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9 회)
왕건의 평양순행을 환영하는 주연은 평양성 내성의 대동강가 《순수정》이란 루정에서 벌어졌다.
대동문에서 이백쉰걸음정도 강웃쪽으로 성벽을 따라 올라와있는 이 루정은 유사시 내성의 동쪽지휘터로도 리용되고있는 건물이였다.
왕건의 령에 따라 식렴이 평양성을 보수개축하면서 주변의 경치에 어울리게 성벽에 붙여 정자를 지었는데 그 모양이 생각했던것보다 더 기묘해보여 발길이 끊기지 않는 명소가 되였다.
(이 건물이 이후 조선봉건왕조시기부터 오늘까지도 불리우는《련광정》이다.)
이 루정에 올라서면 눈앞의 경치에 자연히 넋을 잃고말것이였다.
발밑으로 흐르는 푸르디푸른 대동강은 마치도 한폭의 거대한 청옥색비단필이 드리운듯 하고 그너머로 아득히 펼쳐진 구룡벌의 경치는 록색주단우에 세워놓은 십장생도를 보는듯 우거지고 날아예는 만물의 신비로운 조화가 작게는 교태를 머금고 재롱을 부리는듯, 크게는 웅장함을 뽐내는듯 늠실늠실 춤을 추고있는 형국이였다.
대동강물이 남으로 흘러내리며 감싸안아올린듯 봉긋봉긋 솟아오른 남산재와 창광재, 안산재의 봉우리들도 절경이지만 반대켠에 북으로 솟구쳐오른 금수산의 들쑹날쑹한 봉우리들은 그 모양이 하도 기묘하고 어여뻐서 입을 다물지 못할 지경이였다.
금수산봉우리를 가리켜 평양성사람들은 모란봉이라고도 불렀다.
한송이 모란꽃이 강물우에 떠있는것 같다 하여 붙인 이름이였다.
《식렴아우가 평양성에 들어앉은 이후로 송악성출입이 영 떠진 리유를 내 이제야 알겠노라.》
술기운에 거나해진 왕건이 기분이 좋은듯 주변경치를 부감하며 새삼스레 한마디 거들었다.
《페하, 그래서 내가 늘 여쭙는것이오이다. 이 좋은 경치를 나 혼자 독차지하고있자니 마음 한구석이 늘 송구하온즉…》
식렴은 이때다 하고 또 한번 서경천도를 들이댈 잡도리를 하였다.
《소신은 그저 페하께옵서 하루빨리 평양성으로 천도하시기를 바랄뿐이오이다. 금필대광도 이 점에서는 저와 같은줄 아오이다.》
《하하하… 또 그 소린가?》
왕건이 금필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늘어난 남쪽의 땅과 인명을 돌보는 일이 아직은 급한 대목이요. 북쪽은 식렴아우가 있어 내 시름을 놓는바이오나… 지금 송악을 훌쩍 뜰수는 없는 일이요. 그 점을 리해해주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뜻이였다.
이전 신라와 후백제사람들의 민심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는것이였다.
고려는 고구려를 이은 나라임이 명백하나 이제는 신라와 후백제까지도 품어안은 나라였다.
삼남의 모든 백성들이 평양이 고구려의 수도였을뿐아니라 고조선의 수도였다는것을 알게 하고 통일고려의 수도로 받아들이게 하는데는 시간이 필요하다는것이 왕건의 견해였다.
왕건의 심중을 누구보다 잘 아는 금필이였다. 왕건이라고 왜 료동으로 진격하고싶지 않으랴. 허나 지금은 그것이 힘에 부친 일이였다.
료동을 차지한 거란은 종횡무진으로 령역을 넓혀나가고있었으나 주변나라들의 항거에 부딪쳐 차츰 기진해지고있었다. 허나 일단 말발굽을 올리고나선 일진광풍의 기세는 아직 사그러지지 않았었다. 그들은 한쪽으론 차지한 지역들을 공고히 하면서 숨을 돌리는 차례로 계속해서 동으로, 서로 끈질기게 령토팽창에로 치닫고있었다.
이런 때에 고려가 옛 고구려땅인 료동만을 바라고 그들과 접전을 하려 한다면 그들은 용납하지 않을것이였다.
