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 회) 
 

3. 어둠속에서 번뜩이는 비수

 

전화종이 울렸다. 히사꼬는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에서 쉬지근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쯔보이 히사꼬양을 찾습니다.》

《제가 히사꼬인데요.》

처녀가 대답하자 저쪽에서 대뜸 반기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 히사꼬양이요. 오랜만에 목소리를 들으니 반갑구만. 날 모르겠소?》

《저, 누구신지?》

《허, 유감인데. 가루베 신조를 벌써 잊었을린 없을텐데…》

순간 히사꼬는 뱀이라도 본것처럼 흠칠했다. 《백자》차집에서 본 대머리가 떠오르면서 등우로 벌레같은것이 스멀스멀 기여오르는듯한 느낌을 뿌리칠수가 없었다. 처녀가 전화기를 든채 굳어져있는데 상대는 자못 걱정하는 어조로 다음 말을 이었다.

《참, 듣자니 남동생이 탈가를 했다면서. 근심이 이만저만 아니겠구만. 히사꼬양에게 그런 고충이 있는줄은 미처 몰랐는걸.》

난데없이 불미한 집안일이 튀여나오는 바람에 처녀는 얼굴을 붉히며 주위를 살폈다. 협회사무실은 조용했다. 저쯤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회원 두사람의 모습만이 눈에 띄울뿐이였다. 이 사람이 어떻게 도오뗀의 일을 알고있는걸가? 어리둥절해진 히사꼬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듯 가루베가 흔연스레 뒤를 달았다.

《오늘 누굴 만났더랬는데 히사꼬양의 안부를 묻다가 우연히 알게 됐소. 내 성미에 그런 소식을 듣구서야 어디 가만있을수 있더라구. 똘스또이의 말이던가. 이제 할수 있는 선행을 래일로 미루지 말라구. 허허… 건 그렇구 히사꼬양이 거절하지 않는다면 내가 도울수 없을가 해서. 남동생이 대학에 다니면서 학비걱정을 안해도 되게 내가 후원단체 같은걸 하나 소개해줄수 있는데 히사꼬양의 의향은 어떤지?》

히사꼬는 금시 거절한다는 말이 튀여나가는것을 겨우 참았다. 단마디로 물리치기에는 집안형편이 지내 딱했던것이다. 입술을 옥물고 침묵만 지키는 처녀에게 끈덕진 유혹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달리 생각할건 없소. 난 단지 히사꼬양에 대한 호감때문에 이렇게 나서는거요. 동의한다면 오늘 저녁 6시에 우리가 만났던 <백자>차집에서 기다리겠소. 그때 만나 상세한걸 의논해봅시다. 아 참, 리선생에겐 아직 이런 얘길 하지 않는게 좋을듯싶겠는데. 혹시 괜한 오해라도 살가봐서 그러는거요. 그럼 저녁에 다시…》

가루베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전화기를 놓았다. 보나마나 거절하지 못할거라는 오만한 태도였다. 히사꼬의 얼굴이 모멸감으로 확 달아올랐다. 왜서 가루베의 넉적은 소리에 면박 한마디 안기지 못했는지 스스로도 놀랍기 그지없었다. 그러면서도 어쩔수없이 시계에 눈길이 가는것은 무엇때문인가? 처녀는 와락 치밀어오르는 설음과 분함을 삼키며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가루베는 히사꼬에게 이른 시간을 30분 앞두고 《백자》차집에 들어섰다. 빈자리로 찾아가 무너지듯 무겁게 주저앉은 그는 목을 졸라맸던 넥타이를 늦구고나서 더위에 벌그레해진 부얼부얼한 얼굴을 손수건으로 꼼꼼히 닦기 시작하였다. 한참 그러고있을 때 차가 나왔다. 가루베는 차 한모금을 훌쩍이고나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고풍스러운 차집의 분위기는 이전이나 다름이 없었다. 축축히 울려나오는 느린 음악, 소곤거리며 차를 마시는 사람들의 한적한 모습… 창문으로 비껴들어오는 석양볕이 벽에 진렬된 조선의 옛 백자들을 감빛으로 물들이고있었다.

