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3 회)
5. 샘물은 퍼낼수록 깨끗해진다 《어마나!》 예리한 아픔에 순분은 소스라쳐 놀랐다. 귀국하는 날 아이들에게 입힐 옷가지들을 손질하다가 얼결에 바늘로 손가락을 찔렀던것이다. 방안에서 놀던 수영이와 수남이가 엄마 손에서 피가
나온다고 울상이 되여 야단을 쳤다. 얼른 손끝에서 돋아나오는 피방울을 훔치며 아이들을 안심시킨 순분은 하던 일을 대충 거두고 부엌으로 내려갔다. (오늘 내가 왜 이럴가?) 순분은 한손으로 쿵쿵거리는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너무 힘든 하루였다. 종일토록 무거운 상념이 그의 마음속에서 떠날줄을 몰랐다. 무슨 일을 해도 손에 일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고 저자를 보고
돌아올 때에는 길을 헛갈려 왕청같은 골목에서 헤매기도 하였다. 창밖에서는 저무는 해의 치마자락이 서쪽하늘가를 맥없이 불태우고있었다. 한동안 얼친 사람모양 멍하니 서있던 순분은 이윽해서야 앞치마를 두르고 저녁차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늘 하던대로 곤로불을 지피고 밥솥에
물부터 잡았다. 그리고는 부엌의 서늘한 구석에 놔두었던 대바구니를 꺼냈다. 바구니안에는 물이 싱싱한 숭어 두마리가 얼음주머니우에 놓여있었다. 오사까에서 돌아온 남편의 모습은 여느때없이 수척해보였다. 눈확은 푹 꺼지고 마른 살갗이 얼굴에 덮였는데 입맛까지 잃었는지 때식도
굼때는둥마는둥 하는것이였다. 그래서 오후에 일부러 어물전에 가서 사온 숭어였다. 순분은 숭어를 도마우에 올려놓고 손질하기 시작하였다. 고향이야기를 할 때마다 대동강숭어소리를 빼놓지 않고 올리군 하는 남편이였다. 달밝은 밤이면 대동강의 번뜩이는 수면우로 팔뚝만 한 숭어들이
쭐버덩쭐버덩 뛰여오른다는 이야기며 대동강숭어국이 어찌나 유명했던지 예로부터 평양에 다녀온 사람을 만나면 의례히 《숭어국맛이 좋든가?》고 첫
인사말을 건넸다는 이야기 그리고 원래 숭어국은 숭어토막을 찬물에 두고 통후추알과 함께 끓여야 제맛이 난다는 이야기들을 순분은 남편에게서 얼마나
익히 들어왔던가. 그처럼 두고 온 고향을 못 잊어하는 남편이였기에 밥그릇을 시원히 비우지 못하다가도 숭어국을 보면 어린애같이 좋아하며 식탁앞에
다가앉군 하였을것이다. 비늘을 깨끗이 벗기고나서 숭어를 보기 좋게 토막내기 시작하는데 방안에서 수영이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도란도란 들려왔다. 《이건 대동강! 이건 모란봉!》 아이들이 아버지가 가져다준 《조선》화보를 들여다보는 모양이였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자주 들어와서 인젠 수영이는 물론이고 다섯살 난
수남이까지도 평양의 웬간한 명승지들은 척척 입에 올리는 정도이다. 구김살없는 아이들의 청맑은 목소리를 들으며 순분은 어렴풋이 웃었다. 하지만 웃을 때조차 그의 눈에서는 그늘이 사라질줄 모른다. 오늘 아침
남편이 집을 나서며 하던 말이 또다시 머리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여보, 당신이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귀국하는게 어떨가?》 처음에 순분은 남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선뜻 알아들을수가 없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귀국하라니?… 영문을 몰라 얼떠름해있는데 마른침을
넘기며 남편이 힘겹게 터놓는것이였다. 《실은 향악보를 아직 찾지 못했소.》 순분은 아연해서 남편을 쳐다보았다. 향악보를 못 찾았다는 남편의 말이 무거운 메아리를 일으키며 가슴속에 퍼져갔다. 애써 눈길을 피하는
남편의 컴컴해진 낯빛을 알아보는 순간 그는 남편이 진실을 말하고있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럼 혼자 여기 떨어지고 나와 아이들만 먼저 가라는건가? 어쩜 그런 생각을…) 순분의 얼굴은 하얗게 굳어져버렸다. 너무하다는 말이 혀끝에 매달려 파르르 떨었건만 노여움과 설음이 한데 뒤엉켜 목안을 꽉 메우는 바람에
아무 말도 할수가 없었다. 안해의 그런 심정을 알기나 하는지 남편은 그리 알고 준비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어디론가 나가버렸다. 문을 열고 나가는
남편의 등모습이 어찌 그리도 야속해보이던지.… 시뿌연 안개가 낀것처럼 눈앞이 흐려왔다. 이날이때껏 남편을 떠난 가정에 대해, 자기자신에 대해 상상조차 해본적이 없는 그였다. 이역살이의
모진 풍파를 헤쳐오면서도 두려운줄 몰랐던것이 무엇때문이였던가. 지금은 고생스럽지만 앞날은 즐거울거라는 꿈을 늘쌍 간직해올수 있었던것이 과연
무엇때문이였던가. 다름아닌 언제나 곁에 남편이 있다는 믿음때문이 아니였던가. 그에게 있어서 남편은 의지할 기둥이였고 눈비를 막아주는 지붕이였으며 얼어든 몸을 녹여주는 온돌이였고 세상을 내다보는 마음의 창문이기도
하였다. 헌데 그런 남편과 별안간 기약없는 리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무서운 고독이 심장을 내리누르는것을 견딜수가 없었다. 그랬다. 기약하기 어려운 리별이였다. 인제 얼마나 더 시간과 품을 기울여야 향악보를 찾게 될는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였다. 하건만 남편은
귀국날자가 박두한 오늘까지도 그 일에서 절대로 물러서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10년이고 20년이고 향악보를 찾을 때까지 그냥 여기서
헤매겠다는건가. 가슴이 떨렸다. 남편이 하는 일이 조국을 위한 일이라는것을 모르는 순분이 아니였다. 하지만 남편과 마찬가지로 조국을 위한 일이라면 고생도
락으로 여기는 동포들이 이 일본땅에 어디 한둘인가. 설사 남편이 이대로 떠난다 해도 그 일을 맡아나설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을것이다. 남편이야
지금껏 잃어버린 고국의 보물들을 되찾으려고 외진 길을 혼자 뛰여다니며 고생인들 좀 많이 해왔던가. 그런 수고를 잘 알기에 총련에서도 어서
귀국하라고 남편을 떠미는것이 아니랴. 헌데도 굳이 물러설념을 않으니 생각할수록 야속하게만 여겨졌다. 정말로 남편에게는 가족이 소중하지 않단 말인가. 여태껏 기둥으로 믿고 살아온 가장의 마음속에서 안해나 자식들은 고작 그 정도의 자리밖에
차지하고있지 못했었나 하는 의문까지 들자 순분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서늘해오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렇게 의혹과 실망, 외로움속에 모대긴
하루였다.… 《엄마, 물끓어요!》 부엌사이문을 열며 수영이가 떠들어서야 순분은 상념에서 깨여났다. 아닌게아니라 어느새 밥솥에서 물끓는 소리가 요란스러운데 자욱한 김발이
부엌에 뽀야니 서려돌고있었다. 정신을 차린 순분은 서둘러 밥솥에 쌀을 안쳤다. 어머니의 그런 안색이 별스러워보였던지 수영이가 문설주곁에 오도카니 선채 움직일줄을 모른다. 《들어가 동생하구 놀아라.》 흔연한 낯빛을 애써 지으며 수영이를 들여보낸 순분은 손질을 끝낸 숭어토막들을 대접에 무드기 담아놓고나서 이번에는 도라지를 물에 불군
양은소랭이를 내놓았다. 그 도라지도 오늘 시장에 나가 사온것이였다. 집에서 차려주는 음식들가운데서 도라지생채를 제일로 꼽군 하는 남편이였다.
