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3 회)
제 8 장
심산속에 묻힌 옥 2 (2) 이날밤 북대봉 깊은 골짜기에 글읽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이 험한 골짜기가 생긴이래 그 한복판에서 처음으로 울리는 글소리였다. 그런데 그 글소리는 지금까지 들어온 그런 틀의 글소리가 아니라 글의 뜻과 세상리치를 들춰내여 자기의것으로 만드는 글소리였다. 《하늘천!》 《하늘천!》 《하늘에는 무엇이 있느냐?》 《해와 달, 별이 있고 구름과 바람, 비와 눈이 있습니다. 번개와 우뢰도 있습니다. 신선도 있다는데 아직 저는 본 일이 없소이다.》 《음, 그렇겠지.… 그래 하늘은 좁으냐 넓으냐?》 《북대봉골짝 하늘은 좁고 인간세상의 하늘은 넓었습니다.》 《하늘은 끝이 없이 넓으니라. 사람의 마음도 그렇게 넓어야 하느니라.》 《예,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글자를 짚어라. 따―지.》 《따―지.》 《땅우에는 무엇이 있느냐?》 《산이 있고 골짜기가 있고 나무와 짐승들이 있고 바위와 폭포가 있습니다. 조, 기장, 콩, 팥따위도 있고 꽃도 있습니다. 북대봉골짝밖에는 넓은 벌판에 벼도 있고 큰 강도 있습니다. 그리구…》 《제일 귀중한것을 먼저 말해야지. 땅우에서는 사람들이 살고있다. 사람은 이 세상 만물가운데서 가장 귀중하다. 우리가 먹는것, 입는것을 다
사람이 만들어내니까. 그래서 옛날부터 사람을 만물의 령장이라고 했다.》 《령장이란 무슨 뜻입니까?》 《이 세상 모든것들중에서 가장 힘이 있고 가장 슬기롭고 의로운걸 갖추고있다는것을 말하는것이다.》 《그럼 성천부사나 조참봉따위도 그런 축에 들수 있습니까? 그리구 남의 나라를 먹겠다는 왜놈들을 어떻게 만물의 령장이라고 할수 있습니까?》 황바위는 선생의 이 말이 맞지 않는다고 항의하듯이 물었다. 림중량은 황바위를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이녀석이 한가지를 배워서 열, 백가지를 깨닫는 놈이로구나.) 림중량은 기뻤다. 《그렇다. 사람의 모습을 했다고 해서 다 만물의 령장은 아닌것이다. 사모관대를 하고 큰갓을 쓰고 백성들을 디디고서서 호통질이나 하며 그들의
피땀을 짜내는자들이 어떻게 만물의 령장이 되겠느냐. 그리고 남의 나라에 총칼을 들고 덤벼드는 도적놈들이 어떻게 만물의 령장이겠느냐. 네 말이
옳다. 그런자들은 다 사람의 탈을 쓴 짐승들이다. 나라를 사랑하는 우리 백성들이 진짜 사람들이지. 바로 너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같은 사람들
말이다. 너는 그런 할아버지, 아버지를 가진것을 자랑으로 알아야 한다. 이런것을 잘 알아야 네가 무엇을 위해 돌팔매질을 잘 익혀야 하는지도 더
똑똑히 알게 될것이다. 그리구 그 돌멩이에 조선백성의 넋이 박히지 못할 때 그 돌멩이는 노리는 원쑤를 똑바로 때려맞힐수 없는 한갖 막돌로
되고말것이라는것도 똑똑히 알아두어라. 알겠느냐?》 《예.》 《따지》자 한자를 놓고 배우면서도 거기서 새라새로이 눈을 뜨고 새 정신이 들고 새 결심이 굳어지는 황바위는 이밤 늘씬 제 키가 커지고