《<순백의 아름다움>이라…》

저도 모르게 이런 소리를 중얼대던 가루베는 후뜰 놀라고말았다. 몇달전에 히사꼬에게서 들은 말을 그대로 외우고있었던것이다. 그러고보니 지금 앉아있는 이 자리도 그때의 그 자리였다. 어찌된 영문인가?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어떤 잠재의식이라도 작용했는가?

갑자기 입안이 쓰거워났다. 가루베는 차종을 내려놓고 담배를 붙여물었다. 푸실대며 흩어지는 담배연기사이로 불이 펄펄 일던 리경식의 눈빛이 섬찟하니 다가들었다. 자기를 가리켜 《호리야》라고 꾸짖던 격노의 그 웨침이 또다시 머리우로 가차없이 떨어질것만 같았다. 뒤덜미가 뻣뻣해왔다. 그때 일을 생각하니 더위에 지쳐빠졌던 심장이 불시에 독거미마냥 꿈틀거렸다.

(리경식, 네가 감히 나를 개 꾸짖듯 했단 말이지.…)

가루베의 입귀가 사납게 일그러졌다.

《조선향악보》를 기어이 가져다 놓겠다고 아라기앞에서 장담할 때 그는 자기의 금력과 인맥을 발동하면 그까짓 조선인들을 얼마든지 밀어제낄수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생각하고있었다. 총독부관계자들을 훑어나가던중 니시다를 찾아냈을 때만 해도 얼마나 기세가 등등했던가. 행운의 문들이 차례로 척척 열려지는것 같은 현훈증에 사로잡혀 가루베는 수일어간에 향악보를 가져간다고 아라기의 서기에게 전화까지 걸지 않았던가.

니시다를 찾아갔던 일이 허사로 되고나서야 그는 자기가 너무나 쉽사리 장담했었다는것을 깨달았다. 더구나 누군가가 자기보다 먼저 니시다에게 찾아와 향악보의 행방을 물었다는것과 이찌가와라고 소개한 그자인즉 다름아닌 아라기의 장서를 정리해간 조선인중 한사람인 박상열이라는것을 알아냈을 때 가루베의 놀라움과 불안은 이만저만한것이 아니였다.

상대하는 조선인들이 록록치 않다는것을 늦게나마 통감한 가루베는 그들이 어느 정도 앞서있는지부터 알아봐야겠다고 작정하고 박상열을 찾아가 만났다. 그런데 예상밖의 일이 벌어졌다. 박상열이 제편에서 먼저 협력을 자진해오는게 아닌가. 가루베는 처음에 조선인들이 무슨 오그랑수를 부리는가 해서 선뜻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한동안 말이 오가서야 그는 리경식이라는 조선인과 한통속인줄 알았던 박상열이 속으로는 딴 궁리를 하고있다는것을 확인할수가 있었다. 또 어째서 박상열이 자기의 본명이나 가네다라는 통명대신에 이찌가와라는 왕청같은 가명을 내대고 향악보를 찾아다니는지도 짐작되는바가 있었다.

하긴 그럴법도 한 일이였다. 같은 조선인이지만 그들은 상반되는 이데올로기를 선택하고있었던것이다. 게다가 박상열의 말마따나 가루베 신조라는 거물이 나섰는데 누가 감히 대적할 엄두를 낼수 있으랴. 협력을 자진해나선 박상열의 제의는 현실을 바로 보고 자그마한 리득이나마 얻어보려는 약삭바른 타산에서 나온것이 분명한듯 싶었다. 가루베는 쾌심에 겨워 속으로 《반자이》를 부르짖었다. 철옹성으로 여겼던 적의 성곽이 별안간 물먹은 담벽처럼 무너지는것을 보는 장수의 심정이였다고 할가.…

박상열의 이야기를 듣고나서 가루베의 이목은 당연히 리경식에게 집중되게 되였다. 일본땅에서 《조선향악보》를 처음으로 찾기 시작했다는 리경식, 고물수레를 끌며 막바지인생길을 톺으면서도 조선문화재를 수집해왔고 귀국도 미룬채 향악보를 찾아다니고있다는걸 보면 여간한 집념의 사나이 같지 않았다. 제아무리 그렇다한들 황금의 힘앞에서야 무슨 용빼는 수가 있으랴.

