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7 회)
제 10 장
서진성혈전
3
왜놈들이 서진성을 치러온다는 정보에 서진성안의 분위기는 팽팽해졌다. 더우기 꽃골사람들은 하늘이 자기들에게 혈육의 복수, 짓밟힌 고향의 복수를 할 기회를 주었다고, 다른 놈은 못잡아도 게구마놈은 꼭 잡아야 한다면서 벌써부터 흥분을 걷잡지 못해하였다.
그런가 하면 게구마놈이 서진성에 마지막인사를 하러 왔다고 벌써 웃음거리로 삼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고자대는 실패의 전제이라고 이런 경향에 림중량은 각별한 주의를 돌렸다. 그러면서 제장들의 성격과 특기들을 더듬어 그에 맞게 전술을 짰다.
실로 오늘 싸움은 주동적으로 적의 대군을 끌어내서 치는 싸움이기는 하지만 서진성의 운명을 건 가렬처절한 싸움이였다. 바로 오늘을 위하여 오래동안 싸움준비를 해왔으며 서진성의 비밀을 깊이 묻어둔것이다.
림중량은 우선 초담이와 대동강 큰 길목의 기찰활동을 잘해서 우선 왜병우두머리들의 치명적약점을 장악하고 그것을 백방으로 리용해서 성미급한 왜놈사무라이들이 조급히 허둥거리게 만들기로 작정했다.
싸움이 눈앞에 박두한 때에 평양방어영에서 군사 하나가 말을 달려 림중량을 찾아왔다.
《림중량의병장께 아뢰오.》
《뭐냐?》
《김응서방어사와 함께 림중량의병장께서도 급히 입궐하라는 어명이 내렸소이다.》
《어명이?》
림중량은 황급히 무릎을 꿇고앉았다. 그를 본따 선봉장, 제장들도 황공한 자세로 무릎을 꿇었다.
림중량은 군사가 내주는 어명이 적힌 종이말이를 정중히 받아들고 읽었다.
어명을 가지고왔던 군사를 떠나보낸 림중량은 한동안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그의 처지에서 임금의 어명까지 받은것은 황공무지한 일이였다. 하지만 당장 닥쳐올 싸움을 두고 떠나자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심중을 들여다본 성표가 장담하듯 말했다.
《의병장님, 여기 싸움은 걱정마시고 어서 떠나시오이다. 저를 믿으시오이다.》
림중량은 부지중 한숨을 내쉬였다.
내키든 내키지 않든 지금은 성표선봉장에게 서진성의 의병대를 맡기는수밖에 없었다.
림중량은 여러 제장들을 둘러보며 간곡하게 당부하였다.
《제장들은 선봉장을 잘 도와서 성을 끝까지 지켜내기 바라네. 여기서 왜적을 물리치지 못하면 평양성을 수복하는 싸움이 그만큼 어려워진다는걸 명심들 하게.》
이어 림중량은 적들이 대군으로 밀려들수 있다는것을 예견해서 서진성주변에 매복시킨 의병대를 더 증강해서 제일 요긴한 대목에 출전시키라고 거듭 당부하고나서 의병 두명을 호위로 삼아 서진성을 떠났다.…
다음날 밤 삼경때쯤 돼서 다께시를 두목으로 하는 대군이 서진성 앞벌을 뒤덮으며 달려들었다.
서진성은 깊은 잠에 곯아떨어진듯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서진성을 가까이 하며 은밀히 기여드는 적들의 머리우로 별안간 불화살이 별찌처럼 꼬리를 끌며 날아갔다.
그러지 않아도 의병들이 파놓은 함정이 없는가, 어디서 차돌멩이나 표창이 날아오지 않겠는가 하고 잔뜩 움츠리고 다가들던 놈들은 눈이 화등잔만 해서 멈춰섰다.
세개의 불화살마다에 무슨 글쪽지들이 끼여있었다. 한통은 게구마에게 보낸것이였다. 《게구마! 이 서진성 차돌멩이맛을 잊었는가. 이번에는 그 검을 떨구지 말고 단단히 틀어잡고 염라대왕에게 가라! 이 땅에는 네가 묻힐 청산이 없다.》
글쪽지를 읽고난 게구마는 퀭해진 눈을 껌벅거리였다.
