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 회)

제 8 장

심산속에 묻힌 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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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대봉의 봄은 초불봉의 진달래로부터 시작되였다.

오늘 림중량은 황바위와 함께 비탈밭을 일구고 씨를 뿌린 다음 두릅도 한바구니 따서 들고 돌아왔다.

《선다님, 초불봉에 진달래가 저렇게 활짝 피였는데 오늘은 거기 가서 소풍을 좀 하지 않으시겠소이까?》

사립문밖에서 기다리고있던 황봉이 말했다.

《그거 참 좋은 생각이요. 그렇게 합시다.》

림중량은 초불봉을 다시한번 바라보았다.

초불봉은 온통 불이 붙는듯 하나의 거대한 초불처럼 붉었다. 이 깊은 골짝에 사는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부자에게 북대봉이 안겨주는 꽃다발치고는 너무나도 컸다.

그 꽃빛갈을 받쳐주는듯 북대봉 송백의 푸른빛은 오늘따라 더 청청도 했다.

《올해에는 더 곱게 핀것 같소이다. 아마 선다님덕분에 새 인생을 맞은 제 자식을 위해서 저렇게 환하게 핀것 같소이다.》

경난많은 사람의 말이란 항상 남의 심정을 흔들어놓는 법이다.

(그렇지, 저렇게 초불봉진달래가 붉은 날이 황바위의 생일날이라지. 그래서 이 아버지가…)

림중량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저렇게 핀 진달래를 황바위가 이 골짝에서 이제 열일곱번째로 맞는셈이군.》

《그렇소이다. 꽃도 곱지만 저 푸르청청한 우리 북대봉의 소나무들은 또 얼마나 좋소이까?》

《그렇소. 우리 강산의 푸른 빛갈은 변치 않는 조선백성의 기상이요.》

림중량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였다.

황봉은 부엌으로 들어가 막걸리자배기를 들고나왔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아래골짜기에서 말울음소리가 들리더니 풍모가 단아한 한 선비가 그들앞으로 급히 달려와 말에서 뛰여내렸다.

《아니, 윤봉이 아닌가! 자네가 웬일로? 우리 아버님께서?…》 하며 림중량이 놀랐다. 그는 림중량의 이웃친구였다.

《춘부장(남의 아버지에 대한 존칭)께서 병환이…》

윤봉은 말고삐를 잡고 머뭇거렸다.

《일찍 알려주려고 했는데 여기에 들어와있는 아드님의 뜻을 아시고는 굳이 말리시는 바람에…》

《그래 병세가 아주 위급하신가?》

림중량이 다시 다우쳐물어도 윤봉은 머뭇거리기만 했다.

《이 사람, 숨기지 말고 말하게. 그럴바에야 무엇하려 예까지 왔나?》

림중량이 따지고묻자 선비는 힘들게 말했다.

《사실은 위…위급하시네.》

《뭐?》

림중량은 북대봉골짝 좁은 하늘을 치올려보았다.

《아―》

그의 신음소리는 나라와 부모에게 한꺼번에 덮쳐든 이 불행을 다 받아안지 못하는 통탄함과도 같았다.

황봉은 부엌문밖에서 술자배기를 안은채 어찌할바를 몰라했다. 황바위는 불안이 잔뜩 실린 눈으로 림중량을 지켜봤다. 그의 아버지의 병이 자기가 림중량을 너무 오래동안 붙잡고있었기때문에 그렇게 된것만 같아 어쩔줄을 몰라했다. 그런 아버지를 두고와서 자기 부자를 위해 밤낮없이 이 깊은 산골짝에서 전심전력을 다해준 림중량이 새삼스럽게 눈물겹도록 고마왔다.

림중량은 떠날 차비를 서둘렀다. 그러다가 자기를 떠나보내게 된 서글퍼진 심정으로 어쩔줄을 몰라하는 황봉부자를 본 림중량은 다시한번 초불봉진달래를 바라보더니 《황서방, 그 자배기를 내려놓소.》 했다. 그리고는 윤봉이를 토방에 앉히고 그에게 황봉부자를 소개했다.

꾸벅 인사를 하는 황바위를 눈여겨보는 윤봉은 그의 정기도는 두 눈과 준수한 모습을 보자 이런 영특한 인재를 두어두고 올수 없어서 림중량이 여기에 오래동안 머물러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대뜸 들었다.

윤봉은 림중량의 죽마지우(어릴적친구)였다. 림중량의 아버지에게서 글도 배우고 검술도 함께 닦은 사람으로서 림중량과는 친형제같은 사이였다.