아마 도라지특식이 소문난 강원도내기여서인지 주부의 솜씨가 류별났던 모양이다. 순분은 물에 불구어 부근부근해진 도라지들을 굵직굵직하게 찢기 시작하였다. 그러느라니 오후에 겪은 일이 다시금 뇌리에 아프게
되살아나는것이였다. 시장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서였다. 남편생각에 골몰해서 길을 걷던 순분은 흥이 나서 주고받는 녀인들의 귀익은 목소리를 듣게 되였다. 《어유, 술이라문 역정부터 내시던 형님이 오늘은 웬일이슈? 바깥어른 술심부름을 다 하시구.》 《그러기 말이네. 다른 때 같으문사 어림도 없는 일이지비. 하지만 제 나라 땅을 밟게 됐다구 그리두 좋아하는 령감을 보니까 요사인 암만
술을 찾아두 바가지 긁을 생각이 아이 난다이.》 《참 성님도 모르신당께. 왜 술심부름만 하신다는깁니껴. 뭐라뭐라해도 난 밤에 서방님하고 마주앉아 의좋게 술을 나누는 맛이 천하제일이지라오.
호호호…》 입을 싸쥐고 키득대는 웃음소리에 순분은 눈길을 들었다. 한동네에 사는 동포녀인들이 한발 먼저 반찬감을 사들고 앞서가고있었다. 눈여겨보니
자기네처럼 다들 귀국신청을 낸 집들이였다. 기쁨에 흥뜬 그들의 심정이 순분의 가슴에도 물결쳐왔다. 이역땅에서 함께 고생해온 이웃들이였다. 모진 차별과 설음, 생활고에 시달리느라
그늘이 가셔질줄 모르던 그들의 얼굴마다에 봄볕을 머금은듯 웃음꽃이 피여난것을 보니 순분의 마음도 자연 훈훈해졌다. 녀인들이 주고받는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근데 이봅세 동생, 엊그저께 시삼촌이 왔댔다메?》 《에그- 성님, 말씀 마시소. 한바탕 생야단을 치다가 갔지라오.》 《시삼촌이라문 북규슈에서 석탄장사를 해서 돈을 모았다는 그 삼촌말이유?》 《그렇지라오.》 《거참, 조카네가 총련계라구 발길 한번 안한다던 그 삼촌이 어째 별안간 뛰여와 야단합데?》 《우리가 공화국으로 간당께 그랬지라오. 글쎄 시삼촌말이 <느네들 철없어서 그런당께. 왜정때 내가 벌이하러 가봐서 아는데 북쪽은 맨 산이구
맨 돌뿐이드라. 겨울에 밖에 나가서 침얼 뱉으문 얼음덩이가 돼서 눈우에 떨어지구 오줌얼 누문 대번에 얼음줄기가 따라올라오는데랑께. 곡식이 제대루
될끄나 과수가 제대루 될끄나. 더군다나 전쟁때 미군이 깡그리 폭격해놔서 재더미만 남았다는 소릴 느네두 들었제? 그런 곳에 뿌득뿌득 찾아가선
어쩔끄나?> 하면서 당장 귀국신청을 취소하라는게라오.》 《기차라. 대체 시삼촌은 무시기 쏴놔서 그리두 삐뚤어진 소릴 합데?》 《말로는 우리가 걱정이 돼서 그런다지만 딴은 그게 아니지라오. 시삼촌이 이남과 거래가 많다더니만 조카네가 이북으로 갔다는 소문이 나면
장사에 지장이 있을가봐서 그런다는걸 우리가 왜 모르겠십니껴. 암만 지청구를 해도 주인이랑 내랑 끄떡도 하질 않으니깨 시삼촌이 이번엔 우리 영호를
얼리는게라오. 귀국선 타지 않고 일본에 남겠다면 인제부터 학비랑 용돈이랑 자기가 전적으로 대주겠다는둥 래일 당장 하꼬네산에 놀러 가자는둥
대학공부꺼지 시켜주고 승용차랑 사주겠다는둥… 에그나- 우리가 고생고생할 땐 본체도 않던 시삼촌이 어찌나 달짝지근한 말들을 쫘르르 쏟아놓던지 귀가
다 간지럽더랑께.》 《그래 영호가 뭐랬수?》 《글쎄나 난 깜짝 놀랐당께. 이제사 아홉살밖에 안되는 녀석이 고렇게 올차게 댑변할줄은 참말 몰랐서라오. 시삼촌이 하도 다그어대니깨 우리
영호가 댑변하기를 <작은할압시, 우리 걱정은 마십시오. 조국에 가면 돈 한푼 받지 않고 중학공부도 시켜주고 대학공부도 시켜준다고 했습니다. 새
집도 준다고 했습니다. 저는 어서빨리 김일성원수님의 품에 안겨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글쎄 이러는게라오.》 《원, 녀석두…》 《그녀석 속시원히 말 잘했다이!》 《아닌게아니라 영호말을 들으니깨 눈물이 팍 쏟아질것 같더랑께. 여적 철따구니없는줄만 알았던 아들자식한테서 그런 말을 듣게 될줄이야 어떻게
알았겠서라오. 어찌나 대견스럽던지 내 자식 같아보이지 않더랑께요. 참말 우리 학교에서 배운 힘이 그렇게꺼지 클줄은 생각도 못했서라오.…》 이웃들의 목소리에서는 구김새 한점 없는 생기가 풍겨왔다. 순분의 유순한 얼굴에 웃음이 피여났다. 불쑥 그들과 어울려 웃고 얘기하고싶은
충동이 갈마들었다. 잠시나마 그들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그들의 자랑거리를 함께 들어주면서 만단시름을 털어버리고싶었다. 순분의 발걸음이 이웃들을
향해 절로 빨라졌다. 그러는데 어눌한 말씨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느닷없이 귀전에 후벼들었다. 《헌데 참 형님, 거… 수영이네 얘기 못 들으셨어유?》 《무스거?》 《듣자니깐 수영이 아부지가 자길 이번 귀국명단에서 빼달라구 그랬다나봐유.》 《왕청같이 무슨 소린기오. 귀국할 때 남편 입힌다고 수영이 엄마가 새 양복꺼지 사오는걸 요전날 내가 봤당께로.》 《아무튼 수영이 아부지가 처자식들을 이번에 먼저 보내구 자긴 나중에 따라가겠다구 그랬다던데유.》 《저런…》 순분은 불에 덴것처럼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춰버리고말았다. 이웃들이 자기 집 소리를 하고있었던것이다. 당황한 나머지 몸둘 곳을 몰라하는데
그런줄도 모르고 아낙네들은 계속해서 수군대며 가고있었다. 《정말 알다가두 모를게 남정들 속이라니깐. 혹시 그 집주인이 딴맘을 먹은건 아닐가유?》 《에그머니나, 설마하니 수영이 아버지가 아무렴…》 《그러지 않구서야 어쩌문 졸지에 처자식들과 떨어지겠다는 말을 꺼낸단 말이유?》 《하긴 남자들 소가지는 구렝이 한가지랑께.》 《쯧쯧, 입방아들일랑 그만 찧구 날래 가기나 합세.》 쥐여박는듯 한 북관사투리에 수군대던 목소리들은 움츠러들고말았다. 순분은 낯빛이 해쓱하니 질린채 한자리에 얼어붙어있었다. 녀인들의 구설에 남편이 오르는 순간 날카로운 고통이 온몸에 굽이쳐흐르고 홀연 눈물이
눈까풀을 아프게 찌르며 두볼로 주르르 흘러내리는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숨이 막히는것 같았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금시 새여나올것만 같은
울음소리를 간신히 참고있었다.… 그 일을 생각하느라니 다시금 설음 같은것이 치밀어올라 숨이 가빠왔다. 순분은 싸늘해진 손으로 맥없이 도라지를 찢으며 이웃들이 수군거리던
소리를 몇번이고 곱씹어보았다. (정말 수영이 아버지가 딴마음을 먹은걸가?) 이런 물음을 던져볼 때마다 그는 세차게 도리를 흔들군 하였다. 아니,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남편은 그럴 사람이
아니였다. 몇해전 남편이 조선문화재를 손에 넣으려고 혼자 사는 어느 일본녀인의 집에 여러번 찾아갔던적이 있었다. 그 일을 두고 주변에서 《과부와