또 한통은 구시라에게 보낸 쪽지였다. 《고래잡이군 구시라, 생불마귀야! 이 서진성앞 큰길을 팔목의 피로 물들이며 벌렁벌렁 기여갔던 네놈이 왼팔로 칼을 잡고왔구나. 이번엔 영낙없이 그 왼팔마저 끊어주마. 오늘 〈푸른갑옷〉의 표창과 다시한번 맞서보겠느냐?》
구시라는 이를 박박 갈며 서진성을 쏘아보았다. 그는 글쪽지를 발기발기 찢어 팽개쳤다.
다께시도 쪽지를 읽었다. 《당신은 10년전부터 우리 나라에 국사의 명분으로 나들며 정탐질을 해왔는데 그것이면 됐지 목숨과 공명이 그렇게도 소중해서 오늘은 고니시에게 붙어 여기까지 왔는가. 그 목숨부터 잘 건사하라!》
다께시는 서글픈 한숨을 지으며 서진성을 바라보았다.
서진성우에서는 큰 《의》기가 펄펄 날리고있었다.
몇자 안되는 글쪽지가 세명의 왜병우두머리들의 사기를 초절임시켜놓았다.
구시라가 좌군에게 저도 놀랄만큼 큰소리를 내질렀다.
《저 서진성으로 쳐들어가라. 저 성은 비여있다.》
허나 그의 목소리는 바람새는 나팔통과 같았다.
《아니다. 비여있을 서진성이 아니다. 조심하라!》
중군을 거느린 게구마의 겁에 질린 목소리였다.
해는 벌써 열발이나 떠올랐는데 점점 사나와지는 하늬바람속에 눈보라는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제일 선참으로 서진성성벽에 달라붙은것은 구시라의 좌군이였다.
그뒤로 따라선것은 다께시의 우군이였다. 놈은 먹을것을 빼앗길가봐 《쏘라, 쏘라!》고함을 질러 졸병들에게 헛총질을 시키며 달려갔다.
엉거주춤한것은 게구마의 중군이였다.
《어째서 장군은 가만히 계시오?》
다께시의 말에 게구마는 천연스럽게 대답을 했다.
《싸움을 하자면 병법을 알아야 하오.》
게구마는 휘하졸병들을 둔덕진 곳에 올려세워놓고 서진성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지켜보다가 령이 내리거든 조총알소나기를 퍼부으며 나가라고 지시했다.
구시라는 수십개의 사다리를 성벽에 붙여놓고 그우로 졸개들을 몰아올리며 한편으로는 수십개의 중차로 성벽을 까부시게 하였다.
지옥귀신이야기로 어제부터 잔뜩 오갈이 든 졸병놈들이 선뜻 성가퀴에 올라서지 못하는데 구시라가 그들을 노리고있는 조총수들에게 고함을 쳤다.
《우물쩍거리는 놈, 뒤를 돌아보는 놈들은 쏴갈기라.》
놈은 말우에서 칼을 빼들고 눈물을 질끔거리며 목에 피대를 올렸다.
눈치를 보던 게구마가 저자신이 잔뜩 겁에 질려서 앞뒤를 가리지 않고 졸병들을 내몰기 시작했다.
게구마가 다몰아대는 바람에 성곽바깥 물홈타기로 다가서던 졸병들중 어떤자들은 깨진 얼음속에 빠져서 그만 흙투성이가 되면서도 벌벌 떨며 앞으로 전진했다.
게구마는 공을 구시라에게 떼울세라 더욱 악을 썼다.
이때 갑자기 서진성성루와 그 왼쪽 성가퀴쪽에서 몰방으로 쏘아대는 총소리와 함께 사다리로 기여오르던자들이 사다리채 재주넘이를 해서 나딩굴고 물홈의 얼음장을 건느던 자들이 아우성을 치며 물홈과 얼음장우에 나자빠졌다.
《의병대에 조총이 있다.》
싸움을 시작하자마자 의병대에 조총이 있다는것을 안 왜군의 첫 타격은 실로 컸다.
고서방조총대의 그간의 노력이 큰 은을 낸것이다. 스물두자루의 총이였다.