림중량의 애국적지조와 의기 그리고 뛰여난 무예를 사랑하여 그와 함께 나라의 부패한 정사를 두고 가슴아파하면서 울분도 터뜨리고 악을 선의 탈바가지로 바꿔쓴 지방구실아치들에게 준절한 경고도 함께 주어 중화아근 백성들의 신망이 높은 선비였다.

황봉이 초불봉에 가지고가자던 기장술을 한사발 그득 부어 림중량에게 권했다. 두볼의 구레나룻이 크게 씰룩거렸다.

《선다님, 이런 때 무슨 말로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소이다. 이제는 저희들 뒤걱정 마시고 어서 떠나시여 그동안 저희들때문에 못하신 효성을 다하사이다.》

림중량은 그 한사발 술을 많은 생각을 담아 쭉 들이키더니 황바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바위야, 이 아저씨에게 한사발 올려라.》

술사발을 받아든 윤봉에게 림중량은 《자네도 이 젊은이를 잘 보아두게. 서설봉선생께서도 큰 앞날을 기대하시는 젊은일세.》 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온김에 이들부자에게 그동안의 나라형편을 좀 이야기해주고 떠나주게. 이 심심산골에 살면서도 나라와 백성을 두고 가슴을 조이는 사람들일세.》

그의 말에 윤봉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얼굴을 찌프리며 말했다.

《란리가 눈앞에 다가오고있네. 내 얼마전에 볼일이 있어서 서울에 갔다왔는데… 날로 강성해지는 왜놈들이 이제는 조선에서도 저희 나라에 통사를 보내라고 을러메고있다네.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거듭 그 겐소라는 중놈을 사신으로 보내왔는데 그 나라 〈관백〉이라는자가 우리 상감님과 조정에 보내는 국서라는것이 오만무례하기 그지없다누만. 그런데두 나서서 그를 반박하는 대신들은 거의 없고 그놈들 요구대로 통사를 보내서 좋게 지내자는 의견들이 나오고있다니 이거 가슴칠 노릇 아닌가.

결국 이제는 우리가 그놈들에게 덜미를 잡히워 끌려가는판이지. 참 기가 막혀서…》

윤봉은 술사발을 들이키고나서 더 격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통사를 보내는 일을 놓고도 왜놈을 잘못 건드리다가는 자는 범 코구멍 쑤시는짓이라고 조심해야 한다고 하는 대감네도 있고 우리를 대국으로 모셔온 왜국이 감히 어찌겠느냐고 큰소리를 치는 량반님네도 있다니 일은 당하고야말걸세. 그놈의 동이요 서요 하는 당파싸움때문에 한쪽에서 〈콩이요.〉하면 한쪽에서는 덮어놓고 〈아니다, 팥이다.〉하는 판이니까.…》

윤봉은 긴 한숨을 쉬고나서 서울에서 듣고온 이야기를 더 들려주었다.

《내 이번에 왜국의 우두머리인 도요도미의 이야기를 좀 듣고왔는데 그놈이 교활하기 그지없고 천하에 없는 독종이라누만. 왜놈들은 〈천황〉이란 사람에게는 허울좋은 감투만 씌워놓고 〈막부〉라는것을 만들어 사무라이들가운데서 힘이 센 놈이 좌지우지하게 했는데 120여년전부터 서로 싸움질로 란리판을 벌리다가 도요도미란 놈이 교묘한 수단을 써서 그 란리를 평정했다누만.

그런데 그놈이 어찌나 교활한 놈인지 제일 권세가 센 오다라는 놈앞에서 여섯개이던 자기 손가락 하나를 썩둑 베여 충정을 맹세했는데 그자가 비명에 죽자 그자리를 타고앉았다누만. 그후 오사까성을 크게 꾸려놓고 〈서경〉이라고 부르며 온 나라를 호령하는데 평이라던 제 성까지 풍신(도요도미)이라고 고치고 스스로 〈관백〉이라는 왜국최고의 벼슬까지 타고앉아서 좌지우지한다누만.》

《그 졸개놈들도 포악하기 그지없다는데…》

림중량이 말하자 《그놈들은 얼굴이나 몸뚱이에 칼자국이 많은 놈을 〈대장〉으로 친다는데 제 주인이 죽으면 따라 배를 갈라죽는 놈들이라네. 그런데 그런 놈들을 거느리고 우리 나라에 쳐들어오려구 조총이라는것까지 사들이고 싸움배까지 만든다니 야단 아닌가. 그런데다가 도요도미는 〈양딸〉을 많이 길러서 세력이 큰 령주놈들에게 주어 그들을 모두 사위로 삼아 제 신변을 튼튼히 하고있다니 얼마나 교활한 놈인가. 일은 꼭 그놈때문에 당하고말 일인데…》하고 윤봉이 말했다.

