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 회)

제 13 장

쌍가마

3

 

요즘 어랑산성에서 제일로 골치를 앓는것은 다께시였다.

서진성을 치라는 고니시의 엄명을 받았지만 전번 서진성싸움에서 오갈이 잔뜩 들고 이번 설잔치때 게구마가 《다 파먹은 김치독에 왜 우리만 빠져야 하는가.》라고 지른 그 소래기를 얼싸좋구나 받아문 놈들이 제가닥으로 놀고있었기때문이였다.

서진성을 치지 않으면 고니시의 된벼락을 맞을게고 치자니 자기에게는 이 어랑산성의 정신나간 놈들의 멱살을 잡아일으킬 힘이 없었다.

(아, 내 값이 이것밖에 안되였던가?)

전날 《국사》로 이 나라에 드나든 자기가 오늘은 고니시밑에서 허리를 굽혀야 한다고 생각하니 통분하기도 하고 또 성안에서 마지막싸움이 붙은 이때 언제 도망병들이 몰려나올지도 몰라 좌불안석인 다께시였다.

이때 게구마가 불쑥 앞에 나타났다.

털때문에 얼굴표정은 잘 알수 없으나 오늘은 노는 꼴이 여느때 없이 곰살궂어보였다.

(저놈의 털이 되게 많기는 많군.…)

새삼스럽게 게구마를 지켜보던 다께시는 불쑥 이런 생각이 들어 속으로 때에 맞지 않는 웃음을 머금는데 게구마는 게구마대로 다께시에게 왕청같은 소리를 했다.

《다께시상! 우리 뜁시다.》

《엉?!》

게구마는 다께시앞에 한무릎 다가앉았다.

《평양성이 지금 건들건들하는데 중뿔나게 마지막 코피 터지는 일을 당할 맛이야 있소? 여기 엎드려있다가 평양성형편을 보아서 먼저 뜁시다. 이건 우리 죄가 아니요. 제구실 못한 고니시의 죄지. 문무겸비한 천하영걸로 자처하는 선봉장 고니시가 있고 세상만사에 달통한척 하는 중 겐소가 있는데 제발로 뺑소니들이야 못치겠는가?

내 경성나가면 우끼다님에게 고니시가 무능해서 우리가 구사일생으로 겨우 살아왔다는 이야기를 다 할테니… 우리가 먼저 뜁시다.》

그런데 뜻밖에도 다께시가 《너도 사무라이 종자야?》하고 고함을 치는 바람에 《뭣이? 네놈은 몇푼짜리 사무라이야.》하며 게구마가 칼을 쑥 빼들었다.

깜짝 놀란 구시라가 그들을 겨우 뜯어말렸다.

《네놈은 여기 처박혀앉아서 이 어랑산성이나 지켜라. 비굴한 놈.》

다께시가 내쏘았다. 그런데 비위좋게 게구마는 다시한번 제법 충고를 주듯 한마디 더 했다.

칼집에 칼날을 꽉 박으며 《너무 외곬으로만 생각마시우. 그래, 그 서진성이 얼마나 깊은지도 모르면서 왜 그속에 손을 넣지 못해 안달이우?》

사실 큰소리는 쳤지만 다께시도 그 말에 온몸이 오싹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러고보니 서진성이 참말 골뱅이속처럼 깊고 오묘했다.

전번에 죽을번 한건 말고라도 여직까지 서진성의병들과 여러번 맞서왔지만 매번 업혀다니기만 하지 않았던가. 서진성은 모든것이 수수께끼였다.

(그 성을 덮쳤다가 과연 승산이 있겠는가. 그런데다가 평양성형편은…)

어제밤에도 밤새껏 평양하늘을 불태우던 그 무서운 불화살을 바라보면서 이제 도망쳐올 고니시한테서 그동안 서진성을 눌러놓지 못했다고 벼락을 맞을 일을 생각하며 안팎곱사등이신세가 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던 다께시는 이래저래 울컥 밸이 치밀었지만 게구마의 말을 귀등으로 들으며 구시라의 2천군을 거느리고 서진성을 향해 나섰다.