박상열을 손쉽게 걷어쥐는 바람에 기고만장해진 가루베는 배를 퉁기며 이번에는 리경식을 찾아갔다. 박상열의 말대로 리경식이 정말 나까야마의 행방을 알아냈는지 살펴보고 어디 한번 흥정도 걸어보자는 심산에서였다. 허나 심한 오산이였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그 조선인앞에서 가루베는 여지없이 발가벗기우고 만신창이 되지 않으면 안되였던것이다. 그날 리경식의 입에서 뿜어나오던 증오의 웨침들이 되살아날 때면 가루베는 지금도 뒤덜미가 뻣뻣해오고 사지가 가드라들군 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 일은 가루베의 가슴속에 리경식이라는 조선인을 불구대천의 숙적으로 새겨넣었다. 어떻게든 리경식을 이겨야 앙갚음을 할수 있었고 출세와 영달의 꿈을 이룰수 있었다. 가루베는 필사의 힘을 다해 기승을 부렸다. 그는 향악보의 행방을 찾기 위해 인맥이란 인맥은 총동원하는 한편 눈에 쌍심지를 켜고 리경식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죽을수가 닥치면 살수가 생긴다더니 박상열이 그 일을 쾌히 맡아나섰다. 개인적인 리해관계도 있었거니와 남조선계였으니 향악보와 같은 귀중한 문화재가 북조선으로 넘어가는것을 결단코 방관할수 없었던 모양이였다. 가루베로서는 입이 가로 터질만큼 좋아할 일이 아닐수 없었다. 리경식이 여적 제 친구의 속심을 모르는 조건에서 박상열만큼 그의 거동을 가까이에서 살펴볼만 한 사람은 없다고 보았던것이다. 그러고보면 리경식을 만났을 때 이찌가와라는 가면을 쓴 박상열의 정체를 적당히 묻어두었던것이 얼마나 잘한노릇이였던가싶었다. 가루베는 박상열의 활약을 기대하며 그에게 갖은 달콤한 약속을 아낌없이 쏟아보였다.

허, 헌데 이런 기막힐데라구야! 글쎄 박상열이 감쪽같이 자기를 업어넘겼다는것이 아닌가!

박상열이 자기에게 알리지도 않은채 리경식을 뒤쫓아 오사까로 뛰여갔다는것을 가루베는 뒤늦게야 알게 되였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감촉한 그는 부랴부랴 흥신소(일본에서 남의 위탁을 받아 개인의 소행이나 재산따위를 비밀리에 조사하는 사설탐정기관)를 고용하여 박상열의 행적을 조사하게 하였다. 결과는 경악할 지경이였다. 지금껏 박상열이 리경식과 자기사이에 끼워 얼렁수를 쓰면서 안속을 채웠을뿐아니라 오사까에 가서 향악보를 놓고 리경식과 대판 암투까지 벌렸다는것이 아닌가.

당장에 송편으로 목이라도 따야 할 일이였다. 그런줄도 모르고 여태 박상열에게서 소식이 날아오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으니 제 꾀에 제가 넘어간것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제노라 하던 자기가 센징들한테 보기 좋게 엿을 먹은것이다. 분통이 터져왔다. 가루베는 늘어진 볼살을 푸들푸들 떨며 길길이 날뛰였지만 이미 행차뒤 나발이였다. 그때에야 비로소 가루베는 박상열이 자기나 리경식만 못지 않게 눈에 홰불을 켜달고 향악보를 노려왔다는것을 쓰거움속에 깨달았다. 박상열의 진짜속내는 놓쳐버린채 단지 그가 리경식의 성공을 달가와하지 않는 점만 흐뭇이 구경해온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그나마 불행중 다행이라면 북이냐 남이냐를 치렬하게 다투던 끝에 두 조선인이 모처럼 찾아든 기회를 바보처럼 잃고만것이라 할런지.… 허지만 지금 언제 그런 위안이나 하고있을 계제인가.

