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 회)

제 10 장

북대봉 황총각이 불씨들을 안고갔다오

1

 

중화고을거리는 평양에서 남쪽으로 60리가량 상거한 곳으로서 평양과 서울사이의 나라 큰길을 끼고있는 요충지이며 평양의 남쪽관문이다.

예로부터 서울에서 내려오는 감사행차를 비롯하여 벼슬아치들과 행객들이 여기서 점심을 치르고난 다음 평양성으로 들어가군 했었는데 그래서 원래는 이름도 중화(길 가다가 지어먹는 점심밥)라는 뜻으로 불리웠었다.

중화고을에서 동남방향으로 상원쪽을 향하여 한 30리 나가다가 큰길에서 다시 30리가량 북쪽으로 굽어들어간 곳에 꽃골이라는 깊숙한 마을이 있다.

마을 한쪽에 덩그러니 큰 기와집이 있고 그리 높지 않은 양지바른 산기슭에는 60호가량의 농가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데 이름그대로 꽃이 많은 마을이다. 봄이면 앞뒤산에 진달래가 먼저 한벌 덮이고 그뒤를 이어 살구꽃과 복숭아꽃, 여름에는 산등성이마다에 붉은 산나리, 가을철이면 봄꽃 못지 않은 단풍이 고운 마을이다.

농사철이면 품앗이로 이웃들은 더 화목해지고 가을이면 마당질끝에 비록 빈자루만 들고나앉는 형편이지만 서로 의지가지가 되는 이웃들이 마음의 언덕이 되며 겨울은 겨울대로 깊은 눈밤의 사랑방마을돌이, 초신삼기, 새끼꼬기, 섬치기속에서 옛조상 자랑하는 구수한 옛말 등 이야기돌림에 아이들도 두눈을 또릿거리며 가슴을 부풀리운다. 그런 겨울밤 사랑방주인의 무던한 인심으로 따끈한 시래기국에 밥 한숟갈씩 놓아들고 쭉 빠갠 무우동치미를 어적어적 깨무는 재미란 가난은 하지만 제 고향마을에 끊지 못할 정으로 든든히도 얽어매여 지는 값진 정취이다.

특히 덫에 큼직한 메돼지라도 걸리는 날에는 네것내것이 따로없는 마을의 명절이 되고 군포, 호포, 수자리, 나들이, 품팔이, 종살이, 머슴살이 등 인생경난, 사는 고생, 힘이 들어도 서로 함께 나누는 마음들이 있어 숨이 덜찬 마을이다.

린색하고 매정스럽기로 조명이 나서 《좁쌀 윤초시》로 불리우는 기와집주인의 뒤바라지며 일년내내 땅임자들의 논밭에 매워 빨리우는 땀방울도 서로 거들어주고 부추겨주는 이웃들이 있기에 턱에 닿는 가쁜숨도 후― 내쉬군 한다.

매미들이 떼를 지어 울어대는 한여름 이른새벽 이리떼같은 왜적의 무리들이 이 마을로 새까맣게 들이닥치고있었다. 이 땅에 첫발을 들이민 때로부터 오늘까지 이놈들의 발길이 닿는 곳은 말그대로 쑥대밭이 되였고 인간도륙장으로 되였다. 특히 부산, 서울, 평양을 거치는 국도 린근 수십리 어간은 이 야수들의 총질, 칼질, 불질, 로략질로 남아난것이란 없었다.

이 꽃골이 오늘까지 이 참화에서 벗어나있은것은 다행히 큰길에서 멀리 떨어져 후미진 곳이였기때문이였다.

그동안 이 평화롭던 마을에서도 린근마을들이 섬오랑캐들에게 당하는 살륙만행의 끔찍한 소식이 징소리처럼 퍼져와서 불안하고 스산한 마음들로 초조한 나날을 지내왔었다. 일부 피난을 간 집들도 있었지만 아직 왜적의 야수성을 다 알지 못하는 순박한 사람들이 손에 잡고 놓을수 없는 세간붙이며 이러저러한 인간세상에 엉키고 쩌들은 정으로 하여 선뜻 마을을 뜨지 못하고있었다.

그런가 하면 가면 어데로 가랴 하는 막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설마하니 이 외진 우리 마을에까지야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 마을에 남아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큰 땅임자인 윤초시네식구가 아직 다 뜨지 않은것을 보고 그 어떤 기대 비슷한것으로도 되여 오늘래일하고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윤초시네 집으로 말하면 중화 서진벌 등에 한 500석지기 땅이 있고 그 구두쇠솜씨로 하여 속알이 박혀있는 포실한 살림이다.

