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 회)
6. 비운의 시절에 얼마후 리경식은 아라기의 별장을 나섰다. 가네다가 함께 가자고 따라나섰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래일부터 장서정리를 함께 해야 할 처지였던만큼
별수없이 경식은 그와 동행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정작 밖으로 나왔지만 가슴속의 번열은 좀처럼 가셔지지 않았다. 경식은 후- 하고 긴숨을 내긋고나서 고마역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말라죽은 풀들이 찬바람에 나붓긴다. 기울어가는 태양이 비스듬히 구름뒤에 걸려 피곤하고 싸늘한 어스름빛을 던져주고있었다. 한동안이 지나도록 두사람사이에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말수가 많아보이던 가네다 역시 어찌된 일인지 묵묵히 걸음만 옮기고있을뿐이다. 삼나무들이 늘어선 들길에 나서자 고마천의 물소리가 한가하게 따라왔다. 완만한 구릉으로 둘러싸인 고마무라의 모습이 눈앞에 안겨왔다. 고마천이
굽이져 도는 곳에 자리잡은 주머니모양의 논이며 경사가 느린 산중턱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농가들… 농가들의 뾰족한 지붕우로 가느다란 연기가
솟아오르고있었다. 평화로운 그 정경을 바라보느라니 달아올랐던 마음이 다소나마 가라앉는것 같았다. 문득 《고마무라》라는 이 지방의 지명이 리경식에게 새삼스러운
생각을 불러일으키는것이였다. 일본인들은 《고마》라는 말을 한자로 《高麗(고려)》라고 표기한다. 그런데 여기서 《고려》 다시말해서 《고마》는 일본인들이 흔히
《고우라이》라고 부르는 918년에 성립된 고려가 아니라 그 이전시대의 고구려를 가리키는 말이였다. 고대일본인들이 고구려를 《고마》라고 부르고
때로는 백제와 신라를 포함한 조선반도전체를 가리켜서도 《고마》라고 부르게 된데는 단군의 어머니가 곰이였다는데로부터 예로부터 곰을 신성시해온 우리
조상들의 유습이 일본에까지 전해진것과 중요하게 관련되여있었다. 결국 《고마무라》란 《고구려촌》이라는 의미였다. 경식은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그 어떤 충동을 느끼며 느닷없이 가네다에게 이런 물음을 던졌다. 《가네다씨, 혹 <고마무라>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 알고계시는지요?》 뜻밖의 질문인듯 가네다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어정쩡해보이는 태도로 대답하는것이였다. 《글쎄요. 지명의 뜻을 보아서는 조선반도와 그 어떤 련관이 있어 보이는듯 합니다만…》 경식은 그 말에 머리를 끄덕여보였다. 《옳습니다. 나도 언젠가 력사책을 보다가 알았는데 거기엔 흥미있는 사연이 깃들어있습니다. 7세기 후반기에 고구려가 멸망하자 약광이라는
고구려왕족이 가족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왔답니다. 그후 도꾜주변에 흩어져 살던 고구려유민들이 무인지경이였던 무사시노벌판에 모여들어 고려군을
설치하고 약광을 군장으로 올려앉혔다고 하더군요.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반도에서 건너오는 유민들에게 환대정책을 실시하였는데 그건 이들이 말타기와
농업기술을 비롯해서 선진문화를 일본에 보급해주었기때문이지요. 고구려사람들의 영향으로 개척된 무사시노벌판은 명치시대에 이르러 일본에서 쌀생산의
절반을 차지하는 곡창지대로 되였고 <고마무라>라는 지명도 바로 그런데서 생긴것이라고 합니다.》 《아!》 가네다는 감심한듯 탄성을 뽑았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과연 이 지방에선 <고마>라는 말을 흔히 찾아볼수가 있군요. <고마천>, <고마신사>, <고마고개>, <고마산>… 참, 고마역에 내려 제일먼저 눈에 뜨이는 <천하대장군>과 <지하녀장군>이라는 표말도 꼭 조선의 마을어구들에 세워진 장승을 보는것만
같습니다.》 《아니, 조선의 장승들을 보신적이 있는가요?》 경식은 저으기 놀라 이렇게 묻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자 가네다는 한순간 쭈밋거리는것 같더니 다시금 말을 이어나갔다. 《아, 그저 좀… 그러고보면 일본어의 <고마>(망아지, 말)나 <고마게다>(일본 나막신의 하나), <고마이누>(신사나 사찰앞에 사자
