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7 회)
제 9 장
출전 3 《아버지―》 산발을 타고 메아리쳐오는 아들의 다급한 목소리에 놀라 황봉은 지팽이를 짚고 일어서려다가 오리나무밑에 도로 주저앉았다. (왜 벌써 저애가 돌아올가? 오늘이 서일의 잔치날인데… 어제저녁에 덫에 치운 메돼지를 지워보낸 아이가 이렇게 빨리 돌아오다니. 혹시
호군나으리께서 세상을 뜨신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숨이 턱에 닿게 헐떡거리며 달려온 아들은 웨쳐댔다. 《아버지, 란리가 났어요. 왜놈이 벌써 평양성까지 쳐들어왔대요. 서일형님의 장인도 왜놈에게 죽구요. 형님은 림중량의병장에게로 떠나셨어요.》 《뭐, 뭐, 어쨌다구?》 아들이 꺽꺽 막히는 목소리로 툭툭 쳐서 한 말이지만 실로 그 한가지한가지 일들이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였다. 황봉은 얼굴이 새하얘지더니 아들을 잡아끌어앉히며 말했다. 《좀 차근차근 이야기를 하려무나.》 《예, 내가 가서 얼마 있으니까 신랑신부가 집에 들어서더구먼요. 그런데…》 바위는 땀으로 물참봉이 된 삼베등거리를 벗어서 쥐여짜며 서설봉일가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했다. 《아, 하늘아!》 황봉은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치올려봤다. 다음순간 그는 문득 아들 생각이 났다. 그는 아들을 지켜보며 물었다. 《그런데 너는?》 이때 황바위는 아버지에게서 아직 본적이 없던 절절하고 근엄한 눈빛을 보았다. 손자를 싸움마당으로 떠나보내던 서설봉로인의 그런 눈빛이였다.
그는 아버지가 고마왔다. 아버지에게서 북대봉바위와 같은 억센 힘을 받아안는 마음이였다. 다시는 인간세상에 나가지 말자고 북대봉산발들을 닫아매듯 하며 들어오던 아버지, 수리개처럼 날으는 아들의 날개죽지를 붙안고 애타하던 아버지가
아니였던가. 달려오면서도 외아들이 목숨을 바치러 나가는 싸움길인데 홀로 남는 아버지마음이 어떠하랴 하는 생각에 발걸음을 몇번이나 멈추기도 했던
황바위였다. 그런데 황바위는 오늘 서설봉, 림중량의병장 등과 어깨나란히 한 아버지를 보게 된것이 정말 자랑스러웠다. 황바위는 문득 지금까지 자기가 이 외로운 아버지의 속만 태워주었을뿐 어느때 한번 다심하고 살뜰하게 대해드리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정을 담아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오냐.》 《아버지를 만나뵙고 떠나라는 서설봉할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왔습니다.》 황바위는 진정 천만시름을 다 놓고 떠날수 있는 심정이였다. 《오냐. 어서 떠나거라. 서설봉할아버님의 그 장하신 충의지심과 너의 할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잊지 말아라. 그리구 부디 림의병장님의 짐이
되지 않게 하여라.》 《예.》 황바위는 일어섰다. 그런데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던지 《바위야, 집에 들어가서 구럭과 낫을 좀 갖다다오.》라고 했다. 바위가 급히 구럭과 낫을 가지고 나오는데 지팽이를 짚고 일어서려던 아버지가 도로 주저앉았다. 그제서야 아버지의 발이 부은것을 안 황바위는
《아버지, 웬일이세요?》하고 아버지발을 부둥켜안았다. 《일없다. 산양 한마리를 만났길래 잡아서 서일도련님 잔치에 가지고 가려다가 그만에… 하, 두루두루 왜놈이 원쑤로구나.》하고 억지로
일어서더니 구럭과 낫을 들고 절룩거리며 뒤숲으로 갔다. 《아버지, 무슨 일인지 제가 해요.》 황바위가 가로막아나섰으나 아버지는 굳이 그를 물리치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황바위는 아버지를 남겨두고 떠날 오막살이를 다시한번 돌아보았다.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오두막추녀가 너무도 낮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이 오돌막에서 어머니마음으로 이 아들을 위하여 문밖의 가랑비소리에도 귀기울여주었고 아버지마음으로 사나운 짐승소리도 지켜준 아버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감겨돌았다. 전에는 미처 못했던 이런 생각이 막상 아버지를 두고 떠나자니 그 키낮은 추녀로 아버지를 지질러놓고 떠나는것만 같았다. 황바위는 개울가로 나가서 펑퍼짐한 주추돌감 두개를 날라다가 자기도 놀랄만한 힘으로 그 새 주추돌우에 기둥들을 번쩍번쩍 들어 올려세웠다.
마음이 좀 후련해졌다. 이번에는 눈길이 토방밑의 디딤돌로 갔다. 그것도 오늘따라 더 높고 삐뚤어져보였다. 이번에는 그것을 고르롭게, 아버지가 오르내리기 편하게 손질을 하고난 다음 집옆의 옹달샘을 정성껏 손질했다. 퐁퐁 솟는 물줄기가 고마왔다.