어둠속 어디에서 의병들이 불쑥 나타날지, 언제 총알과 표창이 날아들지, 어디에 함정과 덫이 있는지 이제는 다 파먹은 김치독에 빠지지 말아야겠다는 한 생각만이 온 무리를 지배하는 2천군은 사실상 허울뿐이였다.

(그런데 왜 서진성이 저렇게 잠잠할가?!)

오늘 낮에만 해도 북과 징, 새납소리가 요란했고 성우엔 기발들이 펄펄 날리고있었다는 서진성이 아닌가.

정적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하여 왜군은 잔뜩 오그라들었다. 구시라가 먼저 500명을 데리고 성안의 동정을 알아보러 떠났다.

나머지놈들은 눈속에 몸들을 감추고있었다.

초이레밤 어스름한 달빛에 높지 않은 토성이 우렷이 비껴 높이도 솟아보였다.

눈속에 박혀있는 놈들은 여차직하면 뛴다는 공통된 심정으로 뻘건 평양성쪽 하늘과 우중충한 서진성을 번갈아보며 마음들을 조이고있었다.

그런데 이와는 딴판으로 그 무슨 이야기모임이라도 하듯 소곤거리는 패들도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 싸움에서 우리에게 이길 가망이 없단 말이지?》

《그렇지요. 조선군사나 의병들이 쓰는 말만을 들어봐도 〈내 나라〉,〈내 백성〉,〈우리 평양〉등 … 그 말들에는 씨알이 박혔는데 우리에게 〈우리 나라를 위하여! 우리 백성을 위하여!〉라는 말을 쓰는 사람이 있습네까? 그런 명분이 없으니까 차돌멩이에 맞아 조총이 쇠부지깽이가 되고말지요.》

《우리 나라 사무라이들이 차고다니는 검도 무고한 백성들의 목을 베여 시험을 해보고나서야 차고다니는것인데 그런 아수라의 칼로 어떻게 정의로운 조선백성의 넋을 함부로 벨수 있겠소이까?》

한편 서진성성벽앞으로 살금살금 기여가는 왜병들은 그 성가퀴에서 염라대왕의 귀신들이 불쑥 나타나는듯싶어 마음들이 조마조마한데 뜻밖에 앞의 병졸의 환성이 터졌다.

《서진성 의병들이 우리가 무서워 다 뛰였다!》

《서진성이 텅 비였다. 성문들이 활짝 열려있다!》

그 말을 듣자 뒤에서 따르던자들은 다리맥이 풀렸다.

《아니 빈 성을 바라구 우리가 여기까지 달려왔단 말이요. 참 한심하군.》

《글쎄말이야. 그런것두 모르구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온 장수들은 도대체 어떤 속심을 가진것들이야, 우리를 텅 빈 성에 끌어다놓구 당장 굶겨죽이자는게 아니야.》

《돌아가세. 어랑산성으로… 괜히 여기서 우물거리다가 무슨 벼락을 또 맞겠는지 모르겠네.》

왜병들은 여기저기 모여서서 소리를 줴쳤다.

2천명의 《개선부대》가 의기양양해서 돌아올 때 서진성에서 둥― 둥― 북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뛰자! 또 속았다.》

가뜩이나 림기응변한 의병전술에 지금까지 혼맹이가 빠졌던 왜병들은 소용돌이치는 물살과 같이 산지사방 흩어져 뛰기 시작했다. 사다리, 중차 등 무거운 병쟁기들을 다 내동댕이치고…

《서랏! 서랏!》

다께시와 구시라의 고함소리가 소용돌이속에 묻혀버렸다.

