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회) 
 

5. 고마무라의 별장(2)

 

그로부터 몇주일이 지나 하또리에게서 련락이 왔다. 문부성 관리로 있는 친구를 내세워 수차례 교섭한 결과 마침내 아라기로부터 장서의 정리를 허락받았다는것이였다.

리경식은 한달음에 고마무라로 달려갔다. 이번까지 꼭 스무번째 되는 걸음이였다. 그동안 아라기의 장서를 손에 넣기 위해 그가 겪은 고뇌는 얼마였고 수모와 랭대는 또 얼마였던가. 허나 고생스럽긴 했어도 드디여 목적한바를 이루게 되였다고 생각하니 경식은 향악보를 되찾기라도 한듯 벌써부터 가슴이 부풀어올랐고 그럴수록 하또리에 대한 고마운 심정을 금할수 없었다.

경식을 알아본 별장의 하녀는 주인의 분부가 있었던지 그제서야 비로소 그를 안으로 들여놓았다.

대문을 넘어서는 경식의 눈앞에 초겨울의 설핀 해볕이 비낀 정원의 광경이 다가들었다. 삼나무며 단풍나무들 그리고 지난날의 영화를 말해주듯 욕심스레 잔가지들을 펼치고 서있는 아름드리 느티나무들… 추위에 거칠어지고 앙상해진 나무가지들사이로 길다란 창문들이 박힌 별장의 자태가 바라보였다.

정원의 한가운데는 련못이 있었다. 침몰선의 마스트와도 같이 물우에 드러나있는 말라버린 련꽃대들이 저으기 음울한 느낌을 자아내고있었다. 리경식은 하녀를 따라 굵다란 홍송들이 늘어선 련못가를 에돌아 현관으로 들어갔다.

하녀가 그를 데려간 곳은 응접실인듯싶어보이는 어느 한 방이였다. 경식은 코트를 벗고나서 방안에 들어섰다. 다음순간 그는 아연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어느새 와있었는지 가네다라는 사나이가 쏘파에 걸터앉아 신문을 뒤적거리고있는것이 아닌가.

《당신이 어떻게?…》

그러자 가네다도 경식을 알아보고 흠칫 놀라며 몸을 일으키는것이였다.

《그러니 당신도 장서때문에?…》

대모테안경을 추스르며 엉거주춤해서 이렇게 되묻는 가네다의 얼굴에 당황해하는 빛이 력연하였다.

하녀가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경식은 줄이 간 양복을 차려입은 가네다의 여느때없이 미끈한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결국 이 고서점주인 역시 끝끝내 아라기의 동의를 받아냈단 말인가. 놀라움과 불안감으로 뒤엉킨 눈빛들이 오가는 가운데 두사람사이에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가네다가 먼저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침묵을 깼다.

《인제 보니 형씨도 여간이 아니시군요.》

리경식도 시무룩이 웃으며 가네다의 말에 응수했다.

《피차일반이지요.》

그들은 자리에 앉아서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가네다쪽에서 분위기를 눙치려는듯 화제를 걸어왔다.

《참, 문화재수집가라고 하셨지요. 그럼 고서적에도 관심이 많으시겠는데 혹 1930년대에 일본에서 한정판으로 출판된 <고원화동>이라는 책을 보신적이 있습니까?》

《<고원화동>이요?》

경식은 얼떠름해서 가네다에게 반문했다. 처음 들어보는 책이름이였던것이다. 가네다는 그럴줄 알았다는듯 웃음을 지으며 앞에 놓인 신문을 가리켜보이는것이였다.

