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회)

제 5 장

작은 샘이 대하를 이룬다

2

 

《우리 유복(서일)이가 할아버님 종신(림종할 때 지키는 일)이나 해드렸는지?》

《예.》

로부인의 물음에 한대걸이 무겁게 대답했다.

《그럼 됐네. 어서 집으로 들어가자구.》

서설봉 부인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앞섰다. 집안에 들어선 로부인은 옷매무시를 바로하고나서 한대걸에게 정중히 물었다.

《그래, 나으리께서 림종시에 남기신 유언은 무엇인가?》

《예, 전 그자리에 있지는 못했사오나 제가 여기로 올 때 림중량의병장님께서 세세히 말씀해주셨소이다. 〈…싸워보니 왜놈들이란 남의 땅에 기여든 도적이기때문에 기가 죽은 놈들이다. 내가 죽은 후에 진중에 곡성을 내지 말며 내 손자에게 몽상을 입히지 말며 싸움이 끝날 때까지 나를 서진성벽밑에 가장(가무덤)해달라. 그리고 〈푸른갑옷〉전술을 잘 쓰라!…〉 그러시고는 손자님의 손을 꼭 잡으시더니 〈부디 의병장님을 잘 도와 우리 평양성의 관문인 이 서진성을 잘 지켜라!〉하고 눈을 감으셨답니다.…

선생님의 시신을 안장할 때 보니 군포속에 이런 시 한수가 있었답니다.…》

서설봉 부인은 경건한 자세로 한대걸이 내놓는 그 시를 받아들고 이윽토록 보다가 눈앞이 흐려져 앞이 보이지 않는듯 그것을 손자며느리에게 주었다.

《네 큰소리로 읽어라!》

시를 받아든 손자며느리가 오열에 젖은 잦아드는 목소리로 한자두자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더 크게… 더 크게…》

흰 귀밑머리를 크게도 움씰거리는 로부인의 목소리는 엄엄했다.

 

한평생 장검의 푸른 날 세웠건만

슬프다 어언 늙어 왜적을 못치는가

서리서리 맺힌 원한 검속에 벼려안고

내 하늘 날아돌며 내 겨레 지키리라

 

마지막 출전을 각오하고 써서 간직했던 시였다. 그 시구가 황바위의 가슴속에 새겨졌다.

손자며느리는 눈물로 얼룩진 시폭을 안고 마침내 어푸러지며 곡성을 터쳤다. 동래성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무인의 딸이 참고참던 울음을 터친것이다. 곡성은 북대봉산발들에 아프게 부딪치고 돌아왔다.

말없이 지그시 눈을 감고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로부인은 심중히 한대걸에게 다시 물었다.

《우리 유복이가 할아버님시신앞에서 무어라 다진 말이 없었다던가?》

《예, 장검을 짚고 할아버님시신앞에서 〈할아버님, 안심하십시오. 제 할아버님의 위국충정에 오점을 남기는 손자가 되지 않으리오이다!〉라고 했답니다.》

한대걸은 이렇게 말하고나서 무엇인가를 더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음―》

로부인은 말없이 푸르청청한 산봉우리들에 눈을 주었다.

이 나라 애국무인으로 살아온 남편의 훌륭한 생을 눈앞에 더듬어보는듯 이윽토록 북대봉봉우리들을 지켜보던 로부인은 황바위를 돌아보며 물었다.

《쌍가마, 신욱이 그리고 나으리를 따라간 젊은이들은 림중량의병장을 받들어 다 잘들 싸우고있겠지?…》

《…》

황바위가 선뜻 대답을 못하자 로부인이 그에게로 다가서며 다그쳐물었다.

《또 누가, 엉?》

《저… 쌍가마가 오래비를 왜놈에게 빼앗겼소이다.》

《뭐?!… 뭐라구?》

《쌍가마!》비단폭을 찢는듯한 서일의 안해 일옥이의 비명이였다.

