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 회)

 

 

매암매암…

매미소리가 들려왔다.

남궁쪽 별당채앞에 서있는 느티나무가지우에서 우는 소리였다. 울음소리가 도글도글한게 알이 지고 영악스럽기까지 하였다. 매미소리가 저렇게 여무진것은 여름이 끝나가고있다는것을 말하는것이였다.

견훤은 매미가 우는 그 느티나무밑에서 죽은 금강의 동생인 신강과 마주앉아있었다. 그사이 조금 진정되였던 가슴이 다시금 풀무처럼 풀떡거리기 시작했다. 신강이 가지고 온 소식때문이였다.

신강은 며칠전에 고려로 자진 투항해왔다.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와 의논을 하고 그의 투항의사를 미리 통지하는겸 먼저 들어온것이였다. 신강의 말에 의하면 견훤의 딸 애랑은 남편 박영규에게 아버지를 구해내자고 매일같이 졸라대였다고 한다. 박영규도 신검형제와 능환의 소행에 격노하고있었지만 력량상차이를 생각하여 기회만 보아오던참이였다. 견훤을 탈취해낸 다음이 문제였기때문이였다. 그냥 신검과 맞서야 할지 아니면 고려로 넘어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영규는 견훤이 고려로 탈출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다.

한발 늦은것을 알고 후회했으나 소용이 없게 되였다.

애랑은 이번엔 또 고려로 넘어가 아버지를 돌봐드려야겠다며 다시금 영규에게 애원했다.

한편 신검은 영규가 새 조정에 복종의사를 밝히지 않았다며 완산주로 급히 올라오라고 지시했다.

《짐승이나 한가지인 네놈이 나를 훈계해?…》

부아가 솟구친 영규는 때마침 찾아온 신강의 말을 쫓아 자기의 귀순결심을 먼저 고려에 알리도록 한것이였다.

이 소식에 접한 금필은 환성을 올렸다. 견훤의 아들인 신강에 이어 견훤의 사위이자 백제의 큰 호족이며 장수인 영규가 투항해온다면 그 여파는 실로 클것이였기때문이였다. 금필은 왕건에게 이 기회에 견훤을 고무해주자고 제의했다.

왕건은 흔쾌히 응하였다. 조회를 필한 뒤 둘은 남궁후원으로 나갔다.

《어서들 오시지요.》

견훤은 황황히 허리를 굽혔다.

《상부께서 편안하신지 보고싶어 나왔소이다. 남궁에 계시는게 혹여 불편하지나 않으신지요.》

《아니할 말씀이로소이다. 부탁하건대 말씀부터 낮추어주시오이다. 저는 고려페하의 신하가 아니오이까!》

견훤은 거듭거듭 허리를 굽히였다.

《상부께선 백성들의 피를 흘리지 않게 하시려 내리신 그 용단 하나로도 일생 존경을 받으실것이오이다. 이렇게 아드님이 한분 뒤따라오시고 이제 사위되는 사람까지도 상부님의 뒤를 따르겠다 하였으니 이게 다 상부의 공이 아니겠소이까.》

왕건은 견훤을 연신 치하했다.

견훤의 얼굴은 그사이 더욱더 초췌해져있었다. 아무리 좋은 술도 그의 마음속 상처를 아물게 할수는 없는것이였다. 그는 심화병에 들어있었다.

금필이 왕건과 함께 대전으로 돌아온지 한시간도 되지 않아서 이번엔 신라조정의 급보가 날아들었다. 경순왕이 투항의 뜻을 밝혀온것이였다.

《신라왕이 투항의 뜻을 밝혀왔다고?!》

《그러하오이다. 일어진(서라벌앞 고을성)에 나가있는 염상장수가 알려왔소이다, 신라조정의 시랑 김봉휴가 왕의 편지를 가지고 송악으로 떠났다고.》

박술희가 흥분에 떨며 알리는 말이였다.

