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0 회)
제 16 장
푸른 갑옷 3 (1) 어랑산성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대군을 끌고온 다히라는 큰소리로 웨쳐댔다. 《변상갑이에게서 아직 소식이 없는가? 우리가 여기로 온것은 서울길의 안전과 소금때문이다. 소금을 못먹은 평양성안 반송장들이 어떻게 싸운단
말인가. 조선군은 평양성을 둘러싸고 조여들고있다. 변상갑이의 소금이 안되는 날에는 우리 3천군이 몽땅 떨쳐나서서 조선백성들의 소금을 빼앗아내야
우리 군사가 산다. 알겠는가?》 놈은 조선에 오는 외국국사 겸 렴탐군노릇을 한바 있어서 코대가 높고 제노라하는 놈이였다. 그놈은 게구마를 흘겨보고나서 《나오며 보니 중화의병대란것들이 고작해서 돌멩이질군인데 괜히 헛소문에 벌벌 떨고있단 말이다.》 하면서 소금을
못구할 때는 배를 갈라 자결할 생각들을 하라고 부하들에게 을러멨다. 사실 그것은 게구마란 놈이 들으라는 소리였다. 《핫!》 모든 놈들이 대답을 하였으나 게구마만은 먼산 바라보기를 하고있었다. 놈은 결코 속이 편안한것은 아니였으나 서울에 있는 유끼다를 믿고 다히라따위는 우습게 보는터였다. 그러나 그보다도 여기가 결코 안식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 때문이였다. 오늘 첫새벽 졸개 한놈이 긴장이 풀려서 굳잠든 다히라의 방문을 급히 두드렸다. 《뭐야?》 《이자 방금 이 붉은 쪽지를 끼운 화살촉이 저 홰나무에…》 《음, 됐다. 이젠 살았다.》 다히라는 붉은 쪽지를 폈다. 틀림없는 변상갑의 글씨요 중화군수의 도장이고 특히 종이는 외국에서도 희귀한 서양의 분홍색 화전지였다. 《하하하, 그 뒤웅박대가리가 머리를 쓰거든.》 급히 수급졸개들을 모은 다히라는 꽃골로 오백명, 수월산 룡마골로 오백명을 떠나보내고 소금과 천을 가져오면 평양으로 싣고갈 인원과 호위성원
오백명을 주로 조총대, 창검대에서 뽑았다. 그러면서 다히라는 게구마에게 한마디 했다. 《이번에 장군의 수하 벤상꼬가 큰 공을 세웠소. 장군은 꽃골로 가서 우리 군사들이 소금짐, 천퉁구리를 져나르는것이나 좀 보아주시구려.》 그러자 게구마는 《이거야 다 장군의 공로인데 장군이 가보시지요. 지금 나는 골이 쑤셔서…》 하고 잔뜩 우거지상을 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흥, 그곳이 내가 죽을번한 곳이라는걸 알고 네놈이…) 하고 앙심을 도사리는데 《그럼, 이번 공로에서 장군의 명함이 빠지게
되는데요.》 하고 야유를 하면서 다히라는 더는 말을 안했다. 이른새벽 엷은 안개에 덮인 꽃골골짜기로 조선옷을 입은 근 오백명의 무리들이 은밀히 기여들고있었다. 끌고온 말들도 여라문필이 넘는데 모두 자갈을 물린듯 말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두 흰 수건을 쓰고 흰 중의적삼을 입었는데 신만은 와라지였다. 이 새벽 감쪽같이 꽃골에 쌓여있는 소금과 무명필을 재빨리 실어갈 가뜬한 옷차림을 한 왜병들이였다. 대다수의 놈들이 검을 차고 조총을 멘
놈도 30여명이나 되였다. 책임자인듯한 키다리 한놈은 투구갑옷차림을 하고 큼직한 검을 차고 말을 탔다. 놈들이 마을어구에 들어서자 모두 멈춰서고 갓쓰고 두루마기 입은 놈이 먼저 마을로 들어갔다. 놈들은 지껄여댔다. 《돌팔매질 잘한다는 아이놈이 이 마을에 살았다면서?》 《그 기꾸지가 돌멩이 맞고 배를 가른데가 어디야?》 《게구마상대신에 오늘 우리가 돌멩이를 맞는게 아니야? 게구마상은 떨려서 못왔는가?》 마을로 들어갔던 놈이 다시 되돌아나와 손짓을 하자 이백명가량의 놈들이 말을 몰고온 놈들과 함께 마을로 들어가고 조총수놈들은 마을어구
