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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불멸의 력사》
장 편 소
설

박 윤
( 제 37 회 )
×
조순군은 소양강의 소란스러운 물소리에 문득 의식을 차렸다. 머리가 뗑하고 정신이 들지
않는게 여간 기분이 나쁘지 않다. 그런속에도 오른손은 기관단총의 부혁을 으스러지게 틀어쥐고있다.
(내가 어떻게 된 일인가. 산건 명백하구… 지금이 어느때야?… 밤이야, 낮이야?…)
움쭉 몸을 일으키려다가 《아이구우.》하고 신음소리를 내지르며 오히려 땅에 코를 박은채
길게 뻗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오른쪽장딴지와 왼쪽허벅지가 둔한 식칼로 생살을 도려내듯 예리하게 아파났다.
그는 다시 신음소리를 내지르다가 피끗 정신이 들어 안깐힘을 쓰며 허리를 폈다. 허리춤에서
개인붕대를 꺼내 구멍이 펑 뚫리고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부상자리들을 힘들게 처맸다. 적기관총에 아래도리를 맞은것이다.
비로소 숨이 나가는것과 함께 어제밤 습격조로 떠나온 전후사연이 쪼각쪼각 머리속에서 이어진다.
(흠… 그렇지. 대대장동지와 함께 전무성정찰군관이 우리에게 임무를 주었어. 놈들의 《금화공세》를
짓부셔버리는데서 큰 의의가 있는, 류경수군단장동지까지 관심하는 습격전투랬어. 미제침략군이 저 오성산일대에
력량을 집중하지 못하게 여기저기서 족쳐대야 한다고… 그래 우린 소양강기슭을 따라 전진하면서 중땅크집결처를 확인했어.
조장동지가… 응, 땅크집결처를 습격하고 우린 적연유창으로 접근하다가 추적을 받았지… 부상당했지만 난 습격조를
엄호하다가… 총탄이 떨어진 후… 그래, 미군순찰병놈과 격투하던 중 함께 이 벼랑으로 떨어진것 같아…)
조순근은 머리를 비틀어 어둠속에 잠긴 강변을 살펴보았다. 저만치 너럭바위곁에
미군침략군병정이 코를 처박고 뻗어있다.
함께 굴러떨어졌어도 이 땅이 제 아들은 알아본것이다. 네놈은 죽고 나는 살았어. 강변을
올려다보았다. 천길벼랑은 아니였으나 아무리 억척장신이라고 해도 떨어지면 목대나 사등뼈가 으깨질 높이다. 조순근은 부지중
아픔을 참으며 어설픈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래! 땅아, 넌 이 농민출신의 조순근이를 배척하지 못해, 암 그렇구말구… 나야
우리 백성들의 하늘님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 친히 아시는 전사거든. 글쎄 우리의 장군님께서 아버지, 어머니를
찾아주시고 베잠뱅이들의 소박한 편지까지 전해주셨거든. 그 편지엔… 얌전때기 복순이의 소식도 들어있었어. 약혼만 했는데도
부모님들을 모시고있거든. 호박처럼 둥글둥글하지만 마음은 비단 한가지야…)
조순근은 자기가 까무라친새 몸에서 피가 많이 흘렀다는것을 깨달았다. 머리속에 허깨비가
들어앉은듯 어지럽고 이 생각, 저 생각이 겹쳐지고 때로는 헤뜨는것처럼 정신이 가물거리기도 하는것이였다.
(내가, 인민군군인이… 륙군하사가 이게 무슨 꼴이람. 어서 날이 밝기 전에 부대를
찾아가야지…)
조순근은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꿈쩍도 할수 없었다.
이미 하반신은 자기것이 아니였다.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꺼질듯 한숨을 내쉬고나서 소양강쪽으로 힘들게 기여갔다. 무수한 바늘이 온몸을 마구
찌르는것 같았으나 끝내 가닿았다.
소양강물에 얼굴을 박고 타는 목을 추기려다가 간신히 참고 물을 도로 뱉았다. 피를 많이
흘린 다음 물을 마시면 그건 끝장이다.
조순근은 신기철분대장에게서 그런 리치를 배웠다.
