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지막회)
금필은 평양성에 들어가 오래 머물러있지 못하였다.
압록강북쪽 료동의 정세가 그사이 더 엄중해진때문이였다.
료(거란족)나라에 밀리워 자취를 감추었던 돌궐족들이 료의 주력이 증원으로 진격해내려간 사이에 다시금 수습해가지고 료동으로 기습해내려온 까닭이였다. 이들은 그동안에 료동북쪽 초원일대의 여러 종족들을 누르고 일시에 번성해서 또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돌린것이였다. 이들의 목적은 료동을 타고앉자는것이였다. 이들은 고려가 료동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는것을 알고있었으므로 료동에 내려온 즉시로 고려를 위협해나섰다. 압록강대안에까지 나타나 금시 강을 건너오려는듯이 위세를 돋구기까지 하였다. 그들의 행동은 저들이 최소한 압록강을 건너가지는 않을터이니 그리 알고 고려도 압록강북쪽땅은 단념하라는 뜻을 담고있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쳐내려갈것이라는 위협으로서 이것은 도저히 용납할수 없는것이였다.
왕건은 금필에게 돌궐족을 눌러버릴것을 위임했다. 할수만 있다면 압록강을 건너 들어가서라도 버릇을 가르치라고 했다.
수십년간의 전쟁을 치른지 얼마 되지 않는 고려에 있어서 이것은 힘에 부친 일이였다.
그러나 나라의 안녕을 위해서는 어쩔수없이 대응을 하여야 했다.
하여 금필은 평양성 북쪽에만 국한시켜 군사를 일으키기로 했다.
발해유민들이 기대이상으로 적극 응해나왔다. 그들은 저들의 터전이던 이전의 발해땅에 누구보다 애착이 강했던것이다.
금필은 왕계를 비롯한 여러 젊은 장수들을 지휘하여 북방방위에 대처하러 떠났다.
그의 나이도 이제는 륙순을 넘고있었다. 허나 그는 백발을 날리며 주저없이 전장으로 향하였다.
통일을 이룩한 고려가 평화로이 생업을 누리게 하고저 그는 인생의 말년에도 말우에서 내리지 않고있었다.
금필은 의주와 삭주, 초산과 만포, 자성에까지 이르는 근 천여리의 북방전연을 종횡무진하면서 신생고려의 안전을 지켰다.
그해 가을 왕건이 단군묘를 찾을 때에도 금필은 함께 동행하지 못하고 북방을 지키였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생전에 단군묘를 찾아보지 못하는 한을 남기였다.
단군묘는 평양성에서 대동강을 거슬러 60리쯤 올라가서 강대안에 붙은 다음 5리를 가까이하는 곳에 솟아있는 박달대산(지금의 대박산)앞자락에 자리잡고있었다.
금필은 고려를 건립한 해 가을에 동북방을 평정하러 원정할 때 성천고을을 바라고 지나가면서도 이곳을 알지 못하여 지나친것을 이후에 알고 여간 후회하지 않았었다. 성천고을에서 단군묘까지는 50리도 채 되지 않는 거리였던것이다.
당시의 사람들과는 반대로 흐르는 세월속에 이후의 사람들은 단군이 전설로 꾸며진 신화속의 인물이라는것으로 외곡되게 인식하고있었다. 고조선을 세운 단군이 실재한 인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세상에 그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5천여년전의 단군의 뼈가 그대로 오늘까지 보존되여있다는 사실을 그가 알았더라면 그는 무덤을 차고 일어나 한달음에 달려왔으리라.
허나 이것은 후날에 알게 된 이야기이고 당시의 금필은 그저 겨레의 첫 조상묘를 찾아뵙지 못한 아쉬움으로 가슴을 태웠을뿐이였다.
941년 4월에 들어서면서 금필은 그만 병석에 눕게 되였다. 늙은 몸으로 쉬지 않고 일한데서 온 로환이였다. 자성땅 압록강가에서 쓰러진 금필은 즉시 송악으로 실려왔다.
왕건이 지몽과 술희를 수행하고 금필의 집을 찾아왔다.
《금필아우가 병석에 들다니, 이 무슨 청천벽력같은 일이요?》
왕건은 너무 안타까와 가슴을 쥐여뜯으며 부르짖었다.
《페하, 페하를 상심케 하여… 죄송하오이다.》
금필은 일어날 맥조차 없어 누운채로 왕건의 두손만 잡아쓸었다.
왕건도 그사이 몰라보게 수척해져있었다.