《실은 나도 이 신문에 실린 고서소개란을 보고서야 그런 책이 있다는걸 알았습니다. 하하… 정말 별난 책도 다 있지요. 글쎄 일본에서 사용되여온 남녀성기의 별칭들을 집대성한 대작이라나요. 놀라운건 그 책에 녀자들의 성기를 가리키는 말만 해도 무려 300여개나 올라있다는겁니다. 중국어나 영어에는 그런 말이 불과 20여개안팎이라는데 말입니다. 허 참… 하긴 언젠가 나도 매춘부를 지칭하는 일본어휘가 자그만치 400여개나 된다는 말을 들은적은 있습니다만은 그러고보면 호색문화에서는 일본을 따를 나라가 별로 없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네다는 표정과 억양을 재치있게 바꿔가며 챙챙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펼쳐나갔다. 하지만 경식은 당겨진 활줄처럼 팽팽히 긴장된 그의 속마음을 읽고있었다. 부르쥔 주먹을 련상시키는 암팡진 몸집이며 고집통같은 되박이마, 눈꼬리가 째진 자그마한 눈에 담기와 꾀가 비쳐보이는것이 보통내기가 아닌것 같았다.

이 사나이를 대할 때마다 석연치 않은 느낌이 머리를 쳐들군 하는것은 무엇때문일가. 자기와 다름없이 아라기의 장서에 관심을 쏟고있다는데서 오는 경쟁의식때문일가. 아니, 왜서인지 사연의 실마리는 그보다 훨씬 전의 어느 과거속에 묻혀있는것만 같았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가? …

자기도 모르게 이상스러운 생각에 빠져있던 경식은 그만에야 버쩍 정신을 차렸다. 이럴 겨를이 없었다. 당장 아라기와 맞서야 할 판인데 황당한 일에 머리를 쓰고있는 자신이 어처구니없었다.

곁에서는 여전히 가네다가 고서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고있었다. 경식은 그의 사설을 건성으로 들어넘기며 방안을 주의깊게 둘러보았다.

묵직한 휘장들이 창문마다 반나마 드리워있어 방안은 퍼그나 침침해보였다. 한쪽벽에는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칙칙해진 도꾸가와시대의 화조그림들이 걸려있었고 다른쪽 벽에는 사이고 다까모리의 초상이 흑갈색 벗나무액틀에 싸여 걸려있었다. 류달리 눈길을 끄는것은 맞은켠 벽에 엇걸려있는 두자루의 군도였다. 군도의 아래쪽에는 키가 큰 국화꽃을 담은 단지가 놓여있었고 웃쪽에는 한자로 《우국》이라고 휘갈겨쓴 시뻘건 붓글이 큼직하게 붙어있었다. 그 붓글때문에 방안의 공기는 한층 무거워보였다.

경식은 등골로 뻗쳐오는 서느러운 기운을 느꼈다. 그것은 살기였다. 그와 고향사람들 그리고 온 겨레의 숨통을 지지누르던 광포무도한 살기였다. 얼마나 많은 조선사람들이 왜놈의 저 칼날아래 피흘리며 쓰러졌던가. 비단 조선사람들만이 아니였다. 수천만의 아시아인민들이 사무라이들의 흉악무도한 칼날아래 몸서리치는 재난을 당하지 않았던가.

가슴속에서 불덩이가 치밀어올랐다. 무고한 사람들의 피와 눈물에 절은 죄악의 칼을 가보인양 뻐젓이 내걸고있는 철면피한을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누를길 없는 증오에 숨이 막히는것만 같았다. 경식은 마음속의 울분을 토하듯 모두숨을 내쉬며 가까스로 흥분을 눅잦히고있었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더니 기모노우에 하오리(일본인들의 겉옷)를 걸쳐입은 늙은이가 하녀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왔다. 아라기 사다오였다. 지금껏 줄사설을 펴놓던 가네다가 어느 틈에 날쌔게 일어나 인사치레를 하는것이였다.

《도꾜에서 고서업을 하는 가네다 마사또라고 합니다. 이렇게 각하를 뵙게 되여 더없이 기쁩니다.》

리경식도 뒤따라 일어서며 자기소개를 하였다.