(배워둬서 나쁠건 없어. 저 박원진이는 영어를 배워두지 않았다고 후회했지. 좋은
친구였는데… 참, 대대에 와있는 전무성군관동진… 다음번엔 우편물을 찾으러 회양까지 나를 보내자고 대대장동지에게
말했었지. 아마 그 녀군관때문일수도 있어. 그런데 그날 후방물자타러 갔을 때 보니 정찰군관동진 그 녀성군관앞에서 너무
꼼짝못해.
《무성동무, 난 그런걸 좋아하지 않아요.》
《알겠소. 다음번엔 시정하지.》
《그리구 왜 목달개는 그 모양이예요. 동문… 전사들의 거울이 아닌가요.》
《그것도 고치겠소.》
정말 《물렁팥죽》 군관동지야, 허허허…
도대체 그 군관동진 뼈대가 있는분인지 모를 지경이였어. 아무리 가시내가 곱기로서니 사내의
체면이야 잃지 말아야지…)
조순근은 자기앞에서 만약 호박꽃같은 복순이가 치마바람을 일군다면 하고 상상해보았다.
그는 오만상을 찡그리고 저도 모르게 《어험!》하고 위엄있게 헛기침을 했다.
어딘가 벼랑밑 어둠에 묻힌 으슥한 수풀속에서 인기척같은것이 났다.
조순근은 정신이 번쩍 들어 기관단총을 움켜쥐였다.
《누구야. 손들엇! 움직이면 쏜다!》
조순근은 이 순간 자기가 빈 총을 들고있다는것을 잊었다.
어제밤의 격투도 탄환이 떨어져 시작된것이였다.
가시덤불쪽이 대뜸 잠잠해졌다.
짐승인가? 착각인가? 너무 피를 흘린것 같아.
《난 인민군이다. 대답하라.…》
그러자 수풀쪽이 다시 부스럭거리더니 어둠속에서 막대기같은걸 목에 건 두억시니가 향방없이
기여나온다.
《누구야?》
《성님, 순근성님 아니시유?…》
조순근은 깜짝 놀라 뒤로 몸을 세웠다.
《누, 누구야?…》
《옳군요. 내 김덕만이예유…》
《뭐? 덕만이?!…》
조순근은 희미한 강물빛에 벌금벌금 손더듬하며 기여오는 형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철갑모밑으로 얼굴에 붕대를 칭칭 돌려감고 온통 피칠갑을 하여 도깨비화상처럼 보이는
김덕만이 발치까지 더듬어오자 그제야 조순근은 그를 알아보고 이마살을 찌프렸다.
《덕만아, 네가 어떻게 된거니?》
김덕만이 쭈그리고 앉아 한숨을 푹 내쉰다.
《어제 성님들이 연유창을 때리는 전투때 상했어유.
…854.1고지를 떼운 다음 난 사실 처벌중대에 가서 별고생을 다 해유…》
《야, 덕만아, 그러게 전번에 내가 말했지. 그 총부리를 어디루 돌리는거야. 왜 그
죽일놈의 미군놈들을 따라다니는가 말이야!》
《성님…》
《이 청맹과니야. 너 이 전쟁이 무슨 전쟁인줄 알아? 조선사람과 미국놈과의 싸움이야. 네가
지금 어느편에 붙어다니니? 부끄럽지도 않는가 말이야.》
《성님…》
조순근은 몸을 일으키려다가 끙 신음소리를 내며 다시 주저앉았다.
《성님, 어디 다쳤어유?》
《그래 다쳤다. 미국놈들과 싸우다 다릴 상했다.》
조순근이 또 툭 쏘자 김덕만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쉰다.
《그래, 덕만아. 이젠 어쩔테야?》
《성님…》
《어서 대답해라!》
조순근의 불같은 호령질에 김덕만이 엉금엉금 기여와 그의 상한 다리를 잡았다.
《성님, 난… 그때부터 성님생각만 했어요.… 성님말대로 하려구요. 성님이야 이전에두 우리
마을 젊은것들을 휘동하지 않았수…》
조순근은 그의 손을 당겨잡았다.
《덕만아, 우리에겐 한길밖에 없어.
김일성장군님을 따라나서야 한다.》
《그러니 성님, 나같은것두 정말 인민군대가 될수 있나요?》
조순근은 김덕만의 북두갈구리같은 험한 손을 쓰다듬었다.
《덕만아, 우린 인민의 군대야. 미국놈들과 결판낼 생각이 있는 조선사람은 다 받아줘…》
조순근은 이 순간 리만희대대장이 정치상학시간에 한 강의들이 조리있게 떠오르지 않는것이
안타까와 말을 더듬거렸다.