비슷하게 형상하여 마주놓은 한쌍의 돌조각) 같은 낱말들도 모두 <고마>(고구려)와 련관이 있을듯싶군요.》 경식은 가네다의 재빠른 머리회전에 내심 혀를 차며 그의 말을 수긍하였다. 《적지 않은 일본학자들도 그렇게 생각하는것 같습니다. 하기야 일본에 건너온 조선사람들의 흔적이 어디 이 고장에만 남아있는가요. 8세기에
야마또국가의 수도였던 <나라>의 지명도 국가를 의미하는 조선말 <나라>를 그대로 옮긴것이고 도꾜도와 사이다마현을 포괄하는 옛 지명인
<무사시노>도 <모시씨>라는 조선말에서 유래된것이라고 합니다. 모시풀의 씨를 심었던 곳의 이름이 점차적으로 퍼져 마침내 넓은 무사시노의 지명이
되였다는거지요. 결국 누구든 조금만 눈여겨 살펴보면 고대시기부터 일본에 영향을 미쳐온 조선문화의 자취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수 있다는
이야기겠지요.…》 어지간히 성수가 오른 리경식의 얼굴에서는 무의식적인 긍지가 력력히 흐르고있었다. 아닌게아니라 이 시각 경식은 이런 이야기를 가네다가 아니라
다름아닌 아라기 사다오에게 쏟아놓고싶은 심정이였다. 허황한 과대망상과 자고자대에 환장이 되여 조선민족을 함부로 릉멸하는 그자에게 저들이 우상처럼
떠받들고있는 《황국사관》과 《야마또우월주의》가 얼마나 위선에 찬 허구인가 하는것을 낱낱이 까밝히고싶었다.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를 살아오면서
동방문화를 찬란히 꽃피워온 조선민족을 소리높이 자랑하고싶었다. 《하하하…》 경식의 이야기를 들으며 골똘한 생각에 잠겨 걷던 가네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경식이 의아해서 돌아보자 가네다는 여전히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오구라씨의 말을 듣고나니 아라기 사다오라는 령감이 퍼그나 희극적인 존재로 느껴지는군요. 조선사람들이 개척해놓은 땅에서 살면서 조선사람들을
멸시하니 말입니다.》 가네다의 굵은 대모테안경속에서 총기있는 작은 눈이 민첩하게 깜빡이고있었다. 경식의 마음은 슬며시 긴장되였다. 가네다가 자기의 속을 환히
꿰뚫어보고있는듯 한감을 느꼈던것이다. 이 사나이는 도대체 어떤자일가? 한날한시에 이곳에서 만난것이 단순한 우연일가? 과연 이 사나이가 아라기의
장서에서 노리는것은 무엇일가? 지나치게 속을 주어서는 안되겠다는 경계감이 불쑥 솟구쳐올라 경식은 대수롭지 않은듯 가네다의 말을 받았다. 《그 늙은이는 워낙 군인출신인지라 력사에 대해선 그닥 아는게 없겠지요.》 다음순간 웃음기가 떠돌던 가네다의 두눈에 야유의 빛이 스쳐갔다. 가네다는 누구에겐지 모를 코웃음을 치고는 짧게 도리를 흔들었다. 《과연 아라기가 력사를 몰라서일가요. 설사 알려준다고 해도 조선사람들이 일본에 문명을 가져다주었다는 사실을 인정할바엔 차라리 모래판에 혀를
박고 죽자고 할겁니다. 일본은 신의 자손인 천황이 다스리는 나라요, 천황의 나라는 세계에서 으뜸이라고 생각하는자들이니까요. 한마리의 개가 잘못
짖어대면 천마리의 개들이 따라짖는다더니 그런자들때문에 많은 일본인들의 력사의식은 아직까지도 <황국사관>이라는 황당무계한 허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는것이 아니겠습니까. 내 말이 틀렸습니까?》 가네다의 물음에서는 의문부호가 느껴지지 않았다. 경식은 의혹이 비낀 눈길로 가네다의 동그란 얼굴을 바라보았다. 약빠른 고서업자인줄로만
알았던 사람의 입에서 이런 말까지 나오다니… 도무지 속을 알수 없는 사나이였다. 《정말 보통이 아니시군요. 헌데 일본인으로서는 좀 지나친 사고가 아닐가요. 그러다가 비국민이라는 소리를 듣겠습니다.》 경식의 말에 가네다는 소리없이 웃더니 심상한 어조로 대꾸하는것이였다. 《아무리 일본인이라 해도 진실이야 어디까지나 진실이지요.… 더우기 난
일본인은 아니니 비국민으로 몰릴 념려는 없습니다.》 경식은 그만 어리벙벙해지고말았다. 너무도 뜻밖이였던것이다. 《일본인이 아니라니, 그럼? …》 가네다의 두눈에 능청스러운 불꽃이 타올랐다. 《혹 <구다라징>이라는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요?》 《<구다라징>?》 경식은 가네다의 말을 얼결에 받아외우며 미간살을 모았다. 무엇인가 예감 같은것이 서서히 가슴을 두드려온다. 세월의 갈피속에 묻혀있던