그런데 윤초시는 작년에 성천고을에 가서 피난갈 집까지 마련해놓고도 늙은 어머니만 하인을 붙여 보낸 다음 막상 온 집안이 다 뜨자니 그 좁쌀같은 성미에 꽁댕이낫 한자루까지 놓기 싫고 버리기 아쉬워 오물짝거리고있었다.

그럴 때 마침 동래, 부산쪽에 왜놈들과의 좋은 장사구멍이 터졌다는 양덕 조참봉의 말을 듣고 그럼 당장 란리는 터지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에 훌 집을 떠났었는데 그만 갑작 란리통에 아직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있는것이다. 그리하여 아직 이 집에는 마누라와 시집갈 나이의 외동딸이 남아있었다.

마을로 덤벼든 왜적은 50명가량이였는데 서울에서 평양으로 들어가는 놈들이였다. 두목놈은 눈과 코, 입, 귀구멍만 내놓고는 온통 새까만 털부숭이였다. 오동빛 비늘갑옷을 입고 누런 뿔모양의 갈구리쇠를 앞에 댄 검붉은 투구를 쓴 놈인데 우람찬 체통에 밤빛말을 타고 허리에는 엄청나게 큰 왜검을 찼다. 그에게 바싹 붙은 두놈도 말을 탔는데 조선버선짝 비슷한 검은 건을 쓰고 손에는 조그마한 방패같은것을 든 평복차림을 한 놈들이다.

한놈은 뒤웅박대가리에 짙은 구레나룻, 우묵눈이고 한놈은 매부리코다.

무엇인가 자주 두목놈에게 주어섬겨대는것으로 보아 조선풍습을 잘 아는 향도관이나 통역관놈들 같았다. 갑옷차림을 한 놈들도 있지만 다른 놈들은 앞대가리를 시퍼렇게 박박 밀어서 배코쳐올리고 뒤통수에 한뽐씩이나 되는 굴뚝같은 좀마게(왜상투)를 틀어올린 놈들이다. 넓은 량쪽 팔소매를 끌어매여 걷어올리고 굵은 오비(띠)에는 모두 긴 왜검과 짧은 칼을 찼다. 발에는 신바닥만 있는 조리(왜짚신)를 끈매여 신고 각반을 쳤으며 옷빛갈은 모두 검은빛이다.

잔등과 옷소매들에 제 집의 가문표식을 달아입은 놈도 있다. 그런 놈들은 소위 《사무라이》가계의 출신인것이다.

일행중의 스무놈은 화승대의 일종인 조총을 메고 남은 놈들은 칼을 들었다. 그뒤로 댓놈이 빈말들을 끌고왔다. 비록 몇명 되지 않는 놈들이지만 수만명이 온갖 만행을 다하며 평양성안으로 몰려간 뒤에 보기에도 기동성있게 꾸려가지고 온 이 소부대놈들은 그 두목놈에게 대하는 태도로 보아 그 어떤 특수한 임무를 맡고 오는 놈들같은데 살기가 등등했다.

평복차림을 한 두놈이 말을 몰아 먼저 꽃골어구에까지 갔다가 돌아와서 털보놈에게 무어라 몇마디 하자 털보는 졸도들을 불러세워놓고 지껄여댔다.

《너희들이 오늘 명심해야 할 일은 세가지다. 첫째는 눈에 뜨이는 마을놈들을 모조리 쏴죽이고 쳐죽이는것이다. 그렇게 해서 조선백성놈들이 감히 우리에게 맞설념을 못내게 해야 한다.

둘째는 빼앗은것들을 저 말들에 가득가득 실어가지고 평양성으로 들어가는것이다.

특히 조선호랑이가죽이 내게는 꼭 필요하다. 이것은 우리 나라를 떠날 때 〈관백〉 도요도미 도노께서 내게 직접 하신 분부이다.

세번째는 내가 차고있는 이 명검, 우리 집안 대대로 물려오는 가보인 이 칼이 천하 명검이라는것을 너희들앞에서 오늘 보여줄테니 똑똑히 보라는것이다. 알겠는가?》

그러면서 털보는 육중하게 생긴 왜검의 손잡이를 툭툭 쳤다.

아직 이른새벽, 갓 잠을 깬 평화롭던 꽃골마을에 갑자기 콩볶듯하는 총소리와 함께 불소나기가 쏟아졌다. 우선 마을 초입에 있는 집이 첫 벼락을 맞았다.

