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7 회)
15. 통일대업을 이루다 고려군은 승리의 개가높이 송악으로 돌아왔다. 고려조정의 문무백관들이 도성밖에 나와 왕건을 위시한 개선군을 맞이했다. 백성들은 구름처럼 몰려들어 만세를 불렀다. 왕건은 송악궁성 만월대의 위봉루에 높이 올라서서 국토통일의 승리적인 결속을 선포하였다. 만세의 함성이 다시금 송악의 하늘가에 울려퍼졌다. 왕건이 오늘의 날을 보지 못하고 전장에서 먼저 간 군사들과 그 가족들을 위로하자 장내는 금시 눈물의 바다가 되였다. 왕건은 통일전쟁에 기여한 모든 군사들에게 상을 내리도록 함과 동시에 서른살이상의 군사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 생업에 힘쓰도록 령을
내렸다. 남편을 잃은 녀인들이 재가를 원하는 경우 허용하도록 하여 전쟁으로 생겨난 매 가정의 빈구석을 메꿀수 있게 하였다. 마감으로 국토통일의 승리를 공고히 하기 위한 금후시책을 발표하였다. 이제부터 고려는 민생을 돌보는데 주력해야 하였다. 천지를 진동하는 환호성은 오래도록 울려갔다. 금필은 울었다. 술희도… 왕건의 눈가에도 구슬같은 눈물방울이 맺혀있었다. 이 시각 이들은 이 자리에 없는 숭겸을 생각하고있었다.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았음을, 통일고려의 력사에 그의 이름도 뚜렷이 찍혀 전해지리라는 확신으로 해서 이들이 흘리는 눈물은 그만큼
값진것이였다. 이들은 마음껏 울고울었다. 이들의 두볼로 격정의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홍안의 젊은 시절에 품고나섰던 그 뜻, 갈가리 찢기고 짓밟혀 몸부림치는 이 땅, 이 겨레를 구원코저 의기를 들고 나선지 장장 40여년만에
머리에 흰서리를 얹으면서 이룬것이여서 성공의 희열은 그토록 남다른것이였다. (아, 드디여 이 땅은 하나로 되였구나! 겨레의 소원이 이루어지고야말았구나!) 왕건을 위시한 장수들의 심정은 격동의 파도로 하여 세차게 고동치고있었다. … 금필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부인 림씨가 중문밖에 나와 서있다가 나부시 절을 하였다. 그뒤로 아들, 딸, 며느리들이 줄줄이 무릎을 꿇었다. 금필은 놀랐다. 집안식솔이 이렇게 많아졌단 말인가! 세 아들에 두 딸, 그만한 수의 며느리와 사위들, 거기에 손자, 손녀들까지 달려있었다. 대견하기 그지없는 모습들이였다. 금필은 이들이 이토록 성장할 때까지 언제 한번 머리를 마주하고 따뜻한 말 한마디 제대로 해준적이 없는데
생각이 미치였다. 아들들은 군사들이라 더러 얼굴을 띄여볼수 있었으나 며느리들은 얼굴조차 낯설어보였다. 손자애들은 한번도 안아본 기억이 없었다. 금필은 부인 림씨에게로 시선을 돌리였다. 그의 머리에도 흰서리가 내려있었다. 지금껏 집안의 대소사를 혼자 도맡아온 안해였다. 그의
마음고생이 많았을것이였다. 한때는 후백제의 리간계에 걸려 간자로 모함을 당하기까지 한 그였다. 송악에는 친척 하나 없는 그가 본고장에서도 언니와 단 둘이였다가 그 언니마저 여읜 뒤 외토리가 되여 금필을 찾아왔었다. 외롭기 그지없던
그가 이렇듯 번성한 가정을 이루어낸것이였다. 《부인! 그간 고생이 많았겠소.》 마음속에서는 감사의 말이 무수히 오갔으나 금필은 그저 그 한마디뿐이였다. 그러나 안해는 그것으로 만족하고있다. 잔잔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잠시 어렸을뿐이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여있었다. 그 모습은