십중팔구 그들이 저들의 전령토를 노리고 접어드는것으로 오해하고 필사의 공격을 해나올것이 분명하기때문이였다.
고려가 현재 다시금 군사를 일으키는것도 문제였다. 후삼국통일의 장기전을 치른 뒤 고려는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군력이 모자라는것이였다. 백성들은 이제 더는 전쟁이 없기를 한결같이 바라고있었다.
료동을 되찾기를 바라는것은 대체로 옛 고구려출신사람들과 발해유민들이였다. 후백제와 신라사람들까지 리해를 시켜 일으켜세우는것은 당장에는 힘이 드는 일이였다. 게다가 고려는 당장은 내정에 최대로 힘을 기울여야 할 처지였다. 후백제는 고려에 통합되기는 하였으나 아직은 반감이 깨끗이 가셔지지 않은 상태였다.
금필은 통일이후의 또 한차례의 전투를 이미 예견하고있었다. 그것은 새로이 차지한 후백제의 민심을 바로잡는 전투였다. 새로운 전투는 칼이 아니라 덕으로 해야 하는 전투였다. 겨레가 진짜로 한집안이 되도록 해야 하는 어려운 전투였다.
왕건과 이 점을 미리 의논하고 후백제와의 결전에서 인명의 희생을 최대한 줄이는 방향으로 싸움을 이끌기는 하였으나 역시 희생은 피할수가 없었다. 고려군의 칼에 죽은 후백제군사들의 가족들의 가슴속에 생긴 마음의 상처는 쉽사리 아물지 않는것이였다. 그들을 끌어안는데는 시간이 필요하였다. 세월의 흐름만이 이 상처를 아물게 할수 있었다. 왕식렴의 평양성천도를 지금 당장에 찬성해나서지 못하는 리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금필은 총명한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식렴에게서 일단 옳다고 생각한 일에 대해서는 아무리 웃사람이라 하더라도 집요하게 설득시키려드는 때를 드문히 당하군 하였었다. 그때마다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식렴이 왕건의 정사에 남달리 관심하고 나라의 운명을 두고 왕건을 돕는 마음에서 제 일가견을 펴는것은 리해할수 있는 일이지만 그가 왕건보다 나은 견해일 때는 밀어줘야겠지만 왕건보다 못한 견해일 때는 내놓고 찍어밝혀줘서 리해를 시켜야 하였다. 그 일은 왕건이 아니고 바로 금필이 자신의 몫이였다.
(내가 미처 그 생각을 못했구나. 페하를 돕는다는 사람이…)
금필은 크게 자책했었다.
하여 금필은 후백제통합결전을 치른 뒤 서둘러 식렴과 마주앉았다. 그의 뒤조종으로 당했던 모함따위는 거들지 않았다. 그에게 사리정연하게 견해를 피력했다.
… 지금 거란은 광활한 료하와 중원땅을 놓고 한족과 벌리는 아귀다툼에서 승승장구하고있다. 그들은 우리 고려와도 기어코 끝을 보려고 벼르고있다. 거란과의 싸움은 어쩌면 대를 넘겨가면서 치르어야 할 숙명적인 과제이다. 멀지 않아 압록강이 거란과의 결전장이 될터인데 그러면 평양성은 그 전방이 될것이다.
평양을 당장에 수도로 정했다가 만에 하나 밀리우는 때에는 돌이킬수 없는 결과가 초래될수 있다.… 통합한 후백제와 신라까지도 다시 잃을지 어이 알랴.
그러니 당분간은 평양천도를 미루어야 한다. 그러나 앞으로는 어김없이 천도해야 할것이다.…
식렴은 총명한 사람인지라 인차 금필의 견해에 동감했다. 아울러 이전에 금필을 괴롭혔던 일까지도 재삼 사과했다.
《금필대광! 그때 내 좀… 정신이 나갔던것 같소이다.》
《식렴대광! 그렇게 말을 꼭 해야 되겠소? 우리 고려를 뒤받치고선 보이지 않는 대들보인 식렴공이신데… 공께서 기분을 내느라 얼핏 꼬집어주신것이라 난 이후에도 즐겁게만 회상하나이다. 아닌 말로 욕을 해도 매질을 해도 밉지 않은 그런 사람이 있질 않소.》
《그만하시오. 금필공에겐 내 손을 들었소! 정말이지 금필공은 당대에 흔치 않은 인걸이요! 하하하!》
둘은 가벼운 마음으로 헤여졌었다.…
왕건도 그들사이의 화해를 아는지라 긴 말은 하지 않았다.
