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5 회)
14. 후백제와 최후격전을 하다 《어쩌면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견훤이 써보낸 편지를 내던지며 량검이 부르짖는 소리였다. 《투항이라니? 당치 않은 말이요! 이는 고려가 군사를 일으키기 위해 명목을 세우려는것이 분명하오.》 룡검도 입에 거품을 물고 나섰다. 이찬 능환이 견훤의 편지를 집어들며 말했다. 《우리 후백제와 최후결전을 벌리려는것이지요. 그 꼭지를 지금 떼고있는것이오이다.》 《그러면 우리도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소?》 신검이 겁에 질린 눈으로 능환에게 물었다. 《준비를 해야 하오이다. 이번이 마지막싸움이 될수도 있사오이다. 준비를 해야 하오이다.》 이찬 능환은 다시금 침착히 되뇌이였다. 《우리에게는 10만의 정예군사가 있소이다. 전하께서는 신라가 고려에 넘어갔다고 락심하시는데 그럴 필요는 없소이다. 신라는 군사라고 해야
기껏 1만을 넘지 못하오이다. 고려군에 만명이 더 보태여진 셈이오이다. 고려는 맘껏 잡아야 군사가 5만밖에 되지 않사오니 한번 맞서볼만
하오이다.》 《고려가 최후결전을 하련다면서 5만으로 접어든단 말씀이요? 우리가 10만을 가지고있는것을 그들도 모르지는 않을터인데…》 신검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였다. 《그들이 새로 징발할것이오나 그러면 우리도 그만큼 더 하면 되는것이오이다. 인총은 우리가 더 많지 않사오이까. 고려는 군사수에서만은
우리를 따라잡지 못할것이오이다.》 능환이 희떱게 장담해나섰다. 《신라가 고려에 투항한것은 차라리 잘되였소이다. 이제 우리가 고려만 먹어치우면 신라도 함께 먹는것으로 될터인즉 결국은 두벌손질을 하지
않게 된것이나 같소이다.》 능환은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르는 격으로 기세를 돋구었다. 이에 량검과 룡검도 덩달아 날뛰였다. 《길고 짧은것은 대봐야 알것이요.》 《우리가 삼국을 통일 못한다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이요?》 하지만 신검은 말이 없이 낯색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이러는 신검을 띄여보며 량검은 비웃음을 머금고있었다.… 지금 견훤은 고려궁성 남쪽안채에서 한껏 귀를 돋구고 소식을 기다리고있었다. 완산주에
띄여보낸 자기의 편지를 아들녀석들이 골백번은 더 보고도 남았을터인데 일언반구 반응이 없었던것이다. 견훤의 울화병이 다시금 도지기 시작했다. 그따위 란신적자들을 그래도 사람으로 믿고 기대를 걸었던 내가 잘못이다. 아! 불쌍코나, 견훤아! 너는 정말이지 자식복이 없는 놈이로구나! 견훤은 장탄식을 하고 나앉았다. 능환이!… 이 견훤을 받들어 한생 변함이 없을거라고 그렇게도 침방울을 튕기던 그가 이렇게 돌변하다니… 후백제를 함께 일으켜세웠노라
자고자대하는것을 곱게 내쳐둔게 애당초 잘못이였다. 교만에 빠져 안하무인으로 노는것을 일찌감치 단속해두지 못한탓에 마지막에는 제 상전의
머리끄뎅이까지 둘러메치는것이 아닌가. 견훤은 능환이 가차없이 죽여버린 간무를 생각하자 가슴이 터져와 금시 숨이 멎는듯 했다. 당나라에서 돌아오는 그를 함께 있자고 붙잡지만 않았어도 그가 그렇게 헛된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을터인데… 사람두, 모질지도 못하지, 왜 그때
나를 뿌리치고 제갈길을 그냥 가지 않았을가.… 견훤은 제가 하도 간절히 간청하는 바람에 할수없이 눌러앉은것은 생각지도 않고 애꿎은 간무를 헛되이 나무랐다. 그토록 능수능란하게 수를 꾸며주며 마지막까지 나를 받쳐주더니… 그 좋은 머리를 가지고 능환이의 칼날 하나 피하지 못했다는것이 견훤에겐 리해되지 않았다. 그가 능환이따위가 죽이련다고 해서 그렇게 고분고분 죽을 위인이였단 말인가. 아니, 그는 절대로 그럴수 없다, 절대로… 하다면… 부지중 견훤은