3천 왜군이 나오는 날 다섯자루가 더 생겼는데 그것을 때와 장소를 골라 퍼부어서 얼떨떨해진 적들은 그게 몇백자루의 총인지 알수 없었다.
《와―》소리지르고 뛰던 놈들이 두목놈들의 고함에 다시 돌아섰다.
왜병들의 총알은 성벽에 부딪쳐 튀면서 불꽃만 일으키는데 의병들의 총에는 단 한방의 헛방도 없었다. 맞총질 몇번을 하다가 왜병들이 또다시 뛰는 바람에 적군우두머리들도 함께 돌아서서 뛰기 시작했다.
《이놈들, 이놈들!》
구시라는 악을 쓰며 몇놈의 목을 쳐팽개쳤으나 서진성의 헛방없는 불소나기에 저도 비실비실 뒤로 밀려났다.
언덕받이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다께시는 조총을 겨누고있는 중군에 대고 고함을 쳤다.
《무엇을 하느냐. 쏘라!》
언덕배기 중군의 조총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게구마가 와들짝 놀랐다.
《지금 총을 쏘면 어떻게 하오. 우리 군사 죽지 않소.》
《바로 그렇게 해서 저놈들을 돌려세우자는거요.》
《음, 하긴 병법에 〈고육지계〉(제편을 죽여 적을 치는 계책)라는게 있기는 있지.》
게구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편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것을 본 군사들이 다시 돌아섰다. 이 총에 죽으나 저 총에 죽으나 매일반이여서 서진성에 대고 불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서진성 하늘과 벌판이 온통 불줄기로 뒤덮였다. 무턱대고 쏘아대는 왜군의 조총불길이였다. 그리고 놈들의 화포들에서 일어나는 불길이였다.
왜군은 다시 사다리를 타고 기여오르고 또다시 중차들로 성벽을 까부시기 시작했다. 연안성에서처럼 흙무지를 성벽옆에 쌓기 시작했다.
부들부들 떨면서 성가퀴에 올라서서 성안을 넘겨다보던 놈들이 《악》소리를 지르며 성안으로 곤두박혔다. 그뒤를 따라오르던 놈들이 《악》소리를 치더니 사다리채 재주넘이를 하며 뒤로 굴러떨어졌다.
성안에서 긴 자루가 달린 바가지들이 불쑥불쑥 올라오더니 놈들에게 펄펄 끓는 물과 고추가루사태가 들씌워졌다. 중차로 성곽 한모퉁이를 뚫고 환성을 지르던 놈들은 뚫린 구멍안에서 불쑥 내민 날카로운 창날에 가슴들이 맞창이 나고 뚫린 구멍들은 삽시간에 큰 돌로 꽉 메워졌다.
치렬한 싸움은 이렇게 계속되였다. 흙산을 쌓던 놈들이 무더기로 날아간 화살을 맞고 굴러떨어지고 성곽밑엔 왜병들의 시체가 너저분하게 깔렸다. 왜군은 성이 토성이라는것을 알고 중차를 들이밀려고 했다. 그런데 중차가 나타나기만 하면 표창우박이 그 중차를 끄는 놈들의 머리우에 쏟아져 중차를 버리고 도망을 쳤다.
악에 받친 놈들은 마침내 성벽밑에다가 새초와 장작개비를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그러나 별로 탈것이 없는 토성이여서 그것도 효과가 없었다.
치렬한 싸움속에 시간은 흘렀다.
해는 중천을 넘어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진성은 끄떡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지고 기진맥진해진것은 왜병들뿐이였다. 그러자 졸병놈들속에서 악다구니가 터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우리 군사들을 적의 손에 내맡기고도 맥을 못쓰는자들이 장수야?》
《지금 의병들은 밤을 기다리고있다. 우리가 밤을 무서워한다는것을 그들은 뻔히 알고있다.》
이른아침부터 서진성 동문, 남문에서 시작된 싸움은 신시(오후 3~5시)에 이르렀으나 결판이 나지 않았다.
성은 여전히 철옹성이고 요지부동이였다.
온 하루를 격전과 추위속에서 떨고 배고픔을 참을수 없게 된 왜군은 돌덩이처럼 언 주먹밥을 씹으려고 했지만 서진성은 그것도 마음놓고 먹을수 없게 련속 불벼락을 들씌웠다.
