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2 회)
4. 인생을 다스리는것 차집안을 둘러보던 처녀가 가루베를 알아보았는지 이쪽으로 걸어온다. 랑만기가 넘쳐흐르던 여느때의 모습이 아니였다. 따뜻하고 발랄한 광채가
흘러나오던 처녀의 두눈은 생기를 잃은채 피로와 번민에 잠겨있었고 맑은 웃음이 피여나군 하던 입가에도 설음의 그늘이 어둡게 비껴있었다. 처녀의
얼굴은 가까스로 빛을 내는 별마냥 창백하고 희미해보였다. 그래도 예쁘장한 처녀였다. 희고 반드러운 뺨을 가리운 검은머리발도 예뻤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물결치는 봉긋한 앞가슴도 예뻤다. 저도 모르게 가루베는 처녀의 곤색치마자락을 타고 드러나군 하는 다리의 고운 선을 눈여겨보다가 헛기침을 하며 눈길을 돌려버렸다. 처녀가 다가오자 가루베는 너스레를 부리며 반겨맞았다. 《허, 이거 히사꼬양이 들어서니 차집의 운치가 한결 살아나는것 같구만.》 가루베는 흐무러진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처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잠시 망설이던 히사꼬가 가루베의 맞은켠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상처입은
자존심때문이여선지 처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가루베는 능청스러운 눈길로 처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무렴, 이런게 바로 돈의 힘이라는거야. 꿈으로 인생을 채워가는 이 천진란만한 처녀야, 가난뱅이에겐 선택할 권리가 없다는걸 인젠
알겠느냐? 돈은 사람들에게 존경할걸 명령한다는 진실을 인젠 알겠는가 말이다!) 흐물흐물 웃음집이 흔들거리는것을 겨우 참으며 가루베는 짐짓 딴전을 부렸다. 《이거 정말 반가운데. 우리가 만난지 몇달 되던가. 이렇게 반가운걸 보니 혹시 내가 히사꼬양한테 남다른 감정이라도 품고있는게 아닌지
모르겠소. 흐하하…》 가루베가 느끼하게 껄껄거리자 히사꼬는 오한이라도 만난듯 몸을 옹송그렸다. 처녀의 앞에 차가 놓여졌다. 그래도 히사꼬는 긴장으로 굳어진 몸을
좀처럼 풀지 않는다. 처녀를 눙쳐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가루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참, 지금도 계속 조선도자기를 연구하고있겠구만. 고상한 취미요. 그래서 그런지 히사꼬양을 볼 때면 산중에 숨어있는 사찰의 분위기라고
할가. 하여튼 그런게 느껴지거든. 흐흐…》 속이 텅 빈 가루베의 웃음소리가 처녀를 건드렸다. 교회당의 종소리같이 끈덕지고 위선적인 그 웃음소리가 듣기 괴로웠던지 야무지게 맺혀있던
처녀의 입술사이로 마침내 가느다란 소리가 새여나왔다. 《저, 용건을 말씀해주실수 없겠는지요?》 랭기가 느껴지는 어조였다. 그러면서도 이른 서리를 맞은 나팔꽃마냥 생기를 잃어버린 목소리였다. 가루베는 뚱뚱한 배를 쑥 내밀고 소리없이
웃다가 뜨직뜨직 본론을 꺼냈다. 《용건이라는게 별다른건 아니고 아까 전화로도 이야기했지만 히사꼬양의 동생문젤 의논해보자는거요. 도오뗀이라고 했던가, 남동생이름이?… 일이
참 딱하게 됐더구만. 의학대학입학시험에서 합격이 되였는데도 가정사정때문에 포기했다면서? 거참, 히사꼬양의 집안에 그런 괴로움이 있다는걸 아니 내
마음이 다 쓰리더라니까. 생각 같아선 내가 직접 나서서 도오뗀의 학비를 대주고싶지만 공연히 히사꼬양이나 집안사람들의 자존심을 건드릴것 같아서
그러지도 못하겠구… 그래 좀 궁리해봤는데 도꾜의 어느 사립병원이나 의학연구단체에 부탁해서 동생의 후원단체로 나서게 하면 어떻겠소? 이전에 내가
의사노릇을 한적도 있는지라 그 계통에 연줄이 좀 있거든. 게다가 동생은 똑똑하고 학업성적도
우수하다니 내 얼굴이 깎일 일도 없을거구. 어떻소, 히사꼬양의 생각은?》 히사꼬는 대답이 없었다. 잠자코 차종만 만지작거리는 처녀의 손등에서 파란 정맥이 가늘게 뛰고있었다. 가루베는 처녀의 그 모양을 능글거리며 지켜보다가 탄식조로 뒤를 달았다. 《공부라는것도 다 때가 있는건데 한창 배워야 할 애가 가난탓에 꿈을 포기하다니, 쯧쯧… 가슴아픈 일이지. 그애의 전도를 위해서도 그렇구
집안을 추세우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대학공부는 시켜야 하지 않겠소. 좀 고달프긴 해도 의사라는게 그만하면 수익은 괜찮은 직업이지. 동생이 의대를
나오면 가정형편도 한결 펴일게요.》 《동정》과 《친절》이 끈적끈적하게 묻어나오는 말이였다. 그래도 히사꼬가 한마디 응대도 하지 않자 가루베의 얼굴가에 흡족해하는 기색이
넘실거렸다. 처녀의 침묵을 제나름으로 어림짐작한것 같았다. 《흐흐… 하기야 친누이의 생각이 어련할라구. 그럼 동생일은 그리하는걸로 하지.》 그 말에 히사꼬가 반발하듯 고개를 쳐들었다. 가루베를 쳐다보는 처녀의 두눈에서 싸늘한 의문과 경계의 빛이 튀여나왔다. 처녀는 미심쩍어하는
어조로 불안한 속마음을 내비쳤다. 《어째서 저에게 그런 호의를 베푸시는지 알고싶습니다.》 히사꼬의 의문에 가루베는 히벌쭉이 웃더니 느적느적 대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하는것이였다. 《허- 이미 말했던것 같은데, 단지 히사꼬양에 대한 호감때문에 나섰다구. 사실 난 처음 만난 순간부터 히사꼬양에게서 남다른 인상을
받았더랬소. 사색하는 일을 고역처럼 여기는 요즘 젊은이들과는 영 딴판이거던. 입만 벌리면 돈소리나 하고 군입질하듯 성욕이나 채우는걸 쾌락의
전부로 아는것들을 보면 가소롭다 해야 할지, 측은하다 해야 할지. 헌데 히사꼬양은 그런 부류의 천박한 젊은이들과는 취향이 다르더란 말이요.