로부인은 털썩 토방에 주저앉으며 《아, 하늘에 뜻이 있는가?》하고 주먹으로 가슴을 탕 치더니 어깨를 들먹이였다.

《쌍가마, 그게 제 어미 원쑤를 오래비 혼자서 어떻게 갚겠느냐구… 이를 사려물고 밤낮으로 단검치기를 했지. 그런데 오래비를 잃다니…》

로부인의 말은 오열로 끊어졌다.

남편의 순국소식앞에서는 강의한 기상으로 슬픔을 누르더니 왜놈에게 빼앗긴 젊은이의 절통한 소식앞에서는 울음을 참지 못하는 그였다.

《너무 상심마십시오. 우리 쌍가마는 울음대신에 제 오래비 쇠몽둥이로 단검을 벼려찼소이다!》

한대걸의 품에서 억남이가 잠에서 깨여나 《응아―》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 성깔에 칼을 만들어 찼겠지. 암 그래, 차야지.…》

북대봉골짜기들은 폭포소리를 높이고 산봉우리들은 뻐꾹새울음소리로 끓었다.

이윽하여 로부인은 손자며느리를 돌아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일렀다.

《새아가, 할아버님 몽상을 입자!》

이윽고 서일이의 안해가 집옆에 있는 바위짬 옹달샘의 정갈한 석간수를 떠다가 소반에 받쳐 토방우에 편 거적우에 놓고 그앞에 향불을 피웠다.

서설봉 부인은 손자며느리가 입혀주는 남편의 몽상을 입고 나섰다. 란시에도 무인집 가풍대로 마련해가지고 다니던 북포(함경도에서 나온 고운 삼베)로 상복을 차려입고 짚신을 신었다. 손자며느리도 시조부님 몽상을 아버지 몽상과 함께 마음속에 겹쳐입었다.

황바위는 소반우에 놓인 석간수를 보느라니 지난날 아버지가 광풍에 날린 씨앗이 되여 이 골짜기에 떨어져 바로 이 오돌막에서 어머니와 저 석간수를 한그릇 떠놓고 인생의 백년가약을 맺을 때 이 골짜기 봄뻐꾸기들까지 울려놓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까지 겹치며 마음이 쓰려났다.

두 녀인은 무인의 안해와 딸답게 용케도 아픈 마음들을 누르며 향불을 덧놓았다.

로부인은 곧 손자며느리를 신칙해서 손님들에게 대접할 점심상장만을 하게 하였다. 그사이 한대걸은 도끼로 쾅쾅 장작을 패서 마당에 한가리 쌓아놓고 황바위는 남정손이 미치지 못한 울바자도 고쳐놓고 집옆의 숭숭 뚫린 바위돌을 까서 돌멩이 한구럭을 만들었다. 그리고나서 그들은 집옆의 옹달샘물터로 갔다.

샘줄기는 세차게 솟구치고있었다. 태고연한 북대봉바위밑을 뚫고 솟아오르는 물줄기는 세차기도 했다. 또 맑기도 했다. 옹달샘물은 흘러서 벼랑을 뛰여내리고 계곡의 폭포가 되여 무엇인가 웨치듯 쾅쾅 쏟아져내렸다.

황바위는 문득 이 땅의 부로(늙은이)들과 뜻있는 사람들이 깨우쳐주던 참뜻이 가슴을 쳤다.

이 작은 샘에서 시작된 물은 여기저기 샘들과 합쳐 시내를 이루고 그것들이 또 합쳐져 거대한 바다를 이루리라! 그렇다. 황바위자신이 열아홉해나 마시고 자란 티없이 깨끗한 샘줄기, 그래서 아버지도 나에게 이 샘물빛이 어린 《푸른갑옷》을 지어 입혀주지 않았던가.

그제야 황바위는 의병장이 무엇때문에 서설봉 부인을 만나러가는 한대걸에게 자기를 따라보냈는지 그 깊은 뜻이 헤아려졌다.