《신라조정에서 마침내 락착을 지었단 말인고?!》

왕건은 선뜻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였다.

《염상이 조급하게 다그어댄것은 아닐가?》

왕건이 금필이쪽으로 얼핏 눈길을 주었다.

《저…》

《그렇지는 않사오이다. 염상이 어찌 그런 일을 하였겠소이까.》

최지몽이 금필을 막아나섰다.

허나 그 순간 금필의 얼굴은 금시 달아올랐다. 지몽과만 의논하고 염상에게 조금은 일이 빨리 되도록 알아서 할것을 귀띔했던것이다.

왕건은 금필의 붉어진 얼굴을 알아보았으나 모르는척 하고 화제를 돌리였다.

《하오면 후백제와 결전을 치르기 전에 먼저 신라의 투항을 받아들여야 하는것이 아니겠소?》

《그렇사오이다. 신라의 투항을 받아들인 뒤 신라군사까지 합치여 후백제를 치여 결속을 하는것이 순리이오이다.》

지몽이 아뢰였다.

《후백제도 신라의 본을 따서 투항해올런지 어찌 알겠소.》

왕건은 후백제도 투항하였으면 하는 자세였다.

《후백제는 투항하리라 믿기 어렵사오이다.》

금필이 켕겨있던 마음을 다잡고 끼여들었다.

《아버지가 넘어왔는데 아들이 달리 하겠소? 난 신라만 투항해오면 후백제도 투항하리라 믿고싶은데…》

왕건은 여전히 후백제도 투항해오기를 바라고있었다.

《두고 보아야 할 일이오만 후백제는 버틸것이오이다. 그들과는 힘으로 겨루어 결말을 봐야 할줄 아오이다.》

금필은 달무와 아람이가 보내는 정보를 통해 후백제조정의 분위기를 세세히 파악하고있는지라 자신있게 대답했다.

《싸움은 어차피 해야 한단 말이겠소?!…》

왕건은 머리를 끄덕거렸다.

《하오면 모두 그 준비에 박차를 가해야 하겠소.》

《알아들었소이다.》

금필을 위시한 신하들모두가 기운차게 머리를 숙였다.

대전을 나온 금필은 그제야 긴 숨을 몰아쉬였다. 등골과 목아래가 축축해났다. 왕건의 앞에서 진땀을 뺀것이였다.

사실 경순왕이 투항을 결심한것은 력사의 흐름을 따르는 자연스러운 행위였지만 그가 투항을 결심하고 이를 통지하는 편지를 보내기까지 된데는 금필의 뒤조종이 작용을 한것은 사실이였다.

경순왕을 두번이나 만나보고 그의 마음속을 알대로 알고있는 금필이였다.

견훤이 고려로 귀순해온것을 알면 경순왕은 더욱 결심이 굳어질것이였다.

문제는 대신들의 각이한 론의인데 그것은 왕이 결심할탓이였다. 일단 왕이 결심하고 어명으로 선언만 하면 그만인것이였다.

그 결심을 하는것이 힘이 든것이다. 실은 이 결심을 내리기가 힘들어 몇년째 세월을 보내고있는것이였다.

리해가 가는 일이였다. 천여년을 자랑해온 한 나라의 사직을 포기한다는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기에 용단을 내리기도 헐치 않을것이였다.

웬만한 담으론 어림없는 이런 일에는 옆구리를 찔러주어야 할 필요가 제기되게 된다. 용단을 내리도록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일종의 충격을 주어야 하는것이였다.

금필은 서라벌어귀에 둔치고있는 염상에게 경순왕을 보채도록 지시했었다.

금필의 지시대로 염상은 틈만 있으면 신라왕실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서라벌도성을 순찰하군 하였다. 이전에 금필이 떨구어두었던 신라왕궁호위군사를 철수시킨 다음부터 시작한 관례였다. 보름에 한번씩 하는것으로 되여있었으나 때없이 들어갔다. 백성들은 다치지 않고 경순왕을 직접 만나는것으로 압박하군 하였다. 견훤이 고려에 귀순한 사실도 염상이 직접 경순왕에게 알려주었다.