가슴이 넓어지는것 같았다. 어느덧 초불봉머리우로 은하수가 기울고 하늘에는 촘촘히도 진주보석별들이 박혀 맑은 정기를 뿜었다. 이밤 새 눈이 밝아지고 가슴이 넓어진것은 아들만이 아니였다. 문밖의 추녀밑에서 지팽이를 짚고서서 방안의 글소리를 들으며 황봉은 생각하였다. (사람을 알자면 소금 한섬을 함께 먹어보아야 안다고 했는데 저 량반은 만나자마자 모진 세상 비바람에 쫓기여 이 심심산골에 구겨박힌 인생들의
마음속까지도 어쩌면 그리도 속속들이 꿰뚫어보는것일가?) 한자의 글자속에 세상리치를 그렇게도 알기 쉽고 뚜렷하고 뜨겁게 담아 자기와 자기 아들의 가슴에 안겨주는 림중량의 열기띤 목소리
한마디한마디를 놓칠세라 아버지도 귀와 마음을 강구고있었다. 하여 인간세상에서 버림받았던 허탈감으로 비여만 가던 그의 가슴속에 훈훈한 봄기운이
스며들고있는것이다. 특히 돌멩이에 조선백성의 넋이 박혀야 한다는 그의 말에 생각이 더 깊어졌다. 방안에서는 다시 아들과 림중량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는 지팽이끝을 더 문가까이로 다가세웠다. 《그러구보면 사람의 값이란 벼슬자리나 재물에 있는것이 아니라 제몫 특히는 나라앞에 지닌 제몫을 어떻게 해내는가에 달려있는것이다.
알겠느냐?》 《아저씨, 저도 제몫은 할수 있습니다.》 《어떻게?》 《왜놈이 달려들면 백놈쯤은 때려잡을수 있습니다.》 《뭐, 백놈?》 문밖의 아버지가 와뜰 놀랐다. 《하하하, 왜놈 백놈이라…》 방안에서는 림중량의 호걸스런 웃음소리가 터졌다. 《그것도 괜찮은 몫이다. 그런데 왜놈은 몇백놈이 아니라 수만, 수십만명이 달려들텐데 어쩐다?》 《어떻게 그 많은 놈들을 혼자서야 다 잡겠습니까.》 《그러니 백성들이 모다붙어 함께 그놈들을 때려잡아야 한다. 예로부터 백성들이 힘을 모으면 하늘도 이긴다고 했느니라.》 《우리 백성들에게는 칼도 총도 없는데 어떻게 그놈들을 다 잡을수 있습니까?》 《물론 총도 칼도 있어야지. 또 그것을 능숙하게 쓸줄도 알아야 하구.… 그러나 아무리 총질, 칼질을 잘한다 해도 그것만 가지고는 싸움에서
이길수 없다.》 《예, 그럼?…》 《싸움에서 이기자면 백성들이 한마음이 되여 뭉쳐서 일떠서야 한다. 내 땅에 기여든 놈들을 한놈도 살려보내지 않겠다는 불같은 마음으로
말이다. 이것이 제일 큰힘이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는 외적이 쳐들어올 때마다 이렇게 해서 원쑤를 쳐물리쳤다. 백성들이 한마음만 되면 아무리
악독한 원쑤앞에서도 무서울게 없고 그속에서 장수도 나오고 기기묘묘한 전법도 생기고 병장기도 마련되게 된다.》 황바위의 두눈이 황황히 빛났다. 《장수란 별다른 사람이 아니다. 이런 리치를 잘 깨닫는다면 너도 장수가 될수 있다. 내 전날에도 말하지 않더냐?》 《그렇지만 저같은 사람이야 어떻게?…》 《뭐? 내 너에게 공연한 글을 가르치나부다.》 갑자기 림중량의 목소리가 엄엄해졌다. 《예?》 《나는 네가 세상리치에 하루빨리 눈뜨기를 바라서 종아리까지 치면서 너를 가르치고있다. 그런데…》 이때 뜻밖에도 황바위의 오돌찬 목소리가 챙챙하게 울렸다. 《아저씨, 마음놓으십시오. 왜놈들이 덤벼들면 제 그놈들앞에서 조선백성구실을 단단히 하겠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손자,