《식렴아우! 그대는 내 마음을 알고도 남음이 있으리니 지금은 우리 태자께서 평양성에 마음을 붙이도록 하는데나 마음을 써주시오.》
《알아들었소이다, 페하!》
식렴은 그만에야 태자에게로 몸을 돌렸다.
《태자마마! 신이 오늘은 태자마마께 품을 놓고 평양성을 소개해올리겠나이다.》
《어서 그리하여주시오.》
태자는 사뭇 반기는 표정이였다.
식렴은 주홍색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들고 목을 가다듬었다.
《보시는바로 평양성의 제일경치는 뭐니뭐니해도 대동강을 옆에 끼고 솟은 저 금수산봉우리이오이다. 이곳 풍수군들의 말을 빌어본다면 저 금수산 모란봉은 마치도 대동강의 푸른 물에 옥같은 몸을 잠그고 곱디고운 얼굴을 하늘가로 살며시 쳐든 녀인의 모양이라 하옵는데… 자세히 살펴보시오이다. 그럴듯하지 않소이까?》
식렴은 태자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말씀을 듣고보니 과연 그럴듯하오이다.》 태자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그럴것없이 우리 모란봉에 올라가서 이야기를 들어보시오이다.》하고 청을 올리였다.
《원로에 피로가 없으시다면…》
식렴이 좋아하면서도 얼핏 왕건쪽을 바라보는데 《태자는 한창 나이이니 걱정할것이 없소. 어서 그래주오.》하고 왕건이 등을 밀어주었다.
《나는 좀 쉬겠거니와 지몽과 류차달대광만 남고 나머지 사람들은 따라가도 되겠소.》
왕건은 금필도 술희와 함께 태자와 동행하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태자를 위시한 일행은 말을 타고 모란봉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앞에 식렴이 서고 태자의 뒤로 술희, 왕계와 함께 금필이 따랐다.
모란봉이 시작되는 첫 등성이에 오르자 식렴이 설명을 계속하였다.
《여기서 보시여 아시겠지만 우리가 방금 앉아있던 저 <산수정> 이 올라앉은 절벽바위는 강물에 몸을 잠그고있는 녀인의 가슴노리께라고 할수 있사오이다. 강변으로 꺾이워내려간 저 절벽은…》
식렴은 몸을 뒤켠으로 돌려 강웃쪽을 가리켰다.
《… 청류벽이라 하옵는데 거기는 녀인의 부드러운 볼편이라 할수 있고 그뒤로 <영명사> 가 자리잡은 골안가까이에 솟은 봉우리와 그 반대켠 왼쪽의 <칠성문>쪽으로 가지쳐내린 봉우리는 녀인의 량쪽 귀라고 할수 있소이다. 그럼 먼저 <칠성문>으로 가시오이다.》
식렴은 일행을 반대켠으로 이끌었다.
《칠성문》은 평양성 내성의 북문이였다. 이곳은 금필이 이미 와서 본 곳이였다. 왕건이 고려국을 세운지 다섯번째가 되는 해에 금필은 왕건과 함께 그해의 평양성순행의 첫 순서로 이 성문을 찾았었다.
그해에 금필은 왕건과 함께 평양성의 지휘처들을 료해하는데 중점을 두고 성을 돌아보았다. 그때 식렴이 이 《칠성문》을 원상그대로 훌륭하게 복구해놓은데 대해 왕건은 만족을 표하였다.
이 성문을 《칠성문》이라 이름을 단것은 북두칠성의 칠성이라는 글자를 따서 붙인것으로 북문이라는 뜻을 담고있었다.
평양성전체로 보면 《칠성문》은 서문에 속하였다. 《칠성문》을 지나쳐 올라가면서 평양성의 내성이 계속되고 그뒤로 평양성의 북성이 계속해서 이어지였으므로 《칠성문》이 실지로는 평양성의 서쪽 옆구리에 붙어있는것이였다.
《칠성문》을 북문이라 하는것은 평양성 내성의 서북면에 위치한 까닭에서였다. 북성을 셈에 넣지 않았을 때 서북쪽성문이 되는것이였다.