어슴푸레한 기억들이 보일듯말듯 뇌리에 어른거렸다. 웬일인지 가네다가 안경을 벗어들었다. 그러자 눈등에 난 흠집이 유표하게 드러났다. 유심히 그 모습을 눈여겨보던 경식의 입에서 갑자기
놀라움에 찬 소리가 새여나왔다. 《아, 이께부꾸로역앞에서 만났던 그 <구다라징>!》 《허허, 인제야 날 알아보시겠소.》 가네다가 히죽이 웃으며 하는 말이였다. 분명 그것은 조선말이였다. 경식은 저도 모르게 눈굽이 화끈해졌다. 《이렇게 만나다니…》 《반갑소, 친구!》 두 사나이는 으스러지게 손을 그러잡았다. … 그들의 인연은 비분처절했던 스무해전의 그 시절에 맺어졌다. 해를 거듭할수록 중일전쟁의 수렁속에 더욱더 깊숙이 빠져들게 되자 일제는 《전쟁완수》라는 간판밑에 《국민징용령》을 공포하고 15살부터
50살까지의 로동능력있는 조선의 청장년들을 죽음의 고역장에 닥치는대로 끌어갔다. 중세기의 노예사냥을 방불케 하는 가혹한 장면들이 조선의
방방곡곡에서 매일과 같이 펼쳐졌다. 길을 가던 사람들, 밭에 있던 농민들, 집에서 잠을 자던 청년들이 영문도 모르고 붙들려갔다. 지어 결혼식상을
받던 신랑까지도 그 자리에서 강제로 끌려가는 판이였다. 고향에서 농사를 짓던 리경식에게도 어느날 마른하늘의 벼락같이 징용장이 날아들었다. 그날 밤 큰아버지는 경식이앞에서 넉두리마냥
하소하는것이였다. 《어려서 부모잃은 너한테 잔뼈가 굵기두 전에 호미자루를 들게 했는데 인제 징용까지 보내야 하니 내 죽어서 돌아가신 네 부모들을 어떻게
대한단 말이냐.》 큰어머니도 그리고 페결핵을 앓고있어 징용에서 면제된 사촌형이며 사촌누이들도 눈물속에 온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할아버지는 그때 몸져누워있었다. 막내손자에게 징용장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할아버지는 초약그릇도 밀어놓고 벽을 향해 돌아누운채
거치른 숨만 하염없이 몰아쉬였다. 그러던 할아버지가 다음날 징용터로 끌려나가는 경식이를 부여잡고 식구들이 울음을 터뜨렸을 때 자리를 차고 벌떡
일어나 앉으며 가슴속에서 이글거리던 천불을 와락 터뜨리는것이였다. 《썩 그치지들 못할가! 엎어진 둥지에 성한 알이 어디 있을고!》 밤새 주름고랑이 더욱 깊어지고 눈시울이 벌겋게 부어오른 할아버지의 얼굴은 한많은 세상에 대한 뿌리깊은 적의와 울분으로 하여 경련하듯
푸들거리고있었다. 경식이가 할아버지앞에 무릎을 꿇고 울먹이며 하직인사를 올리자 피줄이 불거져나온 할아버지의 여윈 손이 손자의 손을 꽉
그러쥐였다. 《경식아, 늑대한테 물려가도 제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어디 가든지
조상의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게 살아야 하느니라.》 준절하게 울려온 할아버지의 마지막당부였다. 순사들에게 끌리워 동구밖을 나서던 경식이 집쪽을 돌아보니 사립문을 붙잡고 서서 멀어져가는 손자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안겨왔다. 파뿌리모양 세여버린 할아버지의 머리칼이 강쇠바람에 마른 풀잎같이 흩날리고있었다. 할아버지의 두눈이 물에
젖은 돌처럼 번쩍이였다. 경식은 참을길 없는 흐느낌에 숨을 헐떡거리며 할아버지와 정든 사람들을 향해 다시한번 꾸벅 절을 올렸다. 그렇게 골육들과 생리별을 당한 경식은 수많은 젊은이들속에 끼여 일본으로 끌려갔다. 왜놈들의 총칼에 떠밀리우며 낯설은 이역땅에 내린 그들은 부두의 가설건물에 갇혀 하루밤을 보내고나서 이튿날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북쪽을
향해 달렸다. 화물칸에 짐짝처럼 실려 어딘지 알수 없는 곳으로 속절없이 끌려가는 조선사람들의 얼굴마다에는 원한과 절망, 체념의 그림자가 무겁게
드리워있었다. 누군가가 북해도에 끌려가는것 같다고, 북해도에 가면 꼼짝없이 죽는다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을 듣는 경식의 피줄로 차디찬 전률이 줄달음쳤다. 숨이 꺽 막혀왔다. 이대로 왜놈들의 노예살이를 하다가 타향의 외진 곳에 무주고혼으로
묻혀야 한다고 생각하니 설음인지 공포인지 모를 그 무엇이 덩어리로 뭉쳐 목구멍을 꽉 메우는것만 같았다. 지루하게 달리던 기차가 어느 한 곳에 잠시 멈춰섰을 때였다. 화물칸의 틈새로 밖을 내다보던 옆사람이 동경인것 같다고 중얼거리는것이였다. 그
순간 경식은 도꾜에서 산다는 이종사촌형의 주소가 떠올랐다. 기회를 봐서 거기로 찾아가라며 고향을 떠나오기 전에 큰아버지가 알려주었던것이다.