혼비백산한 대렬이 활랑거리는 가슴들로 어랑산성으로 들어섰을 때 거기에서는 또 뜻밖의 일이 기다리고있었다.

얼굴의 털을 빡빡 깎은 놈이 칼자욱이 시퍼런 얼굴을 희번덕거리며 다께시에게 지껄여댔다.

《평양성 우리 군사가 전멸지경에 이르렀다오. 서진성에도 의병들이 없다니 이젠 우리 먼저 뜁세다. 평양성치들이야 어련히 뒤따라오지 않으리요.》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다께시가 어리벙벙해져서 묻자 그 자는 《아니 이 게구마도 몰라보시우?》하고 다께시앞에 바싹 코를 들여보였다.

《나무아미타불!》

다께시는 뒤걸음을 치면서 눈을 희번덕거렸다.

《수염때문에 조선백성놈들이 날 제꺽 알아볼것 같아 이렇게 싹 깎아버렸수다. 나는 당신에게 권고할건 다 권고했소. 이제는 당신마음대로…》

게구마가 수하병졸들에게 소리쳤다.

《평양성안의 우리 군사가 곧 도망쳐나온다. 우린 이젠 빈 성인 서진성에서 더 할 일이 없으니 한걸음 먼저 앞서가자.》

그렇지 않아도 조마조마해있던자들이 일시에 와― 일어섰다.

구시라와 다께시가 그앞을 막으며 칼을 빼들고 고래고래 소래기를 쳤지만 터진 물곬앞에 두손을 내대는격이였다.

이때 불화살 한대가 춤을 추듯 날아와 성앞 오리나무에 박혔다.

《의병들이 새벽에 쳐들어온다.》하는 질겁한 소리가 한쪽에서 들리자 졸병들은 걷잡을수없이 터진 물고기떼처럼 와―하고 밀려나왔다.

왜병들의 혼란은 더 커졌다. 사무라이 몇놈이 칼을 빼들고 졸개몇놈의 목을 치며 막아나섰지만 어느새 어랑산성 군사의 절반이 도망쳐버리고말았다.

도망군의 맨 앞장에는 게구마와 매부리코가 서있었다. 뒤따르던 병졸들이 저들끼리 이렇게 수작질했다.

《게구마상이 살줄 아는데서는 다께시상보다 한수 높거든.》

《저 게구마상이 우리에게 오늘 한턱 쓰는데…》

《그런데 저렇게 털 빡빡 깎고 뛰다가 변나지 않을가?》

《털이 많다는것만 생각했지 그 털을 빡빡 깎으면 제 얼굴이 더 두드러지게 드러난다는건 모르거든.》

《역시 팔삭둥이야. 히히히…》

왜놈들이란 잠시도 주둥이를 다물지 못하는 놈들이였다.

뒤에서 저를 보고 흉을 보든말든 게구마는 매부리코에게 으시대듯 물었다.

《앞을 내다보는데서 나와 다께시를 비교해보면 어때?》

《하늘땅차이입죠.》

《뭐가?》

《수염을 깎는 선견지명으로부터 가지고가실 짐보따리 꾸려놓는 일… 어디 다께시상이야 그런걸 압니까? 게구마장수야말로 영웅이시오.》

매부리코는 게구마를 추어올렸다. 이젠 경성으로 간다는 생각에서였다.

게구마는 자못 유쾌한듯 먼동이 트기 시작하는 하늘을 털깎아서 시퍼래진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로서는 그럴만도 했다. 우선 그 아슬아슬한 사지에서 벗어났고 서진성에서 골탕먹은 책임을 몽땅 다께시에게 넘겨씌우게 되였으며 고니시를 비롯한 평양성에 와있던 놈들이 제말을 통 듣지 않은탓에 큰일을 망쳤다고 큰소리를 치게끔 된것이다.

《아, 오래간만에 우끼다님을 뵈옵게 되누만. 그런데 그 호랑이가죽을 못가지고가서…》

우끼다란 말에 매부리코는 한수 더 떴다.

