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 회)
제 1 장 1. 분계선이 없는 곳에서 느닷없이 전시회장은 류다른 손님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어디서 왔는지 학자풍의 수많은 관람객들이 밀려들었던것이다. 백발을 날리는 로학자들도 있었고 홍안의 젊은 학자들도 있었다. 경건한 명상에 잠긴 모습들이 보이는가 하면 훈훈한 기쁨과 감흥으로 달아오른
모습들도 보였다. 이따금 들려오는 흥뜬 목소리들, 화기어린 웃음소리들, 무랍없이 오고가는 북쪽말씨들과 남쪽말씨들… 어디라 할것없이 전시회장에
신선한 흥분과 랑만적인 기분이 떠돌고있었다. 그들은 잠시후 열리게 될 일제략탈문화재반환을 위한 토론회에 참가하러 온 북과 남의 력사학자들이였다. 토론회가 진행되는 이곳
조선미술박물관으로 모여든 그들은 박물관의 1층홀에 한 해외동포가 기증해온 민족유물들이 전시되여있다는것을 알고 찾아온것이였다. 그러고보면
평양에서
열리고있는 교포의 유물전시회는 북과 남의 유별난 관심사로 되였으니 행운을 만난셈이였다. 전시된 유물들은 다양했다. 세나라시기의 불상과 기와들이며 고려시대의 자기들 그리고 조선봉건왕조시대의 서적들과 치레거리들도 있었다. 《박선생, 여기 고대시기의 유물도 있구만요!》 《정말 그렇군요!》 아득한 태고적의 유물앞에서 40대쯤 돼보이는 두 사나이가 감동을 터치고있었다. 그것은 크기가 손바닥만 한 둥근 모양의 청동거울이였다.
앞이마가 도도록한 사나이가 거울을 눈여겨보더니 옆의 사나이에게 물었다. 《문선생은 문화재를 전문하시니 잘 아시겠군요. 제 보건대는 고조선시대의 거울 같은데 대략 어느 시기의것으로 추정됩니까?》 그 물음에 옆사나이는 직업적흥미가 동했는지 박물관의 규정도 잊고 거울을 손에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는것이였다. 얼마동안 찬찬히 거울을
들여다보던 사나이가 알만 하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좀 보십시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이렇게 표면이 반들거리고 무늬가 잘 남아있는걸 봐서 방부제를 칠한게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거울뒤면의 이 무늬들을 보십시오. 가는선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원둘레와 직선들이 하나도 찌그러지거나 맞붙은게 없이 얼마나 정교합니까. 박선생의
생각이 옳습니다. 이 거울은 고조선시기의 거울이 분명합니다. 학계에서는 이런 거울을 두고 <잔줄무늬거울>이라고 부르지요.》 《아!》 듣고있던 사나이의 입에서 감탄사가 새여나왔다. 그들 역시 토론회에 참가하러 온 학자들이였다. 방금 설명한 사람은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문성민실장이였고 《박선생》이라고 불리운 사람은
서울의 어느 대학에서 박물관을 맡아보고있다는 박인규관장이였다. 두사람은 이미 토론회차로 여러번 만난적이 있는 구면들이다. 《거참,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이 들여다보았을 이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쳐보니 감정이 이상해지는군요.》 이윽토록 거울을 들여다보며 문성민이 천천히 하는 말이였다. 그 말에 느껴지는바가 있는듯 박인규가 뒤를 달았다. 《허허… 듣고보니 생각이 많아집니다. 허다한 선조들의 얼굴이 그 거울에 비쳐졌을테지요.》 문성민은 생각에 잠겨 박인규의 말을 받았다. 《어찌 선조들뿐이겠습니까. 이 거울에 비낀 오늘의 우리 모습을 두고 천년후의 후손들은 또 뭐라고 말들 할지 궁금하구만요.》 침묵이 흘렀다. 서로 말이 없는 공간속에서 두사람은 자신들의 심혼과 많은 말을 하고있었다. 그럴 때였다. 불현듯 녀인의 석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뜻이 깊은 말씀들을 나누고계시는군요.》 은백발의 한 녀인이 멀지 않은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며 서있었다. 두리두리한 얼굴에 로인같지 않게 둥근 어깨가 퍽 당당해보이는 모습이였다.