염상의 잦은 접촉에 어지간히 마음이 다잡혀지고있던 경순왕은 그로부터 견훤의 귀순소식을 듣자 드디여 결단을 내리게 되였다.

《경들도 알다싶이 신라는 이미 쇠진할대로 쇠진했소. 왕명이 지방에 통하지 않는지도 벌써 몇해째 잘되고있소. 근간에 신라왕실과 조정의 호구지책이 얼마나 힘겨운것인지는 경들도 다 아는 사실일거요. 경들이 록봉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지도 벌써 몇달째가 되니 말이요. 세상에 부끄러운 일이지만 실상은 이렇소. 하다면 후백제에 먹히기를 앉아서 기다려야 옳겠소? 과인은 쓰러지는 국운을 돌보는 마지막수단으로 백성과 국토를 고려에 합칠가 하오.》

경순왕은 마디마디 살점에 못을 박는 심정으로 말을 잇고있었다.

《하오면 투항이란 말이오이까?》

태자가 바닥을 치며 머리를 솟구었다.

《해석하기에 달린것이다. 내가 임금되기를 그만 두는 일이니 투항이라 해도 틀린 표현은 아닐것이다.》

《그래서는 아니되오이다. 다시금 민심을 모으고 군사를 일으켜 힘이 다할 때까지 해보시고나서 론의해도 될일이 아니겠소이까? 어찌 천년사직을 그리도 쉽게 내여주려는것이오이까?》

태자는 태질하듯 몸부림치며 부르짖었다.

경순왕은 한숨을 내쉬였다.

《네가 정말로 모르는구나. 우리를 따를 민심이 어디 있고 일으킬 군사는 또 어디 있단 말이냐? 온전한 장수 하나 없는게 이 나라 실상이니라. 우리 선대때에 그리도 애타게 동분서주하던 그 최치원이 왜서 지금에 와선 죽어도 조정엔 다시 나서지 않겠다고 뻗치는줄 아느냐. 가망이 없다는걸 그는 알고있기때문이니라. 우리 신라의 유명한 재사들인 최언위와 최지몽이 이미전에 고려로 넘어가 왕건의 두뇌가 되여주고있는것을 너도 알테지? 서라벌북쪽의 민심은 이미전부터 고려에 가있었느니라. 지금은 신라민심이 통채로 고려로 기울었고… 너는 그래 그것을 모른단 말이냐? 지금 이러고있다가는 자칫하면 견훤이 길러놓은 후백제의 새끼범아가리에 신라가 먹히울수 있다는걸 너는 왜 생각 못하느냐 말이다.》

경순왕은 애끓는 목소리로 타일렀다.

하지만 태자는 막무가내였다.

《모두가 죽기로 싸운다면 후백제도 고려도 물러설것이오이다.》

《끌어내가라!》

경순왕은 단호했다.

《나라의 종사를 걱정하는 태자의 마음 갸륵하다 할것이나 되지도 않을 사직타령하며 백성의 안녕은 생각도 않는 그따위 작태에는 분개하지 않을수 없노라.

지금은 누구든 신라라는 작은 울타리에만 옴해있을 때가 아니니라. 수치는 잠시잠간 견디면 그만일것이로되 겨레의 통합이라는 큰 대업을 성취하는데 스스로 기여했음이 그래 후손대대 부끄러움으로만 전해질 일일것 같으냐!

다들 눈을 크게 뜨고 멀리 앞을 보아라!》

경순왕은 울부짖었다.

《대왕전하! 왕명을 받들겠나이다. 고정하소서!》

대신관료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얼굴에 비분의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투항을 반대하는 대신들도 똑같이 통곡하였다.

어전은 울음바다가 되였으나 대다수 관료들은 왕의 결심을 따랐다.

