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 회)

 

유난히도 맑고 상쾌한 날씨였다.

금필은 지금 죽령마루에서 김부(경순왕)와 락랑공주를 바래주고있었다.

김부는 자기의 령지인 경주를 시찰하러 가는 길이였다. 경주일대를 점검하고 군사를 확보하여 후백제와의 결전에 대비하라는 어명을 받고 떠나는 길이였다.

부인인 락랑공주가 함께 떠났다.

금필은 락랑공주가 방금전에 속살거리던 말을 떠올리며 즐거운 미소를 머금고있었다.

《작은아버님! 이번 경주길에 동해의 해돋이를 실컷 구경하겠나이다.》

언젠가 서해의 섬에 올라 해돋이 아닌 해돋이를 감상하던 때를 생각해서인지 락랑공주의 얼굴이 발그레 물들고있었다. 그때 아무 생각없이 금필에게 안겨들었다가 남의 입거리가 되였던것이 무안스러워서였으리라.

그가 어릴 때처럼 무랍없이 금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을 때 금필은 또 한번 가슴이 찌르르해졌다.

사람의 정이란 참으로 이상한것이였다.

금필은 공주들중에서 락랑공주를 제일 고와하였다. 자기 딸이상으로 정을 주었다. 아마도 그것은 신혜왕후가 락랑공주를 남달리 사랑하기때문에 그랬는지도 몰랐다. 금필은 신혜왕후가 하는 일은 무조건 따르는데 버릇되여있었다.

왕건의 많은 비빈들모두가 신혜왕후에게만은 하나같이 머리를 숙이였으니 그것은 신혜왕후가 후실들은 물론 그들이 낳은 자식들까지도 꼭같이 귀히 여기고 보살펴주고있기때문이였다.

신혜왕후가 삐여지게 고와하며 남달리 손이 더 간것은 태자 무와 장녀 락랑이였다.

금필은 김부에게도 마음속 진정을 담아 작별인사를 하였다.

《김정승! 귀한 옥체 무리하지 마시고 무사히 돌아와주소서!》

《작은아버님께서도 험로에 조심하시옵소서!》

김부는 락랑공주처럼 금필을 아버지로 불렀다. 그도 금필이 장인인 왕건과 의형제라는것을 알고있는것이였다. 게다가 금필은 왕건의 장인이 되는 사람으로서 김부에게는 금필이 장인의 장인인것으로 벼슬로서는 금필의 우에 있으나 인척으로 따지면 금필의 밑에 사람이 되는것이였다.

허나 그래서만도 아니였다.

김부는 자기의 인생전환에서 금필이 논 역할을 잊을수 없는것이다.

겨레의 통합이 민심의 핵이고 시대의 바람이라는것을 터놓고 주고받은 첫사람이 바로 금필이였던것이다. 그와 마주앉으면 잡념이 없어지고 마음이 개운해지였다. 사사로운 감정따위도 떨쳐버릴수 있고 속이 커지고 넓어지면서 마냥 유쾌해지군 하는것이였다.

김부는 이런 연유로 해서 남달리 금필을 존경하고 따랐다. 경주로 내려가는 이 시각에도 김부는 자기를 바래주러 멀리까지 따라내려온 금필을 생각하며 고마움을 금치 못해하였다.

그무렵 태자 무는 내군대장 박술희와 함께 천안으로 기동하고있었다.

후백제와 접전할 최전방으로 나가는것이였다. 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태자의 위용을 과시하는 진군길이였다. 후백제로 하여금 투항하든가 맞서든가 마지막결심을 하라는 일종의 통고였고 선전포고였다.

고려태자가 군사를 이끌고 천안에 내려오자 기다렸다는듯 후백제군이 웅주성으로 올라왔다. 자그만치 6만이였다. 이미전부터 둔치고있던 4만의 병력과 합쳐지자 10만이 넘는 대군이 웅주일대를 뒤덮었다.

린근의 민가들이 졸지에 거덜났으며 주변의 곡식밭은 모조리 군량으로 결딴났다.

후백제군은 처자들의 아우성소리를 귀등으로 흘려버려야 했다. 죽느냐, 사느냐를 가르는 최후의 대격전을 앞둔 시각이였던것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견훤이 또다시 왕건을 찾아와 주청했다.

후백제가 10만대군으로 웅주에서 공격을 하려 하는 때에 천안에 만명의 군사만을 두고 어떻게 할 심산이냐며 다시금 자기도 싸움터에 나가겠다는것이였다.