사나이들이 얼떠름해하자 녀인은 웃으며 다가와 자기소개를 하는것이였다. 《이야기들을 나누시는데 끼여들어서 미안합니다. 전 카나다에서 온 서만옥이라는 늙은이라오.》 대뜸 두사람의 눈길이 녀인에게로 모아졌다. 문성민이 먼저 나서며 녀인에게 물었다. 《그럼 이 유물들을 기증하신 교포어머님이 아니십니까?》 스스럼없이 흘러나온 어머니라는 부름에 녀인은 감동의 빛을 감추지 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사람은 환성을 올리며 녀인을 에워쌌다.
생존경쟁의 란무장에서 홀몸으로 기업을 운영해오는 속에서도 자기가 조선사람임을 한시도 잊지 않고 민족유물을 수집해왔다는 녀인, 녀인의 미거는
토론회참가자들에게 이미 알려져있었던것이다. 주위에 있던 다른 관람객들도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렇게 만나뵈니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정말 민족을 위해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기쁨과 감복, 반가움에 넘친 찬사들이 꽃보라인양 녀인에게 쏟아졌다. 녀인이 어쩔바를 몰라하며 손사래를 쳤다. 《이러지들 마세요. 전 그런 찬사를 받을만 한 사람은 못되는걸요.…》 비단필같이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조명빛에 녀인의 눈이 불꽃처럼 반짝였다. 얼마후 박인규가 호기심을 누를수 없었던지 녀인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청동거울은 어디서 찾아오셨습니까?》 그러자 녀인은 문성민에게서 거울을 받아들고 생각을 더듬다가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이 거울은 베네찌아의 어느 상인에게서 산겁니다. 그 사람은 취미삼아 동서고금의 갖가지 거울들을 수집하고있었는데 고대에짚트의 청동거울로부터
요즘 나오는 거울에 이르기까지 없는것이 없었답니다. 언젠가 초청을 받고 그의 집을 방문했더니만 자랑삼아 내게 자기가 모아들인 거울들을 보여주는게
아니겠습니까. 그중에 이 청동거울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말이 해방전에 조선에서 흘러나온것인데 일본을 거쳐 유럽의 여기저기로 옮겨지다가 결국은
자기손에 들어오게 되였다더군요. 그 사람이 절대 내놓을수 없다는걸 겨우 설복했습니다.》 녀인의 이야기를 듣고보니 한점한점의 유물마다에 스며있는 남모르는 진정과 수고가 헤아려져 누구나 감심어린 빛을 금치 못해하였다. 그러는데 녀인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누구에게라 없이 조용히 외우는것이였다. 《실은 이자 지나가댔는데 거울을 보면서 학자선생님들이 하시는 이야기가 발목을 붙잡더군요. 가만히 새겨보니 그 말씀인즉 제 얼굴이 어떤가
하는건 거울을 보고 알수 있지만 자기가 살아온 한평생이 어떤가 하는건 자손들앞에 서봐야 알수 있다는 뜻 같았어요. 왜그런지 제 마음도
이상해지더란 말입니다.》 녀인의 목소리는 무겁게 울렸다. 오늘과 래일에 대하여, 자신과 후손들에 대하여 새삼스럽게 생각해보게 하는 말이였다. 문성민도 박인규도
그리고 모여든 사람들도 녀인이 한 말을 음미해보며 깊은 묵념에 잠겨있었다. 갑자기 거울을 들고있던 녀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안경을 낀 한 로학자가 전시품들을 돌아보며 이리로 다가오는 모습이 거울에
비쳐왔던것이다. 비록 머리는 은빛으로 세였어도 정신적인 체중이 느껴지는
걸음걸이에서는 아직 힘과 자신심이 엿보이고있었다. 《선생님!》 이렇게 소리쳐 부르며 먼저 다가간 사람은 박인규였다. 그를 알아보았는지 로학자도 무등 반가움을 금치 못하는것이였다. 《오, 자넨가! 평양에 왔다는 말을 들었네.》 두사람은 서로 부여잡고 부자간인양 따뜻이 회포를 나누었다. 《아버지는 왜 이번에 오시지 못했나? 전번에 금강산에서 만났을 때 이번 토론회에 꼭 참가하겠다구 나한테 다짐했는데.》 로학자가 서운한 기색을 드러내며 묻는 말이였다. 박인규도 허전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지 않아도 제가 평양으로 떠나올 때 아버님이 몹시 섭섭해하셨습니다. 사실 아버님은 이번 토론회에 참가하려고 방북신청까지 다 냈었는데