《칠성문》은 성벽과 일치되게 일직선우에 문을 내는 일반적형식을 피한 대신 이어지는 량쪽성벽을 조금 어기여 쌓고 그사이에 문길을 모로 내게 세웠다. 그렇게 하고보면 틀림없이 성문은 북쪽방향으로 정바르게 향해있는 북문이였다. 성문밖에서 얼핏 보면 성문정면이 보이지 않지만 성문의 코앞에 가서 몸을 돌려야만 성문의 정면과 마주치게 되여있었다. 주변의 바위절벽흐름새에 맞춘데도 있지만 공격하는 쪽에서 잘 분간할수 없게 등을 반쯤 돌리고있는 모양이 볼수록 기묘하였다. 고구려성문들에서만 볼수 있는 특색있는 모양새였다.
이 성문우에서는 보통강너머 서쪽과 모란봉의 북서쪽방향에서 공격해오는 적들을 한눈에 보고 처리할수 있었다. 내성은 물론 중성의 서쪽면으로 움직이는 적정까지 한눈에 굽어보며 대처할수 있는 곳이였다.
금필은 고구려조상들의 지혜로움에 재삼 감탄했다.
성의 둘레가 60여리나 되는 평양성은 북성과 내성, 중성, 외성 이렇게 네 구역으로 나뉘여있는데 성문만 해도 17개나 되였다.
일명 장안성이라고도 부르는 평양성은 고구려 양원왕 8년이 되는 해인 552년에 시작하여 평원왕 28년이 되는 586년까지 35년간에 걸쳐 쌓은 고구려의 수도성이였다.
장수왕이 427년에 압록강 북쪽의 환도성으로부터 평양에로 수도를 옮겼을 때에는 대성산을 면한 안학벌에 왕궁을 따로 지었었다. 왕궁인 안학궁은 평지성이고 그뒤로 조금 떨어진 곳에 쌓은 대성산성은 유사시 방어성으로 리용하는 산지성이였다. 대성산성과 안학궁성은 서로 지척이기는 하였으나 분리되여있으므로 외적의 침입을 받는 경우에 대비하는데는 적지 않은 불편이 있었다.
이로부터 고구려는 산지성과 평지성이 결합되여있는 새로운 형태의 성을 모색하게 되였다. 평시에나 전시에나 그대로 그냥 눌러앉아 살면서 방어도 쉽게 할수 있는 그런 수도성이 요구되였던것이다.
평양성이 바로 이러한 요구를 충족하기에 조금도 미흡한데가 없었다. 게다가 대동강과 합장강, 보통강이 북동과 남서로 이어가면서 감싸고돌아 해자역할까지 하게 되여있어 말그대로 하나의 거대한 천연요새였다.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명당자리였다.
일행은 평양성 내성의 서쪽변두리를 따라올라가 《을밀대》에 이르렀다.
식렴은 이곳을 녀인의 코와 입, 두눈에 비기였다. 녀인의 얼굴에서도 기본부분이 된다는것이였다.
여기서는 북쪽으로 《최승대》가 세워진 봉우리가 마주 보이였다.
그 봉우리를 식렴은 녀인의 이마라고 했다. 그뒤로 내리뻗은 산자락은 녀인의 풀어헤친 머리태라는것이였다.
금수산의 제일봉인 《최승대》를 중심으로 하고 대동강을 면한쪽 벼랑턱에 위치한 유명한 《부벽루》와 《영명사》까지 포함하고있는 성이 평양성의 북성이였다. 순전히 산성인 북성에는 절과 사당만이 있을뿐 인가는 없었다. 그 경치가 사뭇 신비로와 평시에도 군사들만 주둔케 하고 신성시하는 곳이였다.
내성은 이 북성과 면하고 남으로 내리흘러있었다. 내성은 절반은 산성이고 절반은 평지성이였다. 북성의 《최승대》와 마주하고 선 《을밀대》에서 《칠성문》이 있는 구간까지가 산지이고 《산수정》과 《대동문》이 위치한 동쪽으로 해서 남산재를 가로지르는 곳까지가 평지이며 련이어 장대재와 만수대를 이어 다시금 《칠성문》으로 련결되는 구간이 산지성이였다.