《물질문화보존협회 리사 오구라 분지입니다.》

아라기의 사무러운 눈길이 두 사나이를 찬찬히 더듬었다. 팔십객의것이라고는 선뜻 느껴지지 않는 매몰찬 눈빛이였다. 잠시후 약간 쇠진한듯 한 아라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장서가 탐나서 뻔질나게 찾아온다는 작자들이 자네들인가.》

아라기는 자기를 부축하는 하녀의 손을 뿌리치더니 지팽이를 짚으며 벽난로가 있는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비록 몸집은 보잘것없이 작고 머리는 하얗게 세였어도 도고하게 쳐들린 고개며 꼿꼿한 몸자세, 과장되게 다듬은 카이제르수염에서는 《먹지 않고도 이를 쑤신다.》는 사무라이들의 거만에 찬 패기가 짙게 풍기고있었다.

하녀가 벽난로앞에 팔걸이의자를 가져다 놓자 아라기는 의자우에 거드름스럽게 걸터앉았다. 난로안에서는 마른 장작들이 탁탁 불티를 튕기며 타고있었다. 두사람의 존재를 무시해버린듯 한동안 그 모양을 바라보던 아라기는 이윽해서야 벽난로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채 못마땅하게 얼굴을 찡그리며 이런 말을 하는것이였다.

《요즘 젊은것들은 하나같이 뜻이 옹졸하구 나약하거던. 나한테 다께오라는 손주놈이 하나 있는데 아무리 봐도 모자라는 녀석이 분명해. 대학을 졸업하고 몽골력사를 전문한다기에 내 호기심이 동해 몇마디 물어보았더니 한다는 수작이 자긴 몽골말안장만 수집할뿐 다른건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는거야. 고작해서 꿈이라는게 몽골말을 타고 울란바따르서부터 도꾜까지 려행해보는거라나. 허, 기가 막혀서… 만주를 호령하구 씨비리를 넘보던 우리들에 비하면 그런걸 어찌 남아의 꿈이라 할수 있겠는가. 보나마나 자네들두 마찬가질테지.…》

아라기의 랭랭한 야유에 이번에도 가네다가 잽싸게 나섰다.

《각하께서 갖은 고초를 겪으시면서도 제국력사와 관련한 수많은 문헌들을 고이 보관해오신데 대해 심심한 경의를 드립니다. 각하,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꿈과 기개가 부족한것은 그들이 력사를 모르고 선배들이 남긴 뜻을 모르기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로부터 책은 만인을 위한것이라 하였습니다. 각하께서 간수해오신 수많은 장서들을 세상에 널리 돌린다면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나간 사실들을 돌이켜보게 하고 각하의 공덕을 알게 하는 좋은 일로 될것이라 생각합니다.》

역시 가네다는 달변가였다. 아라기도 그의 말이 싫지 않았던지 천천히 이쪽으로 눈길을 돌리는것이였다. 하지만 늙은이의 표정은 여전히 랭담했다.

《자네 말주변이 좋군. 허나 무턱대구 많이 읽는건 좋은게 못돼. 책이라구 해서 아무 책이나 모조리 믿고 읽는다면 차라리 하나도 읽지 않느니만 못한거지. 책은 벗을 고르는것과 같이 많지는 않다 해도 똑바루 신중하게 선택해야 하는거야.》

아라기는 제법 심오한 철학이라도 푸는것처럼 한마디한마디 끄집어내는듯 한 말투로 훈시를 늘어놓았다. 그러는 아라기에게 경식은 이때라고 생각하고 넌지시 뒤를 달았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저희들이 각하의 장서를 정리하고저 하는 근본취지도 구경은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의 민족이나 하나의 시대가 불과 몇권의 책에 의해 지배된 실례는 얼마든지 들수 있지 않습니까.》