《페하! 상부어른의 요청을 들어주시오이다.》

금필은 견훤을 내세우는것이 여러모로 보아 리롭다고 생각했다.

《좋소이다. 그럼 함께 출전하십시다.》

왕건은 응하였다.

9월이였다.

왕건은 금필과 함께 견훤이까지 데리고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천안에 당도하여 태자의 군사와 합류한 후 관병식을 거행하였다.

《군사들은 들으라!

후백제는 평화로이 합쳐져서 함께 부흥을 도모하자는 고려의 간곡한 제의를 끝끝내 거절해나섰다. 란적 신검과 그 일당의 죄를 물어 천명으로 다스려야 하겠기에 우리는 드디여 궐기하였다. 이 싸움은 후백제의 전왕께서 간절히 청하여 응해나선것인바 전왕과 짐이 총대장이 되여 직접 지휘할것이니 모두가 떨쳐일어나 따를것이다.》

왕건의 위엄있는 목소리가 관병식장에 울려퍼졌다.

《알겠소이다!》

여러 장수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같은 시각 후백제진영에서도 점검의식이 진행되고있었다.

《왕건이 우리 아비와 나란히 관병식을 거행했다며?!》

갑옷차림의 량검이 누구에게라없이 묻고있었다.

신검과 능환이 말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능환은 량검의 분별없는 말투에 미간을 찌프렸다. 량검은 늘 봐야 신검이 왕이라는것을 생각하지 않는 자세였다.

싸움이 박두해올수록 더했다. 신검은 말할것도 없고 능환자신마저도 무시하고 나섰다.

《6만밖에 안되는 군사로 우리의 15만대군과 맞서보겠다고?! 흥!》

량검은 코방귀까지 뀌고있었다.

《왕건은 그 정도로 그칠 사람이 아니다. 우리 모르게 예비군사를 깔고있을런지 어이 알겠니?》

신검이 량검을 시까슬렀다.

《우리의 뒤에도 고려군사가 있다는걸 명심하여야 하오이다. 라주에 둔치고있는 고려수군을 잊지 마소서.》

능환이 량검의 덤벼치는 꼬락서니에 슬며시 반격했다.

《옛 신라군도 류의하셔야 할줄 아오이다. 그들은 적은 수라 할지라도 익측으로 우리의 옆구리를 찌르기에는 충분한 력량이오이다.》

장수 효봉이 끼여들었다.

《배심들이 왜 그리 알팍들 하시오? 그러게 5만의 군사는 떼여놓은것이 아니겠소? 그대들은 고려장수들이 이제는 늙었다는것을 모르시오? 그간에 싸워보시고도 그 점을 모르신단 말씀이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싸워서 기필코 이기리라는 생각들을 왜 못하는가 말이요.》

량검은 중군장으로 후백제군사의 한토막밖엔 거느리지 못한 주제에 (좌군장은 효봉, 우군장은 룡검이였다.) 왕이고 뭐고 가리지 않고 연방 힐난했다.

그의 기갈에 좌중은 금시 주눅이 들고말았다.

량검의 완력에 능환까지도 밀려나고있었다. 장수들은 량검의 손탁에 들어 그가 하자는대로 끌려가는 판이였다.

바로 이때 고려군이 천안에서 철수한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천안에서 철수하다니?》

능환은 정신이 얼떠름해졌다.

(왕건이 어찌하여 불필요한 이동을 하는걸가?)

고려군이 6만이면 그것만으로도 대군이다. 6만이 움직이는데 드는 군력의 소모가 어느만큼인가 하는것은 그들자신이 잘 알터였다.

어째서 지금의 유리한 지대를 포기하는걸가? 능환은 그 내막을 알아차릴수가 없었다.

고려군이 싸움터를 옮기려는것은 천안지대가 최후의 격전지로서 마음에 들지 않은때문이였다.

이곳은 후백제의 본거지나 같은 곳이고 인구도 조밀했다. 싸움에서 이겨도 후백제백성들의 피해가 막중할터이였다. 후백제군자체도 많이 상실되여야 할터인데 거기에 또 일반백성들의 피해까지 겹쳐들면 그 한이 사무치게 될것이였다.

통일을 위한 싸움이지만 희생은 줄여야 했기에 민심을 미리 헤아리고 취한 조치였다.

이 조치는 금필이 제안하여 취해진것이였다. 금필은 왕건이 자기와 이미 세운 각본대로 천안에 무력을 집결하고 태자 무까지 내려보내여 공격준비를 갖추고있을 때에 이르러 생각을 고쳐하기 시작했다.

천안에서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공격을 해야 하리라는것이였다.