《… 나라의 운이 점차 쇠미해지고 천운이 다하여 왕업을 보존할 실낱같은 희망도 없사온데 다행히 천자의 빛을 보게 되였으니 온 백성과 더불어 국토를 들어 투항하고자 하옵나이다. 부디 수락하여주소서.…》

경순왕은 이런 내용의 국서를 왕건에게 보내였다.

경순왕은 견훤을 받아들인 왕건의 소행에서 큰 충격을 받았었다.

경순왕 자기와는 달리 견훤은 왕건과 죽기내기로 맞선 적수중의 적수였다.

견훤의 칼에 고려의 아까운 인물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던가. 장수들도 적잖았고 군사는 또 얼마던가. 게다가 왕건은 자기의 장인 오다린과 4촌동생 왕신이까지 잃지 않았던가.

칼탕쳐 죽여도 고려국의 분을 풀수 없을 정도인데도 왕건은 견훤을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상부에, 록봉에, 식읍에 그 환대가 극도에 닿아있었다.

처음 한동안은 의아해하기까지 하였으나 인차 깨도를 하였다.

(겨레의 통합에 이바지한 측면을 중시하다보니 전날의 죄목 같은걸 무시해버린것이다. 왕건은 확실히 그릇이 큰 인물이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경순왕은 서둘렀던것이다.

왕건은 경순왕의 국서를 받은 즉시 이를 수락하는 답서를 보내였다.

왕건의 국서를 가지고 고려의 사신일행이 경순왕에게로 달리였다.

경순왕은 투항할 준비가 끝나자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고려 개경으로 떠났다.

행렬은 자그만치 삼십리까지 늘어섰다. 보물을 실은 수레들과 일행을 호위하는 신라군사들, 그뒤를 따라선 신라백성들의 행렬이 꼬리를 물고있었다. 중간중간에 고려군이 섞이여 호위를 했다.

염상은 이 거사의 주인이 자기자신인듯 말을 경순왕의 주련옆에 나란히 대고 경순왕과 어깨동이를 하고 걸었다.

행렬이 지나는 마을마다 사람들이 하얗게 나와 신라왕을 환호했다.

명색이 신라의 관할일뿐 실지는 이미전에 고려의 땅이나 다름없이 된 마을들이였다. 이미 자기들은 고려사람이 다된것으로 간주하고있는 이들이였다. 이제는 임금마저 자신들과 한모양으로 고려의 한지붕안에 들었으니 그 기쁨이 여간 크지 않을것이였다.

태자와 함께 경순왕의 막내아들 김굉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였다.

태자의 누이인 덕주공주는 개경으로 올라오는 도중에 충주에서 떨어져 월악산 절간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였다.

태자는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살다가 죽었다.

《죽어도 고려의 신하로는 될수 없소이다. 세상을 등지고 산속에 들어가 망국신라를 끝까지 조상하겠나이다.》

떠나는 아비의 등에다 대고 하직인사로 남긴 말이였다.

력사에 《마의태자》로 이름을 남긴 이 왕자의 행실을 어떻게 평가할것인가.

그의 소행이 신라의 한 왕조에는 충성으로 될지 모르나 겨레의 소망에는 불충으로밖에 될수 없을것이다. 그는 룡상에 앉아보려는 일신의 꿈에만 마음쓴 나머지 대세의 요구와 겨레의 통일소망은 외면하였던것이다. 력사의 뒤길로 가버린 협애한 사람, 돌이켜볼 가치도 없는 구슬픈 인간이였다.

그러나 경순왕은 태자가 가버린 오솔길이 아니라 력사의 순리를 따라 통일의 대로로 갔다. 일신의 부귀영화도, 누구에게나 차례지지 않는 황금의 옥좌도 그는 미련없이 버리고 나섰다. 겨레의 통합이라는 대사를 이루려면 누구나 티끌같은 사심도 없어야 한다는것을 력사에 깊이깊이 새겨놓으며…

935년 10월에 고려에 사신을 파하여 투항을 알리였고 11월에 개경으로 들어갔다. 갑오일에 신라도읍을 떠나 꼭 열흘만인 계묘일에 개경에 도착하였다.