《성님… 나두 사내대장부로서 인민군대성님을 따라나서겠어요.》
《응, 잘 결심했다! 이제야 덕만이가 제길을 찾았어.》
《그때… 샘터에서 성님을 만난 다음부터 결심했댔어요. 미국놈들을 그저… 우리 대대에두
나같이 생각하는 사병들이 수두룩해유.》
조순근은 김덕만의 얼굴에 칭칭 동인 붕대를 조심스레 만져보았다.
《이제 우리 야전병원에 가면 능한 군의동지들이 널 인차 고쳐줘.》
《정말이예유?》
《날이 밝는구나. 이젠 떠나야겠다. 이 소양강줄기를 따라 오르면 전선을 넘을수 있어…》
김덕만이 등을 돌려댔다.
《성님, 그럼 내게 업히시우. 난 눈을 상해 잘 보지 못하니 그저 길만 가르쳐주시우.》
날이 푸름푸름 밝아오고있었다. 그들은 소양강기슭을 따라 전선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류다른
일행이였다. 《적》군이 《아군》을 업고 동터오는 전선을 향해 가고있었다. 조순근은 김덕만의 등에 업혀 길잡이를
하고있었다.
멀리 전선의 하늘에 해가 솟기 시작했다.
×
길은 곧추 꿈결처럼 아득히 뻗어있다. 이대로 멀리멀리 가고싶었다.
이렇게 차를 몰고서가 아니라 발목이 시도록 저 가을빛 짙은 대지를 걷고 또 걷고싶었다.
그것이 저 푸른빛채운이 드리운 전선너머 어린 시절 몽당치마를 입고 떠나온 고향의 내가까지
이어졌으면… 아버지가 운명직전에 그리도 간절히 뇌이던 향산천기슭의 작은 초가집, 뜰엔 수수울바자를 두르고 울너머
해바라기가 갸웃이 얼굴을 내민 곳, 구기자덩굴이 칠칠이 드리운 박우물에 샘물이 퐁퐁 솟구치던 골… 이제는 모든것이
삭막하고 희미해져 금시라도 영원히 잊혀질것 같아 가슴조이는 이 추억… 새파란 풀이 눈속을 헤집고 돋아있던 밀영의
귀틀집.
장군님의 해빛같은 미소, 작은 손에 은빗을 쥐여주시던 아름답고 현숙하신 녀전사의 눈부신
모습, 말파리, 밀림의 바다를 몰아치던 눈보라… 그래 그걸 잊을수 있을가. 눈보라소리는 어느 한 순간도 그의 마음속을
떠나본적이 없다. 이역땅의 세방에 발을 들여놨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옮겨가던 낯선 도시들의 역두와 선창가에, 아버지가
경영하던 출판사와 책방들의 서가에, 녀학교시절 방학때마다 다녀왔던 하와이의 해안에 있는 삼촌네 2층집에, 삼촌내외가
경영하던 과수농장의 포도밭에, 하버드대학의 원형기둥과 예일대학원의 층계앞에, 신문사의 타자기소리 소란한 방들에,
편집장인 남편과 함께 찾군 하던 하원의원들의 별장과 무도장, 국회의사당 도서실과 청문회장들에 그 추억의 눈보라소리는
떠나지 않고있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냥 울리고있었다.
리지아는 애써 갈마드는 추억들을 털어버리려는듯 검갈색머리칼을 흔들었다. 차속도를 늦추고
차창을 내렸다.
(아버지가 제구실을 바로 다 못하는 이 딸의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섭섭해할가. 그래 난
아직 조국에 필요한 인간이 되려면 멀었어. 너무 소심하고 겁이 많아.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는다니까. 자라보고 놀란 년
솥뚜껑보고도 놀라는 격이 된셈이야… 하지만 아버지가 배워준 정보공작의 초보, 그 《조심성》덕분에 오늘까지
견디여오는건 사실이야. 사실 까게베선으로 접근한건 정말 위험한 길이였어. 그 선이 두번째만에 성공하긴 했지만…)
승용차가 문산을 빠져나와 수림을 낀 도로에 들어섰을 때 불쑥 배기가스를 내뿜으며 모터찌클
한대가 앞을 막아섰다. 철갑모를 쓴 키가 후리후리한 장교가 곤봉을 쳐들었다. 보매 헌병인 모양이다.
