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1 회)
제 4 장
국난은 다가온다
4
서설봉은 통분속에 겪은 지난날들을 생각하며 가슴을 치는것이였다.
특히 임오년(1582) 9월 온 나라의 뜻있는 사람들을 격분케 하던 일을 잊을수 없었다.
마가을 하늘이 잔뜩 얼굴을 찌프린 날이였다.
서울 경복궁에서는 어전경연(왕앞에서 경서를 강론하는 모임)이 있어 3정승을 위시한 당상관들이 다 모였었다.
이날의 강관인 홍문관 대제학이 그 당시 아직 번역완성되지 않은 삼경중의 《서전》을 강의했는데 당시 당파와 학파관계로 듣고 받아들이는것이 각이하기때문에 발언은 최대한으로 조심했지만 듣는 귀들은 모두 강구어져있었다.
선조왕은 옥좌에 앉아 듣는듯 조는듯 눈을 지그시 감고있었다.
30을 갓 넘은 혈기왕성한 나이건만 얼굴은 그늘속에서 뜬듯 부석부석했고 입술은 조갈이 나있었다. 왕족이면서도 아무 존재없이 열여섯살까지 려염집(보통사람의 집)에서 자란 그는 명종왕의 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갑자기 면류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고 룡상우에 올라앉게 되였던것이다.
원래 바탕이 청수하며 기골이 장대한 그는 백성들의 고생살이도 목격하며 자란탓에 그들에 대한 동정심도 있었지만 순박하고 어린 왕을 둘러싸고 조정대신들은 서로 제 리속을 위한 갖은 권모술수들을 꾸며왔다.
왕은 말썽많고 까다롭고 격식많은 인정전(왕이 정사를 보는 곳)의 룡상우에 앉아있기보다는 천하미인들이 득실거리는 뒤골방을 더 좋아했다.
그러던중 수많은 절색가운데서도 김귀인의 야생적인 미와 매력에 현혹되여 왕은 마침내 요염하고 수완이 뛰여나게 능숙한 그의 억센 손아귀에 걸려들고말았다.
그래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중전(왕의 본처)은 왕의 소박을 맞아 아예 한구석에 물러앉게 되고 왕의 총애를 독점한 김귀인이 차츰 자기 세력을 궁중안팎과 조정대신들에게까지 뻗치게 되였다.
경복궁 뒤뜰 양화당(김귀인이 있는 집)에서는 하루에 세번씩이나 새옷을 갈아입고 분세수를 하는 김귀인이 가리마우에 왕족, 귀족들의 머리치장감이며 신분표식품인 금첩지를 꽂아 곱게 단장하고 왕이 조정의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면 내시들과 무수리(녀자시중군)들을 시켜 왕의 옥교(왕의 가마)를 곧장 양화당앞 옥돌이 깔린 뜨락의 화초밭 사이길로 모셔오게 하였다.
그리고는 밤마다 청심박이 큰 황랍초불들로 대낮처럼 밝은 6간대청에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춤과 노래와 무당들의 굿판을 벌렸다.
김귀인의 교태와 웃음소리에 녹아난 젊은 왕은 그런 속에서 밤과 밤을 새웠고 그 어간에 왕궁안팎의 실권은 김귀인의 손아귀에 들어가서 백성들은 김귀인을 《왕실의 열쇠》라고 불렀으며 또 《양화당의 김귀신》이라고도 부르게끔 되였다.
금잔옥잔에 따라붓는 감흥로, 천일주, 섬사주의 술기운으로 항상 흐리멍텅해진 왕의 귀전에 속살거리는 김귀인의 말마디는 그대로 《왕명》이 되고 《법》이 되였으며 고관대작들도 떼고 붙이고 죽이고 살리는 부작(귀신 쫓는 글쪽지)글귀처럼 되였다.
이러는 가운데 금강산 일만이천봉마다에 팔뚝같은 초불을 켜꽂고 천지신명에게 100일기도를 드린 《덕》으로 아들을 낳게 된 김귀인의 권세는 말그대로 왕도 왕궁도 조정도 쥐락펴락하는 존재로 되였다.