그만에야 일본에서 백제사에 대한 순회강연을 해달라고 초청해오는 바람에… 아쉽기는 하지만 일본사람들의 잘못된 력사인식을 바꾸기 위해선 이런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시면서 대신 저를 평양으로 떠밀어보내셨습니다. 아버님은 저더러 선생님을 만나거들랑 꼭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박인규의 대답에 로학자가 헌헌히 웃으며 뜻모를 소리를 했다. 《허허허… 역시 <구다라징>다운 처사야.》 그들의 관계를 이미 알고있는듯 뒤에서 벙글거리던 문성민이 로학자가 다가오자 인사를 했다. 로학자가 그를 알아보고 반색을 한다. 《문실장도 왔구만.》 문성민이 로학자에게 동포녀인을 소개했다. 《선생님, 이분이 바로 여기 전시된 유물들을 조국에 기증하신 서만옥어머님이십니다.》 《아, 그렇소!》 로학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로학자는 녀인에게 다가서서 정중히 례를 차렸다. 《이야기를 듣고 감동이 컸습니다. 정말 쉽지 않은 애국적소행이라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로학자의 인사에 서만옥도 고개를 숙이며 화답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민족을 위해서 저보다 더 애를 쓰시는분들이 어디 한둘입니까.》 녀인의 거동이 어딘가 당황해하는듯싶었다. 얼굴은 긴장으로 굳어져있었고 눈길도 불안스럽게 허둥거리고있었다. 웬일인지 그러는 서만옥을
바라보는 로학자의 눈빛도 점점 굳어져갔다. 로학자는 처음엔 안경을 거쳐, 다음에는 안경너머로, 나중에는 안경을 벗고 녀인을 눈여겨보다가 망설이며
묻는것이였다. 《저, 실례입니다만 카나다에서 오셨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곳에서 사신지는 오래되였는가요?》 서만옥의 낯빛이 해쓱해졌다. 녀인은 힘겹게 몰숨을 내긋고나서 외마디로 대답했다. 《예.》 문성민과 박인규가 두사람을 의아스럽게 바라보는데 토론회가 곧 시작된다고 알리는 안내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토론회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뭔가 할 말을 미처 못한듯 머뭇거리던 로학자도 별수없이 녀인과 서먹한 인사를 나누고는 자리를 떴다. 문성민이 동포녀인에게 작별인사를 하자 녀인이 말했다. 《실은 나도 토론회에 방청으로 초청받았답니다.》 그 말에 문성민도 박인규도 다같이 기뻐했다. 박인규가 반가운 나머지 어려움도 잊고 녀인의 팔을 잡아끌었다. 《거참 잘됐습니다. 어머님, 우리와 함께 갑시다.》 그들의 허물없는 친절에 녀인은 시름없이 웃으며 따라나섰다.… 토론자의 격앙된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퍼지고있었다. 《…이렇듯 륙전법규와 관례에 관한 규칙 제27조와 제28조, 제56조 그리고 1935년과 1954년의 문화재보호에 관한 헤그협약에 비추어볼
때 명백히 알수 있는바와 같이 우리 나라의 수많은 문화재들에 대한 일제의 파괴와 략탈은 국제법을 철저하게 유린한 특대형범죄이며 인류가 두고두고
기억하여야 할 만행중의 만행인것입니다.…》 력사는 단지 과거의 기록만이 아니다. 누가 말했던가. 력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현재란 다름아닌 과거의 산물이고 오늘의 영광과 오욕은