아들노릇을 꼭 하겠습니다. 그대신 아저씨는 꼭 장수가 돼서 왜놈들을 쳐물리쳐주십시오. 제 그땐 차돌구럭을 메고 아저씨와 함께 달려나가 왜놈에게
한방의 헛방도 치지 않겠습니다.》 《원, 녀석두…》 관자노리를 푸들거리며 문밖에서 황봉이가 바라보는 북대봉 뫼부리들이 이 새벽 각별히도 유정했다. 다음날 쩡쩡 쇠메질소리와 풀무질소리가 북대봉골짝에 울려퍼졌다. 벌겋게 달궈진 쇠붙이가 림중량의 쇠메에 두들겨지고 피시식피시식 그것을 황바위가 물에 잠가 식혀들며 벙글거렸다. 이렇게 만들어진 열두개의 표창이 황바위의 손에서 날아올라 이번에는 아름드리 피나무강대줄기들을 벌둥지처럼 만들어놓았다. 황바위는 낮에는 림중량과 무술훈련과 밭일을 하고 밤에는 글을 읽었다. 심혈을 쏟아붓는 림중량의 불같은 정력과 뜨거운 사랑속에 하나를 미루어
열을 깨닫는 황바위의 총명과 이악성은 글에서도 무술에서도 림중량도 놀랄만큼 하루가 다르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던 날 황바위와 림중량은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성천부사 아들놈이 이 책을 3년 석달 걸려서 배웠다는데 그렇게 하면 글은 배워서 언제 써먹겠습니까?》 《옳은 말이다. 그런자들은 글을 배우는것이 아니라 가지고 노는것이니라.》 그후 황바위는 땅바닥에다도 바위돌에다도 배운 글자를 익혀가며 한달남짓한 동안에 《천자문》을 다 통달했다. 림중량은 놀랍고 기뻤다.
바지가랭이에다 모래를 넣고 뛰고 달리고 벼랑을 타고오르는데서도 그가 갖추고있는 용감성, 불굴성, 대담성으로 하여 림중량을 경탄시켰다. 황바위는
그날 밤길에서 교훈을 스스로 찾고 밤눈익히기에도 애를 썼다. 진리에 눈을 뜨는 인간의 심혼이 어떻게 뜨겁게 불타는가 하는것을 림중량은 감동속에
지켜보았다. 이리하여 궂은 세상의 때가 묻지 않아 백지장처럼 순결한 황바위의 넋속에는 날을 따라 값진것들이 알박혀갔다. 림중량은 또 편지를 써서 서설봉에게 보내여 《동몽요결》(소년학습교재)을 가져오게 하였는데 이번에는 그런 사연이 적혀있는 편지를 읽게 된
아들을 보는 황봉은 날듯이 기뻤다. 내 아들이지만 새로 태여난 아들만 같아서 대견하고 기뻤다. 《동몽요결》을 가르치는 한편 황바위가 불어대는 풀무에 쇠를 녹이여 표창과 말편자를 만들며 림중량이 들려준 애국명장들인 을지문덕, 강감찬과
온달장군의 이야기는 황바위에게 각별히 큰 감명을 주어 그의 심혼속에 지워지지 않는것으로 안겨졌다. 특히 버림받은 천한 백성이였으며 《바보온달》로 량반벼슬아치들의 조소를 받던 온달이 이악하게 배우고 무술을 닦은 뒤에 대고구려의 명장이 된
이야기는 그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백발을 흩날릴 때까지 외적이 쳐들어올 때마다 맨 앞장에 서서 나라와 백성을 지켜냈고 세상을 떠날 때 사랑하는
조국과 백성곁을 차마 떠날수 없어 그의 관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는 전설이야기대목에서 황바위는 풀무대를 으스러지게 잡고 저도모르게
《온달장군!》 하고 큰소리로 탄성을 질러서 림중량을 놀라게까지 했다. 이러는 동안에 어느덧 북대봉은 흰눈을 뒤집어쓰게 되였고 사나운 눈바람속의 훈련은 더욱 엄혹해졌다. 아슬한 눈벼랑을 황바위와 함께 날아넘고