논밭뚝에 엎드려 총끝을 마을쪽으로 겨누었다. 나머지놈들은 사방을 경계하며 여기저기에 매복하였다. 어느새 아침해가 삐죽이 꽃골뒤산에서 얼굴을 내미는데 마을뒤쪽 산비탈 안개속 여기저기에 쌓아놓은 《소금더미》, 《천더미》로 살금살금 접근한
몇놈이 긴 칼을 쑥 빼들더니 새초이영을 씌워놓은 그 《소금더미》, 《천더미》들을 쿡쿡 찔러봤다. 그러더니 《속았다. 소금도 천도 없는 빈 새초더미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것은 한대걸의병대가 만들어놓은 가짜소금더미였다. 그러자 골안으로 들어갔던 놈들이 머리가 쭈삣해져서 모두 와―하고 돌아서서 줄행랑을 놓았다. 겁에 질린 놈들은 금방 어데선가 의병들이 불쑥 달려나올듯, 아니면 그 소문난 돌팔매군의 돌멩이들이 어데선가에서 금방 날아올듯 골을 싸매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뛰였다. 전날밤 서진성을 치러 나갔다가 홰불을 보고 얼혼이 나갔던 한놈이 《이건 밤중도 아닌데 다히라상은 우리를 이런데로 내몰았는가?》 하며
투덜댔다. 《소금 100섬이 어데 있단 말이야?》 그통에도 소금생각이 간절한듯 쩝쩝거리는 놈도 있었다. 마을밖에 은신하고있던자들도 돌따서서 뛰기 시작하는데 키다리놈이 칼을 빼들고 아무리 고아대도 대렬은 이미 밀리는 사태였다. 놈들은 벌써 큰길이 미여지게 줄행랑을 치면서 길가의 벼랑들과 골짜기들을 겁에 질린 눈으로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조총수놈들은 무엇을 겨누고 쏠지 몰라하다가 총을 멘채 뛰였다. 이렇게 되자 키다리놈도 투구갑옷을 바싹 조이며 말머리를 돌려 뛰였다. 그러나 꽃골은 잠잠하였다. 새벽매미들만 신이 난듯 울어댔다. 마을밖에 있던 놈들은 벌써 멀리 뛰고 마을에 기여들었던 놈들이 갈림길어구에까지 나와 후―하고 큰숨을 내쉬고 무시무시한 빈 마을을 돌아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바로 이때 《저 철천지원쑤놈들을 살려보내지 말자!》 하는 분노에 찬 목소리와 함께 벼랑바위짬에서 푸른 옷을 입은 한 젊은 의병이 불쑥
일어났다. 표창대정 호영이였다. 표창대를 이끌고 떠나올 때 와들대는 손으로 아들의 앞섶을 바로 잡아주며 《헛방을 쳐서 죽은 네 형을 울리지 말어라.》
하고 신신당부하던 어머니를 생각한 호영이였다. 순간 백발백중의 표창들이 날아가 놈들을 무리로 쓸어눕혔다. 아직도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고향마을, 땅속에서도 눈감지 못한 부모형제들이 지켜보는 내 마을에서 왜놈을 치리라 밤과 낮이 따로없이
표창던지기를 이악스럽게도 익혀온 꽃골젊은이를 비롯한 80여명의 펄펄 나는 표창대원들이였다. 어찌 그 표창에 헛방이 있으랴. 《앗, 돌멩이다.》 《아니다, 쇠덩이다.》 《날이 선 창이다.》 놈들은 사방으로 내뛰였지만 뛰는 놈보다 날아가는 표창이 더 빨라 삽시간에 길거리는 놈들의 주검이 너저분하게 깔렸다. 표창에 배때기가 꿰진 말들은 미친듯이 돌아치다가 풀썩풀썩 나자빠져서 다리를 버드럭거렸다. 살아서 뛰는 놈들의 두건이 벗겨져 앞대가리의 시퍼런 배코자리뒤 좀마개가 풀어져 귀신형국들이 되였다. 눈에 쌍심지를 단 꽃골젊은이 하나가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벼랑을 뛰여내리려고 하자 호영이가 꽉 그의 팔소매를 잡고 《너 정신 있니?