간무가 능환의 칼을 우정 피하지 않은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보았다. 십분 그럴수도 있다는 짐작이 들었다. 견훤이 자기의 인생길이 비참하게 끝날것이라는걸 미리 내다보고 일찌감치 죽음을 받아들인것일수도 있었던것이다. 신라토배기인 그가 제가 나서자란 고국땅을 견훤과 함께 마음껏 유린한 자기 인생을 뒤늦게나마 후회하지 않았으리라고 믿기 어려운것이였다. 그러고보면 그는 나와 같은 길을 가면서도 생각은 달리하였구나, 동상이몽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마음 한구석에 회의심만은 늘 품고있은게
분명해, 나와 한 약속은 저버리지 못하겠으니 그저 맹목적으로 의무감에 할수없이 이날껏 나를 따른것이야. 생각이 이에 미치자 견훤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음같아선 당장에 달려가 무덤을 파헤치고라도 그를 일으켜세워놓고 따지고싶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저승에 간 몸이였다. 아아, 이 견훤이란 놈은 신하복도 없는 놈이였구나!… 견훤은 진심을 바치는 충신을 두지 못한 임금은 제아무리 똑똑하다 해도 구실을 바로할수가 없다는것을 늦게나마 절감하게 되였다. 견훤은 혼자서 쓸쓸하게 새해를 맞았다. 936년 정월 초하루날, 왕건은 그때까지도 등을 돌려대고있는 이전 후백제왕과 신라왕을 화해시키려고 술자리를 마련하고 두사람을 동시에
불렀다. 하지만 견훤은 병을 핑게대고 고집스레 버티였다. 그는 제 막내아들벌밖에 되지 않는 김부와 마주앉는것이 그 이상 부끄러운 일이 없을것이라는
생각을 하고있었다. 고려왕에게 깃을 들인 처지는 같으나 먹은 나이를 생각하면 그를 대하느니 차라리 쥐구멍에 들어가고픈 심정인 견훤이였다. 왕건은 할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남궁으로 갔다. 태자 무와 함께 가려다가 견훤이 자식들에게 쫓긴 몸인것을 생각하고는 그만두었다. 태자 무의 어머니인 장화왕후를 딸리려고 했다가 또
그만두었다. 그의 아비 오다린을 죽인것이 바로 견훤이였던것이다. 왕건은 금필의 딸인 동양원부인을 데리고 나섰다. 견훤의 후실 고비가 애젊은것을 생각한것이였다. 금필이 부인 림씨와 함께 왕건을 수행하였다. 자기를 후백제땅에서 탈출하도록 도와준것이 금필인지라 견훤은 금필과는 사이가 풀려있었다. 이전엔 서로 싸움도 많이 하였지만 생사기로에서
건져준 은인이 된 다음부터 견훤은 금필만 찾았다. 견훤은 왕건과 금필을 마주하자 눈물부터 흘리였다. 이들이 새해벽두에 자기를 잊지 않고 찾아준것이 고맙기 그지없었던것이다. 《상부께서 거동이 불편하시다기에 걱정이 되여 나왔소이다.》 왕건이 겸허하게 머리를 숙이였다. 《페하께서 이렇듯 나를 대해주시니 내 또한 허물없이 부탁부터 하려고 하오이다.》 《어서 그리시오.》 《로신이 페하께 의탁한것은 페하의 힘을 빌어 역자를 치고자 해서였소이다. 원컨대 페하께서 군사를 빌려주시여 소신이 그를 인도하고 나가 역적무리들을 치게 하여주시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것이로소이다. 들어주옵소서.》 《고려군사를 빌려 후백제의 아들을 치겠다는 말씀이시오?》 왕건은 아연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렇소이다. 정초부터 소란을 피우련다 나무람 마시옵고 부디 신의 청을 들어주옵소서.》 《그것은 전쟁을 말하는것이온데… 상부께선 우리 고려보고 후백제와 전쟁을 하라고 부추기는것이요?》 견훤은 왕건이 나무리자 한순간 주춤거렸다. 그러나 내친김에 뻗쳐 볼 모양으로 그냥 간청했다. 《그따위 애녀석을 눌러버리는 일을 전쟁이라고까지 하겠소이까? 다 망한것을 거두는 일이오이다. 소신이 일쿼세웠다가 소신의 불찰로 무너뜨린
집안이니 소신이 재간껏 수습하려 함이외다. 빌고 또 비오니 부디 제 청을 들어주옵소서.》 《상부, 좀 더 기다려보소이다. 후백제가 아직 대답을 하지 않았소이다.》 왕건은 견훤을 얼리느라 땀을 빼야 했다. 《페하께옵선 이 로구를 너무 어린애처럼 다루시는군요. 소신의 자식들이 지금 고려와 맞서보려고 전쟁을 준비하고있는줄 모르는줄 아시오?
