 반짝이는 기쁨의 잔물결… 그들의 머리카락이 불어오는 미풍에 가벼이 나붓긴다. 그 모습을 보니 경식은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자기도 가족과 함께 모란봉의 가을바람에 머리칼을 나붓겨볼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안해는 사진과 함께 그간의 사연도 편지에 적어보냈다. 보통강기슭에 새 집을 받은 이야기며 수영이가 학교에 들어간 이야기 그리고 수남이가 유치원에서 빨간별을 탔다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적어보냈다. 글줄마다에 담긴 사연들도 경식을 흥분케 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그의 가슴을 달아오르게 한것은 보이지 않는 글줄의 여백마다에서 떠오르군 하는 안해와 아이들의 모습이였다.

하여 안해의 편지를 처음 보았을 때 그는 기쁨과 함께 자기가 마치 먼 우주의 외진 공간에 홀로 뿌려진것 같은 고독감으로 하여 온밤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안해와 아이들이 애타게 기다리는 조국으로 가고싶은 생각이 불같이 치밀었다. 그러나 조국과 겨레앞에 한 다짐은 어찌한단 말인가.

가족을 귀국시킨 후 오늘까지 여러달동안 경식은 시미즈를 찾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해왔다. 오늘도 행여 무슨 단서라도 찾을가 해서 미야기현에 있는 시미즈의 고향에 가서 보름이 넘도록 연고자들을 톺다가 돌아오는 길이였다. 하건만 시미즈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였다. 대관절 이자가 어디로 종적을 감춘것일가? 시미즈가 지금도 향악보를 가지고있을가? 혹시 그사이 어딘가에 팔아치우기라도 했다면?…

그런 생각을 거듭할수록 마음이 뒤숭숭해와 견딜수가 없었다. 자기가 고생하는것은 별문제였다. 뒤에서 도와주고있는 총련조직과 동포들의 수고를 생각하니 더더욱 마음이 조여들었다. 경식은 답답한 마음을 풀 길 없어 연방 줄담배만 피웠다.

그러고있는데 문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엄길호가 숨을 몰아쉬며 들어서는것이 아닌가.

《에크, 이거 곰 잡겠군.》

방안에 가득 서린 담배연기에 엄길호가 낯을 찡그리며 하는 말이였다. 리경식은 어리둥절해서 그를 맞았다.

《한밤중에 웬일이십니까?》

그가 영문을 몰라하는데 엄길호는 방안을 한바퀴 휘둘러보더니 중얼거렸다.

《허, 홀아비살림이 말이 아니군.》

그리고는 경식이 권하는 자리에 앉자마자 불쑥 그믐밤에 홍두깨 내밀듯 말을 꺼내는것이 아닌가.

《여보게 경식이, 드디여 나타났네!》

경식은 엄길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타나다니? 대체 뭐가 나타났다는건가? 혹시? … 다음순간 경식은 뇌리를 치는 생각에 부르르 떨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시미즈가 나타났습니까?》

경식이 숨넘어갈듯이 다우쳐묻자 엄길호가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조선향악보>를 가진 사람이 나타났단 말일세.》

그만에야 경식은 어안이 벙벙해지고말았다. 대체 시미즈말고 향악보를 가지고있는 사람이 누군데? 그럼 벌써 시미즈가 향악보를 팔아버렸단 말인가? 도무지 갈피끈을 찾을수 없어 경식이 우두커니 서있는데 엄길호는 그를 끄당겨 도로 앉히고나서 사연을 설명했다.

《오사까부본부에서 련락이 왔네. 오사까에서 초밥집을 운영하는 한 녀자가 시미즈한테 사기를 당했는데 갖은 신고끝에 끝내 그자를 붙들었다는구만. 붙들구선 어떻게나 되게 다불렀다세웠는지 급해난 시미즈가 가지고있던 향악보를 울며 겨자먹기로 내놓았다는게 아닌가. 그자한테 남아있는거라군 그것밖에 없는데다 경찰에 넘겨봤댔자 더 어째볼 여지도 없었던지라 그 녀잔 향악보라도 뺏었다는거네. 그 책이 돈깨나 나간다는 시미즈의 소리가 미덥지 않았던지 그 녀잔 향악보를 들고 다니면서 알만 한 사람들한테 금새를 물어보았다더군. 다행히 그 사람들가운데 우리 동포가 하나 끼워있어 부본부에 사실을 알려왔다고 하네.…》

소식을 전하는 엄길호 역시 어지간히 흥분한 기색이였다.

리경식의 머리속에서 사색이 맹렬하게 뒤설레고있었다. 초밥집을 운영하는 녀자… 대뜸 우달근에게서 들은 《아라이스시》 녀주인이 떠올랐다. 놀랍기 그지없었다. 기름쥐처럼 반지러운 그 사기군을 어떻게 녀자의 몸으로 붙들수 있었는가? 그것도 홀로 사는 녀자가? 모질고 악바르다는 말을 듣긴 했어도 그렇게까지 아귀찬 녀자인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엄길호의 다음 말이 더욱 경식을 놀라게 했다.