그의 애젊었던 처녀시절 홍안의 모습 그대로였다. 싱싱한 한송이 꽃같던 그 모습, 금필만이 알아볼수 있는 모습이였다. 《자, 모두들 집안으로 들어가자!》 이윽해서야 금필은 호기있게 분부하고 발을 내짚었다. 자신이 한집안의 가장이라는것을 그는 이날에야 비로소 느끼고있었다. 다음날 하루는 정말 꿈속에서처럼 지나갔다. 금필은 온 하루를 손자, 손녀애들과 어울렸다. 비슷한 나이또래끼리 씨름도 시키고 편을 갈라 수박놀이도 하게 하였다. 마지막엔 붓을 들려
글씨도 씌여보았다. 맏딸인 동양원부인이 름름한 두 손자애를 내세웠을 때에는 무릎을 꿇고 례의를 갖추기까지 하였다. 두 손자(효목, 효은)애는 자기의 외손이기에 앞서 당당한 왕자들이였기때문이였다. 금필은 자기가 이 왕자들의 외조부가 된다는 사실에 은근히 가슴이 뛰였다. 자신이 본의아니게 권력의 중추에 끼여있다는 생각이 미친것이였다. (이 애들의 후일이 걱정이 아닐수 없구나.) 금필은 서둘러 붓을 들었다. 누런 황지에 다음과 같은 글자들이 일필휘지로 씌여졌다. 과전불납리 리하부정관 오이밭에서는 신을 고쳐신지 않고 오얏나무밑에서는 갓을 고쳐쓰지 않는다는 말로 남에게 의심받을 일은 아예 말라는 뜻이였다. 왕자를 턱대고
권력을 탐하지 말고 일생을 평범하게 살라는 뜻이였다. 다른 손자애들에게도 글을 써주었다. 성년불감래 일일난재신 척시당면려 세월불대인 (성년은 다시 오지 않고 하루에 새벽은 다시 없으니 때를 따라 열심히 공부하여라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열심히 공부하고 수양하여 성인이 돼서 나라를 받드는데만 일생토록 전력하라는 뜻이였다. 금필은 자기 가문의 자손들이 대대손손 고려왕실을 받드는데서 충신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았었다. 후날에 금필을 조상으로 하는 평산유씨가문에서 많은 충신들이 나왔다. 그중의 한사람인 금필의 5대손인 유록승(고려 숙종시기)은 오랑캐들을
물리치는 싸움에서 대승하여 고려의 안전을 지킨 공로로 무송부원군의 작위를 받음으로써 무송(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무송면)땅에 뿌리를 내리고
자손대대 무송을 본으로 하는 유씨족을 번성시켜왔다. 평산유씨와 더불어 이들은 유금필을 저들의 원조상으로 받들면서 그가 통일국가의 주역으로 활약한것을 긍지높이 자랑해왔다. 눈이 내리고있었다. 전쟁이 멎은 이 땅에 내리는 이해의 첫눈이였다. 금필은 이날 궁성에서 설을 쇠려고 경주에서 상경한 김부와 만났다. 김부가 개경에 올라와 왕건 다음으로 만날 사람은 금필인것이다. 둘은 오랜만에 마주앉았다. 《공주님께서도 안녕하시겠지요?》 금필의 스스럼없는 인사에 김부는 머리를 끄덕였다. 《같이 왔어야 할것이온데 로독이 채 풀리지 않아 내전에 머물고있소이다.》 《원로에 피로하셨겠소이다. 리화령을 넘으셨소이까? 아니면 추풍령으로?》 《리화령을 넘었소이다. 충주가까이의 온천이 유명하지 않소이까. 그곳을 거쳐오도록 길을 잡았소이다.》 《그리하셨군요. 리화령! 그곳도 잊을수 없는 곳이오이다.》 금필은 그 순간에 지나온 옛 전장을 더듬어보았다. 태봉국시절부터 무수히 넘나든 리화령, 금필에게 있어서 리화령은 다른 전장들에 못지 않은 추억을 불러오는 곳이였다. 이 령을 넘어 사화진으로 진격하였었다. 그곳에서 김부의 부친인 사화진 성주 김효종과 만나 백제공략을 위한 호상협조의 밀약을 했었다. 라주를 탈취하려는 견훤의 이목을 그곳 사화진으로 쏠리게 하였던 그 일이 어제런듯 떠올랐다. 그런즉 금필은 김부와 선대때부터 친교를