그리하여 항간에서는 《부중생남 중생녀》(아들보다 딸을 낳는것이 더 좋다는 뜻.)라는 말까지 돌게 되였다.
때때로 왕은 (내가 왕인데 이래서야…)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조정과 지밀(왕궁안방)에서 죄여드는 거미줄과도 같은 손길들에 잡힌채 어언 재위 15년이 되였다.…
이윽고 경연이 끝나자 왕은 신하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오늘 경연에 대하여 할 말들이 없는고?》
그러자 한 재상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였다.
《황송하오나 오늘 경연에 관해서가 아니라 지금 나라안팎에 긴급한 문제가 있어 삼가 이자리를 빌어 상주할가 하나이다.》
모두의 눈이 그에게로 쏠렸다.
우찬성 리이(리률곡)였다.
그는 당대의 큰 학자일뿐아니라 조정안에 극심해지는 당파싸움을 조절하려고 애를 썼으며 여러가지 가치있는 시책들도 내놓은 재상이였다.
《말해라.》
왕의 어명이였다.
리률곡은 몸가짐을 바로하고 자기 주장을 말했다.
《아조 개국이래 력대 성왕의 크신 덕으로 비록 왜적의 작은 침습들은 있었사오나 200년 태평성대를 누려온것은 만백성의 복이로소이다.
그러나 태평세월에 물젖어 오늘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더우기 나라의 군사방비가 거의 비여있는바 이것을 알고 바다건너 왜국은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있사옵니다.
장구한 세월을 두고 우리 바다가 마을들을 자주 침습해오던 놈들은 70여년전의 삼포왜란, 20여년전의 을묘왜변을 비롯한 란들을 일으켜 끊임없는 침략행위를 감행하고있사옵니다.
특히 우리 나라와 가까운 대마도(쯔시마)우두머리를 시켜 그 졸개들로 하여금 우리 나라의 관직을 요구하는데까지 이르게 하고있사옵니다.
그리고 장사군을 비롯해서 각양각색의 렴탐군을 우리 8도강산에 들이밀어 국력을 샅샅이 내탐하고있는바 이것은 반드시 앞으로의 대거침략을 위한 음모이라고 생각하옵나이다.
놈들이 이렇게 오만무례하게 된것은 백수십년에 걸치는 왜국안의 동란을 거의 평정해가는 풍신수길(도요도미 히데요시)의 침략기도의 표현인바 놈은 오래전부터 서양나라들에서 총과 싸움배들을 사들이고 그 제조기술까지 배워서 군사장비를 한층 강화하고 최근에는 조총을 순사의 기본무기로 하고있다 하옵니다. 그러하오니 제 나라안이 평정되는 날에는 그 군력을 자국내에 그대로 두어두지 않을것이오며 우선 가까운 우리 나라를 침습할것은 불을 보듯 명백한 일이라고 생각하옵나이다.
특히 왜국 군력의 중추를 이루는 사무라이(무사)들은 대토지를 가진 령주들의 가병들로서 생업이 없이 살륙만행만을 일삼는자들이며 제 주인을 위해서 목숨바치는것을 가장 큰 영예로 알고 제 주인이 죽으면 함께 제 배도 가르는 놈들로서 잔악하기 그지없으며 더우기 오랜 세월 전장에서 피맛을 보아온 야수들이라 하오니 실로 모골이 송연한 일이로소이다.》
왕의 두눈은 커지고 장내는 물을 뿌린듯 조용했다.
《그러하온데 우리의 군사장비상태로 말하오면 군적은 빈 장부뿐이고 군사가 없으며 성벽들은 무너지고 군기들에는 녹이 쓸어있사오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오이까.