금필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것은 달무와 아람을 비롯한 완산주도성안의 간자들이 보내온 최근소식들을 분석하면서부터였다.

현재 후백제의 민심은 심히 와해되여있어 고려와 죽기로 싸워 결판을 보려는 상층부와는 달리 대다수 백성들은 전쟁 그자체에 진저리를 치고있었다. 무모한 싸움으로 당하게 될 희생을 두려워하고있는것이였다.

금필은 후백제땅에 만연하고있는 이러한 염전심리를 주목하지 않을수 없었으며 후백제의 이러한 민심을 요긴하게 써먹을 생각을 하게 되였던것이다. 그래서 고려가 후백제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하였다. 뒤따라 싸움장소를 인구가 적고 또 후백제땅이 아닌 다만 후백제가 일시 차지하고있을뿐인 신라땅의 일선으로 옮기게 했다. 금필의 이 제안을 왕건이 쾌히 승낙한것이였다.

정작 고려군이 일선(경상북도 선산)으로 공격방향을 변경하자 이 소식은 천안부근의 백성들은 물론 그아래로 내려오면서 완산주도성에까지 쫙 퍼져 후백제민심이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저들에게 피해가 적어지리라는 안도감과 함께 전장에 나간 남정네들이 무사히 돌아와주기만을 바라는 기대감이 엇바뀌면서 싸움의지가 급속도로 무너지고있었던것이다.

쓰러지는 집안을 지탱해보려고 무진 애를 쓰는 능환이인지라 전장정황에만 급급한 나머지 제 후방의 민심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을뿐더러 이런 상황에로 유도해간 고려군의 속내는 더우기 넘겨볼수가 없었던것이다.

《고려군이 일선으로 진을 옮겨가고있다 하나이다.》

전령이 재차 정황을 알려왔다.

《뭐, 뭐? 일선이라구?》

신검이 와뜰 놀라 반문했다.

고려군이 인가도 드물고 벌보다는 야산으로 이어진 싸움에 불리한 산지로 이동하고있는것이다.

문제로 되는것은 일선이 천안에서보다 완산주까지의 거리는 백여리 더 멀지만 대신 동남쪽으로 깊숙이 내려와있어 완산을 옆으로 공격하게 되여있는것이였다. 고려군이 북쪽에서가 아니라 동쪽에서 측면으로 공격방향을 잡은것은 후백제군이 천연방어선으로 리용할수 있는 금강중하류쪽을 피하고 쉽게 건늘수 있는 금강상류계선에서부터 거침없이 밀고들어가자는 의도에서였다. 고려군은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데 보다 더 유리한 곳을 찾은것이였다.

왕건이 바라는대로 싸움을 결속하기 위해 금필은 지몽, 술희와 더불어 결전의 마지막전야에까지 작전안을 짜는데 고심했다.

고려군의 이러한 기도를 미처 알아차릴 사이도 없이 후백제군은 울며 겨자먹기로 일선으로 끌리워가지 않을수 없었다.

후백제군은 또다시 이동을 개시했다. 10만대군사가 지나가면서 또다시 주변을 짓뭉개버렸다. 촌락들이 거덜나고 논과 밭이 쑥대밭이 돼버렸다.

능환은 이 혼란속에서도 서북방을 우려했다. 고려가 후백제군을 동남쪽으로 유인해놓고 서북쪽에서 내리칠런지 모를 일이였다. 후백제의 서해안이 고려군에게 제압당한 실정에서 얼마든지 있을수 있는 정황이였다.

능환은 신검에게 군사를 갈라 웅주서쪽을 방비토록 건의했다.

신검이 이에 응하여 5만을 떼여돌렸다.

그런데 이것이 량검의 분격을 촉발시켰다.

《고려군이 10만으로 일선에서 들이치려 하는 때에 군사를 가르다니 이 웬말인가?》

실지로 고려군은 8만에 가까왔다.

명주성주 왕순식이 만명의 군사를 끌고 급히 지원을 온데다가 금필의 기별을 받고 뒤미처 도착한 골암진 북쪽지대의 발해유민군사 3천에 그곳에 정착해 사는 녀진인들의 기병 9천 5백이 합쳐진것이였다.

후백제의 간자들이 그 수를 늘여서 보고하는통에 고려군은 급기야 10만으로 둔갑하게 되였다.

《전하께서 이렇게 우왕좌왕하시다니요? 이래가지고서야 어찌 싸움을 치를수가 있소이까?》

허겁지겁 군막에 들어선 량검이 신검을 훈시하려들었다.