《헌데 참 기막힌 일이더군. 글쎄 그 녀자가 겉으로는 일본사람흉내를 내고있지만 실은 조선사람이라는구만.》

《조선사람이라구요?》

경식은 자기가 잘못 듣지 않았나 해서 엄길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녀인이 조선사람이라니? 결국 시미즈에게서 향악보를 빼앗아낸 사람이 다름아닌 조선녀인이란 말인가? 아연한 속에서도 뭉클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그 녀인이 조선사람이라면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아무리 일본인행세를 하고있다 할지라도 그 녀인 역시 한조상의 자손이 분명할진대 민족의 재보가 이역땅에서 떠돌고있는것을 어찌 모른다 할수 있으랴.

뜻하지 않은 행운앞에 경식이 희색을 감추지 못하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엄길호의 얼굴에 무슨 까닭인지 한가닥 그늘이 비껴돌고있었다. 엄길호가 근심스러운 어조로 뒤를 이었다.

《마음을 놓긴 이를것 같네. 그 녀자가 지금 향악보를 경매에 붙이겠다구 고집한다누만.》

《경매라니요?》

저도 모르게 경식이 큰소리를 내지르고말았다. 녀인이 그 정도로까지 돈에 눈이 멀었단 말인가. 정말로 향악보가 경매에 붙여진다면 그야말로 야단이 아닌가. 가루베 같은 모리배들이 뛰여들어 저저마다 값을 부르는 판국이 펼쳐진다면 일이 어찌될지 누가 장담할수 있으랴.

경식은 자리를 걷어차고 일어났다.

《당장 오사까에 가야겠습니다.》

《이길로 말인가?》

《예, 어떻게 하나 향악보가 경매에 붙여지는걸 막아야 합니다.》

엄길호가 따라 일어서며 경식을 붙잡았다.

《이 사람, 가더라도 우리 집에 들렸다 가게. 자넬 데리구 오기 전엔 집에 들여놓지 않겠다구 로친네가 으름장을 놨어.》

다급한 속에서도 고마운 생각이 솟구쳤다. 가족이 귀국한 뒤 자기더러 귀국할 때까지 함께 살자고 그토록 설복하던 그들내외였다. 허나 지금 어디 그런걸 생각할 겨를이 됐는가. 경식은 한사코 떠나겠다고 고집했지만 엄길호가 짐짓 눈까지 부릅뜨며 정 그러면 상대도 않겠다고 나오는 바람에 어쩔수없이 따라나서지 않을수 없었다. 가는 도중에 엄길호가 불쑥 물어왔다.

《박상열과는 그뒤 한번도 만나지 못했나?》

뜻밖의 물음이였다. 오사까에서 피눈물을 삼키며 갈라진 뒤로는 여태 만난적이 없는 상열이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가슴쑤시는 아픔속에 이따금 그의 얼굴이 떠오르군 하던것은 무엇때문일가. 소문을 들으니 그쪽에서도 시미즈를 찾느라고 무던히 애를 쓰는 모양이였다. 경식이 당황해서 대답을 못하자 엄길호가 말했다.

《자네 말을 들어보니 그도 제딴엔 민족을 위해서 애쓰는 사람 같은데 그런 사람들과도 마음을 합칠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아무쪼록 우리가 그런 측면에서 더 힘써야 할것 같네.》

엄길호의 어조는 진지했다. …

다음날 오사까에 도착한 경식은 엄길호가 일러준대로 우달근부터 만났다.

《에익, 돈밖에 모르는것 같으니. 그 내인소리가 나오니 입이 다 쓰거워집니다.》

우달근이 우락부락하며 내뱉는 첫마디였다.

《이거 리선생을 또 수고시키게 됐수다. 전번에 리선생과 함께 다닌 리력두 있구 해서인지 이번에도 부본부에서 나한테 일을 맡깁디다. 시미즈란자를 찾아내지 못해 밥을 먹어두 모래알을 씹는것 같았는데 향악보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으니 어찌나 기운이 솟던지. 난 그길루 그 내인을 찾아갔더랬수다. 헌데 이런 소귀에 념불외우기가 어데 있겠소. 아무리 설복을 했건만 줄창 일본사람행세를 하면서 향악보를 경매에 붙이겠다는 소리만 앵무새처럼 외우는게 아니웨까. 원 그런것두 동포라구 믿구 찾아갔던 내가 어리석었지. 생각다 못해 그 내인이 시미즈네 술집에 눈독을 들였던게 떠올라서 난 우리 상공회산하에 있는 건물 하나를 헐값에 내주겠다구 들이댔수다. 그 집으루 말한다면 모양두 번듯한데다가 번화가에 위치하구있어놔서 숱한 사람들이 군침을 흘리는데지요. 그렇게 해서야 겨우 좀더 생각해보겠다는 말미를 받아놓을수 있었지요.…