돌연 역증이 가루베의 심장을 비틀었다. 그는 채 피우지 못한 담배를 짜증스럽게 비벼껐다.

바로 며칠전에 있은 일이였다. 가루베는 아라기 사다오의 생일을 하루 앞두고 고마무라의 별장으로 찾아갔었다. 지금 형편에서 아라기의 앞에 나서는것이 염라대왕앞에 나서는것만치나 끔찍했지만 사소하게라도 늙은이의 고까움을 살가봐 두려웠던것이다.

이태동안 어김없이 치르어온대로 품들여 마련한 생일선물을 들고 별장으로 가니 서기가 대뜸 주인에게로 잡아이끄는것이였다. 가루베는 급해맞지 않을수 없었다. 늙은이를 만나는것이 두려워 진상품이나 내려놓고 얼른 돌아설 작정으로 우야 이른아침시간을 골라 찾아온 그였으니 그럴수밖에. 서기로부터 자기가 나타나면 데려오라고 주인이 분부했다는 소리를 전해듣고서야 가루베는 별수없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마냥 서기를 따라나섰다. 령감은 삼나무껍질로 지붕을 얹은 자그마한 차실에 앉아 차를 마시고있었다. 가루베는 아라기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이로군.》

들고 온 진상품은 거들떠보지도 않은채 아라기가 던지는 첫마디였다. 가루베는 그 말속에서 금방 일을 칠것처럼 기세를 떨더니 그래 어찌되였느냐고 묻는 늙은이의 속대사를 읽었다. 쪽박 쓰고 소낙비를 피하랴. 딴 도리가 없어 가루베는 그간에 있은 일들을 자초지종 상전에게 아뢰였다.

아라기는 차를 마시며 잠자코 듣기만 하였다. 조는듯이 무표정한 늙은이의 얼굴우에서 강파르게 패인 주름살들이며 비수마냥 치들린 카이제르수염이 이따금 무슨 곁말이라도 주고받는것처럼 움씰움씰하였다. 그 모양을 불안스럽게 지켜보며 가루베는 간신히 사설을 끝맺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폭풍직전의 정적이라 할지. 이제 저 정적을 깨치며 벼락이 떨어지든가 매몰찬 야유의 소나기가 쏟아질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였다. 가루베는 간이 록두알만 해서 상전의 하회를 기다렸다. 그런데 얼마후 아라기의 입에서는 이런 질문이 흘러나오는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 두자가 서로 다른 패당이였다는건가?》

뜻밖의 질문을 받은 가루베가 어정쩡해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각하. 아시다싶이 일본의 패전과 함께 38°선이라는게 생겨나면서부터 조선인들은 북과 남으로 갈라져 호상 반목하고있지 않습니까. <조선향악보>를 찾고있는 그자들 역시 하나는 북조선계이고 다른 하나는 남조선계이니 사정은 마찬가지일거라고 보아집니다.》

늙은이의 부석부석한 눈시울이 먼 옛날을 돌이켜보듯 가느스름히 쪼프려졌다.

《38°선이라…》

아라기는 독백이라도 하듯 이렇게 되뇌더니 어딘가를 쳐다보며 먼지낀 그림처럼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는것이였다.

《새삼스럽구나. 내가 38°선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들었던게 아마 황군에서 복무하기 시작하던 초시기였을게야. 일청전쟁이 끝난 후에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놓구 제정로씨야와 치렬한 각축전을 벌렸더랬지. 그무렵에 야마가따륙군대장이 천황페하의 특사로 로씨야황제대관식에 참석한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로씨야외상 로바노브와 만나 38°선을 경계로 조선을 분할지배하자구 제기했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어. 그때 로바노브의 반대로 야마가따의 제기는 무산되였지만 지난 세기말에 일본이 처음으로 들고나왔던 그 38°선이 오늘날에 와서 반도의 현대사를 좌지우지하게 될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결국엔 렬강들틈에 끼여있는 반도의 숙명이라 해야 할테지. 흠…》

흥미있다는듯 코웃음을 치고난 아라기는 말머리를 돌렸다.