《아우는 지나치다. 이다지도 방자해질수 있는가?》

신검이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이전에도 고려군은 라주를 기습했고 강주까지 빼앗은적이 있지 않나? 완산은 코앞인데 아무때건 기습할수 있는거야. 그걸 모른다고 할수 있는가?》

《지금은 일선입니다. 일선을 막아야 한단 말이요!》

량검은 쓰겁게 내뱉고는 휙 나가버렸다.

《저녀석이?!》

신검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해가지고 한동안 불그락후르락 하고서야 주저앉았다. 노는 꼴로 봐선 당장에 목을 베여야 할것이나 그러지는 못하였다.

신검은 심지가 나약한 편이였다.

둘사이의 푸르딩딩한양을 지켜보는 능환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 고였다.

(이 일을 어찌할고… 갈수록 험산이로구나.)

그럭저럭 후백제군은 일선으로 이동했다.

숨막힐듯싶은 무더위가 계속되고있었다.

사람도 말도 모두가 땀으로 미역을 감고있었다.

《고려군이다!》

전렬에서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능환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 일리천(강이름)이 가로질렀는데 그너머로 고려군의 전렬이 늘어선것이 보이였다. 그뒤로 군막들이 전개되여있고 곳곳에서 지휘기들이 바람에 펄럭이였다.

《진을 쳐라!》

신검이 소리치자 후백제군이 허둥지둥 움직이기 시작했다.

좌군과 우군이 갈라지고 중군과 후군이 그뒤를 차지했다.

신검은 전방에 나와 고려군을 살펴보다가 흠칠했다.

고려군의 좌군 전렬에 휘날리는《견훤대왕지휘기》를 본것이였다.

(아비가 제 아들을 치러 나오다니?!)

신검과 량검은 전률했다.

군사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신검은 머리를 싸쥐였다.

《싸워야 하오이다.》

《아버지는 우리를 죽이자고 온것이 아니요?》

량검과 룡검이 동시에 부르짖었다.

《아버님께서 어쩌면 저럴수가 있단 말인가!…》

신검은 탄식했다. 저들이 저지른짓은 생각지 않고 제 아버지만 원망하는것이였다. 시간이 갈수록 견훤의 기발은 후백제군을 절망에로 휘저어놓고있었다. 견훤의 총애를 받던 장수 애술과 효봉은 진작부터 얼굴이 까맣게 질려 전전긍긍했다. 후백제군은 싸우기 전부터 사기가 저락되고있었다.…

견훤은 지금 참담한 기분으로 전렬에 서있었다.

고려군의 좌군 총대장으로 나선것이였다.

박술희와 기타 10여명의 장수들이 각각 만명씩 이루어진 기마군과 보군병력으로 좌익을 맡고있었다.

우군에는 홍유를 위시한 10여명의 장수들이 역시 같은 수의 병력으로 진을 치고있었다.

중군에는 왕건과 태자 무, 지몽 외에 금필이 왕순식 등 역시 10여명의 장수들과 더불어 기마군사 2만과 보군 3천을 거느리고있었다.

그뒤에 또 1만 5천의 후원군이 대기하고있었다.

두리둥둥 두둥둥…

고려군의 중군쪽에서 좌군이 먼저 공격할것을 명령하는 공격개시 신호가 울려왔다.

견훤은 백발을 휘날리며 앞으로 내달았다.

그의 눈앞으로 후백제군의 우군 전렬이 마주 달려나오고있었다.

화살전이 가능한 거리에 이르자 견훤은 문득 손을 들었다.

고려군 좌군이 일시에 멈춰섰다.

견훤은 단신으로 후백제군 코앞까지 말을 내몰았다.

후백제 우군의 전렬이 주춤거렸다.

자기와 마주선 후백제군을 바라보는 순간 견훤은 온몸이 떨려나기 시작했다.

(이 무슨 운명의 희롱이란 말인가.… 내가 피땀을 바쳐 길러낸 군사들을… 평생을 바쳐 일쿼세운 저 땅을… 정녕코 내 손으로 무너뜨려야 하는가.…)

견훤은 금시 까무러칠것만 같았다.

견훤은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아니다, 이젠 늦었다. 징벌의 검은 이미 내려졌다!)

견훤은 다시금 앞으로 내달았다.

후백제군 전렬이 뒤설레기 시작했다. 그들도 견훤을 알아본것이였다.

《란신적자를 벌하고저 내가 왔다. 신검은 어디 있느냐?》

견훤은 솟구치는 분노를 겨우 눅잦히고 나직이 내뱉았다.