금필은 그것이 두해전 왕후 류씨를 먼저 떠나보낸 그의 마음속 아픔에서 그리된것임을 상기하자 가슴이 칼로 저며내듯 저려왔다.
왕후 류씨가 세상을 하직하자 왕건은 너무도 가슴이 미여져 며칠을 통곡하였다. 온 조정이 침식을 잊고 울음에 잠기였었다.
금필도 부인 림씨와 함께 목놓아울었다.
말없이 웃음지으며 주변의 모두에게 아낌없이 정을 나누어주어온 류씨부인이였다.
금필은 그를 형수라기보다 손우누이로 따랐고 부인 림씨도 언니로 삼고 살아왔다.
나라를 일떠세우고 통일을 이루어낸 왕건의 뒤를 말없이 뒤받쳐온 그, 왕건이 정략을 추구해 여러 부인을 거느린탓에 때로 시끄러운 일들도 적지 않게 잦았으나 그 모든 세파를 류씨는 한몸으로 막아 조용히 처리해왔었다.
그것이 나라를 세우고 불구는 큰 일과 련결된것이기에 자제하며 참고 견디는데 한생을 바쳐온 그였다. 가슴속을 헤쳐보면 그간에 타서 쌓인 고뇌의 재가 산처럼 쌓여있으리라.
누구보다 이 점을 잘 알고있었기에 왕건의 마음은 더더욱 아팠을것이였다.
금필은 왕건이 왕후 류씨가 죽은 뒤로 심신이 눈에 띄우게 쇠약해지고있는것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아직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왕건은 눈물을 머금고 령을 내리였다.
《오늘부터 어의는 금필아우곁에 있도록 하라.》
《그래서는 아니되오이다. 지금이야말로 페하의 신상을 더 잘 지켜야 할 때오이다. 부디… 고정하소서!》
금필은 만류했으나 왕건은 막무가내였다.
《내가 아우를 일만 시켰도다. 나이를 생각지 않고 무리하게 부리기만 했도다. 후회가 막심하오, 아우!…》
왕건은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령통사에다 백날불공을 올리도록 해야겠소. 천지신명이 우리 아우를 굽어살피게 온갖 지성을 다해야 하겠소. 내봉원사! 그렇게 해야지요!》
《알아들었사오이다, 페하!》
지몽이 슬픈 마음을 억누르며 조용히 대답했다. 그는 금필의 명이 다된것을 인차 알아보았다.
당대에 다시없는 명인 하나가 지금 날개를 접으려 하고있었다.
지몽은 목이 메여올라 눈물만 흘리다가 으왕 하고 오열을 터뜨리며 밖으로 튀여나가는 술희를 뒤쫓아 나오고말았다.
지몽은 술희와 부둥켜안고 소리내여 울었다.
고려의 기둥 하나가 쓰러지는 애석한 순간이였다.
나무는 죽어도 기둥은 지붕을 받친다. 죽어서도 제 몫을 다하는것이 기둥이다.
금필은 쓰러져도 그가 한 일은 고려의 기틀을 언제까지건 떠받치고 있을것이였다.
지몽은 그것을 믿어의심치 않았다.
고려가 건국한 초엽부터 왕건의 슬하에서 일해온 지몽은 왕건의 의형제들인 금필과 술희, 신숭겸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다.
술희는 덜렁덜렁하는것 같으면서도 예지가 넘치는 쾌남아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하고 배포가 유하게 놀아대는것이 술희의 장점이였다.
그는 무예를 하여도 주로 편곤이나 철퇴를 휘둘러 박살내기를 좋아하는 즉흥형이였다. 뭐든 속에 품고는 참지 못하는 직통배기이고 소문난 장난꾸러기였다. 그가 거처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웃음거리가 생기군 하였다.
그에 비하면 숭겸은 정반대였다. 그는 매사에 까근까근했고 좀처럼 속을 드러내지 않았다. 술희가 열린 형이라면 숭겸은 닫긴 형이였다.
숭겸이 심사숙고하는 형이라 하여 오밀조밀 타산이 오래고 느린 사람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그는 생각은 치밀하게 하지만 뭐든 판단하고 결심하고 행동에 옮기는데서 그만큼 민첩한 사람도 드물었다.
왕건을 맘에 두고서도 제잡담하고 궁예에게 가붙어 그의 한쪽팔이 되였던것은 왕건의 정적인 궁예의 인끔을 속속들이 파헤쳐보고 그의 약점을 잘 알아서 왕건을 측면에서 도우려는 속빠른 계산을 하고 옮긴 행동이였다.