《호랑이가죽같은것쯤이야… 후담에 오셔두…》

《뭐, 날보구 이 평양성에 또 오란 말이야?》

《그때 오실 때야 선봉장직책을 가지고오시게 되겠지요. 문무를 겸비하신 장군이 아니고서야 뉘가 감히…》

《하기사 평양성을 한번 치기는 쳐야지.》

《그럼요. 이번에야 어디 꼴이 됐소이까. 고니시상에게 당신 절반만한 선견지명이 있었어두…》

《하긴 인재가 문제야…》

게구마는 말우에서 잔뜩 틀을 차렸다.

이렇게 지껄이면서 얼마쯤 왔을 때였다.

희끄무레한 새벽노을속의 그곳 지형을 돌아보던 게구마가 고개를 기웃거렸다.

《여기 지대가 낯이 익다.》

《참 기억력이 좋으십니다. 예가 바로 서울서 오실 때 들리셨던 그 꽃골마을 들어가는 길목어구올시다.》

매부리코가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렇지! 여기가 바로 변변치 못한 기꾸찌란 놈이 저 벼랑우에서 아이놈이 던지는 차돌멩이를 맞고 천당간 곳이지.…》

《그렇소이다.》

《원 허드레망태기같은 놈… 그런게 다 사무라이라구…》

게구마는 저의 《전성시대》라도 생각하는듯 자못 감회에 잠긴 얼굴로 꽃골쪽을 바라보았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순박하고 선량한 남의 나라 백성들의 보금자리에 불소나기를 퍼붓고 그들의 피줄을 칼탕쳐놓고도 그것을 마치 야마도 사무라이의 호걸기개로 생각하는 모양이였다.

그날 《가전지보》를 휘둘러대던 그 쾌감을 이 새벽 다시한번 음미라도 하는듯 눈을 지그시 감아보던 게구마는 문득 제 귀바퀴를 스쳐날아가던 시퍼런 도끼날과 펄펄 불이 이는 눈들을 부릅뜨고 덤벼들던 백성들의 고함소리와 그들이 쳐들었던 괭이, 쇠스랑이 눈앞에 번쩍번쩍 떠올라 오싹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에익, 그때를 생각하면…)

이 순간 게구마는 바로 자기의 코앞에서 쌍가마의 서슬푸른 표창이 자기의 멱줄을 겨누고있는줄은 꿈에도 생각못하고있었다.

황바위와 함께 길목에 엎드려 거들먹거리며 말을 타고오는 게구마를 지켜보는 쌍가마의 두눈에서는 불이 펄펄 일었다.

《선봉장님, 제손으로 원쑤를 갚겠나이다.》

나직이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는 비분에 떨렸다.

《주의하라구.》

황바위도 적개심이 불타올라 쌍가마의 요구를 수락하였다.

어느새 벌써 쌍가마는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말을 탄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게구마는 불현듯 회오리바람치듯 바위우에 퍼뜩 올라선 사람의 형체를 보고 금시 눈알이 뒤집혔다.

푸른빛의 옷, 푸른 수건으로 감싸진 자그마한 키, 분명 녀자였다. 그뒤에서 같은 차림새의 늘씬한 체구가 또 얼씬했다.

벼랑우의 그 녀자가 번쩍 추켜드는 예리한 쇠붙이가 동쪽산마루에 방금 솟아오르는 해빛을 받아 눈부신 빛을 발산했다.

이어 휘파람소리와 함께 녀자의 손에서 표창이 윙소리를 내며 날아들어 말의 멱줄을 끊어놓았다. 그와 함께 게구마가 으악 소리를 지르며 길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코밀이를 한 놈은 그래도 사무라이라고 이내 몸을 가누더니 칙쇼 하고 칼을 빼들었다. 그리고는 쌍가마를 향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헌데 이번에는 쌍가마의 손에서 휘파람소리를 내며 날아든 표창이 놈의 무르팍을 뀄다. 복수로 갈고 원한으로 벼린 쌍가마의 표창이였다.