뜨거운 사이》라는 소문이 나돌 때에도 순분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남편을 잘 알고있었다. 비록 아기자기한 잔정을 모르는 툭한 성미여도 마음속 깊은 곳에 진정을 품고 사는 남편의 웅심깊은 사람됨을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그는 남편을 굳게 믿고있었다. 이 시각 순분이 괴로워하는것은 결코 남편에 대한 평소의 믿음이 흔들려서가 아니였다. 그처럼 믿는 남편이 남들의 말밥에 오르내린다는 사실이,
자기와 자식들이 소견머리 좁은 사람들의 눈에 가장한테 버림받은 외로운 모습으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그것이 분하고 서러워서였다. 또 그럴수록 한마디
의논도 없이 자기에게 이런 엄청난 짐을 떠맡긴 남편의 처사가 더더욱 야속하고 무정하게 여겨져서였다. 순분은 쓰리고 허영거리는 자기의 심정을
남편에게 하소연하고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저녁차비를 마쳤을 때까지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밥상을 차려놓고 아이들과 함께 가장을 기다리던 순분은 밤이 깊어지자
애들에게 먼저 저녁을 먹이고 혼자서 남편을 계속 기다렸다. 어느덧 벽시계가 아홉점을 쳤다. 잠든 아이들의 머리맡에 앉아 바느질을 하며 이제나저제나 남편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던 순분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어둠이 무겁게 드리운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남편이 늦게 들어온적이 한두번이 아니였건만 오늘따라 왜 이리도 별스럽게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알수
없었다. 순분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가로 다가갔다. 집앞에 난 골목길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부나비 한마리가 불빛이 얼비치는 창유리를 안타까이
두드리고있었다. 어둠속 어디서 길잃은 비둘기의 울음소리가 구구구 들려온다. 불안스러운 긴숨을 조용히 쏟으며 순분은 창문너머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스라한 별들이 도시의 색날은 밤하늘에서 어슴푸레 빛을
뿌리고있었다. 습하고 뿌연 대기를 넘어 먼 동네의 등불들인양 가물거리는 별빛들을 쳐다보느라니 차츰 마음이 고즈넉해지고 까닭모를 그리움이
느껴졌다. 문득 남편과 함께 겪어온 나날들이 추억의 물이랑을 타고 눈앞에 어른거렸다. 고생스러웠던 세월이였다. 그래도 남편이 곁에 있어 꿈과 힘을
잃지 않고 살아온 세월이였다. 순분은 어둠이 비낀 유리창에 이마를 기댄채 지나간 나날들을 돌이켜보았다. 남편과 가정을 이루고 처음 살던 빈민촌 막바지골목의 판자집이 떠오른다. 누비돗자리 두장을 깐 새둥지같은 단칸방에 세간이라야 옷가지며
살림붙이들을 건사하는 귤상자 두개와 그우에 동그마니 얹혀있는 이불 두채 그리고 자그마한 사각밥상과 앉은뱅이화로가 전부였었다. 비가 좀 오면
방바닥에 소랭이 같은것을 받쳐놔야 했고 바람이 세지면 밖에 나가 천막을 치듯 네 기둥을 비끄러매야 하는 집이였다. 그렇게 가난에 덜미잡혀 시작한
살림이였어도 거기에는 뙤창에 돋은 별들을 세여보며 앞날을 함께 그려보던 꿈이 있었고 서로의 고단한 심사를 정을 얹은 말 한마디로 나누어갖던
따뜻한 위로가 있었다. 허나 생활은 험난했다. 그들부부는 매일매일 끝없는 파도처럼 밀려드는 곤궁과 싸워야 했다. 남편이 수레를 끌고 고물행상에 나서면 순분은
삯빨래감들을 얻으러 나섰고 남편이 어뜩새벽부터 생선을 팔러 뛰여다닐 때 안해도 골목골목을 헤매다니며 콩나물을 팔았다. 때로는 둘이 함께 옛
토목공사장에 가서 온종일 땅을 파헤치며 파철을 긁어모으기도 하였다. 손부리가 모지라지도록 아득바득했지만 하루하루 끼니를 이어가면서 다달이 덮씌워지는 방세며 물세, 전기세 같은것들을 감당해나가기란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였다. 아이들이 태여나자 짐은 더욱 무거워졌다. 그들은 한푼한푼을 쪼개서 써야 했고 시장에서 무우를 살 때에도 옹근 한개를 살 돈이
없어 세등분으로 나눈 한토막을 사지 않으면 안되였다. 먹는것도 점심은 번지다싶이 하고 아침저녁으로만 까만 보리밥에 절임무우 몇쪼각으로 때식을
굼때는것이 례사였다. 그런 속에서도 남편은 조상의 유물을 찾는 일이라면 만사를 제쳐놓군 하는것이였다. 한번은 고물을 모으러 다니던 남편이 이사짐을 싸는 집과 맞다들게 되였는데 어지간히 해묵은 집이였던지 내버리는 물건들을 다 모아놓으니
자그만치 세 달구지분이나 되였다. 남편은 그 물건들을 되팔아 적지 않은 돈을 손에 넣을수가 있었다. 그날 남편이 내놓는 돈을 보는 순간 순분은
숨이 나갔다. 그만한 량이면 밀렸던 집세를 무는것은 물론이고 어느 정도 숨을 돌릴수 있었던것이다. 그런데 기뻐하는 빛을 감추지 못하는 안해를
바라보며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남편은 요긴한데 쓸데가 있어 그러니 그 돈을 먼저 쓰는게 어떤가고 묻는것이 아닌가. 순분이 영문을 몰라하는데
어느새 양복을 갈아입은 남편이 내놓았던 돈을 품안에 다시 걷어넣고 어디론가 바삐 나가는것이였다. 남편은 퍼그나 밤이 깊어서야 종이두루마리 같은것을 손에 들고 돌아왔다. 희색이 만면해서 남편이 그것을 펼쳐보였을 때 순분은 그만 어안이
벙벙해지고말았다. 뜻밖에도 색이 바랜 옛날 그림이였던것이다. 남편의 설명을 듣고서야 순분은 그것이 해방전 일본인들이 빼내간 조선의 옛
그림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드디여 찾아왔거던. 이 그림을 찾지 못해 내가 얼마나 속을 앓았는지 아오.》 양복소매에 먼지가 묻는것도 아랑곳없이 그림족자를 어루더듬고 또 어루더듬던 남편은 한참만에 퍽 미안쩍어하며 건사해둔 돈이 있으면 좀
내놓으라고 사정조로 이르는것이였다. 아무래도 족자를 새로 표구해야겠다는것이였다. 순분은 기가 막혀 무슨 말을 할수가 없었다. 그림 한장때문에 요행 들어온 묵돈을 가뭇없이 날려보내고도 모자라 집에 남아있는 얼마 안되는
돈까지 마저 내놓으라고 하니 도대체 생각이 있기나 한건가? 하루가 멀다하게 들볶아대는 빚단련도, 날마다 호구지책에 쫓겨 살아야 하는 숨가쁜
처지도 그 시각 남편의 안중에는 있는것 같지 않았다. 열백번 더 안된다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아쳤지만 그림을 얻고 그렇게도 좋아하는 남편의 들뜬