왕건은 개경도성밖 교외의 넓은 들판에서 신라왕을 맞도록 분부했다.

개경밖 남쪽들판이 졸지에 큰 거리로 변하였다. 천막들이 틈없이 늘어서고 그뒤를 고려군의 기치창검이 숲을 이루며 둘러섰다.

금필은 지금 마냥 부풀어오르는 흥분을 겨우 눅잦힌채 마중나온 왕건을 바라보고있었다.

오늘따라 왕건의 모습은 더없이 웅건해보였다. 그옆에 서있는 태자 무도 대견스럽기 그지없었다.

최지몽은 처음 당하는 일이라 행사를 주관하는데 몹시도 분주했다. 먼발치에 신라왕의 행렬이 나타나자 그는 손을 들어 앞쪽에 나가있는 궁내부대신에게 신호했다. 조금 있더니 신라왕이 련에서 내려 허겁지겁 몇발자국을 내짚더니 두무릎을 꿇으며 땅바닥에 엎드렸다. 그리고는 무릎걸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신라의 관료들이 모두 그 본을 따랐다.

《저들을 일으켜세우라!》

왕건이 급히 손을 저으며 지몽에게 얼굴을 돌렸다.

《신라왕은 투항해오는 임금이오이다. 고금의 규례대로 무릎걸음에 아홉번 절을 올린 뒤에 투항을 청하도록 해야 하는것이오이다.》

지몽이 구구히 설명해나섰다.

《일으켜세우라고 하지 않느냐!》

왕건이 다시금 소리치자 급창사령이 되받아넘겨 경순왕을 멈추어세웠다. 허나 무릎걸음을 허물지 않은채로 왕건의 코앞까지 고집스레 다가왔다.

그의 이마에서 진땀이 흐르고있었다. 그가 이렇게 꿇어보기는 견훤이앞에 나서본 이후론 처음일것이였다.

《고려대왕페하! 신하의 례를 올릴터이니 받아주소서!》

경순왕의 말이 끝나는 순간 왕건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라는 고려와 전쟁을 한 사이도 아니요. 지금껏 서로 도우며 형제로 지내온터인데 어찌 투항하는 례를 하게 한단 말이요.》

왕건은 누구에게라 없이 질책하며 신라왕에게 일어서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신라왕은 개의치 않고 고두배를 시작했다.

한번… 또 한번…

왕건은 그만 참지 못하고 경순왕의 팔소매를 잡아 멈추었다.

《됐소. 부디 례를 갖출 필요는 없으니 그만하시오.》

왕건은 경순왕을 일으키고는 그의 팔을 끼며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량쪽의 대신들이 다같이 놀랐다.

고려측의 대신들이 이구동성으로 아뢰였다.

《페하! 신라왕의 투항의 절을 받으시옵소서. 옛 규례를 지키셔야 하오이다.》

《옳소이다. 군신의 례만은 명백히 받아두어야 하오이다.》

《다시한번 말하는데 신라는 고려와 전쟁을 한 사이가 아니니라. 신라왕은 이전에도 나와 형제였고 앞으로도 형제로 있을것이니라. 투항의 례라는건 당치도 않은 말이로다.》

왕건이 다시금 외우는 소리에도 고려대신들은 한발씩 나온 입을 들이밀념을 하지 않고있었다. 이건 너무하다는 의견이 분분했다. 반면 경순왕과 신라대신들은 감격해마지 않았다.

왕건은 서둘러 경순왕일행을 궁성안으로 모시라고 일렀다.

류화궁에 거처를 정하도록 했다. 나머지 일행은 들판에 가설한 천막거리에 림시로 들도록 했다.