인간적인 감정들이 랭각되여가는 이 황막한 세상에서, 더군다나 각박한 생활난에 시달리면서도 선과 아름다움을 두고 감동할줄 안다는게 어디 쉬운
일이요. 아마 그래서 내가 히사꼬양을 더 좋아하는것 같아. 흐허허…》 가루베는 연신 능글대며 병아리를 덮치려는 먹구렝이마냥 슬금슬금 처녀에게로 조여들었다. 《보다싶이 나라는게 이러루한 사람이요. 사람이건 물건이건간에 한번 마음이 끌리면 좀체 자길 걷잡지 못하거던. 터놓고 말해 근간에 난
히사꼬양이 내 방조자로 되여줄순 없을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보군 하오. 히사꼬양처럼 지성과 교양을 겸비한 처녀가 내곁에 있어준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니겠소. 흐흐… 그리만 된다면 나만 리를 보는게 아니지. 히사꼬양도 지금보다는 훨씬 많은 보수를 받게 될게요. 히사꼬양, 말이
난김에 이 자리에서 내 조수가 되겠다고 약속해줄순 없을가?》 가루베의 요청은 속에 품었던 욕망을 그대로 내보인것이였다. 단지 향악보를 찾는 일에 히사꼬를 써먹자는 타산때문만이 아니였다. 히사꼬 같은
똑똑한 일본처녀가 조선인을, 그것도 자기가 제일 증오하는 리경식을 따라다니다니. 문화재분야에서의 권위로 보나 재력으로 보나 대관절 자기가 그
조선인보다 깔리우는것이 무엇인가. 허영에 찬 가루베의 자존심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일이였다. 게다가 이 처녀는 아릿다운 용모까지
가지고있지 않는가. 가루베의 추근추근한 눈길이 히사꼬의 아래우를 탐욕스레 더듬었다. 고개를 숙인채 가지런히 무릎을 모으고 앉은 처녀의 생신한 육체가 그의
눈앞에 있었다. 백자기의 겉면처럼 희고 고운 살결과 바다풀인양 싱싱한 머리칼, 백설같이 하얀 브라우스에 보기 좋게 감싸여있는 처녀의 젊고 건강한
앞가슴… 처녀가 숨을 들이그을 때마다 들떠오르군 하는 아름다운 젖가슴의 륜곽이 가루베의 거슴츠레해진 눈을 찌르고들었다. 그만에야 온몸의 피가
화끈해왔다. 녀성편력에서도 《호리야》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해온 호색한에게 있어서 히사꼬의 모습은 지글거리는 수욕을 한껏 불러일으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가루베의 뭉실뭉실한 몸에서 풍겨오는 이상한 열기를 감촉한듯 히사꼬가 무릎우에 놓인 치마자락을 불안스럽게 쓸어내린다. 그러는 처녀를 지켜보며
가루베는 음충맞게 느물거렸다. 《리선생에게는 미안스러운 일이라는걸 나도 리해하오. 허지만 그의 형편에서 아무리 히사꼬양을 돕고싶어도 한계가 있다는거야 자명한노릇이
아니요. 모름지기 히사꼬양이 곤궁에서 벗어날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기꺼이 동의해나설거요. 안 그런가?》 히사꼬의 두볼에서 피기가 점점 사라져갔다. 대답을 기다리는 검측스러운 눈길이 거마리마냥 처녀의 얼굴에 달라붙어 떨어질줄을 몰랐다. 마침내
처녀가 고개를 쳐들며 확인이라도 하려는듯 나직이 묻는것이였다. 《그러니 말씀의 뜻은 도오뗀을 도와주시는 조건부로 제가 리선생님의 협회에서 나와야 한다는…》 가루베는 가슴이 덜컹했다. 히사꼬가 자기의 배속을 환히 들여다보고있었던것이다. 《선량한 자선가》는 당황함을 숨기느라 애쓰며 처녀를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괴로움과 번민에 타는 처녀의 눈길이 따져묻듯 자기를 곧바로 쳐다보고있었다. 민감한 처녀였다. 이런 처녀와는 쓸데없이 에두를 필요가
없는것이다. 가루베는 넉살좋게 입가에 친절을 게바르며 넌지시 본론으로 넘어갔다. 《하하… 역시 히사꼬양과는 대화를 나누기가 즐겁거던. 사실 그리 해준다면 나로서야 더 바랄게 없지. 허나 인지상정을 어찌 두부모 베듯 할수
있겠소. 당분간은 리선생곁에 그대로 남아있어도 좋소. 대신 내 일을 좀 도와주었으면 하오. 뭐 별건 아니고 협회에 있으면서 <조선향악보>에 대한
정보가 입수되면 곧바로 나한테 알려달라는거요. 난 남의 수고를 몰라보는 사람이 아니요. 구태여 히사꼬양에게 긴 설명은 필요없을테지.》 호인같은 미소를 간판처럼 붙이고 하는 말이였어도 가루베의 어조에서는 자기 말을 따르는외에 별도리가 없을거라는 장담이 짙게 내풍기고있었다.