떠나올 때 하던 기동대정의 부탁을 잊었어. 우리 표창대의 첫 싸움인데 복수심을 앞세워 일을 망치지 말라구 했지?》라고 말렸다. 도망치는 왜병들은 호영이를 바라보며 기절초풍을 해서 소리쳤다. 《저게 푸른 갑옷이구나.》 《우리는 다 죽었다.》 사방에서 아우성이 터지고 놈들마다 기겁을 해서 산지사방으로 걸음아 날 살려라 내뛰였다. 이날 점심녘 수월산어구의 골짜기 우불구불한 좁은 길로 소금과 천을 가지러 들어간 왜놈들의 뒤꼬리에 역시 100명가량의 우리 창검대가
달려들어 그놈들에게 무리죽음을 안겼다. 서일이가 거느린 창검대 젊은 의병들이였다. 골짜기로 들어가던 놈들은 총에 불을 달념도 되돌아설념도 못하고 사색들이 되여 벼랑으로 기여오르고 뒤꼬리에 살아남은 놈들은 거미새끼처럼
산지사방으로 헤쳐져 뛰며 소리쳤다. 《오늘은 푸른 갑옷을 입은 장수가 칼을 쓴다.》 단정한 푸른 옷차림에 설화마로 앞뒤를 돌며 삼대베듯 놈들의 모가지를 베여던지는 서일이와 그가 거느린 날범같은 창검대원들의 칼과 창에 놈들은
무데기시체를 남겼다. 이 시각 칠성이는 쇠장대를 틀어잡고 숲속에서 왜놈 군기고를 노리고있었다. 제가 지키던 바로 그 군기고다. 그래도 그때는 내 나라의것을
지키였는데 이제는 왜놈의 화약고가 되여 왜놈들이 지킨다고 생각하니 분통이 터질것만 같았다. 안개속이여서 지키는 왜놈이 몇인지, 총을 가진 놈이 몇인지 딱히는 알수 없으나 이곳 지형지물들이 눈에 익은 칠성이는 한 20명은
잘될것이라고 생각되였다. 자기의 뒤쪽에서는 역시 푸른 옷차림을 한 신욱이를 비롯해서 날고뛰는 활잡이군 20여명이 때를 기다리고있었고 짐군, 말군 60여명이
어랑산성에서 불길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있는데 모두 화약상자며 탄알을 실어갈 준비들을 하고있었다. 좀 떨어진 곳의 큰 사스레나무가지에는 보따리 하나가 걸려있었는데 《고니시에게 보내는 선물―중화의병대》라는 큰 글쪽지가 붙어있었다. 칠성이는 이번 싸움을 조직한 림중량의병장이 과연 명장이로다 하는 생각을 다시 했다. 이번 싸움은 황바위가 잡아온 변상갑이를 시켜서 쓴 붉은 쪽지 두장을 가지고 한대걸의병대와 협동을 해서 어랑산성의 왜적에게 본격적인 타격을
줄 의병전술에 맞게 짠 전술이였다. (가짜 소금더미, 천더미를 만들어놓고 꽃골, 룡마골짜기, 무기고 그리고 어랑산성을 동시에 들이치는것, 이 얼마나 멋진가!) 칠성이 이런 생각을 하며 흥분을 주체 못하고있는데 이때 황바위는 어랑산성동쪽의 가파로운 벼랑우에 솟은 성벽을 기여오르고있었다. 거기는
절벽이여서 왜병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던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안개속에서 두런거리는 왜병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바람에 발을 빗디뎌 돌멩이를 굴렸다. 두놈이 급히 총대를 꽉 잡고 어디에 대고 쏠지 몰라했다. 어려서부터 심산의 안개속에서 눈이 밝고 또 훈련속에서 더 밝아진 눈으로 그놈들을 노린 황바위는 표창으로 단방에 답새겨 놈들을 아찔한 벼랑밑
개울속에 처박아버리고 재빨리 쇠갈구리가 달린 끈을 까마득한 성가퀴에 던져 걸고 루대가 있는 성벽쪽을 타고올랐다. 산속 백길 낭떠러지로 비호처럼 기여오르내리던 솜씨로 성가퀴에 불쑥 올라선 황바위를 보고 자지러진 소리를 지르는 루대우의 조총수 두놈의
골통을 박살내고는 놈들의 조총 두자루를 둘러멨다. 그리고는 유신검이 챙겨준 화약감으로 루정다락에 불을 질렀다. 갑자기 성벽우에 솟아난 새벽불길에 성안의 왜병들은 악마구리 끓듯 하며 솟아오르는 그 불길에 거연히 비낀 푸른 중의적삼에 푸른 수건 질끈