아기를 업고 물동이를 이고 나오던 젊은 녀인이 외마디소리를 지르고 마당복판에 아기와 함께 쓰러졌다.

이쪽 산기슭에 있는 오막살이옆 느티나무에 올라가서 매미를 잡던 여라문살쯤 되는 사내아이가 총소리에 놀라 나무에서 떨어진것을 놈들은 시시닥거리며 몰방으로 쏘아눕히였다.

《이 오랑캐놈들아!》하고 웨치며 달려나와 그를 얼싸안은 머리 흰 녀인까지 쏘아눕혀 삽시에 버드나무밑이 선혈로 질벅해졌다.

남새밭에서 김을 매다가 그 광경을 보고 《아이구머니나.…》하고 달려가던 어린애 업은 녀인까지 쏘아눕혀 왜적들은 순식간에 한곳에 여러 주검을 널어놓았다.

피를 쏟고 쓰러진 체소한 엄마의 잔등에서 애기가 자지러지게 울었다.

그 옆집 토방에서도 백발로인이 허공을 허비며 쓰러지고 집들에서는 불길이 솟구쳤다. 온 마을에 아우성이 터지고 여기저기서 왜놈의 칼에 맞고 총에 맞아 아이들과 녀인들, 늙은이들이 쓰러졌다.

늪옆의 풀밭에서 풀을 뜯다가 각을 뜯기운 암소 두마리와 칼에 멱을 찔리운 돼지들과 염소며 목 비틀린 닭들이 빈 말잔등들에 처실리웠다.

집집마다에 들이닥친 왜놈강도떼의 총탁과 발길에 문짝, 농짝들이 부서지고 아낙네들이 정성담아 올올이 짠 무명필, 삼베필, 명주필들이 말우에 실리웠다. 부모공양을 하던 윤이 도는 놋주발과 잔치를 앞둔 아들딸의 혼수감들이 털부숭이 오랑캐놈들의 손에 꿍져져 말잔등에 처실리웠다.

한 오막살이안에서 무명을 짜던 녀인이 왜놈의 칼에 무명필이 끊기우자 《이놈들아, 이것이 네놈들 줄려구 짠 무명인줄 아느냐?》 하고 잉아대를 추켜들다가 무명필을 끊은 그 칼에 맞아 베틀을 안은채 쓰러져 그밑에 선혈을 쏟았다. 어머니를 부르며 달려오는 어린 딸애도 놈들의 총에 맞았다. 모든 집들에서 시뻘건 불길이 혀를 날름거리며 치솟아올랐다.

윤초시네 집 안마당 가운데 놓인 왜놈의 쪽걸상에는 앉은키가 엄청나게 큰 털보가 제놈이 자랑하는 《가전지보》인 칼자루를 짚고 가랭이를 쩍 벌리고 앉았는데《이 오랑캐놈들아!》하고 고함을 치며 도끼와 쇠스랑을 추켜든 두 젊은이가 그놈의 앞으로 달려들었다. 움씰하고 일어서서 칼을 빼들며 뒤걸음쳐 물러섰던 털보가 《칙쇼!》소리와 함께 쇠스랑을 든 젊은이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칼을 맞고 《억!》소리를 치며 젊은이가 쓰러지자 이번에는 그 칼로 도끼를 든 젊은이를 옆으로 후려쳤다. 눈을 부릅뜬 젊은이는 칼을 받는 순간 도끼를 힘껏 털보놈에게 내던지고 쓰러졌다.

도끼날이 털보놈의 귀전을 스쳐지나 마루우에 떨어지며 마침 방에서 보자기에 싼 조그마한 함을 들고나오던 왜놈의 목덜미를 깊숙이 찍어넘겼다.

그바람에 그 왜놈은 털썩 보자기를 마루에 떨구고 쓰러졌는데 농쟁기를 둘러메고 달려든 두 젊은이를 베고난 털보는 천하검객이라도 되는듯 칼날을 빼든채 졸개들을 둘러보다가 도끼에 맞고 죽은 졸개놈이 떨군것을 보자 칼을 칼집에 철컥 꽂으며 소리쳤다.

《그게 뭐냐? 호랑이가죽은 없는가?》

이날 갑자기 마을에 들이닥친 왜놈들앞에서 온 마을의 집들이 다 그러했지만 윤초시의 집에서도 처참한 광경이 빚어졌다. 원래 윤초시에게는 외동딸이 하나 있었다. 이제 나이 열일곱인데 서울길을 오가는 동안에 친구들의 연줄로 마땅한 사위감이 생겨서 윤초시는 딸의 례장감이며 치례감에 각별한 관심을 돌려왔다.