저것들이 더 자라나기 전에 쳐야 하오이다. 그러니 이 사람이 죽기 전에 한을 풀도록 도와주소서.》 견훤이 하도 완고하게 나오니 왕건으로서도 정말 난감하지 않을수 없었다. 사실을 말하면 조만간에 치러야 할 전쟁은 분명하였다. 피할수 없는 마지막결전을 눈앞에 두고있었는데 그 명목을 견훤이 제가
만들어 주고있는것이였다. 어찌 보면 견훤의 처사는 고맙기까지 한것이였다. 그러나 그 준비에 시간이 필요하였다. 더도 말고 반년은 더 들어야 했다. 그간의 후백제의 힘을 타진해본 결과 얻어진 결론이였다. 금필이 식렴의 간자들까지 총동원하여 알아본바에 의하면 후백제의 군사력은 예상외로 강해졌다. (금필은 그사이 달무와 아람 이외에도 매를
리용하는 정찰조를 몇개 더 조직해서 후백제의 여러곳에 파하였다.) 물산이 풍부하고 인구가 조밀한 후백제는 일단 싸우자고 마음먹고나서자 그 힘이
상상을 초월하고있었다. 고려조정은 전쟁준비에 총력을 기울이였다. 북방수비에 동원되였던 군사들이 남쪽으로 이동되였다. 갓 정리된 북방의 인력과 자원이 깡그리 동원되고있었다. 금필은 골암진북쪽의 고려땅에 영주한 말갈족들에게까지 군사를 징발하도록 어지를 내리게 주선했다. 나라의 곳곳에서 새로 모집된 군사들에게
조련을 주는 한편 쇠를 녹여 병쟁기를 만들고 곡식을 모아 군량을 확보했다. 싸움은 여름철에 가서야 개시할수 있었다. 이를 알리 없는 견훤이 제 사정만 사정이라고 떼를 쓰고있는것이였다. 《상부께옵선 자중하시오. 란신적자를 치고싶은 마음은 우리도 같소이다. 아직은 때가 일러 그러는것이니 안심하시고 기다리시오이다.》 금필이 나서서 얼리자 견훤은 그제야 수그러들었다. 고려와 후백제는 싸울 차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겨울이 언제 가고 봄날이 언제 오는지도 모를 지경이였다. 금필은 왕건과 함께 국력을 정비하고 동원준비를 갖추는데 정력을 다하였다. 태자 무까지 참가한 가운데 지몽과 함께 지도를 펼쳐놓고 작전안을 토의하는데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병력과 장비상태를 점검하는 일도 놓치지
않고 깐깐히 해나갔다. 금필은 왕건이 후백제와의 최후결전에 다시금 팔을 걷고나서자 사기가 났다.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던것이다. 견훤을 만나고 돌아온 뒤, 그러니까 설을 쇠고 며칠이 지난 어느날이였다. 최언위와 최지몽, 술희와 함께 금필을 불러들인 왕건이 자못 심중한 표정으로 말을 떼였다. 《짐이 그대들과 한가지 상론할것이 있노라. 이전에도 몇번 내비친적이 있었는데 후백제도 신라처럼 자진귀속의 방법으로 통합할수 없겠는가 하는
문제요. 웬일인지 짐은 시일이 좀 걸리더라도 그 길로 가는것이 좋으리란 생각이 자꾸 드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하오?》 (페하께서 또 동요하고있구나.) 금필은 대뜸 긴장해졌다. 즉시에 불안감이 온몸을 엄습해왔다. 군사적견지에서 볼 때 이는 분명한 착오이기때문이였다. 상대가 풀이 죽어있는거라면 몰라라 서슬이 딩딩해서 기세를 올리고있는 때인데 자진귀속을
바란다니 웬말인가. 시간이 갈수록 상대의 힘만 키워주게 되고 그렇게 되면 싸움이 더 어려워질뿐이라는걸 페하께서 모른단 말인가? 고려가 주도권을
확고하게 틀어쥐고있는 지금의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내밀어야 하는것은 너무도 당연한 리치가 아닌가. 금필은 왕건이 어째서 신라는 포섭하되
후백제와는 싸움으로 결속하자고 한 초기의 전략을 포기하려 하는지 알수가 없었다. 《짐은 후백제와의 최후결전을 해야 한다는 그자체를 반대하는것이 아니요. 그 방법에 한해서 다를뿐이지. 힘으로 그들을 눌러버려야 함은 다를바