황봉부자는 놀랍다못해 억이 막혀 윤봉에게서 눈을 못떼고 림중량은 입을 꽉 다물고 눈을 감은채 그린듯이 앉아있었다.

나라의 형편은 이렇게 위급한데 거기에다가 자기는 부친의 친환까지 위급한것이다. 만약 부친상을 당하면 상복을 입는 3년동안은 손에 칼을 들고 출전할수 없는것이 나라의 법인것이다. 그의 심정이 느껴져 윤봉이도 잠시 말을 끊었다가 침통한 목소리로 또 하나의 절통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림공! 국난은 왜적에게서뿐만이 아니네. 요즈음 조정안이 또 벌컥 뒤집히는 류혈참극이 벌어졌네.》

《뭐라구?》

림중량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권세를 잡고있던 동인파의 한사람인 정여립이 〈역모〉(왕실전복음모)혐의로 몰려서 그와 관련된 숱한 동인파사람들이 참변을 당하고 귀양살이를 가는것을 내 눈으로 보고왔네.》

《아, 나라가 위급하구나.》

림중량은 토방바닥을 쳤다. 그들의 마음인양 북대봉하늘에 밀려든 먹장구름속에서 시뻘건 번개가 비수처럼 번쩍하더니 쿠르릉…쿵! 쾅! 벼락을 쳤다.

림중량은 휘청거리는 발길로 다가가 오리나무에 매둔 오추마 고삐를 풀었다. 그는 황바위를 돌아보았다. 마치 무거운 국난의 짐을 그 어린 어깨우에 지워놓고 가기라도 하는 마음인듯 그에게 다시한번 타일렀다.

《황바위야! 비바람 맞지 않고 피는 꽃이란 없는 법이다. 뜻이 큰 사람에게는 큰 길이 열리는 법이다. 일은 당한 일인데 앞으로 서일이, 신욱이들과 손을 굳게 잡아라.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조선백성이 있는 곳에는 어데서나 애국의 불씨가 타고있다는것을 잊지 말어라.》

《예, 알겠소이다.》

황봉부자를 돌아보고난 림중량은 오추마에 올라탔다. 인간세상의 정에 목마르던 황봉부자의 목을 푹 추겨주고가는 그는 세상리치에 밝고 글 잘하고 칼 잘쓰고 활 잘쏘며 의리깊고 인정깊은 사람이였다. 심산속에 막돌로 묻히였던 인재를 옥돌로 다듬어 인생의 보검을 들려주고 훨훨 나는 수리개의 날개를 달아주고 떠나는 사람이였다.

헤여져 섭섭한것은 인간의 상정이지만 림중량이 안겨주고 가는것이 이 골짝 가득 채워준 귀중하고 큰것이여서 황봉의 마음은 어제날처럼 외롭지 않았다.

림중량을 바래워주러 간 아들이 해가 저무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할만큼 황봉은 아들걱정이 티끌만큼도 없었다.

(그놈 성미에 선다님을 혼자 보낼리가 없지.…)

심산속에 묻혀사는 고독을 타고난 운명으로만 생각하던 자기가 인간세상 한복판에 아들과 함께 서있다는것을 깨달은 황봉이였다. 그는 림중량이 이 골짜기에 찾아오던 날 잎이 떨어지던 산오동에 새 잎망울이 부풀고있는것을 이윽토록 눈여겨보고있었다.

범골을 떠난 림중량은 350리길을 말갈기를 부여잡고 집으로 급히 달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불쑥 큰 구럭을 메고 먼저 나타난 황바위를 본 그는 입을 딱 벌리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초신감발을 가뜬히 차렸는데 바지저고리는 가시덤불에 긁혀 너덜너덜 찢겨져있었다. 림중량이 알지 못하게 숲속길을 질러 뒤따라온것이 분명했다.

《원, 녀석두…》

림중량은 그의 어깨를 꽉 쥐여주었을뿐 다른 말을 안했다.

그런데 두번다시 그를 놀라게 한것은 아버지의 병세가 다행히도 좀 누그러져서 림중량이 안도의 숨을 내쉬는것을 보자 황바위는 그길로 훌쩍 또 사라지고만것이였다. 그런데 림중량의 어린 아들을 슬그머니 불러내여 큰 꿀단지를 안겨주고 갔다는것을 알고 윤봉이 감탄해서 《거, 보통아이가 아니군.》 하는 말에 림중량은 《그런 앨세.》했을뿐 다른 말이 없었다.

그러나 먼길을 뒤따라와서 자기 눈으로 아버지의 병세를 보고서야 마음을 놓고 돌아간 그의 인정미와 의리에 가슴이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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