아무튼 리선생 볼낯이 없수다. 실은 이번엔 어떻게 하나 내 손으루 향악보를 찾아가지구 리선생한테 안겨주자던노릇이 허 참… 이러다간 또 전번처럼 일을 그르치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 별수없이 부본부에 보고를 했더랬지요.》

우달근은 혹시 자기가 처신을 잘못하지나 않았나 해서 안절부절을 못했다. 경식은 그러는 달근을 안심시키고나서 물었다.

《그런데 그 녀인이 시미즈를 어떻게 찾아냈습니까?》

《전번에 리선생한테두 얘기했지만 그 내인의 됨됨이 오죽이나 암차다구요. 허지만 시미즈가 쥐숨듯 꼬리를 감추는통에 졸지에 닭 쫓다 울타리 넘겨다보는 꼴이 되고말았지요. 글쎄 빚군들이 저저마다 몰려들어서 지랄발광 네굽질을 하는 판에 어데 가서 해본단 말이웨까. 그래두 법을 좀 낀것들은 시미즈의 료리집이요, 살림집이요 하는것들을 날쌔게 타고앉았지만 그 내인은 울바자없는 과부신세인지라 끈떨어진 뒤웅박신세가 될수밖에요. 악에 받친 내인은 가산을 다 털어서라두 기어코 사기군을 붙잡아서 보상을 받아내구야 말겠다구 강심을 먹었다우다. 그래서 숱한 돈을 날려가면서 수소문을 하구 사람을 써서 끝내 시미즈를 붙들었다는게 아니웨까. 참 지독한 내인이지요.…》

말을 듣고보니 여간한 녀인이 아니였다. 그런 녀인의 마음속에 정말로 조선사람이라는 자각이 털끝만치도 남아있지 않을가? 그것이 의문스러워 경식은 또다시 달근에게 물었다.

《그 녀인이 자기가 조선사람이라는걸 그렇게까지 감추더란 말입니까?》

그 물음에 달근은 대뜸 이마살을 찌프렸다.

《원 말두 마시우. 글쎄 조선말은 아예 입에 올리지두 않더라니까요. 자긴 조선사람들과 아무런 인연두 없다나요. 허 참… 부본부에서 그 내인의 행적을 좀 알아보니 현재는 아라이 기요시라는 일본녀자루 행세하고있지만 본래는 고향이 진도랍디다. 본명은 알수 없지만 그 내인의 근본을 아는 동포들속에선 지금도 그 집을 진도집이라구 부르고있구요. 헌데두 그 내인은 길가에서 고향사람들을 만나두 아는체조차 안한다질 않소. 남편은 왜정때 징용으루 끌려와 도호꾸의 어느 주물공장에서 일했는데 거기서 얻은 규페증으루 일찍 저세상사람이 되였다더군요. 그뒤 내인은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젖도 떼지 못한 두자식을 혼자힘으루 키워왔다우다. 과부로 일생을 살아가느라면 한숨이 구만구천두라는데 그래서 그리두 심보가 이지러졌는지. 쯧쯧…》

(진도집녀인…)

경식은 속으로 무겁게 외워보았다. 가히 짐작이 가는 일이였다. 이역땅에서 의지가지할데 없는 녀성의 몸으로 갖은 생활고와 민족적차별을 견디여나가야 했으니 모질어진 그 마음속에는 얼마나 쓰라린 비분이 독을 뻗치고있는것이랴. 그런 강심살이속에서 조국과 점점 아득히 멀어져가고 민족적감정마저 희미해져가는 사람들을 리경식 역시 적지 않게 보아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살구나무에 벗꽃이 필수 없듯이 근본이야 어디 가랴. 경식은 녀인의 마음속에 한가닥이나마 남아있을지도 모를, 아니 분명 불씨마냥 살아있을 조선사람의 넋에 기대를 걸고싶었다.

그들은 그길로 녀인을 찾아 떠났다. 서리발을 품은 하늬바람이 으르렁거리며 불어왔다. 한겨울의 차디찬 해가 시퍼렇게 얼어붙은 허공에 외로이 걸려있었다.

쯔루하시역전에 이르니 《아라이스시》라는 간판이 눈에 띄였다. 초밥집이라고 해서 보잘것없겠거니 하고 생각했는데 막상 와보니 생울타리까지 두른 꽤 큰 음식점이였다. 울안에 들어서니 조그마한 안뜰이 나졌다. 뜰 한가운데로는 돌포장길이 깔려있었는데 길 량쪽에 동백이며 란초, 석창포 같은것을 심은 화분들이 줄을 맞춰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옆에는 손바닥만 한 련못들과 시내물, 성냥개비 같은 다리들이 장난감처럼 배치되여있었다. 어느것이나 할것없이 순 일본식으로 꾸며져있었다.