동이고 그 유명한 돌멩이구럭을 건뜻 멘 황바위를 보자 흡사 노한 새벽호랑이가 성벽우에 올라서서 3 000명 성안의 왜병을 짓누르고 선듯한 공포를
느꼈다. 《푸른 갑옷이다.》 《북대봉호랑이다!》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터졌다. 갈팡질팡하며 조총수놈들이 총에 불심지를 달았다. 순간 푸른 갑옷은 어느새 사라지고 아직도 안개가 걷히지 않은 성가퀴 어디선가에서 내려꽂히는 쇠덩이에 조총수놈들이 연거퍼 쓰러지며 비명을
질렀다. 성벽밑에서도 아우성이 터지고 성가퀴에 붙어있던 놈들이 외마디비명을 지르며 성벽밑으로 굴러떨어졌다. 실로 그 무엇으로도 막아내지 못할 분노의 무쇠주먹쇠창들이였다. 어랑산성이 그에게 명줄을 잡힌듯 뒤죽박죽이 된 속에서 《다까도비가 맞아죽은 무서운 돌멩이다.》 하는 공포에 찬 목소리가 들리였다. 《아니다, 쇠창이다. 조선의병의 새 병장기다.》 하는 놀란 목소리가 커지며 《쏴랏, 쐇! 쏴서 저놈을 떨구라.》 하는 악받친 목소리들이
들렸다. 그러나 무서운 표창은 안개속에서도 아우성을 치는 놈들의 아가리에, 골통에, 목줄대기에, 앙가슴팍에, 다리마다에 숨쉴 짬을 주지 않고 날아가
박혔다. 오늘을 위하여 몇해를 별러온 팔매질이였던가. 바짝 제놈들의 코밑, 아니 머리를 디디고선 황바위의 표창은 조선의 분노덩어리였고 성가퀴에 우뚝 솟은 푸른 갑옷은 복수의 화신이였고 왜놈의
공포속에 쏟아져내리는 표창은 백발백중의 불벼락이였다. 이 급한 정황을 보고받은 다히라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놈을 잡아라! 성안팎에서 포위하라! 생포하면 더 좋다!》 하고 고아댔다. 성문이 열리며 놈들이 쏟아져나왔다. 황바위는 급히 바줄을 잡고 성벽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벌써 줄밑에까지 놈들이 밀려오고있었다. 황바위는 바줄을 놓고 놈들의 복판으로 날아내리며 두손의 표창을 앞으로, 뒤로, 옆으로 내쳤다. 놈들은 총을 쏠 짬도 없었으며 칼은 빼들었으나 그앞으로 감히 덤벼들념을 못하고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악악 하는 동안에 표창을 맞고
뻐드러지며 비명을 지르는 놈들이 늘어났다. 그러는 가운데 어느 사이에 황바위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놈들은 서로 바라보며 눈들을 꺼벅거리는데 황바위는 좀 떨어져있는 곳에 매놓았던 불빛말을 잡아타고 꽃골쪽으로 달렸다. 그 말은 싸움에서 이기라고 윤초시가 기동대정에게 준 말이였다. 이때 갑자기 멀리 군기고쪽에서도 불길이 솟아오르며 창고속의 화약과 총탄 터지는 소리가 하늘땅을 뒤흔들었다. 어랑산성우의 불길신호에 따라
칠성이가 군기고를 치고 화약과 탄알을 빼낸 다음 지른 불길이였다. 황바위는 군기고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군기고를 지키던 왜적들이 《이놈들아!》 하고 고함을 치며 내달린 칠성이의 쇠장대에 단번에 두놈이
묵사발이 되였다. 놈들은 내뛰면서 총을 쏘려다가 날아드는 신욱의 활군들의 화살들에 먼저 목줄대기가 맞창이 나서 나자빠졌다. 그사이에 칠성이는 쇠장대로
군기고문을 부시고 짐군, 말군들에게 짐을 지워보낸 다음 군기고에 불을 지른것이였다. 한편 신욱의 궁술앞에 쓰러지며 놈들은 《오늘은 푸른 갑옷이
활을 쏜다. 천하명궁이다!》하고 아우성을 쳤다. 칠성이는 피발이 선 두눈을 부릅뜨고 그놈들을 뒤쫓아가는데 그의 쇠몽둥이에 걸리는 놈이면 총가진 놈이건, 칼가진 놈이건 대갈통, 허리통이