내성은 평양성의 노란자위였다. 고구려시기에는 왕궁이 위치하였던 곳으로서 지금도 내성안에는 왕건이 거처할 내전대궐이 중심을 차지하고있었다. 그외에는 식렴을 비롯한 몇몇 관리들만이 틀고앉아있을뿐 호위군사를 제외하고 평민들은 얼씬도 못하게 하였다.
내성의 평지바닥은 비가 와도 스며들지 않고 비물이 똘랑똘랑 튀여났다. 고구려사람들이 동평양벌의 찰진흙을 날라다 가마에 쪄서 다져 깔았기때문이였다. 성돌은 룡강의 화강석을 날라다 쌓았다고 하였다.
창광재와 안산재를 에돌면서 동서로 가로지른 그다음 구간이 중성이였다. 이곳엔 관청이 자리잡고있었으며 관리들과 부유한 장사치들이 주로 살고있었다. 제일남쪽인 외성에만 일반백성들이 살고있었다.
농사군보다는 쟁인바치들이 더 많았고 관청에 속해있는 노비들도 거처를 하고있었다.
태자는 《을밀대》우에서 아물거리는 평양성장안을 한참이나 부감했다.
《<사허정> 이라… 말그대로 사면팔방의 경치를 한눈에 볼수 있는 곳이오이다.》
태자가 《을밀대》처마에 걸려있는《사허정》이란 글씨를 올려다보며 하는 말이였다.
《그렇소이다.》 식렴은 얼굴의 땀을 씻으며 잠시 숨을 돌리였다.
《참 , 금필대광께서도 한말씀 해주소이다.》
태자가 식렴의 수고를 덜어주려는듯 금필에게 청을 하였다.
《좀 그래주시오. 이곳 북장대는 금필대광이 특별히 관심하고있는 곳이기도 하지요》
식렴이 금필에게 말머리를 넘기였다.
《제가 식렴대광만이야 하겠소만…》
금필은 사양하는척 하면서도 즉시 설명을 이어갔다.
《태자마마, 이 <을밀대>의 기묘함으로 말하면 이곳 사람들이 자랑하는바대로 <을밀상춘>이라고 봄의 경치감상이 평양8경의 하나로 유명한데도 있사오나 군사지휘처로 이만한 곳이 더는 없는것을 먼저 꼽아야 할것이오이다.》
금필은 언제 보나 싸움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였다. 그는《을밀대》가 평양성 내성의 북쪽지휘터로 그저그만이라는 점을 우선 강조하였다.
《을밀대》가 서있는 이 봉우리는 금수산 모란봉의 제일중심이 되는 정점이였다. 물론《을밀대》맞은켠에 조금 더 높은《최승대》봉우리가 실지로는 금수산의 제일봉이나 《최승대》봉우리는 금수산의 북쪽켠에 치우쳐있고 북쪽방향만을 관망하기에 머무르는 곳인 반면 《을밀대》는 북성은 물론 중성과 외성까지도 손금보듯 내려다보며 대처할수 있는 곳이다. 하기에 고구려시기에도 싸움이 벌어질 때면 이곳 《을밀대》북장대가 응당 총대장의 지휘처가 되군 하였다. 금수산의 중심이 되는 곳이기때문이였다.
《여기서 내려다보니 적들이 대동강으로나 보통강으로 해서 올라오는것을 능히 육안으로 보고 처리할수가 있겠소이다.》
태자가 동서남북방향을 차례로 둘러보며 금필의 말을 긍정했다.
《북쪽방향이 가리워있으나 저 <최승대> 가 지척이므로 한달음에 올라갈수 있어 큰 불편은 없소이다. 실지로는 여기에 서서도 기발로 <최승대> 와 자유로이 화답을 할수가 있소이다. 밤에는 밤대로 또 불빛으로 의사소통을 할수가 있소이다.》
《실로 묘한 곳이오이다. 만약에 북성이 깨진다 해도 이곳에서 능히 막을수가 있게끔 되여있으니 말이오이다.》
태자는《을밀대》봉우리밑이 절벽으로 깎이워졌다가 다시금 솟구쳐오르며 《최승대》봉우리를 이룬 산모양새를 훑어보고는 싸움이 일면 내성과의 호상협력으로 북성에서 일단 패하는 경우에도 손쉽게 형세를 회복할수 있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판단해냈다.
태자도 이제는 어지간히 자랐었다.