억누를길 없는 격렬한 욕구가 온몸을 휘감았다. 살아야 한다는, 기어코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심장의 거치른 웨침소리에 경식은 마침내
결심을 굳히고말았다. 기차가 다시 도꾜를 떠나 얼마간 달렸을 때 경식은 왜놈보초에게 찾아가 변소에 가겠다고 말했다. 보초는 처음에는 안된다고 눈을 부라리다가
경식이가 죽는 시늉을 하며 사정을 하자 그러면 옷을 벗어놓고 가라고 호통을 쳤다. 별수없이 경식은 아래도리의 속옷만 내놓고는 입었던 옷을 모두
벗어놓을수밖에 없었다. 변소간에 쭈그리고 앉아 동정을 엿보니 보초는 옷까지 벗어놓은 경식이가 설마 달아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는지 이쪽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게다가 놈들은 더웠던지 승강구의 문까지 열어놓고있었다. 경식은 이때라고 생각하고 조심스레 변소를 나와 승강대에 다가섰다. 칠흑같은 야밤이였다. 기차는 컴컴한 들판우를 빠른 속도로 달리고있었다.
평소 같으면 도저히 엄두도 내지 못할 정황이였지만 당장이라도 놈들이 달려와 뒤덜미를 덮칠것만 같아 경식은 이를 악물고 허공중에 몸을 내던졌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가 뛰여내린 곳은 도꾜교외의 한 고구마밭이였다. 뛰여내릴 때 쇄골과 한팔이 부러져 제대로 운신할수 없게 된 경식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기차가 온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가고 또 갔다. 그러던 그는 어느 길섶에 이르러 그만 의식을 잃고말았다. 다음날 아침 누군가가 툭툭 몸을 건드리는 바람에 경식은 정신을 차렸다. 그를 발견한 사람은 짐차를 몰고 지나가던 일본인운전수였다. 옷도
걸치지 못한채 피투성이가 되여 쓰러져있는 모습에서 사연을 짐작한 그 일본인은 경식을 조선사람들이 있는 근처의 함바(밥집)로 데려다주었다.
그곳에서 경식은 엄길호를 비롯한 동포들을 만나게 되였다. 그때 토목공사장에서 인부로 일하고있던 엄길호는 리경식을 친동생처럼 극진히 돌봐주었고 경식이가 대준 이종사촌형의 주소에 소식도 띄워주었다.
며칠후 이종사촌형이 나타나 경식을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도꾜의 뒤골목에서 자전거포를 운영하던 이종사촌은 사지판에서 자기를 믿고 찾아온 경식을 위해 여러모로 애를 써주었다. 그의 도움으로 경식은
경찰이 발급한 신분증을 손에 넣게 되였고 어지간히 몸도 추세울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얹혀살수만은 없어 몇달후 경식은 이종사촌에게
일자리를 하나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되여 들어간 곳이 일본인이 운영하는 어느 고물회사였다. 회사에는 스무명가량의 인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거기서 먹고 자는 대신 정해진 량의 고물들을 날마다 모아들여야만 했다. 아침이면 주인은
인부들이 밥술을 놓기 바쁘게 손수레를 하나씩 맡겨 밖으로 내몰았다. 그러면 인부들은 손수레를 끌고 집집을 돌며 낡은 옷가지나 그릇붙이, 유리병
등 돈이 될만 한 잡다한 고물들을 수집하군 하였다. 일본에서 흔히 말하는 《보로(넝마)장사》라는게 바로 이런 일이였다. 얼핏 보기엔 단순한것 같아도 막상 경식이 그 일을 하자니 어려운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우선 일본말을 변변히 못하는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값이 나가는 물건들을 제대로 알아본다는것이 쉬운 일은 아니여서 어떤 날에는 종일토록 모은 고물들이 아무 쓸모없는 물건짝들인지라 하루
밥벌이는커녕 주인의 욕바가지만 뒤집어쓰는 경우도 드문하였다. 그래도 그런것은 날이 감에 따라 점차 요령도 트이고 반토막이나마 일본말도 그럭저럭
번질수 있게 되여 어느정도 넘길수 있었지만 넝마장사군을 천시하는 일본인들의 멸시 어린 태도만은 정말 참기 어려운것이였다. 어떤 때는 고물수레에 자전거가 좀 긁혔다고 무작정 따귀를 얻어맞기도 하였고 또 어떤 때는 고물이 아닌 쓰레기를 내다주며 이런거라도 주니
먹고사는것을 고맙게 생각하라는 모멸에 찬 소리를 듣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경식은 당장에 모든것을 엎어버리고싶은 생각이 불끈불끈 치솟았지만
어쩌는수가 없었다. 조선사람이라면 최하층의 존재로 치부하는 일본사회에서 어데 가도 《센징》들에게 처음 차례지는 일이란 토공일이나 넝마주이
같은것이 고작이였기에 경식은 등어리를 지겹게 짓누르는 삶의 무게를 묵묵히 견디여나갔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던 그해 여름날에 있은 일이다. 온종일 골목골목을 누비던 경식은 해질무렵에야 고물수레를 끌고 회사로 돌아가고있었다.