날아내리는것은 림중량이 황바위에게뿐아니라 자기자신에게도 들이대는 강한 요구였으며 국난앞에 자기를 준비시키는 투쟁이기도 했다. 오늘도 메돼지사냥과 함께 산등을 타는 훈련을 마치고 그들이 돌아왔을 때 서일이 애젊은 초립동이 신욱이와 함께 할아버지의 편지와 조선의 병서
《동국병감》을 가지고와있었다.(《동국병감》은 우리 나라 명장들이 우리 실정에 맞는 전술, 전법으로 적을 치고 나라를 지켜낸 경험들을 묶은
책이다.) 서설봉은 편지에서 국난을 앞에 두고 그 심산속에서 나라의 기둥감들을 키우려는 림중량의 애국지성에 경의를 보내면서 《동국병감》과 함께
외동손자에게 검을 들려보내니 그 칼날에 《멸왜보국》(왜놈을 치고 나라를 보위하는것)의 자기 념원도 함께 벼려지게 해달라고 썼었다. 그러면서 날로 위급해지는 나라형편을 생각하면 밥숟가락을 들어도 모래알을 깨무는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앞날이 촉망되는 자기의 제자 신욱이도
함께 보낸다고 했다. 신욱이는 서해가 대동강기슭에 사는 젊은이로서 서설봉의 고결한 인품과 검술을 흠모하여 찾아와 배우는 초립동이였다. 그날부터 북대봉속의 범골엔 불타는 애국심으로 심장을 끓이는 세 젊은이와 림중량의 무술훈련으로 밤과 낮이 따로 없었다. 황바위의 표창던지기, 서일의 검술, 신욱의 궁술 그리고 오추마와 설화마 두필의 나는듯 하는 발굽소리속에 그들의 무술과 애국단심은 날을 따라
강철로 다져졌다. 겨울을 지내고 서일과 신욱이가 떠나던 날 림중량은 그들을 이끌고 소소리높은 북대봉상상봉으로 올랐다. 어느 사이에 눈보라는 멎고 그들의 시야에는 아득히 조국의 산야가 펼쳐졌다. 멀리 연연히 뻗은 산봉우리들, 천야만야 깎아지른듯한 절벽들,
길게 뻗고 넓게 펼쳐진 강줄기며 옥토벌들… 그것을 가리키는 림중량의 목소리는 확확 열기를 내뿜었다. 《얼마나 아름다운 우리 강산이냐. 저 산굽이, 물굽이마다에서 우리의 부모형제들이 이 땅을 가꾸며 살고있다. 몇천년을 이 땅에서 살아오면서 온 세상에 찬란한 문화를 빛내여온 우리 나라가 아니냐. 그런데 다른 놈도 아닌 바로 우리 조상들덕으로 글을
배웠고 인간의 체모를 갖추게 된 바다건너 오랑캐놈들에게 오늘은 잘못하다간 수모를 받게 될 처지에 이르렀으니 이 아니 절통한 노릇이냐. 더우기 이 위급한 때 우리 조정에서는 당파싸움으로 서로 죽이기내기만 하고있으니 실로 가슴아픈 일이다. 나라에 불의지변이 일어날것은 뻔한데
너희들은 잠시도 마음의 탕개를 풀어서는 안된다.》 림중량의 목소리는 절절했다. 그는 손을 들어 조국의 산야를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내 오늘 너희들에게 하고싶은 말이 있다. 저 산과 물굽이 그 어디에나 우리 백성들이 있는 곳에서는 애국심의 불씨들이 타고있다. 너희들은
그 불씨들을 모아서 큰 불길로 만들어낼줄 알아야 한다. 일찌기 서설봉선생께서는 나에게 〈백성들에게 제 겨레의 넋이 살아있는 나라는 결코 망하는
법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 겨레의 넋이란 바로 우리 백성들의 가슴에 간직된 애국의 불씨다. 알겠느냐?》 《예.》 세 젊은이들의 웅글진 대답소리는 북대봉을 타고내려 먼 산발, 강발들로 메아리쳐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