금필은 흐뭇하여 웃는 얼굴로 술희를 돌아보았다.
술을 과하게 한 술희는 아까부터 선하품을 해가며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있었으나 금필의 흐뭇해하는 눈길과 마주치자 벌씬 웃으며 화답하는것을 잊지 않았다.
《역시 평양성은 천하제일의 명당이로다.》
《하하하… 이제는 술희대광도 평양성의 진가를 알은듯 하니 기쁨이 배로 커지는바요》
식렴이 시까스르는 소리였다. 그는 졸음에 취해 말우에서 건들거리기만 하던 술희에게서 찬탄의 소리가 튀여나오자 흥이 돋은것이였다.
식렴은 술희가 태자의 사부인데다가 죽으나사나 무 외에는 다른 어느 왕자도 태자로 내세우는것을 용서치 않는 인물인것을 아는지라 은근히 경계해오고있었다.
사실 식렴은 무를 태자로 하는데도 반대는 없었지만 신명왕후의 소생들에게도 은근히 왼심을 써온 처지였다. 그것은 식렴이 신명왕후의 아버지인 충주출신의 거부 류긍달과 이미전부터 맺아오는 친분관계의 영향때문이였다. 왕건이 행화(살구꽃)라고 애칭까지 붙여가며 신명왕후를 더 고와하는것을 속으로 남달리 좋아하는 리유도 거기 있었다. 신명왕후는 류긍달이 손수 왕건에게 바쳐가며 복속을 표한 전략적의도의 산물인바 그의 승벽 또한 남달라서 룡꿈을 꾸는것쯤 례사로 여기고있는터였다.
이를 잘 알고있을뿐아니라 은근히 부채질해주고있는 사람이 바로 식렴이였다. 자기의 이런 속마음을 저 덜퉁한것 같으면서도 기지가 넘치는 술희가 들여다보고있으리라 지레짐작하고있는 식렴이였다.
《어떠시오, 술희대광! 천하제일의 경관을 대하고본바에 시 한수 꼬아내지 않으시려오?》
식렴은 술희의 속을 떠볼양으로 기회도 맞춤이라 시 한수를 청했다.
《좋소이다. 목이 마른듯 하니 한동이 내오시면 대광의 청을 들으리다.》
시읊는 값으로 술을 내라는것이였다.
절간에 가서도 생고기, 익은 고기 나무람하지 않을 술희의 개비위가 또 발동한것이였다.
《태자마마! 술희대광이 저쯤 나오면 나로서도 어쩔수가 없소이다.》 식렴이 태자에게 우정 울상을 해보였다.
태자는 웃음을 머금고 머리를 끄덕였다.
《애들아! 여기서 잠시 쉴터이니 술자리를 보아라.》
식렴은 시간도 퍼그나 흐른 뒤라 마침이다 하고 중참을 벌려놓았다.
태자가 부어주는 술대접을 단숨에 비워버린 술희는 수염발을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그시 감았던 두눈을 부릅뜨는 찰나에 드디여 술희의 입에서 시구가 터져나왔다.
신라의 경주성도 백제의 사비성도
고려의 평양성엔 견줄바가 아니로다
평양성에 비하건대 경주성은 룡 본 닭이요
사비성은 범 본 토끼로다
성인이 이른대로 삼국통일 이렀으니
장부된 이 몸이 이제 할것 무엇이뇨
오호라 여기 금수산에 해빛도 명쾌하다
고려의 칼날이 울어예며 부르나니
지척인 옛땅 찾아 내 가리라
말몰아 한달음에 달려가리라
짜그르르 박수가 터졌다.
《사부님의 그 기개에 소자의 심신이 백배로 솟구치오이다. 정말 잘 읊으셨소이다.》
태자 무가 술희를 치하하자 술희는 설레발을 쳤다.
《치하는 저 금필대광에게 해야 할줄 아오이다. 이 시는 금필대광이 전해에 지은것인데 시가 하도 좋더라니 내 뜬금으로 외워두고있었던것이오이다.》
《그렇소이까?! 금필대광은 무장이기 전에 시성이오이다.》
《망극하오이다, 태자마마!》
금필은 황급히 머리를 숙이였다.
태자의 치하에 금필은 설레이는 마음을 다잡을길 없었다.
그렇다! 지금에라도 금시 말을 달려 밟아보고싶은 북방의 료동이였다.