그날따라 물건들이 많았던지라 수레를 끌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목에서는 단내가 풍기고 수그린 얼굴에서는 땀줄기가 구불구불 흘러내리고있었다. 그렇게 수레를 끌며 이께부꾸로역앞을 지나는데 야단법석대는 사람들의 무리가 앞을 가로막았다. 군대에 징집되여나가는 일본인들이 가족이며
친구들과 작별하고있었던것이다. 《대의멸친》, 《진충보국》, 《출정군인들을 축원한다!》 등의 글들이 씌여진 크고작은 기발들이 바람에 나붓기는데 징집자들의 어깨우에는
하나같이 《무운장구》라든가 《출정영광》과 같은 글들이 수놓아진 《센닌바리》가 걸쳐져있었다. 《센닌바리》란 천명의 녀인들이 표백한 흰천에 한뜸씩
붉은 실로 글을 수놓은것이였다. 천사람의 바늘뜸을 받은 속옷을 입히면 총알을 맞지 않는다는 미신에 홀려 가족들이 근처의 녀인들에게 간청하여 만든
일종의 호신부였다 할지… 《너의 목숨은 이미 천황페하께 바친것이다. 백목으로 만든 관에 들어 돌아오너라.
내가 이곳에서 너의 충골을 받아안겠다!》 《국민복》에 전투모를 쓴 늙은 아버지가 《온가정 영광》이라고 새겨진 어깨띠를 두르고 아들에게 훈계하는 말이였다. 뒤이어 들려오는 아들의
살기찬 대답소리. 《아버지, <대동아공영권>을 확립하는 성전에서 사꾸라꽃처럼 지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쪽에서는 눈물을 가까스로 참는 녀인의 목메인 소리가 들려왔다. 《얘야, 돌아오는건 백목상자라고 하지만 아무튼 넌 몸성히 돌아와야 한다. 널
믿고 홀로 살아온 이 에밀 생각해서라도 제발…》 《어머니, 그만하세요. 남들이 듣겠어요. 제 어떻게든지 전공을 세우고 빨리 돌아와서… 어머님을 잘 모시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아들의 목소리도 울먹거리고있었다. 어디선가 군가가 터져나왔다. 갓떼 구루소또 이사마시꾸 지갓떼 구니오 데다까라와 … 그들의 지글거리는 열기와 살벌한 광기로 하여 한여름의 대기는 더욱 달아오르는듯 하였다. 경식은 금시 질식해버릴것만 같아 허둥지둥 그들속을
빠져나왔다. 온 일본렬도가 광란적인 전쟁열에 들끓고있었다. 남자는 《천황의 용맹한 방패》가 되여 전쟁에서 죽는것이 무상의 영광으로 례찬되였고 녀자는
《야스구니의 처》로 되는것이 최고의 영예로 찬미되는 세월이였다. 하지만 저들이 그처럼 《감격분기》하여 달려나가는 전쟁터라는게 사실은 아무런
정당한 리유도 없이 개처럼 죽어야 하는 그런 곳이 아니던가. 일본인들은 도대체 리해할수 없는 족속들이라고 생각하며 경식이 얼마쯤 갔을 때였다. 갑자기 앞에서 왁자하니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길을 들어보니 무뢰배들로 보이는 한무리의 왜인들이 누군가를 목말에 태운채 목이 찢어져라 《반자이》를 웨쳐대며 내달려오는것이 아닌가. 목말에
올라탄자는 기가 올라 목검까지 휘두르고있었는데 병졸복을 입고있는걸 보니 징집된 동료를 바래러 나온 패거리 같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놀라서
황황히 물러섰다. 경식이도 서둘러 비켜서려고 하였지만 워낙 수레가 무거웠던지라 얼른 자리를 내줄수가 없었다. 그바람에 지랄치듯 달려오던 무리들이
경식의 수레에 걸채여 와그르르 나가넘어지고말았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스미마셍(미안합니다), 스미마셍…》 경식은 창황실색하여 미안하다는 말을 거듭했다. 목말을 탔던 병졸복차림의 녀석이 한켠에 나동그라져 끙끙거리는것을 보자 경식은 그리로 달려가
그자를 부축해주었다. 그런데 다음순간 그자는 일어나며 다짜고짜로 경식의 뺨을 후려갈기는것이였다. 《빠가야로!》 뒤따라 일어선 다른자들도 경식에게 달려들어 분풀이를 해댔다. 졸지에 날아드는 무지막지한 주먹질과 발길질을 당해낼수가 없어 경식은 그만
거꾸러지고말았다. 억이 막혔다. 번잡한 큰길복판에서 난탕을 치다 그리되고도 오히려 도적이 매를 드는 식으로 행패질을 하다니… 악물린 경식의 입술사이로 저도