공산싸움에서 견훤의 포위에 든 그 경각의 시각에 왕건을 빼돌리고 그로 가장하고 나선것만 봐도 그의 결심과 행동이 얼마나 빠른가를 알수 있는것이다.
평시에는 앉았던 자리에 풀도 나지 않을 사람이라는 매운 뒤소리를 들을 정도로 쪽 빼고 툭툭 터는 형인 반면에 의로운 일에는 목이 꺾어져도 마른 곳, 진 곳 가리지 않고 뛰여드는 정열인이였다.
금필은 고정하고 인정이 무른데서 이들과 표가 났다.
무예에 한해서는 숭겸이 언월도인데 비해 금필은 쌍검도였다.
금필이 숭겸이나 술희보다 앞서는것은 병법의 운영에서였다. 지금껏 싸움한것을 보면 알수 있는것처럼 금필의 지략은 왕건과 거의 짝지지 않았다.
고려군이 누빈 전장의 갈피마다에 왕건과 함께 한 싸움은 말할것도 없고 왕건의 령으로 진행한 싸움의 대부분은 금필자신이 주동적으로 내놓은 방안대로 싸워 이긴것들이였다. 어느 싸움이든 그 총지휘는 금필의 몫이 되군 하였다.
금필의 특징은 남을 속일줄 모르는 고지식함이라고 해야 할것이였다.
아부아첨을 모르는 청렴결백함은 다 그의 고지식한 성품에서부터 나오는것이였다.
그는 거울처럼 투명하고 백지처럼 깨끗한 사람이였다. 그리고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이였다. 의형제 세명이 다 그러하지만 왕건을 받드는데서 금필은 언제나 우위에 서있었다.
지몽은 고려사의 첫시기를 기록해야 할 사명이 자기에게 있다는것을 의식하면서 금필을 위시한 그들 의형제를 다시금 더듬어보고있는것이였다.
그 시각에도 금필은 꺼져가는 생의 초불을 간신히 이어가면서 왕건에게 진언하고있었다.
《페하, 나라의 재정을 류실하지 말아주사이다. 국력이자 군력이온데… 군력을 다져야 할 때에 나같은것을 위해 불공이라니… 당치않은 일인줄 아나이다.》
《군력은 다져야 하고말고. 하지만 나를 막지 마오 . 그대가 불가를 귀히 여기지 않는줄 내 모르는바 아니나 나는 해야겠노라. 심신을 가라앉히는데는 불경만 한게 없소. 민심을 다스리는데도 불경이상 없다는게 짐의 소신이요.》
왕건은 불교를 정책의 수단으로 리용하고있음을 강조하는것이였다.
생의 말년에 이르러 왕건은 불가에 완전히 몸을 담그어버렸다. 왕건의 고조부(강충)가 한생을 불교전파에 바친 래력도 그러하거니와 조부 작제건때부터 부친 룡건 그리고 왕건자신의 소년시절에 이르기까지 대사 도선과의 가정적연고관계는 그를 불교와 떨어질수 없는 존재로 되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제가 자작 지은 저서 《도선비기》의 명구들을 들어가며 송악의 명당자리에 집터까지 잡아주고 태여나기도 전에 자기를《천자》로 예언해준 도선이 바로 중이라는데로부터 왕건은 도선을 숭상하였고 자연히 불교도 숭상하였던것이다. 하기에 그는《도선비기》에 찍혀져있는 명산대처들 외에는 다른 곳에 더는 절간을 짓지 말라는 유언까지 남긴것이였다.
《페하, 불손한 말같사오나 소신은 삼강오륜만 잘 가르쳐도 민심을 다스리리라 생각하나이다.》
금필은 평소의 자기 생각을 기탄없이 터놓았다.
《물론이지. 유학이 가르치는 례의도덕만으로도 나라를 다스릴수 있고말고. 허나 그대처럼 내곁을 떠나려는이들을 대할 때면 인생의 허무함을 금할수가 없단 말이요. 이에 위안이 되는것이 불경이라 그말이요.》
왕건이 비애에 가득찬 표정으로 응답하였다.
《심신이 약해질 때 석가의 교리를 떠올리면 위안이 되는것을 어쩔수가 없구려.》
왕건의 마음이 약해지고있었다. 금필은 그것이 안타까왔다.
