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0 회)
2. 고백하고싶어지는 때 박상열과의 대결이 있은 다음날 또 한차례의 예상치 못했던 일이 터져 리경식을 더 큰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날 한낮이 기울어가던무렵 우달근이
꺼멓게 질린 낯빛을 해가지고 경식의 앞에 나타났다. 《시미즈가 없어졌수다!》 밑도 끝도 없이 내뱉는 달근의 소리에 경식은 홀연 뻥뻥해지고말았다. 치미는 화를 누르느라 연신 헐근거리며 달근이 사연을 터놓아서야 리경식은
차츰 모든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어제 저녁에 급작스레 시미즈가 우달근을 찾아왔다. 어찌나 황황급급해하는지 꼭 천둥소리에 놀라 집에 뛰여든 개모양이였다. 《우상, 리선생이 가져온 돈 20만엔을 선불금으로 먼저 넘겨주시면 내 어떻게 하나 장인령감을 설득하겠습니다. 나머지 금액은 차차 상론해서
정하는걸로 합시다. 어떻습니까?》 난데없이 뛰여들자마자 선심이라도 쓰듯이 던지는 시미즈의 수작이였다. 달근은 당장에 주먹부터 나가는걸 겨우 참고 그자에게 내뱉았다. 《네 말은 콩으루 두부 만든대두 곧이들리지 않으니 먼저 향악보부텀 가져다놔라. 그럼 돈을 줄테니.》 그러자 댕댕해보이던 시미즈의 낯판이 대번에 우그러들더라는것이였다. 《우상, 난 우상과의 신의를 지키자고 이러는겁니다. 시간을 끌면 그 두상이 또 무슨 망녕을 부릴지 어찌 알겠습니까. 제발 이번만은 내 말을
믿어주소이다.》 사실 향악보때문에 가슴이 숯등걸로 돼버린 달근으로서는 처음에 시미즈의 말대로 할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니
시미즈가 덤벼치는 꼴이 수상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도 간을 말리며 야지랑을 떨던 좀생이가 부랴부랴 흥정을 서둘러대는것도 이상했거니와 엊그제
20만엔을 들고 갔는데도 코방귀만 뀌였다는 장인령감을 별안간 무슨 수로 얼렁뚱땅 넘겨보겠다는건가. 돌배나무에 사과알이 달린다는 소리나 같았다.
필경 시미즈가 등치고 간빼먹으려는 수작질이라고 생각하니 달근의 움켜쥔 주먹이 우들우들 떨려왔다. 당장 일이라도 칠듯싶은 우달근의 험상궂은 기상에 시미즈는 그만 자라목이 되고말았다. 그자는 별수없다고 생각했는지 턱을 들까불며 애걸했다. 《조… 좋습니다, 우상. 당신들이 바라는 물건을 래일 아침까지 틀림없이 가져다놓을테니 약속을 꼭 지켜야 합니다.》 시미즈는 이런 말을 남기고는 수염에 불달린 놈마냥 황급히 사라져버렸다. 달근은 그러는 그자를 지릅뜨고 바라보다가 내심 무릎을 쳤다. (옳지, 인제야 저녀석이 바빠난가보군.) 요즘 시미즈가 채권자들에게 시달리느라 홍찌를 갈기고 다닌다는 말을 자주 듣군 하는 그였다. 그러고보면 돈에 기갈이 날대로 난 시미즈가
급해맞은 나머지 20만엔이라도 먼저 손에 넣고 보자고 생각을 바꿔먹었는지도 모른다. 허나 사위놈한테 독이 오를대로 오른 장인령감이 호락호락
움직여줄가. 하긴 승냥이도 제 새끼는 안 잡아먹는다는데 아무리 모진 두상이라 해도 물에 빠진 딸사위의 꼭뒤를 누를 생각까지는 차마 못할는지도
모르지. 정말로 시미즈가 향악보를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우달근은 가슴이 울렁거렸다. 일이 그리된다면 오죽이나 좋으랴. 뭐니뭐니해도
리경식이 기뻐할 생각을 하니 석달장마끝에 해빛을 본것처럼 저도 모르게 기분이 후더분해왔다. 그 량반이 나쁜 놈들한테 테로까지 당하면서 여북
곡경을 치렀던가. (내가 향악보를 척 들구 나타나면 리선생이 펄쩍 놀랄테지.…) 이런 상상까지 해보느라니 자연 마음이 싱숭생숭해와 달근은 그날 밤 제바로 눈을 붙일수가 없었다. 날이 밝자 우달근은 웬걸 하면서도 행여나 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시미즈가 나타나길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헌데 천만뜻밖에도 시미즈대신
그자의 장인령감이 들이닥칠줄이야… 아침에 그 령감이 낯이 새파래가지고 뛰여들었다고 한다. 어찌나 다급했던지 하오리의 끈이 풀어진것도 모른채 달려온 령감은 다짜고짜로
사위놈한테서 받은 고서를 내놓으라고 생야단을 쳤다는것이 아닌가. 《당장 사위놈을 내놔라! 그놈이 가져온 고서를 내놓으란 말이다! 그 개백정같은 놈이 고서를 훔쳐가지구 이리루 온걸 내가 모를줄 아느냐,
이놈들!》 령감은 두발을 쾅쾅 구르며 입에 거품을 물고 길길이 날쳐댔다. 어떻게도 두상이 기광을 부리는지 달근은 한동안 령감의 악다구니질을 어벙벙해서
듣기만 하였다. 령감이 고아치는 소리를 한참 듣고서야 그는 대충 사연을 짐작할수 있었다. … 간밤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시미즈가 술꾸레미까지 척 들고 령감을 찾아왔더라는것이다. 먹을알이 없으면 이마빼기도 디밀지 않는