바로 여기서, 자기의 생이 태동했던 이 북대봉에서 민족의 넋이 어린 맑은 샘물로 애국의 정기를 채우고 서설봉선생이 지녔던 불같은 애국의 열정에서 불씨를 받아오라고 떠밀어보낸것이 아니겠는가.

황바위는 두손바닥으로 샘물을 떠담았다.

쪽박처럼 움푹 패인 손바닥안에 맑은 물이 찰랑이였다.

문뜩 중화의병대 기치의식때 림중량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읽던 글의 한구절이 떠올랐다.

《…제 겨레의 넋이 살아있는 나라는 망하는 법이 없다!…》

그 뜻을 가슴깊이 새겨볼수록 황바위는 무엇인가 깨끗하고 뜨겁고 절절한것이 샘물처럼 자기의 마음속에서 용솟음치고있음을 느꼈다.

겨레의 넋이란 무엇인가. 조상의 뼈가 묻혀있는 이 땅, 수수천년 이 나라 백성들이 땀을 바치며 열매를 거두어들이고 재부를 창조해놓은 이 강토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 그것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사랑과 헌신의 정이 아니겠는가. 그것을 안고있기에 이 나라 백성들은 이 땅에 더러운 발을 들여놓은 저 섬나라오랑캐들과의 싸움에 나선것이다. 헌데 난 백성들의 가슴에 차고 넘치는 그 애국의 넋을 보지 못했고 백성들의 뭉친 힘이 곧 겨레의 넋을 이룬다는것을 알지 못했어.…

황바위는 이런 생각에 잠겨 손바닥의 물이 다 새여나간것도 느끼지 못했다.

이때 곁에서 샘물주변을 정리하던 한대걸이가 문득 생각난듯 일어섰다.

《내 정신보지. 로부인과 상론할 일이 있는데…》

《예?…》

황바위는 그제야 상념에서 깨여나며 따라 일어섰다.

한대걸은 앞서 걸으며 황바위에게 두런두런 이야기했다.

《내가 여기로 떠나올 때 의병장님은 이렇게 말했네. 〈서설봉선생은 생존시에 불피코 왜란이 닥쳐올것이라고 하면서 왜놈들과의 싸움을 위해 우리 유복이를 데리고 남해쪽으로 나가겠다고 하시였소. 그것은 아들, 며느리원쑤를 갚아주고 서일이를 리순신장군휘하에서 큰 장재감으로 키우려는 뜻이였던거요. 선생은 80고령으로 우리 의병대에서 싸우시다가 장렬한 순국을 하시면서 손자에게 나를 잘 도와 평양성관문을 지키라고 유언하셨소.

그러나 국란이 한두해에 끝날것 같지도 않으니 일단 서일이를 남해로 내보내여 큰 장재로 키워놓았다가 왜놈들을 전부 바다에 수장해버리는데 한몫을 하게 하자는거요. 이것이 서설봉선생의 유언을 더 크게 받드는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오!〉…》

황바위는 고개를 수굿하고 걸으며 그 이야기를 들었다. 들을수록 림중량의 깊은 뜻이 가슴에 마쳐오며 지금의 싸움이 얼마나 거족적인 싸움으로 되는가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로부인이 어떻게 생각하시겠는지…》

한대걸은 입속말로 중얼거리며 오돌막을 향해 걸어갔다.

서일의 안해는 례절있는 집안의 가풍대로 부엌에서 칼도마 소리조차 새여나오지 않게 하면서도 어느새 기장밥에 애호박국, 버섯볶음, 산나물지지개 등으로 성의껏 점심상을 차려내왔다.

로부인은 억남이를 업고 토방아래를 서성거리며 많이 들라고 권하고 서일의 색시는 부엌문밖에 손을 모아잡고 서있었다.