서슬이 딩딩한 견훤의 모습은 천하를 호령하던 옛모습 그대로였다.

후백제군사들은 얼굴이 흙빛이 되여 절절매기만 하였다.

《대왕전하!》

후백제장수 애술이 달려나와 무릎을 꿇었다.

《용서해주옵소서!》

그는 창을 거꾸로 들고 빌고있었다.

《신들을 용서해주옵소서!》

덕술과 효봉을 비롯한 후백제좌군의 장수들이 애술의 뒤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있었다.

《나를 따를 장수들은 내뒤에 서라!》

견훤이 웨치자 이들은 일제히 견훤의 뒤에 가섰다.

군사들이 너도나도 그 본을 따기 시작했다.

한번의 싸움도 해보지 않은채 후백제군 우군의 전렬이 무너지고있었다.

이 모양을 지켜본 량검이 분노를 터뜨렸다.

《저런 늙다리… 쓸개빠진 놈들을 보았나!… 중군은 우군의 투항을 막으라! 좌군은 공격하라!》

량검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명령을 련발했다.

후백제의 우군은 뒤로부터 제편의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견훤은 목청껏 소리쳤다.

《후백제 우군은 내 명령을 들으라! 후백제군의 중군을 막으라!》

급변하는 정황을 재빨리 판단한 술희가 뒤따라 령을 내렸다.

《고려 좌군은 나를 따르라! 후백제군의 중군을 막으라!》

술희는 말을 달려나오며 견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후백제 우군은 중군의 전렬과 엉켜돌아가며 좌충우돌하기 시작했다.

그뒤로 고려의 좌군이 구름처럼 덮쳐들자 드넓은 벌판이 일시에 흙먼지구름속에 잠겨들었다.

치고받는 병쟁기소리가 아우성소리와 뒤섞여 일리천들판과 그뒤의 산발로 메아리쳐갔다.

후백제군의 중군 후렬은 일단 물러났으나 중군 전렬은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어갔다. 워낙 대군의 접전이라 일단 엉켜붙은 전렬이 물러설 틈이 없었던것이다.

첫날 싸움은 해가 서산에 기울무렵이 되여서야 끝났다.

애술과 효봉, 덕술 등 투항해온 후백제장수들이 왕건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만 일어나라! 그대들은 오늘부터 나의 장수들이노라!》

왕건은 만족하여 그들을 환영했다.

《신검은 어디 있느냐?》

견훤은 그 와중에도 신검을 찾았다.

《대왕전하! 신검은 중군에 있소이다.》

투항한 후백제장수들이 견훤에게 일러바치였다.

《하오면 좌군은 나를 따르라!》

견훤은 계속해서 쫓아갈 자세였다.

《상부어른! 오늘은 그만 쉬십시다. 이왕에 늦어진 일을 첫날에 다하시겠소이까?》

왕건이 부드럽게 만류해나섰다.

《한시가 새롭소. 내가 불법무도한 자식들을 바로잡아주려고 이날까지 기다려온것을 페하께옵선 모르신단 말씀이시오?》

견훤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덤벼치였다.

《페하! 적의 중군을 계속해서 치는게 좋을것 같소이다.》

태자 무가 왕건에게 아뢰며 나섰다.

《태자마마의 생각이 옳은줄 아뢰오.》

금필이 즉시 태자 무를 지지해나섰다. 견훤을 내세워 얻어진 첫 싸움이 예견했던대로 번져지자 지금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던것이다. 잠시 생각하고난 왕건은 머리를 끄덕였다.

《하오면 두번째 싸움은 태자가 맡아하도록 하라!》

왕건은 최후결전의 마감을 태자 무가 결속하도록 했다.

《그게 좋겠소이다.》

금필도 지몽도 기꺼이 찬동했다.

둥 두둥, 두둥둥둥…

다시금 북소리가 울려퍼졌다.

고려군의 우군과 중군이 좌우로 갈라지면서 후백제 중군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일리천들판이 또다시 자욱한 먼지구름속에 잠겨들었다.

량검과 룡검은 신검과 아귀다툼을 하면서도 어렵지 않게 서렬을 재편성해가며 고려군을 막아나섰다.

량검이 전렬을 맡고 그뒤에 룡검이 다음렬을, 그뒤에 신검이 또 다음렬을 맞춰가며 죽기로 맞섰다.

그러나 고려군은 공격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장수들이 앞장에서 칼을 휘두르며 적진을 련속 무너뜨려나갔다. 이 과정에 고려군 우군을 지휘하던 홍유가 화살에 맞고 쓰러졌다. 금필이 말을 몰아 달려가보니 이미 기운이 진한 상태였다.