모르게 《개새끼들!》이라는 조선말이 튀여나왔다. 《뭣이? 이자 뭐라고 했는가?》 병졸복을 입은 신병이 우악하게 툭 불거진 눈망울을 디룩거리며 물었다. 얼굴은 박박 얽은 곰보였는데 《돌격지상》이라고 쓴 머리띠가 총알처럼
생긴 그자의 머리에 동여져있었다. 곁에서 유까다(일본인들이 목욕후나 여름에 입는 홑옷)를 걸친 녀석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저자가 센징 같습니다.》 《센징?》 곰보의 눈자위가 비웃듯이 번뜩거렸다. 그러자 유까다를 입은 녀석이 한발 나서더니 위세를 돋구었다. 《흥, 조센징인 주제에 건방지게 우리 형님의 길을 가로막아. 오이, 우리 형님으로 말한다면 대일본제국을 위해 적탄을 만나러 나가는
출정용사이시다. 당장 무릎꿇고 용서를 빌라! 빨리!》 유까다를 입은자가 눈알을 독스럽게 굴리면서 기세를 올리는데 곰보는 목검을 눌러짚고 서서 입가에 방자한 조소를 띠웠다. 《아아, 스즈끼, 네놈은 언제 봐야 성미가 급하단 말이다. 그렇게 몰아대지 않아도 된다. 조센징은 워낙 비굴한 족속들이니까. 핫하하…》 그자의 웃음에 다른 놈들도 곁따라 키득거렸다. 쓰러져있는 경식의 심장은 분노의 아픔에 조여들었다. 관자노리에서 피가 뛰는 소리를 들으며 경식은 불이 이는 눈으로 놈들을 노려보았다.
혐오와 경멸속에 이글거리는 경식의 거센 눈빛을 보자 스즈끼라는자는 칼날같이 독이 올라 더욱더 날치였다. 《건방진 놈! 빨리 빌지 못하겠는가?》 금시 검푸른 피가 뿜어나올듯 한 상통으로 으르딱딱거리던 놈은 부아가 뒤집혔던지 와락 달려들어 경식의 수레를 냅다 차버렸다. 그통에 수레가
자빠지면서 그안에 있던 물건들이 거리바닥에 산산이 내동댕이쳐졌다. 순간 경식은 걷잡지 못할 격노에 몸을 떨며 벌떡 일어났다. 그는 그달음으로 달려가 스즈끼의 동가슴을 힘껏 걷어찼다. 스즈끼가 헉- 하고
허파 터지는 소리를 지르며 저만치 나딩굴었다. 경식은 달려드는자들을 치고 차넘기며 서리찬 분격을 터뜨리고 또 터뜨렸다. 비단 그놈들만이 아니라
조선사람을 업수이여기는 온갖 왜놈들을 모조리 두드려패고싶었다. 그래야만 벼락치는 울분을 조금이나마 삭일것 같았다. 온몸이 찢기고 터지면서 놈들과 맞붙어 한창 싸우고있을 때였다. 모여든 사람들속에서 분연히 누군가가 뛰쳐나오며 놈들을 밀막는것이였다. 《이게 무슨짓이요? 당장 그만두지 못하겠소?!》 그 서슬에 경식에게 달라붙었던 패거리들이 엉거주춤 굳어져버렸다. 오달지게 생긴 한 청년이 놈들앞에 앙버티고 서있었다. 검정색 학생복을 입은
청년이였다. 동그란 얼굴의 작은 눈에서는 열기가 팔팔 끓고있었는데 눈등에 있는 흠집이 류별나게 눈에 띄였다. 어안이 벙벙해있던 놈들은 상대가 학생이라는것을 알아보자 웬놈이냐는듯 눈을 희번득거렸다. 곰보가 어지간히 지쳐빠졌던지 입귀로 침을 비질비질
내보이며 씨벌였다. 《고노야로, 네가 무슨 상관인가!》 그러는 놈에게 학생이 되알진 어조로 따지듯 들이댔다. 《잘못은 당신들이 저지르고 왜 함부로 사람을 치는거요?》 《사람?》 곰보는 빈정대듯 이렇게 되뇌더니 목검으로 경식을 가리키며 조롱했다. 《흥, 정어리가 물고긴가? 조센징도 사람인가?》 둘러선 무리들속에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경식은 온몸을 태우는 분노와 수치감에 부르르 치를 떨었다. 그는 터져나오는 통곡을 가까스로 눌러삼키며 상가집 개만도 못한 망국노의 운명을
저주했다. 가증스러운 저 왜놈을 당장에 결딴내지 못하는 자신에게 끝없는 저주를 퍼부었다. 그럴 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별안간 학생이 달려들며 목검을 짚고 서서 으시대는 곰보의 면상을 죽어라 하고 받아넘겼던것이다. 곰보는
비명도 지를 사이없이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너무도 창졸간에 당한 일이라 졸개녀석들도 어쩔바를 몰라하는데 한놈이 떠듬대며 학생에게 묻는것이였다. 《네놈… 네놈도 센징이지?》 학생의 입에서 조선말이 당당히 튀여나왔다. 《아니다! 난 <구다라징>이다!》 《<구다라징>?》 놈들은 영문을 몰라 멍하니 얼굴만 마주보았다. 경식이도 그 뜻을 알수 없었지만 불길마냥 학생의 입에서 터져나온 우리 말은 세찬 메아리가