고구려조상들이 세세년년 주름잡으며 지켜온 료동벌!
그 땅은 단군성왕이 겨레의 첫 나라를 세울 때부터 우리의 땅이였다.
그 땅이 지금 다른 종족들의 다툼질에 내버려져있는것이였다.
아 아, 조상의 땅이여!
언제면 그 땅에도 우리 겨레의 삶이 다시금 깃들게 할것이냐?!
금필은 부지중 가슴을 움켜쥐였다. 괴로움으로 숨이 가빠났다.
한생을 다 바쳐 겨레의 통일을 이루어내였건만 아직도 미흡한 구석이 남아있는것이였다. 금필은 이것이 늘 한이였다. 이는 금필만이 아닌 이 나라 겨레모두가 품은 한이였다.
이제는 백발을 얹은 금필이건만 당대에 마무리할길 없는 이 일로 해서 그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
(후세에 우리를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으리라. 그만해도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라고 리해해줄 사람들도 과연 있을것인가?)
환희에 넘쳐있던 금필의 얼굴은 졸지에 흐려지고있었다.
금필은 평양성에 머무르는 전기간 이 생각으로 하여 마음 한구석이 우울했다.
그 이듬해 봄, 금필은 왕건과 태자 무를 따라 다시금 평양성 순행의 길에 올라 고구려의 시조왕인 동명성왕의 릉묘를 찾았다. 고려국의 년례행사인 평양성에로의 이해의 순행길에 첫 일정으로 잡은 걸음이였다.
평양성 가까이의 락랑벌어구에 있는 당악고개(중화부근)를 지나 오른쪽으로 꺾어든 산지의 아늑한 골짜기안에 고구려시조왕의 릉묘가 자리잡고있었다.
왕릉앞벌에는 룡산천이 동에서 서로 흐르고있었다. 평양성앞에 이르면 대동강에 합류되는 작지 않는 내가였다.
내가건너에 왕릉이 자리잡은 룡산이 있고 그뒤로는 룡산의 원줄기인 제령산이 병풍처럼 흐르면서 왕릉을 감싸고있었다.
아늑하면서도 앞이 탁 트인것이 나무랄데 없는 명당자리였다. 넓은 벌판과 긴 골짜기, 맑은 내가, 그뒤로 야산을 거쳐 중부지대의 산맥에 이어진 묘한 곳이였다.
평원과 산악이 접하는 곳으로 뭇짐승들이 여느때없이 많을것이였다.
이곳이 락랑벌과 이어진 곳이고보면 고구려때엔 이곳이 왕의 사냥터로 유명했다는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제사지내기에 앞서 제물로 필요한 짐승을 이곳에서 쉽게 잡았을터였다.
울울창창한 룡산의 송림 또한 장관이였다.
고구려사람들은 무덤을 소나무숲속에 즐겨 썼다고 한다. 소나무가 없는 곳에 묘를 쓸것이면 우정이라도 심어서 소나무숲을 만들었다고 한다.
릉묘로 들어가는 길은 잘 닦아져있었다. 한해사이에 식렴이 만사를 제치고나서서 릉묘주변을 손질하였었다.
릉묘로 오르는 길옆 산기슭에 왕릉을 지키는 절간인 정릉사가 서있었다. 임금의 교지로 동명왕릉을 정비한다는 소식이 불가에 전해져 사처에서 중들이 모여들어 절간을 보수했다고 한다.
여럿의 중들을 거느린 주지가 사뭇 경건한 표정으로 일행을 맞이했다.
《여기가 그 유명한 7층8각탑이 섰던 자리이더뇨?》
사당을 돌아본 왕건이 절 앞마당 복판에 자리만 남은 곳을 가리키며 묻는 소리였다.
《그렇소이다. 고구려 장수왕때에 세운 동양유일의 8각탑이였다 하옵는데 그만에 거두지를 않아 오늘은 형체가 남아있지를 않소이다.》
《참 아쉽소그려. 4각탑은 많이 보았으나 8각탑이였다니… 어인 일로 8각탑을 세웠댔을가.…》
왕건이 호기심이 돋는듯 혼자소리를 하자 주지가 제꺽 응수했다.