맺아오는셈이였다. 《그곳 민심은 어떠시오? 정승께서 어련하시였겠소만…》 금필의 물음에 김부가 활기있게 대답했다. 《태평성대가 도래하였나이다. 전란은 가셔지였고 백성들은 평온하게 생계에만 전념하고있더이다.》 《반가운 소식이옵군요. 페하께서 기뻐하셨겠소이다.》 《그러하오이다. 이게 다 페하의 성덕이라 하겠소이다. 강토도 하나요 백성도 하나이오니 이제는 무궁토록 하나된 이 겨레와 령토를 이어가야지요.》 《실로 그러하오이다. 사나이 세상에 한번 나서 이렇듯 거대한 통일의 중대사를 당대에 제 손으로 이루어내다니 정말 꿈같이 희한하기만
하오이다. 정승께서 왕실을 잘 받드시여 고려의 대가 천추만대에 흥하도록 하셔야 할것이오이다.》 금필은 젊은 김부에게 고려왕업의 후일을 잘 받들도록 당부하고있었다. 《제 어찌 그 일을 게을리하겠소이까. 그래서 하는 말이온데 제 이번에 옛 신라왕가의 보물을 가지고왔소이다.》 《신라왕가의 보물이요?》 《그렇소이다. 우리 공주님께서 작은아버님과 먼저 의논하고 날을 잡아 페하께 올리라고 이르셨소이다.》 《그게 어떤 보물이기에?》 《성제대이옵니다.》 《성제대?》 《일명 <천사옥대> 라고도 하오이다. 하늘에서 내려보낸 구슬로 엮은 허리띠라는 뜻이온데 신라의 천년왕업의 안녕이 이 옥대에 의해
지켜져왔다고 이르고있사오이다.》 《소인도 이전에 들은 일이 있사온데 정승께서는 신라에서 보물중의 보물로 대물림을 해왔다는 그 신기한 띠를 페하께 바치시겠다는
뜻이겠소이다?!》 《그렇소이다. 천년을 이어오는 왕실가보이자 국보였소이다.》 《천년이라면 신라시조 박혁거세거서간때부터 내려오는것이겠소이다?》 《박혁거세 본시조때부터인지 혹은 김알지 중시조때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신라의 창업과 더불어 오늘에 이른것이오이다.》 《신라의 천년보물을 고려왕실에 바친다는 말씀이시군요!》 《통일강국 고려의 만년대업을 소원하는 소인의 마음을 담은것이로소이다.》 《고려국의 경사가 될 일이오이다. 이렇듯 좋은 일을 나하고 의논하고 말고 할것이 있소이까? 지금 당장 페하께로 가십시다.》 《제 생각에는 정월초하루날 첫 국정모임에서 식을 차리고 바치는것이 어떨가 하오이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요. 정승께서 정말 좋은 일을 생각해내셨소이다.》 금필은 기쁘기 그지없었다. 이것은 신라의 천년사직이 완전히 고려로 넘기여지였다는것을 증명하는것으로 되는 일이기때문이였다. 신라왕실의 천년가보인 성제대(《천사옥대》)는 937년 정초에 고려왕궁의 대전에서 왕건에게 정중히 증정되였다. 왕건은 만족하여 이 보물을 받아들었다. 금편쪼각들을 금실은실로 꿰여 빈틈이 없이 엮어만든 정교한 금은세공장식허리띠였다. 백옥, 청옥, 룡옥, 황옥, 비취옥 등 셀수없이 많은
보석알들이 띠의 앞뒤면에 가득 채워져 밤하늘의 별처럼 눈부신 빛을 내뿜었다. 왕건은 현란한 빛을 내뿜어 눈이 시리기까지 하는 금은옥대를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이윽해서 김부에게 답례를 표하고난 왕건은 추연한 낯으로
좌중에 일렀다. 《정승이 자기 왕실의 천년보물을 미련없이 바친것은 실로 갸륵한 일이나니 이는 우리 통일고려의 만년부흥을 바라는 정승의 진정을 보인것이로다.