《그래 차후책은 있는가?》

가루베는 후닥닥 놀랐다. 그는 정신을 바싹 차리며 령감의 물음에 대답했다.

《예, 현재 향악보를 가지고 사라졌다는 시미즈란자의 행적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있는중입니다. 사처에다 줄을 늘였고 경찰에도 협력을 부탁해놓았습니다. 한편으론 향악보에 눈독을 들이는 두 조선인들에게 면밀한 추적을 붙여놓았습니다. 각하, 념려마십시오. 아무리 그래야 이 일본땅에서 조선인들이 날고뛴들 별수가 있겠습니까.》

가루베의 흰소리에 늙은이가 랭소를 지으며 빈정거렸다.

《그게 단가?》

《?…》

《내 보건대 이번에두 또 자넨 그자들에게 얼려넘어가든가 아니면 선손을 떼울것 같은데.》

가루베는 한순간에 입이 얼어붙고말았다. 이 령감이 대체 뭘 말하자는거야? 그쯤하면 내 솜씨따윈 더 볼나위도 없다는건가? 슬그머니 당황해난 가루베가 안경을 매만지며 조마조마해하는데 아라기는 차를 다 마시고나서 느릿느릿 말하는것이였다.

《예로부터 적을 알고 자기를 알아야 이길수 있다구 했어. 조선놈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해보이는가. 센징들을 꺾자면 그놈들의 약점을 물고늘어져야겠는데 자네 같은 허영배들은 무턱대구 단방치기승부만 노리고들거던.》

자기를 썩은 짚오래기만큼도 여기지 않는 상전의 하대에 울화가 벌컥 치밀었지만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는 자리인지라 가루베는 감히 내색조차 할념을 못했다. 불현듯 늙은이가 회색빛눈망울을 이상하게 번뜩이며 물어왔다.

《그래, 시미즈인가 뭔가 하는 오사까의 그 사기군이 센징들을 어떻게 골탕먹였다구?》

《예? 아, 그자가 노린것인즉 조선인들끼리 기껏 경쟁시켜서 폭리를 얻자는것이였다고 합니다. 장사치의 잔꾀랄지… 다행히 그 결과로 조선인들의 기도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만은…》

가루베가 떠듬적거리며 대답하자 아라기는 들고있던 빈 차잔을 소리가 나게 탁자우에 내려놓았다.

《옳아, 바루 그거야. 자네도 아까 말했지. 38°선이 생겨나면서 조선인들이 량쪽으로 갈라져서 서로 반목하고있다구. 그게 그들의 가장 큰 약점이란 말이야. 그러구보면 오사까의 그 작자가 일부러 그랬던 얼결에 그랬던 센징들의 그런 약점을 리용해서 리속을 차릴 생각을 했다니 한갖 장사치라도 자네보다 얼마나 수가 높은가.》

가루베의 살찐 얼굴이 삶은 문어대가리처럼 시뻘개졌다. 속이 뒤틀렸지만 인정할수밖에 없는 사실이였던것이다. 어째서 자기는 그런 수를 쓰지 못했던가. 정말로 자기가 오사까의 그 사기군보다도 지둔하단 말인가. 아니, 기본은 상대를 너무 우습게 보고 접어든데 있었다. 리경식도 그래, 박상열도 그래 그렇게까지 완강하고 검질긴자들일줄이야 어찌 짐작이나 했으랴. 쓰디쓴 패배감과 수치감이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치밀어올랐다. 가루베가 설익은 개살구 먹은 상이 되여 죄인처럼 웅크리고있는데 아라기의 기광스러운 목소리가 정수리를 후려쳐왔다.