《페하! 신라의 귀속으로 고려의 명성이 더욱 높아지게 되였소이다. 이는 페하의 성덕에 하늘이 감복한것이라 할것이오이다. 축수를 드리오이다.》

대신들이 왕건이앞에 몰려들어 일일이 축하의 인사를 드리였다.

왕건은 흐뭇한 미소를 짓고있었다.

신라라는 한개 나라가 자기 수중에 들어왔으니 대만족이 아닐수 없었던것이다. 통일이 급속도로 이루어지고있는것이였다.

다음날 궁성의 내전인 천덕전에서는 신라의 귀속을 받아들이는 성대한 의식이 거행되였다. 경순왕은 자세를 바로하고 왕건에게 신하의 례를 갖춘 절을 올리였다. 량쪽의 문무대신들이 꼭같이 환호하며 두손 들어 축하를 표시했다.

왕건은 경순왕 김부를 고려조정의 정승으로 임명하고 그 품위가 태자의 우에 이른다고 선포하였다. 그의 년록봉을 천석으로 정해주고 궁성안에 신란궁을 새로 지어 거처하게 하였다.

같이 온 대신들에게도 토지와 록봉을 후하게 주도록 했다.

뒤이어 신라국이 페지되였음을 선포한 뒤 서라벌을 경주라 이름하고 김부의 식읍으로 삼도록 하였다.

그날 밤 주연끝에 왕건은 다시금 김부와 마주앉았다.

대낮같이 불을 밝힌 내전마루우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한껏 차넘치고있었다.

왕건은 취흥이 도도한 얼굴에 함뿍 웃음을 짓고있었다. 그의 부드러운 눈길은 김부의 얼굴에서 떨어질줄 몰랐다. 마치 친자식을 애무하는 어버이의 눈빛같았다.

실은 이 시각 김부에 대해 왕건은 그이상의 애정을 품고있었다.

나이로 봐도 김부는 왕건에게 아들벌밖에 안되는 사람이였다. 왕건이 쉰일곱인데 비해 김부는 서른다섯밖에 안되는 젊은이였다.

그런 그가 일생의 대용단을 내린것이였다. 동족끼리 싸우지 아니하고 화합해서 살아가자고 조상대대 천년을 이어온 임금의 지위를 미련없이 내놓은것이였다. 본의든 아니든 겨레의 소망을 위해 왕위마저 포기하여 통일대업의 또 하나의 려명을 마련한 그 마음이 얼마나 크고 장한것인가.

왕건은 진심으로 그에게 존경심이 갔다.

《대왕!》

왕건은 김부의 어깨를 두손으로 그러안았다.

《페하! 신은 이제 더는 대왕이 아니오이다. 다시 불러주옵소서!》

김부는 당황하여 말꼬리를 흐리였다.

《아니요, 대왕! 그대의 용단에 내 다시한번 머리숙여 인사하는바요. 그리고 겨레의 통일대업에 마음도 같이하는 사이가 되였으니 우리 정표를 나누어 이 의리가 영원토록 이어지게 합시다.》

《그게 좋겠사오이다. 페하께옵선 어떤 정표를 나누자고 하시오니까?》

김부가 반색을 하고나섰다.

《내 생각엔 우리 고려왕실과 옛 신라왕실사이에 혼인을 맺도록 함이 좋을듯 하오.》

《황공하오이다. 하오면… 신은 백부 김억렴의 딸을 추천해올리는바로소이다. 그의 덕과 용모가 지극히 아름다와서 페하의 배필로서 손색이 없을줄 아오이다.》

《과인은 그대에게 나의 맏딸 락랑공주를 부탁하려 하오.》

《망극하오이다. 백골이 진토된다 해도 공주님의 옥체를 하늘만큼 귀히 여겨 보호하겠사오이다.》

《그대가 하늘같이 귀한것을 나에게 주었는데 내 그에 맞는 보답을 못해 송구할뿐이요. 이날까지 금쪽같이 귀히 품어온 딸을 주는것이니 과인의 진정을 잊지 말아주오.》

왕건의 간곡한 당부에 김부는 그만 눈물을 쏟고말았다. 이마를 마루에 댄채 흐르는 눈물을 감출양인지 얼굴을 들지도 못하고 흐느끼기만 하였다.