노랭이사위인지라 처음엔 령감도 바짝 긴장했더랬는데 사위란 녀석이 지독히도 살갑게 달라붙는통에 그만 마음이 헐렁해져서 주는 술을 다 받아마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취해서 꼬꾸라지고말았는데 눈을 떠보니 어뜩새벽이였다. 느낌이 불길해서 허리춤을 뒤져보니 아니나다를가 금고열쇠가 없었다. 령감이
허겁지겁 금고를 열어보니 금고는 텅 비고 그안에 있던 향악보랑 귀중품들이랑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는게 아닌가. 그제서야 사위녀석의 간계를
알아차린 령감이 집안사람들을 다그어대니 조금전에 사위가 부랴부랴 떠나갔다는것이였다. 령감은 눈알이 뒤집혀 지랄발광을 했다. 그러던 령감의 뇌리에
문뜩 향악보일로 사위를 무섭게 달고친다는 우달근이 떠올랐다. (분명 사위놈이 그자한테루 갔을게야. 그자가 향악보를 손에 쥐려구 사위놈과 짠게 틀림없어.) 이렇게 넘겨짚은 령감은 그달음으로 우달근의 주소를 알아내가지고 정신없이 사위를 쫓아왔던것이다.… 어쨌건간에 생사람 놓고 지랄쳐대는 꼴이 밉광스러워서 달근은 두상한테 도둑놈을 붙잡겠거들랑 다른데나 가보라구 욱박아줬다. 그랬더니 령감은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을러멨다는것이다. 《좋다, 이놈들! 내 이길루 당장 사위놈을 경찰에 고소하지 않나 봐라. 남의 재물에 손을 댄 놈들이 얼마나 발편잠을 자나 두구보잔 말이다,
이놈들!…》 령감이 사라져버리자 한시바삐 시미즈의 행방부터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우달근의 머리를 쳤다. 간사한 족속들인지라 장인사위가 짜고 한바탕
연극을 노는지 누가 알랴. 달근은 주먹을 부르쥐고 시미즈네 술집으로 달려갔다. 가보니 아닌게아니라 시미즈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데 어느새
알았는지 빚군들이 몰려와서 주인을 내놓으라고 악마구리 끓듯 끓고있는것이였다. 그 모양을 보니 기가 막히더라는것이다. 시미즈가 빚더미에 깔려있다는것은 알고있었지만 그 정도로까지 남의 돈 떼먹기를 례사로 일삼으며
돌아친줄은 우달근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것이다. 달근의 이야기를 듣는 리경식의 온몸은 잠간사이에 다 타버린 석탄덩이마냥 푹 꺼져들고말았다. 시미즈가 향악보를 가지고 사라지다니… 눈앞이
캄캄해왔다. 목적한 산봉우리에 거의 가닿다가 불시에 천길나락으로 굴러떨어졌다 해도 이다지는 참담할것 같지 않았다. 귀속에서 피가 소란스레
맥박치는데 그사이로 우달근의 열기 띤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난 시미즈가 숨을만 한델 알려구 점원들이랑 말해보면서 얼마쯤 술집에 머물러있었수다. 그러는데 갑자기 경찰이 나타나는게 아니웨까. 시미즈의
장인이 정말루 제 사위를 경찰에 고발한거우다. 그 령감이 도둑맞힌 물건도 물건이려니와 사위녀석이 달아빼면 빚군들의 행패질을 대신 겪어야 할게 더
끔찍해서 선손을 쓴것 같수다. 이를테면 자기두 같은 피해자라는거겠지요. 술집사람들을 불러서 주인에 대해 조사하던 경찰이 나한테두 말을
걸치더군요. 이름을 묻길래 대주니 대번에 경찰서에 함께 가줘야겠다나요. 보나마나 그 령감이 나까지 용의자루 몰아 경찰에 고해바쳤겠지요. 그깟
두상 그러겠으문 그러구 내가 꿈쩍할 까닭이 뭐겠수. 에라, 마침이다. 이 기회에 시미즈의 행처나 더 알아보자 하구 경찰서에까지 갔댔수다. 허참,
거기 가서 난데없는 졸경을 치를줄이야…》 우달근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후들거리는 손으로 담배를 붙여 물었다. 볼이 꺼지도록 담배를 들이빨던 그는 얼마후에야 소태씹은 인상이 되여
이야기를 계속했다. …경찰서에 간 달근이 어느 한 방에 들어서니 채권자인듯싶은 몇사람이 먼저 와서 시미즈를 고발하느라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고있었다. 달근은
자세한 형편을 파악하느라 애쓰며 시미즈와의 관계를 꼬치꼬치 캐묻는 경찰에게 적당히 답변했다. 그러는데 한옆에 앉아 오가는 말들에 귀를
도사리고있던 일본녀인 하나가 돌연히 눈에 쌍불을 켜달고 끼여들더라는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 댁이 바로 빠찡꼬점 주인이신가요? 그러지 않아도 찾아가려던 참이였는데 면바로 만났군요. <다마무시주점> 주인이 지금 어데
있는가요? 내 돈을 협잡해먹은 그 사기군이 어디에 숨었는지 터놓으세요. 어서요! 그러지 않으면 아예 이 자리에서 그 댁까지도 사기죄로
고소하고말겠어요!…》 어디서 무슨 소리를 얻어들었는지 우달근을 시미즈의 단짝인줄로 여기고 달려드는 모양이였다. 척 보기에도 암차고 영악스러워보이는 녀인이였다.