기분에 차마 찬물을 끼얹을 용기가 나지 않아 순분은 그날 푼전을 아껴가며 모아두었던 돈까지 고스란히 내놓지 않으면 안되였다. 남편은 그런 사람이였다. 정말 모를 일이였다. 고국의 문화재와 관계된 일이라면 가정을 돌보는것도 잊고 억척스럽게 달라붙는 남편의 진속이
무엇인지, 고심겹게 찾던 문화재를 손에 넣으면 온밤 들여다보고 쓸어보며 뜬눈으로 지새우는 그 심정이 과연 어떤것인지 순분으로서는 처음에 선뜻
알수가 없었다. 한해두해 세월이 흘러서야 그는 차츰 남편을 리해하기 시작하였다. 부모형제없이 혈혈단신으로 살아온 순분에게 남편은 조국을 알게 해주었다.
순분은 남편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그리고 이역만리에까지 와닿는 어버이의 손길을 직접 체험하는 나날에 자기에게 친정어머니처럼 의지하고 따를 조국의
품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사람들에게는 조국앞에 지켜야 할 중한 도리가 있다는것을 배우게 되였다. 그러고나니 처자식들을 먹여살리기도 바쁜
형편이건만 그토록 주저없이 문화재들을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남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것 같았다. 돈에 의해 사람의 금새가 매겨지는 일본땅에서 비록 고물수레를 끌어도 뜻을 세우고 당당히 살아가는 남편이 순분에게는 저으기 어려우면서도 한편
자랑스럽게 여겨졌다.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남편의 그 의로움과 떳떳함에 그늘을 남기고싶지 않았다. 순분은 남편의 뜻을 따르는 길이 안해된 본분이고
조국의 품에 부끄럽지 않게 안기는 길이라고 생각하며 말없이 집살림을 혼자서 지탱해나갔다. 녀자의 몸으로 그렇게 한다는것이 얼마나 힘에 겨웠던가. 식구들을 먹여살리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았다. 아라강에 나가 자갈을 춰내기도 하고 파솜이나 파천을 주어다가 솜을 튀기고 실을
뽑기도 하였으며 손달구지를 끌고 교외농촌에 가서 고구마며 참대순 같은것들을 넘겨받아와 팔기도 하였다. 공장지구에 쌓인 탄재더미들을 헤치며 타다
남은 석탄덩이들을 줏느라 남자인지 녀자인지 분간 못할 지경으로 탄가루를 뒤집어쓴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밤에는 또 밤대로 졸음을 깨물며
삯바느질을 하였다. 그렇게 모지락스럽게 번 돈으로 쌀 한봉지를 사들거나 련탄 서너장을 새끼에 꿰여들고 땅거미속에 긴 그림자를 끌며 집으로 돌아올 때면 두다리가
휘청거리고 온 누리가 빙글빙글 돌아가는것 같았다. 그래도 마음만은 개운했다. 자기가 애를 쓸수록 남편의 일이 잘되고 아이들이 주눅 안 들고
자란다는 보람이 있어 삶은 고되였어도 순분은 즐겨 살았다. 그런 그들부부의 모습을 보며 이웃들도 《찰떡궁합》이라고 부러워들 하였다. 하지만 서럽고 가슴아픈 일들도 있었다. 수남이가 돌을 갓 넘겼을 때였다. 탈없이 잘 자라던 아이가 코물을 좀 흘리는것 같더니 갑자기 페염으로 넘어갔다. 아이들의 병은 시각을
다투는 법이다. 불덩이같이 달아오른 아이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니 당장 입원치료를 받아야 한다는것이였다. 눈앞이 새까매졌다. 남편은 문화재일로 규슈에 나가있었는데 수중에는 입원비를 치를만 한 돈이 남아있지 않았다. 며칠전에 남편이 옛날 사찰에서
쓰던 향로(향불을 피우는 작은 화로)를 찾아온다면서 집안의 돈을 다 걷어내갔던것이다. 어찌할지 몰라 허둥지둥하던 순분은 창황중에 집으로 달려와 남편이 얼마전에 찾아온 향로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크기가 한뽐정도 되는 자그마한 놋향로였는데 하늘을 쳐다보며
서있는 원앙새의 모양을 신통히 본딴것이였다. 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순분은 향로를 싸들고 병원으로 달려가 입원비대신 내놓았다. 향로를 찬찬히 눈여겨보고난 일본인의사는 입이
헤벌어져서 수남이를 쾌히 입원시켰다. 그리고는 갖은 왼심을 다 써가며 특별히 돌봐주는것이였다. 결국 아들은 무사할수 있었다. 남편이 제 살점보다
더 중히 여기는 유물에 상론없이 손을 댄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아무튼 자식을 살려냈다고 생각하니 어느 정도 위안이 되였다. 그런데 며칠후 집에 돌아온 남편이 그 사실을 알고 벼락치듯 노성을 지르는것이 아닌가. 《당신 제정신이요? 어디다 함부로 손을 대?!》 그렇게까지 화를 내는 남편을 본적이 없었다. 순분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하였으나 입술이 떨려 아무 말도 할수가 없었다. 저이가 정말
아이들의 아버지가 옳긴 옳은가? 어쩜 저리도 무정하실수 있을가? 옛날 물건들이 암만 중해도 어떻게 자식보다야 더 중할수 있담? 억이 막혔다. 참을길 없는 서러움이 그의 목을 내리눌렀다. 남편이 그처럼 애지중지하는 물건들이 조국으로 보내야 할 귀한 보물들이라는것을 몰라서가 아니였다. 허나 처자식들이 있고서야 보물도 있고
애국사업도 있는게 아니랴. 과연 저이가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 모든것을 견디여나가는 녀자의 수고를 하다못해 절반만이라도 헤아리실가? 자식들에게 빵
한개 변변히 못 사먹이던 그 쓰라림과 식구들의 밥그릇에 자기 밥을 덧얹어주고는 랭수 한사발로 빈 배를 채우며 도슬러먹던 그 강심을, 탄가루와
땀에 얼룩진 여윈 뺨을 비추어보며 세수물우에 떨구던 그 눈물을 저이가 어떻게 다 아시랴. 순분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겨져나가는것만 같았다. 남편이 시꺼멓게 질린 낯빛으로 어디론가 나가버리자 순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온몸을 떨면서
세차게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시집을 온 이후 그렇게 울어보기는 처음인것 같았다. 가슴속에 응어리져있던 설음과 고뇌, 남편에 대한 고까움이 일시에
탕수마냥 터져흐르는것을 걷잡을수가 없었다. 지금껏 그가 단 한번이라도 남편에게 매여달린적이 있었던가. 안타깝고 고달파도 탓하거나 군소리 한마디 없이 홀로 모든것을 감당해오지
않았던가. 남편이 모아들인 문화재를 한두점만 내다 팔아도 궁색한 처지는 면할수 있다는것을 모르지 않았건만 그런 미련은 꼬물만치도 둔적이 없었다.