마침내 기진한 왜병들은 털썩털썩 눈우에 주저앉기 시작했다.
말탄 사무라이놈들이 이리뛰고 저리뛰며 일어서라고 고함을 쳤지만 《평양동장군》과 서진성 의병들에게 두들겨맞아 오갈이든자들을 일으켜세울수 없었다.
다께시는 철수명령을 내릴가 했지만 뒤에 또 어떤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서진성에 의병이 많지 않은것만 같아서 오늘을 놓치기가 아쉬웠다.
거기에다가 옆에서 게구마가 《저 성안에 큰 놈들이 있수다. 그 〈푸른갑옷〉이랑…》하고 쑤셔주어서 자존심이 꿈틀거리는데 해가 서산마루로 기울어지기 시작할무렵 갑자기 서진성 성루에서 둥둥… 하는 북소리가 두번 나더니 성가퀴들에 일제히 《멸왜보국》, 《위국위민》이라고 쓴 기발들이 솟아올라 세차게 나붓기기 시작했다.
그 기발과 함께 서진성 동문이 활짝 열리더니 설화마우에 푸른색 바지저고리에 푸른색 수건을 쓰고 붉은 허리띠를 가뜬히 조여맨 젊은 의병과 그와 같은 옷차림의 키가 자그마한 의병이 적토마를 타고 쏜살같이 달려나오고 그뒤로 천여명의 의병들이 질풍처럼 내달리며 기진맥진해 눈우에 주저앉아있는 왜병조총대에 표창벼락을 퍼부었다.
놈들은 미처 총에 불도 달아보지 못한채 무더기로 쓰러졌다. 삽시에 벌판은 시뻘건 피로 물들었다.
《〈푸른갑옷〉이다!》
《북대봉호랑이다!》
《표창이다!》
왜군진중에 아우성이 터졌다.
그 이름만 듣고도 떠는 서진성 《푸른갑옷》표창대의 벼락공격이였다.
설화마를 탄것은 황바위였고 적토마를 탄것은 호영이였다. 자그마한 키로 단검을 치며 황바위에게 바싹 붙은것은 쌍가마였다.
세필의 말우에서 던져지는 표창과 단검은 백발백중이였다. 그들은 적의 복판을 뚫고 달려나가며 좌우로 치고 다른 표창대원들은 량쪽에서 달려들어 표창질을 해대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는데 눈깜박할 사이에 왜군조총수들의 손목과 말들의 다리정갱이를 분질러놓았다.
조총수들은 손목을 그러잡고 뱅글뱅글 뛰다가 나자빠지고 말들은 껑충거리다가 푹푹 쓰러졌다.
그런데 이때 성벽우에서 매운재가루를 성벽으로 기여드는 놈들의 눈에 퍼부으며 《이놈들!》하고 고함을 치던 젊은 색시가 악을 물고 올려쏘는 왜놈의 총알을 맞고 새된 비명을 지르며 성벽안으로 굴러떨어졌다.
《이 사람!》
《이게 웬일인가. 우리가 지금 싸움에서 이기고있는데…》
《눈을 뜨라구.》
호영이 어머니랑 곽과부가 그를 붙잡고 몸부림쳤다. 원통한듯 감기지 않는 눈으로 구름낀 하늘을 바라보는 새색시는 젊기도했다.
《아, 원통하구나!》
부녀대원들이 그가 들었던 매운재단지를 안고 성벽덕대로 오르는데 이때 성루에서 둥―둥―둥 세번 북소리가 울리자 서문쪽과 북문쪽에서 신욱이의 사수대원들과 고서방의 조총대원들이 비호처럼 내달려 도망치는 놈들의 뒤잔등에 화살소나기와 총알우박을 들씌워 왜군을 남문과 서문사이 우묵진 곳으로 몰아갔다.
다시 터진 조총소리에 겁을 먹은 놈들이 더 기겁을 해서 뛰였다.
이때 웅뎅이쪽에서 《함정이다.》, 《마름쇠다.》하는 왜놈들의 아우성이 터지며 대렬이 멈칫했다.
구시라가 악을 썼다.