자기대신 아버지를 도와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도끼로 장작도 한가리 패서 쌓아놓고 낟알오쟁이들도 아버지손이 가닿기 쉬운 곳으로 내려 옮겨걸어놓고나서 졸졸 뒤를 따라다니는
애기사슴들의 등을 쓸어주며 《이제는 내대신 너희들이 우리 아버지의 아들노릇을 해다오.》하고 어린시절의 동심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어느새 왔는지 아버지가 구럭속에 시닥나무와 가둑나무껍질을 한가득 벗겨가지고와서 집안을 둘러보더니 혼자말처럼 했다. 《원, 녀석두…》 아버지는 구럭을 토방에 내려놓으며 아들에게 말했다. 《얘야, 이걸 푹 삶아라.》 《아니, 그건 뭘 하실려구요?》 《글쎄…》 아들은 뜨락에 가마를 내다걸고 그것을 삶기 시작했다. 씁쓸하고 들큰한 냄새가 집안팎을 감쌌다. 아버지는 방으로 들어가더니 아들 장가보낼 때 해입히려고 마련해두었던 무명필을 안고나왔다. 아들은
깜짝 놀랐다. 아들은 아들대로 아버지 옷감으로 건사해둔것이였다. 그때 양덕거리에서 사온 사연많은 무명필이였다. 아버지는 끓는 가마속에 무명필을 집어넣었다. 삽시에 흰 무명필에 푸른 물이 들었다. 《아버지!》 《오냐, 새옷이라도 한벌 지어입고 나가야지.》 황바위는 더는 말없이 푸른 물이 든 무명필을 개울물에 훨훨 헹구어 짰다. 아버지와 아들은 무명필끝을 맞잡고 장작불에 말렸다. 그 한끝을 잡은 아버지의 웅심깊은 사랑이 아들의 가슴에 쩌릿하게 슴배여왔다. 《아버지, 이 빛갈이 참 곱군요.》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밝게 해드리고싶었다. 《곱구말구. 우리 북대봉처럼 사철 푸르청청한 빛갈인걸… 그날 림선다님께서도 푸른 빛갈은 변치 않는 조선사람의 기상이라고 하셨지.》 이 순간 아들은 북대봉처럼 청청한 이 천으로 옷을 지어입혀 보내려는 아버지의 깊은 심정이 느껴져서 눈확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아들은 다는 몰랐다. 나무껍질을 벗겨가지고 오던 아버지가 어머니무덤앞에서 《여보, 우리 바위가 왜놈을 치러 나가우. 알겠수? 그래서
남처럼 전복은 못지어 입혀보내지만 저 북대봉처럼 사철푸른 빛갈을 물들여 옷을 지어 입혀보내려구 하오. 그 애 첫옷도 우리가 이렇게 이 북대봉의
푸른 나무물을 들여 입혔댔지. 글쎄 그놈이 당신소원대로 북대봉호랑이가 돼서 원쑤들의 목덜미를 물어끊으러 떠난단 말이요. 알갔소?》하고 속삭이듯
한것을… 뭇별이 류달리 알찬 이 여름밤, 아버지는 광솔불앞에서 아들의 중의적삼을 지었다. 어려서부터 장난세찬 아들의 옷을 엄마대신 해입히며 깁고
꿰매여온 아버지건만 왜 이밤은 그리도 여러번 바늘에 손가락을 찔리우는지… 그것은 단순한 한벌의 중의적삼이 아니였다. 아들에게 3대의 소원을 담아
총알에도 칼날에도 뚫리지 않는 갑옷을 짓는 아버지의 마음이였다. 아들은 옆에서 느릅나무껍질과 닥나무껍질로 미투리를 삼았다. 싸움터에 신고나갈것과 아버지것을 손바닥에 침을 뱉아가며 촘촘히 조여삼았다. 산골의 긴 밤도 이밤만은 짧아서 아버지가 아들의 옷을 다 지어놓았을 때는 희붐히 초불봉산마루가 밝아왔다. 그런데 어느새 아버지는 온 골짝을
쩡쩡 울리며 메돼지바위의 차돌을 깨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안 아들이 망치를 받아쥐고 바위를 까서 한무데기의 차돌멩이를 만들었다. 그들은 이렇게 왜놈때문에 가슴속에 응혈진 3대의 불덩어리를 만들었다. 아버지는 그 차돌들을 아들의 구럭에 표창과 함께 차곡차곡 챙겨넣어주며 말했다. 《부디 헛방을 치지 말아라.》 《예.》 아들은 대답을 하고나서 무언가 생각이 난듯 말했다. 《아버지, 제가 떠난 다음 서일이 할머님이랑 새아주머니가 여기로 와서 살도록 가는 길에 이르고 가겠어요.》 아들의 어른스런 그 말이 대견해서 아버지는 선선히 대답을 했다. 《암, 그렇게 해야지. 유서방도 의병에 나갔겠는데… 그래야 내 마음도 놓이구…》 초불봉머리우에 아침해가 올라설 때 황바위는 아버지에게 작별인사를 하였다. 《어서 떠나거라. 이 애비가 함께 못가는게 원통하구나. 부디 사내답게 잘 싸워라. 그리고 너의 큰아버지이름이 황돌이라는걸 알지? 손가락이
여섯인 륙손이구… 살아만 있다면 꼭 싸움판에 나올게다.》 《아버지, 명심하겠소이다.》 황바위는 깊이 머리숙여 인사하고 아버지앞을 떠났다. 황봉은 멀어져가는 아들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며 지팽이에 온몸을 실은채 오래오래 서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