남편의 피땀이상 소중한것이 순분에게는 없었기때문이였다. 그렇지만 자식들의 운명이야 어찌 외면할수 있단 말인가. 무정했다. 그저 오직 문화재
하나밖에 안중에 없는 남편이 너무도 무정스러워 순분은 하염없이 흐느껴울고 또 울었다. 그날 남편은 밤이 늦도록 들어올줄을 몰랐다. 때로는 마음속으로 항변도 해보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문설주에 기대앉아 남편을 기다리던
순분은 그만에야 지쳐버려 혼곤히 잠들고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던지.… 잠결에 어깨를 껴안는 더운 손길을 느끼며 순분은 눈을 떴다. 남편이였다. 숨가삐 뛰여다니며 향로를 되찾아온 남편이 곁에 앉아 안해의 어깨를 어루쓸고있었다. 《내가 너무했소. 모든게 다 내탓이요.…》 남편의 목소리는 물기에 젖어있었다. 목이 콱 메여왔다. 무엇을 더 바라랴. 남편의 투박한 말속에 안해가 바라는 그 모든 애정과 위로가 다
들어있는데야. 행복이라는게 이런걸 두고 하는 말일가. 순분은 드세차고 열렬한 힘의 사품에 끌리워 남편의 품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지나온 나날을 더듬는 순분의 눈가에는 호젓한 미소가 떠돌고있었다. 되돌아보면 남편과 같이 살아오면서 눈물도 많았고 속타는 일도 많았었다.
그러면서도 괴롭고 힘겨울 때마다 제일먼저 떠오르던 사람은 다름아닌 남편이 아니였던가. 땅속깊은 곳에서 뿜어오르는 지열마냥 진실하고 웅심깊은 남편의 애정을 굳게 믿었기에 순분은 남편을
위해 모든것을 기꺼이 바쳤고 남편이 확신에 넘쳐 이야기해주는 래일의 생활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마침내 귀국의 배길이 열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부부의 환희는 얼마나 컸던가. 설음많은 이국살이와 작별하고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사회주의조국의 품에 안기게 되였다는 열뜬 행복감에 겨워 순분은 밤이 지새도록 남편과 기쁨을 나누고 또 나누지 않았던가. 그런데 막상 귀국을
눈앞에 둔 지금에 와서 뜻밖에도 남편과 떨어지게 될줄이야 어이 상상이나 했으랴. 허전해진 순분의 가슴속에 외로움과 쓸쓸함이 또다시 밀려들었다. 일찌기 부모형제를 잃고 낯설은 이역의 골목골목을 홀로 헤매던 그는 외로움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제일 두려운것은 외로움이였고 그래서 더더욱 남편은 소중했다. 아무리 험한 가시밭길이라도 남편과
함께라면 견디여낼 자신이 있었지만 남편이 곁에 없다면 평탄한 큰길이라도 혼자 걸을 자신이 없었다. 그런 심정을 남편은 한번이라도 생각해봤을가? 순분은 두손으로 볼을 싸쥐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였다. 밤은 소리없이 깊어가고있었다. 불현듯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걸음걸음 눌러딛는듯 한, 힘과 묵직함이 느껴지는 소리였다. 순분은 눈앞에 드리운 머리카락을 성급히 밀어내며
어둠속을 내다보았다. 남편의 낯익은 자태가 뜨락에 들어서고있었다. 그 순간 반가운 생각부터 앞서 순분은 서둘러 일어나 문을 열어주었다. 《아직 자지 않소?》 이렇게 물으며 방안에 들어서는 남편에게서 습관된 체취가 뭉클 안겨왔다. 순분은 달아오르는 얼굴을 숙이며 대답을 피하고는 얼른 부엌으로
내려가 밥과 국을 다시 덥혔다. 얼마후 저녁을 차려들고 방에 들어가니 남편은 아이들의 자는 모양을 들여다보며 묵묵히 앉아있는것이였다. 순분은
그러는 남편을 밥상으로 불렀다. 《시장하실텐데 어서 드세요.》 남편이 밥상앞에 나앉자 순분은 뽀야니 뜬김이 서린 남비뚜껑을 열었다. 물씬 김을 뿜는 숭어국이 푸짐하고 맛갈스러운 모습을 드러냈다. 남편은
눈이 둥그래졌다. 《갑자기 웬일이요? 숭어국에 도라지생채라… 게다가 술까지?》 순분이 남편앞에 남비를 가져다 놓으며 말했다. 《요새 많이 상하신것 같은데 오늘은 좀 푹 쉬세요.》 그리고는 주전자에 데운 소주를 한잔 따라서 남편에게 권했다. 《헌데 당신 밥은 왜 보이지 않소?》 훈훈해진 기색으로 술잔을 받아들던 남편이 의아해서 묻는 말이였다. 별로 밥생각이 없어 순분이 먼저 먹었다고 얼버무렸지만 남편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지 말구 어서 저녁을 가져오오. 당신 언제 나보다 먼저 저녁을 든적이 있더랬소?》 별수없이 순분은 자기 밥그릇을 가져오지 않을수 없었다. 남편은 안해에게 숭어국까지 듬뿍 덜어주고나서야 술잔을 들었다. 그러는 남편의
떼꾼해진 눈이며 터갈린 입술이 순분의 눈에 아프게 미쳐왔다. 가슴이 저려났다. 정작 그런 모습을 대하니 방금전까지 마음속에서 고패치던 원망어린
말들은 뒤로 물러나고 대신 남편에 대한 측은한 생각이 밀려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순분은 숭어국을 달게 드는 남편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기만
하였다. 그러는데 불쑥 남편이 지나가는 소리처럼 묻는다. 《귀국할 차비는 다됐소?》 가슴이 흠칫했다. 홀연 아픈 곳을 찔리운 순분은 숨을 죽이며 황황히 눈길을 떨구었다. 남편도 안해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이윽토록 말이 없다가
숟가락을 멈추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는것이였다.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오. 늘 당신한테 고생만 시키누만.》 순분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가까스로 억누르고있던 서러움과 하소연들이 금시라도 남편앞에서 터져나올것만 같았다. (저이는 내 마음을 다 아셔. 알면서두 고지식한 성미때문에 저러시는거야. 필경 저인 그 책을 찾기 전엔 절대로 여길 떠나려 하지