없으나 그들스스로가 손을 들게 해서 량자가 다 희생을 줄이면서 통합을 하자는것이요. 나는 통합후의 일을 생각해서 그러는것이요. 땅을 차지하는
일은 이제 와서 그리 힘든 일이 아닌데 문제는 이후에 백성들을 다스리는것이요. 고려군의 칼날에 자식과 남편을 잃은 후백제사람들이 우리를 곱게
불수가 있겠소? 민심을 느끼는 일이 결코 소홀히 할 일이 아니니 그 점을 고려해보아야 할것이요.》 왕건은 승리후의 정사를 생각하고있는것이였다. 사람의 시야는 확실히 제한되여있다. 대체로 제가 그러안은것만큼 생각하는것이다. 그래서 임금이 보는 시야는 신하들보다 넓은것이다. 금필은 그 점에 있어서 조금도 의심해본적이 없었다. 지금도 금필은 왕건의 견해가 틀린것은 아니라고 확신하고있었다. 하면서도 여전히 의견을 품게 되는것은 무엇때문일가?!… 《짐은 결심을 내렸소. 그대들은 짐의 의도를 알고 그 방향에서 처리안을 짜도록
하오.》 왕건은 상론을 하자고 사람들을 불러들이고서 잠시의 론의도 없이 령을 내리고말았다. 이전같으면 알아들었소이다 하고 일어서야 할것이였으나 금필은 쉬이 일어서게 되지 않았다. 후백제의 항복을 받는것으로 싸움이 끝나야 하는것은
명백한 사실이나 싸움을 통해서가 아니라 회유나 설복으로 항복하게 하라는 령에는 응하고싶지 않아서였다. 금필은 생각을 더듬어보았다. (쇠약한 신라는 고려에 의지하는 정책을 써왔으므로 자연히 그들을 보호해줘서 그들스스로가 복속돼오도록 한 전략이 옳았다. 하지만 후백제는 다르다. 그들은 애초부터 고려와 대결하였고 시종 우렬을 다투어온 적이 아니였던가. 이들에게는 힘의 대결로 패배를 명백히
인정시켜야만 후환이 없을것이다. 통합이후에도 절대로 머리를 들수 없게 하자면 그 길밖에 없다. 투항은 받아야 할 일이나 그것은 따귀를 치고나서
받아야만 한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금필은 머리를 들었다. 《페하! 외람된 말이오나 소신은 생각을 달리하오이다.》 《무엇을 달리한다는건가?》 왕건은 뜻밖이라는듯 금필을 가로보았다. 《투항 그자체가 패배를 인정하는것은 사실이오나 그들에게 자진귀속이란 이름을 달아주게 되면 후일에 시끄러운 일이 없지 않을가 념려되여 하는
말이오이다. 신라와는 달리 후백제는 감히 삼국통합의 주역까지 꿈꾼 나라가 아니오이까. 이들에게 자진귀속이란 당당한 이름을 달아준다면 기가 덜
꺾인 이들이 통합이후에라도 옛꿈을 되살리자고 나설지 어이 알겠소이까. 잔여세력이 기회를 보아 딴가마를 걸어놓고 서서히 힘을 모아 주권을
빼앗자고들런지도 모를 일이오이다. 국권회복을 한답시고 들고일어나서 국호마저 고려가 아닌 <후백제> 로 정할런지 누가 알겠소이까. 이런 후백제는
무조건 힘으로 눌러놓아서 력사에 명백한 패배를 새겨놓아야 뒤탈이 없을줄 아오이다. 거듭 말하오건대 후백제는 명백히 칼로 치고 그다음에 항복을
받아야 하오이다. 제 말이 노여우시다면 이 목을 버이소서. 탓하지 않고 곱게 받겠소이다.》 《금필대광께서도 이제는 나를 가르치는데 어지간히 익숙해지셨소. 그러니 목을 베란 말씀이시지요?》 옳다는것인지 그르다는것인지 가려내기 힘든 반응을 보이고난 왕건이 이번엔 최언위에게 눈길을 돌렸다. 《최언위어른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페하! 소신은 방금전에 금필대광의 말을 들으면서 문득 이전에 제가 고려로 떠나올 때 최치원어른이 한 말을 생각해보았소이다.》 《그가 무슨 말을 하였게 그러오?》 《지금은 페하께옵서만이 삼국통합을 이끌어낼수 있는 존재이므로 페하를 따르는것이 지극히 당연한 리치라 하면서도 이후에 고려왕대의 바통을
