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2 회)
금필은 지금 왕건의 그 수심어린 얼굴을 다시금 떠올려보는것이였다. (쉽게 손을 들 견훤이 아니오니… 페하, 조금만 더 힘을 내소서.) 금필은 칼자루를 쥔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그시각 견훤은 5천의 철기군을 거느리고 운주성으로 올라오고있었다. 견훤의 심중도 착잡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어떻게든 왕건을 꺾어야겠는데 뜻대로 되지 않는것이다. 고창전투이후 신라는 고려에 완전히 기울어지고말았다. 931년 여름에 있은 고려왕의 서라벌방문과 두달 넘는 체류로 해서 신라는 말이 나라이지 고려의 일개 지방이나 별반 다를바 없게 되였다.
왕건의 두달이란 체류가 마치도 자기 관할하의 한개 령지를 순행한듯싶은 표상을 주었기때문이였다. 문제는 신라의 민심이였다. 신라백성들이 견훤은 늑대라고 짐승에 비유하고 왕건은 아버지라고 최고의 인격을 부여하였던것이다. 고려는 숨돌릴사이없이 서해안공략에 나섰다. 후백제의 북방으로 전선을 옮긴것이였다. 후백제는 힘들게 차지하였던 신라의 땅뙈기들을 죄다 고려에
내주었고 지금은 자기 령토의 북쪽을 또 떼울판이였다. 웅진에서 완산주까지는 2백리밖에 되지 않았다. 웅진에서 운주성까지는 백리도 채 되지 않으니 왕건은 3백리도 안되는 곳까지 내려온것이였다. 고려군을 무슨 수를 쓰든 결정적으로 막아야 했다. 견훤은 이 싸움에 자기 아닌 그 누구를 대신 내보내고 앉아있을수가 없었다. 하지만 군사 간무는 간절하게 청해왔다. 이번만은 도성에 남아있으라는것이였다. 조정형편이 견훤이 움직이는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것이였다. 견훤은 짐작하고있었다. 왕위계승과 관련한 엇갈린 주장때문이리라. 신검이냐, 금강이냐. 후백제조정은 서서히 두편으로 갈라지고있었다. 하지만 견훤은 발등의 불부터 끄고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키지 않는 걸음을 한것이였다. (고려군을 멈춰세워야 한다. 변방을 수습하고 돌아와서 결말을 짓자. 왕위계승문제는 다음의 순서다. 일단 공포해버리면 따르는 길밖엔
없으렷다. 백제조정에 견훤의 왕명을 거역할자가 과연 누구일테냐.) 견훤은 이렇게 마음을 다잡고 이번 길에 나섰다. 《전하, 운주성은 이미 고려군이 타고앉은 뒤나이다.》 앞질러 파견하였던 간자의 보고였다. 《그럴테지.》 견훤은 한숨을 내쉬였다. 《하오나 전하, 고려군은 지금 해이되여있소이다. 군사는 2천도 되나마나하옵고 군막마다 술판이 랑자하오이다.》 《무엇이? 그게 사실인가?!》 견훤이 숙였던 머리를 쳐들었다. 《분명히 그러하오이다. 소인들이 운주성을 샅샅이 누볐사오이다.》 (고려군사들이 해이되였단 말이지!) 그럴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견훤은 제 자신도 이제는 칼을 들기가 싫어지고있다는데 생각이 미치였다. 그들도 마찬가지일수 있다고 생각했다. 량측이 지쳐있기는
마찬가지였던것이다. 쳐야 한다. 상대가 해이된 틈을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한다. 견훤은 무작정 운주성으로 내몰았다. 저녁에 웅진성을 떠나 온밤을 내처 달렸다. 날밝기 썩 전에 운주성앞에 당도하여 공격서렬을 지은 뒤에야