짐은 이 사실을 온 나라에 알려서 백성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싶노라.》 《망극하오이다.》 김부와 모든 대신들이 일제히 머리를 숙여 화답하였다. 《좌중에 한마디 물을것이 있노라. 저 보물이 신라의 천년사직은 지켰으되 한계가 있어 오늘에는 고려로 넘어왔노라. 하오면 우리 고려도
만년사직을 지켜주는 보물이 있어야 할것이온즉 경들은 어떤 보물이 있어야 하리라 생각하느뇨?》 왕건은 은근한 미소를 머금은채 신하들을 굽어보았다. 갑자기 제기하는 물음이라 모두가 주밋거리기만 하였다. 《짐이 그동안 생각해온것이 있는데 들어보겠는가?》 《그리하여주소이다.》 대신들이 일제히 머리를 숙이였다. 《그 보물은 그대들 개개의 마음속에 있는것이니라. 겨레의 통일이라는 기쁨이 바로 그것이노라. 이것이 우리 고려의 보물중의 보물이 아니겠느냐!》 《실로 그렇소이다!》 좌중은 일시에 환희로 설레였다. 《나는 우리 겨레가 만들어낸 이 통일이야말로 고려국의 제일가는 보물이라고 생각하노라. 겨레의 통일이야말로 나라의 근본이 되고 만년대계의
초석이 되는것이니 우리모두 통일이란 이 보물을 티끌만큼도 흐리지 말고 자자손손 길이 보존해가도록 해야 하겠노라!》 《명심하겠소이다.》 문무백관 모두가 머리숙여 맹세의 절을 올리며 화답했다. 실로 그러하였다. 신라가 아무리 금과 옥으로 띠를 엮어 나라의 안녕을 소원하였어도 그것은 일시에 지나지 않는것이였다. 겨레의 안녕은 겨레의 합심에 있는것이다. 하나로 합쳐져야 산다는 진리로 뭉쳐진 겨레의 통일! 통일이야말로 겨레의 영원한 안녕과 번영을 담보해주는 보물중의 가장 값진 보물인것이다. 금필은 왕건이 정말 말을 잘하였다고 내심 감탄했다. … 날씨가 따뜻해지고있었다. 봄이
오고있는것이였다. 궁성안의 우거진 나무가지들엔 꽃망울이 내돋았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실려 글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전 후원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지금 금필은 지몽의 안내를 받으며 후원으로 걸음을 옮기고있었다. 태자가 보고싶어 지몽에게 청한것이였다. 후원의 정자에 태자 무가 단정히 앉아 글을 외우고있었다. 그앞에는 술희가 마주하고 앉아 귀를 강구고있었다. 술희는 5년전부터 태자의
사부소임을 맡고있었다. 주로 무예와 병법을 가르쳤다. 그러다가 지난해부터 언위가 주로 맡아하던 력사와 정사까지 가르치였다. 최언위가 로환으로
자주 병석에 든 까닭이였다. 《다음은 장수가 경계하여야 할 열가지 주의사항을 아뢸 차례오이다.》 술희가 문제를 내였다. 《아뢰겠소이다. 첫째로, 장수는 용감하되 그 기운이 지나쳐서 죽음을 가벼이 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것이오이다.》 《예.》 《둘째로, 성급히 서두르면 잘되여가던 일도 그르칠수 있으니 매사를 차근하게 하는것이오이다. 셋째로, 탐욕이 지나쳐 제 리익에만 전념하는 일을 경계해야 할것이오이다. 넷째로, 너무 어질어서 사람을 칠 때 가서 주저하는 일도 없어야 함이오이다. 다섯째로, 지혜가 있다 하나 겁이 많으면 그것도 장수라 할수 없는것이오이다. 여섯째로, 사리를 밝힐줄 모르고 남을 무턱대고 믿는것도 장수의 기질에는 합당치 않음이오이다. 일곱째로, 청렴과 결백은 좋은것이나 남을 돕는데 너무 린색해도 아니될것이로소이다. 여덟째로, 아무리 지략이 있다 해도 마음이 너무 늘어지고 약하면 장수의 구실을 할수 없는것이오이다. 아홉째로, 주대있고 결패가 있는것은 좋으나 너무 자기 고집만 세우는것도 장수에게는 결점이 되는것이오이다. 열째로, 난관앞에서 마음이 약해지거나 용기를 잃고 제 할 일을 남에게 맡기는것은 장수이기를 이미 그만둔것으로 될것이오이다.》 《예, 잘 해득하셨소이다.》 