그러나 다음순간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히사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실례입니다만 거절하겠습니다.》 뜻밖의 대답이였다. 가루베의 퉁방울눈이 안경뒤에서 올챙이처럼 불어났다. 히사꼬는 눈길을 내리깐채 더 말이 없었다. 그러는 처녀에게서 오연한
랭기가 풍겨왔다. 금시 얼음으로 변해버린 처녀를 멍청히 바라보던 가루베는 아래입술을 삐죽이 내밀며 쓴웃음을 지었다. (흥, 살아가는 일의 태반을 공상으로 메꿔가는 이런 풋내기들이야 인생을 있는 그대로 볼줄 모르지. 어리석은것 같으니…) 가루베는 손가락에 낀 다이아몬드반지를 진지하게 들여다보다가 제법 인생의 년장자연한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히사꼬에게 설교를 펼쳤다. 《음, 알만 하오. 리선생때문에 그러는거겠지. 아무렴, 사람이 도의를 중히 여길줄 알아야 하구말구. 하긴 융통수는 좀 부족해도 리선생한테
끌리는 점이 있는건 사실이요. 그만하면 일가견이 있는데다 뜻도 범속하지 않고 지조가 강한 사람이랄가. 히사꼬양 같은 젊은이들로선 관심을 가질만도
하지.… 아무튼 히사꼬양의 그 청춘이 부럽소. 비록 감정이 턱없이 과장되고 생활을 온통 시처럼 감수하는 시절이긴 해도 자기가 좋아하는대로 세계를
마음껏 그려볼수 있으니까. 나 역시 그 나이땐 숨을 쉬면 자연히 페속에 산소가 들어가듯이 자신에게도 얼마만치의 행복이 저절로 차례지게 될거라고
생각했더랬지.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가면서야 세상은 배고파하는 사람들을 존경하지 않는다는걸 깨닫게 됐소. 사실상 지조요, 량심이요 하는게 인간의
실생활에선 아무런 소용도 없더란 말이요. 그런건 작가나 철학자들이 추구하는 하나의 환영이라고나 할지. 히사꼬양도 시간이 흐르면 차츰 깨닫게
될거요. 인간생활에선 만가지 도의나 명분보다 한쪼각의 빵이 더 귀중하다는걸 말이요. 그러고보면 인생이라는건 결국 <할수 없지>하는데 귀착되는것
같아. 흐허허…》 덧없는 인생에 도통한 도사인양 허구픈 웃음을 흩뿌리던 가루베는 요긴한 말이라도 하려는듯 히사꼬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히사꼬양, 이 년장자의 조언을 새겨듣기 바라오. 이 세상은 정의요, 사랑이요, 량심이요 하는게 황금보다 더 소중하다고 믿는 가난한
사람들로 꽉 차있소. 그런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면 지어 처절하다는 생각까지 들군 하지. 허나 아무리 소중하다고 해도 그런걸 위해 배까지
곯아야 할 리유가 대체 뭐겠소. 인간이 불행에 빠지지 않으려면 싫든좋든 현실을 인정해야 하오. 인생을 다스리는건 애정이나 리상이 아니라 바로
돈이라는걸 말이요.》 《인생의 철리》를 력설하는 가루베의 훈시는 자못 엄숙했다. 히사꼬가 처음 보기라도 하듯 가루베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가늘게 좁혀진 처녀의
눈시울이 파르르 떨린다. 경악과 의분, 혐오의 불꽃이 처녀의 두눈에서 세차게 튕겨나왔다. 얼마후 히사꼬는 가루베의 낯을 외면하며 낮으나 랭랭한
어조로 잘라말했다. 《전 이손저손으로 아무런 지조없이 떠돌아다니는 돈처럼 살고싶지는 않습니다.》 능청대던 가루베의 얼굴에 한줄기 노기가 스쳐갔다. 닭알껍질만큼이나 연약해보이던 처녀에게 이렇게까지 옹골찬 속대가 들어있을줄이야. 심사가
뒤틀렸는지 입귀를 실룩거리며 킁킁 코그루만 박던 가루베는 초조히 담배 한대를 꺼내여 붙여물었다. (요것 봐라. 이렇게 그냥 호인행세만 하다간 애숭이한테 망신이나 당하고말겠는걸. 흠, 어디 두고보자.) 잠시 히사꼬를 노려보던 가루베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거 섭섭한데. 그래도 난 히사꼬양을 생각해서 흉금을 터놓고 한 말인데. 좋소, 인간의 지조나 량심이 돈보다 더 중하다는 고결한 그
견해에 경의를 표하는바요. 하다면 하나 묻기요. 이러나저러나간에 히사꼬양은 일본처녀겠지? 정녕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자기 조국인 일본부터 먼저
생각하는게 떳떳한 지조요, 량심일듯싶은데. 문화재경우도 그렇지 않소. 리경식이 같은 사람은 조선인이니 제 민족의걸 찾자고 모지름쓰는게 당연하지만
우리 일본인들로서야 경위가 어떻든지간에 선배들의 피땀이 묻은 식민지시절의 전리품들을 응당 자랑스럽게 여겨야 하지 않을가. 결코 누구에게도
돌려줄수 없는 일본의 재부이고 영광이거던. 헌데도 히사꼬양은 조선인들에게 동조하면서 선배들의 명예에 먹칠을 하고 국익을 해치고있으니 과연 이게
일본인의 지조와 량심이 있는 행동인가 말이요? 만일 도오뗀이 이 사실을 안다면 자기 누이를 어떻게 생각할가? 조선인들에 대한 이른바 도의감때문에