특히는 군사를 정상적으로 집결훈련해오던 진관제를 페지하고 을묘왜변때 써먹은 제승방략을 기본군사전략으로 하고있는바 이것은 나라에 란이 생기면 급히 장정들을 긁어모아 서울서 내려가는 순변사, 방어사가 그를 령솔하게 하고 일부는 지방의 병마절도사가 이끄는 제도이옵니다.
을묘왜변과 같은 작은 란을 평정하는데는 그것이 그런대로 써먹을수 있는 전략이라 하겠사오나 수십만 대군이 갑자기 들이닥칠 때는 북소리, 징소리에 맞춰나가고 들어오는 법도 모르며 어제날까지 호미, 쇠스랑이나 잡던 농사군 오합지졸을 가지고 장차 어찌하오이까. 하물며 왜군은 살륙에 이골이 난 야수들이며 명령 한마디면 당장이라도 떼를 지어 덤벼들 놈들임을 생각할 때 눈앞이 캄캄해질뿐이오이다.》
률곡은 격해지는 마음을 애써 눌렀다. 조정대신들은 왕의 어전이라는것과 또 사리정연하고 당당한 그의 주장앞에 감히 서뿔리 다른 말들을 하지 못하고있는데 률곡은 간절한 심정을 담아 왕에게 아뢰였다.
《무릇 나라의 안정을 기하기 위하여서는 큰 나라를 바라보지 말며 약한 나라를 얕보지 말며 태평세월에도 앞날을 생각해야 하는 법이온데 지금 일부 사람들은 〈왜국은 우리의 교화를 받아온 놈들인데 감히…〉 하는 생각에 물젖어있는바 이것 또한 군사없고 군기고가 비여있는것 못지 않은 위험한 일로 아옵나이다. 나라의 정세 이러하오니 대왕전하께옵서 조정대신들과 백성들의 의견을 널리 수렴하시와 군국대사에 만전을 기하도록 조처해주시옵기를 삼가 이자리를 빌어 아뢰옵는바이로소이다.》
《음, 그래서 경의 의견은?》
왕은 다음말을 재촉했다.
《군사 10만을 길러 그 불의지변을 막기 위하여 경도 서울과 각도 군영 특히 남방 수영들을 강화하고 거기에 장수재목들을 보내여 그를 주관하게 하며 제승방략제도를 진관제로 복구하여 젊은이들을 교대로 훈련시켜놓으면 태평세월도 진정한것이 되리라고 소신은 생각하옵나이다.》
왕의 표정은 자못 심각해졌다.
장내는 술렁거렸다.
방금전까지 경전의 《도》요 《덕》이요 하는 근엄한 론의가 있은 뒤여서 리이의 이 제의는 실로 뜻밖이며 판을 뒤집어엎는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그 뜨거운 우국지정과 백번 옳은 그의 주장에 감히 맞서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경들은 우찬성의 이 제의를 어떻게 생각하는고? 깊은 생각을 하고 하는 말인데…》
왕은 대신들을 둘러보았다. 잠시 조용하던 좌중에서 한 신하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였다.
《리치는 그러하오나 이 태평세월에 10만양병론은 때에 맞지 않는것인줄로 아뢰오. 오히려 민심만을 소란시킬줄로 아뢰오.》
그는 명망이 있는 재상으로서 리이와 자별하게 지내는 류성룡이였다.
리이는 아연해졌다.
평소에 자기와 함께 조정의 당파싸움을 두고, 다 허물어져가는 국방문제를 두고 가슴을 치던 그였다. 그런데 류성룡이 한마디하자 대감들이 술렁거렸다.
《감히 섬오랑캐가 아무렴 우리를…》
《이 태평성대에 10만명 양병이라니…》하며 허세와 장내의 분위기에 맞춰 눈치놀음을 하는자들도 있었다.
왕은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럼 경들은 모두 반대란 말인가?…》
또다시 장내는 조용해졌다.
왕은 룡상에서 일어나 뒤짐을 지고 거닐며 깊은 생각을 한 끝에 드디여 결론을 내렸다.