《이 정릉사 7층8각탑과 관련하여서는 참 재미난 일화가 전해오고 있소이다. 탑을 세운 초기에 이곳을 찾았던 장수왕께서도 그런 질문을 하였사온데 그때 이곳 주지가 말하기를 탑을 7층으로 세운것은 우리 고구려사람들이 수자 일곱을 가장 좋은 수로 여긴데서 취한것이옵고 8각으로 한것은 불가에서 수자 여덟이 가장 길한것을 뜻하는데서 취한것이라고 대답을 올렸다고 하오이다. 그러면서 이는 시조 동명성왕이 부처가 되였음을 알리는것이라고 주를 달았소이다.》
《동명성왕이 부처로 되였다 하였소?》
《그렇소이다. 그런데 이 말에 대신관료 하나가 성을 내였다 하오이다. <우리 동명성왕님은 하늘의 아들이라 황룡을 타고 하늘로 오르시여 하늘신이 되였는데 부처가 되였다니 그 무슨 궤변이요?> 중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그네들이 하도 동명성왕을 공경하기에 릉앞에 비스듬히 절을 짓고 탑도 세우라 하였더니 이젠 시조성왕님을 아예 부처로 만들려들어? 변괴로다!> 하며 씨근거리는 관리를 보고는 그만 입을 다물고말았다는것이오이다.》
《정말 재미있소. 그래, 그게 아니라면 그 관리의 답은 무엇이라더뇨?》
왕건이 흥미가 동하는듯 또 물었다.
《그 관리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우리 고구려사람들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고 알고있소이다. 자고로 동명성왕은 해와 달의 아들이요, 천신인고로 하늘을 의미하는 원형의 집을 지어야겠으나 그렇게는 할수 없고 해서 원에 가까운 8각탑을 세운것이오이다.> 라고 답을 올렸다 하나이다.》
《그래, 그 답은 맞는것이뇨?》
《아니올시다. 장수왕께옵서 로반박사(고구려시기 탑건축기술자에게 주는 칭호.)를 불러오라 하여 정답을 물으니 그가 하는 대답인즉 <제가 제일 노린것은 세상에 다시없는 탑을 세워서 우리 고구려가 가장 발전되고 신성한 나라라는것을 시위하기 위해서였소이다. 이 탑은 누구의 본을 딴것은 아니요 더우기 부처와는 상관이 없는줄 아뢰오.> 라고 대답을 했다 하오이다.》
《고구려가 탑을 세우는데서도 가장 앞선 나라라는것을 시위하려 하였다?! 이랬거나저랬거나 시조왕을 받들고 고구려를 자랑하자는 마음에서 탑을 세운것은 좋은 일이요. 불가에서 이처럼 정성을 고이니 감격할뿐이노라.》
왕건은 주지에게 거듭 머리를 숙여보였다.
《자, 그럼 동명성왕묘로 가자!》
왕건은 발걸음을 릉앞으로 돌리였다.
주지의 안내를 받으며 릉묘앞에 이른 일행은 경건한 마음으로 향을 사르고 절을 올리였다.
릉묘는 고구려시조왕의 묘답게 규모가 사뭇 크고 웅건했다.
고구려 장수왕 427년에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면서 릉묘도 함께 옮겨온것으로서 건국시조를 받드는 고구려조상전래의 풍속에 저절로 머리가 숙어짐을 어쩔수 없었다.
(시조 주몽왕께 아뢰나이다. 성왕의 뜻을 따라 미흡하나마 고구려를 뒤이은 고려국을 세웠나이다. 아직은 저 료동 한쪽을 거두지 못하였사오나 겨레의 마음을 하나로 모았으니 부디 안심하시고 편히 쉬시옵소서!)
금필은 마음속으로 경건히 아뢰여마지않았다. 그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왕건도 태자도 모두가 눈물을 머금었다. 한가닥 아쉬움은 남아있어도 겨레와 강토를 하나로 모았다는 기쁨의 눈물, 안도의 눈물일것이였다.
금필은 동명왕릉의 뒤켠 산자락에 안치되여있는 오이, 마리, 부분노 등 주몽왕의 측근신하들의 묘소도 돌아보고 충격을 받았다. 력사는 시조왕을 받든 충신들도 잊지 않고있는것이였다. 제자신 고려국의 시조왕을 받들어 그만하면 부끄러움이 없다는 생각에 금필은 안도하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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