《조총을 몽땅 돌려대고 쏘라.》
구시라의 호령에 왜병들은 그제야 제정신이 든듯 했다. 앞에는 함정이고 뒤는 추격하는 표창, 화살, 총알속에 든 왜적들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바에야 싸우다 죽자고 결심한것인지 돌아서서 총에 불을 달기 시작했다.
성루우에서 둥둥둥둥… 하고 네번 연거퍼 울리는 북소리가 요란해지더니 성문이 더 활짝 열렸다.
원달이 이끈 창검대가 노도처럼 내달리며 왜군속으로 짓쳐들어갔다.
놈들이 겁에 질린 소리를 치며 불을 달던 총을 안고 급해맞아서 뛰기 시작했다.
어떤 놈들은 이악스레 칼을 빼들고 황바위에게 달려들었다가는 모가지들을 떨구고 푹푹 쓰러졌다.
뎅강뎅강 칼날 부딪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어지럽게 울려퍼졌다.
창검대장 원달이가 칼을 높이 추켜들다가 《억―》소리를 지르며 거목처럼 서있다가 눈벌우에 쿵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아까부터 그에게 눈독을 들이고있던 구시라가 쏜 총알에 맞은것이다.
《앗, 원달이가?》
창검대원들에 이어 황바위가 달려왔다.
《원달이 이 사람, 정신차리게.…》
황바위의 목메인 부르짖음에 원달은 가까스로 눈을 떴다.
《황바위… 내 사람대접을 받다가… 가네.… 아, 저 왜놈들을 다 쳐없애지 못하고 가는게 원통하구나!》
《이 사람 맥을 놓지 말게. 자네가 힘들여 키운 창검대원들이 얼마나 장하게 싸우는가를 좀 보란 말일세, 엉?》
《황바위… 서진성을 부탁하네.…》
원달은 마지막힘을 모아 피에 젖은 손으로 황바위의 손을 더듬어잡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황바위는 숨이 진 원달이를 부둥켜안으며 억이 막혀 오열을 터뜨렸다.
《아, 원달이, 이게 무슨 일인가.… 백정으로 갖은 천대를 받으며 살다가 겨우 사람대접을 받는다고 그리도 좋아하던 임자가… 눈을 뜨라구, 원달이!…》
황바위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전장에 메아리쳤다.…
4
황바위가 애써 눈물을 거두고 돌아서는데 남복을 한 쌍가마가 급히 달려왔다.
《바위오빠, 지금 서문으로 왜놈들이 쳐들어오고있소이다.》
《뭐라구?!》
황바위는 깜짝 놀라 다시 다그쳐물었다.
《서문쪽에선 뭘하고있었어? 거기엔 성표선봉장이 나가있는데 어떻게 그럴수가 있단 말이야?》
쌍가마가 분개해하며 대답했다.
《적의 대군이 갑자기 밀려들자 성표선봉장이 먼저 몸을 피했소이다. 그통에 서문을 지키던 의병들도 당황해서 흩어지고…》
《선봉장, 선봉장이 어쩌면 적들에게 길을 열어준단 말이냐?》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두드리는 황바위의 두눈에서 시퍼런 불이 황황 일었다.
《원쑤들에게 절대로 살길을 열어줄수 없어!》
황바위는 휙 몸을 날려 설화마에 뛰여올랐다.
《쩌!―》
쌍가마는 성이 나서 채찍을 안기며 말을 달리는 황바위를 따라가며 소리쳤다.
《위험해요. 혼자 가지 말아요!》
그러나 황바위가 탄 설화마는 벌써 까맣게 멀어졌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쌍가마도 말우에 올라 채찍을 안겼다.
그가 서문어구에 이르렀을 때는 벌써 황바위가 사방에서 달려드는 왜놈무리를 향해 칼을 휘둘러대고있었다.
황바위의 칼이 허공에서 번뜩일 때마다 왜놈들의 모가지가 뎅강뎅강 떨어져나갔다. 그러나 왜놈들은 황바위를 계속 에워싸며 악착스럽게 덤벼들었다.
쌍가마는 말을 달리며 황바위의 뒤에서 달려드는 놈들을 향해 표창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가 뿌려던지는 표창 하나하나가 어김없이 왜놈들의 멱중에 들어가박혔다.