남에게는 좁쌀처럼 잘고 린색하면서도 자기 자식이나 처첩에게만은 아끼는것이 없는 그런류의 위인인 윤초시인것이다.

그런데 그때 돈냥이나 있으면 첩살림쯤 보통일로 하는 그런 세월이였지만 그런데는 괴이할만큼 청백하며 그는 오로지 딸 하나를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쳐왔다.

이날도 윤초시의 마누라는 덩그런 큰 집에서 뒤숭숭한 마음으로 딸과 함께 성천고을로 떠날가 하다가 집을 비우고 갔다간 남편에게서 무슨 벼락을 맞을지 몰라 가슴만 조이고있었는데 꿈에도 본일없던 검은 악귀떼가 집안으로 닥쳐들었던것이다.

놈들이 칼을 빼들고 마루우로 올라서자 윤초시 마누라는 너무도 억이 막혀 《이 짐승같은 놈들아, 이게 무슨짓…》하고 소리를 치다가 그 말도 채 못마친채 칼을 맞고 방바닥에 쓰러졌다.

평소에 담이 작던 윤초시의 딸이 다듬이방망이를 들고 방으로 뛰여드는 놈의 골통을 후려쳤으나 시골처녀의 다듬이방망이가 어떻게 살인과 략탈을 업으로 삼는 왜적의 적수가 되랴. 그놈의 무지한 발길에 연약한 처녀는 방구석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고말았다.

방으로 뛰여든 두놈은 샅샅이 방안을 뒤졌다.

마을에서 제일 큰 집이고 털보놈이 직접 틀고앉은터이라 략탈이 더 심했다. 마음먹고 몇해동안 장만한 외딸의 혼수감은 물론 참빗갑속같은 집안 구석구석에서 나오는 진귀한 물건들에 털보는 입을 헤벌리고 앉아서 《호랑이가죽은 없는가?》 하고 또 지껄여대는데 이런 경황에서도 한놈이 쓰러져있는 처녀의 미모에 눈이 쏠리더니 여름수개같이 시뻘건 혀바닥을 빼물며 처녀를 뒤방으로 끌고가다가 정신이 든 처녀에게 방망이로 골통을 얻어맞고는 처녀의 앞가슴에 긴 왜검을 콱 박았다.

이럴 때 다른 한놈은 홍공단보자기에 싼 자개박이패물함을 농속에서 찾아내여 그것을 안고 나오다가 마을젊은이의 도끼에 맞고 쓰러졌던것이다.

평복을 한 매부리코통역관놈이 털보앞에 패물함의 뚜껑을 열고 홍공단우에 그속에 든것들을 좌르르 쏟아놓았다.

《야―》

섬오랑캐들의 환성이 터졌다. 그놈들이 난생처음 보는 눈부신 패물과 치레감들이였다.

평안도지방의 독특한 혼례식용 금은노리개, 옥노리개들, 솜씨있게 칼집을 조각장식한 은장도, 향주머니, 나비방아다리, 치아통, 은고리가 달린 범의 발톱, 은가락지, 옥가락지, 룡잠, 봉황잠에 석류잠, 밀화잠 등 비녀들과 금, 은, 옥, 파리(유리) 등의 정교한 조각단추들, 제놈의 나라에서는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보물들이 금수실, 은수실장식들에 잘도 어울려있었다.

경탄할 솜씨로 10장생을 수놓은 혼례식 공단댕기는 조선사람의 멋과 생활의 맛을 드러내보여 놈들도 혀를 내둘렀다. 향기그윽한 청송 쌍학수놓이, 조그마한 비단주머니의 동심결장식끈을 풀자 왕밤알만한 사향의 향내가 비린내나는 놈들의 코를 물씬 찔렀다.

섬나라 오랑캐들의 넋을 빼앗은 그 정교롭고 화사한 조선녀인들의 치레감들에 넋을 잃고있던 털보가 은고리장식을 한 범의 발톱을 집어들더니 통역관에게 물었다.

《이게 뭔가?》

《예, 범의 발톱이올시다.》

하고 뒤웅박대가리에 눈이 우묵하고 구레나룻투성이인 40이 훨씬 넘어보이는 통역관놈이 대답했다.

《조선호랑이 발톱인가?》

그 물음에 뒤웅박대가리는 눈을 껌벅거리더니 시치미를 뚝 떼고 한술 더 떠서 대답을 했다.