한 나라의 사직을, 그것도 원기왕성한것이라면 몰라도 스러질대로 스러진 다 삭아빠진 나라의 사직을 어깨에 걸머지고 어떻게든 지탱코저 그간에 속인들 얼마나 썩였던가. 무능한 조상들을 탓하기는 그 몇번, 마지막에는 자기를 낳아준 부모까지 원망하였었다.

김부는 부모의 사랑도 얼마 받아보지 못한 사람이였다.

그의 아버지 김효종은 진성녀왕말기에 신라조정의 시중으로 있다가 경명왕대에 조정에서 물러나와서도 신라를 버텨보겠노라 사화진 성주로 내려가있었고 이후엔 자기가 이전에 후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애써 꾸려놓았던 대야성이 다시금 위태로와지자 그곳으로 내려가서 싸우다가 후백제장수 추허조에게 패하여 자결하고말았다.

김부는 아버지가 늘 변방에 나가있었기에 언제 한번 얼굴을 익힐새도 없었다.

그는 아버지의 애무는커녕 회초리 한번 맞아보지 못하였다. 아버지의 사랑을 전혀 모르고 자란것이였다.

그런 그가 지금 왕건에게서 아버지와 같은 친근감을 느끼고있는것이였다.

룡상에 버티고있느라 언제 한번 흘려볼수 없었던 눈물을 장인이 된 왕건앞에서 그만에야 터뜨린것이였다.

왕건은 엎드려 우는 김부의 등허리를 천천히 쓸어주었다. 그의 눈가에도 눈물이 고여넘고있었다.

왕건이 흥분하고있는것을 띠여본 금필이 술희와 함께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페하!… 고정하옵소서!》

주연이 끝난 뒤에도 금필과 술희는 왕건의 곁을 뜨지 않고있었다.

이날 밤만은 왕건과 더불어 밤을 샐 잡도리였던것이다.

흐느끼던 김부가 얼굴을 쳐들었다.

왕건은 여전히 김부를 그러안은채 금필이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이보게 아우들! 만나보면 형제요 안아보면 자식일세그려! 후백제도 이렇게 칼을 놓고 우리와 손잡으면 얼마나 좋을텐가 말일세!》

《옳은 말씀이로소이다!》

금필도 술희와 함께 진심으로 응수했다.

《나는 여러번 말했어. 이제는 칼을 내려놓자고. 그런데 자네들은 뭔가! 계속 고집하면서… 금필아우! 자넨 나빠! 지몽이하고 계속 그 작당을 하고있거던.》

《페하! 고정하옵소서!》

금필은 당황해났다. 왕건이 취중에 하는 소리나 그속엔 불만이 한껏 깔려있는것이다.

(페하가 후백제와의 전쟁을 정말로 원하지 않으신단 말인가?… 그러면 아니되시겠는데…)

금필은 당황한중에도 걱정이 밀려들었다.

(페하도 이젠 늙으셨는가!… 하기는 나도 이젠 할아버지가 아닌가!)

금필은 왕건의 내인이 된 딸(동양원부인)이 아들을 낳은것을 상기하자 마음이 이상스레 저려왔다.

(전쟁!… 전쟁은 꼭 해야만 하는것일가?!…)

금필은 저도 모르게 회의심에 빠져들었다.

하기야 전쟁을 하지 않고 후백제를 굽힐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금필은 왕건이 바라는대로 후백제를 싸움이 아니라 담판으로 굽혀볼 생각을 하게 되였다.

다음날 금필은 지몽과 마주앉았다. 견훤으로 하여금 후백제의 2대왕인 신검에게 투항을 권고하는 편지를 쓰게 하려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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