않으실테지.) 불시에 순분의 심장이 남편을 붙잡아야 한다고 울보채며 아프게 들뛰기 시작하였다. 여직껏 남편에게 온넋을 의지하고 남편의 뜻을 고스란히
따르기만 해온 그였다. 그러나 이 순간만은, 다만 이 순간만은 남편을 향해 《안돼요!》라고 도리를 치고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는 남편을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얄망궂은 위구심이 온몸을 사정없이 짓태웠다. 얼굴을 숙이고 손가락으로 애꿎은 방바닥만 안타까이 허비던 순분은 마침내 주저주저하며 남편에게 말을 떼였다. 《저어… 묻고싶은게 있는데…》 《?…》 남편이 눈길을 들어 안해를 바라본다. 잠시 망설이던 순분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새여나왔다. 《혹시… 우리가 싫어지신건 아닌가요?》 《엉?》 너무도 뜻밖의 소리였던지 남편은 대번에 덩둘해지고말았다. 순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떻게 말도 안되는 그런 소리가 자기 입에서
서슴없이 튀여나올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놀라웠다. 수다스러운 이웃들에 대한 반발심에서였던가 아니면 무정한 남편에 대한 토라진 마음에서였던가.
아무래도 좋았다. 이왕 입을 연바엔 남편앞에서 마음속 고통을 죄다 쏟아놓고싶었다. 울고 강짜를 해서라도 남편을 붙들고싶었다. 순분은 난생처음
남편에게 엇서려는 자기를 느끼고 부끄러워하면서도 다잡기 힘든 충동에 떠밀리워 도담하게 뒤말을 이었다. 《혹시나 딴맘이 계시거든 속시원히 얘기해주세요. 그럼 제 속이 이렇게까지 타진…》 순분의 말끝이 울음기에 잠겨 흐트러지고말았다. 남편은 서러움과 노여움에 해쓱하니 질린 안해의 모습을 어리벙벙해서 바라보다가 어이없는듯
허거프게 웃었다. 《허허 참, 그러니 내가 딴살림이라도 차리려구 그러는것 같다는거요? 허허허…》 남편의 웃음소리는 한동안 그칠줄 몰랐다. 그러던 남편은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술을 한잔 부어 순분에게 권하는것이였다. 《자, 오늘은 당신도 한잔 내오.》 순분은 당황했다. 아직까지 술이라는것을 한번도 입에 대보지 못한 그였다. 못한다고 거듭 도리질했건만 남편이 하도 권하는 바람에 순분은
어쩔수없이 잔을 받아들었다. 술을 먹으면 마음이 커진다지. 이 술 한잔으로 시름을 모두 가실수만 있다면, 이 술 한잔으로 남편의 마음을 돌릴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싶어 순분은 머밋머밋 술 한모금을 억지로 넘겼다. 대번에 얼굴이 홧홧 달고 숨이 차올랐다. 순분이 힘들어하는것을 보고 남편이
얼른 술잔을 넘겨받았다. 《역시 당신은 안되겠구만.》 남편은 이렇게 말하며 남은 술을 단숨에 들더니 너누룩하고 애정깊은 어조로 안해에게 진정을 터놓았다. 《여보, 내겐 당신이상 소중한 사람이 없소. 당신과 아이들 없이 내가 어떻게 살수 있겠소.》 그 말을 듣는 순간 순분은 눈물이 왈칵 솟구쳐올랐다. 툭하고 말이 적은 남편에게서 그런 고백을 들어보기는 처음이였던것이다. 남편의 꾸밈없는
고백은 삽시에 알콜처럼 피줄을 타고 퍼져 번민으로 모대기던 그 녀자의 마음속에 눈물겹도록 감동의 파문을 일으켰다. 순분은 터져나오는 목멘
울음소리를 간신히 누르며 남편의 그 진정에 정신없이 매여달리기 시작했다. 《저도 수영이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알아요. 그래서 이날이때껏 수영이 아버지가 하는 일이라면 군말없이 따르려고 애썼어요. 헌데 수영이
아버지, 이번만은 제 말을 들어주시면 안되겠어요? 함께 귀국해요. 수영이 아버지와 떨어져서 우리끼리 아무리 락을 본들 어떻게 발편잠을 잘수
있겠어요.》 끝끝내 흐느낌소리가 튀여나왔다. 순분은 고개를 떨군채 입술을 물어 흐느낌소리를 죽여가며 서럽게 울었다. 우두커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남편의
얼굴도 침침해졌다. 안해의 애원하는 목소리가 흐느낌소리와 뒤섞여 계속 들려왔다. 《수영이 아버지의 마음을 저라고 왜 모르겠나요. 하지만 수영이 아버지야 여태 조국을 위해서 할수 있는껏 다하시지 않았어요. 수영이 아버지가
어디 먹고 남아서 그 일을 해오셨나요. 그렇다구 우리한테 애국사업을 하라구 따로 돈을 보태준 사람도 없지 않나요. 수영이 아버지가 남들보다 못
먹구 못 입으면서두 조국을 위해 애써오셨다는걸 누군들 모르겠어요. 그런걸 잘 알기에 총련에서도 우리더러 어서 귀국하라구 등을 떠미는게
아니겠어요.… 정말이지 전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총련도 있고 동포들도 많은데 왜 부디 수영이 아버지 혼자서 마지막까지 애쓰셔야 하는건지…
제발 부탁이예요. 이번만이라도 저와 아이들생각을 좀 해주세요.》 순분은 타는듯 한 눈으로 남편을 쳐다보았다. 그러는 안해를 마주 보기가 헐치 않았던지 남편의 눈길이 은신처를 찾듯 향방없이 허둥거렸다. 긴
침묵이 흘렀다. 도간도간 새여나오는 안해의 흐느낌소리를 들으며 돌덩이마냥 굳어져있던 남편은 한참만에야 혼자소리를 하듯 중얼거리는것이였다. 《하긴 내가 아니라도 그 일을 맡아할 사람이야 있겠지. 총련조직에 제기하면 자금문제도 지금보다 수월하게 풀수 있을거구. 아마 내가 가족과
함께 래일 당장 귀국한다 해도 굳이 탓할 사람은 없을게요.》 남편의 목소리는 차츰 무거워졌다. 《아닌게아니라 나도 당신처럼 생각한적이 있더랬소. 그래도 나야 지금껏 조국을 위해 애써오지 않았던가, 그러니 응당 남먼저 귀국할 자격이
있다 하고 말이요. 헌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렇게 생각한 나자신이 철부지로밖에 여겨지지 않더구만.》 순분의 속이 거문고줄처럼 떨려왔다. 마침내 남편이 그렇게 듣고싶었던 진심을 터놓으려 한다는 예감에 가슴이 조여들었던것이다. 그는 온몸을
옥조이며 웅글게 들려오는 남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생각 좀 해보오. 속담에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 아무리 자식들이 부모생각을 한다 해도 어찌 자식들을 걱정하는 부모마음에야