잠시 숨을 돌리게 하였다. 이윽고 날이 밝았다. 견훤이 막 공격명령을 내리려는 때였다. 《전하! 왼쪽에 고려군이 나타났소이다.》 다급한 웨침소리가 견훤의 고막을 때렸다. 《왼쪽에 고려군이?…》 《전하! 오른쪽에도 고려군이 보이오이다.》 《무엇이?…》 견훤은 놀랐다. 왼쪽과 오른쪽에서 어느새 고려군이 나타나 수풀처럼 기치창검을 솟구치며 조여오고있었다. 조금 있더니 숨죽은듯 조용하던 앞쪽의 운주성에서 드디여 북소리가 두둥둥둥 울려왔다.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였다. 견훤은 아찔했다. 고려군의 수에 또 넘어간것이였다. (이젠 다로구나!) 다급해난 견훤은 부장에게 흰기를 들라고 소리쳤다. 견훤의 진영에서 흰기가 펄럭이자 금시 움씰거리던 고려군의 전렬이 주춤거렸다. 견훤은 급히 화의요청편지를 쓰게 하여 왕건에게 보냈다. 싸우러 온것이 아니고 화해하러 온것이라는 내용이였다. 먹물이 채 마르지도 않은 견훤의 친서를 받아든 왕건은 다시금 주저했다. 《견훤이 화의를 요구해왔는데도 치자오?》 왕건이 맥풀린 목소리로 묻는 말이였다. 《그러하오이다. 무조건 쳐야 하오이다. 견훤의 화의요청은 잔꾀가 분명하오이다.》 최지몽이 고집해나섰다. 《저들에게 불리해지니 다급해서 급한목이나 넘기고보자는 궁여지책이로소이다. 견훤은 웅진을 떼운 다음쯤에나 혹여 생각을 고쳐먹을수
있을것이오이다.》 금필도 지몽과 같은 생각이였다. 금필의 말을 듣고나서 왕건은 머리를 끄덕였다. 《진작부터 화의하려는 생각이 아니였던것만은 분명하오.》 《그러니 견훤이 우리보고 례의를 지키지 않는다고 나무람할 건덕지도 없는것이니 우리는 떳떳하오이다.》 금필은 례의를 중히 여기는 왕건을 아는지라 그 점에 못박았다. 《하오면 공격하시오.》 왕건은 드디여 령을 내렸다. 다시금 북소리가 울리고 고려군의 맹렬한 공격이 개시되자 후백제군의 전렬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견훤은 죽기를 각오하고 맞서려 하였으나 장수들의 만류로 전렬로 나갈수가 없었다. 지금의 견훤은 옛날의 견훤이 아니였다. 그는 벌써
예순여덟이라는 칠순이 다된 고령의 늙은이였던것이다. 견훤은 할수없이 퇴각하였다. 후백제의 철기병 5천가운데서 3천이 죽고 나머지 2천은 뿔뿔이 달아나버리였다. 세명의 후백제군장수들이 고려군에 포로되였다. 견훤이 간무대신 종사관으로 삼았던 종훈과 그밖의 부장들인 최필, 상달이였다. 운주성전투는 후백제군의 패배로 끝났다. 934년 음력으로 9월 여드레날이였다. 후백제는 또다시 웅진북쪽의 30여개 성을 잃었으며 후백제의 많은 성주들이 자진투항하여 고려로 넘어갔다. 후백제는 완전히 궁지에 빠져 고려에 서서히 위압되여가고있었다. 천고마비의 그지없이 쾌청한 가을이였다. 산과 들은 벌겋고 누렇게 단장되여가고있었다. 송림이 우거진 곳을 내놓고는 죄다 변해버렸다. 바람에 나무잎이 하나, 둘 떨어져내려 곳곳에 엉성한 나무가지들이 드러나고있었다. 금필은 며칠째 사냥에 몸을 잠그고있었다. 왕건과 함께 사냥길에 오른것이였다. 정확히 말하면 서경부근을 에돌아 례성강대안을 거쳐 돌아오기를
작정하고 떠난 지방순행길이였다. 일행은 지금 평산부근에 머물고있었다. 숭겸이 기러기를 쏘아떨구고 상을 받은 그의 세습령지였다. 지금 이곳엔 숭겸의 후손들이 보금자리를 펴고있었다. 금필은 왕건과 함께 이곳에서 숭겸을 다시금 추억하였다. 둘다 한동안 눈물을 걷잡지 못하였으며 수행한 신하모두가 눈물을 머금었다. 왕건은 사냥보다는 숭겸을 더 생각하였기에 오늘도 이곳에 살고있는 숭겸의 일가친척들을 만나보겠다며 마을로 내려갔다. 조용히 혼자