초밥집에 들어선 두사람은 곧바로 주인의 방으로 향했다. 한번 왔던 곳이여선지 앞장서서 걸어가는 달근의 거동은 거침이 없었다. 그들이 주인의 방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안에서 매섭게 욕을 퍼붓는 녀인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나왔다.

《이녀석아, 왜 또 학교에서 싸웠니? 왜 싸웠어? 학교에서 선생님이 오셨댔다. 널 보고 불망종이래. 아유, 이거야 화가 치받쳐서. 야, 그따위 소릴 듣고 다닐바엔 아예 콱 죽어라, 죽어!》

그러자 골딱지가 나서 대드는 총각애의 소리가 뒤따랐다.

《힝, 그깐 선생소린 하지두 마세요. 그 선생이 애들앞에서 날더러 뭐랬는지 아나요? 마늘냄새가 나지 않게 조심하라구 그랬단 말이예요.》

《뭘? 너야 어디 마늘이란걸 입에 대기나 하냐?》

《엄만 것두 모르시겠나요? 내가 쭁꼬라구 비꼬는거란 말이예요.》

《뭐 쭁꼬? …》

그만에야 억이 막히는지 말이 끊어졌다. 그러다가 항변하듯 주어섬기는 녀인의 맥빠진 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그건 선생님이 잘 몰라서 그러시는거야. 내가 선생님을 찾아가서 똑똑히 이를테다. 우린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라구.》

《쳇, 그런다구 누가 속아넘어간대요. 나두 알아요. 엄마두 아버지두 다 쭁꼬였다는걸.》

찢어지는듯 한 녀인의 소리가 터졌다.

《입다물지 못하겠어! 건 그렇구 애들하군 왜 싸웠어?》

《그 마스노새끼 내 책상에다 락서질을 했어요. 쭁꼬새끼라구.》

녀인이 가까스로 분을 참느라 씨근거린다. 잠시후 악에 받쳐 내쏘는 녀인의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누구든 그따위 소릴 또 줴치거들랑 혼쌀을 내줘라! 다신 못 그러게 혼찌검을 내란 말이야! 이겨라! 그런것들한텐 기어코 이겨야 해! 이기지 못하면 집에 얼씬두 말어!… 됐어. 이 돈을 가지구 가서 오뎅(일본음식의 한가지)이나 사먹어라.》

듣고보니 녀주인과 아들애사이에 벌어지는 대화였다. 얼마후 얼굴이 찢기고 부어오른 총각애 하나가 방에서 나왔다. 제 엄마에게서 받아든 돈을 들고 좋아라 뛰여가는 총각애의 뒤모습을 경식은 이윽토록 지켜보았다. 그러는 그의 눈가에 서느러운 기운이 지르르 흐르고있었다.

결혼식장을 쓰려다가 거절당한 어느 한 동포의 일이 생각났다. 그때 결혼식장 경영주의 거절리유라는게 다른것이 아니고 신부가 입고 나오려는 치마저고리가 일본의 전통풍습과 맞지 않는다는것이였다. 우습게도 그 결혼식장에서 면사포를 쓴 서양식결혼례복에 대해 문제시한적은 없었다. 만일 타국에서 사는 일본인신부가 저희네 민족옷차림으로 결혼식장에 나서려다가 거절당했다면 그 심정이 어떠했을가. 결혼식장의 경영주라면 겨우 밥벌이나 근근히 하는 서민에 불과할진대 그런 사람들까지 이 정도이니 일본인들의 머리속에 조선민족에 대한 배타의식이 얼마나 타성으로 굳어져있는가 하는것을 가히 짐작할만 한것이다. 하긴 요시다 시게루 같은 한 나라의 총리라는자의 입에서 《소수민족은 배속의 벌레》라는 망언이 백주에 튀여나오는 판이니 일반 국민들의 사고가 달리야 될수 있으랴.

그처럼 혹심한 민족차별에 견딜수가 없어 일본인으로 귀화하여 일본인행세를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허나 그것이 과연 어떤 길인가. 흔히 귀화신청을 내면 신청자의 생활양식을 조사하러 법무성 관리가 오는데 집에서 김치냄새가 나거나 치마저고리가 눈에 띄우면 불합격이 된다고 한다. 결국 조선사람스스로가 자기의 민족성을 철저히 부정할 때에만 귀화가 허락된다는것이다. 설사 그러한 굴욕을 감수하며 귀화를 한다 해도 사정은 매한가지이다. 귀화한지 거의 10년째 되여오는 누군가는 자기를 완전한 일본인으로 착각하고있었건만 최근에 조선사람이였다는것이 드러나면서 일본청년과의 혼례를 앞두고있던 딸자식이 별안간 파혼을 당했다지 않는가.