모두 박살이 났다. 실로 분노한 거인의 화신이였다. 신욱이가 소리쳤지만 복수심으로 제정신이 아닌 칠성이는 다시 달려가며 또 한놈을 때려눕히고 내달리는데 먼저 달아뺀 조총수 두놈이 옆쪽
바위뒤에서 그에게 총부리를 겨눴다. 《칠성형―》 이때였다. 어데서 나타났는지 비호처럼 달려든 애젊은 소녀 하나가 총가진 놈들에게 달려들며 단검을 던져 두놈의 목줄대기를 끊어놓았다. 《오빠야!》 하고 피를 쏟고있는 칠성이를 그러안았다. 때를 같이하여 황바위의 불빛말이 달려왔다. 《아, 칠성형님! 쌍가마!》 그는 부르짖으며 말에서 굴러떨어지듯 했다. 이때 또 한사람의 울부짖음소리가 저쪽에서 들려왔다. 《칠성이, 이 사람…》 표창구럭을 메고 쌍가마와 함께 중화의병대로 오던 황바위의 아버지 황봉이였다. 칠성이의 시체는 서진성안에 뉘여졌다. 오늘의 승리는 컸지만 칠성의 상실로 인한 사람들의 마음은 더 아팠다. 오빠를 붙잡고 몸부림치는
쌍가마의 울음은 다만 오빠만을 생각한 울음이 아니리라.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그의 울음은 사람들의 창자를 에웠다. 급보를 받고 달려온 한대걸이 떨리는 두손으로 동생에게 홑이불을 덮어주는 그 마음이 헤아려져 황봉이는 그 손을 잡아 비껴놓고 자기 손으로 그
이불을 다독다독 다독여주었다. 호영이 어머니를 비롯한 눈물이 많은 녀자들이 쌍가마에게 울지 말라고 하면서도 더 많은 눈물들을 쏟는다. 림중량의병장은 칼을 짚고 하늘을 우러르고 섰다. (저 어린 처녀가 차고온 단검으로 왜놈을 몇놈이나 잡을것인가. 외쪽발로 달려온 저 황봉이… 아니다. 우리는 왜놈따위에 죽을 사람들이 아니다.) 한팔이 떨어져나간것 같은 상실감을 메꾸려고 의병장은 비분을 누르며 황바위, 서일이, 신욱이, 호영이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 칠성이의 시체를 서설봉할아버님옆에 나란히 눕혀라!》 어느새인가 짙기도 하던 안개가 씻은듯이 개였다. 어랑산성에서는 또 다른 벅작소동이 일어났다. 어제 하루밤사이에 서진벌의 오곡이 싹 없어진것이였다. 곡식을 베는 패, 나르는 패, 심지어 낫을 갈아대는 패까지 짠 의병장의 빈틈없는 작전으로 사람들은 무한한 격동속에 멀리 서쪽마을로 서진벌
곡식을 다 베여서 날랐던것이다. 그속에는 윤초시도 있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우리가 먹을 곡식을 하루밤사이에 이렇게 싹 빼앗기다니.…》 책상을 쾅 치는 다히라에게 게구마는 이죽거렸다. 《못당합네다, 못당해요. 저 서진성에 명장이 있는데… 흥, 푸른 중의적삼 입은 코흘리개 아이새끼 하나도 못당하면서…》 《뭐야, 그럼 넌 뭣 하러 여기에 나와있는 놈이냐?》 다히라가 악을 쓰자 《흥, 뭐 포위된게 평양성뿐인줄 아시우.》라고 했다. 게구마는 이렇게 이죽거리며 면도칼로 볼의 털을 깎았다. 옆에 있던
매부리코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아니, 왜 그 좋은 수염을…》 《사람이란 앞을 내다볼줄 알아야 하느니.》 《그건 무슨 말씀이온지?》 《우리가 이 나라에서 쫓겨갈건 뻔한데 내 이놈의 털때문에…》 《예?》 《우리에겐 인재가 없어.》 《그건 사실이올시다. 게구마님과 같은 큰 어른을 이런데다가 구겨박으니…》 매부리코는 그를 말렸다. 《그렇지만 그 수염만은 놔두십시오. 서울 우끼다님앞에 나설 때 반반한 얼굴로야 어떻게…》 《음, 참 그렇군.》 게구마는 면도칼을 놓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