어제와 하나로 잇닿아있기에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지나간 과거는 오늘과 래일을 후손들에게 일깨워주며 묵묵히 서있는것이다. 곁에서 기관총을 쏘아대듯이 빠른 말씨로 속삭이는 박인규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력사분야에서는 남과 북의 사료가 서로 일치합니다.》 문성민 역시 연단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채 들먹거리는 심정으로 그의 말을 받았다. 《같은 민족이니 사료도 같을수밖에요.》 《음, 단순하지만 의미심장한 분석입니다.》 그러고보니 스스로도 생각되는바가 있어 성민은 금방 한 말을 마음속으로 다시금 되새겨보았다. 민족이 같으니 사료도 같다! 너무도 당연하다. 국토가 량단되여 60여년세월이 흘렀지만 우리에게는 공유하고있는것이 너무도 많다. 하나의 피줄과 하나의 언어, 하나의
풍습을 공유하고있고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를 하나로 공유하고있다. 지금 여기에 모여앉은 수많은 참가자들을 두고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하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라고 어느 누가 선뜻 말할수 있으랴. 여기에는 분계선이 없다. 언어의 장벽도, 풍습의 장벽도, 리념의 장벽도 없다. 민족수난의 상처를 함께 아파하며 민족의 활로를 함께
모색해나가려는 하나된 지향만이 온 장내에 맥맥히 흐르고있었다. 실로 6. 15시대가 열린이래 례사롭게 볼수 있는 광경들중의 하나이다. 그동안 력사학계에서만도 북과 남을 오가며 얼마나 활발한 토론들이
벌어졌던가. 일제의 조선강점불법성과 강제련행에 관한 토론회, 《일본해》표기의 부당성과 C-K영문표기문제에 관한 토론회 그리고 이 시각
진행되고있는 일제략탈문화재반환을 위한 토론회… 북과 남의 력사학자들이 모여 년례행사처럼 벌려온 그 하나하나의 공동학술토론회들은 그대로 일제의
저주로운 죄악을 한목소리로 단죄하는 온 겨레의 성토였고 파란많은 분렬의 세월속에서도 지워지지 않은 민족의 끈진 동질성을 확인해가는 과정이였다. 또 한차례의 토론이 끝나자 박수가 터져올랐다. 대지를 후련하게 두들기는 비줄기마냥 장내를 흔드는 우렁찬 박수소리가 삼천리에 굽이치는
민족자주의식의 분출로, 민족공조의식의 분출로 메아리쳐온다. 박인규도 열정적으로 박수를 치며 달아오른 심정을 토로하는것이였다. 《오래간만에 박수를 제대로 쳐보는것 같습니다. 오늘 발표되는 론문들이 다 훌륭합니다.》 문성민은 혈조가 번진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동감을 표시했다. 언제 보나 목소리가 박새처럼 쟁쟁하고 시인처럼 흥분하기 잘하는 박인규, 그는 일제와 사대주의사가들에 의해 매몰되였던 우리 나라의 상고사를
복원하기 위해 한생을 바쳐가는 사람이였다. 아직까지도 일제가 부식시켜놓은 식민지사관에 포로되여 우리의 상고사를 회의적으로 대하는 일부
얼간이학자들을 대할 때면 그는 《력사는 애국심의 원천이다. 고로 사필이 강하여야 민족이 강하고 사필이 용감하여야 민족이 용감하다.》고 한 단재
신채호의 말로 그들을 갈파하군 한다고 한다. 민족에 대한 애착이 강하고 주견이 있는 학자였다. 성민이 그와 함께 토론들에 대한 소감을 나누고있는데 사회자가 다음 토론자를 소개하는것이였다. 《다음은 조선력사학학회 부위원장 리경식교수의 발표가 있겠습니다.》 《아, 리교수님이군요.》 박인규의 얼굴가에 대뜸 반색이 떠올랐다. 문성민도 류다른 관심을 가지고 연단쪽을 바라보았다. 전시회장에서 그들이 만났던 로학자가 연단으로
나왔다. 《교수님은 여전하시군요.》 나직이 들려오는 박인규의 말에 문성민은 머리를 끄덕였다. 량귀가 벗어져올라간 이마며 기름한 얼굴에 붓으로 그은듯 한 서리내린 장미… 교수의 모습에서 풍겨오는 기품과 무게는 여든살이 넘은 오늘에도
예전이나 다름없어보였다. 리경식교수의 서가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발표한 문성민의 첫 론문이 꽂혀있다. 사회과학원에서 문화재연구의 걸음마를 떼던 시절 성민은 리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학위론문을 준비했었다. 그 나날 그는 교수에게서 삶의 겉치레와 허명을 모르는 과학자의 바른 자세를 보았고 조국과 겨레앞에 지닌