《뜻은 알만 하나 태평세월에 민심을 소란시킬 우려가 더 크므로 우찬성의 10만양병주장은 허용할수 없노라.》
× ×
오동잎 떨어지는 궁전뜨락을 지나 대궐문을 나설 때 리이는 류성룡에게 말했다.
《농사군도 1년은 내다봐야 농사에 실수가 없는 법인데 다른 사람도 아닌 그대가 한 나라의 재상으로서 그래 10년앞도 정말 못내다본단 말인가?》
그 말에 대답을 못하는 류성룡의 풍채좋은 흰 얼굴은 벌개졌다.
그도 그것을 모르는바 아니였지만 지금 조정안의 당파형편으로 보아 도저히 실현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때문이였던것이다.
광화문을 나선 리률곡은 긴 한숨속에 초헌을 밀어놓고 서서 경복궁뒤 북악산을 덮고있는 먹장구름을 바라보며 장탄식을 했다.
(아, 국난은 다가오건만…)
그는 문득 친구 림제의 시 한구절을 생각했다.
동쪽바다에는 큰 고래가 날뛰고
서편국경에는 사나운 짐승 있건만
북방성새엔 굳센 진터 없어라
조정이 하는 일 너무도 옳지 않구나
죽음을 겁내임이 그 어찌 사나이랴
한풍이 다시 살아오지 않아
좋은 말도 속절없이 늙고만 있네
초야에 깊이 묻힌 영웅의 마음
날마다 천리를 달리는줄
그 누구라 짐작하랴
한풍이란 말관상을 잘 본 옛사람의 이름을 빌린것이지만 얼마나 날카롭게 국방을 생각지 않는 조정대신들을 비판한 시인가.
림제는 술에 취해서 한쪽발엔 가죽신을, 한쪽발엔 짚신을 신고 말을 탄 자기를 보고 말구종군이 의아한 얼굴을 하자 《가죽신발을 본 사람은 내가 가죽신을 신은줄 알게고 짚신을 보는 놈은 내가 짚신을 신은줄 알텐데 무슨 걱정이냐?》하고 껄껄 웃어대기도 했다.
당파싸움질에 대한 얼마나 예리한 풍자인가.
그의 이런 생활과 글을 생각하며 리이는 (그러구보면 우리는 그 초야에 묻힌 선비만도 못한 사람들이 아닌가.) 하고 다시 장탄식을 했다.
그의 관복소매속에는 10만양병의 자기 주장이 이루어지는 경우 실시할 그 대책들이 상세히 기록된 건의문이 들어있었다.
거기에는 왜놈들을 내 땅에 들여놓지 말며 특히 왜국사절과 그 수행원들이 오면 동평관(정대소)에 오래 묵여두어 렴탐질을 마음놓고 하지 못하게 하며 경각성을 높일 문제와 남해수영들에 군사적으로 명망있는 유능하고 충직한 장수들을 보내야 한다는 주장이 들어있었다. 그러한 장재로서 당시 나라의 북방방위에서 뛰여난 무훈을 세우고있는 리순신의 이름도 들어있었다.
실로 나라의 앞날을 우려하는 그의 심혈이 기울여진 계획이였다.
《그런데 아…》
그 관복소매를 쓸어보며 다시한번 가슴을 치는 리률곡의 반백머리가 소슬한 가을바람에 흩날리고있었다.
또 한가지 잊을수 없는 일은 서설봉이 서울에 있을 때의 일이였다.
어느날 서울 종로의 종각앞에 사람들이 어깨성을 쌓고 웅성거리고있었다.
이때 유신검과 함께 그앞을 지나던 서설봉은 《무슨 일인가?》 하고 유신검을 돌아봤다.
《글쎄올시다. 제 좀…》
유신검이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더니 조금후에 돌아와서 말했다.