어떻게나 독이 올라 시악을 부리는지 녀인의 기세를 담기에는 방안이 다 비좁아보일 지경이더라는것이다. 달근이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쳐도 모자라
나중에는 경찰까지 달라붙어서야 겨우 녀인을 제지할수 있었다고 한다. 우달근이 뒤늦게 알아본즉 쯔루하시역전에서 초밥집을 운영하는 과부인데 명색은 《아라이스시》라는 초밥집간판을 내걸었지만 안방에 틀고앉아
고리대업을 주업으로 삼고 살아간다는 녀인이였다. 그런데 풍문을 들으니 그 녀자가 돈을 빌려주는 진짜의도라는게 리자보다도 채무자들이 담보로 내건
부동산을 뺏는데 있다니 참으로 지독스럽다 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서 우정 시미즈 같이 용렬하고 뒤가 뻔한 작자들만 족집게로 고르듯 골라가지고는
돈을 빌려주는데 채무상환기일이 지나기 바쁘게 빚담보로 삼았던 점포요, 토지요 하는것들을 가차없이 강제집행에 넘겨 삼키군 한다는것이다. 제아무리
뻔뻔하고 끈덕진 작자들이라도 그 녀인에게 한번 걸리면 종당에는 뼈속물까지 다 빨리운채 빈껍데기만 남고말았다. 여북했으면 동전 한잎을 받아내기
위해 천리길도 마다하지 않는 그 녀인을 두고 《벼룩가죽 벗길 녀자》라는 말까지 떠돌겠는가. 아무튼 그처럼 모질고 악바르게 고리대를 한 덕분에 녀인은 오사까에 발을 붙인지 10년도 못되지만 벌써 초밥집을 내놓고도 여러개의 점포들과
적지 않은 땅을 손에 넣었다고 한다. 시미즈의 《다마무시주점》도 그 녀자의 덫에 걸려든 먹이였다. 하지만 이번만은 사정이 달랐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을 감당할수 없게 된 시미즈가 어떻게 사기를 쳤는지 그 녀자외에 또 다른 사람에게서도
술집을 담보로 하여 돈을 호려냈던것이다.… 《결국 시미즈의 술집 하나를 놓구 두 채권자가 싸움질해야 할 판이니 그 내인이 독을 쓰게두 됐지요.》 리경식은 어수선해진 마음을 다잡지 못한채 달근의 말을 듣고있었다. (《아라이스시》?) 그저께 시미즈를 만나러 갔다가 본 한 녀인의 독이 오른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때 녀인의 입에서 《아라이스시》라는 이름이
튀여나왔었지. 그러니 시미즈가 그 녀자때문에 그렇게 바빠했는가. 하긴 채무상환기일은 박두해오고 사기행위는 들통이 나게 되였는데 장인령감은
령감대로 호락호락 향악보를 내놓으려 하지 않으니 바빠날수밖에 없었을테지.… 번거로운 생각을 달리는 경식의 귀전에 우달근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리선생, 거기서 내가 또 누굴 본지 아시우? 다름아닌 이찌가와를 보았수다. 야나가와꾸미에 갔다가 들은 그 사람말이우다.》 순간 경식은 전류에라도 감전된것처럼 흠칠 놀랐다. 이찌가와라니? 그러니 박상열이 또 나타났단 말인가? 가슴을 지지는듯 한 아픔이 되살아나는
속에 관자노리가 툭툭 뛰는것을 느끼며 경식은 우달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경찰에 불리워온걸 보니 시미즈의 장인이 이찌가와란 사람두 용의자루 고발한것 같더군요. 들은바대루 그 사람두 향악보때문에 시미즈와 꽤나
련계가 있었던가보우다. 헌데 기가 차서… 글쎄 시미즈가 어제 이찌가와한테두 찾아가서 나한테 한것과 꼭같은 소릴 줴쳤다질 않수. 돈을 넘겨주면
향악보를 가져다놓겠다구 말이우다. 그런 얕은 꾀에 이찌가와라구 넘어갈리가 없지요. 그렇게 되니까 시미즈는 향악보가 다른데 넘어갈지두 모르니 자길
탓하지 말라구 내뱉구는 사라지더라나요. 에익, 사람질 못할 놈 같으니… 시미즈가 나한텐 맞대놓구 말하지 못했지만 결국은 향악보를 미끼루 량쪽 다
뜯어내려구 롱간질한거우다. 비록 그 약아빠진자가 제 장인까지 제껴놓구 혼자 해먹으려다 헛물을 켜긴 했지만…》 《시미즈가 향악보를 이찌가와에게 가져간건 아닐가요?》 리경식이 불안스럽게 묻는 말이였다. 우달근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것 같진 않수다. 경찰서에 갔을 때 보니 이찌가와란 사람두 시미즈의 행방을 알지 못해 속이 뒤집혀있는것 같던데요. 여하튼 이거 난사는
난사우다. 시미즈 그 작자만 붙들면 어떻게든 향악보를 손에 넣겠는데 경찰서에까지 걸음을 해봤지만 통 기미를 챌수가 있더라구요. 경찰쪽에선 되려
내나 이찌가와를 통해 뭘 좀 알아내려다가 소득이 별루 신통칠 않으니까
돌려보내구맙데다.》 경식의 수척해진 얼굴에 착잡한 기색이 떠돌고있었다. 벌어진 일들로 미루어 시미즈는 처가집에 저당잡혔던 향악보를 훔쳐내오다가 령감이 하두
다급하게 뒤쫓는 바람에 급해맞아서 몸을 사린것 같았다. 기회를 엿보다가 소동이 가라앉으면 향악보를 가지고 다시 거래를 걸어보려는 속셈이였을수도
있었다. 하지만 본래 코앞의 리해관계에만 급급해하는자인지라 제 장인이 사위를 경찰에까지 고발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모양이다. 예상외로 일이
험하게 번져져 경찰이 수배에 나서고 장인령감이며 빚군들이 이를 갈면서 윽벼르는 형편에서 좀스러운 위인이 과연 여기에 나타날 엄두나 낼수 있을가?