되여 그의 가슴을 두들겨주었다. 곰보의 패거리들도 뒤미처 그것을 눈치챘던지 야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일시에 한짝이 된 경식이와 학생은 흉악한 살기를 내뿜으며 덤벼드는 놈들과 맞서 피투성이싸움을 벌렸다. 갈범처럼 윽윽대며 주먹을 휘두르던
학생이 놈들의 뭇매에 얻어맞고 먼저 거꾸러졌다. 놈들이 쓰러진 학생을 미친듯이 차고 때렸지만 그는 신음소리도 내지 않았고 애걸도 하지 않았다.
먼지와 땀, 피로 얼룩진채 악에 받쳐 이그러져있는 동료의 모습앞에 경식의 온몸은 증오의 불길로 황황 타번졌다. 그는 성난 맹수마냥 거세게
울부짖으며 놈들과 뒤엉켜 죽기내기로 싸웠다. 지나가던 순사 둘이 칼자루를 절컥거리며 달려온것은 그무렵이였다. 《무슨 일인가?》 몰풍스럽게 생긴 순사 하나가 이렇게 묻자 경식이 나서며 피범벅이 된채 쓰러져있는 학생을 가리켜보였다. 《죄없는 사람을 저자들이 어떻게 만들어놨는가 보시오.》 순사의 앙칼진 시선이 곰보의 패거리에게 향해졌다. 《사실인가?》 그러자 스즈끼라는자가 악의에 차서 부르짖었다. 《아니요! 저 센징놈들이 출정용사를 구타했소!》 《뭣이? 출정용사를…》 그제서야 놈들은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 한켠에 주저앉아있는 병졸복차림의 곰보를 알아보았다. 순사들의 몸이 대번에 꼿꼿해졌다. 그도 그럴것이
철두철미 군국주의로 일관되여있던 당시의 일본제국에서 현역군인이라면 경관들도 쩔쩔매는 대상이였다. 젊은이들이 징병장만 받아도 일본경찰은 벌써
공손해졌고 징집된 사람들이 군복을 입기도 전에 경관을 때려눕혀도 경찰은 감히 어쩌지 못하는 때였던것이다. 하물며 천한 《센징》따위가 일본군인을
구타했다니 더 말해 무엇하랴. 경식을 노려보는 순사들의 몸에서 살기가 뻗쳐나왔다. 《칙쑈- 감히 출정용사를 모독하는걸 보니 네놈은 틀림없는 불령선인(일제에 반항하는 조선인)이다!》 순사들의 가차없는 매질이 경식에게로 날아들었다. 거기다가 곰보의 패거리들까지 기승이 올라 합세하는 바람에 경식은 순식간에 곤죽이
되여버리고말았다. 학생이 그 광경을 지켜보며 피눈물을 삼켰지만 어찌할수가 없었다. 《친구, 기운을 내라구.》 놈들에게 묶이워 끌려가는 순간 경식이 학생을 돌아보며 남긴 말이였다. 비통하게 주고받는 눈길속에서 두사람은 무참히 짓뭉개여진 서로의 심장을
보고있었다.… 경식은 그때 학생이 던진 《구다라징》이라는 말의 의미를 여러해가 지나서야 깨닫게 되였다. 일본인들은 《百濟(백제)》를 일본식한자음인
《하꾸사이》라고 읽는것이 아니라 《구다라》라고 읽는다.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문화가 발전한 백제는 옛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오랜 기간
동경의 대상이였고 은인의 나라였다. 그런것으로 하여 일본인들은 일본에 건너간 백제계이주민들이 자기 모국을 가리켜 부르는대로 백제를 《큰
나라》라는 조선말로 불렀으며 그것이 《군나라》, 《구다라》로 전해져온것이라고 한다. 지금도 일본말에는 《시시하다》, 《쓸모없다》는 뜻의 《구다라나이》라는 어휘가 있다. 《구다라나이》를 직역하면 《백제가 아니다.》인데
백제의것이 아니면 시시하고 쓸모없다는 일본인들의 옛 관념이 오늘까지 남아있는 흔적이라 해야 할것이다. 결국 자신을 《구다라징》(백제인)이라고
자부한 학생의 말속에는 먼 옛날부터 일본인들이 《은인의 나라》로, 《큰 나라》로 섬겨온 조선의 자손이라는 긍지와 자존심이 도고하게
꿈틀거리고있었던것이다. 그 《구다라징》을 이렇게 다시 만날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생각하면 할수록 어째서 그를 진작 알아보지 못했을가 하는 의문이 가슴을 후벼왔다.