가보겠다 하므로 호위만 붙여 보내였다. 금필은 지금 최지몽과 화토불에 구워낸 노루고기를 안주삼아 술잔을 기울이며 마주앉아있었다. 모처럼 마련된 자리였다. 둘의 대화는 자연히 시세에로 이어지고있었다. 이야기의 초점은 물론 후백제였다. 《지몽공의 생각엔 어떠하신지, 지금이야말로 후백제를 치는 때가 아니요?》 금필은 자기보다 스무살나마 아래인 지몽을 존대해 불렀다. 《대광나으리께서 어련히 내다보실텐데요.》 지몽은 얼굴에 홍조를 띠우며 응대했다. 금필이 자기를 괴여올리는것이 거북하다는 뜻이였다. 지몽은 금필이 군사에는 말할것도 없거니와 정사에도 밝고 선견지명이 남다른것을 인정하고있었다. 그러면서도 사심이 없고 대가 바른터라 남달리
친근감을 가지고 존경하고있는터이였다. 그런면에서 둘은 어슷비슷한 권세욕, 물욕, 색욕이 전혀 없는 흰 종이장같이 깨끗한 사람들이였다. 《지금도 적기려니와 조금만 지켜보면 더 좋은 기회가 올것이라는 예감이 드는데 유대광께서도 그렇게 보시는지요?》 《그렇소. 후백제왕자들의 싸움이 필경 일을 칠것 같소이다.》 금필은 아람과 달무가 보내오는 통신을 통해 후백제도성의 실상을 비교적 자세히 파악하고있었다. 달무는 아람과 함께 떠돌이부부행색으로 완산주도성에 스며든 뒤 장거리옆 어느 한 마방집의 하인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말안장을 수리하거나
말편자를 신기는따위 일을 알심있게 잘해주어 인츰 주인의 눈에 들었다. 주인의 마누라도 아람이를 며칠간 동자일을 시켜보고는 아예 부엌칸을 내맡기며
딸자식 하나 벌었다고 좋아했다. 일이 되려니 그즈음에 도성안팎의 마방집들은 모두 마부(후백제조정의 궁성 마부일을 주관하는 기관)관하에 들게 되면서부터 궁성안의 장수들이
탈 말과 장구들을 거들어주는 일들이 껴묻게 되여 후백제조정일과 군사들의 움직임에 대한 소식수집이 여간 수월해지지 않았다. 마방집 허청간
보짱밑에 매달린 매조롱은 비여있기가 일쑤였다. 매들은 아람과 달무가 적어보내는 쪽지편지를 차고 늘 하늘을 날고있었던것이다. 금필이 후백제중심부를
살피는 자기의 눈을 착실하게 달고있는 셈이였다. 이후에 견훤의 모사 능환이 신검을 내세우고 견훤을 페위시킨 소식과 같은 모사인 간무를 죽인
소식도 달무와 아람에 의해 즉시 알수 있었던것이다. 《옳소이다. 후백제가 제스스로 무너질 조짐이 많사오니 그때가 바로 가장 적당한 시기가 될것이오이다.》 《금년은 이를것이고 래년안으로 결말이 날것으로 보는데요.》 《저도 같은 생각이로소이다. 유대광나리!》 지몽의 두눈이 반짝이고있었다. 《바야흐로 고려의 대의가 이루어질 시각이 도래하고있소. 지몽공이 할 일이 더 많아지고있소그려.》 《저야 무슨… 전장에서 늘 종횡무진하시는 나리의 로고가 더 크시오이다. 이제는 유대광께서도 흰서리가 돋치셨소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요. 우리 고려조정에서도 왕위계승에 별다른 일이 없어야 할것인즉 이게 지몽공의 몫이 아니겠소.》 《우리 고려야 이미 태자책봉이 바르게 되지 않았소이까. 맏이인 무가 련화부인(순명신성왕후)소생들보다 더없이 출중한것은 내남없이
인정하는바가 아니오이까? 후백제의 견훤이처럼 맏이가 아우들보다 못하여 골머리를 앓을 일도 없는것이고… 태자책봉은 임금의 몫이라 임금이 어련히