한대걸은 밥상을 받기 전에 서일이의 남해출전소식을 꺼내려 했으나 어머니마저 왜놈에게 빼앗긴 손자를 피덩어리때부터 온갖 지성을 다하여 키워온 로부인의 심정이 새삼스럽게 헤아려져 선뜻 말을 뗄수 없었다.

어느덧 해가 초불봉우에 올라앉았다.

한대걸이와 황바위는 마당에 나서서 떠날 차비를 서둘렀다.

《벌써 떠나겠단 말인가? 억남이와 하루라도 더 있지 않고…》

서설봉 부인이 놀라며 그들앞에 나섰다.

《우리야 의병이 아니오이까. 큰 싸움이 앞에 있어 그러니 량해해주십시오.》

한대걸이 결심한듯 옷매무시를 바로했다.

《그럼, 내 자네들의 길을 더 막지 않겠네.》

《가만, 제가 잊은것이 있었소이다.》

황바위는 자기가 메고온 전대속에서 소금 한말을 내놓으며 로부인에게 어줍게 말했다.

《저, 우리 아버지가 보내는것이오이다. 여기 북대봉에서 제일 귀한게 소금일거라고 하시면서…》

《원, 그 험한 싸움판에서 이런걸 다 생각하다니…》

하얀 소금발을 손으로 쓸어보며 감회에 젖어있던 로부인은 문득 일어섰다.

《내 정신 봤나…》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던 로부인이 좀전에 먹을 갈아 쓴 편지 한장을 들고나왔다.

《이 편지를 의병장에게 전해주게.》

한대걸은 그 편지를 받아 품속에 건사하였다.

서일의 안해가 길떠나는 사람들을 위해 얼마간의 량식과 기장떡을 전대속에 챙겨넣어주었다. 그리고나서 부끄러운듯 얼굴을 붉히며 편지 한장을 내놓았다. 서일이에게 보내는것이였다.

한대걸은 웃으며 그 편지를 황바위에게 주었다.

《이 편지는 자네가 서일이한테 전하게.》

서일의 안해는 편지를 받아 품속에 건사하는 황바위에게 감사의 정을 담아 나직이 말하였다.

《수고를 끼쳐서 미안하오이다.》

황바위는 씩 웃었다.

《수고야 뭘…》

《쌍가마보고 부디 몸성히 잘 싸우라고 전해주소이다.》

그 말에 황바위는 짜릿한 아픔이 가슴을 훑으며 지나가는듯한 애수를 느꼈다.

한대걸은 서설봉 부인의 잔등에서 쌔근쌔근 잠들어버린 억남이의 포동포동 살진 볼을 다독여주고나서 결연히 걸음을 뗐다.

서설봉 부인과 손주며느리는 사립문밖 오리나무밑에 오래도록 서서 두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래주었다.

한대걸이와 같이 걷는 황바위는 여기 북대봉으로 오던 때와는 달리 자기의 발걸음이 무게있고 억세여진것만 같았다.

집옆의 옹달샘에서 퐁퐁 솟아오른 한줄기 시내물은 이산저산에서 흘러내리는 시내물과 합쳐지고 바위돌에 부딪쳐 폭포처럼 소리를 내며 산골짝으로 굽이치고있었다. 이렇게 작은 샘이 흐르고 합쳐지여 그 무엇으로도 막을수 없는 거대한 대하를 이룰것이라는 생각이 그의 가슴속에 끝없이 갈마들었다.…

 

3

 

북대봉을 떠난 두사람이 밤길까지 내처 걸어 성천고을 비류강나루터에 다달은것은 다음날 점심녘이 좀 못돼서였다.

한대걸은 나루배를 기다릴겸 다리쉼이나 하자고 하면서 짚신감발을 벗고 물속에 들어서서 푸푸 소리를 내며 세면을 하기 시작했다.

황바위에게 있어서 이번 북대봉길은 한대걸이라는 인간에 대해서 더 깊이 알게 된 기회이기도 하였다.