친동생의 전도마저 아랑곳하지 않는 누이를 그애가 과연 원망하지 않을가?》 히사꼬의 낯빛이 해쓱해졌다. 동생의 일이 처녀의 마음을 아프게 한것 같았다. 고개를 숙인채 괴로움을 묵새기던 히사꼬는 이윽고 한쪽뺨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맥없이 걷어올리며 구슬프게 말하는것이였다. 《제 동생은 더이상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동생일을 생각하면 저도 슬픕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슬픈건 일본의 현실입니다. 남을 짓밟고 마음에
상처를 남겼으면 진심으로 사죄하는것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죄나 가책은커녕 지난날의 부끄러운 일들을 자랑스럽게 찬미하는 일본사람들을
볼 때면 전 도저히 리해가 가지 않습니다. 묻고싶습니다. 과연 그렇게 하는것이 일본인의 지조와 량심을 지키는 길입니까. 우리가 남들의 인간성과
존엄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누가 우리의 인간성과 존엄을 존중해주겠습니까. 정말이지 낯이 뜨겁습니다. 제가 태여난 조국이 철면피한들의 나라라고
손가락질을 당할 때마다 일본인으로 태여난것이 부끄러워 견딜수가 없습니다.》 가루베의 코구멍이 악에 받쳐 잔뜩 부풀어올랐다. 처녀의 말은 그대로 추상같이 자기를 단죄하던 리경식의 노성으로 뒤울려왔던것이다. 비록
괴로움에 흐려있지만 그 어떤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겠다는듯 도고함을 잃지 않은 처녀의 눈빛에서 가루베는 자기의 기도가 무참히 깨여져나간것을
보았다. (발칙한 년, 네년도 날 <호리야>라고 릉멸하는구나.) 가루베는 퉁겨나온 눈알을 횡포하게 디룩거리며 잡아먹을듯이 히사꼬를 쏘아보았다. 갑자기 손가락이 뜨거워났다. 담배불이 타들어가면서 손가락을
지져놓은것이다. 가루베는 신경질적으로 담배불을 비벼끄더니 비틀어진 입술에 비웃음을
띠우며 이죽거렸다. 《허- 대단해. 히사꼬양이 이렇게 자기 조국까지 타매할만큼 코가 센줄은 몰랐는걸. 허나 충고하건대 세상만사를 너무 장담하고 나설 필요는
없는거요. 모든 일에는 다 낮과 밤의 량측면이 있는 법이니까. 례컨대 히사꼬양을 놓고봐도 그렇지. 리경식의 일이라면 그렇게도 발벗고 나서는
히사꼬양이건만 때로는 그 사람의 잔등에 칼을 박기도 했으니 참 사람의 일이란 얼마나 오묘한가 말이요.》 순간 히사꼬의 얼굴이 조각인양 굳어져버렸다. 《무슨 말씀이세요?》 크게 뜨인 처녀의 두눈이 아연함에 질려 가루베를 마주보았다. 가루베가 심술궂게 웃었다. 자기에게 면박을 준 히사꼬에게, 아니 그보다는 리경식에게 앙갚음하고싶은 사나운 충동이 가슴속으로 들물마냥
쓸어들었다. 가루베는 순간이나마 찾아온 복수의 기회를 한껏 즐기고싶었다. 하여 그는 처녀에게 대답할 대신 놀라움과 의혹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이는
히사꼬를 흐물흐물 구경하며 천천히 차종을 들어 입에 가져다댔다. 그러는 그의 두터운 금테안경속에서 조롱하는듯 한 눈빛이 춤을 추고있었다. 힘겨운 침묵이 흘렀다. 한동안이 지나서야 차를 다 마신 가루베는 느릿느릿 수건을 집어 입을 훔쳤다. 그러더니 숨을 죽인채 자기를 주시하는
처녀에게 느물대며 입을 여는것이였다. 《아직 모르는게지. 히사꼬양이 존경하는 그 리선생이 오사까에 갔다가 왜 헛물을 켰는지. 박상열이라고 기억날텐데. 고서점을 운영한다는
리선생의 그 친구말이요. 명색이 친구라지만 기실 박상열은 동상이몽하는 사람이요. 이를테면 리선생의 경쟁자랄가. 그 사람이 이번에 오사까에 가서
향악보를 놓고 리씨와 대판 암투를 벌렸다더군. 나중엔 일이 틀려지니까 야꾸자들을 시켜서 리씨한테 테로까지 가했다던지… 허, 다된 밥에 재를
뿌린셈이지. 그통에 리씨는 거의 손에 넣었던 향악보를 놓쳐버리구 물우에 그림그린 격이 되였다는거요. 덕분에 어부지리는 내가 보았지만. 흐흐…
헌데 참 놀랍더구만. 리선생이 향악보때문에 오사까에 갔다는걸 박상열에게 대준 장본인이 다른 사람도 아닌 히사꼬양이라니 말이요.》 《믿어지지 않는군요. 어쩜 그럴수가…》 히사꼬의 떨리는 말이였다. 터져나오려는 웃음때문에 목구멍이 간질거리는것을 겨우 참으며 가루베는 계속 빈정거렸다. 《그러니 리선생이 아직 내색을 안한게로군. 놀랍기로야 그 사람이 더할테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더니 히사꼬양에게서 뒤통수를
얻어맞을줄이야 꿈엔들 생각했을라구. 모름지기 요즘 리선생은 배신감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할게요.》 가루베는 처녀의 얼굴빛이 백지장처럼 하얘지는것을 안경너머로 흡족해서 지켜보고있었다. 《아, 진정하오. 물론 히사꼬양으로서야 본의아닌 실수였겠지. 정직한 사람은 정직한만큼 잘 속는 법이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리씨의 실망이
여북하겠소. 향악보를 찾으려고 귀국까지 미루어가면서 뛰여다닌 사람이 아니요. 아마 다시는 히사꼬양에게 속을 주지 않을게야. 더군다나 히사꼬양은