알아서 하는것인데 견훤의 모사들은 무엇이 마땅치 않아 닭싸우듯 하는지 참 리해가 되지 않소이다. 물론 맏이가 태자로 되는것이 예로부터 내려오는
법도이기는 하나 맏이보다 둘째나 셋째가 나을 때에는 그를 태자로 정하는것도 역시 내려오는 법도가 아니오이까.》 《그래서 하는 말이요. 지몽공의 말씀대로 태자책봉은 임금의 몫이라 임금께서 정하시면 신하들은 그대로 따라야만 하는게 법도인데 그네들은 이
초보의 법도도 모르고 덤비고있거던. 신하들이 임금이 하는 일을 미덥지 못해하는데 문제가 있소이다. 우리 고려조정엔 그런 사람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될것이요. 이후에라도 혹여 그런 사람이 없으리라
장담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겠소? 나이를 먹어가니 후일이 념려되는구려. 다행히도 젊은 지몽공이 있어 마음이 놓이긴 하오만…》 《그일에 한해선 마음을 놓으시오이다. 제가 최선을 다할것이로소이다. 페하의 뜻도 그러하거니와 내 오늘 나리의 조언을 평생의 지침으로
삼을것이오이다.》 《감사하오.》 둘은 뜨겁게 손을 마주 쥐였다. 둘사이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치였다. 물기가 스민 눈빛들이였다. 사심을 모르는 두 충신이 남모르는 산속에서 마주앉아 나라의 가장 큰 중대사를 약속하고있었다. 이후로 지몽은 자기의 맹세를 유감없이 지켜나갔다. 태자 무를 지켜 박술희와 함께 여러번 위기를 넘기였다. 지몽은 이후로 고려의 4대왕조까지 사심없이 받들다가 간신들의 모함에 걸려 아까운 죽음을 당하였다.… 금필이 왕건을 안내하여 백주(배천)성에 이른것은 이해도 다 가는 섣달 초엽이였다. 왕건이 백주에 들리기로 한것은 발해왕족들이 사는 형편을
돌보기 위해서였다. 이해 934년 7월에 고려는 발해왕자일행의 귀속을 받아들이는 경사에 접하였었다. 발해의 왕세자 대광현이 문무대신들을 위시한 만여명의 발해인들을 거느리고 왕건을 찾아온것이였다. 발해수도가 함락된지 8년째 되는 해였다. 멸망이후에도 발해의 곳곳에서 발해후국들이 일어나고 거란의 정복에 반기를 들고 항전을 계속하고있었으며 지금도 그 수는 헤아릴수 없을 정도라고
하였다. 발해의 왕세자가 고려에 들어온것은 실로 중대한 력사적사변으로서 이것은 명실공히 발해가 고려에 통합됨을 선포한것으로 되는것이였다. 《망국의 왕자가 동족의 대의를 따르고저 고려에 의거해왔소이다. 허물하지 말고 받아주소이다.》 대광현은 눈물을 머금고 청을 올렸다. 《이는 고려와 발해가 하나로 되는것이니 그대의 공로는 실로 하늘도 감복할것이로소이다.》 왕건은 발해왕세자 대광현의 귀속을 진심으로 만족해서 최상의 말을 골라 무수히 치하하고나서 다음과 같은 교지를 내리였다. 《발해국 왕세자 대광현에게 <왕계> 라는 성과 이름을 준다. 이를 고려 왕실족보에 올리고 세세년년 세습할것이다. 벼슬은 <원보>
(4등급)요, 백주고을을 식읍으로 받아 조상의 제사를 받들도록 할지어다.》 왕건은 대광현을 백주고을의 장관으로 직함을 주고서도 거처는 송악궁성에 두게 하고 같이 온 친인척들과 기타 발해인들은 백주와 그 린근고을들에