비길수 있겠소? 우리 아이들을 공부시키라고 조국에서 보내주는 교육원조비와 장학금만 놓고봐도 그렇지. 아마 당신은 다 모를게요. 그 돈이 어떤
돈인지…》 불현듯 남편이 더운 숨을 몰아쉰다. 그리고는 흥분어린 어조로 이야기를 계속해나갔다. 《몇해전 정월에 평양에선 수령님의 지도밑에 그해 국가예산초안을 토의하는 내각회의가 열렸댔다오. 아침에 시작된 회의는 밤이 깊도록
계속되였다더군. 오랜 시간동안 일군들과 함께 예산초안의 세부항목까지 하나하나 따져가시던 수령님께서는 재일동포자녀들에 대한 교육원조비와
장학금항목은 왜 없는가고 물으시였다는거요. 한 일군이 그이께 재정형편이 너무 긴장해서 국가예산에는 반영하지 않고 림시외화계획에 따로 넣어
집행하려 한다고 말씀올렸다오. 전쟁이 끝나 금방 재더미를 털고 일어서던 때였으니 조국의 재정형편이 얼마나 어려웠겠는지는 당신도 짐작이 갈게요.
페허우에 용광로들도 다시 일떠세워야지, 무너진 발전소언제들도 다시 쌓아야지, 관개공사도 하고 주택들도 짓고 학교랑 병원들도 건설해야 했으니
한푼한푼의 자금이 오죽이나 귀했겠소. 그런데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계시던 수령님께서는 장내를 둘러보시며 아니다, 보내주어야 한다, 당장 보내주어야 한다, 우리가 공장 한두개
못 짓는 한이 있더라도 이국땅에서 고생하는 동포들에게 아이들을 공부시킬 돈을 보내주어야 한다고 단호히 말씀하셨다는게 아니요. 그날 그이께서는
이것은 한두번 보내주고 그만둘 일이 아니라 일본에 우리 동포가 있고 배워야 할 어린이가 있는 한 계속 보장해주어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국가예산에 <재일동포자녀들을 위한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이라는 항목을 새로 내오고 항구적인 사업으로 틀어쥐고나가야 한다고 간곡히 이르시였다는거요.
그렇게 돼서 공화국의 국가예산에는 그 어느 나라에서도 있어본적 없는 해외동포자녀들을 위한 재정항목이 별도로 생겨나게 되였다오.》 비를 맞은듯 젖어들던 남편의 목소리가 격정의 덩어리에 컥 막혀 끊어지고말았다. 순분은 뜨거운것이 남편의 눈구석에 고여있는것을 알아보았다.
목젖너머가 그들먹해왔다. 그토록 남편을 목메이게 한 어버이에 대한 고마움이 심장을 울리며 그의 가슴속에도 여울쳐왔다. 얼마후 남편은 격해진 심정을 감추지 못하며 다시금 말을 이었다. 《여보, 우리에겐 이런 어버이가 계시오. 이런 조국이 있단 말이요. 지난날 우리 처지라는게 어떤거였소. 고향은 있어도 조국이 없어서
조선사람으로 태여난걸 슬퍼하지 않으면 안되던 망국노신세가 아니였소. 그러던 우리한테 지금은 조국이 있소. 어머니라고 심장으로 찾는 은혜로운
조국이 말이요.… 당신 말대로 내가 먹고 남아서 문화재를 수집해온건 아니요. 허지만 조국의 고마움을 생각하면 사람으로서 너무도 마땅한 도리가
아니겠소. 당신이나 내나 조국에 가서 무료교육이랑 무상치료받을 생각에 기뻐하면서두 자식들을 위해 허리띠를 조여매고 고생하는 어머니조국의 그
수고를 과연 얼마만큼이나 생각해봤소?》 불같은 이 물음을 남편은 안해가 아니라 자기자신에게 던지고있는듯싶었다. 남편은 분연히 머리를 흔들며 진심을 토했다. 《아니, 난 도리를 모르는 인간으론 살고싶지 않소. 조국앞에, 사람들앞에 떳떳이 나서고싶소. 당신과 내 아이들이 부끄럼없이 조국땅을 밟게
하고싶단 말이요!》 번열에 타는 남편의 열기가 그대로 자기의 온몸을 활활 불태우는것만 같아 순분은 견딜수가 없었다. 좀전까지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던 서러운
고백들과 애원의 말들은 어느새 썰물마냥 아스라하니 멀어져가고있었다. 남편의 그 뜻과 웅심을 따르기에는 너무나도 힘이 부치는 자기를 한탄하며
순분은 맥빠진 숨을 조심히 모아쉬였다. 잠시 흥분을 묵새기며 숨을 고루던 남편은 다소 가라앉은 어조로 생각에 잠겨 조용히 뇌였다. 《당신도 차츰 알게 될게요. 마음속에 의지할 조국이 있다는게 얼마나 행복한건지… 여보, 우리가 자식들한테 물려줘야 할 가장 귀중한게
뭐겠소? 돈이나 명예 같은걸가? 아니, 난 조국을 생각하는 마음보다 더 크고 귀중한건 없다고 생각하오.》 이렇게 말하는 남편의 얼굴에서는 수난에 절은 이역살이를 치르면서 억세게 자리잡은 신념이 강렬스럽게 내비치고있었다. 남편의 눈빛은 그전보다
더 성숙하고 깊어보였다. 순분은 남편을 붙잡으려던 자기의 욕망이 헛된 꿈이라는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더이상 물으려고도, 항변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도리여
거짓없이 터놓는 남편의 고백을 막상 듣고나니 푸근한 겨울날 밤 숫눈길우에 깔린 달빛을 호젓이 밟을 때처럼 마음이 가분해오는것을 느꼈다. 아이들을 앞세우고 남편과 나란히 조국에 가고싶은 열망은 지금도 변함이 없건만 어찌하여 외진 길을 끝까지 가려는 남편앞에서 이렇듯 더 말을
못하고있는걸가. 순분은 남편이 소중히 심장속에 새겨안고있는 말을 속으로 가만히 외워보았다. (조국! 조국!) 그에게도 조국이라는 말은 결코 수평선에 어른거리는 신기루같이 막연하고 어렴풋한 낱말이 아니였다. 그것은 얼어든 몸과 마음을 녹여주는 봄날의
훈기와도 같은것이였다. 해빛 따사로운 대지에서 남편과 함께 꾸려갈 새 생활이였고 구김살없이 자라날 아이들의 름름한 모습이였다. 그것은 그대로
고마움이였고 따스함이였으며 희망의 설레임이였고 가슴부푸는 래일이였다. 하기에 아무리 남편과 헤여지기 싫고 함께 귀국하고싶은 마음이 간절했어도 그
모든 욕념들은 남편이 절절히 상기시켜준 조국에 대한 감정보다 더 앞에 놓일수가 없었다. 허우룩하면서도 개운한 체념이 순분의 마음속에 저녁노을처럼 내려앉았다. 어쩔수 없는 남편이였다. 가정을 이룬 첫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렵고 고달픈 일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곁눈 한번 팔지 않고 외곬길을 꿋꿋이 걸어온 남편이였다. 남편을 원망하며 남몰래 흘린 눈물은 얼마였던가.