간혹 시미즈가 도적고양이처럼 살그머니 나타난다 해도 이쪽이 아니라 박상열이나 다른 누군가에게로 찾아간다면?… 혈관을 조이는듯 한 촉박감이 다시금 경식을 일으켜세웠다. 그길로 리경식은 시미즈를 찾아나섰다. 우달근을 비롯한 오사까의 동포들이 경식을
도와나섰다. 이전부터 시미즈와 거래하고있던 사람들도 만나보았고 행여 다른 소식은 없는가 해서 경찰에도 줄을 놓아 탐문을 계속하였다. 지어
시미즈가 자주 다니던 색주가들까지 수소문해서 가보았다. 하건만 땅으로 잦아들었는지 시미즈의 행방은 좀처럼 알길이 없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불안과 위구는 더욱더 리경식을 힘겹게 압박해왔다. 시미즈가 오사까를 아예 떠나가버린것은 아닐가? 이미 향악보의 가치를
알고있는자이니 타고장에 가선들 리속을 못 채우랴 하는 제딴의 배심도 없지 않을것이였다. 하긴 빚독촉에 쫓겨 막다른 궁지에 몰리우자 장인에게서
향악보를 훔쳐내가지고는 줄행랑을 놓겠다고 애초부터 작정하고있었던지도 모른다. 시미즈는 열번도 더 그럴수 있는 인간이였다. 혹시 그자가 어느 틈에
박상열과 거래한것은 아닌지? 허나 상열이쪽에서도 시미즈를 찾느라 여간 분주하지 않다는걸 봐서 사정은 다를바없는것 같았다. 이러다가 끝내 시미즈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어쩐단 말인가. 모든것을 령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아니면 구만영선생이며 엄길호, 우달근을
비롯한 동포들과 처자앞에서 그리고 조국인민들앞에서 있는 힘껏 애썼지만 별수없었다고 맥빠진 변명을 늘어놓아야 한단 말인가. 이런 생각이 들 때면
경식은 한밤중에도 후닥닥 일어나 랭수를 벌컥벌컥 들이키군 하였다. 그러는 속에 보름 남짓한 시일이 흘러간 어느날 도꾜에서 귀국날자가 박두했으니 빨리 돌아오라는 련락이 경식에게로 날아왔다. 여느 동포들이라면
환희에 넘쳐 받아안았을 그 소식이 리경식에게는 왜 그리도 가슴 철렁하게 들려왔던가. 마치 시험답안을 채우지 못한 학생이 시험의 마감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는 심정이였다 해야 할지… 《오늘중으로 리선생을 보내라고 엄길호동지가 신신당부를 해왔습니다.》 련락을 가져온 조동수의 말이였다. 곁에 있던 우달근도 어떻게든 자기들이 기어이 향악보를 찾아 보내겠으니 여기 일은 걱정말고 어서 귀국하라고
등을 떠미는것이였다. 고마운 마음들이였다. 그런데도 경식은 그들의 꾸밈없는 말들이 자기의 무능함을 후려갈기는 채찍질처럼 여겨져 얼굴을 들수가 없었다. 정녕
이대로 귀국해야 하는가.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몸으로 어떻게 떳떳이 조국의 흙을 밟을수 있단 말인가. 설사 탓하는 사람은 없다 해도 뼈아픈
죄책감은 평생토록 마음을 괴롭힐것이 아닌가. 결코 그렇게 살수는 없다는 격렬한 웨침소리가 경식의 가슴벽을 아프게 두드려왔다. 그러나 다음순간 지금쯤 조국에 갈 차비를 하고 가장이 오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있을 안해와 아이들이 떠올랐다. 귀국선에 오를 날만
손꼽아 세여보며 희망에 부풀어있을 그들에게 인제 와서 귀국을 미루어야겠다는 말을 차마 어떻게 또 할수 있단 말인가. 이번 길에는 틀림없이
향악보를 손에 넣을줄로만 알고 서둘러 안해에게 귀국신청을 내게 한 자기가 아니였던가. 홀연 종아리가 아파왔다. 고향에 계시는 할아버지가 손자의 이런 꼴을 보았더라면 또다시 자신의 종아리를 사정없이 치게 하셨으리라. 경식은
거칠게 새여나오는 신음소리를 가까스로 눌러삼켰다. 이다지도 자기라는 인간은 조국과 겨레에게도, 처자들에게도 쓸모없는 보잘것없는 존재였단 말인가.