문득 《못생긴 오리》라는 안데르센의 동화가 떠올랐다. 우연히 오리알에 끼여 까나온탓에 오리새끼들의 무리속에서 《미운 오리새끼》로 따돌리우던 백조새끼가 어느날 자기가 아름다운 백조임을 깨닫고 기쁨에 넘쳐 공중으로 날아올랐다는 그 이야기처럼 인간도 자기의 뿌리를 망각하지 않고 부정하지 않을 때 자긍심에 넘쳐 존엄있게 살수 있는것이 아니겠는가. 바로 그때문에 수많은 재일동포들이 온갖 민족적편견과 차별에 시달리면서도 죽으면 죽었지 일본인만은 되고싶지 않다고 입버릇처럼 외우고있는것이라고 경식은 생각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시우?》

곁에서 우달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서야 생각에서 깨여난 경식은 달근을 따라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방에 들어섰을 때 녀주인은 누비돗자리우에 앉아 어깨를 주무르며 수판알을 굴리고있었다. 척 보기에도 억척배기라는것이 알리는 30대의 녀인이였다.

《돈나 고요데쇼-까?(무슨 용건이십니까?)》

인기척을 듣고 녀인이 수판알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채 건네는 말이였다.

우달근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안녕하시우. 내가 또 왔수다.》

그제서야 달근을 알아본 녀인이 좀전의 흥분기를 애써 가시며 일어났다. 하건만 녀인의 입에서는 여전히 일본말이 흘러나왔다.

《이랏 샤이마세.(어서 오십시오.)》

두리두리한 얼굴에 둥글면서도 매단단하게 생긴 어깨가 김치돌 같이 묵직해보이는 녀인이였다. 팔소매와 옷자락에 벗꽃을 물들인 기모노만 입고있지 않았더라면 본모습은 조선의 어디서나 흔히 볼수 있는 용모였다. 허나 모진 세월이 녀인의 얼굴에 너무도 때일찍 흔적을 남기고있었다. 이 세상 모든것에 대한 불신과 적의가 깊숙이 가라앉아있는 두눈, 바늘로 그은듯 때이르게 잔주름이 잡힌 눈귀, 그런가 하면 사내처럼 악마디가 진 손… 주방일을 하다가 들어온듯 녀인의 손에 쌀가루가 묻어있었다.

달근이 녀인에게 경식을 소개하고나서 찾아온 사연을 간단히 이야기했다.

리경식을 쳐다보는 녀인의 눈빛은 랭랭했다. 단조롭고 무표정한 그 얼굴에서 경식은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으려는 완고함과 조심스러운 경계의 빛을 보았다.

녀인은 손님들에게 자리를 권하고 차를 내오게 했다. 소금에 절인 벗꽃을 띄운 차였다. 차잔을 들여다본 달근이 쓴입을 다시더니 녀인에게 경식을 가리키며 말했다.

《주인, 이분은 여태 그 고서를 찾느라구 귀국까지 미루면서 고생해오셨다우. 처자들과두 헤여지지 않으면 안되였지. 오늘은 이분의 이야길 좀 들어보우다.》

경식은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는 녀주인에게 조선말로 심정을 터놓기 시작했다.

《아주머니, 저 하나 고생하는거야 무슨 큰일이겠습니까. 가슴아픈건 하루빨리 조국에 돌아가야 할 민족의 재보가 이역땅에서 정처없이 떠돌고있는겁니다.》

《오, 하나시쮸 시쯔레이데스가…(저, 말씀중에 실례입니다만)》

녀인이 도중에 강대꺾듯 말을 꺾으며 일본말로 얘기해달라고 부탁하는것이였다.

경식은 그만 할 말을 잊어버린채 녀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는 그의 목에서 울대뼈가 꿀꺽 오르내렸다. 방금전까지만도 아들애가 당한 민족적멸시를 두고 치를 떨던 녀인이 아닌가. 옷도 일본옷을 입고 말도 일본말로만 하는 녀인, 자기가 조선사람임을 이다지도 완강히 거부하는 녀인의 넋속에 과연 민족의 얼이 어느만큼이나 남아있을가? 애오라지 녀인의 민족적량심에 기대를 걸고 왔던 경식으로서는 시작부터 락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별수없이 그들의 대화는 일본말로 진행되였다. 경식은 녀인에게 향악보가 일본으로 건너오게 된 사연과 반드시 겨레의 품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데 대해서 그리고 지금껏 그 고서를 찾기 위해 동포들이 피타는 노력을 기울여온데 대해 안타깝게 설명했다.