조선인들이 불구대천의 숙적으로 간주하는 일본의 한 처녀가 아닌가.》 히사꼬가 강잉히 머리를 흔들었다. 《리선생님은 결코 그런분이 아닙니다!》 《흐하하하…》 가루베는 밭은 목을 제끼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고통에 몸서리치는 히사꼬를 보니 십년 묵은 체증이 조금이나마 꺼져내리는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리경식에 대한 믿음을 끝끝내 버리지 않는 처녀가 가증스럽기 그지없어 가루베는 악의에 찬 웃음을 미친듯이 뿜어댔다. 한참만에야 가루베는
벌겋게 짓물린 눈구석을 문지르고나서 심술사납게 처녀를 시까슬렀다. 《실로 눈물겹군. 하긴 서로 찍어누르려고 날치는 이 쟝글사회에서 타산없이 쏟아붓는 그런 믿음이나 순정은 어찌 보면 존경할만 한 가치가
있는지도 모르지. 허지만 이보오, 히사꼬양. 혹 리씨가 이번일을 용서한다쳐도 어차피 그는 일본을 떠날 사람이 아닌가. 그래 그 사람의 마음속에
히사꼬라는 한낱 일본처녀가 어느만큼이나 차지하고있을것 같소? 그는 오직 자기 조국 하나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요. 지금은 쓸모가 있으니까 일본처녀를
리용하고있지만 필경 귀국하고나면 씻은듯이 잊어버릴걸. 헌데도 히사꼬양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런 조선인을 따르겠다니 쯧쯧…》 가루베는 참으로 딱하다는듯 혀를 털었다. 히사꼬의 눈가에 가랑가랑 눈물이 맺혀돌았다. 참기 어려운 분함과 서러움이 처녀의 얼굴을
짓태우고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다시금 가루베가 음침하게 능글거렸다. 《너무 락심할건 없소. 인간은 자기의 행복을 위해 열번이고 백번이고 다시 선택할 권리가 있거던. 대체 아무 뜻도 없는 도의니 량심이니 하는
말에 인생을 얽매일 까닭이 뭔가 말이요. 내가 딴속이 있어 이런 권고를 하는게 아니요. 무엇보다도 같은 일본인으로서 히사꼬양의 난감한 처지를
동정해서 이러는거요. 부디 현실적으로 판단하기 바라오. 히사꼬양의 립장으로서야 응당 부모님들과 동생부터 생각해야지. 리경식은 히사꼬양에게
아무것도 줄게 없지만 난 많은것을 해줄수 있다는걸 알아야 해. 그러고보면 히사꼬양이 이 가루베 신조를 알게 된것도 하늘이 점지해준 연분일런지
몰라. 흐흐흐…》 가루베의 끈적끈적한 눈길이 처녀의 몸을 또다시 더듬적거린다. 히사꼬가 살을 떨며 일어섰다. 감출길 없는 혐오의 불꽃이 처녀의 두눈에서
일었다. 《저에겐 그런 동정이 필요없습니다.》 히사꼬는 불같이 이 한마디를 내쏘고는 자리를 떠났다. 《흥, 미련한것. 그렇게 한사코 리경식이를 쫓아다니다간 보기 좋게 신세를 망치고말걸!》 악에 치받쳐 씨벌여대는 가루베의 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다. 처녀는 비렬한의 마수에서 순간이라도 빨리 벗어나려는듯 숨가삐 차집을
나서버렸다.… 히사꼬는 정신없이 반달음을 놓기 시작했다. 어디로 발길이 향하는지 그자신도 몰랐다. 그저 온몸이 자기의 육신같지 않게 덜덜 떨려나기만
할뿐이였다. 찌물쿠던 하늘에서는 땅거미와 함께 밀려든 구름이 가랑비를 뿌리고있었다. 가로세로 비스듬히 내리는 가랑비가 처녀의 이마전이며 두뺨에 어지러이
흩뿌려지군 했다. 하건만 처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머리며 옷이 비물에 젖어들고 발길에 뭔가 채워 비칠거리면서도 허겁지겁 그냥 내걷기만 했다. 비웃음을 띤 가루베의 얼굴이 눈앞에서 사라질줄 몰랐다. 《인생의 철리》를 떠벌이던 가루베의 역겨운 소리가 아직도 귀가에서 어지러이
맴돌아쳤다. 인생을 다스리는건 돈이라구? 열물마냥 쓰거운것이 치밀었다. 돈을 긁어모으고 써버리는것외에는 아무런 정신적인 리상도, 인간적인 감동도
없이 살아가는게 과연 행복일가? 남들의 피땀으로 배를 기름지으고 남들의 눈물로 환락을 누리는게 기쁨의 전부라면 그런 삶이야말로 짐승과 다를게
뭐란 말인가. 그래도 명색이 문화재전문가라는 가루베가 어떻게 그런 시정배의 소리를 후배앞에서 거리낌없이 할수 있을가? 후배가 그렇게까지
보잘것없이 보였을가? 가루베에게는 자기라는 처녀가 돈 몇푼을 위해 아무 곳에서나 웃으며 옷을 벗어주는 길가의 창녀처럼 비쳐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모닥불을 뒤집어쓴것처럼 얼굴이 홧홧해왔다. 무슨 정신에 자기가 가루베를 만날 결심을 했었는지 스스로도 아연하기만 했다. 애오라지 동생때문이였다. 원하지 않던 곳에서 뜻하지 않게
내뻗친 손길이 께름했지만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소중했기에 히사꼬는 별수없이 용단을 내렸던것이다. 하건만 가루베는 남의 불행으로 제 배를
채우려는자였다. 그런자에게 한가닥이나마 기대를 걸었던 자기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걸음마다 수치를 씹으며, 걸음마다 자신을 저주하며 히사꼬는 발길이 닿는대로 걷고 또 걸었다. 《빌어먹을! 눈이 멀었어?》 처녀와 부딪칠번 한 행인 하나가 버럭 역정을 내는 소리였다. 히사꼬가 걸음을 멈추고 급급히 사죄했다. 《미안합니다.》 지나쳐가는 행인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있던 히사꼬는 문득 자기가 울고있다는것을 깨달았다. 땀과 비물이 흘러내리는 두볼로 눈물이 줄줄이