《예, 북대봉호랑이 발톱이올시다.》

《음, 내가 떠나올 때 조선의 북대봉호랑이가죽이 기름이 지르르 흐르는 천하일품이란 말을 들었다. 오늘은 우선 이 북대봉호랑이 발톱이라도 가지고가자.》

털보놈이 자못 흥에 겨워하는데 뒤웅박대가리놈은 (흥, 저놈은 호랑이가죽을 그 무슨 개가죽으로 아는 모양이지.) 하고 속으로 코방귀를 뀌고 졸개놈들은(저 털보놈이 보물들을 몽땅 독차지하려나?) 하는 눈길로 슬금슬금 털보놈과 패물들을 바라보며 시뻘건 혀바닥을 빼물기도 하고 시누런 이발을 드러내며 코등을 실룩거리기도 했다.

이때였다. 환갑이 넘어보이는 한 로인이 시퍼렇게 날이 선 도끼를 둘러메고 대문안으로 뛰여들며 《이놈들아!》하고 소리쳤다. 마을초입집에서 며느리와 어린 손자를 몰살당한 손로인이였다.

어제밤에 이웃마을로 첫손자 돌잔치상에 놔줄것을 구하러 갔다가 뒤늦게 달려온것이였다.

눈을 부릅뜨고 흰수염을 거슬러올린 손로인은 대문안에 들어서며 어깨에 칼을 맞고 쇠스랑을 쥔채 뜨락에 쓰러진 자기 아들을 보자 《아니?》하고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 오랑캐놈들아! 내 아들, 내 손자, 내 며느리를 살려놓아라!》하고 울부짖으며 털보놈앞으로 달려들었다. 목숨을 걸고 덤비는 사생결단이였다.

지금까지 패물에 골몰해있던 털보놈이 칼날을 쑥 빼다가 탁 도로 닫으며 지껄였다.

《참았다. 저런 늙다리 반송장을 살려두는것도 좋다. 그래야 우리가 무섭다는걸 조선놈들에게 이야기할게 아닌가.》

그러면서 손로인을 문밖으로 내쫓게 했다. 도끼를 휘두르는 손로인의 고함소리는 왜병들의 총칼앞에서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때 들판과 산으로 피해갔던 마을사람들이 손에손에 농쟁기와 몽둥이를 들고 멀리서부터 고함을 치며 달려왔다. 그런데 어데서 날아들었는지 큰 장작개비 하나가 두목놈의 눈앞을 날아지나서 담장밑의 큰 장독을 깨놓는 바람에 튕겨난 시뻘건 된장이 그놈의 앞자락이며 투구에, 번쩍거리는 갈구리쇠대에 더덕더덕 늘어붙었다. 처음엔 겁을 먹고 굴뚝모퉁이에 숨어있던 이 집 머슴이 눈앞에 쓰러지는 사람들을 보자 두눈에 쌍심지를 켜고 장작개비로 그놈을 후려치고는 다시 장작개비를 추켜들고 달려나오다가 놈들의 칼에 쓰러졌다.

《칙쇼, 도대체 이놈의 나라가 무슨 놈의 나라냐? 내 이 칼을 빼들고 싸움터를 달리며 좌충우돌한지 20여년에 이런 백성놈들을 보기는 처음이다.》

이렇게 지껄이던 털보놈은 체면을 생각했던지 아니면 조여드는 마을사람들의 함성에 겁이 났던지 홍공단에 싼 패물함을 붙안고 일어서며 소리쳤다.

《이놈의 집에 불을 지르라!》

잔악한 섬오랑캐들은 이 집 모녀와 칼에 맞은 사람들 그리고 도끼에 맞고 거꾸러진 왜병놈까지 방안에 쓸어넣고 솔가지와 장작더미를 헐어다가 집에 불을 질렀다.

놈들이 쏘아댄 조총알에 달려오던 마을사람들 몇이 또 쓰러졌다.

그러나 함성은 더 커졌다. 털보놈은 졸개들을 돌아보며 초조감을 숨겨보려는듯 지껄였다.

《그만 여기를 뜨자. 관용은 사무라이의 첫째 미덕이다. 내 도량이 좁지 않다는것을 저 백성놈들이 알게 하자.》

피에 굶주린 놈들은 불멸할 무훈담이라도 이 꽃골에 남긴듯 기세등등해서, 그러나 부랴부랴 략탈한것들을 말잔등에 처싣고 평양으로 가는 큰길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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