그러나 경식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녀인에게서 나온 대답은 너무나 매몰찼다.

《그건 어디까지나 그쪽분들의 사정이고 제가 관심하는건 책을 내놓으면 저한테 어느만큼의 대가가 차례지는가 하는것뿐입니다.》

그러니 돈을 내놓고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것이다. 조국이란것도 민족이란것도 돈앞에 놓을수는 없다는 그 녀인의 지극히 단순명백한 대답에 경식은 말이 나가지 않았다. 우달근이 눈섭꼬리를 푸들푸들 떨며 끼여들었다.

《이보시오 주인, 전번에 와서두 내 말했지만 돈을 모아서 많이 꿍져넣는다구 50년 살걸 100년 사는것두 아니구 남달리 잘 먹구 잘 입는다구 거부기같이 300년을 사는것두 아니지 않수. 아무리 생활에 악착스러워지기로서니 사람으루 세상에 났으면 사람값을 치러야지. 제 조국 중한줄두 모르구 제 민족 귀한줄두 모르구 알쭌히 저 하나 호강할 궁리만 한다면야 그게 무슨 사람이겠수. 짐승 한가지지.》

조는듯이 눈길을 내리우고 앉아있던 녀인이 듣기 지겹다는듯 나른히 손을 들었다놓았다.

《저한테 그런 선동은 통하지 않는다고 수차 말씀드린것 같은데요. 사람노릇 다하고 돈을 어떻게 모읍니까. 돈을 모으려면 욕을 먹으라는 말이 공연히 나왔겠습니까. 절더러 자꾸 돈밖에 모른다고 몰아대시는데 대체 이 일본땅에서 돈보다 더 중한게 어디 있다고 그러십니까. 돈없이야 한발자국인들 움직일수가 있습니까. 목이 말라서 물 한그릇 얻자고 해도 돈이 있어야 하고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 가야 해도 돈이 있어야 하지 않나요. 댁에서도 기업을 하신다는데 돈이 그렇게 소용없으면 뭣때문에 그런 일을 하시는겁니까?》

녀인의 반박에 달근은 어이없는 웃음을 짓고말았다.

《난 돈을 버는걸 탓하는게 아니우다. 돈을 벌든 무슨 일을 하든 우선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이 말이우다.》

리경식의 절절한 목소리가 또다시 울렸다.

《아주머니, 아주머니가 가지고계시는 그 고서는 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유산입니다. 이를테면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넘겨준 가보라고 할가요. 헌데 지난날 나라를 잃었던탓에 그걸 강도들에게 빼앗겼댔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주인의 품에 되돌려져야 할게 아닙니까.》

그러나 녀인의 표정은 여전히 랭담했다. 경식은 열에 뜬 자기의 말들이 녀인의 차디찬 심장에 부딪쳐 돌부스레기마냥 흩어지는 소리를 듣는것만 같았다. 녀인이 피도 감정도 없는 인형인양 단조롭기 그지없는 어조로 말했다.

《거래와 관계없는 이야긴 듣고싶지 않습니다. 전 그 책을 훔쳐내지도 않았고 협잡으로 얻은것도 아닙니다. 제가 지불한 비용과 제가 당한 손실의 대가로 정정당당하게 손에 넣었을뿐입니다. 절더러 채권자의 권리를 포기하라는겁니까? 서로 잡아먹을 내기를 하는 이 세상에서 저 하나만 손해를 보고 넘어질수야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조국이 어찌됐건 민족이 어찌됐건 그런건 알바 아니라는건가?》

우달근이 참다못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람이 그래선 못쓰우다, 못써! 아무튼 태를 묻은 제 조국이구 피를 나눈 제 동포들인데 어떻게 그럴수가 있수. 부끄럽지두 않수? 이역살이가 아무리 고달파두 조선사람으루 태여났으면 젖먹던 힘까지 다 내서라두 가슴펴구 조선사람답게 살아야지 왜놈들한테 수모란 수모는 다 받아가면서 반쪽발이루 사는게 그리두 편한가 말이우다. 후날 애들이 뭐라겠수?》

순간 녀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짙은 눈섭이 들려오르면서 깊고 차거운 주름살이 엇비듬히 이마를 파고들었다. 가늘게 쪼프린 녀인의 두눈에서 푸르스름한 원한이 독을 뿜는다. 녀인은 일그러진 입가에 경멸을 띠우며 넉두리마냥 설음을 터뜨렸다.