《홍유대광어른! 이게 어인 일이시오이까!》

금필은 목이 메여 더 말을 할수가 없었다.

《금필대광!》 희미해지는 의식을 가다듬으며 홍유는 마지막힘을 다해 입을 놀렸다.

《우리 좋은 기억만 하세.… 싸움을 잘 결속해서 꼭 통일된 고려를 세워주게. 그리고 페하를 잘 받들게.… 어련하리오만 그대가 있어 난 마음놓고 눈을 감겠네.》

홍유는 스르르 눈을 감아버렸다.

《홍유나리!…》

금필은 홍유를 그러안으며 부르짖었다. 그리고는 목청껏 웨쳤다.

《군사들! 홍유대광의 원쑤를 갚자. 앞으로!…》

와!…

홍유의 죽음을 목격한 고려 우군은 리성을 잃고 맹공격을 계속해나갔다. 우군에는 홍유와 수십년을 함께 싸워온 군사들이 많았다. 이들이 쉬지 않고 막무가내로 내닫는통에 공격은 밤에도 멈춤없이 계속되였다.

신검은 고려군이 밤에도 자지 않고 공격해오자 넋을 잃고말았다.

그토록 검질기게 추격해올줄은 미처 생각도 못하였던것이다.

밤이 새고 새날이 밝을무렵까지도 고려군의 추격전은 계속되고있었다.

능환은 고려군의 공격의 예봉이 신검에게 가해지고있는것을 간파했다.

견훤이 어떻게든 신검형제를 붙잡아야 한다고 부추기고있을것이 뻔했던것이다.

능환은 퇴각로를 추풍령쪽으로 잡았다. 한시바삐 후백제땅으로 들어서서 고려군의 공격을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심산에서였다. 신검은 응하였다. 이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추풍령을 넘어 겨우 신라지경을 벗어났다.

싸움이 일어 닷새째되는 날에 신검은 황산(충청남도 론산부근)고을에 들어가 잠시 숨을 돌리였다. 그러나 고려군의 추격은 계속되였다.

할수없이 신검은 완산을 비켜돌아 2백여리 더 내리빼여 마성(광주부근)으로 들어갔으나 이미 대기하고있던 고려군(라주에 둔치고있던 고려군, 금필이 달무에게 련락을 띄워 기동시켰었다.)에 의해 그만 포위에 들고말았다.

신검의 휘하에는 1천여명의 기병밖에 남지 않았다. 그동안 퇴각에 퇴각을 거듭하는 과정에 후백제군은 완전히 각개격파되고말았던것이다. 신검과 능환은 행여 어디서건 증원군이 올것을 바랐으나 그것은 헛된것이였다.

고려군은 흩어진 후백제군을 포위하는 족족 다스리고는 고향으로 돌려보내였다.

도성인 완산주도 이미 점령당한 상태였다. 고려군은 전쟁은 이미 끝났다고 선포했고 과거를 묻지 않을터이니 집에 돌아가 생업에 전념하라고 권고했다. 후백제군은 고려군의 이 조치에 환호하고있었다.

신검은 그만 항복하기로 결심하고말았다. 고려왕이 아량을 베풀어 살려줄지도 모른다고 헛되이 기대한것이였다.

견훤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꿇어엎드린 세 아들녀석들을 굽어보았다. 마성까지 신검을 잡겠다고 이악스레 따라온 견훤이였다. 도중에 로환을 이기지 못하고 말에서 굴러떨어졌었다. 왕건이 어의를 붙이여 겨우 눈을 뜰수 있었다. 회복될 가망은 없었다. 그는 림종의 시각에 이른것이였다.

투항해온 자식들의 몰골은 말이 아니였다.

신검은 베옷을 걸치고 온몸을 오라줄로 묶여진 차림을 하고있었다.

나라를 바치며 투항하는 왕들이 하는 차림새였다. 그 바쁜 속에서도 고금에 이어오는 규례를 빈틈없이 차리여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투항례식을 실수없이 하고있었다.

그 꼴을 굽어보는 견훤의 마음은 뼈를 깎는듯 아프기 그지없었다.

(저것들이 저 꼴을 보이자고 그짓을 하였구나!… 저 짐승같은 놈들이…)

견훤은 그만 두눈을 감아버렸다.

이때 왕건의 노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후백제왕자들은 들으라!