생각하고 또 할수록 무기력한 자신이 환멸스럽기 그지없었다. 걸음걸음 밀려드는 모진 번뇌와 쓰라린 좌절감에 시달리며 경식은 그날 도꾜로 가는
렬차에 몸을 실었다. 도꾜에 도착한 리경식은 엄길호가 있는 귀국대책위원회로 발길을 향했다. 엄길호를 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 전번처럼 또 귀국을
미루겠다고 말할가? 아니면 어쩔수없어 먼저 귀국하니 향악보를 부탁한다고 낯뜨거운 소리를 해야 하는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자신도 종잡을수가 없었다. 오로지 모든것을 터놓고싶은 심정뿐이였다. 당장에 엄길호를 만나 가슴속에서 끓어번지는
번열을 송두리채 쏟아놓아야만 잠시라도 괴로움에서 벗어날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귀국대책위원회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경식은 아무 말도 꺼낼수가 없었다. 엄길호가 동포들에게 에워싸여 한바탕 곤경을
치르고있었던것이다. 《이번엔 양보 못하겠으니까 귀국명단에 우릴 넣어주셔유.》 《우째 우리 집만 쏙 뽑았능기요?》 《회장, 내는 말이지 이번까지 보내주지 않으문 귀국선에 매달려서라두 기어-코 가겠당께로.》 서로 가로채며 겨끔내기로 법석대는 모양들로 보아 귀국명단에 들지 못해 안달이 난 동포들 같았다. 경식은 한동안 문가에 우두커니 서있을수밖에
없었다. 귀국대책위원회 회장이 된 후로 사람단련에 못 견디겠다는 푸념을 엄길호에게서 종종 들어왔지만 막상 대하고 보니 간단치가 않았다. 사람들에게 들볶이느라 쩔쩔매던 엄길호가 쉬여버린 목소리로 통사정을 한다. 《자 자, 한사람씩 차례로 말해야지 도무지 이거야 정신을 차리겠습니까. 가만, 분회장은 왜 또 나타난거요?》 둘러선 사람들중 한 사나이에게 눈길을 박으며 엄길호가 던지는 물음에 기다렸다는듯 사나이의 입에서 지청구가 터져나왔다. 《회장은 참으로 너무합니다. 그렇게까지 손이야 발이야 사정했는데도 끝내 날 빼놓는단 말입니까?》 귀국문제가 거론되는 이런 마당에서 분회장의 체면이나 돌보고있을 경황이 못된다는듯 사나이의 태도는 여느 동포들과 조그만치도 달라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엄길호도 더 참기 힘든지 버럭 역정을 내고야말았다. 《정말 답답하구만. 분회장이란 사람까지 이리 생떼를 쓰니 어디 일을 해먹겠소. 간부들이 너도나도 선참으로 귀국해버리면 총련은 어떻게
유지하고 남아있는 우리 동포들은 누가 돌본단 말이요? 어차피 60만이 한꺼번에 몽땅 귀국할수야 없는노릇이 아니요? 아무리 고집이 소발통이기로서니
그만큼 말했으면 알아들어야지.…》 비단 분회장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들으라는듯 엄길호가 기세를 올리는 소리였다. 그래도 분회장은 순순히 물러설 잡도리가 아니다. 《나더러 소발통이라 해도 좋고 리기주의자라 해도 좋습니다. 하여튼 내 말을 들어줄 때까지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테니 어디 누가 견디나
두고봅시다!》 《허 참, 억지가 사촌보다 낫다는건가.》 엄길호가 쓴입만 다시는데 누군가가 또 사람들을 비집고 주춤주춤 나섰다. 《이보이소, 회장어른!》 무뚝뚝한 령남말씨로 이렇게 부르며 나선 사람은 청자색양복에 나비넥타이까지 받쳐매고있어 제법 신수가 멀쩡해보이는 사나이였다. 사나이를 알아본
엄길호의 얼굴에 어리둥절해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아니, 캬바레주인이 어떻게?》 문가에 서있던 리경식도 그 사람을 알아보았다. 도꾜의 번화가에서 캬바레를 운영하는 그는 장사눈치가 빨라서 여느 동포들이 손대기 저어하는
까다로운 접객업만 골라서 해왔고 그것으로 돈을 모은 사람이였지만 동포사회에서는 감기고뿔도 남주기 싫어하는 린색한으로 랭대를 받고있는 인물이였다. 《꼭 드릴 부탁이 있어 찾아왔심니더.》 《뭔데요?》 《지 아들 두눔얼 공화국에 보낼수 없심니꺼?》 《?》 엄길호의 두눈이 대뜸 뎅그래졌다. 모여섰던 사람들도 덩둘해져서 캬바레주인을 쳐다보았다. 엄길호에게 퉁을 먹고 부어있던 분회장이 저으기
의아쩍어하며 되묻는다. 《아니, 그 댁이야 민단 아니요?》 퉁명스럽게 던지는 그 물음에 캬바레주인의 얼굴은 금시 얼어버리고말았다. 그 모양을 보는 경식의 마음속에서도 의혹의 파문이 일고있었다. 남쪽국적을 가지고있는 민단동포가 자식들을 북에 보낼 생각을 하다니? 분렬주의자들의 끈덕진 반북선전에 넘어가 적의와 편견의 시각으로 공화국을
바라보는 그들이 아닌가. 더군다나 돈벌이에만 눈이 어두워 조국이나 민족에 대해서는 아예 외면하다싶이 하며 살아온 저런 사람이 대관절 무슨
속궁냥으로 느닷없이 아들을 둘씩이나 북에 보내려고 하는건가?… 다들 영문을 몰라하는데 당황해서 허둥거리던 캬바레주인이 얼마후 더듬더듬 이런 말을 하는것이였다. 《렴치불고하다카실줄 알지만도 딴 도리가 없어 찾아왔심니더.… 우짠 팔잔지 지 아들 두눔이란게 다 깡패질을 허구 돌아칩니더. 만날 싸움질이구