《호군나으리, 가십시다. 차마 눈뜨고 못볼 괘서(걸그림)인데…》하고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갓쓰고 단령(보통벼슬아치의 옷)을 입은 김귀인의 오래비인 내수사별좌 김공량이가 쩍 벌리고 선 사타구니사이로 사모쓰고 당상관 관복을 입은 늙은 재상이 흰 수염을 흩날리며 기여나오는 그림이 걸렸소이다.
그 꼬락서니를 보는 사람들은 나라가 망해도 더럽게 망한다고 침들을 뱉고있소이다.》
《뭐라구?》
서설봉은 종각처마를 이윽토록 바라보며 긴 탄식을 하였다.
《아, 국난은 눈앞에 다가오고 률곡대감의 10만양병의 웅략이 좌절된 이때 나라안은 이렇게 썩는단 말인가?》
김귀인의 오래비 김공량은 왕궁과 나라의 물자를 도맡아 다루는 내수사별좌라는 벼슬자리를 새로 복구시켜 타고앉아서 나라의 재정을 제마음대로 쥐고 주무르는자다.
벼슬자리로 보면 하치 않은 자리지만 김공량은 그쯤되자 통이 커져서 제 신분에 맞지 않는 고관의 옷차림까지 거리낌없이 하고 구종, 별배(시중드는 하인)까지 앞뒤로 거느리고 거들먹거렸다.
그는 조선8도에서 제 집 대문이 미여지게 들어오는 뢰물과 왕궁물자까지도 장마당에 내보내여 두곱, 세곱의 리득까지 보았다.
심지어 나라의 군량까지도 남쪽, 북쪽으로 옮겨팔아 값을 올려서 제 배를 불리웠고 제 조상의 뼈를 명당자리에 묻기 위하여 송도를 비롯한 여러곳의 민총(백성의 무덤)까지도 파헤치게 하는 위인이였다.
이쯤되자 자기 일신의 안전과 높은 벼슬자리를 탐내는 고관대작들의 람여, 초헌(고관들의 가마)과 수레들이 그 집 문전에 꼬리를 물고 백주에도 버젓이 드나들며 왕에게 바치는 진상품보다도 더 값진 공물들이 그의 집 대문안으로 꾸역꾸역 들어갔다.
그래서 아첨과 비굴로 빚어진 조정대신들의 웃지 못할 일화도 많이 생겨나 그 소문은 백성들에게까지 퍼져나가서 격분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날의 그 괘서도 바로 이러한것을 풍자한것이였다.
생각에 잠겨 말없이 걷던 서설봉은 유신검을 돌아보며 말했다.
《신검이, 내 아무래도 률곡대감께 작별인사나 하고 떠나야겠네.》
《호군나으리, 정 서울을 떠나실 작정이십니까?》
《내 이제 이 서울에선 할 일이 없네. 보고 듣는것이 다 역겹기만 하니…》
서설봉이 그와 헤여져 천천히 걸어가는데 유신검은 그를 오래도록 지켜보고 서있었다.
그러나 그날 그 괘서가 걸린 종각앞을 지나던 검은 장삼을 입은 중 하나가 사람들의 이야기에 이윽토록 귀기울이고있은줄도, 그후 그가 부산에서 배를 타고 쯔시마로 건너간줄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후 조선에 외국사신으로 파견했던 중 겐소라는자에게서 조선국내정세에 대한 보고를 듣고난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음, 리률곡의 10만양병론까지 배척을 받았단 말이지? 그러구 보면 그 제승방략이라는 보잘것없는 군사방략앞에서 조선땅을 눈감고 막대기를 휘저으며 나가듯 해도 걸릴것이 없단 말이 아닌가. 그리고 내수사별좌의 사타구니를 빠져나오는 조정대신이라… 하하하하, 알만해, 하하하.》하고 크게 웃어댔다.
그는 희색이 만면해서 잰내비상판의 무우꼬리같은 삼각수염을 쓸며 크게 웃어댔다.
그 자료는 그날 종로종각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던 검은 장삼을 입은 《중》이 조선의 군사지도와 함께 겐소에게 제공한 렴탐자료였다.