리지아는 차를 세웠다.
《증명서!》
차문을 열고 품에서 려권을 꺼내들었다. 그 순간 려권을 든 그 녀자의 손을 장교가 거쿨진
손으로 움켜잡았다.
《리지아선생, 제 리문철이올시다.》
리지아는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전번에 접선한 본부 파견원, 뻐젓이 북쪽말씨를
내놓고 쓰며 서울의 호텔을 찾아왔던 그 키다리 인민군정찰조장 리문철이다.
《옳군요. 어마나, 그런데 어떻게?…》
리지아가 주위를 두릿거리자 리문철은 려권을 도로 주며 히죽이 웃었다.
《등잔밑이 더 어둡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냥 이렇게 서서 접선하는게 제격입니다.》
《제가 여길 지난다는걸 어떻게 알았어요?》
《다 아는수가 있지요. 우린 벌써 사흘째 리선생을 뒤쫓고있었지요. 안전을 위해서…》
《호호, 그런걸 전 소식이 닿지 않아 안타까와 했군요. 새 정보도 있답니다.
클라크부인에게서 알았는데 대통령으로 될 아이젠하워가 오는 12월초에 남조선에 온답니다.》
《허, 그건 중대한 특급정보인데요?…》
《그렇습니까?》
모터찌클에 앉아있던 두 조원이 빙그레 미소를 보낸다.
리지아는 마음이 푹 놓여 방싯이 웃었다.
리문철은 열려진 승용차문짝을 잡고 철갑모를 벗어들었다.
이따금씩 군용차들과 승용차들이 한두대씩 지나갈뿐 도로는 조용하다.
《조국에서는 선생의 공작성과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번 놈들의 〈금화공세〉를 짓부시기
위한 준비를 하는데 선생이 보내준 정보자료도 한몫 했으니까요. 우리 국장동지는 리선생이 영국대사관의 까게베선으로 보내온
첫 정보를 중시합니다. 이건 우리 혁명의 수뇌부보위와 직결되여있으니까요. 물론 신형직승기와 관련된 정보와 극동군사령부의
8개 타격안정보도 중요했습니다.
우리 국장동지는 대단히 만족해하면서 선생이 앞으로도 소소한건 피하고 큼직큼직한 이를테면
전략적인 정보에만 관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김일성장군님께서 선생의 신변을 걱정하십니다.》
리지아는 깜짝 놀라 두손을 가슴앞에 모아쥐였다.
《아니, 김일성장군님께서 저를?!…》
리문철은 눈을 꿈벅이였다.
《이제는 말씀드리지요. 그때도 장군님의 령을 받고 제가 선생을 찾았습니다. 우리는 처음
녀잔지, 남잔지도 몰랐지요.
장군님께서 〈설악산 1번〉동지의 딸이 분명할거라며 은빗이야기까지 해주셔서… 힘들게
찾았습니다.
지시가 있어서 남로당선도 피하고 까게베선을 역리용해서 겨우 꼬리를 밟았지요.…
설마하니 리승만의 처하고 가까울줄이야… 허허허.》
리지아는 가슴이 뭉클하고 눈굽이 뜨거워났다.
(우리 장군님께서… 그러니 밀영을 찾았던 그 어린 소녀를… 다 기억하고계셨구나. 아버지!
장군님께서 우릴 아시고 찾으셨대요.…)
리지아는 눈물을 닦을념도 안하고 리문철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선생, 이번에 장군님께서는 조국을 위해 공로를 세운 선생에게 국기훈장1급을 수여하도록
뜨거운 은정을 돌려주셨습니다.…》
《네?!…》
리지아는 그만 얼굴을 싸쥐고 울음을 터치고야 말았다.
리문철이 자못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리지아동지, 장군님께서는 동지의 훈장을 자신의 서류함에 보관하셨다가 전승의 날에 만나
수여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리지아는 눈물어린 시선으로 전선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장군님… 그리운 아버지장군님, 제 한목숨 다 바쳐서라도 이 믿음, 이 사랑에 기어이
보답하렵니다. 아버지처럼 장군님을 받드는 길에 한생을 바치렵니다.)