력사학자의 본분을 두고 진지하게 고민해보기도 하였다. 한번은 그가 교수에게 어째서 우리 조상들은 유럽의 콜로쎄움이나 파르테논 같은 세계적인 건축유적들을 못 남겼는지 모르겠다고 푸념조로 말한적이
있었다. 그때 리교수가 노기어린 어조로 질책하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성민은 얼굴이 뜨거워지군 한다. 《그럼 유럽엔 팔만대장경이 있다던가? 에밀레종이 있다던가? 금속활자를 발명한 사람들도 우리 조상들이고 철갑선을 처음 만든 사람들도 우리
조상들일세. 외적의 략탈과 전란만 아니였더라면 세계적인 건축유적들도 우리 나라에 수두룩했을거네. 어째서 우리에게 없는것만 보고 있는건 보지
못하는가. 자존심이 없는 력사가는 청맹과니가 되고마네.…》 흔히 력사가는 상상력이 풍부해야 하고 공부를 많이 해야 하고 체험이 깊어야 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그 모든것에 앞서 자기 민족에 대한
사랑과 긍지야말로 력사가가 지녀야 할 필수자질이라는 철리를 그 나날 리교수는 성민에게 새겨주었다.… 이윽고 연단쪽에서 귀에 익은 리경식교수의 웅글진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다 아는바와 같이 도이췰란드는 2차대전직후 200만점에 달하는 략탈문화재들을 해당 국들에 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유독 일본만은 반세기가
넘도록 그에 대한 아무런 반성과 사죄도 없이 략탈한 문화재들을 계속 차지하고있을뿐만아니라 그 반환에 대해 어떤 담보나 약속도 없이 오늘에
이르고있습니다.》 교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장내를 둘러보았다. 조명등의 강렬한 반사광이 교수의 안경에 부딪쳐 섬광을 일으킨다. 저으기 흥분한듯 잠시 숨을
고루던 리교수는 얼마후 강개한 어조로 토론을 계속하는것이였다. 《조선문화재를 파괴하고 략탈한 일제의 죄행은 아직도 아물지 못한 상처로 우리 겨레의 가슴속에 뿌리깊이 남아있으며 일본당국의 철면피한 처사는
전체 조선민족의 의분을 불러일으키고있습니다.…》 궁글고 심각한 교수의 목소리가 비분의 절규인양 긴 여운을 남기며 사람들의 가슴을 두드리고있었다. 문성민에게는 교수의 토론이 학술토론으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고문서의 기록들을 인용해가며 지나간 사실을 객관적으로 론증하는 학술토론이기 전에 사랑과 증오로 온몸을 태우며 력사를
살아온 한 체험자의 피끓는 증언이라 해야 할것이다. 《저분도 한때 일본에서 살면서 어머님처럼 민족유물을 수집하시던분이랍니다.》 박인규가 곁에 앉은 동포녀인에게 조용히 알려주는 말이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녀인의 눈길이 리교수에게 붙박혀 떨어질줄을 몰랐다. 문성민도 언젠가 교수에게서 문화재를 수집하던 나날의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었다. 문득 그의 눈앞에 하나의 광경이 떠올랐다. 양복도 못 입은
와이샤쯔바람에 민족유물이 가득찬 트렁크 두개만 량손에 든채 조국의 품에 안기던 리교수의 그 모습이였다. 일본땅에서 넝마장사를 하면서 한점두점
피타게 민족의 재부를 모아들인 그의 애국적소행은 이미 세상에 널리 소개되였다. 하지만 그 나날 리교수가 겪은 기쁨과 괴로움, 고뇌와 환희에 대해
자상하게 알고있는 사람들은 아직 많지 못할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의미가 새로워지는 이야기들이 있다. 리교수의 이야기도 그러한 이야기들중의 하나라고 문성민은 생각했다. 불현듯 서만옥이 긴숨을 몰아쉰다. 조국과 겨레를 위해 한생을 맥박쳐온 한 인간의 심장의 박동소리가 그의 가슴에도 뜨겁게 메아리쳐오는걸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