칼부림인게라 경찰한테 늘 쫓기는 신센기요. 지나 마누라넌 자식눔들때문에 속이 타서 인젠 재만 남았심니더. 그눔들얼 친척들이 사는 이남땅에 보낼
생각두 해봤지만도 세상 험악하기사 거기락고 일본과 다를게 뭐가 있겠심니꺼. 믿을덴 이북밖에 없심니더. 이대루 자식눔들얼 일본땅에 그대루 둬두문
야꾸자질이나 계속하다가 신세럴 망치던가 아니문 기껏해서 나 같은 돈벌레밖에 더 되겠심니꺼. 회장어른, 지발 부탁입니더. 그눔들얼 사람 만들게
이북에 좀 보내주시이소.》 캬바레주인의 두눈에서 물기가 떨었다. 불현듯 방안에 침묵이 깃들었다. 절절하게 울리던 그의 하소연을 되새기며 리경식도 선자리에서 움직일줄을
몰랐다. 우리 공화국의 사회주의제도가 얼마나 미더웠으면 저렇듯 민단동포들까지
자식들만은 이북에 맡기겠다고 기를 쓰고 나서는것이랴. 사실 귀국을 희망하여나선 동포들의 절대다수가 고향을 남녘땅에 두고있는 사람들이였다. 선조의 유골도 거기에 묻혀있었고 일가친척들도 거기서
살고있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남으로 갈수 있는 그들이건만 한결같이 공화국에로의 귀국을 갈망하고있는것은 무엇때문인가. 심지어 민단의
극우보수분자들속에서도 남쪽으로 귀국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다지 않는가. 후더운것이 밀려드는 경식의 마음속에 귀국선의 자태가 우렷이 다가왔다. 귀국사업이 벌어지던 초시기 조국에서 보내준 귀국선은 울라지보스또크항에 선적을 둔 쏘련려객선들이였다. 방금 전쟁을 끝낸 나라에서, 아직은
경제토대가 미약하고 재정적으로도 여유가 없던 나라에서 하루이틀도 아니고 근 10년간이나 돈을 주며 외국의 대형려객선들을 빌려쓴다는것은 말처럼
헐한 일이 아니다. 하건만 공화국은 벽돌 한장이 귀한 어려운 형편에서도 잃었던 자식들을 찾아오는 심정으로 온갖 로고를 아낌없이 쏟아부었던것이다. 그렇듯 크나큰 사랑을 기울이면서 조국이 언제 한번 우리에게 대가를 바란적이 있었던가. 이역땅의 자녀들을 떳떳이 내세우라고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어김없이 보내주면서도, 한푼의 외화가 귀중한 때에 숱한 외화를 들여 외국의 큰 배들을 귀국선으로 용선하면서도 재일동포들에게 단돈 한푼
요구한적이 없는 사회주의조국이였다. 참된 사랑이란 그런것이다. 값이 정해져있는 사랑이라면 그것은 벌써 거짓사랑이 아니겠는가. 그때문일것이다. 새들이 해볕을 찾아 보금자리를 틀듯이 진정을 따르는것은 인간의 본성이기에 고향을 남에 둔 수많은 재일동포들이 공화국을
어머니품으로 여기며 그 품에 운명을 의탁하는것이 아니랴. 나무뿌리의 즙이 가지들로 솟아오르듯이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그 어떤 열렬한 힘이 불시에 온몸으로 미쳐왔다. 그것은 긍지였다. 수천수만번의
곤경속에서도 부서지지 않을, 자신에겐 어머니라 스스럼없이 부르는 진정한 조국이 있다는 가슴벅찬 자부심이였고 믿음이였다. 개인의 운명만을 생각하는 인간은 나약해지기마련이다. 자신의 운명을 조국의 운명과 하나로 결합시킬 때 인간은 강해지며 삶의 보람과 사명을
찾게 되는것이다. 리경식은 자기가 엄길호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를 높뛰는 심장으로 깨달았다. 하여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다 돌아가자 그는 주저없이
엄길호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님, 전 향악보를 찾기 전엔 절대로 귀국하지 않겠습니다.》 엄길호의 눈섭꼬리가 움씰 들리웠다. 그는 휘우듬한 입을 꾹 다물고 물끄러미 경식을 바라보다가 한마디 던지는것이였다. 《그럼 처자들은?…》 리경식의 묵직한 얼굴에 동요하는 빛이 떠돌았다. 안해와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제나저제나 조국으로 갈 날만을 고대하고있을 그들에게 자기를 기다려 무한정 일본땅에 남아있으라고
할수는 없는 일이였다. 아니, 그래서는 안된다. 그들만이라도 한시바삐 조국의 품에 안기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것이 가장으로서의 당연한
도리라고 경식은 생각했다. 고개를 수굿한채 생각에 잠겨있던 경식이 결연히 대답했다. 《아무래도 처와 아이들부터 먼저 귀국시켜야 할것 같습니다.》 엄길호는 천천히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물그물 피여오르는 담배연기사이로 무거워진 그의 안색이 비쳐왔다. 경식은 흥분을 누르며 묵묵히 엄길호를 지켜보았다. (이 형님이 내 심정을 알아줄가? 날더러 가족들과 함께 귀국해야 한다고 설복하려들지도 모르지. 아무튼 그리할수는 없다. 조국을 위해 내
할바를 다하지 못한채 어떻게 떳떳이 귀국선에 오를수 있단 말인가.) 벌써부터 엄길호앞에 쏟아놓을 불같은 말들이 가슴속에서 고패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러는데 담배 한대를 다 태우고난 엄길호가 불쑥 경식에게