자리를 잡게 하였었다. 백주가 대광현(왕계)의 령지이므로 그곳의 사는 형편도 알아보고 고무해주려고 왕건이 의도적으로 한 걸음이였다. 대광현은 개경에서 한발 먼저 내려와있다가 왕건을 맞이했다. 백주고을밖 2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례성강나루 대안까지 마중을 나왔다. 왕건은 백주고을에서 이틀을 묵으며 이들의 생활을 돌본 뒤 귀로에 올랐다. 발해왕세자를 환대하고 왕가에 받아준 소식은 고려지경을 넘어 발해땅에도 전해졌다. 이해 그믐달에 발해조정의 대신 림진을 비롯한 적지 않은 관료들이 또 넘어왔다. 관료들의 수만 해도 백수십이 넘었다. 고려는 이들을 본래관직을 기준하여 등급에 맞는 고려관직을 하사하고 안정시키였다. 이후에도 고려로 넘어오는 발해인들은 그치지 않았다. 고려가 통일을 이룩한 이후에도 고려로 넘어오는 발해인들은 더욱 늘어났다. 자료에 의하면 938년 한해에만도 무려 3천여호의 발해유민들이 고려로 이주하여왔고 980년에는 3만이 넘는 발해사람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왔다고 한다. 고려의 발해유민포섭정책은 다음대를 이어가며 계속되였다. (발해가 조락되던 920년대부터 이후로 100여년동안에 고려로 넘어온 발해인은 다
합쳐 15만은 넘을것으로 추산하고있다.) 고려로 넘어온 발해유민들은 이후에 벌어진 고려의 반거란항전에서 한몫 단단히 하였다. 여러차례 걸치는 거란의 고려침공시 침략자들을 무자비하게
소멸하고 고려땅을 지켜낸 사람들은 대개가 다 서북방과 동북방에 정착한 발해유민들의 후손들이였다. 발해왕실을 비롯한 발해유민들의 고려에로의 대대적인 이동은 삼국통일의 주역으로서의 고려의 지위를 더욱 확고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게 하였다. 고려가 고구려의 뒤를 이었던 발해를 포섭통합하는 행운을 혼자 독차지함으로써 통일에 관한 일에서 신라나 후백제는 더는 주역의 지위를
고집할수가 없게 되였던것이다. 이렇게 되리라는것을 제일먼저 예견한 사람은 후백제 옥계사의 중 운암이였다. 《도선비기》를 써서 후세에 유명해진 지리산 관음사의 대사 도선의 수제자인 운암대사는 그 당시 허월대사(명주성주 김순식의 아버지)와 함께
《천지조화》를 점치고《천운》을 내다본다는 소문이 짜한 중이였다. 명주가 태봉에 삼키운 그때부터 송악에 와있으면서 왕건의 새 나라를 예언하고 그날만 기다려온 허월 못지 않게 대세가 고려에 유리하게
흐르리라고 믿고 기다려온 사람이 바로 운암이였다. 그는 말년의 견훤에게 이런 조언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단군겨레의 얼은 태백(백두)천지에서 시작되고 이 겨레의 혈의 중핵은 단군의 출생지자 도읍지였던 평양성이기때문에 평양을 차지한 자가 천하의
주인이 되리라는것이였다. 그러면서 도선대사가 예언한 송악중핵론은 신라시기의 령토에만 한정된 리론이라고 하였다. 도선의 수제자인 운암이 발해까지를 포함한 새로운 령역안에서의 새로운 중핵론을 제창해나선것이였다. 그는 견훤에게 지리상 관계로 봐서도 발해를 포섭하지 못한 후백제는 더는 통일의 주역이 될수 없다고 내놓고 찍어 밝혔다고 한다. 이전같으면 당장에 운암의 목을 쳤을것이였으나 견훤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용히 마주앉아 마지막까지 듣고나서 조용히 자리를
일었다는것이였다. 력사의 기록에는 없는 민간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의 한 토막이였다. 대세는 바야흐로 고려에 유리하게 번져지고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