경식의 말에 아라기는 알릴듯말듯 머리를 끄덕였다. 가네다가 은연중 동료의식을 느꼈던지 경식에게 슬며시 눈을 끔뻑해보였다. 다시금 아라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옳은 말이야. 이를테면 후꾸자와 유기찌의 <탈아론>이 그렇지. 명치시대이후로 행해진 제국의 모든 대외로선은 실상 <탈아론>에서 비롯되였다고 해두 과언이 아니니까.…》

《탈아론》은 일본인들속에서 《근대일본이 낳은 최대의 사상가, 교육자》로 불리우고있는 후꾸자와 유기찌가 1885년에 발표한 글이였다. 당시 일본인들의 대외관점은 크게 두가지로 갈라져있었다. 하나는 아시아의 일원으로서 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련대하여 유미렬강의 침략을 막는것이였고 다른 하나는 렬강들의 대아시아정책에 편승하여 아시아나라들을 침략하는것이였다. 후꾸자와는 《탈아론》에서 조선이나 중국과 같이 뒤떨어진 이웃나라들은 일본에 한 터럭의 도움도 안되기때문에 일본은 아시아의 대렬에서 벗어나 서양의 문명을 수용하고 조선이나 중국을 대하는 방법도 렬강들의 방법을 따라야 한다고 력설했다. 바꿔말하면 미국이 군함을 몰고와 일본에 불평등조약을 강요하였던것처럼 일본도 군함을 끌고가 이웃나라들에 불평등조약을 강요해야 한다는것이였다. 바로 이러한 후꾸자와였기에 조선인을 위하여 조선의 멸망을 바란다는 망발도 서슴지 않았던것이다.

《탈아론》은 근대일본인들의 아시아관형성에서 중요한 작용을 하였으며 일본의 팽창주의를 선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근 한세기전 후꾸자와 유기찌가 제창하던 《탈아시아주의》의 구호는 결코 과거의 망령이 아니였다. 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대한 몰상식한 편견과 무지, 황당한 우월감은 오늘날까지도 일본인들의 머리속에 부적마냥 남아있지 않는가.

경식의 이런 생각을 알리 없는 아라기는 뚝뚝 떨어지는 비방울처럼 띠염띠염 말을 이어가고있었다.

《선각자들이 마련해준 <세계웅비>의 경륜과 그들이 흘린 피가 없었더라면 비록 한때였을망정 어찌 섬나라에 불과한 우리 일본이 광대한 대륙의 판도를 석권하고 <대동아공영권>의 꿈을 꿀수 있었겠는가. 일본인들은 자기의 영웅들을 알아야 해. 도요또미 히데요시, 사이고 다까모리, 이또 히로부미… 실로 그들이야말로 죽음도 불사하는 충성과 철저한 극기를 미덕으로 안 사무라이의 전형들이였지. 그들을 망각한다면 그건 일본인이 아니야.》

늙은이의 이마우에 힘줄이 불거져올랐다. 아라기는 병적인 열기가 내비치는 눈을 들어 벽우에 걸린 사이고 다까모리의 초상을 쳐다보는것이였다.

(도요또미 히데요시, 사이고 다까모리, 이또 히로부미…)

경식은 아라기가 부른 이름들을 속으로 다시 외워보았다.

생각할수록 기이한 일이였다. 조선사람들에게는 침략의 원흉으로 지탄받고있는 괴수들이 일본사에서는 례외없이 위인으로 숭배의 대상이 되고있는것이다. 무법불법의 《을사5조약》을 날조하여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데 앞장섰던 이또 히로부미는 《일본을 근대화한 주역》으로 일본사에서 칭송을 받고있으며 자기에게 10개 대대만 주어 파견한다면 하루아침에 전 조선을 《정복》할수 있노라고 부르짖은 《정한론》의 주창자 사이고 다까모리는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무라이》로 지금도 도꾜의 우에노공원에 커다란 동상으로 서있다.