털을 깎은 가증스런 얼굴을 고향마을 밝은 해빛속에서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낸 쌍가마의 복수의 표창, 어머니와 오빠, 삼촌어머니, 사촌동생과 함께 던진 그 칼날에 어찌 드팀이 있으랴.

게구마와 함께 오던 마군놈들이 내뛰기 시작했다.

잠시후 다시 머리를 쳐든 게구마는 몇걸음앞에서 증오에 찬 눈으로 자기를 내려다보는 남복차림의 녀자의병을 발견할수가 있었다.

《으흐흑… 내가 쪼꼬만 계집의 표창에 이 꼴이 되다니…》

《게구마 이놈. 네놈에게 무참히 죽은 룡악이마을사람들의 복수다!》

《룡악이? 흐흐윽, 룡악이, 룡악이. 내 그때 네년놈들의 씨종자를 모조리 없애버리지 못한것이 한이다.》

《닥쳐라, 이 섬오랑캐 백정놈아! 죽어도 똑똑히 알아두고 죽어라. 우리 백성들은 다시는 네놈들이 이 땅을 넘겨다보지 못하도록 네놈들의 씨종자를 말릴것이다.》

쌍가마가 검을 비껴들고 다가서는데 놈이 승냥이처럼 울부짖었다.

《이년, 다가서지 말아!》

그러더니 이내 옆에 찼던 단검을 꺼내더니 자기의 배에 가져다대는것이였다. 사무라이답게 죽는다는것이였다. 정말 악종중의 악종인 놈은 제 배를 갈라냈다.

《아, 분통이 터지는구나!》

놈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고나서 피거품을 물고 꾸억꾸억거리다가 아예 잠잠해졌다. 잠시후 뒤에서 밀려오던 놈들이 배를 가르고 죽은 게구마를 발견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게구마상이 죽었다!》

때를 맞추어 벼랑바위우에서 붉은 기발이 연거퍼 세번 힘차게 올라갔다. 길바닥을 새까맣게 덮고 뛰던 놈들의 머리우로 큰길과 량옆의 산벼랑, 논두렁들에서 엇바뀌며 표창이 날아들었다. 갑옷입은 놈들이 꼬리를 물고 나딩굴었다. 여기에 창검대의 칼벼락, 창벼락에 손쓸사이가 없는 놈들은 앞쪽 야산에서 콩볶듯 하는 조총소리에 놀라 길로는 감히 뛰지 못하고 논두렁, 밭두렁들로 말들을 내몰았다. 그러자 의병들은 제꺽 군마들을 들이치는 전술로 바꿨다.

삽시에 길바닥과 논두렁들에 놈들의 군마들이 너저분하게 자빠졌다.

말에서 떨어진 놈들이 꽁지가 빳빳해서 뛰다가 제놈들이 메고왔던 조총에 맞고 논두렁, 밭두렁들에 푹푹 꼬꾸라졌다.

이 다급한 정황속에서도 매부리코는 게구마의 부담마에서 나딩군 고려청자기며 그림과 글씨족자들을 주어모으고있었다. 경성 우끼다에게 바칠 뢰물을 길바닥에 놔두고싶지 않았던것이다.

이때 백립을 쓴 선비가 도끼를 추켜들고 그놈에게 달려들며 《이 오랑캐놈아, 우리 조상들이 남겨놓은 국보들을 못가져간다.》하고 웨치다가 매부리코의 칼에 맞고 쓰러졌다. 그러자 머리흰 나이지긋한 중로인이 비호처럼 달려오더니 매부리코의 허리통을 한칼에 동강냈다. 유신검이였다. 천하 명검공의 법도있는 검술 솜씨였다.