흘러내리고있었던것이다. 처녀는 가슴속에서 새여나오는 이상야릇한 흐느낌소리를 들으며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보니 자기가 지금 찌요다구로 들어가는 어구에 서있지 않는가. 어째서 저도 모르게 이리로 발길이 향했던가? (그래, 리선생님의 친구라는 사람이 여기서 살고있다고 했었지. 찌요다구의 《구다라서림》… 그날 박상열이라는 그 사람이 자기소개를 하면서
분명 그리 일렀어.) 박상열이라는 이름이 되살아나자 다시금 처녀의 가슴이 활랑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봐야 가루베의 말을 도저히 믿을수 없었다. (리선생님에게 그런 친구가 있다니? 어떻게 친구라는 사람한테서 테로까지 당할수 있을가? 참말 친구가 옳긴 옳을가? 혹시 내가 그 사람의
속임에 넘어간거나 아닌지?…) 다음순간 히사꼬는 도리를 저었다. (아니. 확실히 리선생님의 친구분이였어. 내가 박상열이라는 이름을 꺼냈을 때 선생님이 얼마나 반가와하셨다구. 그런 친구가 제 민족을 위해
애쓰는 리선생님의 일에 재를 뿌렸다니 그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람! 틀림없이 그 철면피한이 꾸며낸 말일거야. 가루베가 제 목적을 이루기 위해
황당한 거짓말을 꾸며낸게 분명해.) 히사꼬는 그렇게 믿고싶었다. 그러나 백에 하나 가루베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박상열이란 사람이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이고 그런 사람에게
속을 준 자기의 경솔함때문에 리선생이 곤경에 빠진것이 사실이라면? … 상상만 해도 속이 떨려왔다. 정녕 그리되였다면 어쩌나 하고 생각하니 온몸의 피가 일시에 빠져버리는듯싶었다. 처녀는 피나게 입술을 깨물며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아니! 있을수 없는 일이야. 절대로 그럴수는 없어!) 한시바삐 거짓을 까밝히고싶었다. 박상열을 만나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찬 가루베의 너울을 속시원히 벗기고싶었다. 히사꼬는 세차게 방망이질하는
가슴을 부여안고 또다시 걸음을 다그쳤다. 그가 《구다라서림》앞에 이른것은 늦은저녁무렵이였다. 고서점은 이미 닫겨있었다. 뒤로 돌아가 초인종을 누르니 일여덟살쯤 된 총각애가 나와
아침에 나간 아버지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고 말하는것이 아닌가. 히사꼬는 삽시에 맥이 풀리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총각애가 앞에 없다면 금방이라도 주저앉아버릴것만 같았다. 허나 그대로 돌아갈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처녀의 가슴이 너무도 졸아붙어있었던것이다. 어떻게든 이밤으로 박상열을 만나야 한다는 일념에 처녀는 총각애가 문을 닫고 들어간 뒤에도
한참동안이나 마당가에서 서성거렸다. 가랑비는 여전히 지꿎게 내리고있었다. 하지만 이미 온몸이 호졸곤히 젖어있었던지라 처녀는 굳이 비를 그을념을 안했다. 그렇게 반시간가량
기다렸을 때였다. 어둠속에서 흥얼거리는 소리가 가까와오더니 우산을 든 사나이 하나가 비청걸음을 하며 마당으로 들어서는것이였다. 어지간히 취한
모습이였다. 사나이의 코노래가 귀에 익어 가만히 들어보니 리선생에게서 몇번인가 들었던 《아리랑》이라는 조선민요였다. 속이 후드득 떨렸다. 마침내 집주인이 나타났다는것을 처녀는 육감으로 알아차렸다. 히사꼬는 긴장에서 오는 경련을 느끼며 총총히 사나이앞으로
나섰다. 《저, 실례지만 박상열선생님이 아니십니까?》 《뉘시오?》 거나한 목소리와 함께 우산이 제껴졌다. 집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사나이의 모습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오달진 자태, 동그란 얼굴, 테가
굵은 안경속에서 깜빡거리는 자그마한 눈… 틀림없이 협회에 찾아왔던 그 사람이였다. 얼근해진 눈길로 처녀를 건너다보던 사나이도 어리벙벙해서
중얼거린다. 《엉? 히사꼬양이 여길 어떻게?》 한순간에 취기가 사라져버리는듯 기우뚱거리던 사나이의 몸이 말뚝처럼 꼿꼿해졌다. 히사꼬는 선뜻 대답이 나가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맴돌아치던 무수한 말들이 한꺼번에 솟구쳐올라 목을 꽉 메웠던것이다. 얼마후에야 히사꼬는
불덩이같은것을 간신히 삼키고나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한가지 묻고싶은게 있어 찾아왔습니다.》 박상열은 비에 흠뻑 젖은 처녀를 아연히 바라보았다. 처녀의 돌발적인 출현에 저으기 놀란듯 불안한 기색이 그의 얼굴에 력연히 떠돌고있었다.