그런가 하면 임진왜란을 일으킨 침략의 괴수 도요또미 히데요시는 또 어떠한가. 일본인들은 그를 가리켜 란세를 잠재우고 치세의 기틀을 마련한 무장이며 그 여세를 몰아 대륙에 진출하여 세계를 호령하려 했던 《영웅》이라고 추어올리고있다. 반대로 도요또미가문을 멸망시킨 도꾸가와 이에야스에 대해서는 매우 음험한 인물로 묘사하던 나머지 《도꾸가와 이에야스를 저주하는 회》라는것까지 결성되여있는 실정이다.

어떻게 되여 두 나라의 력사관이 이렇게까지 판이하게 상반되는것인가.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주되는 요인은 일본의 력대 통치배들이 광신적인 국수주의와 침략주의사상을 국민들의 의식속에 체계적으로 집요하게 부식해온데 있다고 경식은 생각했다.

도요또미 히데요시만 보아도 그렇게 말할수 있었다. 히데요시에 대한 숭배분위기가 본격적으로 조장되기 시작한것은 명치시대에 이르러서였다. 끝없는 팽창야욕에 부풀어있던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을 침략하고 중국을 위협한 히데요시를 찬양하는 노래를 만들어 일본인들이 어릴 때부터 부르게 하였다. 히데요시의 《재능》, 《무용담》 그리고 조선침략을 포함한 《업적》 등이 력사소설과 연극, 대중소설 같은것들을 통하여 일본인들의 가슴속에 강렬하게 새겨지게 되였다. 더욱 기이한것은 히데요시의 인기가 패전후에도 계속 유지되여왔다는것이다. 보통 력사상의 인물들은 시대적환경이 변하는데 따라 그 평가도 달라지건만 히데요시만은 영화나 텔레비죤 같은 영상매체들을 통하여 《립신출세의 화신》으로, 《대국지향의 선구자》로 변함없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있었다. 세월은 흐르고 시대는 바뀌였어도 일본인들은 아라기 같은자들이 심어놓은 국수주의적이며 팽창주의적인 사고관점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있는것이다.

방안이 괴괴한 관속같이 여겨졌다. 경식은 낡은 가구들의 냄새가 떠도는 후덥지근한 공기에 혐오감을 느끼며 아라기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라기는 열뜬 눈초리로 벽난로안을 지꿎게 들여다보고있었다. 지렁이마냥 구불구불한 피줄이 아라기의 관자노리에서 움틀거리는데 벽난로의 불길이 너울거리며 늙은이의 얼굴에 기괴한 그림자를 던지고있었다. 얼마후 짓눌린듯 한 아라기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우리를 보구 전범자라고 비난들 하지. 전범자?… 흥, 자네들은 강자를 반대해서 싸우는 재판을 본 일이 있는가? 만일 재판관이 힘에 거역한 판결을 내린다면 그 판결은 집행되지 않을거네. 강자에겐 적이 없구 약자에겐 피할 곳이 없는게 세상리치야. 인간은 멸시를 받아야 할수도 있구 정당하지 않을수도 있지. 허나 칼은 멸시할수 없어. 칼은 항상 정의니까.…》

아라기의 울대뼈가 무섭게 두드러졌다. 늙은이의 회색빛눈망울이 푸르스름한 독을 품고 번뜩이고있었다.

《우리 일본이 전쟁에서 진것두 결국은 힘이 약했기때문이지. 조선놈들을 보라구. 한땐 대일본제국의 발굽밑에서 숨두 크게 쉬지 못하던것들이 지금은 얼마나 기가 올라서 날치는가. 조선인이나 중국인에게 지배되는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일본인들은 자신과 아이들을 죽이구 모든걸 끝장내는게 더 나을걸세.》

사레가 들렸는지 갑자기 가네다가 곤두기침을 깇었다. 경식은 피가 나게 입술을 깨물었다. 패전에 대한 앙심깊은 복수심, 타민족에 대한 지독한 배타적태도, 인류를 멸살시키고서라도 기어이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는 파시스트의 욕망… 저것이 바로 일본군국주의자들의 진면모였다.