묻는다. 《이 사람 경식이, 자네 찌꾸호탄광때가 생각나나?》 《?…》 한순간 경식은 어리둥절해졌다. 찌꾸호탄광! 그곳은 왜정말기 경식이 끌려갔던 죽음의 징용터였다. 토목공사장에서 일하던 엄길호도 거기에 끌려가
경식이와 함께 짐승보다 못한 징용살이를 치르지 않았던가. 헌데 갑자기 그런 말은 왜 꺼내는가?… 경식이 의아해하는데 혼자소리처럼 뇌이는 엄길호의 처연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우린 상가집 개만도 못한 신세들이였지. 피눈물인들 좀 많이 흘렸나.》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쳐지는 세월이였다. 간데라불빛이 어둠속으로 빨려들어가던 시커먼 굴길, 탄가루와 땀에 범벅이 되여 사람인지 석탄인지 분간조차 할수 없던 반벌거숭이의 앙상한
몸뚱이들, 무너진 갱속에서 살려달라고 부르짖던 동포들의 절망에 찬 곡성들… 걸핏하면 《빠가나 조센징》(바보같은 조선인)이라고 패대면서 사람을 소나 말만치도 여기지 않는 살인적인 노예로동도 참기 힘들었고 허기진
창자를 채우려고 다이나마이트까지 먹지 않으면 안되였던 지독한 굶주림도 참기 힘들었지만 그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던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과연
무엇이였던가.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어느날 남양전선에 끌려나갔던 탄광마을의 일본청년들이 《천황페하를 위해 순사한 전몰장병》들이 되여 돌아왔다.
하얀 보자기로 싼 유골함들이 단우에 놓여지고 유족들과 탄부들이 빙 둘러서서 죽은 혼들을 바래웠다. 탄투성이가 된 해골같은 얼굴에 두눈들만
멍청하니 데룽거리는 조선인징용자들도 그 자리에 끌려나왔다. 일본인들은 전쟁을 겪느라 지쳐빠졌지만 《가미가제국민》답게 빳빳이 서서 군가 《우미 유까바》를 울며 합창했다. 조선사람들도 따라불러야 했다.
바다에 가면 물에 잠긴 주검, 산에 가면 풀에 묻힌 주검, 페하를 위해 죽는 이
몸 뒤도 돌아보지 않으리. … 덧없이 허공중을 때리며 애절하게 거듭되는 군가를 따라부르느라니 왜서인지 경식은 눈물이 왈칵 솟구쳐나왔다. 왜놈들의 일에 조선사람이 웬
눈물이냐는듯 곁에 있던 엄길호가 눈을 부릅떴지만 경식은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걷잡을수가 없었다. 그날 밤 그는 엄길호앞에서 가슴을 두들기며
오열을 터뜨렸다. 《형님, 그래두 저것들은 죽으면 울어줄 나라라도 있지 않나요. 내게두 그런 나라가 있으면 열번을 죽더라두 한이 없겠수다. 그게 서러워서
우는겁니다. 대관절 우리가 사람인가요, 짐승인가요? 살아도 의지할데가 없구 죽어도 슬퍼해줄 나라가 없는 우리 같은것들이 사람이 맞긴 맞는가
말입니다?!》 비분에 절어 울부짖는 경식을 부여잡고 엄길호도 꺽꺽 흐느끼지 않았던가. 세상살이에는 배고픈 설음도 있고 혈육을 여읜 설음도 있다. 허나 설음설음 해도 가장 큰 설음은 지켜주고 보살펴주는 나라가 없는탓에 사람으로
태여나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망국노의 쓰라린 설음이였다. 《왜놈의 종살이를 한 조선사람치구 가슴에 피멍이 들지 않은 사람이 어데 있겠나. 그래서 제 나라를 더 소중해하는거지. 아무렴, 도리를
모르면 사람이 아니지.》 엄길호의 말이였다. 경식은 그의 얼굴에 비껴흐르는 한줄기의 미소를 보았다. (그러니 내 심정을 다 읽었다는건가?) 불덩이마냥 달아오른 경식의 뜨거운 눈망울을 바라보며 엄길호는 찬동하여 도장이라도 찍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집에 들어간 경식은 자기를 반겨맞는 처와 아이들에게 선뜻 결심을 털어놓을수가 없었다. 안해는 벌써 이사짐을 거의다 싸놓고있었다. 수영이와 수남이도 아버지에게 매달려 배를 타게 되였다고 좋아라 두발을 동동 구르는것이였다. 향악보를 찾았는가고 묻는 안해에게 경식은 엉겁결에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끄덕여보였다. 그러자 가량가량한 순분의 얼굴가에 안도의
기색이 피여올랐다. 남편의 일을 두고 무척도 속마음을 조여온 모양이였다. 순분은 조국으로 갈 때 남편에게 입히려고 사온 새 양복을 꺼내놓았다. 경식의 낯빛이 어둑하니 흐려졌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안해에게 새옷
한벌 변변히 사주지 못한 그였던것이다. 새 생활에 대한 기대와 기쁨으로 부풀어있는 안해에게 차마 실망을 안겨줄 용기가 나지 않아 경식은 끝내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말았다. 그날 밤이였다. 밤늦도록 재깔거리며 들떠있던 아이들은 어느새 부모들짬에 끼여 쌔근쌔근 코를 골고있었다. 자리에 누워 그간의 집안일을 두서없이 전하던 안해