여기저기서 손로인과 윤초시, 호영이 어머니와 꽃골사람들이 길바닥으로 내달려 버드럭거리는 놈들을 도끼와 쇠스랑으로 찍어넘겼다.

《게구마놈을 잡았다!》

《털깎고 도망치던 놈을 쌍가마가 잡았다!》

꽃골사람들이 소리쳤다.

《어머니, 오빠, 보시나요. 룡악이마을사람들의 원쑤를 갚았소이다.》

발돋움을 치며 꽃골쪽을 바라보는 쌍가마의 두눈에서 걷잡을수 없이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4

 

놈들이 도망치는 큰길과 산굽이, 논두렁과 밭두렁우로 황바위선봉장이 높이 쳐든 기발에 따라 중화의병대의 멸적의 불덩이들이 쏟아지고있었다.

흰눈을 물들이는 붉은 피빛들이 더 짙어갔다.

이제 뒤미처 밀려올 어랑산성 왜군들, 평양성에서 쫓겨올 이리떼들의 무리도 서진성을 옮겨다놓은 이 꽃골어구에서 이렇게 무리죽음을 당하리라.

도망치는 왜병들속에서 겁에 질린 목소리들이 들렸다.

《아, 서진성이 여기 나와있었구나!》

《여기서 우리를 기다렸구나!》

어제밤 빈 서진성에 들어갔던 놈들이였다.

사위는 또다시 잠잠해졌다. 그럴수록 왜병들은 조갈이 들었다.

황바위의 전술이였다. 손오복이와 상론했던대로 이제 뒤이어 나올 왜적들에게 안도감을 주기 위해서였다. 산짐승무리도 한번 빠졌던 함정으로는 다시 오려 하지 않는다. 여기서 계속 소리를 내는것은 우둔한짓이였던것이다.

더 큰 멸적의 불벼락대목, 그것은 더 앞으로 멀리 나가서 황주계선과 청주산어구목인것이다.

정적은 오히려 왜병들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왜 이리 조용할가. 맹수도 먹이를 덮치기 전엔 숨을 죽인다는데…)

왜병들은 겁기어린 초췌한 눈으로 사방을 휘둘러보며 목을 움츠렸다.

도망치는 생쥐도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돌아서서 고양이를 문다고 했던가. 몇놈이 조총을 아무데나 쏘아대며 미친놈처럼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서라, 이놈들아!》

하지만 주위는 여전히 조용했다.

《가만!》

게구마대신 대오를 인솔하던 놈이 소리쳤다.

대렬이 일제히 멈춰섰다.

《분명코 의병놈들이 길목에 또 매복하고있을것이다. 이제부터 부대를 세개 대로 나누어 행동해야겠다. 척후대는 길을 따라 곧추 나가고 다른 두개의 대는 길량옆 숲을 타고 한 5리가량 떨어져서 전진하라!》

구령에 따라 왜병부대는 세개로 갈라졌다.

과연 놈들도 머저리는 아니였다.

매복해있던 의병들이 먼저 나타난 척후왜병들에게 불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이때 기다리고있은듯 량옆에서 멀찍이 떨어져 전진하던 왜병들이 의병들의 뒤쪽으로 은밀히 접근하기 시작했다.

의병들은 그것을 알리없었다. 그속에는 황바위도 있었지만 그 역시 앞으로 달려드는 놈들에게 차돌멩이를 던지느라 여념이 없었다.

의병들의 뒤로 덤벼드는 적들을 맨 먼저 발견한 사람은 쌍가마였다. 쌍가마는 그 시각 꽃골사람들과 헤여져 황바위에게 오고있었던것이다.

쌍가마는 싸움형편을 순간에 포착하였다.

(놈들이 의병대의 뒤를 치려 하고있구나! 안된다, 안돼!)

그 순간 쌍가마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사랑하는 황바위에게로 향한 왜놈들을 유인해야겠다는 결심을 가다듬었다. 말고삐를 든든히 틀어쥔 그는 적들을 향해 달리며 소리쳤다.