집안엔 아비가 있어 자식들이 있고 나라엔 임금이 있어 신하가 있고 백성들이 있는것이다. 자식은 아비를 받들고 신하는 임금을 받들어야 가정도 나라도 편안할터인데 그대들은 부왕을 유괴하여 룡상을 찬탈하고는 나라를 망하게 하고말았다. 천륜을 어기고 의리를 저버린 그 죄 알겠는가!》

추상같은 웨침소리에 신검은 금시 자라목이 되였다.

《어리석은 이놈이 하늘 무서운줄 모르고 그만… 만고에 다시없을 대죄를 지었소이다. 백번 죽어 마땅하오나… 한번만 기회를 주신다면…》

《무엇이라?! 한번만 기회를 달라구?!…》

견훤은 신검의 넉두리에 악이 치받치였다.

《나라의 사직을 이 꼴로 만들어놓고도 살기를 바란단 말이냐? 룡상이 욕심나서 제 아비를 가두고 제 동생을 죽인 이 천하에 무도한 놈아! 어리석고 어리석은 이 천치놈아!…》

견훤은 너무도 억이 막혀 말도 제대로 못하였다.

(망했구나… 망했어! 나라도 가정도 내 한생도 다 망했구나!)

속으로 거듭 부르짖던 견훤은 피눈물을 머금은채 그만 졸도하고말았다.

왕건은 능환을 심히 질책하였다.

《네가 왕자들을 꼬드겨 제 임금을 내동댕이치게 한 그 능환이란 놈이냐?》

《그러하옵니다.》

《신하라면 신하다와야지 네깟놈이 뭐라고 감히 임금이 하는 일을 가지고 이래라저래라하고 나선단 말이냐? 이왕에 임금을 모시고 나섰으면 시작과 끝이 일관해야지 모시던 임금을 중도에 헌신짝 버리듯 줴버려?! 왕자들을 반역에로 꼬드긴 그 죄 하나만으로도 너는 목을 베고도 남는다.》

《알고있소이다. 어서 죽여주사이다.》

능환은 두눈을 꼭 감고 목을 내밀었다.

(내가 잘못했어. 견훤이 하자는대로 내버려두어야 하는것을… 신검이 하나 금강이 하나 고려에 먹히우기는 마찬가지인것을…  중뿔나게 왕위계승에 손을 대더니…)

능환은 금강이 신검보다 훨씬 낫다는것을 인정은 하면서도 한사코 이를 부인해나섰던 일을 늦게나마 후회했다. 그것은 단지 제가 애초에 신검에게 정을 들였던것을 떼고싶지 않아 그리된것일뿐이였다. 제가 정한대로 일이 되지 않는다고 뒤틀린 소가지를 바로잡지 못한때문이였다.

그보다는 후백제조정의 정사는 제가 제일 잘 안다고 자부해온 그 우월감이 문제로 되였다는것을 그는 비로소 느끼였다. 임금인 견훤을 존중하는 마음이 꼬물만큼이라도 있었다면, 임금의 심중을 늘 헤아리고 임금의 뜻을 정히 따르는데만 버릇되여있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도 않았을터였다. 신하로서의 체신머리를 바로하는 일을 잊어버린것이 그의 실책의 원인이였다.

(내가 교만해진때문이다. 극도로 오만해서 임금을 깔보아도 분수가 있지 감히 임금우에 나를 올려놓고 대사를 좌우지하려들다니… 임금의 신의를 저버리고 감히 역모를 꼬드긴 역신인 내가 무슨 낯으로 더 살기를 바랄소냐!…)

능환은 스스로 칼을 받았다.

왕건의 령에 따라 량검과 룡검은 진주로 귀양을 보냈다.

신검은 늦게나마 자진투항했다 하여 관직을 내렸다. 허나 그것은 견훤의 정상이 가엾기 그지없어 잠시 취한 조치였다. 견훤이 다시금 정신을 잃고 실려간 뒤 이들 세 왕자는 처형되였다.…

금필은 왕건의 완산주입성을 서두르지 않도록 했다. 만에 하나 단 하나의 반기를 드는자에 의해서도 왕건의 신변에 뜻하지 않게 이상이 생길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지몽과 짜고 완산주도성을 정리하는데 사흘을 보내였다. 그사이 지몽에게 붓을 들려 왕건의 이름으로 된 통고장을 먼저 완산주도성에 내돌리였다.

《후백제국은 페지되였다. 이 땅에는 오직 고려국만이 존재한다. 모든 백성들은 고려국임금이 돌보아줄것이다. 고려군은 백성들의 생명안전에 만전을 기할것이다. 부디 안심하고 고려군을 맞이하라.》

후백제주민들은 포로되였던 자기 군사들이 손톱 하나 다치지 않고 모두 돌아오는 속에 고려왕의 통고장까지 보고서는 다들 안심했다.