날이 어두워지고있었다. 리문철이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리지아동지는 지금 대구로 가시지요?》
《네, 대구에 갔다가 군용기로 도꾜에 가야 합니다. 클라크의 어머니가 도꾜호텔에서 절
기다립니다. 전 이선을 놓치지 말자고 해요.》
《옳게 판단했습니다. 리지아동지, 사업상 동지에게 새로운 비상련락선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장군님의 말씀이 계셔서 동지의 안전을 보호하는 방향에서 안전책들이 취해지고있습니다. 례를 들면 판문점출입명단에서 동지를
포함한 미국기자들을 강경히 배척한다든가. 우리 신문 론평에서 동지의 기사들을 때린다든가…》
리문철의 말에 리지아는 미소를 지었다.
사실 정전담판이 열릴 때부터 리지아는 북조선측이 강경히 항의하는 《환영할수 없는 기자들》
명단속에 들어있었다.
리문철은 안주머니에서 사진 한장을 꺼내들었다.
《이 사람의 얼굴을 기억해두십시오.》
리문철이 사진을 내밀었다.
리지아는 얼핏 들여다보다가 흠칫 놀랐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이자는 미국무성 딘러스크차관보의 서기로 있던…》
《알고계셨는가요?》
《네, 저의 남편도 아는… 미국의 신임을 받는 아주 악질이라고 했어요.》
리문철의 입이 가로 쭉 째졌다.
《됐습니다. 그럼… 바로 이 〈악질〉이 동지네 〈설악산〉조의 조장이고 비상련락원입니다.》
《네?!…》
리지아는 깜짝 놀랐으나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자기도 《악질》로
보였을게 아닌가, 모든것이… 리해되였다.
《이 림송동지는 지금 미8군 련락장교단에 있습니다.》
《예, 요즘도 가끔 마주치군 합니다. 그는 아주 거물급입니다. 도꾜의 미극동군사령부도
제집드나들듯 한답니다. 미군소좌여서 남조선군 대령들도 먼저 허리를 굽혀요. 어떻게 접선할가요?》
리문철이 또 히죽이 웃었다.
《림송동지에게도 이미 리지아동지를 알려주었으니 접선암호는 필요없습니다. 그저 만나면 될것
같습니다.》
《호… 정말 접선암호는 필요없군요.》
《리지아동지, 언제나 우리 동지들이 함께 있고 곁에 있다는것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국장동지의 부탁입니다.》
리문철이 함경도말투로 진중하게 말한다.
리지아는 황홀한 눈길로 정찰조원들을 바라보았다.
(정말 놀라운 사람들이다. 이 사람은 적구에 와서도 꺼리낌없이 북쪽말투를 쓰고… 이태전에
헌병사령관 원용덕이 사단장으로 있을 때 대낮에 이 사람에게 포로된적이 있었다더니… 정말 대단해! 용감하구! 오늘만해도
그래. 번개처럼 나타났거든, 인민군대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야. 이런 인간들이 이 전쟁을 치르고있어, 이기고있어! 난
이제 동지들과 함께 살게 됐구나.… 장군님, 이젠 마음이 든든합니다.)
날이 완전히 어둡고말았다.
리문철이 섭섭한듯 입을 다셨다.
《이거 떠날 시간이 되였군요.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정말 헤여지기 싫군요.》
《이번에 벌린 놈들의 공세도 막판에 이르렀습니다. 얻어맞고있으니까요. 승리한 다음 우리
평양 대동강가에 모여 야유회라도 합시다.》
《약속합시다.》
모터찌클로 씨엉씨엉 다가가던 리문철이 홱 돌아서서 다시 걸어왔다.
리문철은 야전복 품속에서 크지 않은 주머니를 꺼냈다.
《?!…》
《이게 성천 약밤이우다. 한번 맛보시오. 우리 정찰병들의 성의입니다.》
《아이, 정말 고맙습니다.》
리지아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리문철이 대문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다음번엔 아들애한테 줄 목각권총을 갖다드리지요.》
《조장동지!》
리지아는 말을 떼놓고는 눈물이 글썽해서 그를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리지아는 정찰병들이 탄 모터찌클이 파란 배기가스를 뒤에 남기고 수림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오래동안 그냥 차에 앉아있었다.
그는 오늘 이 순간부터 자기가 혁명가로 세상에 다시 태여났다는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는
방그레 웃고나서 남쪽을 향하여 쾌속으로 승용차를 몰아갔다. 차는 전선을 뒤에 두고 남으로, 남으로 달리고있었지만
마음은… 마음은 한순간도 쉼없이 북으로, 장군님의 품으로 날아가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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