《대체 조국이란건 뭐고 민족이란건 뭔가요? 그런게 저한테 뭘 해줬느냐 말입니다! 전 어머니의 배속에서부터 배고픔을 타고난 팔자였어요. 날마다 배가 고파 허덕거렸지요. 찔레순이건 송기건 봄에 돋아나는 모든게 다 끼니거리였어요. 별식이라야 기껏해서 섣달그믐밤에 어머니가 한개씩 삶아주시던 닭알맛이 전부였구요. 눈물인들 좀 많이 흘렸다구요. 오죽했으면 아이적에 이런 생각까지 해봤답니다. 사람의 눈물이 짭짤하지 말구 달달했으문, 그러문 배고픈줄도 모를텐데…》

《그게 다 제 나라가 없었던탓이 아니겠습니까.》

갈린듯 한 경식의 목소리였다. 녀인이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나라라구요? 나라가 아니라 돈이 없었기때문이지요. 돈이 있었더라면 제가 왜 그런 설음을 당했겠나요. 일본땅에 와서 거지처럼 천대받고 멸시받던걸 생각하면 지금도 속이 떨립니다. 죠센징이란 소릴 듣기가 죽기보다 더 싫은걸 어떡해요. 그래서 전 조국이니 민족이니 하는 말을 믿지 않습니다. 믿을건 단지 돈뿐이예요. 전 앙심을 먹었답니다. 도적질을 내놓고선 무슨짓을 해서라도 돈을 모아야겠다구요. 개같이 벌어서라도 기어코 내 새끼들을 정승같이 먹이겠다고 돌아간 남편의 무덤앞에서 맹세했단 말입니다!…》

녀인의 두눈에서 눈물이 사납게 번쩍였다. 리경식도 우달근도 아연해서 녀인을 바라보았다. 숨막히는듯 한 침묵이 흘렀다. 조국과 겨레를 외면하는 한 인간의 랭혹함에 분노하면서도 녀인의 불우한 과거가 두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근본까지 잊을수 있단 말인가. 어찌 보면 빼앗기고 잃어버린것보다 더 서글픈 일은 이 녀인처럼 잊어버리고 사는것이 아닐가고 경식은 생각했다.

얼마쯤 지나 녀인은 손수건으로 눈꼬리를 찍으며 고집스럽게 되뇌였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제가 원하는건 단 하나, 합당한 대가를 받는겁니다. 책을 경매에 붙이겠다는것도 그때문이구요.》

그바람에 우달근의 낯이 다시금 오만상이 돼버렸다.

《또 그 소린가. 그래서 우리가 시미즈의것보다 얼싸한 건물을 헐값에 넘겨주겠다는게 아니우.》

《…》

녀인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는 녀인의 입술은 바싹 졸라맨 돈주머니모양 영악스레 다물려있었다. 답답해서 못 견디겠다는듯 달근이 솥뚜껑같은 손바닥으로 제 무르팍을 북치듯 두드렸다.

《좋수다. 그럼 우리가 건물을 거저 넘겨주겠수다. 그 건물의 시가가 얼마쯤 되리라는건 아마 아주머니두 모르지 않을거우다. 어떠시우?》

그 말을 듣자 녀인의 눈이 차겁게 반짝였다. 득실을 타산하듯 한동안 말이 없던 녀인은 경계의 빛을 늦추지 않은채 달근에게 묻는것이였다.

《래일중으로 양도증서를 만들수 있겠는지요?》

건물을 거저 내놓는다는 말에 녀인의 마음이 동하기 시작한것 같았다. 우달근이 씨원스럽게 대답했다.

《그럽시다. 그러니 증서를 만들구 도장을 누르면 고서를 내놓겠다는거우다?》

녀인은 랭정하게 뭔가 따져보는듯 하더니 마침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양도증서에 덧붙여서 50만엔을 가져와야 합니다.》

《50만엔?》

두사람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번화가에 자리잡은 노란자위건물을 꿀꺽하고도 모자라 50만엔이라는 금액까지 덧부르는 녀인의 탐욕에 어안이 벙벙해졌던것이다. 《벼룩가죽 벗길 녀자》라더니 정말로 그런 소리를 들을만도 했다. 그들의 심리를 눈치챘는지 녀인이 뒤를 달았다.

《저도 다 알아봤는데 그만한 가치는 나가는 책이라고 들었습니다. 전 정직한 거래만 합니다. 정당한 가격이상으론 한푼도 더 부르지 않습니다. 혹시 지나치다고 생각하신다면 얘기는 여기서 끝낼수밖에요.》

매정하게 잘라매는 녀인의 말이였다. 경식은 쓰거운것을 연신 삼키고있었다. 이런 녀인에게 한가닥 기대를 걸고 왔던 자기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싶었다. 50만엔이라… 그는 잠시 망설였다. 가족들을 귀국시킨 뒤 집을 판 돈까지 다 합쳐도 그만한 액수가 안되였던것이다. 그러나 길게 생각할 일이 아니였다. 피마르게 찾던 향악보가 눈앞에 있지 않는가. 경식은 성큼 녀인에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래일중으로 양도증서와 함께 50만엔을 가져오겠습니다.》

우달근도 기꺼이 화답했다.