한대걸은 속이 트이고 의기가 남달랐다. 관가와 토호들의 등가죽벗기기와 온갖 멸시속에서도 그는 자기 일보다 남들이 겪는 억울한 일을 더 통분해하고 그를 막아나서준탓에 매도 많이 맞은 사람이였다.

인간의 의리와 의기란 발길에 채워 굴러다니는 막돌멩이같은것이 결코 아니였다. 제 나라의 하늘과 땅, 나서자란 고향산천에 질벅하게 슴배여있는것에 대한 사랑이였고 그것을 지키려는 의지였다. 그것은 착하고 성실한 백성들의 피땀을 짜내고 온갖 멸시를 다하는자들에 대한 증오를 떠나서는 생각할수 없는것이였다. 언젠가 애숭이밤나무를 제 손으로 찍어버린것도 열네댓말밖에 열리지 않는 그 한그루 밤나무에다가 두섬 세금을 붙여놓은 관가에 대한 항의에서였다. 그 밤나무를 놔두면 더 큰 재난을 당할수 있었기때문이였다.

그는 란리가 나기 전 성천고을에 와서 귀양살이를 하는 조호익도사를 자주 찾아가서 위로해주군 했었다. 아들때문에 실성한 삼촌어머니와 식구들을 데리고 맹산땅 깊은 산골로 가서 살다가 일곱해만에 고향인 중화땅 꽃골로 돌아온 후 왜란이 일어나자마자 의병을 일으킨 조호익을 선참 찾아갔다. 중화의병대에 편입되여 석가산과 상원길목들에서 왜적과 싸우게 된데는 한대걸의 사람됨을 잘 알고있는 조호익의 보증이 있었기때문이였다.

황바위네가 비류강가에 다달았을 때 금방 떠나려는 나루배우에는 몇명의 길손들과 농사군들이 타고있었다. 강복판에 들어선 나루배에서는 강기슭의 비류벽이 정면으로 바라보였다.

한껏 푸른 비류강은 출렁이고 철썩이며 흐르고있었다.

비류벽을 바라보며 지나간 일들을 더듬어삼켜보는 황바위의 가슴은 쓰렸다.

오늘 비류벽에는 그날의 진달래가 아니라 벌써 가을을 잘 타는 단풍이 물들고 모래불에는 들국화무지들이 점점이 널려져있었다.

황바위의 눈앞에는 그날 심부름을 하다가 관가의 시동아이가 물에 빠져죽었는데도 눈섭 하나 까딱않는 신임 성천부사의 화전놀이배를 비류강복판에 뒤집어엎으려던 양덕고을 대토호인 조참봉의 종 칠성이의 우람차던 모습이 떠올랐다. 부드득 이를 갈며 이 세상 모든 추악한것들을 다 뒤집어엎을듯 분노한 거인의 힘으로 육중한 놀이배를 기우뚱 옆으로 밀어제끼던 칠성이… 그 배우에서 기겁한 소리를 지르며 나딩굴던 성천부사와 조참봉의 무리들… 비류강에 장사났다고 환성을 지르던 모래불사람들의 놀라움과 경탄에 찼던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귀전에 쟁쟁했다. 백탄(화력이 센 참숯)화로앞에 칠성이를 묶어놓고 시뻘겋게 단 부저가락을 내대며 짐승처럼 짖어대던 성천부사 김요림이의 상판이 얼른거렸다.

(아, 그 원쑤놈을 내 어찌 잊을수 있단 말인가?!)

황바위의 이런 심정에는 아랑곳없이 무심한 비류강은 철썩거리며 흐르기만 했다.

나루배에서 내린 황바위와 한대걸은 농군들과 함께 잔디언덕에 올라섰다.

황바위와 한대걸이 인간희비극을 싣고 출렁이는 비류강을 다시한번 돌아보고 발길을 다그치는데 《저, 말 좀 물읍세다.》하며 허우대가 크고 귀얄수염이 보기 좋은 늙은이가 그들의 발걸음을 멈춰세웠다.