허나 마음 한켠으로는 자랑스럽기도 하였다. 어지러운 이 일본땅에서 돈이면 다라고 생각하는 속물들을 혐오속에 볼 때마다 순분은 뜻과 기개를 굽히지 않고 도고하게 살아가는 남편을 돋보지
않을수 없었다. 문득 어릴 때 본 옹달샘이 떠올랐다. 그 옹달샘은 순분이 간직하고있는 유일한 고향추억이였다. 나지막한 흰 바위아래 차랑차랑 넘쳐흐르던 맑은
샘물, 그우에 동동 떠있던 예쁜 표주박 하나… 새끼손가락이나 겨우 드나들 조그마한 샘구멍으로 그침없이 퐁퐁 솟구치던 파아란 샘물은 얼마나
신비로웠던가. 겉보기엔 작고 소박한 샘이였건만 퍼내고퍼내도 마를줄 모르고 퍼낼수록 더 정가로워질수 있었던건 필경 땅속깊은 곳에 크나큰 원천을
품고있었기때문일테지. 남편이 말한 조국을 생각하는 마음도 바로 그런것이 아닐가 하고 순분은 생각했다. 고즈넉한 정적이 방안에 깃들었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밤새의 울음소리가 부부의 생각을 조심스러이 이어주는데 불쑥 남편이 다가와앉더니 안해의
자그마한 손을 다정히 감싸쥐는것이였다. 《미안하오. 당신 나한테 시집와서 가슴아픈 일도 많았구 눈물도 속으루 많이 흘렸지. 어찌겠소, 나 같은 사내를 만난것두 다 연분이겠는데.
허허…》 남편의 인정어린 말을 들으니 금시 눈앞이 부옇게 흐려왔다. 순분은 남편의 후더운 손길에 손을 맡긴채 얼굴을 붉히며 나직이 말했다. 《제가 눈물흘리구 속썩이는것두 다 수영이 아버지가 있으니 믿고 그러는거지요.》 눈물이 밴 안해의 목소리는 행복하게 울렸다. 남편의 믿음어린 응대가 뒤를 따른다. 《고맙소!》 얼마뒤 식사를 마친 남편은 웃방으로 올라갔다. 조금 지나서 상을 거둔 순분이 그리로 올라가보니 남편은 평소의 습관대로 앉은뱅이책상우에
고려청자를 올려놓고 바라보고있었다. 고요한 흥분이 우렷이 떠오른 남편의 눈에 청자의 푸르른 빛이 은은히 비껴돌았다. 밤도 깊었는데 쉬여야 하지
않겠는가고 순분이 걱정하자 남편은 이런 말을 하는것이였다. 《별스럽게 오늘따라 할아버님생각이 자꾸 나서 그러오. 그날 나더러 자신의 종아리를 치게 하시던 할아버님모습이 눈에서 떠나지 않는구만.》 종종 안해에게도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주군 하던 남편이였다. 그 심정이 리해되여 순분은 말없이 남편의 곁에 앉았다. 《얼마전에 인편으로 들으니 할아버님은 지금도 정정해계신다는구려. 당신이 조국에 가면 여기서 내가 수집한 민족문화재들을 할아버님께 꼭 가져다
보이요. 그리고 할아버님께 전해주오. 이 막내손자는 비록 이역땅에 있어도 할아버님이 쥐여주시던 그 회초리를 항상 마음속에 안고 산다고 말이요.》 남편의 우묵한 두눈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순분의 눈가에도 이슬이 떠돌고있었다. 잠시후 남편은 여전히 고려청자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채 버릇처럼 외우는것이였다. 《여보, 이런 때가 내겐 제일 좋구만. 금덩이나 진주보석을 본다 한들 이렇게 고려청자 하나를 바라볼 때만큼이야 흐뭇하겠소. 하하하…》 시름없이 웃는 남편의 얼굴은 어린애처럼 순진하고 선량해보였다.… 며칠후 순분은 아이들을 데리고 귀국의 길에 올랐다. 남편이 수집해온 민족문화재들이 그가 가지고 가는 짐속에 들어있었다. 기쁨과 감격, 석별의 열파가 귀국선이 떠나는 니이가다항에 끓어넘쳤다. 부두를 뒤덮은 오색테프의 물결들과 사람들의 머리우로 꽃바다인양
떠오르는 공화국기발들, 드높이 울려퍼지는 취주악에 맞추어 동포들이 목청껏 부르는 《김일성장군의 노래》… 멀어져가는 부두를 향해
손나팔을 대고 웨치는 사람들도 있었고 떠나가는 귀국선을 바래우며 공화국기를 내흔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부모의 유골함을 가슴에 품고
이역의 하늘가를 바라보며 눈물짓는 처녀애의 모습도 보였다. 허나 배에 오른 순간부터 순분의 눈길은 허둥지둥 한곳으로만 내닫고있었다. 남편이 있는 곳이였다. 순분은 남편의 모습을 잠시라도 놓칠가봐
란간을 꼭 부여잡고 부두쪽에 눈그루를 박은채 돌미륵마냥 움직일줄을 몰랐다.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들틈에 끼워 발돋움하며 가족을 바래우는 남편의
웃는 얼굴이 점점 눈앞에서 멀어져만 갔다. 수영이와 수남이가 울먹거리며 아버지를 찾고 또 찾는다. 《아버지! 빨리 와요-》 《기다릴게요-》 순분이도 아이들을 따라 남편을 소리쳐 불렀다. 그렇지만 눈물에 목이 잠겨 흐느낌소리만 새여나올뿐이였다. 차츰차츰 희미한 점으로 사라져가는
남편의 모습을 애타게 더듬어찾으며 순분은 마음속으로 거듭 외우고있었다. 《기다리겠어요, 기다리겠어요. 수영이 아버지!》 어느덧 뭍은 수평선너머로 잦아들었어도 순분은 아이들과 함께 갑판에서 떠날줄 몰랐다. 허전해진 부두가에 우두커니 서있다가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며 돌아서는 남편의 모습을 그도 아이들도 볼수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