《조선놈들의 내분과 불화를 할수 있는껏 부채질해야 해. 뭐니뭐니해도 센징들을 누르자면 그게 최상의 방책이거든. 자넨 그 두놈이 끝까지 마음을 합치지 못하게 리간시키구 서로 물고뜯게 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해. 그리되면 바라는 물건이 저절로 굴러들어오는건 시간문제가 아니겠는가.》

천백번 지당한 훈시였다. 비록 병적일만치 자기주장을 과신하며 무작정 남을 가르치려드는 오만무도함이 있어도 이 령감의 사고방식에는 권모술수로 일생을 흘러보낸자만이 지닐수 있는 랭혹함과 로회함이 비껴있다는것을 가루베는 부인할수가 없었다. 그래, 권력을 잡으려면 저렇게 랭혹해야 한다. 일본의 정치인이 되려면 저렇게 무자비해야 한다. 가루베는 비둔한 몸을 뱀처럼 도사리며 아라기의 훈시에 화답했다.

《실로 이 자리에서 깨닫는바가 엄청납니다, 각하!》

그러나 아라기의 훈시는 끝이 나지 않았다.

《난 단지 조선의 고서따위때문에만 이런 소릴 하는게 아니야. 중요한건 우리 뒤를 이을 젊은것들이 아시아와 세계를 주무를수 있는 지혜를 깨닫는거야. 영국인들이 그랬던가, <분렬하여 통치하라>구.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반도가 두쪼각으로 갈라진건 하늘이 아직 우리 일본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증거라 할수 있어.… 조선인들이 둘로 갈라져서 싸우는 이 기회를 틈타서 우린 힘을 길러가지구 다시 일떠서야 해. <대동아공영권>의 꿈을 반드시 이루어야 한단 말일세. 그 길에서 <분렬하여 통치하라>는 말은 여전히 우리가 되새겨보군 해야 할 유익한 금언으로 될거야.》

아라기의 울대뼈가 흉물스럽게 불끈거렸다. 늙은이의 온몸에서 뻗쳐나오는 거센 기운에 휘말려들며 가루베는 다시금 목청을 돋궈 화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각하!》

마감무렵에 가서 아라기는 느닷없이 이런 말을 흘렸다.

《지방의회선거가 래년 봄에 있더라?》

광기로 번뜩이던 령감의 눈빛이 어느새 의뭉스러운 빛으로 바뀌여있었다. 가루베는 벌떡 신경을 곤두세웠다. 엉큼한 령감이 자기 속을 뻔드름히 들여다보고있었던것이다. 아닌게아니라 선거가 닥쳐오고있었다. 어떻게 하나 이 기회에 정치인으로 환골탈태하고싶은것이 가루베의 굴뚝같은 욕심이였다. 그러자면 이 늙은이의 후원이 결정적으로 필요했다. 모든것이 늙은이의 결심여하에 달려있었다. 가루베는 네거리에서 교통신호등을 지켜보는 기분으로 상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상전은 거드름스레 그루를 박았다.

《정치를 한다는게 쉬운 일이 아니야. 나약하거나 무능한자들은 결코 정계에 오래 살아남지 못하지. 자네에게 정치인이 돼볼 야심이 있다면 미리부터 뜻을 벼리구 기회를 행운으로 바꿀줄 아는 능력을 갖춰야 해. 그리구 그걸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하구. 만일 그럴 자신이 없다면 지금 당장이라두 돌아가 창부나 껴안든가 아니면 어느 뒤골목에 들어가서 호떡장사나 하는게 나을걸. 인생이란건 와떼를로싸움터야. 패하면 나뽈레옹도 쫓겨갈뿐이지.… 물러가게. 조선고서를 가져오기 전엔 다시 내앞에 나타나지 말게.》

아라기가 내뱉은 마지막말이다. 해내지 못하면 모든것을 포기하고말라는 매몰찬 최후통첩이였다.

그 일이 있은 뒤로 가루베는 불난 강변에 덴 소 날뛰듯 더욱 헤덤벼쳤다. 고기는 물을 타고 새는 바람을 타고 사람은 때를 탄다고 했지. 아라기가 준 마지막기회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된다. 문제는 인제 누가 먼저 시미즈를 찾는가 하는것이였다. 가루베는 시미즈가 숨어있는 곳을 찾기 위해 유들유들한 낯이 더위에 시뻘겋게 익는줄도 모르고 헐떡거리며 뛰여다녔다. 하루가 멀다하게 경찰관계자들을 찾아다녔고 여기저기에 돈을 뿌려가며 청탁을 놓는가 하면 불독촉을 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리경식과 박상열에게서 잠시라도 눈을 뗄가봐 자기가 고용한 흥신소사람들을 매일같이 들볶아댔다.