큼직한 지게에 짐을 얹어놓은걸 보니 어디엔가로 정처없이 떠나가는 나그네가 분명했다. 그옆에는 보따리를 인 그의 안해인듯 한 녀인이 서있었다. 둘다 귀밑머리가 반백이 넘었는데 깨끗이 빨아입은 옷들과 몸가짐으로 보아 순박한 농사군들이였다.

《거 중화의병대루 가자면 어느쪽으로 가야 하우?》

《중화의병대요?》 황바위가 되물었다.

《예.》

《우리랑 함께 갑세다.》하며 한대걸이 응했다.

《아니, 그럼 중화의병님들이시우? 내 어쩐지 다르다 했지.》

《로인님네는 무슨 일로?》

《예, 나는 양덕땅에 사는 천덕이라는 사람이외다. 아들놈이 중화의병대에 나가있어서…》

《그렇습니까. 장한 아들을 두셨소이다.》

《저… 의병님들, 혹시 우리 애를 아시는지요?…》

《원 로친두, 그 많은 의병들속에서 어떻게 알겠다구… 우리 북대봉에서 〈푸른갑옷〉입고나간 북대봉호랑이만큼 용맹을 떨쳤다면 또 몰라라…》

《아니, 그 〈푸른갑옷〉을 알고계십니까?》

한대걸은 그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아직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왜놈을 벌벌 떨게 하는 그 〈푸른갑옷〉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걸요. 우리 북대봉정기를 타고난 큰 장수지요.… 그래서 우리는 내 아들두 만나보구 그 장수도 만나보려구… 또 그 장수에게 꼭 물어볼 일두 있구 해서…》

《예?》

《우리 만복이녀석두 그렇게 이름난 의병구실을 해야겠는데…》

안해의 말을 천덕로인이 받았다.

《허, 그런 장수야 천에 하나, 만에 하난데 어디라구…》

한대걸은 여느때라면 그 《푸른갑옷》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해주었으련만 요즘 황바위의 마음속 고충을 잘 아는지라 그저 시무룩이 웃어넘겼다.

황바위는 낯모를 로인내외가 자기를 이렇게까지 내세워주니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 황바위가 차돌멩이질이나 잘해서 사람들이 이토록 입을 모아 칭찬하는것이 아니였다. 그것은 이 땅에 기여든 왜적을 쳐물리치는 의병들에 대한 백성들의 크고 절절한 기대였다.

《년세가 많으신것 같은데… 의병대에 나간건 막내인가요?》

황바위가 이런 생각에 옴해있는데 한대걸이 물었다.

《그렇쇠다. 큰놈들은 모진 세상에서 굶겨죽이고 병으로 죽이고…》

《허, 그런 막내동이라… 참 장하시외다.》

《그런 말씀마시우. 나라가 망하게 된 판에… 나무는 죽어도 서서 죽는다지만 이 나라 백성이 뭐 만만한 백성이라구 그까짓 왜놈들한테 서서 먹히우갔소?!》

천덕로인의 말에 황바위는 눈두덩이 뜨끈해졌다.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우리 백성들의 애국심이지.…)

들국화등판에서는 가을풀벌레들이 목청을 돋구었다.

《자, 다시 걸어볼가요?》

한대걸의 물음에 천덕로인이 받았다.

《나야 일없지만 아무래도 우리 로친이 의병님들 걸음을 따라갈것 같지 못하외다. 우리 의병님들 바쁘신 걸음을 지체시킬수야 없지요. 그러니 의병님들은 먼저 가시우. 우리도 곧 뒤따라가겠쇠다.》

《그럼 우리 먼저 가서 아드님에게 아버지, 어머니가 오신다구 말해주지요. 천만복이라구 하셨지요? 이름이 참 좋구만요. 그렇지요. 만복을 받으며 살아야지요.》

한대걸과 황바위는 옹이가 져서 나무막대같은 천덕로인의 손을 잡아주고 다시 가던 길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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