《이놈들아! 내 칼을 받아라!》

쌍가마의 손에서 표창들이 번개같이 날아갔다.

《으악―》

단번에 두놈이 멱을 잡으며 꼬꾸라졌다.

《매복이다!》

뜻밖에도 저들의 익측에서 의병의 표창이 날아들자 적들은 기가 질렸다.

쌍가마는 숲속을 꿰지르며 계속 표창을 뿌렸다.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있던 적들은 그제야 상대가 쌍가마 혼자뿐임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서뿔리 달려드는자가 없었다. 혹시 그 뒤에 수백명의 의병들이 있을지 어이 알랴.

아무리 둘러봐야 쌍가마 혼자뿐임을 확인한 왜병들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듯 여기저기서 소리쳤다.

《계집 혼자다. 사로잡으라!》

계집이라는 소리에 미친증이 살아오른 왜병들은 괴이한 비명을 내지르며 칼을 내들고 달려들었다.

어느새 쌍가마의 주위로 포위환이 형성되였다.

정황을 직감한 쌍가마는 머리를 버쩍 쳐들었다.

(이대로 죽을수는 없다!)

순간 그의 머리속에 이 주변 어디엔가 벼랑이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지, 이놈들을 그리로 유인하자.)

쌍가마는 말머리를 돌려 칼벼랑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쫓으라!》

몇명의 마병들이 쌍가마의 뒤를 물었다.

어지러운 조총소리가 울리는 속에 네굽을 놓고 달리던 쌍가마의 말이 호호응―하며 무춤거리는것이 아닌가. 공교스럽게도 벼랑까지 가닿지 못한채 왜병의 조총탄에 맞은것이였다.

쌍가마는 어쩔새없이 말에서 떨어지며 눈속에 나딩굴었다.

《악―》

한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희뿌연 하늘이 빙 돌아갔다.

(아, 이렇게 되다니…)

쌍가마는 몸을 움직여보려 했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어깨부위가 선뜩한게 이상했다. 그제서야 그는 총탄에 맞았음을 깨달았다.

《사로잡으라!》

왜병들의 말발굽소리가 가까이에서 울렸다.

쌍가마는 반사적으로 허리춤을 매만졌다. 한개의 표창이 잡혀졌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표창을 감아쥐고 가슴에 대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 오빠!》

마지막으로 황바위가 보고싶었다. 함께 있던 그 시절 그를 괴롭힌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에게 가슴에 꽉 차있는 사랑을 바치지 못하고 가는 자신이 한스럽기 그지없었다. 아, 왜놈들을 이 땅에서 몰아낼 때까지 황바위와 함께 적토마를 타고 남해끝까지 달려가려 했건만…

《바위오빠, 내 몫까지 다해 왜놈들을 쳐주세요!》

쌍가마는 맘속으로 웨쳤다.

《처억― 처억―》

왜병들이 거의다 다가와 막 덮치려는 순간 쌍가마는 표창을 자기의 가슴팍에 박았다.…

 

한편 꽃골마을어귀 칼벼랑 좌측숲속에서 다급히 울린 몇방의 조총소리에 황바위는 표창질을 멈추었다. 너무도 예견치 않았던 정황이였던것이다.

(놈들이 좌우켠 익측으로 에돌아 빠지려고 하고있구나! 그런데 거기엔 매복이 없을텐데… 가만, 쌍가마가 그쪽에서 올 때가 되였는데 혹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황바위는 곧 후위를 맡았던 호영에게 몇명의 표창대원들을 데리고 좌측의 왜놈들을 치도록 하는 한편 곧 철수명령을 내렸다. 길어지면 도리여 불리했던것이다.

호영이 이끈 표창대원들이 좌측켠의 숲속으로 달려갔다. 그쪽에서는 말을 타고 표창을 던지며 내달리는 쌍가마를 향해 왜군들이 고함을 지르며 조총을 쏘아대고있었다.