《틀림이 없을거우다.》

그들은 녀인에게 래일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고 방에서 나왔다.

(모자라는 돈을 한시바삐 채워야 한다.)

녀인을 만나고 돌아선 순간부터 경식은 이 생각 하나만 줄곧 곱씹으며 걸었다. 곁에서 걷던 우달근이 잠간 들렸다 갈데가 있으니 먼저 자기 집에 가서 기다려달라고 이르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우달근과 헤여지자 경식은 곧바로 시장으로 나갔다. 거기서 그는 자기의 양복과 손목시계를 어렵지 않게 팔수 있었다.

경식이 입고있던 양복은 귀국할 때 입으라고 안해가 마련한 새 양복이였다. 어떻게 되여 그가 오사까로 올 때 그 양복을 입고 왔던가.

필경 이번 길에는 어떻게 하나 향악보를 찾아가지고 조국으로 가겠다는 열망때문이였을것이다. 그런 양복을 팔자니 주저되는바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우물쭈물할 경황이 없었다. 양복은 못 입고 가도 그렇게 찾던 향악보를 들고 가면 안해도 기뻐할거라고 위안하면서 그는 서슴없이 새 양복을 벗어놓았다. 그리고는 값눅은 바지 하나를 사입고는 와이샤쯔바람에 외투만 걸친채 찬바람이 휘파람을 부는 거리에 나섰다.

그랬건만 돈은 아직 턱없이 부족했다. 모자라는 돈을 채울 궁리에 전념하며 경식이 달근의 집에 이르니 어느새 벌써 주인이 들어와있었다.

《어딜 갔다 인제야 오시우?》

달근이 어리둥절해서 묻는 소리에 경식은 벙그레 웃기만 했다. 뒤미처 경식의 행색을 눈여겨본 달근이 입고있던 양복을 어떻게 했는가고 다우쳐물었다. 경식은 할수없이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을수 없었다. 두말할것없이 우달근은 펄쩍 뛰였다.

《새 양복을 팔다니? 대체 왜 그러시우? 그렇게두 우리가 못미덥수?…》

달근은 노여움에 숨이 막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의 심정이 리해되여 경식은 묵묵히 침묵만 지켰다. 한참후에야 달근은 어쩔 도리가 없는지 황소숨을 몰아쉬고나서 돈뭉치를 꺼내놓는것이였다. 50만엔이였다.

《우리 상공회 회원들이 향악보를 찾는데 써달라고 모은 돈이우다. 어서 받으시우다. 그리구 건물양도증서두 래일중으루 넘겨주게 의논이 됐수다.》

영문을 몰라하는 경식에게 달근이 하는 말이였다. 후더운것이 치밀어올랐다. 조국을 위한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는 동포들의 진정을 받아안고보니 녀인때문에 무거워졌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것만 같았다. 돈을 받아쥐고 흥분을 묵새기던 경식은 이윽고서야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정말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지…》

그러자 달근이 이마살을 찌프린다.

《또 그런 당치않은 말씀이시우. 정 그러문 이번엔 진짜 성을 내겠수다.》

《예,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경식은 웃으며 서둘러 자기 말을 거두었다.

《하지만 부족되는 액수만 채우면 됩니다. 아버님이야 제 심정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경식의 의견에 우달근은 한사코 머리를 내흔들었다. 그러다가 경식이 《그러시면 저도 진짜로 성을 내겠습니다.》 하고 말해서야 별수없이 의견을 따르기로 하였다. 어쩌다가 찾아온 즐거움에 파묻혀 두사람은 시름을 놓고 웃었다.…

그무렵 가루베는 흥신소 주인으로부터 리경식이 향악보의 행방을 알아냈다는 전화를 받고있었다. 흥신소 주인은 향악보를 가지고있다는 녀인의 신상자료와 함께 리경식이 급히 오사까로 갔다는 소식까지 빠짐없이 보고했다.

가루베의 얼굴가에 득의한 미소가 피여올랐다.

《요로시-》

가루베는 잠간 퉁눈을 굴려보더니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이보게, 한가지 일을 더 해줘야겠네.》

《예, 말씀만 하십시오.》

《지체하지 말구 지금 당장 그 소식을 박상열이 알게 해야겠네.》

《예? 그리되면?…》

《글쎄 시키는대로 하라니까.》

가루베는 전화를 놓았다. 불쑥 아라기령감의 말이 떠오른다.

《분렬하여 통치하라.》

가루베는 그 말을 입속으로 웅얼거리다가 벌쭉 웃고말았다.

되돌이

우리민족끼리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E-mail) : urimanager@silibank.com 홈페지내용에 관한 문의(E-mail) : uriminzok@silibank.com
Copyright © 2003 - 2013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
gotop
기사종합
 
도서, 잡지
 
영화, 음악
 
독자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