히사꼬가 떨리는 목소리로 가슴속에서 태질하던 의문을 쏟아놓았다. 《박선생님이 오사까에서… 리선생님을 테로했다는게… 그 말이 사실입니까?》 울대뼈가 꿀꺽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등골이 서늘해질만큼 올곧은 그 물음에 박상열은 그만 얼나간 사람모양이 되고말았다. 히사꼬가 조바심을
치며 뒤를 달았다. 《제발 성내지 말아주세요. 저도 가루베씨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어떻게 친구분들사이에 그런 일이 있을수 있겠습니까? 전 단지 박선생님에게서
직접 확인하고싶었을뿐입니다. 선생님, 얘기 좀 해주십시오. 가루베씨가 제게 거짓말을 한게 틀림없지요?》 부디 그렇다고 대답해달라는듯 애원에 찬 처녀의 두눈이 박상열을 지켜보고있었다. 불안과 초조로 타드는, 그러면서도 인간의 도의와 량심을 믿는
선명한 눈빛이였다. 처녀의 그 눈빛을 마주보기가 힘겨웠던지 상열은 고개를 돌려버리고말았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우산이 맥없이 내리워졌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부슬부슬 비떨어지는 소리만이 들려오는데 이윽고 고통에 짓눌리운듯 한 사나이의 혀굳은 소리가 울려왔다. 《가루베의 말은 사실이요.》 《?》 히사꼬의 눈길이 허공에서 얼어붙어버렸다. 사실이라니?… 그럼 정말로 이 사람이 자기 친구를 해치려 했단 말인가? 어떻게 그럴수가… 혹
취중에 헛말을 하는건 아닐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한동안 멍해있던 히사꼬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조이며 박상열에게 다시 물었다. 《무슨 말씀인지… 선생님이 리선생님의 일을 방해했다는게 사실이란 말씀입니까? 그래서 리선생님이 향악보를 찾아오지 못했다는게 사실인가
말입니다?!》 히사꼬의 두눈에서 흥분의 물기가 바르르 떨었다. 박상열이 그만하라고 맥빠진 손짓을 했다. 그의 얼굴은 모진 동통을 참고있는듯 괴롭게
이그러져있었다. 처녀를 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거세게 한숨만 몰아쉬는 상열에게 히사꼬는 애타게 간청했다. 《아니, 그럴수 없습니다. 리선생님의 벗이라면 결코 그런분일수 없습니다. 선생님, 부탁합니다. 저에게 진실을 들려주세요!》 더 참기 힘들었던지 박상열은 버럭 화를 터뜨리고야말았다. 《제길할, 사실이 그렇다는데 왜 자꾸 사람을 못살게 구는거요?!》 취기때문이 아니였다. 히사꼬의 순진한 모습이 그의 마음속 가장 아픈 상처를 못견디게 건드려놓았던것이다. 상열은 분별을 잃고 쓰라린 고뇌를
마구 쏟아놓기 시작했다. 《그래그래, 모조리 다 사실이요. 내가 리경식의 뒤다리를 잡아당긴것도 사실이구 나때문에 그 사람이 향악보를 놓치구 피눈물을 흘린것도 다
사실이요! 친구들끼리 어떻게 그럴수 있는가구? 허허… 옳아, 우린 친구지간이지. 서로 붙안고싶지만 결국에 가선 갈라져야 할 슬픈 친구들이란
말이요! 이 세상엔 그런 친구들도 있다는걸 히사꼬양 같은 일본처녀야 알턱이 없지. 허허허…》 박상열은 실성한 사람같이 넋없이 웃어댔다. 사나이의 눈구석이 번쩍거렸다. 마당에서 터져오른 고함소리를 듣고 집사람들이 달려나왔지만 박상열도
히사꼬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삭일길 없는 울분과 번뇌에 몸부림치듯 상열의 입에서 또다시 사나운 절규가 터져나왔다. 《날 경멸할테면 하라지. 어서 실컷 그러란 말이요! 히사꼬양의 눈에야 리경식이만 의로와보일테지? 하지만 천만에! 이 박상열이한테도 제나름의
뜻이 있고 도가 있소! 나한테도 렴치가 있고 량심이 있단 말이요!》 동가슴을 두드리며 이렇게 부르짖던 상열은 그만에야 입을 다물었다. 경악에 차서 자기를 쳐다보는 처녀의 눈길과 마주쳤던것이다. 히사꼬의
얼굴이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하여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불꼬리마냥 파들파들 떨리는 처녀의 눈빛에서 상열은 얼음보다 더 싸늘해진 기운을 느꼈다.
그것은 분노였다. 인간의 진정을 롱락당한데서 오는 짓타는 혐오였고 환멸이였다. 그제서야 박상열은 리성을 되찾고 처녀에게 때늦은 사과를 했다. 《미안하오. 히사꼬양에겐 정말 볼낯이 없게 됐소. 언제건 꼭 한번 찾아가서 진심으로 사과할 생각이였소. 하지만… 하지만 그때로선 별도리가
없었더랬소.》 납덩이같이 무거워진 상열의 목소리였다. 히사꼬는 금시 무너져버릴것 같은 몸을 가까스로 지탱하며 서있었다. 모든것이 엄연한 사실이였다.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억이 막히는
진실이였다. 결국 친구라는 사람때문에 향악보를 찾기 위해 고심분투해온 리선생의 모든 노력이 졸지에 물거품으로 되고만것이다. 더우기 그런 기막힌
일이 다름아닌 자기때문에 빚어졌다고 생각하니 처녀는 눈앞이 아뜩해졌다. 그러고보니 오사까에 다녀온 뒤로 리선생의 낯빛이 그리도 컴컴해있는 까닭을 알것 같았다. (헌데 어째서 리선생님은 한마디도 내게 귀띔하시지 않았을가? 분명 모든걸 다 아셨을텐데… 정말 가루베의 말대로 더이상 날 믿지
않으시는걸가? 아니, 아니야! 절대로 그러실수 없어. 필경 내가 충격을 받을가봐 혼자서 모든걸 묵새기고계실거야.) 살을 에이는 후회의 아픔이 심장에 미쳐왔다. 그럴수록 눈앞에 서있는 박상열이란 사람이 더더욱 원망스러웠고 의아스럽기 그지없었다. 서로
붙안고싶지만 결국엔 갈라져야 할 친구들이라니? 그때로선 별도리가 없었다니 그건 무슨 뜻인가? 그때처럼 지금도 겉과 속이 다른 소리를
하고있는건가? 혐오감이 점점 더 짙게 서려오르는것을 느끼며 히사꼬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리해할수가 없습니다. 그날 저에게 리선생님의 친구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민족문화재를 찾자고 애쓰는 같은 동포라고 분명 그러셨지요? 그렇게
말씀하시던분이 어째서 굳이 친구의 가슴에 못을 박으면서까지 향악보를 찾는 일에 찬물을 끼얹어야만 했는지 전 정말 리해가 되지 않습니다.》 가슴을 찌르는 처녀의 말에 상열은 할 말을 못 찾고 거친 숨만 연방 내뿜었다. 시꺼멓게 질린 그의 얼굴이 푸들푸들 경련을 일으켰다. 얼마후
머리를 짓숙인채 침통하게 중얼거리는 상열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히사꼬양은 일본사람이니 리해하기가 힘들거요. 우린… 우린 두동강이 난 민족이야. 제아무리 우정이 중하고 뜻이 통한들 뭘 하겠소.