역시 어지간히 곤했던지 이야기를 채 마치지도 못한채 잠들어버린지 오랬다. 어디선가 우동장사군의 입나팔소리가 간간이 들려오는데 창유리로 비쳐드는
희푸른 달빛이 불꺼진 방안을 호젓이 어루더듬고있었다. 하건만 경식은 뜬눈으로 그밤을 보내고있었다. 막상 가족과 헤여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황혼의 조수물처럼 허전한 느낌이 자꾸만 가슴속으로
밀려들었던것이다. 아버지없이 가게 된다는걸 알면 아이들이 얼마나 서운해하랴. 남편과 기약없는 리별을 해야 할 안해의 심정은 또 어떻고… 그래, 기약없는
리별이랄수밖에. 지금의 형편에서 향악보를 인츰 찾는다는 담보는 어디에도 없지 않는가. 이러다가 정말 오래동안 가족과 떨어져있게 되는건 아닌가.… 이런 생각을 거듭하느라니 그동안 쌓인 무거운 피로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번거로이 엇갈리는 시름들을 뿌리치며 이리저리 뒤척이던 경식은 얼핏 저켠에 누워자는 안해를 보았다. 안해는 수남이와 한이불을 덮고있었는데
아들애가 갈개잠을 자는통에 홑이불이 반나마 벗겨져있었다. 경식은 슬그머니 일어나 그리로 다가갔다. 안해와 아들애를 다시 덮어주고 이불깃을 여며주던 경식의 눈길이 달빛에 드러난 순분의 얼굴에
가멎었다. 안해는 무거운 짐을 부린 운반부마냥 고단하게 자고있었다. 하긴 오늘도 하루종일 삯빨래를 하였다니 퍼그나 지쳤을것이다. 그렇게 아글타글 모은
돈으로 새 양복도 사왔을테지. 풋사과인양 청초하던 처녀때의 자태가 석양빛처럼 희미해져가는 순분의 모습을 경식은 우두커니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안해에게서 홍안의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얼굴에는 군데군데 잡티가 생겨나고 곤하게 노그라져서인지 입에서도 단내가 났다. 그제서야
경식은 비로소 안해의 눈귀며 입귀에 때이르게 박히기 시작한 가시주름을 알아보았다. 어째서 안해가 늙어간다는 사실을 인제야 문뜩 깨닫게 되였을가?
처에게 너무도 무관심했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갈마들었다. 경식은 안해의 이마우에 흐트러져 드리운 몇오리의 머리카락을 조심히 쓸어올려주었다. 남편의 체온이 닿자 굳잠에 녹아든줄 알았던 안해의 눈이
가슴츠레 떠진다. 잠기가 무겁게 실린 눈길로 남편을 바라보던 안해는 행복한 꿈이라도 꾸듯 살풋이 웃으며 다시금 스르르 눈을 감는것이였다.
어린애같이 남편의 손을 더듬어잡고 고르게 숨을 쉬면서… 허옇게 닳아있는 안해의 소매끝이 경식의 눈을 아프게 찔러왔다. 마음이 쓰라렸다. 귀국을 눈앞에 둔 오늘까지도 험한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안해였다.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 말없이 바치기만 해온 그
나날에 안해의 고생인들 오죽했으랴. 그래도 안해는 그것을 고생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로지 남편의 사랑 하나면 고생도 락으로 여기는 녀자였다. 그런 안해에게 이날이때껏 해준것이 무엇이였던가. 사랑한다는 말조차 제대로 해준적이 없는것 같았다. 정말 그랬다. 안해와 처음 만날 때에도 경식은 그 말을 하지 못하였다. 세상에는 사랑이란 말을 노래처럼 외우는 사람들도 많건만 왜서 경식은
그 말을 입에 올리기 그리도 힘들어하였던가. 쑥스러워서였던가 아니면 가슴속에 품고있는 소중한 감정을 함부로 내보이기 저어해서였던가. 미안했다. 고생하는 안해에게 자그마한 기쁨을 안겨줄 살뜰한 말 한마디 해주지 못하고 살아온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과연 자기가 안해를
사랑하지 않았던가. 아니, 사랑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안해를 사랑했고 고맙게 여겼다. 궂은 길을 걸을 때나 마른 길을 걸을 때나 그가
바라보던 곳에는 언제나 어머니조국과 함께 안해와 자식들이 있지 않았던가. 경식은 남자들의 손만치 거칠어진 순분의 손등을 뜨겁게 어루만졌다. 안온하고 애정깊은 표정이 안해의 잠든 얼굴가에 고즈넉하게 어려있었다.
그지없이 청순한 모습이였다. 불쑥 이 시각 안해에게 고백하고싶은 욕망이 불길마냥 솟구쳐올랐다. 사랑한다고 말하고싶었다. 지금껏 터놓지 못한 그 모든 진정을 다 담아서,
안해를 대할 때마다 밀려들군 하던 그 모든 미안함과 고마움을 다 담아서 사랑한다고 심장으로 고백하고싶었다. 그것은 생활의 첫 기슭에서 보라빛꿈을 꾸며 터치는 청춘들의 고백이 아니였다. 다난한 세파에 부대끼면서 서로를 리해하고 공감한 숯불같은
중년의 고백이였다.… 얼마후 경식은 달아오른 가슴을 식히려고 밖으로 나갔다. 군청색밤하늘에서 하많은 뭇별들이 제나름의 만단사연을 하소연하듯 쉬임없이
깜빡이고있었다. 경식은 담배를 태우며 오래도록 그 별들과 마음속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