황바위의 뒤로 달려드는 놈들을 유인하려는 쌍가마의 의도를 깨달은 호영이 소리쳤다.

《쌍가마가 위험하다, 다들 나를 따르라!》

호영의 뒤를 따라 표창대원들의 손에서 표창들이 날아갔다. 놈들도 그들을 향해 조총을 쏘아댔다.

그런중에 마군들이 몰려간 칼벼랑쪽에서 몇방의 총소리가 울리더니 아예 잠잠해지는것이였다.

《날 따르라!》

호영은 벼락같이 소리치며 숲속을 꿰지르고 칼벼랑쪽으로 내달렸다. 뒤에서 조총소리가 울렸다. 뒤따르던 몇명의 표창대원들이 쓰러졌다.

호영이 칼벼랑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쌍가마가 왜군들의 란도질에 무참히 살해된 후였다.

절통한 마음을 다잡지 못해하며 호영이 꼬리를 사리는 왜군들을 뒤쫓아갔으나 허사였다.…

 

눈이 내리고있었다. 도망길에 들었다가 쌍가마의 표창에 목이 꿰진 게구마의 몸뚱이와 《푸른갑옷》 황바위의 차돌멩이에 대갈통이 깨여진 왜놈들의 더러운 시체를 묻어버리려는듯 펑펑 흰눈이 쏟아져내리고있었다.

그 눈은 순간에 상처입은 이 나라의 산과 들을 백설광야로 만들어버렸다.

모든것이 평온해진 꽃골마을 뒤산언덕받이에 금방 생긴 봉분도 벌써 하이얀 눈으로 단장되였다.

왜적을 쳐부시는 싸움에서 쓰러진 이 나라의 아들딸들이 고이 잠든 봉분마다에도 이렇게 흰눈은 내리고 내리리라. 마치 마음의 상처를 덮어버리려는듯… 허나 천년이 흘러 강산이 변한대도 간악한 왜적의 무리가 이 나라 백성들의 가슴들에 남겨놓은 마음의 상처 아물수 있으랴.

머리와 어깨우에 눈송이를 무둑히 얹고 쌍가마의 봉분앞에 굳어진듯 서있는 황바위의 모습은 마치 흰 묘비인듯 했다. 언제까지라도 그렇게 서고만 있을 그였다.

《선봉장, 이젠 그만하게. 모두가 지금 선봉장의 모습을 보고있네.…》

등뒤에 다가선것은 한대걸이였다. 보다못해 말을 건넨것이다.

그제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황바위의 눈섭은 백호처럼 흰빛을 띠였는데 두볼에는 흐르다만 눈물이 얼음덩이처럼 굳어져있는것이 아닌가.

(아, 저 북대봉호랑이가 가슴이 얼마나 아팠으면 이리도 쌍가마의 봉분앞을 떠나지 못해하랴!)

한대걸은 너무도 가슴이 아파 고개를 돌리고말았다.

황바위는 주먹으로 얼어붙은 눈물을 쓰윽 닦아냈다.

《아저씨, 쌍가마는 나의 등뒤로 덮쳐드는 왜군을 유인하다가 그렇게 되였소이다. 내 이제 무슨 낯으로 고향사람들을 대한단 말입니까.》

《쌍가마가 바란게 뭐겠나, 살아서 꼭 왜놈들을 고향땅에서 몰아내달라는것이 아니였겠나.… 그보다도 난 자네가 쌍가마의 희생으로 하여 상심해 기가 꺾이게 될것이 걱정이구만.…》

《아저씨! 절 욕해주십시오. 제 왜놈들을 이 땅에서 영영 몰아낼때까지 다시는, 다시는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겠소이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산언덕을 내렸다.…

이것이 바로 평양성수복싸움을 며칠 앞둔 어느날에 있은 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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