비호처럼 적진을 종횡무진하며 왜놈들의 목을 삼대베듯 하는 황바위의 기상앞에 드디여 적들은 뒤로 욱 밀리며 갈팡질팡 달아나기 시작했다. 뒤미처 달려온 의병들도 도망치는 놈들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싸움의 형세는 급전되였다. 그제서야 잠시 숨을 돌리며 황바위를 찾아 눈길을 돌리던 쌍가마의 입에서 갑자기 외마디 비명소리가 울려나왔다.
《바위오빠!》
방금전까지 성난 호랑이처럼 내달리던 황바위가 급기야 밑둥잘린 거목이 넘어지듯 말우에서 굴러떨어지는것이였다.
《쩌!―》
쌍가마는 연거퍼 말에 박차를 가하며 경황없이 내달렸다.
황바위는 말발굽에 짓이겨져 눈과 흙이 범벅이 된 땅우에 죽은듯이 쓰러져있었다.
《바위오빠!》
평소의 부끄러움도 잊고 황바위를 안아일으키던 쌍가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황바위의 《푸른갑옷》에는 피가 질벅하게 배여있었다.
그를 부여잡은 쌍가마의 두손에도 순식간에 피가 랑자하게 묻어났다.
《바위오빠! … 어쩌면 이런 몸으로…》
쌍가마는 숨이 꺽 막혔다.
여기로 달려온 막동이가 황바위를 부둥켜안았다.
《바위형, 이게 어떻게 된 일이요?》
그 소리에 황바위가 천천히 눈을 떴다.
잠시 숨을 톺던 그가 자기를 부축하고있는 막동이를 떠밀치며 소리쳤다.
《빨리 성루에 올라서서 북을 치라. 서문에 기여든 왜놈들을 멸살시키라고 북을 울리라.》
《바위형, 이 몸을 가지고…》
《내 걱정은 말고 어서 가라는데.》
입술을 꼭 깨문채 그를 지켜보던 쌍가마가 먼저 휙 몸을 돌려 말에 올라탔다.
쌍가마는 두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씻을념도 하지 않고 성루쪽으로 곧장 말을 내몰았다.
이윽고 성루에서 북소리가 울렸다.
《둥둥둥둥… 둥둥둥둥…》
쌍가마가 울리는 북소리가 서진성우에 퍼져나가자 신호를 기다리고있던 의병들에게 진군명령이 내렸다.
서진성은 삽시에 적아간의 치렬한 싸움판으로 화했다.
칼과 칼이 번개불을 일으키며 부딪치고 아츠러운 조총소리가 터지고 사방에 주검이 나딩굴고 선지피가 뿌려졌다.
나라와 백성을 지키려는 정의로운 사람들과 남의 땅을 빼앗고 남의 나라 백성을 노예로 만들려는 강도의 무리, 야수들과의 판가리혈전이였다.
서문으로 달려들었던 왜군이 성난 사자처럼 반격해나오는 의병들의 기세에 눌리워 점점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조총을 쏘며 달려드는 왜놈들에게 질겁해서 제먼저 꼬리를 사렸던 성표는 싸움의 형세가 의병들편에 유리해지자 서진성주위에 매복진을 치고있는 의병들을 모두 서문쪽으로 출전시켰다.
적들에게 서문을 내주고 피신했던 자기의 죄를 무마시키려는 타산이였다.
성표의 이러한 오그랑수가 서진성을 더 큰 위험에 빠뜨리는 결과를 가져올줄은 누구도 생각 못하고있었다.
서문으로 출전하라는 성표선봉장의 령이 떨어지자 서진성을 둘러싸고 은밀히 매복해있던 의병들이 홰불까지 켜들고 자기들이 차지했던 매복진지를 로출시키며 서문으로 와와 함성을 올리며 달려나갔다.
기겁한 왜병들은 다께시의 퇴각명령도 떨어지기 전에 들고뛰기 시작했다.
졸병들의 앞장에서 먼저 살겠다고 줄행랑을 놓던 다께시는 갑자기 피뜩 뇌리를 치는 생각에 걸음을 멈추고 휙 돌아섰다.
(서진성주변에 매복하고있던 의병대까지 모두 서문으로 쏠렸으니 성안엔 의병들이 없을것이다. 이거야말로 화가 복이 되는셈이 아닌가. 절호의 기회다!)