그중에서도 가루베가 눈에 피발을 세우고 노려보는 대상은 리경식이였다. 《조선향악보》에 제일 먼저, 제일 가까이 다가갔던자가 바로 리경식이였다는 리유도 있었지만 보다는 그자에게서 당한 모욕을 반드시 되갚겠다는 사무친 앙심때문이였다. 가루베는 리경식의 말소리 하나 숨소리 하나라도 놓칠세라 어둠속의 도적고양이처럼 귀를 강구고 눈을 밝혔다. 그 과정에 흥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리경식이 시미즈를 찾아 오사까로 갔다는것을 박상열에게 알려준 인물이 다름아닌 히사꼬라는것이였다.

어안이 벙벙해졌다. 히사꼬야 리경식의 협회에서 일하는 처녀가 아닌가. 《백자》차집에서 만났을 때 받은 느낌도 그렇고 협회를 조사한 흥신소사람들의 말을 들어봐도 그렇고 리경식을 남달리 따르는 처녀가 분명한데 어떻게 그럴수가?… 모름지기 박상열의 얼림수에 넘어간것이 틀림없었다. 하다면 히사꼬가 자기의 실수를 알고나 있을가? 그리고 리경식은?… 처녀가 그 사실을 알면 금시 울상이 될테지.…

와락 구미가 동했다. 히사꼬를 끌어당길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렇게만 되면 리경식의 일거일동을 손금보듯 장악할수 있지 않는가. 가루베는 히사꼬의 신상을 구체적으로 파헤쳐보았다. 그러던 그는 도오뗀이라는 히사꼬의 남동생이 한주일전에 집을 뛰쳐나갔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고등학교 졸업반생인 도오뗀은 최근에 의학대학입학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되였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입학시기가 박두해오자 도오뗀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문약한 선비이고 어머니는 지병으로 늘 병석에 누워있어 연약한 누이가 시집도 안 가고 집안의 부담을 혼자서 감당해나가고있었다. 그런 형편에서 자기까지 어떻게 누이의 등에 업힐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동생의 발목을 붙들어맸다는것이다. 히사꼬가 피나게 마련한 입학금까지 손에 쥐여주며 제발 대학공부를 하라고 사정사정했지만 동생은 한사코 뿌리쳤다. 입학금은 그렇게 메꾼다 해도 수업료며 실험실습비 등 잡다한 명목의 학비는 무슨 수로 꼬박꼬박 대며 앓는 어머니는 어떻게 돌보겠느냐면서. 온 집안이 달라붙어 도오뗀을 꾸짖고 타이르자 그 녀석은 기어이 제힘으로 돈을 벌어 누이부터 시집보내겠다면서 외삼촌이 산다는 혹가이도의 어촌으로 뛰쳐나갔다는것이였다.

가루베는 쾌재를 불렀다. 물에 빠진자 지푸래기라도 붙잡는다는데 그렇게까지 급박해진 정황이라면 일은 제대로 되여가는셈이 아닌가. 히사꼬의 성정으로 보아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인들 마다하랴. 이런 생각으로 가루베는 다급스레 히사꼬에게 전화를 걸었던것이다.…

하건만 약속한 시간이 반시간이나 넘도록 처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가루베는 연신 궁둥이를 들썩거리며 이제나저제나 하고 출입문쪽만 지켜보았다. 히사꼬가 끝내 오지 않으려는가? 어째서? 그 알량한 자존심때문에? 그게 아니면 리경식과 무슨 꿍꿍이라도 있었는가?…

불안스럽게 갈마드는 초조와 위구속에 안절부절 못하던 가루베의 입이 갑자기 헤벌어졌다. 히사꼬가 문가에 나타난것이다.

(그러면 그럴테지.)

가루베는 육중한 몸을 엉거주춤 일으키며 반색을 지어보였다.

《어, 히사꼬양. 이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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