스무해라는 세월이 흘러서일가. 아니면 그새 그가 안경까지 낀데다가 줄곧 일본인으로 자처해왔기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도 고마무라에서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무턱대고 그를 경원시해오기만 한 자신의 지나친 선입견탓인것 같았다. 미안하다는 말을 몇번이고 외우는 경식에게
《구다라징》은 거듭 손을 내흔들었다. 《미안하긴 나도 마찬가지요. 먼저 알아봤지만 혹 그새 마음이 변해서 귀화라도 한 사람은 아닐가 하고 망설여왔더랬으니까요. 실은 좀전에
고마무라의 유래를 자랑스럽게 설명하는 당신의 태도를 보고서야 마음을 놓았던거요. 날 나삐 생각지 말아주오.》 두사람은 헌헌한 웃음속에 오해를 풀었다. 그들은 지나온 사연을 주고받으며 다정하게 길을 걸어갔다. 그뒤 어떻게 되였는가 하는 경식의 물음에
《구다라징》은 자기도 왜놈경찰서에 붙잡혀가 죽도록 매를 맞았다는것과 몇해후 학도병으로 남양전선에 끌려가 사지판을 넘나들던 일들을 두서없이
터놓았다. 그의 말을 들으며 경식은 망국노의 운명은 누구나 다를바없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고물을 모으며 연명해가던 리경식 역시 끝내 일제의
징용에 다시 걸려 규슈의 찌꾸호탄광에서 노예로동을 강요당하지 않았던가. 쓰라린 체험을 함께 한것으로 하여 그들은 서로에 대해 친근감을 느꼈다. 더우기 《구다라징》이 고서점을 운영하면서 일제에게 략탈당한
민족고전들을 수집하고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경식의 반가움은 곱절로 커졌다. 이역의 한적한 고장에서 뜻이 통하는 동포를 만나게 되였다는 기쁨을
누를수 없어 경식은 자기도 민족유물을 수집하는 사람이며 일본에서 수집한 문화재들을 평양에 있는 력사박물관에 전시하는것이 자기의 꿈이라고 숨김없이
이야기하였다. 불현듯 《구다라징》의 얼굴에 불안해하는 기색이 떠돌았다. 얼굴에 넘쳐나던 반색을 슬그머니 지우며 한동안 잠자코 있던 그는 얼마후 경식에게
조심스럽게 묻는것이였다. 《그러니 거긴 조총련계인가요?》 순간 경식도 긴장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조총련이라는 말은 민단과 일본우익반동들이 쓰는 말이였던것이다. 《그럼 당신은 민단?…》 불시에 두사람사이에는 커다란 심연이 가로놓인듯 하였다. 방금전까지 흥글벙글하던 사람 같지 않게 경계의 빛을 감추지 못하는 《구다라징》을
보니 경식은 마음이 서글퍼졌다. 그는 서먹서먹해진 분위기를 가시고싶어 흔연한 어조로 말했다. 《왜 갑자기 심각해서 그러는거요. 어차피 우리야 다 같은 조선사람들이 아니요.》 그의 말은 진정이였다. 사실 민단계동포들속에도 민족의 넋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경식은 《구다라징》도 그런
사람일거라고 믿고싶었다. 《그 말이 옳소. 뭐니뭐니해도 뜻이 같은 친구를 알게 된게 제일로 반갑소.》 경식의 심정을 읽었던지 《구다라징》이 다소 밝아진 어조로 하는 말이였다. 그들은 흔쾌히 웃으며 걸음을 다우쳤다. 그날에야 비로소 경식은 스무해전에 만났던 옛친구와 통성명을 하였다. 그의 본명은 박상열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