금필은 달무와 아람에게서 안전신호까지 받고서야 왕건의 완산주입성을 거행케 했다.

완산주주민들과 후백제군사들은 고려군의 도성입성을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완산주도성은 고려군을 환영하는 인파로 차고넘치였다.

금필은 도성에 들어간 그날로 그처럼 그리던 달무와 아람을 만나 뜨겁게 포옹하였다.

견훤은 황산(충청남도 대덕군)의 이름없는 절간에 누워있었다.

신검이 왕건에게 무릎을 꿇고 후백제를 바치는 그 비참한 모양을 보다가 다시금 졸도한 뒤 이곳으로 옮겨진것이였다.

완산주도성안에는 다시는 들어가고싶지 않다 하여 비켜올라가다가 이곳에서 주저앉은것이다.

그는 이미 더는 움직일수 없는 몸이였다.

왕건이 보낸 어의가 견훤의 림종을 지키고있었다.

그옆에 견훤의 사위 박영규가 자리를 함께 하고있었다. 그는 일리천에서 싸움이 시작되는 즉시 고려군에 넘어와 신검의 중군을 허무는데 합세하였다. 왕건이 완산으로 공격하면서 그에게 견훤에게 가보라 하여 달려온것이였다.

견훤의 다른 사위인 지훤(그도 싸움이 시작되자 고려군에 넘어와 량검의 군사를 쳤다.)도 와있었다.

고비와 신강, 애랑 등의 얼굴에도 슬픔이 력력하였다.

날이 밝을무렵에야 견훤은 겨우 정신을 차리였다.

희붐히 밝아오는 새벽하늘의 한쪼각이 승방의 동쪽 뙤창으로 내다뵈였다.

견훤은 자신이 드디여 인생의 종착점에 닿은것을 깨달았다.

(내 한생이 이렇게 끝나는것인가!…)

견훤은 자신의 한생을 돌이켜보았다.

성공도 있었지만 구경은 실패로 끝난 인생이였다.

신검이나 능환이때문인가? 그건 아니였다.

그는 하늘이 자기를 외면했다고 생각했다. 대신 왕건의 편을 들어주었다고 하늘을 원망했다.

견훤은 모르고있었다.

자기가 한생을 후백제왕국재건에 심혈을 기울여 성공의 어귀에는 이르렀으나 그 이상의 꿈이 없은탓에 실패하고만것을…

생의 말년에 견훤은 자기도 삼국통일의 주역이 될수 있다고 생각하였었다. 하여 왕건과 자웅을 겨루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초지가 아니였었다. 룡상에 올라앉아 신라를 넘겨다보면서 차츰 그에 생각이 미쳤을뿐이였다.

그러나 왕건은 달랐다. 그는 금필을 위시한 젊은 무장들과 함께 홍안의 시절부터 자나깨나 겨레의 통일을 꿈꾸어왔다.

품은 뜻이 크고 장하니 따르는 인재들이 많을수밖에… 민심은 이들에게 모아졌고 끝내는 겨레통합의 뜻을 이룬것이였다. 고구려의 후손들답게 고구려가 존재한 전기간 추진하였던 겨레의 통일위업을 이들은 기어코 실현하고만것이였다.

왕건이와 마찬가지로 금필도 당시의 시대적요구와 겨레의 소망이 무엇인가를 누구보다 절박하게 감수하고나선 사람이였다. 단지 느끼는것으로가 아니라 그 실현에 몸을 내댄 선각자였다.

한 인간의 성공이 시대와 력사의 지향을 실현코저 얼마만큼 헌신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것을 견훤은 모르고있었다.

견훤은 후삼국이 존재하게 한 사람이자 끝나게 한 사람이였다.

이 후삼국시대는 신라가 령토확장야욕실현과정에 남긴 력사적오유를 시정하고 겨레가 갈망하는 통일의 실현을 준비하던 시기라고 할수있다.

견훤은 이 시대에 태여나 살면서 당대의 지향과 요구를 왕건이나 금필이 같은 고구려출신 무장들만큼 리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였던것이다.

시대의 지향과 요구에 민감하지 못한 정치가는 뒤전에 밀려날수밖에 없는것이다.

병신년(936년) 음력 9월 8일 견훤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왕건의 령에 따라 견훤의 장례는 국상에 대등하게 치르어졌다.

본의든 아니였든 그는 말년에나마 통일의 결속에 이바지한 력사의 한 인물이였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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