국토분단의 현실앞에서 어차피 남과 북으로 갈라서지 않으면 안되는게 우리 겨레의 서글픈 숙명이니까. 그 점에서 리경식이라고 나와 뭐 다른줄 아오.
흥, 내가 반쪽짜리듯이 그가 그토록 몸바치는 조국이나 민족도 따지고보면 반쪽에 불과하단 말이요.》 그러니 리선생이 총련계여서 등을 돌렸단 말인가. 히사꼬는 아연실색하지 않을수 없었다. 북과 남으로 갈라진 조선의 현실을 그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민족분렬의 서리찬 실상에 직접 부닥치고 보니 가슴이 섬찍해왔다. 뿌리깊은 대결관념에 빠져 편협해질대로 편협해진 한 인간의
암둔성에 소름이 끼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히사꼬의 눈앞에 문득 리경식의 모습이 떠올랐다. 리선생이 북을 마음의 기둥으로 따르는것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자기 겨레를 사랑하고 자기
민족의 력사와 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리선생의 마음이 결코 어느 한쪽에만 치우친 반쪽짜리가 아니라는것을 히사꼬는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그렇지
않다면야 어떻게 리선생이 민단계동포인 박상열의 민족적량심에 대해 그리도 자랑스럽게 자기에게 들려줄수 있었으랴. 북이요, 남이요를 가리기 전에
민족전체의 리익부터 앞세우는 리선생이기에 향악보와 관련한 중요한 이야기도 민단동포에게 서슴없이 터놓을수 있었을것이다. 비단 제 민족에 한해서만
그런것이 아니였다. 인간의 지성과 량심을 사랑하고 인류공동의 문화재보를 존중할줄 아는 헌거로움에 감복해서 하또리 류따로 같은 명망있는
일본지식인들도 리선생과의 교제를 귀중히 여기고있지 않는가. 자기가 리선생을 존경하는것도 아마 웅심깊은 그 인간됨때문일거라고 히사꼬는 생각했다. 그런 마음을 두고 함부로 반쪽이라고 비웃다니. 저도 모르게 처녀의 입에서 강개한 소리가 튀여나왔다. 《전 두분의 일에 대해서 다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리선생님이 평소에 박선생님에 대해 얼마나 소중한 감정을 품고계셨는지는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제가 협회에 찾아온 박선생님에게 향악보의 행방을 대드렸다는걸 알고 리선생님이 얼마나 반가와하신줄 압니까. 정말로 반쪽마음을
가지신분이라면 어떻게 그럴수 있겠습니까. 단언합니다. 리선생님의 마음속에서 선생님은 남쪽사람이기 전에 분명 피를 나눈 동족이였습니다. 그런분의
진정이
모욕당하는걸 보니 일본사람인 저로서도 분해서 견딜수가 없습니다.》 어느새 처녀의 두눈에서 눈물이 가랑거렸다. 《히사꼬양.》 박상열의 입에서 맥빠진 파렬음마냥 새여나온 소리였다. 하건만 히사꼬에게는 상열의 그 부르짖음도, 허겁지겁 끼여들며 안주인이 만류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들려오는것은 고막을 울리는 심장의 성난 흐느낌소리뿐이였다. 처녀는 자신의 의지에 전혀 순응하지 않는 무서운 격정에 전률하며
박상열을 향해 의분의 불길을 날렸다. 《놀랍기만 합니다. 친구라는분이 어쩌면 그렇게도 리선생님을 모르실수 있습니까. 전 리선생님의 의로움을 믿습니다. 그분의 지향과 량심을
존경하기에 그분이 사랑하는걸 저도 사랑하고싶고 그분이 타매하는걸 저도 타매합니다. 그런분의 진심을 알아보지 못하는 심장속에도 과연 뜨거운 피가
흐르고있을런지 전 의문스럽습니다.》 (아니! 인간의 믿음이 무엇인지, 진정이 무엇인지 보려고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 이런 사람들은 한생토록 불신과 편견의 수렁속에서 헤여나지
못할거야.) 처녀의 까만 두눈이 분노를 머금고 활활 불탔다. 《부탁입니다. 다시는 친구라는 이름으로 리선생님을 욕되게 하지 말아주십시오!》 히사꼬는 바람을 가르듯 새되게 이런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번열을 토하듯 거칠게 헐떡거리는 박상열의 숨소리가 들려왔지만 처녀는 그달음에
비내리는 어둠속으로 사라져버리고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