당장이라도 증오의 웨침이 터져나올것만 같아 경식은 얼굴이 벌개지도록 넥타이매듭을 치켜올려 목을 조여맸다. 그러는데 수건으로 코를 문지르고난 가네다가 결례를 사과하듯 미소를 그려보이며 아라기에게 공손히 말을 붙이는것이였다.

《지극히 옳은 말씀입니다. 일본이 항복하자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순국의 길을 택한것도 그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아라기의 입가에 경멸의 빛이 떠돌았다.

《자네 날 비웃는구만. 어째서 아라기 당신은 제국과 함께 운명을 하지 않았는가 하는거겠지. 흥, 하긴 죽어야 할 때 죽지 않으면 죽음보다 더 큰 수치가 따른다는게 일본의 자살관이기도 하지. 하지만 난 배를 가르는 식의 책임모면은 하고싶지 않아. 그건 한갖 비겁한 도피에 불과하거던.》

아라기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경식은 마디마디에 그루를 박으며 웅글게 부르짖었다.

《력사는 후세의 심판을 받기마련이지요.》

그 말을 제나름으로 해석한듯 아라기는 머리를 끄덕였다.

《옳네. 자손들이 우리를 리해해주겠지. 우린 앙심을 품구 다시 일어서야 해. <대동아공영권>의 옛꿈을 결코 포기할수 없단 말이야. 우리가 와신상담의 각오를 품구 분골쇄신할 때 야스구니의 혼백들이 흘린 피는 기필코 보상받을걸세.》

늙은이의 온몸에서 광포한 기운이 뻗쳐나왔다. 와신상담을 떠벌이는 그 모양을 보느라니 《참기 어려운것을 참고 견디기 어려운것을 견디여…》라고 하던 왜왕의 항복연설이 떠올랐다.

경식은 목구멍으로 치밀어오르는 쓰거운 웃음을 삼켰다. 불가능한 목적을 추구하는자에게는 그 대가로 절망이 차례지는 법이다. 팔십고개를 넘어선 오늘에 이르도록 천하는 힘센자의것이 아니라 대의를 따르는자의것이라는 력사의 순리조차 변변히 깨닫지 못한채 헛된 망상을 부여안고 잔명을 이어가는 군국주의망녕객의 모습이 보면 볼수록 가련하게 여겨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밖에서 서리발을 품은듯 한 찬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부러져나간 나무가지 하나가 기울기울 떨어져내리며 창유리를 두드렸다.

《날씨가 추워지려는가보구나.》

오한을 느꼈는지 몸을 움츠리며 아라기가 하는 소리였다. 하녀가 다가가 아라기에게 말했다.

《피곤하신것 같습니다, 각하.》

《그래, 좀 누워야겠다.》

아라기는 맥빠진 어조로 이렇게 말하고는 끙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경식이네쪽을 바라보며 생각난듯 이렇게 덧붙이는것이였다.

《참, 장서를 정리하게 해달랬던가. 하긴 옛날부터 책과 꽃 그리구 녀자는 자기가 가장 아끼고 사랑할 자신이 있으면 훔쳐두 좋다고 했지. 좋아, 래일 아침에 내 서기를 만나 서재열쇠를 받으라구. 각별한 부탁들두 있었지만 그보다 자네들의 그 검질긴 성격이 마음에 들어.》

아라기는 하녀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방에서 나갔다. 복도쪽에서 침울하게 중얼거리는 늙은이의 목소리가 느릿느릿 들려왔다.

《우린 할수 있는껏 다 했어. 그 다음은 할수 있는 사람들이 해야지.…》

리경식은 아라기가 사라진쪽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거듭 되뇌고있었다.

(존재할 리유가 없으면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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