태자 무의 거침없는 대답에 술희는 흐뭇한 미소를 담고있었다. 《제 강론은 끝났소이다. 태자님! 쉬도록 하시오이다.》 《사부께서 수고하셨소이다.》 둘은 공손히 서로 맞절을 하고 일어섰다. 《태자님! 편안하셨소이까?》 금필은 자리를 이는 태자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이게 유대광어른이 아니시오!》 무가 무등 반가와했다. 《어서 올라오시오이다.》 금필은 무가 이끄는대로 정자우에 올랐다. 《박술희대광께서 요즈음 수고가 많소이다.》 태자 무는 또 한번 술희를 치하했다. 금필이 들으라는 소리였다. 《미거한 이 몸이 태자님을 가르치는것이 실은 격에 어울리지 않사오나 내봉원사께서 잘 조력해주셔서 빈구석이나 메우고있을뿐이오이다.》 술희의 겸허한 대답이였다. 내봉원사란 지몽을 두고 하는 소리였다. 지몽은 왕명을 정리하달하는 내봉성의 수석직무를 겸하고있었다. 술희가 지몽의 수고를 떠올리는것이였다. 술희도 이제는 퍼그나 늙었다. 금필이보다 퍽 아래인데도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생긴 외형을 보아서는 도저히 글이 있을것 같지 않은
술희였으나 그는 이미 소시적에 사서삼경을 깨친 사람이였다. 대승의 관직에 있은 부친으로부터 종아리에 회초리를 맞으며 배운것이라고 하였다. 태자 무를 시종일관하게 옹호해나선 사람들중의 하나가 바로 술희였다. 금필과 지몽, 복지겸과 함께 술희가 나서서 주위를 눌러온탓에 왕건의
무에 대한 태자책봉이 원만하게 거행될수 있었다. 무는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있기에 이 사람들을 각별히 따르는것이였다. 《모처럼 세분과 자리를 같이하게 되였으니 이처럼 기쁜 때가 언제 또 있겠소이까. 제가 송악청주를 낼터이니 취흥을 돋구어봄이 어떠시오?》 《망극하오이다.》 금필은 지몽, 술희와 함께 머리를 숙여보이고 무가 이끄는대로 술자리로 옮기였다. 그리고 무가 부어주는 술을 달게 받아 마시였다. 태자의
성장에 마음이 놓이는 금필이였다. 술기운이 오르자 여느때없이 기분이 좋아진 태자가 제 먼저 붓을 들어 글 한수를 써제꼈다. 《민심천심》이라는 네 글자였다. 민심은 천심이니 민심을 하늘처럼 여기여 후일을 감당하리라는 뜻이였다. 태자가 붓을 지몽에게 넘기자 지몽은 《문치무공》이라는 글을 써서 화답했다. 문관은 반드시 무를 알고 무관도 문을 알아야 함이니 새 임금께서 문무에 도통하시와 대업을 잘 이어달라는 당부의 뜻이 담긴 글이였다. 술희는 자기 차례가 오자 《대도무문》이라는 글귀를 써올렸다. 큰길에는 특별히 따로 문이 없다는 뜻으로 장도에 오른 장부에겐 나가는 모든 앞길에 거칠것이 없다는 기백이 넘치는 글이였다. 태자에게 신심을
북돋아주자 함이였다. 마지막으로 금필이 붓을 들었다. 하많은 글귀가 그의 머리속에서 오락가락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금필은 이윽고 붓을 달렸다. 《앙천무괴》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도 없이 살리라는 뜻이였다. 태자 무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 자기자신에게 하는 말이였다. 금필은 생각했다. 왕업을 잇는데서 임금의 역할도 물론 중요하다. 그것은 두말할바없는 사실이다. 그와 못지 않게 중요한것이 신하들의 의리이다. 신하가 바른
사람이 되여 임금을 옳바르게 받드는 일도 여간 중요한것이 아니다. 간신이 충신을 해하고 임금까지 해하여 종당엔 나라를 망친 일이 고금을 통털어
얼마나 많았던가. 나라는 정직하고 대가 바른 신하들이 있어 지켜지는것이다. 금필은 이 순간 오직 이 하나의 생각에만 옴해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