잇는 대목에서는 신라출신이 배제되지 않도록 해야 할것이라 하였소이다. 그 말의 뜻은 신라출신의 왕후들이 낳은 왕자들이 고려왕조의 대물림에서 밀리우는 일이 없어야 할것이라는것이오이다.》 《두고보아야 할 일이지만 신라출신 왕후소생이라 해서 대물림을 못한다는 법이야 없지 않겠소. 지금도 우린 후백제출신왕후의 소생이 태자로
정해져있소. 부디 고구려출신소생들만이 왕대를 이어야 한다고 정해놓은 법도 없소. 그가 누구든 근본이야 이 짐의 소생들이 아니요? 이 왕건의
피줄기란 말이요. 신라출신왕후소생이 임금이 되면 다시 신라국을 세울상싶어 그런 말을 하였다오?》 《고려국이야 변함없을테지요만 조정안의 세력권을 차지하는데서 신라출신들이 밀리우지 말아야 한다는것이옵지요.》 《그가 그런 말을 다 하였소? 이 왕건을 지지한다면서도? 그러니까 고려국은 받들되 신라사람의 자존심은 잃지 말라는 훈계로군. 하기는 고금을
통털어 상고해보건대 조정안의 세력다툼이 어느 나란들 없었겠소. 례사로운 일이지. 어찌 외척끼리 다투는것뿐이겠소.》 《그래서 하는 말이오이다. 한왕조안에서도 갈래별로 싸고도는게 조정의 례상사일진대 조정안에 다른 왕조가 들어와 가만있자 할턱이 있겠소이까.
후백제왕조는 받아들이지부터 말아야 할줄 아오이다.》 《그러니 금필대광과 같은 생각이란 말이겠소?》 《그러하오이다. 그들이 싸우자고 할 때 쳐버려야 하오이다.》 《지몽공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페하! 소신은 아직 고려밥을 열다섯해밖에는 먹지 못했소이다. 그보다 먼저 스무해를 신라밥을 먹은 사람이고 근본 또한 신라이오이다. 숨김없이 말한다면 이후에 단 한번만이라도 신라출신왕후의 소생이
왕대를 이어보게 하는게 저의 소원이오이다. 물론 그건 변함없는 고려국의 왕조에 한해서 말이오이다.》 《한지붕에 든 사이끼리 너무 출신을 따지는게 아닌가? 하지만 그 욕심이야 그른것이 아니지. 이왕에 말해둘것은 어느 지역 출신소생이든 지모만
갖추었다면 누구든 그 순위에 따라 고려의 왕대를 이을수 있다는것이요. 지몽공은 묻는 말에나 답을 하오. 그대만은 후백제를 자진귀속시키자는 짐의
뜻을 따를테지?》 《고려왕조의 안녕을 위해 진언하건대 저 역시 후백제는 쳐야 한다고 생각하오이다.》 《짐이 이미 결심하였는데도 따르지 않겠다는거요?》 《신하가 임금을 따르는것은 옳은 길을 갈 때에만 한해서이고 그른 길을 가는 임금은 막아서야 하는것이 진짜충신인줄 아오이다.》 《그렇다?!…》 왕건은 혼자소리처럼 뇌이더니 가볍게 무릎을 쳤다. 《견훤이 나를 부러워할만 하구나! 나는 확실히 신하복이 있어!…》 (?!…) 《짐은 이미 경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있었소. 인명의 피해를 줄이려고 이 생각, 저 생각 해보는중에 그른줄 알면서도 위안이라도 해볼양으로
그대들과 말을 해본거요. 후백제는 때려서 항복을 받아내기로 하오.》 《희생을 줄이는것 역시 가볍게 대할 일이 아닌만큼 싸우는 방식을 꾸미는데서 그 문제도 최대한 풀어가겠소이다.》 금필은 왕건이 우려하는 인명의 피해문제도 해결해야 할 요점임을 강조했다. 《응당 그래야 할것이요.》 왕건은 만족해하였다. 《그대들이 있는 한 짐은 무서운게 없소. 더이상 흔들리는 일은 없을것이요. 그 방향에서 후백제와 마지막결판을 해봅시다.》 그날 금필은 왕건이 더는 동요하지 않으리란걸 확신했다. 가슴속이 불붙듯 달아오르고 온몸에 새힘이 솟구쳤다. 홍안의 젊은 시절에 세웠던 꿈이 머리에 흰서리가 내리는 지금의 시각에 현실로 다가오고있는것이였다. 가슴은 마냥 방망이질을 하고있었다. 장부로 태여나 세운 뜻 장하려니와 그 뜻을 이루고나면 그 아니 장할소냐. 금필은 온몸을 불사를듯 뛰고 또 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