《페하, 강심을 가지소서! 이렇게 자리에 눕고보니 거두지 못한 료동이 마음에 걸리오이다. 페하를 받들어 내 좀 더 힘써 일해야 하는것을… 후회막심하오이다.》
《그대는 운명의 시각에조차 북방을 격정하느뇨?》
왕건은 목이 메여 금필을 들여다보았다.
《페하는 해내실것이오이다. 조상의 땅은 반드시… 깨끗이 찾아야 하오이다. 소신의 자식들이 저를 대신해서 페하를 잘 받들것이니 믿어주소이다.》
《알겠소, 잘 알겠다니까!》
《태자께옵서 평양성을 마음에 두고있는것이 안심되오이다.》
금필은 태자의 성장을 곁들어 평양성을 강조하는데로 화제를 돌렸다.
《짐도 그 점에 한해서는 안심하노라. 식렴이 그 사람이 서경천도를 보채는것이 걱정이로다. 천도는 기회를 잘 보아 단행해야 할 중대사가 아닌가?》
《궁예의 오유도 거기서 시작된것이라 해도 틀리는 말이 아닌줄로 아오이다.》
《옳은 말이요, 아우! 서경 천도는 우리 대에 아니되면 다음대에 가서라도 여유있게 기회를 보아가며 시기가 완전히 성숙된 때에 해야 할 일이요. 지금처럼 우선은 부수도로 삼고 차근차근 자리를 굳혀가며 해야 할것이요. 참, 아우! 내가 얼마전에 생각한것인데 이제 좀 있다가 인츰 서경도 수도로 선포하자는것이요. 개경이나 서경이나 다 수도의 지위를 주자는거요.》
《그러면 수도가 둘이 된다는것이온데…》
《둘이 되오. 개경과 서경, 량경을 두는것이요.》
《!…》
금필은 왕건의 생각이 기발하다고 인정했다.
량경, 개경도 서경도 똑같이 고려의 수도라는 뜻이였다. 어느쪽이든 왕이 거처하는 수도면 그만인것이다. 이것은 고구려계승국의 기치를 우선시하는 서경천도파와 남쪽을 중시하는 개경고수파간의 갈등을 상당히 해소시켜주는 결과를 가져올것이였다.
이후로 왕건은 금필과 자주 마주앉아 서경의 지위에 대하여 자주 토론하였으며 운명하기 전에는 이 점을 명백히 하여놓았었다.
《… 서경은 수덕이 순조로와 우리 나라 지맥의 근본이요, 만대왕업의 터전이다. 마땅히 춘하추동 사시절의 중간달에 국왕은 거기에 가서 백일이상 체류함으로써 왕실의 안녕을 도모할것이다.》
《훈요10조》라는 제명으로 된 열가지 항목의 유서에서 다섯번째조항에 쪼아박은 문구였다.
왕건이나 금필은 평양을 단순히 고려국의 일개 수도로서만이 아니라 겨레의 사활이 걸린 정신적지탱점으로 보았다. 그들은 평양이 겨레의 조상이고 시조인 단군이 태여나고 도읍으로 삼은 성지인것을 자각한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인물들이였다.
력사는 이 점에서 다시한번 왕건과 그를 따른이들의 선견지명을 평가하게 되는것이다.
나라를 통합하고 공고히 하는데 전심전력하던 왕건은 943년 5월 66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사실 비범한 지략이나 재능을 타고난 사람은 아니였다. 궁예처럼 왕실자손도 아니였다. 송악산 토배기부호의 자손일뿐 《도선비기》에 씌여진 타고난 왕의 운명을 지닌 그런 인물은 더더욱 아니였다.
단지 국토를 통일하고 겨레가 하나의 통일된 대국으로 뭉쳐살아야 한다는것을 남보다 먼저 깨달은 사람일뿐이였다.
금필도 그러한 선각자들중의 한사람이였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력사의 진리를 깨닫고있었기에 그는 겨레통합을 위한 이 대업에 전념하였으며 그것을 마침내는 성취하였던것이다. 그의 리념과 목적이 통일을 바라는 시대와 인민의 지향에 부합되였기에 그가 성공할수 있은것이였다.
력사는 이런 의미에서 충의를 다한 유금필을 응당하게 평가하고있는것이다.
금필은 왕건보다 두해 앞서 941년 봄에 왕건의 무릎을 베고 조용히 운명하였다.
만산에 무르녹은 봄꽃잎들이 소리없이 떨어져내리며 충신의 죽음을 조상하였다.
금필이 일생토록 왕건을 따른것은 자신의 소망이자 겨레의 넋이고 숙원인 민족통일의 대업을 따른것이였다.
-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