다께시는 미칠듯한 쾌감에 사로잡혀 칼을 빼들었다. 그다음 헐떡거리며 달려오는 졸병들을 무자비하게 쓸어눕혔다.
앞장에서 도망쳐오던 졸병들이 순식간에 모가지 없는 귀신이 되여 땅에 나딩굴자 뒤따르던 놈들은 눈깔이 뒤집혀 그자리에 굳어졌다.
다께시는 입에 게거품을 물고 소리쳤다.
《다시 도망치는자는 가차없이 목을 벨테다! 듣거라. 지금 성안에는 의병들이 없다. 성을 우회하여 동쪽으로 진군하라. 장수들은 대오를 수습하고 나를 따르라!》
이때 게구마가 눈이 뒤집혀진채 달려와 보고했다.
《저쪽에선 아직도 한무리가 도망치고있소이다.》
《계속 도망치게 놔두라.》
《예?!》
《의병들이 그들을 계속 추격하게 하란 말이다. 일을 성사시키자면 제물을 바쳐야 한다.》
다께시의 입가엔 살기찬 웃음이 지나갔다.…
한편 부상당한 상처를 싸매고 다시 말우에 올라 전장을 누벼나가던 황바위는 갑자기 불안한 예감에 말을 멈추었다.
(어떻게 되여 성주위에 매복해있던 의병들까지 여기로 달려왔는가. 그 의병들이야 제일 요긴한 때 써먹자고 림중량의병장님이 품을 들여 조련시킨 의병들이 아닌가.…)
황바위가 이런 생각을 하고있을 때 의병 한사람이 급히 말을 몰아 그에게 달려왔다.
《큰일났소이다. 지금 왜놈의 대군이 서진성 동쪽으로 덤벼들고있다는 급한 련락이 왔소이다.》
《그게 사실이요?》
황바위는 가슴이 철렁해서 펀뜩 고개를 돌렸다.
《빨리 도망치는 왜놈들을 추격하는 대오를 멈춰세우라!》
황바위가 의병들을 이끌고 서진성으로 돌아서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게구마가 지휘하는 왜놈들은 의병들이 서문으로 돌아서 들어오지 못하게 포위진을 쳤고 다께시의 대군은 동쪽 성곽을 악착스럽게 넘어서고있었다.
성안에는 얼마 안되는 의병들과 부녀자들만이 남아있을뿐이다.
쌍가마는 성벽으로 기여오르는 왜놈들을 향해 팔이 빠지도록 표창을 날렸다.
녀인들도 사생결단하고 손에 잡히는대로 왜놈들에게 달려들었다.
성곽우에서 칼을 휘두르던 몇명 안되던 의병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악을 쓰며 성곽에 올라선 왜놈들은 피에 주린 야수가 되여 닥치는대로 칼을 휘둘러댔다.
놈들은 녀인이건 늙은이건 가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족족 베여넘겼다.
다급한 정황속에서 곽과부가 쌍가마를 성밖으로 떠밀었다.
《쌍가마, 너 하나라도 살아야 한다. 어서 내리뛰라, 어서!》
《안돼요.》
《어서!》
곽과부가 쌍가마를 콱 밀어버렸다.
그 순간 조총소리가 터졌다. 곽과부는 가슴을 움켜쥐며 그자리에 쓰러졌다. 하얀 그의 저고리가 순식간에 선지피로 물들었다.
서진성은 끝내 왜놈의 더러운 발밑에 들었다.
성루에 올라선 다께시는 승전의 쾌감보다도 온몸이 전률하는 공포감을 느끼였다.
희붐히 밝아오는 새벽빛속에 사처에 보이는것은 로인들과 녀인들의 시체뿐이였다. 부릅뜬 눈동자들과 이그러진 입들마다 다께시 자기를 끝없이 저주하며 천백배 복수를 부르짖은것만 같았다.
황바위와 의병들은 무모한 싸움을 피하여 일시 성을 적들에게 내준채 산속으로 자리를 옮겼다.
때아닌 겨울에 구질구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도 간악한 왜놈들에게 무참히 도륙을 당한 이 나라 녀인들의 사무친 원한을 슬퍼하는것만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